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원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문학평론가
'보상적 소비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앞서 전달할 개념이 있다. 노동과 관련한 '소외'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든 생산물에서 분리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노동의 과정에서 어떤 보람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이 생산 공정의 하찮은 부속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일이 노동자 자신에게 자긍심 내지 힘을 제공하는 대신에 어떤 위축감 내지 무기력을 경험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소외를 감지한 자본은 노동자들의 헛헛한 마음까지도 관리하는 전략을 발휘하는데 그것이 바로 보상적 소비주의이다. 자본은 노동자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그가 만끽할 소비재들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일터로 자연스럽게 복귀하게 유도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신의 책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선순환)에서 이를 파우스트식 대사처럼 구현한다.
"우리가 자네에게 잘 맞는 노동과정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가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노동에 대한 보상은 해줄 수 있다네. 집으로 돌아가면 싸구려 소비재가 잔뜩 뒹굴고 있을 거야. 자네는 그렇게 갈망했던 행복을 그것들을 통해서 얻게 될 거야. 직장에서 일하면서 보낸 비참한 시간을 그 소비재들이 보상해줄 거야"
하지만 보상적 소비주의가 노동자들의 마음을 달래는 데 꼭 적중했던 것은 아니다. 소비재를 통해 마음의 무기력을 전환하는 일은 일시적일 뿐이다. 하비는 보상적 소비주의의 전략이 실패하면서 노동자들의 내면에는 더욱 깊은 상실감이 찾아오고 이를 통해 그들은 건드리면 폭발할 만한 분노와 공격성을 갖게 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분노와 공격성이 발현된 한 양상이 근간에 우리 사회에 떠도는 각종 '혐오 정동'이기도 하다. 결국 소외는 노동의 성격 자체가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이다. 노동자가 일을 하면서 자기 안에 잠재한 가능성과 창조성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세상의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공동체의 활기와 안정감을 생성하는 데 일조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경험을 되살려야 한다. 노동의 성격이 그렇게 변화할 때 인간은 돈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물론 자신 너머의 존재들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노동을 하는 중인가.
한 박스 가득 구천 구백 원/ 냉장고의 환한 어둠 속에서/ 잠자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다/ 싹이 났다/ 여러모로 피곤했다 감자는/ 거대하게 자랐다/ 싹 튼 감자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너무 크게 자라서 냉장고 서랍을/ 뚫은 듯 힘찼다/ 힘차게 죽어 갔다/ 메롱메롱 감자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떨이로 구매한 듯한 냉장고 속 감자의 모습이 어떤 사람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자신의 노동에 맞는 제값을 돌려받지 못한 사람, 항상 피곤 속에서 잠자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사람, 감자의 싹처럼 독성을 품은 무언가가 몸에 발생해 곧 있으면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야 하는 사람, 주먹감자를 받은 것처럼 자주 모욕을 당하는 사람. 이근화의 시 '갑자기 죽는 표정'에는 불우한 노동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아마도 이 시인 역시 노동자를 저와 같은 감자의 형상에 빗대게 되는 세계가 아니라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강자가 되는 세계를 꿈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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