[Y리뷰] 감정으로 일렁이는 무대…현대 기술로 살아난 광대 ‘리골레토’의 비극

  • 정수민
  • |
  • 입력 2026-05-01 16:47  |  발행일 2026-05-01
대구오페라하우스-NCPA 제작 아시아 초연작
초대형 LED 연출…감정에 따라 변해 인상적
공간 너비 조절하는 연출로 상황 효과적 묘사
바리톤 레온킴 한국 첫 오페라서 탁월한 연기
25일 무대 사고…오페라하우스 발빠른 대처
대구오페라하우스와 중국국가대극원에서 공동 제작한 대형 오페라 리골레토 아시아 초연이 객석 점유율 96%를 기록하며 지난 4월 24~25일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사진은 리골레토 공연 모습.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대구오페라하우스와 중국국가대극원에서 공동 제작한 대형 오페라 '리골레토' 아시아 초연이 객석 점유율 96%를 기록하며 지난 4월 24~25일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사진은 '리골레토' 공연 모습.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의 광대가 무대로 걸어나온다. 그가 몇 마디 음절을 읊으면 결말을 예고하듯 비극적인 선율이 흘러나오고, 베일을 벗은 넓다란 궁정이 드러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공간감,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드넓은 무대와 마주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와 중국국가대극원(NCPA)이 공동 제작한 대형 오페라 '리골레토'의 아시아 초연이 지난 4월 24~25일 양일간 열린 단 2회의 공연에서 객석 점유율 96%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이달부터 진행되는 리모델링 공사 전 선보인 한중 협력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연출가 다비데 리베르무어가 합류한 초대형 프로덕션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딸을 가진 아버지인 한 광대의 비극을 다룬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딸을 가진 아버지인 한 광대의 비극을 다룬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작품은 딸을 가진 한 어릿광대의 비극을 다룬다. 평소 귀족들에게 미움을 사는 만토바 궁정의 광대 '리골레토'에게는 끔찍이 아끼는 딸 '질다'가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주인인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이 질다를 탐내게 되고, 순진한 질다는 공작을 그만 사랑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리골레토는 복수를 결심하지만, 되려 딸을 잃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특히 거장 베르디의 천재적인 음악과 자극적인 이야기가 만나 입문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오페라다.


무대의 묘미는 인물들의 감정 변화다. 이번 프로덕션에서 내세운 초대형 LED 연출은 감정과 맞물릴 때 진가를 발휘했다. 리골레토가 절망을 느낄 때 검은 파도가 물결 치고, 질다가 첫사랑의 설렘을 느끼는 장면에서는 꽃들이 배경을 빽빽하게 채우는 식이다. 이들의 감정과 동화되듯 연기처럼 퍼지는 미디어 아트에 객석마저 물드는 기분이 들었다.


LED 캔버스를 통해 공간의 너비를 조절하는 현대적인 연출은 각 인물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사진은 1막 2 리골레토의 집 장면.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LED 캔버스를 통해 공간의 너비를 조절하는 현대적인 연출은 각 인물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사진은 1막 2 리골레토의 집 장면.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이런 화려한 요소만 부각됐다면 아쉬웠을 것이다. LED 캔버스를 통해 공간의 너비를 조절하는 현대적인 연출은 16세기 이탈리아의 모습을 투영하면서, 각 인물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질다가 지내는 리골레토의 집은 정사각형으로 축소됐다. 대신 같은 크기의 커다란 거울이 뒷면에 배치돼, 서로를 속이는 부녀의 모습을 함께 보면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3막에서 부녀가 만토바 공작의 행태를 목격하는 장면에서도 가림판을 이용해 두 장면을 연출하면서 비극성을 극대화했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3막 장면. 리골레토 역의 바리톤 레온킴과 질다 역의 소프라노 이혜정이 연기를 펼치고 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3막 장면. 리골레토 역의 바리톤 레온킴과 질다 역의 소프라노 이혜정이 연기를 펼치고 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전석 매진된 25일 공연은 세계적인 바리톤 레온 킴(김한결)의 한국 첫 오페라 무대로 주목받았다. 그는 풍부한 성량과 훌륭한 연기로 비틀린 부성애를 지닌 아버지 리골레토 역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 특히 8분 가까이 이어지는 아리아 '가신들, 이 천벌 받을 놈들아!(Cortigiani, vil razza dannata!)'에서는 귀족들에게 분노하다 결국 애원하는 모습을 통해 아버지로서 설득력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질다 역의 소프라노 이혜정이 그리운 그 이름을 열창하고 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질다 역의 소프라노 이혜정이 '그리운 그 이름'을 열창하고 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질다 역을 맡은 소프라노 이혜정의 활약도 돋보였다. 리골레토 역에 밀리지 않는 성량과 고운 음색으로 선보인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Caro nome)'에서는 박수갈채가 한참 이어지기도 했다. 사랑에 빠진 맑고 순수한 여성을 연기함과 동시에 화려한 기교의 콜로라투라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만토바 공작 역을 맡은 테너 권재희의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은 다소 불안정한 부분이 있었으나, 같은 곡을 되풀이하는 장면에서는 경쾌한 느낌을 살려 리골레토의 비극을 극대화하는 데 일조했다. 베이스 류지상(스파라푸칠레 역)과 바리톤 정제학(몬테로네 백작 역)의 짧지만 강렬한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이밖에도 지휘자 김광현이 이끄는 디오 오케스트라는 각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밀도 높은 연주를 선보였고, 대구오페라콰이어·카이로스 댄스 컴퍼니와의 합도 잘 어우러졌다.


지난 25일 공연된 오페라 리골레토 무대가 끝난 뒤 관계자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정수민기자 jsmean@yeongnam.com

지난 25일 공연된 오페라 '리골레토' 무대가 끝난 뒤 관계자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정수민기자 jsmean@yeongnam.com

이날 공연 중 무대 사고가 있었다. 2막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앞부분에 있던 LED판이 내려오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것. 이런 돌발 상황에서도 두 성악가는 2막 마지막 이중창 '그래, 복수다!(Si! Vendetta!)'에서 고조된 감정을 침착하게 이어나갔으며,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흐트러짐 없이 진행됐다. 이에 보답하듯 관객들도 큰 박수를 보냈고, 약 1분50초 정도로 소요될 예정이었던 무대 전환 시간은 약 20여 분간의 인터미션으로 대체됐다. 오페라하우스는 그동안 제작 극장으로서 쌓아온 노하우로 빠르게 무대를 재정비해 공연을 정상적으로 재개했고, 사고를 잊을 만큼 환상적인 무대를 선사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측에 따르면, 사고의 원인은 LED판을 고정하기 위해 임차한 키네시스 체인 모터의 오작동이었다. 무대 하부 쪽 장치 하나가 작동하지 않아 판이 제대로 내려오지 못했고, 안전을 위해 강제로 중지시킨 것이다. 판이 공중에 걸린 채 남은 장면이 이어졌지만, 오페라하우스의 발 빠른 대처로 3막까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아울러 약 60회의 리허설 기간 중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내년 8월까지 예정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과정에서 최신 기술을 안정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무대 시설을 강화하는 공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시아 초연 오페라 '리골레토'는 오는 9월16일부터 20일까지 5회차에 걸쳐 중국국가대극원에서 다시 공연될 예정이다.



기자 이미지

정수민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생활/문화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