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남는 도시의 조건 ③] 체코 브르노가 ‘지방 소멸’을 이겨낸 비결...남모라비아 지역 혁신 센터

  •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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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9-27 09:37  |  수정 2026-09-27 10:46  |  발행일 2026-09-27
단기 성과주의 넘은 ‘20년의 축적’
현금성 지원보다 ‘창업 생태계’
JIC 울리르 수석 “자생력 확보가 우선”
JIC 스타트업 허브 건물 전경. 이나영기자

JIC 스타트업 허브 건물 전경. 이나영기자

대구시가 인공지능(AI), 로봇, 미래모빌리티, 바이오·헬스케어, 반도체 등 5대 신산업을 내세워 수도권으로 향하는 청년들의 발길을 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청년 엑소더스의 속도는 줄지 않고 있다. 정작 청년들이 지역에서 커리어를 쌓고 기업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소프트웨어)'를 구축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면서다.


영남일보는 체코 브르노의 혁신을 이끈 '남모라비아 지역 혁신 센터(Jihomoravské inovační centrum·이하 JIC)'를 찾아 데이비드 울리르 수석 전략 설계자(Chief Strategy Architect)에게 25년간 이어온 '지방 소멸 극복의 마스터플랜'을 들어봤다.


◆흔들리지 않는 25년 뚝심


남모라비아 지역 혁신 센터(JIC) 울리르 수석. 본인 제공

남모라비아 지역 혁신 센터(JIC) 울리르 수석. 본인 제공

브르노의 성공을 이끈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단기 성과에 집착하지 않는 '시간의 축적'에 있었다. 2003년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 남모라비아주, 브르노시, 그리고 마사리크대, 브르노공대 등 4개 지역 대학은 공동 출자해 JIC를 설립했다. JIC는 단순히 창업 공간을 대여해 주는 기관이 아닌 지역 전체의 혁신 전략(RIS3)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독립적인 컨트롤타워다. 수도 프라하로, 다른 유럽 국가로 청년들을 떠나보내는 도시가 아닌 청년들이 정주를 선택하는 도시가 되도록 하는 데에는 JIC의 역할이 컸다.


울리르 수석은 "브르노 혁신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지자체와 대학이 자체 예산을 투입해 '선거 주기(4년)'와 무관하게 25년 가까이 일관된 정책을 추진해 온 것"이라고 했다.


대구를 비롯한 한국의 지자체들이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전임자의 핵심 산업 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간판을 내걸며 반복하는 것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그는 "혁신은 중앙정부에서 지시한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지역 스스로 예산을 통제하고, 흔들림 없이 코스를 유지해야만 생태계가 자라난다"고 강조했다.


지자체, 대학, 기업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을 하나로 묶어낸 비결은 무엇일까. 대구 역시 수많은 산학관 협력 위원회를 두고 있지만, 대체로 실질적인 시너지로 이어지지 못하고 칸막이 행정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JIC의 접근법은 달랐다. 대단한 시스템이나 서류가 아닌 '집요한 소통'을 끊임없이 해나갔다. 울리르 수석은 "우리는 말 그대로 매주 대학 및 공공부문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분기별로 대학 총장들과 회의를 열고, 그 사이사이엔 대학 기술이전센터(TLO) 실무진과 정기적으로 만난다. 또 매월 지자체의 혁신·연구 전담 담당자들과 실무 조정 회의를 열어 현안을 논의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물리적이고 반복적인 접촉이 쌓인 위에 비로소 연구 상용화 협력, 자체 보조금(Grant) 지원, 학생 대상 실전 창업 교육 같은 진짜 구체적인 프로그램들이 얹어진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역의 이해관계자들을 함께 해외로 데려가 다른 선진 생태계를 체험하게 하는 방식이 주효했다. 공동의 경험이 공동의 목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가장 핵심은 '신뢰'다. 잦은 만남을 통해 발굴한 작은 문제를 해결해 내는 긍정적 경험이 쌓이지 않으면, 거대한 혁신 생태계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JIC 수석 "단기 성과주의 경계해야"


지난 11일 체코 브르노 중앙역 앞은 청년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나영기자

지난 11일 체코 브르노 중앙역 앞은 청년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나영기자

"청년들이 프라하나 해외로 떠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를 억지로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지역에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일자리라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JIC에는 '청년 유출 방지용 특별 프로그램'이나 현금성 정착 지원금 같은 제도는 없다.


울리르 수석은 청년들이 스스로 남고 싶게 만드는 동력으로 '스타트업 생태계'를 꼽았다. 대기업만큼의 높은 연봉이나 5~10년의 안정적인 커리어 플랜을 보장하진 못하지만,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품이 되는 대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내 일을 할 자유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무기로 청년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성공한 창업자들이 멘토나 엔젤 투자자로 돌아와 후배들을 이끄는 선순환이 문화 자체를 바꿨다"고 덧붙였다.


JIC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JIC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1천300여 개의 기업들은 5천 개 이상의 고급 일자리를 창출했다. 최근 5년간 JIC 클라이언트 기업들의 매각(Exit) 가치만 6억4천만 유로(약 9천400억 원)에 달한다.


특히 글로벌 대기업 유치(FDI)에 사활을 걸기보다 JIC는 '토종 스타트업 육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글로벌 분석기기 기업 써모피셔(Thermo Fisher)나 IT 기업 레드햇(Red Hat) 등이 브르노에 대규모 R&D 센터를 세우며 고급 인력을 길러내고 국제적인 비즈니스 감각을 전수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 7일 체코 브르노 트램에도 청년들이 가득했다. 이나영기자

지난 7일 체코 브르노 트램에도 청년들이 가득했다. 이나영기자

하지만 울리르 수석은 "진정한 지역 경제의 자생력은 지적 재산권(IP)과 자본, 그리고 핵심 의사결정권이 지역에 그대로 남는 토종 스타트업에서 나온다"고 역설했다. 글로벌 여행 플랫폼으로 성장한 '키위닷컴(Kiwi.com)'이 거대한 성공 후에도 대도시로 떠나지 않고 브르노에 본사를 둔 채 핵심 결정을 내리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단순 하청 위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진짜 경제 구조 재편은 이처럼 지역 소유의 기업을 통해 완성된다는 설명이다.


로봇과 AI 중심의 5대 신산업으로 재편을 꿈꾸는 대구시를 향해 울리르 수석은 "로봇이나 AI는 범용 기술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해답이 되지 않는다"면서 "이 기술이 노인을 위한 보조 기술로 쓰일지, 우주 산업에 쓰일지 등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할 구체적인 도전 과제(Use Case)부터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단기 성과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리르 수석은 "낡은 산업 기반 위에 단순히 신산업 기업 몇 개를 외부에서 유치한다고 혁신이 일어나진 않는다. 첫걸음은 청년들에게 투자해 그들 스스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도록 밑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이라며 "지역사회가 특정 단체장의 소망이 아닌 '공동의 비전'으로 합의하고, 수십년간 뚝심 있게 자금을 지원할 각오를 해야 한다. 브르노도 20년 이상이 걸렸다"고 했다.


◆청년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 브르노


체코 브르노시는 청년들을 위한 행사를 직접 주최하고 시설을 대여해주는 등 청년 커뮤니티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JIC 제공

체코 브르노시는 청년들을 위한 행사를 직접 주최하고 시설을 대여해주는 등 청년 커뮤니티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JIC 제공

JIC와 CEITEC이 20여년간 뚝심 있게 구축해온 거시적인 생태계 전략은 청년들의 실제 체감 여건과 일상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마사리크대 의과대학(치의학)에 재학 중인 유스티나(여·21)씨는 "브르노시는 청년들을 위한 행사를 직접 주최하고 시설을 대여해주는 등 청년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덕분에 의학, 공학, 예술 등 다양한 전공을 가진 유학생과 현지 청년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네트워킹을 하고 연대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청년 유출을 막는 해답 역시 실질적인 삶의 질과 비전에 있었다.


유스티나씨는 "유럽 최고 수준의 의료 시뮬레이션 센터 등 혁신 생태계를 접하면서 이곳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며 "교통 할인이나 거주 지원 등 시 차원의 쾌적한 인프라 혜택 덕분에, 향후 가정을 꾸린 후에도 대도시로 떠나지 않고 브르노에 정착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온드레이(26·마사리크대 경제학과)씨는 "브르노는 최근 첨단 기술과 연구 중심 도시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현재 조성된 산업 생태계는 제 5년, 10년 뒤의 장기적인 커리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충분하고 명확한 기회를 청년들에게 주고 있다"면서 "도시가 청년들을 성공적으로 유치하려면 지속적인 발전과 인프라 투자가 필수적이다. 브르노는 투자를 아끼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청년들에게 매력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는 도시다"라고 말했다.


체코 브르노의 야나체크 극장 앞 분수대 모습. JIC 제공

체코 브르노의 야나체크 극장 앞 분수대 모습. JIC 제공

체코 브르노에서 김지혜기자 hellowis@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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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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