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을 구입하니 딸려 나온 오래된 편지. 누군가의 추억을 엿볼 수 있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타인의 추억이 책에 실려 왔다. 무심코 책장을 정리하다 빛바랜 우편 봉투를 발견했다. 언젠가 헌책방에서 산 초판 시집에서 딸려 나왔다. 민음사에서 1985년 펴낸 책인데 우편도 그즈음 송부된 듯했다. 보내는 사람은 경기 양주 모 학교의 교사였고, 받는 사람은 '대구직할시 남구 대구교대 일요문학회의 어느 분'이었다. 모교의 이름 모를 후배에게 책과 함께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일요문학회의 활동은 어떠한지요?"라는 다정한 안부 인사로 시작됐다. 뜻밖에 찾아온 낭만이 반가워 미소가 절로 났다.
새 책에선 좀체 만날 수 없는 선물이다. 낡은 종이 사이에 한 시대의 공기와 누군가의 시간이 켜켜이 스며 있다. 밑줄, 접힌 귀퉁이, 이름 모를 독자의 메모까지. 40년도 지난 책을 굳이 찾아 돈을 더 주고 구매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시간을 소장하고 싶었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첫 숨결이 담긴 결과물을 손에 쥐고 싶었다.
대구 중구 헌책방 '북셀러' 내부. 시집 등 문학 서적 초판본을 모아 판매한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세상에, 짧은 영상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는 세상에, 이제 헌책을 구하기란 옛날만큼 쉽지 않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건 진화의 증거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한 이래 너무 많은 쇠퇴를 보았다.
헌책의 시대는 올까.
어떤 쪽도 장담하기 어렵지만, 하나 분명한 건 있다. 헌책이 지닌 매력과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터. 이 치밀하고 감정 없는 AI가 세상을 지배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누군가의 손때 묻은 책을 찾게 될지 모른다.
대구 중구 방천시장 입구에 위치한 헌책방 '북셀러' 외관.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세월 견디며 살아남은 책들…희귀본은 가격 10배 넘게 뛰어
헌책은 이슈 중심의 베스트셀러나 시류에 따라 기획된 책들과는 다른 맛이 있다. 길게는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책이라 어느 정도 검증된 서적이 많다. 여러 사람을 거쳐와 타인의 추억을 엿볼 수 있는 점도 매력. 그중에서도 희귀본과 절판본, 초판본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희소성을 띠다 보니 수집 대상이 되는 건 물론, 10배 이상의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한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함을 넘어서 자료로도 기능한다. 문학관에서 이를 소장·전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초판본은 오리지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있어 수집 대상 1호. 같은 작품이라도 개정판과 표지와 편집이 다른 경우가 많아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일수록 수집광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대구 중구 방천시장 입구에 위치한 '북셀러'는 문헌학을 공부하는 작가 '호재'(필명)씨가 운영하는 헌책방인데, 문학 서적 초판본을 판매한다. 한국문학 거장들의 책을 한데 모아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선 입소문을 탄 지 오래다.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야행성동물' 내부. 올해 문을 연 신생 독립서점이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수요와 무관하게 절판된 책도 가치가 높다. 1978년 설립된 출판사 고려원은 연평균 270여종의 책을 펴내던 1세대 대형 출판사였다. 하지만 IMF 직전 부도가 나면서 폐업했고, 2만여종의 문학·인문·실용서적이 절판됐다. 영업을 재개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절판본들은 웃돈을 얹어 거래됐다. 1988년 출간된 장정일 작가의 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작가 요청으로 초판 1쇄를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돈이 있어도 못 사는 희귀본이 됐다.
독립서점 '야행성동물'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절판·희귀본을 전문으로 취급한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야행성동물'은 올해 문을 연 신생 독립서점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희귀·절판본을 전문으로 취급한다. '댄스 댄스 댄스'(1989)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1996) '하루키 일상의 여백'(1999) '작지만 확실한 행복'(2001) 등 시중에선 구하기 어려운 하루키 책을 300권 이상 판매한다. 이창수 야행성동물 대표는 "AI 시대에 책도 '이게 정말 사람이 쓴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 것"이라며 "이런 시대일수록 검증된 옛날 책이 주목받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하루키라는 유명 작가의 희귀한 판본을 소유함으로써 독자들이 지적 취향을 과시할 수 있는 점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헌책방 골목으로 현재 20여곳의 책방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 중구 제공>
◆몰랐던 보물 발견하는 재미에 헌책방 골목도 관광화
'발견'의 재미도 내포돼 있다. 몰랐던 보물을 알게 되는 것도 헌책만이 갖는 묘미. 헌책 마니아들이 온라인보다 헌책방을 찾는 이유도 비슷하다. 온라인이 정확한 검색을 제공한다면, 헌책방은 예상치 못한 발견을 제공한다. 직장인 박모(28)씨는 "인터넷에서는 찾는 책만 보이지만, 헌책방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책을 만나게 된다"며 "책장을 넘기며 책에 있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점도 매력"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발견을 위해 먼 걸음을 하는 경우도 있다 보니, 헌책방이 밀집된 골목은 지역 자산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도쿄 진보초는 130여개 고서점이 늘어선 거리인데,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라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도 자주 찾는다. 문학과 미술, 영화와 연극은 물론 과학, 어린이 서적까지 서점들은 저마다 다른 전문서를 취급한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도 성공 사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헌책을 판매하며 형성된 헌책방 거리다. 상인들의 노력에 지자체의 활성화 사업이 더해져 외지에서도 찾아오는 관광지가 됐다. 부산 중구에서 지역 미래 유산으로 지정해 보존·관리하고 있다. 번영기 땐 70~80여개 서점이 밀집했지만 현재는 20여곳 정도 남았다. 크게 줄긴 했어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대구 남산동 헌책방 골목. 현재 운영 중인 헌책방은 해바라기 서점, 코스모스북 두 곳뿐이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AI 시대일수록 주목받을 것"…대구에선 '글쎄'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헌책의 시대는 올까. 이창수 야행성동물 대표는 절판본과 관련해 "뜬다고 확실히 단정하긴 어렵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봤다. 이 대표는 "AI 시대에 반발하는 어떤 사회적 흐름이 크게 일어날 것 같다"며 "알고리즘 배열에 따라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는데, 이런 시대일수록 주체적인 취향 소비가 각광받게 될 듯하다"고 말했다. 절판본을 찾는 것도 주체적인 소비의 일환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만 대구에서는 헌책의 가치에 주목하거나 헌책방을 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처럼 대구도 한국전쟁 이후 남산동에 헌책방 골목이 형성됐다. 좌판까지 합치면 한때 50곳이 넘는 서점이 있었지만, 점차 쇠퇴하고 현재 2곳만 남아 존폐기로에 섰다. 사라질 위기에 놓였지만 이와 관련한 지자체 사업은 없는 상황이다.
대구 남산동 헌책방 골목에 위치한 헌책방 '코스모스북' 내부.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신간 서적을 파는 동네책방도 어려운 판에 몇 헌책방을 살려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구의 헌책방 골목은 단순 판매 공간을 넘어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축적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공공적 가치가 크다. 익명을 요구한 대구의 한 서점 관계자는 "70년 역사를 가진 남산동 헌책방 골목이 사라진다는 건 대구의 문화적 자산이 사라진다는 것과 같다"며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처럼 골목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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