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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 마실 가듯 떠나요 '대구 앞산 고산골', 어디선가 '카앙~' 공룡 울음…놀란 잣나무는 쭈뼛쭈뼛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너무나도 청량한 빛깔의 메타세쿼이아에 눈길이 박힌다. 늘씬한 줄기와 뾰족뾰족한 우듬지의 열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수리가 시원해진다. 갑자기 무언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천천히 뒷목을 쭈뼛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공중에 있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얼굴과 마주친다. 하하 놀랐다.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어디선가 공룡 우는 소리 카앙- 카앙- 들린다. ◆공룡이 활보하던 골짜기주차장 옆 계곡에서 공룡 발자국을 본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 때 이곳을 활보하던 공룡이 남긴 것이다. 조각류의 것이 4개, 용각류의 것이 7개, 모두 초식공룡의 것으로 추정된다. 옆에는 물결무늬의 연흔과 퇴적층의 층리도 보인다. 그때, 경상도 일대는 분지형 저지대였다.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들어 점차 드넓은 호수가 만들어졌고 주변으로는 많은 못과 늪지대가 생겨났다. 직경이 150㎞나 되는 호수는 경상도 전역은 물론 대한해협과 일본 본토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그 한가운데에 대구가 있었다. 날씨는 따뜻했고 초식 공룡의 먹이가 되는 나무고사리, 소철, 연한 순의 송백류 등이 풍부했다. 공룡과 다양한 동물들은 물과 먹이를 찾아 습지와 늪과 수풀로 우거진 호수를 활보했다. 육중한 걸음은 발자국을 남겼고,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건조한 기후를 맞았으며, 또 다른 퇴적물이 그 위를 덮었다. 그리고 약 7천만 년 전 화산폭발이 일어나 앞산이 생겼고, 2006년 고산골에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2016년에는 공룡공원이 만들어졌다. 공룡공원 옆으로 메타세쿼이아길이 뻗어 있다. 넓은 흙길 양편으로 곧게 솟은 나무줄기 사이로 공룡과 사람들이 보이고 이따금 공룡 우는 소리가 골짜기에 퍼진다. 공룡공원은 아이들이게 인기다. 공룡 이름을 줄줄이 외우는 아이들은 공룡 뼈가 숨겨져 있는 모래놀이터를 최고로 좋아한단다. 길가에 또 다른 화석지 안내판이 나타난다. 계곡 아래로 거북이 등껍질 같은 건열이 보인다. 건열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지표면이 마르면서 수축해 다각형의 무늬로 갈라진 것이다. 다각형 무늬가 흰 빛인 걸 보니 갈라진 틈 사이로 모래가 채워진 듯하다. 휙 스치는 오늘의 바람이 1억년 전의 바람 같다. 어린이 체험 학습장이 환하다.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 아이들 주변을 토끼가 어슬렁거린다. 살아있는 진짜 토끼다. 체험장 가장자리의 벤치에는 자전거를 타고 온 노인이 그림처럼 앉아 있다. 메타세쿼이아길은 공룡공원에서 고산골 수덕사까지 900m 정도다. 수덕사 앞에 고산골 관리사무소와 앞산 등산코스 안내도가 있다. 여기서 길은 토굴암 방향과 법장사 방향으로 나뉜다. 오늘의 목표는 법장사 지나 잣나무 숲이다. ◆법장사 지나시멘트 등산로다. 이 길에는 밤에도 불이 켜져 있어 야간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성불사를 지난다. 등산로 옆으로 숲 트레킹 길이 시작된다. 굴암사를 지난다. 담벼락에 늘어선 무궁화가 이제 막 새잎을 내밀었다. 법장사에 닿는다. 일주문 편액에 '대덕산 법장사'라고 적혀 있다. 담장 위로 석탑이 높다. 신라 말엽에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근심이 큰 왕이 있었다고 한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서쪽으로 수백 리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정성을 들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왕은 절을 짓고 고산사라 했는데, 이듬해 왕비가 백일기도를 올리고 왕자를 낳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고산사에 3층 석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고산사는 자식 없는 부녀자들의 기도처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1961년 고산사 터에 세워진 절이 법장사다. 석탑은 흩어져 있던 탑의 잔해를 모아 세웠다고 한다. 고산골은 고산사가 있던 골짜기다. 법장사를 지나면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한다. 한 걸음이 천근이라 멈추고, 허리가 뻐근해 멈추고, 무릎이 시큰해 또 멈춘다. 멈추면 들꽃들이 보인다. 하늘하늘 연보랏빛 소래풀 꽃이 많다. 따뜻한 모퉁이에는 노란 뽀리뱅이, 긴긴 목을 빼 들고 작은 얼굴에 빛을 담는다. 야외무대를 지난다. 무대는 풀에 뒤덮여 있고 중앙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주인공처럼 서 있다. 객석은 푸른 이끼로 가득하다. 고대인이 물고기를 새겨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바위를 지나 가침박달나무의 흰 꽃을 보고 나면 시멘트길과 트레킹길이 만난다. 그리고 곧 침목 계단이 있는 흙길이다. 저 위로 삼각의 지붕과 반짝거리는 거울 벽과 나무에 걸린 빨간 시계가 보인다. '물이 있는 쉼터'다. 맑은 물이 수조에 떨어지고 빨간 바가지가 동동 떠 있지만 음용에 부적합하다는 안내문이 있다. 빨간 시계는 시간이 맞지 않다. 삼각 지붕은 사각의 파고라에 비닐 벽을 두른 쉼터였다. 내부에 거울, 빗, 시계, 달력, 수건 따위가 걸려 있다. 주변에는 커다란 거울과 생각보다 많은 운동기구가 있다. 한 아저씨가 거울 앞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두 아주머니는 벤치에 앉아 다리쉼을 한다. 나를 앞질러 갔던 여자는 이곳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되돌아 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나를 추월해 간 남자는 내가 이곳에 닿기도 전에 다시 나를 스쳐 내려갔었다. 많은 사람이 이곳까지의 등산을 루틴으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잣나무 숲에서 돌 많은 산길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아 자꾸만 멈추게 되지만 아무도 없는 산길은 언제나 무섭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 비목나무 앞에 긴급구조신고처 파-2 안내판이 있다. 두근두근 급한 걸음으로 10여 분쯤 흘렀을까, 잣나무 숲이 시작된다. 서늘하고 멋있다. 아니, 서늘해서 멋있나. 1983년에 대형 산불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24만㎡ 면적에 4만6천 그루의 잣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고 2002년에 2만 그루, 2015년에 1만1천 그루를 솎아 베었다고 한다. 바람이 심상치 않다. 숲의 심장부로 나아가지 못하고 긴급구조신고처 파-3 근처만 왔다 갔다 하다 돌아선다. 하산 길은 트레킹길이다. 도도도도도 거의 뛰듯이 내려간다. 제법 날다람쥐 같은걸. 그래도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계류 앞에서 멈추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다시 시멘트 길을 만나고 유아숲체험장에 들어서고야 큰 숨을 내쉰다. 아이들이 놀다 간 오솔길에 분홍 진달래꽃과 노란 산괴불주머니와 연보랏빛 소래풀 꽃과 초록의 참나무 잎이 모여 있다. 검은 토끼가 벤치 아래 돌처럼 앉아 있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따라 맨발산책로로 들어선다. 고산골 집들이 보이고 텃밭 너머 티라노사우루스와 메타세쿼이아길이 보인다. 바람이 변덕스러웠던 봄, 한바탕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듯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앞산순환도로 동쪽 끝 상동교 서단에 공룡공원 이정표가 있다. 공룡공원 바로 앞에 고산골 공영주차장과 주차 빌딩이 있으며 최초 30분에 200원, 이후 10분마다 100원, 1일 주차는 2천원이다. 공룡공원까지 걸어서 10여 분 거리인 남구 국민체육센터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무료다. 공룡공원은 상시 개방이며 입장료는 없다. 저녁 8시 이후는 주차료도 무료다.맨발산책로의 끝자락에 다다를 즈음 텃밭 너머 티라노사우루스가 보인다.고산골 계곡에 있는 공룡 발자국.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 때 이곳을 활보하던 공룡이 남긴 것이다. 옆에는 물결무늬의 연흔과 퇴적층의 층리도 보인다.1961년 고산사 터에 세워진 법장사. 석탑은 흩어져 있던 탑의 잔해를 모아 세웠다고 한다. 고산골은 고산사가 있던 골짜기다.고산골 잣나무 숲. 1983년에 대형 산불이 난 이후 24만㎡ 면적에 4만6천 그루의 잣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왼쪽). 트레킹 길에서 만난 폭포와 같은 계류. 트레킹 길은 자연에 폭 둘러싸여 있지만 시멘트길과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다. 곳곳에 서로를 잇는 샛길도 있다.고산골 잣나무 숲. 1983년에 대형 산불이 난 이후 24만㎡ 면적에 4만6천 그루의 잣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왼쪽). 트레킹 길에서 만난 폭포와 같은 계류. 트레킹 길은 자연에 폭 둘러싸여 있지만 시멘트길과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다. 곳곳에 서로를 잇는 샛길도 있다.
2024.04.26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철원 한탄강 잔도길…수직의 바위절벽 아슬아슬 물 위를 걷다
그게 우연이었을까. 드르니 게이트를 지나 드르니 쉼터에 섰을 때, 먼저 강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에 목젖이 꿈틀했다. 그런데 그 시각 어느 여행객 휴대폰에서 소녀 가수가 부르는 아버지의 강이 들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아, 아버지 불러 봐도 대답 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는 너무 애절해 나의 감정에 시나브로 물결이 일었다. 그렇다. 내가 나의 아버지를 불러 보아도 이미 강물처럼 흘러가신 분이 대답할 리가 없고, 오늘만은 왠지 내 자녀가 나를 아버지 하고 부를지라도 나는 대답 없이 흘러가는 저 강처럼 흘러, 아버지의 강이 되고 싶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비애의 감정에 애면글면 빠져드는지. 드르니 쉼터의 드르니는 '들르다'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후삼국시대, 태봉국을 세운 궁예왕이 왕건의 반란으로 쫓길 당시 이곳에 들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탄강과 자연이 빚은 수직의 경이로운 바위 절벽, 그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는 청록빛 강물은 마구 탄성을 지르게 한다.절벽 중간 위태롭게 매달린 잔도길인기 명소 급부상한 철원의 야심작철원군이 야심작으로 만든 한탄강 잔도길은 어느 날부터 인기 명소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잔도길은 국민의 시선을 끌어모으면서 관광 특수효과를 단단히 누리고 있다. 말하자면 국내 최고 수준의 명품 코스, 핫플레이스가 된 셈이다. 깎아지른 듯 아름다운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만든 잔도길은 첫걸음부터 아찔하다. 한발 한발 걸을수록 오금이 저리고 스릴이 넘치며 짜릿하게 소름이 돋는다. 낭떠러지 아래는 청록색의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강은 또 수직 절벽 협곡과 앙상블을 이루며 굽이굽이 흘러간다. 한 번씩 내려 볼 때마다 다리가 풀리고 후들거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과 협곡 주상절리가 보이고 몸은 허공을 헤엄치는 것 같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서기도 한다. 그러나 잔도는 기대 이상이어서 나의 눈길은 나의 내면 어딘가의 기쁨을 쳐다보기도 했다. 맷돌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는 맷돌랑 쉼터를 쉬지 않고 지난다. 오고 가는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이젠 잔도길이 겁나지 않고 오히려 희열과 두근거림을 준다. 이어지는 절벽과 밝은색 화강암 위에 검회색 주상절리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고 마그마가 화강암 틈새를 밀고 들어온 자국인 풀줄기 모양의 '암맥'도 관찰된다.민출랑 쉼터에서 잠시 쉰다. 민출랑은 전라도 사투리로 깎아지른 절벽을 뜻하는데, 한탄강 민출랑은 너럭바위 끝부분 경사진 여울 일대를 말한다. 근데 왜 전라도 사투리가 여기에 어김없이 접을 붙였을까. 도무지 아리송하다. 절벽을 따라 깔린 현무암을 거침없이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귓등에서 말발굽 소리를 낸다. 너른 바위 쉼터를 지나고, 출렁다리인 주상절리교를 건너자 거기에 드르니 스카이 전망대가 나타난다. 반원의 돌출부가 강 쪽을 점유해 시야가 확 트이며, 유장한 한탄강이 두 눈 속으로 흘러간다. 몸은 허공에 떠 있다. 우리의 생명도 그 기원이 허공이며 하늘이었다. 우주는 텅 빈 무에서 출발, 유가 되었다가 종국엔 무로 돌아간다. 허공은 우주의 알파요 오메가다. 돌단풍교와 쉼터는 그냥 지나친다. 철없이 피는 돌단풍의 유혹에 넘어가 앉게 되면 눈자위가 울긋불긋 물들 것만 같다. 비록 천천히 걷지만 금세 돌아나가고 하는 협곡의 에움길 잔도에 야릇한 통쾌감이 발바닥을 자극한다.반원 돌출형태 드르니스카이전망대바닥 투명유리 한탄강전망대 '아찔'현무암교를 거쳐 동주 황벽 쉼터에 앉는다. 저쪽 편의 밝은 황톳빛 주상절리를 감상할 수 있다. 원래는 아래쪽은 검은색, 위쪽은 황토색과 암갈색이지만 주상절리 벽은 햇빛에 의해 황톳빛으로 물든다. 동주는 철원의 옛 명칭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걷는다. 이제 주상절리 길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인 한탄강 스카이 전망대에 선다. 반원형으로 돌출된 잔도길을 덧대 붙이고, 바닥은 모두 투명한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강심장을 가진 사람도 전신이 얼어붙는다. 씨암탉 걸음으로 아기작 아기작 걷는다. 천연으로 만들어진 하얀 모래밭에 깎아내린 것 같은 절벽. 급류의 물살이 만든 기묘한 화강암 바위들의 풍경은 볼수록 신비하다. 여행객들이 환호를 터뜨린다. 돌아보면 약 40m쯤 절벽 중간에 위태롭게 매달린 하늘색 잔도가 협곡 절벽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풍경은 감탄 또 감탄이다. 특히 발밑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그물 구조물을 지날 때는 그 아래 흐르는 청록색 강물로 간담이 서늘하다. 이렇게 짜릿한 탐험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트레킹에서 누리는 경험이다. 우리는 그 찬란한 물질문명 때문에 온갖 사람들이 영적으로 다 잠을 자며 꿈속, 이를테면 상상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 속에서 걷고 나의 실존을 확인한다. 아 한탄강, 한탄강은 금강산 아래쪽 추가령 지구대에서 발원하여 평강, 철원, 연천 전곡리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총길이 136㎞의 제법 긴 강이다. 본래 이름은 '한 여울', 즉 큰 여울이라는 뜻으로 이것을 한자어로 바꾸면서 한탄강(漢灘江)으로 부르게 됐다. 그러나 이 한탄강은 궁예왕이 철원 땅을 후고구려의 도읍으로 삼으면서 제빛을 발산하는가 싶더니, 후삼국의 다툼 속에서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하던 그가 부하 왕건에게 쫓기어 이 강을 건너면서 눈물 어린 한탄(恨嘆)을 하였다고 한탄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남북 분단의 상처와 아픔이 한탄강이라는 어감으로 상징화되고, 철원과 더불어 비운의 역사를 어부바하여 흐른다.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2번 홀교와 쪽빛소 쉼터도 지난다. 이렇게 아름다운 잔도와 더불어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 바위그늘교와 샘소쉼터도 지나간다. 나는 걸을 때만 나의 꿈에서 살아갈 수 있다. 나의 꿈은 항상 나의 발과 함께 움직이고 뻗어간다. 내 다리가 움직이면 나의 시간도 꿈으로 바뀌어 흐른다. 마치 저 한탄강처럼. 트레킹은 가장 자유로운 나로 돌아가 모태의(母胎)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다.주상절리 협곡·청록빛 강물 감탄사한발한발 걸을수록 허공에 있는 듯수평절리교도 지난다. 철원 한탄강에는 화강암이 가로로 깨진 수평절리가 많다. 땅속에 화강암이 숨겨져 있다가, 화강암을 덮은 다른 암석이 제거되면, 화강암이 재바르게 드러난다. 이때 화강암의 약한 곳이 깨지면서 생기는 것이 수평 절리다. 화강암교를 건넌다. 예로부터 한탄강 여울의 소리가 가마솥 끊는 물소리 같다 하여 구리소라고 불리는 구리소 쉼터에서 잠시 멈춰 선다. 트레킹은 자신만의 처용무다. 인간의 역사는 걸으면서 출발했다. 말하자면 '호모 워크스(Homo walkers)'다. 기술의 발달은 걷기의 퇴행을 가져왔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은 걸으면서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정말 어딘가에서 즐기기보다 걷기 위해서 여행을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에 잠기다가 좀 더 걸어 나가 순담 스카이 전망대에 도착한다. 이제 날머리 순담 게이트는 지척이다. 여기의 경치는 별다르고 황홀한 절경이다. 휘어지는 절벽과 기묘한 형상의 기암괴석들 사이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물살이 더 빨라지는 곳이 '강의 허파'로 불리는 여울이며 산소를 많이 생산, 물을 정화시킨다고 한다. 나는 종일 걷고 또 꿈속 같은 잔도길을 발이 아프도록 다녔다. 오늘 한탄강 주상절리길을, 너와 나 우리는 함께 걸었다.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는 삼라만상이 하나이자 불멸이란 것을. 그리고 걸을 때 정신과 영혼이 생동하는 자유로운 자기가 된다는 것을. 글=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 사진작가☞주소 : 강원도 철원군 갈마읍 군탄리 산 174-3 드르니 주차장☞트레킹 코스 : 드르니 게이트 - 드르니 스카이 전망대 - 철원 한탄강 스카이 전망대 - 순담 스카이 전망대 - 순담 게이트한탄강 직벽의 주상절리길.쉼터에서 본 한탄강의 비경.한탄강 직벽의 수려한 비경.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2024.04.19
[주말&여행] 경북 칠곡군 낙동강 역사 너울길…낙동강 물길따라 4.5㎞…6·25 호국정신이 숨쉰다
왜관읍 서쪽으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른다. 강물은 단단해 보였다. 수면을 뒤덮은 잔물결들은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엎드려 새겨 넣은 각인처럼 느껴졌다. 종일 미세먼지 매우 나쁨, 초미세먼지 나쁨을 기록한 날이지만 강변은 숨쉬기에 썩 괜찮았고 새순이 잔뜩 돋아난 수목의 터널에서는 새소리가 청아했다. 이곳에서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있었다.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은 과거와 점점 멀어지는 것인데, 거리감과 상기 사이에는 알지 못할 어떤 미덕이 있어 덕분에 오늘 걸음은 평안하다.칠곡군 약목면 관호리 오토캠핑장~제2 왜관교 구간 조성6·25전쟁때 끊겼던 '호국의 다리'·자매도시 공원 등 지나강변 절벽 버드나무터널·메타세쿼이아 흙길도 아름다워◆낙동강 역사 너울길 약목면 관호리 관호산성 아래 오토캠핑장에서부터 기산면 죽전리 제2 왜관교까지 4.5㎞ 구간을 '낙동강 역사 너울길'이라 한다. 칠곡군이 2012년부터 2017년까지 구 왜관철교 상·하류 일대 조성한 길이다. 캠핑장을 지나 칠곡보에서 잠시 멈춘다. 공도교 양쪽에 사각의 액자와 하트 액자 포토존이 있다. 액자 속으로 강 건너 풍경이 들어찬다. 태극기가 높이 휘날리는 건물은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이다. 수년 전 기념관의 입체영상관에서 본 328고지 마지막 전투 영상은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아 있다. 그 옆에 가로로 긴 건물은 칠곡보 통합관리센터, 센터 위로 보이는 기와지붕들은 향사아트센터다. 칠곡 출신 국가무형문화재로 국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향사 박귀희 명창의 호를 따서 만든 지역 최초 국악 공연장이다. 뒤돌아보면 관호2리 마을 뒤로 해발 110m의 백포산(栢浦山)이 아담하게 솟아 있다. 저곳에 삼국시대의 성곽인 관호산성이 있다. 본래 이름은 백포산성이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며 관호산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의 정자는 '관평루'다.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평화를 바라본다'는 의미다. 칠곡보에서 산을 올라 내성 석축을 따라 걷는 '관호산성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관호2리는 구왜관(舊倭館)마을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일본인 사신이나 교역자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다. 1905년 일본인들이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관호리의 왜관에 역을 설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백포산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진다는 이유로 강 건너 파미면 회동에 역을 설치하고 왜관역이라 했다. 현재의 왜관리 왜관역이다. 그때부터 관호리 왜관은 구 왜관이 되었다. 백포, 왜관, 관호, 관평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중첩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호는 '호수를 바라본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산 아래 낙동강은 정말 호수처럼 넓다. ◆칠곡보에서 왜관철교까지칠곡보에서 왜관철교까지는 강변서로 제방길이 뻗어있다. 벚나무 길이다. 낙동강 역사 너울길은 제방 아래 강변 들판의 산책로로 이어진다. 덩굴장미와 머루포도와 능소화가 차례로 연결된 긴 터널을 지나면 '자매도시 공원'이 펼쳐진다. 꽃 모양의 입체적 구릉이 산철쭉으로 뒤덮여 있고 황금사철과 회양목이 꽃잎 하나하나의 경계선을 부드럽게 그린다. 초봄에는 칠곡의 꽃인 매화가 피었다 졌고, 머지않아 작약이 만발하겠고, 가을에는 구절초가 피어나겠다. 칠곡군의 자매도시는 중국 제원시와 전북 완주군이다. 각각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상징적인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완주의 봉동이 우리나라 최초의 생강 재배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왜관철교 아래를 지난다. 주변은 공사를 하는 모양으로 약간 어수선하다. 점심 식사를 막 마친 인부들이 저마다의 휴식에 빠져 있다. 기차가 긴 여진을 남기며 지나간다. 강변에는 유채꽃이 조금, 제비꽃은 카펫으로, 거대한 두 그루의 버드나무는 신선처럼 고고한 모습으로 서 있다. 왜관교 아래를 지난다. 사철나무와 대나무가 울타리를 이룬 깨끗한 길이 이어진다. 사철나무 너머 오렌지 빛깔의 건물은 경북도와 칠곡군의 청년연합회 건물이다. 그 옆은 강 쪽으로 테라스가 있는 카페다. 그리고 바로 구 왜관철교가 나타난다. ◆호국의 다리에서 제2 왜관교까지 구 왜관철교는 일제가 1905년 군용 단선 철도로 개통한 경부선 철교다. 1941년에 복선인 왜관철교가 가설되면서 이 다리는 경부선 국도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6·25전쟁 때, 유엔군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 다리의 경간 1개를 폭파했다. 이를 계기로 유엔군은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했고 북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구 왜관철교는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의 상징물로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1979년 안전상의 문제로 전면 통제되기도 했지만 1993년 이후 인도교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 호국의 다리는 공사 중이다. 2025년 8월까지 호국의 다리 일원에 호국평화테마파크를 조성할 예정이다. 철교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 탑은 왜관지구전승비다. 탑 일대는 '애국동산'으로 칠곡 출신 애국지사들의 위령비와 추모비, 기념비, 제단 등이 모여 있다. 애국동산은 자고산 자락에 위치하는데 산 정상에는 평화 전망대와 한미전몰장병 추모비가 있다. 오늘 전망대는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강변 절벽에 버드나무가 터널을 이룬 아름다운 길을 지난다. 오직 바람소리, 새소리만이 청아하다. 대나무 숲을 지난다. 캐주얼한 수트 차림의 중년 남자를 스친다. 바짓단을 둥둥 걷어 올린 그는 맨발이다. 신발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죽전리에 들어선 듯하다. 물소리 들린다. 좁은 계류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제 절벽은 조금씩 누워 구릉지와 들판으로 펼쳐진다. 국립환경과학원 수질측정센터를 지나 하우스 밭과 대단한 소나무를 가진 과수원을 지나 멀리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서 있는 들판의 흙길로 나아간다. 길가에는 하얀 모래별꽃, 보랏빛의 갈퀴나물, 연보랏빛 주름잎꽃, 청보라 빛의 큰봄까치꽃이 한창이다. 가장 많은 것은 샛노란 고들빼기와 애기똥풀이다. 제방 위로 몇 채의 집들이 보인다. 비스듬한 사면을 한 여인이 강아지와 함께 내려와 강변의 벤치에 앉는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샛길을 여러 번 보았다. 관호에서 두어 번, 죽전에서 두세 번 정도였던 듯하다. 수트의 남자도 그렇게 강변으로 내려섰겠지. 강마을 사람들은 언제든 아주 빨리 강변에 닿을 수 있구나. 멀리서 한 여인이 걸어온다. 멀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녀는 맨발이다. 오른손에 쥔 신발이 달랑거린다. 그녀를 지나쳐 메타세쿼이아 길의 끝에서 뒤돌아선다. 돌아가는 길, 오늘의 인상과 추념 사이에는 어떤 알지 못할 미덕이 있어 덕분에 걸음이 평안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경부고속도로 대전방향 왜관IC로 나간다. 톨게이트 지나 오른쪽 왜관방향으로 나가 직진, 매원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한다. 제2 왜관교 건너 우회전해 직진, 관호오거리에서 12방향으로 직진해 관호교차로에서 오른쪽 강변서로로 나가 직진한다. 관호2리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빠져나간 뒤 우회전하면 칠곡보 오토캠핑장(관호산성 둘레길 입구)이다. 캠핑장 맞은편에 주차장이 있고, 강변서로를 따라가면 칠곡보 우안 부근과 왜관철교 아래쪽에도 주차 공간이 있다. 관호오거리에서 1시 방향으로 나가면 곧바로 왜관철교 아래 주차장에 닿는다. 제2 왜관교 아래 강나루 체육공원에서 출발해도 좋다.구 왜관철교는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의 상징물로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다리 건너 자고산 자락에 애국동산이 자리한다.칠곡보 공도교 양쪽에 액자 포토존이 있다. 강 건너에 칠곡 호국평화기념관, 칠곡보 통합관리센터, 향사아트센터 등이 자리한다.강변 절벽에 버드나무가 터널을 이룬 아름다운 길을 지난다. 오직 바람소리, 새소리만이 청아하다.자매도시 공원 내의 중국 제원시 공원.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조형물이 있다.
[주말&여행] 경남 거창 봄의 계곡…속삭이는 물소리 춤추는 수양버들 '봄의 왈츠'
감탄스러운 물소리다. 명랑하고 가볍고 피로를 모르는 물소리다. 찬연한 꽃들이다. 종달새처럼 땅에서 솟아올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꽃들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웃음이 분처럼 흩날린다. 참 웃음 헤픈 나날이다. 건계정 계곡 2㎞ 구간 벚나무 산책로거창장씨 문중서 1905년에 정자 세워병곡계곡은 옛날 보부상들 넘나들어월성계곡 사선대, 의친왕 이야기 간직 ◆건계정 계곡거창읍의 서쪽에 동산처럼 봉긋한 산이 거창의 진산이라는 건흥산이다. 꼭대기에는 과거 삼국이 치열하게 싸울 때 쌓았다는 거열산성이 있어 일대는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덕유산의 여러 물줄기가 하나 된 위천이 마리면을 거쳐 거창읍 건흥산의 남쪽 아래를 흐르는데 그 천변에 건계정(建溪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를 중심으로 약 2㎞ 구간을 건계정 계곡이라 한다. 물길과 나란히 벚나무 산책로가 길고 지금 이 길은 벚꽃 천지다. 산자락에는 몇 그루 개살구나무가 분홍 꽃을 피웠고, 천변에는 노란 개나리가 한 움큼, 길섶에는 짙은 자주색의 꽃잔디가 군데군데 도드라진다. 일대는 최근에 정비되었는지 아직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계곡의 저 끝에는 거창읍의 아파트가 자글자글 모여 있다. 그들은 모두 발꿈치를 힘껏 치켜들고 부럽게, 그립게, 이곳을 바라보는 듯하다.건계정은 벚나무 산책로의 상류에 위치한다. 목재 데크 산책로를 따라 물레방아를 지나 산길을 오르내리며 갈 수도 있고, 도로를 따라 올라가 건계정교를 건너 물가의 식당을 거쳐서 갈 수도 있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수양벚나무와 복사꽃을 헤쳐 열며 산책로를 따라간다. 물레방아의 홈통 아래를 통과한다. 나무바퀴를 돌리며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이 계곡물과 투덕대는 소리가 한동안 요란하다. 산길은 가파른 편이지만 그리 길지 않다. 식당 입구에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거짓말 같은 모습으로 낙화하고 있다. 건계정은 거창장씨(居昌章氏) 문중에서 1905년에 세웠다. 고려 충렬왕 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시조 충헌공(忠獻公) 장종행(章宗行)과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하고 개성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아림군(娥林君, 거창의 옛 이름)에 봉해진 아들 장두민(章斗民)을 추모하는 정자다. 건계정이라는 이름은 독립 운동가 곽종석(郭鍾錫)이 지었다고 한다. 장씨는 중국 남당(南唐) 때 건주자사(建州刺史)를 지낸 장자조(章仔釣)를 시조로 하는데, 건계정의 건(建)자는 선조의 고향인 건주 땅을 잊지 말라는 의미라 한다. 건계정교를 건너 정자의 맞은편 천변으로 간다. 잔뜩 물오른 연둣빛 수양버드나무 아래에서 건계정을 바라본다. 정자는 맑은 물 위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바위의 등 위에 올라서 있다. 바위 면에 수많은 각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정자로부터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산중턱의 건물은 장씨 재실이다. 벼랑에 진달래가 반짝거린다. 수양 버드나무 아래 노란 산괴불주머니는 자울자울 졸고 있다. 다리 옆 벚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진다. 화르르 꽃비가 내린다. 꽃비 속에 하늘이 되롱거린다. ◆병곡계곡위천을 거슬러 간다. 수승대의 대단한 벚꽃을 지나 북상면 소재지의 소소한 벚꽃무리들도 지나 덕유산 자락으로 좀 더, 좀 더 가까이 달려간다. 그러다 홀린 듯 병곡길로 들어선다. 수양벚나무의 길이다. 수양벚나무의 분홍 꽃들로 몽롱한 길이다. 홀리어 투신하듯 달린다. 너무 흐드러진 것들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달려도 걷는 듯하고 걸어도 나는 듯하고 또 내 무릎이나 팔꿈치 따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길의 초입부터 내내 많은 사람들이 걷는 듯, 나는 듯, 꽃 속을 배회하고 있다.덕유산 동엽령에서 흘러내린 분계천과 남덕유산 삿갓골에서 흘러온 월성천이 농산리 농산교에서 만나 위천이 되는데 병곡길은 분계천과 함께 흐른다. 길 따라 천을 거슬러 병곡리 가곡마을, 장암마을, 시항마을이 이어지고 마지막에 병곡마을이 자리한다. 해발 500m에 자리한 병곡마을은 덕유산 아래 첫 마을이라 한다. 서쪽의 산수리 계곡과 나란히 짝을 이루고 있다 하여 병곡(幷谷)이라 하는데 훨씬 오래된 이름은 '빙기실'이다. 그래서 분계천 골짜기를 병곡계곡 또는 빙기실 계곡이라고 부른다. 1천m가 훌쩍 넘는 동엽령은 예부터 전북 진안으로 통하는 영호남 사이의 큰 장삿길이었다. 동엽령을 넘나드는 보부상들은 빙기실 계곡을 오르내리며 빙기실 마을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월성계곡빙기실 마을 끝에서 병곡길은 산수병곡길이 되어 남향한다. 길은 산수리 중심마을을 지나면서 산수천과 함께 흘러 덕유월성길의 산수교 아래에서 월성천과 하나 된다. 월성천을 따라 형성된 5.5㎞의 계곡이 월성계곡이다. 월성(月星)이라는 이름은 계곡 상류에 위치한 월성마을에서 왔는데 마을 남쪽 월봉산(月峰山)의 옛 이름인 월성산(月星山)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농산교에서 출발하면 창선리 지나 산수교를 건너 월성리로 향하게 된다. 월성계곡은 거대한 산세에 둘러싸여 있다. 사방으로 1천m가 넘는 봉우리의 연속이다. 수량은 풍부하고 화강암 바위와 벼랑을 끼고 도는 물길은 더없이 아름답다. 월성계곡 역시 분홍의 수양벚나무로 가득하다. 갓 오른 연둣빛 새순들 사이 하얀 벚꽃과 조팝꽃과 돌배나무 꽃도 늘비하다. 월성천 물길은 서출동류(西出東流)한다. 서쪽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풍수에서는 명당의 한 요소로 여긴다. 월성계곡에 '서출동류 물길 트레킹 길'이 있다. 산수교에서 월성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 월성리 황점마을까지 5.9㎞의 길이다. 그 길에 훌쩍 솟구친 벚나무 오솔길도 있고, 고목의 솔숲도 있고, 월성마을 월성 숲도 있고, 제법 넉넉한 산골 분지의 밭도 있고, 네 명의 신선이 놀다 갔다는 사선대(四仙臺)도 있다. 황점마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선대에서 오래 머문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널브러진 평상들도 싫지 않다. 1909년, 의친왕 이강이 거창 위천면 출신의 전 승지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면서 청년들과 만나 사선대 일대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었다고 한다. 정태균은 1907년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여 다양한 직책을 맡고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사선대에 진달래가 피었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꽃이 핀 것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모든 꽃 지는 시간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Tip대구광주고속도로 거창IC로 나와 우회전해 직진, 회전교차로에서 1시 방향으로 나가 직진, 중앙교사거리 회전교차로에서 9시 방향으로 나가 위천 따라 계속 직진한다. 절부사거리 회전교차로에서 12방향으로 나가자마자 오른쪽 거안로로 빠져나가 직진하면 산성교 앞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는 무료다. 건계정 산책로 끝 송정교 아래에도 주차공간이 있다. 절부사거리에서 거열교를 건너 거열산성 이정표를 따라가거나 거함대로에서 송정교 건너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거안로를 타고 계속 직진하다 마리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직진, 장풍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수승대를 스쳐 직진한다. 북상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해 37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농산교 지나 우회전해 들어가면 병곡계곡, 37번 지방도로 계속 직진하면 월성계곡이다.건계정은 위천의 맑은 물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바위의 등 위에 올라서 있다. 산중턱의 건물은 장씨 재실이다.덕유산에서 발원한 분계천 골짜기를 병곡 또는 빙기실 계곡이라 부른다. 길 따라 이어지는 수양벚꽃의 행렬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건계정을 중심으로 약 2㎞ 구간을 건계정 계곡이라 한다. 물길과 나란히 벚나무 산책로가 길고 지금 이 길은 벚꽃 천지다.해발 500m에 자리한 병곡마을은 덕유산 아래 첫 마을이라 한다. 서쪽의 산수리 계곡과 나란히 짝을 이루고 있다 하여 병곡이라 하는데 훨씬 오래된 이름은 '빙기실'이다월성계곡의 서출동류 물길 트레킹 길은 산수교에서 황점마을까지 5.9㎞의 길이다. 훌쩍 높은 벚나무 아래 트레킹 길이 보인다.네 명의 신선이 놀다갔다는 사선대. 의친왕은 사선대 일대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었다고 한다.
2024.04.12
[주말&여행] 전북 무주 내도리 앞섬마을…육지 속 섬마을서 만날 '봄꽃'은 약속을 잊은 듯…
복사꽃을 보겠다고 앞섬으로 왔다. 마음만 급한 탓에 꽃은 한 송이도 피지 않았다. 구미와 김천을 지나는 동안 벚꽃은 8할 정도의 개화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추풍령을 넘으면서 기대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스산한 영동 땅을 가로지르며 무주로 들어서자 마음은 잔잔해졌다. 무주읍의 벚꽃은 6할 정도 피었다. 잠두마을의 잠두길 산벚은 조금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부남면 굴암리의 벚꽃길은 4할 정도 환했다. 벚꽃이 져야 복사꽃이 핀다. ◆무주읍 내도리 앞섬마을무주읍으로 향하는 압치재를 저 앞에 두고 내도로로 들어선다. 내도리(內島里)로의 진입이다. 내도리는 육지 속의 섬이라는 뜻이다. 진정 섬을 만나려면 얼마나 가야 하나. 한동안은 참으로 좁장한 산길이다. 연두로 물든 수목들과 부지런히 일구어 놓은 밭뙈기들의 너수룩한 모습에 신산한 마음이 빵긋해진다. 작은 방죽이 있다는 방죽안(지내)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산속 깊이 자리한다는 산의마을 표석을 지난다. 내도초등학교와 학교 앞 삼거리의 내동슈퍼 사이를 통과하며 문 닫은 지 오래되어 속절없이 낡아가고 있는 둘의 얼굴을 본다. 고요하고 아기자기한 내동마을을 지나 제법 긴 길을 서서히 내려가면 뒷섬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드디어 금강이 나타난다. 후도교를 건너면 앞섬마을이다. 뒷섬은 후도(後島), 앞섬은 전도(前島) 마을이라고도 한다.앞섬마을 뒤편의 소나무 동산을 스친다. 수려한 소나무들과 함께 깨끗한 무덤 몇 기가 양지에 누워있다. 앞섬 체험센터를 지나고 복숭아집하장을 지나면 금강을 가로지르는 앞섬다리에 닿는다. 강 저편에 무주의 진산인 향로산(香爐山)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다리 건너 향로봉 서남자락의 수리재를 넘으면 바로 무주 읍내다. 앞섬다리 끝자락에 마을 표지석이 있다. 그 위로 마을 전체를 담은 커다란 사진이 빛바랜 채 걸려 있다. 사진은 금강이 마을을 크게 감싸고 돌아나가는 전형적인 물돌이 지형을 보여준다. 육지속의 섬이 맞다. 금강이 휘돌며 만들어 놓은 강변 땅이 모두 복숭아밭이다. 주민의 9할이 복숭아를 키운다고 한다. 마을 안에는 '홍도화 가로수 길'도 조성되어 있다. 마을 특산품인 복숭아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붉은 겹꽃이 화려한 홍도나무를 심어 놓았다. 복사꽃도 홍도화도 벚꽃이 져야 피어난다. 마을 표지석 맞은편 배 모양의 조형물에 시인 모윤숙의 시가 새겨져 있다. '세찬 물결 달려와/ 그 귀한 목숨을 삼켜 갔으니/ 엄마 엄마 숨차게 허덕이다가/ 애처롭게 사라져간 넋들이여…' 앞섬다리가 생기기 전 앞섬의 아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읍내 학교로 갔다. 1976년 6월8일 갑자기 폭우가 내렸고,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불어난 강물에 배가 뒤집혔다. 이 사고로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대통령의 명으로 건설된 다리가 앞섬다리다. 곁에는 '수난한 곳'이라는 비석과 1963년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쌀'의 촬영지라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현장비가 있다. 신영균, 최은희, 허장강, 김희갑 등 개성파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다. 금산 방우리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촬영의 대부분은 내도리에서 이뤄졌다고 한다.◆반딧불이 노는 꽃밭전도마을회관 바로 옆길로 빠져나가면 '앞섬강변길'이다. 강변 둑길을 따라가면 수력발전소의 낮은 보쯤부터 금산 방우리다. 여기서부터 거의 벼룻길이라 할 수 있는 좁은 도로가 마을까지 이어진다. 천천히 눈도 깜빡이지 말고 달려야 하는 길이다. 숨을 쉬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곡류하는 강변을 따라 늘어선 기암절벽의 산과 시퍼런 강물과 무심한 하늘뿐이다. 방우리에서 앞섬다리로 이어지는 금강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어름치의 서식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반딧불이 명멸하며 밤하늘을 수놓는 장면을 감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명소다. 사실 무주에서 반딧불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구천동 계곡에서도, 반디 랜드가 있는 남대천에서도, 칠연계곡 아래에도 반딧불이가 출몰한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곳이 내도리 앞섬다리 부근이라 한다. 앞섬 강변에 아주 너른 꽃밭이 있다. '무주 아일랜드 생태 테마파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꽃 모양으로 구획을 나눈 꽃밭은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이 핀다. 샤스타데이지, 펜스테몬, 꽃범의 꼬리, 부채붓꽃, 아스타, 수국, 에키네시아로즈, 청화쑥부쟁이, 핑키윙키 등 22가지 꽃들이 식재되어 있다. 여름이면 늪지에 노랑어리연이 피어난다. 가을이면 목교 주변 수로 가에 차새풀과 구절초, 수크령, 가는 억새, 꿩의 깃 햇살 등이 피어난다. 지금, 맞은편 산자락에 진분홍 진달래가 파르르 빛을 낸다. ◆질마바위와 '맘 새김 길' 앞섬과 뒷섬을 잇는 후도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강변을 따라 좁은 길이 이어진다. 길섶에 자줏빛 광대나물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 있다. 다른 꽃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들이 피지 않으면 안 될 곳을 골라 피어난다는 광대나물 꽃, 이곳은 선택받은 봄맞이의 땅이다. 벼랑에는 아주 드문드문 산벚이 피었다. 그 투명한 분홍 너머로 벼랑의 바위 사이에 맞춤으로 놓인 꿀통들을 본다. 산벚과 꿀통의 관계는 분명 긴요한 듯한데, 벌이 보이지 않는 봄이다. 후도교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질마바위가 있다. 성곽의 문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다. 바위 문은 정과 망치로 벼랑을 쪼아 낸 '학교 길'이다. 1970년대 초반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 자식들이 강을 건너지 않고 안전하게 무주읍내의 학교로 갈 수 있도록 부모들이 직접 만들었다. 뒷섬마을과 산의, 내동마을 등의 학생들이 이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산의에서는 새벽밥을 먹고 나서야 등교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부모들은 읍내 장터에 내다 팔 곡식을 등에 지고 이 길을 걸었다. 강변 길 끝 읍내로 이어지는 고갯길은 너무도 힘들었다고 한다. 노고가 한눈에 보인다. 바위 아래에 작은 비석이 있는데 '1971. 5. 20'이라 새겨져 있다. 뒷섬에서 앞섬으로, 다시 무주읍으로, 두 번이나 나룻배를 타야 했던 아이들은 이날부터 걸어서 등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길은 금강 '맘 새김 길' 중 2코스인 '학교 가는 길'이다. 이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닌 아이들은 이제 60-70대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학교 가는 길에 제비꽃 한 포기, 민들레와 봄맞이꽃이 흔하다. 저것은 쑥인가. 어릴 적에는 냉이며 쑥을 캐러 무시로 다녔건만 왜 이제는 쑥을 알아보지 못할까. 신발주머니 달랑이며 학교 가던 하많은 아침들도 아득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경부고속도로 서울방향으로 가다 황간IC에서 내린다. 황간삼거리에서 9시 영동 방향으로 가다 마산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마산교차로에서 오른쪽 대전, 영동방향 4번 국도에 오른다. 계속 직진하다 영동교차로에서 장수, 무주방향 19번 도로를 타고 직진한다. 봉소교차로에서 오른쪽 내도리, 압치 방면으로 빠져나가 압치버스정류장 앞에서 우회전해 내도로를 타고 가면 된다. 산의마을, 내도초등학교, 내동마을, 뒷섬마을 지나 후도교를 건너면 앞섬마을이다. 내도로는 앞섬마을을 관통해 앞섬다리를 건너 북고사 가는 길 초입에서 끝난다. 학교 가는 길은 후도교에서 질마바위, 북고사, 무주고등학교까지 약 3㎞다.앞섬다리 주변은 밤하늘을 수놓는 반딧불이를 감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명소다. 그 강변에 너른 꽃밭이 있고 철 따라 꽃들이 무더기로 핀다. 봄꽃을 보겠다고 왔지만 마음만 급한 탓에 한 송이도 피지 않았다.금강이 휘돌며 만들어 놓은 앞섬마을의 강변 땅이 모두 복숭아밭이다. 주민의 9할이 복숭아를 키운다고 한다.앞섬과 뒷섬을 잇는 후도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강변을 따라 '학교 가는 길'이 이어진다. 길섶에 자줏빛 광대나물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 있다.질마바위. 학부모들이 정과 망치로 벼랑을 쪼아 낸 '학교 길'이다. 뒷섬마을과 산의, 내동마을 등의 학생들이 이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앞섬마을 소나무 동산. 수려한 소나무들과 함께 깨끗한 무덤 몇 기가 양지에 누워있고 아래로 복숭아밭이 넓게 펼쳐진다.
2024.04.05
[주말&여행] 경북 고령 봄나들이…꽃향기 따라, 대가야 발자취 따라 봄맞이 가자
쭈그려 앉아 봄까치꽃을 들여다본다.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는 조그맣고 푸른 꽃. 딱 하루만 산다는 봄까치꽃은 너무 여려서 살짝만 스쳐도 꽃잎이 떨어진다는데, 그런데도 이 푸른 꽃은 사람의 손길이 자주 미치는 땅을 좋아한단다. 슬프고도 용맹한 아이다. 땅바닥에 바싹 붙어 자라는 광대나물은 스르르 일어나 자주색 꽃을 피우고는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운 모양새로 봄의 소리를 듣는다. 꽃대마다 작은 꽃들이 닥지닥지 붙어서 피어나는 노란 꽃다지, 떨어져 내린 매화 꽃잎 같은 봄맞이꽃, 좁쌀만 한 크기의 꽃들이 송이모양꽃차례로 피어난 꽃마리, 앙증맞은 것들이 무더기로 피었다. 또 저기 앙증맞은 것들의 무더기는 냉이꽃이다. 하얀 냉이꽃이 온 몸으로 말한다.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성산면 강정리 봉화산전망대마을 첫 집의 낮은 담장에 장미넝쿨이 가득하다. 튼실한 줄기와 큼직한 가시가 여름을 기대하게 만든다. 두 번째 집은 큼직한 공장이다. 소음이 흘러나오는 모퉁이에 벚나무 한 그루 시원찮다. 오물대는 몇몇 꽃송이 속에서 '봉화산 전망대' '여기는 낙동강과 벚꽃이 아름다운 강정리입니다'라는 안내판을 본다. 고개를 슬쩍 돌리기만 해도 보인다, 봉화산. 100m 정도 높이의 낮은 산이지만 낙동강 변 강정들에 쑥 솟아 제법 돌올하다. 공사 중인 산사면 위로 하얀 전망대가 보인다. 12번 고속도로를 달릴 적마다 궁금했던 바로 그 건물은 전망대였다. 마을을 관통해 간다. 꺾이는 골목마다 이정표가 있다. 순하디 순한 백구가 사는 집을 지나고 대나무 숲을 지나면 가파른 산길이다. 몇 송이 수선화와 봄까치꽃과 민들레와 광대나물 꽃과 꽃다지와 꽃마리와 제비꽃과 냉이꽃을 만나고 눈을 마주치고 스치는 길이다. 미끈한 나신의 배롱나무 몇 그루가 산정의 정원을 만들고 있다. 길가에는 조팝나무의 흰 꽃이 하나둘 밝고 산수유는 환하게 노랗고 박태기나무는 듬성듬성 꽃분홍색을 내비친다. 오르막의 오른쪽은 낙동강으로 떨어지는 절벽이다. 그 낭떠러지에 벚나무가 빼곡하다. 꽃은 이제 피기 시작해 아직은 강물이 보인다.전망대에 오른다. 낙동강과 88고속도로낙동강교가 바로 눈 아래다. 남쪽으로 대구 현풍과 고령 개진읍을 잇는 박석대교가 보이고 서쪽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통과한다. 교통의 요지다. 이는 곧 과거 군사적 요충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이곳은 낙동강을 사이에 둔 대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였다. 이곳에 대가야 시대 산성이 있었고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말 엉디 산'이라 했단다.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말응봉(末應烽) 또는 말응덕(末應德)이라 표기했다. 지금 산은 봉화산(峰火山), 전망대는 봉수대를 상징한다. 그래도 위성사진을 보면 씩 웃게 된다. 말 엉디, 딱 닮았다. 봄이면 말 엉디 산은 벚꽃으로 뒤덮인다. 오는 주말부터 완연한 개화가 시작되어 4월 초면 만개할 듯하다. ◆성산로 금산재강정리에서 성산로를 타고 고령 대가야읍으로 간다. 성산로는 논공의 위천삼거리에서 시작되어 성산면을 동서로 가로지른 뒤 금산재를 넘어 고령 대가야읍의 회천교 북단 헌문교차로에서 끝나는 12.8㎞의 도로다. 동고령로 개통 전에는 26번 국도의 일부였고 대구에서 고령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군데군데 대가야 축제 안내판이 놓여 있다. 29일 금요일부터 31일 일요일까지 벚꽃시즌에 맞춰 열리는 축제다. 성산면의 번화가가 끝날 즈음 축제장으로 인도하는 안내판은 동고령로로 올라서라고 하지만 옛길을 따라간다. 길은 벚나무 가로수 길이다. 가로수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는 병아리 떼처럼 종종대는 개나리와 땅을 들썩이는 들과 사람들의 조용한 거처가 펼쳐진다. 그러다 금산재 초입부터 벚나무들은 매우 대단해지는데 고개 너머 대가야읍 목전까지 내내 대단하다. 금산재는 대구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고령으로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또한 재만 넘으면 고령분지였으니 방어를 위한 요지였다. 그래서 비단처럼 아름다운 산 금산은 망보는 산이라 하여 망산이라고도 불렀다. 고갯마루 하늘에 구름다리가 걸려 있다. 다리 위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고령 읍내가 훤하고 남쪽으로는 회천이 환하다. '회천'은 냇물이 모인다는 뜻이다. 가야산에서 시작된 대가천과 안림천이 하나 된 것이 회천이다. 지역 사람들은 '모듬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부른다. 회천은 대가야읍 앞을 지나 남쪽으로 훠이훠이 전진해 합천 덕곡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역시 지금도 망산이고 금산이다. ◆대가야 수목원 금산재 잿마루에서 내려가는 길 왼편은 대가야수목원이다. 길가에 '낙동강유역 산림녹화비'가 서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수목원 입구다. 수목원 입구 수양 벚나무가 꽃을 피웠다. 산자락의 벚나무들도 퐁당퐁당 꽃을 피웠다. 아직 앙상하거나 허전한 수목들이 대부분이지만, 아직 목련이 피어 있고 자목련은 꽃봉오리가 단단하고 수양 매화가 놀라운 자태로 꽃을 피우고 있다. 옛날 이곳은 매우 황폐했었다 한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홍수 때문이었다. 치산(治山)을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1973년, 2004년부터는 기념관과 분경분재관, 폭포 등을 만들고 조경을 하는 등 휴양 문화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그리고 2007년, 기념할 수 있을 만큼 숲은 푸르러졌다. 수목원은 경사진 산 사면을 따라 넓고 길게 펼쳐져 있다. 그 속에 벚나무 숲길, 암석원, 미로원, 철쭉동산, 무궁화동산, 야생화단지, 산림녹화 기념관, 연못, 물놀이 시설 등이 자리하고 등산로와 판석의 산책로, 나무 데크 길 등이 두루 어우러져 있다. 멀리 금산재 고갯마루의 구름다리가 보인다. 산책로를 따라 몇 그루 꽃 피운 벚나무와 산수유나무를 지나고 금산폭포도 지나면 산길을 따라 구름다리까지 갈 수 있다. 금산폭포에 폭포는 없는데 물소리 들린다. 이제 숲은 매일 조금씩 깨어난다. 암석원의 봄까치꽃들 사이에 복슬복슬한 할미꽃이 피었다. 조그맣고 푸른 봄까치꽃은 할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매일 매일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할미의 슬픔을 모르는 말간 얼굴로.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대구에서 5번 국도를 타고 화원, 옥포 지나 위천삼거리에서 오른쪽 성산, 동고령IC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성산로를 따라 약 2km 직진하면 오른쪽에 강정리 봉화산 안내판이 커다랗게 자리한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마을을 관통해 10여 분 올라가면 봉화산전망대다. 골목골목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성산로를 타고 계속 직진하면 금산재를 넘어가게 된다. 고개를 완전히 넘으면 회천과 고령 대가야읍이 훤히 보이고 회천교 다리 건너기 전 왼편에 입구가 있다. 대구 서문시장이나 서부정류장에서 606번 버스를 타면 성산로를 타고 가게 된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동고령IC에서 내리면 바로 성산면 소재지 한가운데 성산로다.대가야수목원은 경사진 산 사면을 따라 넓고 길게 펼쳐져 있다.봉화산전망대. 대가야 시대에는 산성이 있었고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다.금산재 구름다리에서 본 고령 대가야읍. 회천과 읍내가 한눈에 보이고 지산동고분군까지 조망된다.아직 앙상하거나 허전한 수목들이 대부분이지만 놀라운 자태로 꽃을 피우고 있다.
2024.03.29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①
몽골제국은 칭기즈칸이 1206년에 건설했다. 13·14세기 몽골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나라였다. 유럽 정벌은 물론 1271년에는 중국의 남송까지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차지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이다. 필자는 중국문학, 그중에서도 중국공연예술을 전공했다. 중국의 고전 희곡 가운데 양식적으로 완비된 것은 원나라 잡극으로 본다. '중국문학사'에서 잡극을 다룰 때 1271년을 기점으로 '몽고시대'와 '일통시대'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리고 그 흥성기는 '몽고시대'라고 본다. 잡극 음악 자체가 북방 음악이었고, 몽골 왕실에서도 특히 애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원곡 사대가라 불리는 관한경, 백박, 마치원, 왕실보 등이 모두 13세기 중엽에 활동한 극작가이다. 그렇다면 당시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잡극이 활발하게 공연되었음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확인할 자료가 없어서 늘 미진한 구석이 남았다. 원나라 시기에는 중국 남방의 한족까지 매료시켰던 잡극 양식이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속 시원한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잡극은 '대아지당'에 오른 시문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속문학이었고, 특히 몽골이라는 이민족 왕조에서 기원한 양식이었으니 굳이 파헤치지도 않았을 법하다. 몽골을 마주하면 늘 이런 아련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이 필자를 카라코룸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몽골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정작 몽골제국의 옛 수도였던 카라코룸보다 인근의 미니 고비나 오르콘 계곡 투어 자료가 대부분이었고, 카라코룸은 이미 '사라진 도시'로 스쳐 지나는 곳이었다. 그래도 현장을 가보고 싶었다.세계문화유산 등재 카라코룸 유적지도기·성곽 등 유적유물 다수 발굴돼2010년 개관 박물관 복원 모형 전시기와·게르구역, 모스크 등 당시 재현13세기 교황 사절단·고려 교류 흔적몽골제국의 옛 수도 전성기 떠올라울란바토르에서 350㎞, 자동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이다. 세 개의 강이 만나는 목초지에 자리한 카라코룸은 몽골어로 '검은 자갈밭'을 뜻하는 'Qara-Qorum'으로, 중국 문헌에는 '客喇和林' 또는 '和林'으로 나온다. 현재 몽골 발음으로는 '하르허린(Хархорин)'에 가깝다. 카라코룸이 위치한 오르콘(Orkhon) 계곡 지역은 전략적, 경제적 중요도가 높은 곳이자 몽골에서 신성한 지역이다. 2004년 유네스코에 의해 '오르콘 계곡 문화 경관'의 일부로 카라코룸 유적지 및 에르덴조 사원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이 지역은 7·8세기 위구르 시기부터 이미 상당한 도시의 터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투르크 제국, 위구르 제국의 유물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이 1220년에 수도를 정했고, 실제 건설은 1235년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칸이 시작했다. 이후 쿠빌라이 칸이 1271년 남송을 멸하고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길 때까지 몽골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다. 오고타이는 칭기즈칸의 아들 가운데 가장 지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 장인과 프랑스 기술자를 동원하여 웅장한 성벽 도시 카라코룸을 건설했다. 말하자면 동서양 기술이 합쳐진 세계 제국의 상징 도시로 건설된 셈이다. 또 아버지 때부터 함께 일했던 야율초재를 중용하여 중국식 행정 조직과 중국과 이어지는 역참을 설치하여 통치 기반을 다졌다. 내적 안정을 기한 오고타이 칸은 1240년에 바투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서방 원정을 시작하여 키예프, 폴란드 등을 점령하였다. 그가 사망한 1241년에도 리그니츠 근교에서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했다. 또 헝가리군을 격파한 후 실레지아 왕 헨리 2세를 처형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몽골이 유목국가 성격을 탈피하고, 정주 농경국가를 지향하며 세계 제국으로 변모하던 시기였다. 이처럼 카라코룸은 몽골제국 전성기를 웅변하는 도시이다. 그러나 지금은 황량한 벌판만 남아 있을 뿐 카라코룸의 영화는 박물관 속에 갇혀 있었다. 일본 자본으로 지어져 2010년 개관한 카라코룸 박물관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고대도시 시대, 몽골제국 시대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몽골어, 영어와 함께 일본어 설명이 있어서 박물관에서도 자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카라코룸 여러 곳에서 발굴된 도기와 오고타이가 건설한 성곽 유적 유물 덕분에 미흡하나마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도성 유적발굴 가마터였다. 실제 발굴 현장 위에 박물관을 지어 박물관에 유리관으로 발굴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도시 건설에 필요한 각종 기와나 도기, 건설 자재들이 건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발굴과 기록을 토대로 도시 모형을 만들어놓았다. 모형을 보면 기와 건물과 게르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모스크를 비롯한 각종 종교시설도 배치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게 한다. 성안에는 대략 1만3천명에서 1만5천명 정도 거주한 것으로 추정한다. 쿠빌라이 칸 통치기에 몽골을 왕래했던 마르코 폴로는 여행기 '동방견문록'을 통하여 당시 원나라를 유럽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 20~30년 앞서 카라코룸을 방문했던 두 명의 유럽 수도사가 있었다. 각각 구육 칸과 뭉케 칸 통치기에 카라코룸을 방문한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 카르피니(Carpini)와 루브룩(Rubruck)이다. 두 수도사는 '몽골의 역사'와 '몽골기행'이라는 귀중한 여행기를 남김으로써 당시 도성의 모습과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유럽 사람들도 이 기록을 통해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정복자 몽골제국의 정보를 접했다. 카르피니는 1245년 교황 이노센트 4세가 파견한 수도사였다. 카르피니는 서양 가톨릭 수도사로는 최초로 카라코룸을 방문하여 4개월간 체류하고 1247년 리옹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교황에게 몽골제국 답사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니, 그것이 '몽골의 역사'이다. 이 책에는 초원에 세워진 화려하게 정비되고 건설된 계획도시 카라코룸의 풍경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교황의 서신을 구육 칸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카라코룸 박물관에는 교황의 서신과 구육이 쓴 답신이 전시되어 있다.박물관 모형에서 보듯이 카라코룸은 4개의 성문이 있는 성벽 도시였다. 성문마다 시장이 있어서 동쪽에는 곡식, 서쪽에는 염소, 남쪽에는 황소와 사륜마차, 북쪽에서는 말을 팔았다. 성벽의 안팎에는 몽골인은 물론 중국인, 페르시아인, 위구르인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 거주했으며,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도시에는 무슬림 거주 구역과 중국인 거주 구역이 별도로 설정돼 있었고, 불교 사원 12개, 모스크 2개,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교회 1개가 있었다고 한다. 두 수도사의 기록 가운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솔랑기', 즉 '고려(高麗)'를 언급하고 고려인을 묘사한 대목이다. 고려에 관한 기록은 '몽골의 역사'에 여섯 번, '몽골기행'에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정보가 제법 자세한 것으로 보아 당시 고려인의 왕래도 꽤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라코룸에서는 이처럼 다양하고 상이한 민족과 종교가 서로 공존하며 번영을 이루었고, 이는 몽골제국이 지향했던 다원주의를 잘 상징해 준다. 당시 카라코룸은 제국의 번성과 함께 아시아 전역은 물론 유럽의 상인, 고위 관리, 기술자들이 모여 사는 활기찬 도시였다. 카라코룸은 행정, 교역, 문화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접점이었다. 중국 문헌에는 대칸이 살았던 카라코룸의 궁전을 '만안궁(萬安宮)'이라 기록하고 있다. 루브룩은 '몽골여행'을 통해 그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궁전의 입구에는 은으로 만든 거대한 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밑둥치에는 은제 사자 네 마리가 조각돼 있었고, 그 입에서는 말젖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또한 이 나무의 몸통 속에는 긴 대롱이 꼭대기까지 이어져 거기에서 다시 늘어진 나뭇가지를 통해 포도주, 마유주, 봉밀주, 미주 등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음료수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장식품을 제작한 사람은 프랑스 파리 출신의 기술자였다. 이것은 울란바토르 자이승 기념관 근처 공원에서 보았던 은제나무 분수를 묘사한 내용이다. 이처럼 동서양 기술을 접목하여 건설한 몽골제국의 수도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도성을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은 에르덴조 사원 북서쪽 300m쯤에 귀부만 남은 '돌거북'이다. 유일할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유물이다. 거북등의 비석이 카라코룸의 여러 역사를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네 개의 돌거북 비석이 카라코룸의 경계석으로 사방에 있었다. 1220년 칭기즈칸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라고 한 명령도 이 비석에 남은 글이다. 그뿐만 아니라 98m 높이의 5층 탑 '흥원각'에 대한 기록도 있다. 지금은 황량한 벌판 가운데 기단부만 남아 무상함을 느끼게 하지만 기단부에 늘어선 수십 개의 기둥 자리는 당시의 웅장한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계속)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카라코룸 박물관카라코룸 출토 도기. 중국풍 도기로서 중국과의 교류 유물로 보인다.카라코룸 복원 모형도.디지털로 복원한 돌거북 비석.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2024.03.22
[주말&여행] 전북 임실 구담마을, 섬진강변 산비탈에 10여가구 둥지…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
장산마을을 지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살고 있다는 마을이다. 커다란 느티나무 너머로 시인의 거처가 한눈에 들어차고 방진으로 늘어선 산수유나무가 노란 산형꽃차례를 곡진하게 피워내고 있다. 마을 끝자락에서 길은 눈에 띄게 좁아진다. 명목은 자전거길이지만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군데군데 대기차선이 마련되어 있다. 이팝나무와 벚나무가 가로수로 이어지고 띄엄띄엄 자리한 벤치와 시를 새겨 놓은 바위가 연산홍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손 뻗으면 참방, 손끝이 시리게 닿을 것만 같은 강에는 눈(雪)빛의 바위들이 툭툭 떨어져 있다. 문득, 물굽이 따라 청둥오리 떼가 선회한다. 이 길을 옛날에는 지게길이라 했고 지금은 '시인의 길'이라 부른다. 천담마을을 지난다. 길가에 동자바위가 동그마니 서 있다. 그의 일그러진 입술에서 울음소리 흐른다. 강폭이 넓어졌다. 동자바위의 눈물 때문일지도 모른다. 20년전 매화나무 심어 '매실의 고장' 수식어옛날엔 닥나무 많아 질 좋은 한지 생산 유명1998년 이광모 감독 영화 촬영 현장비 세워장산~천담~구담마을 이어지는 물길 아름다워◆구담마을천담마을의 끝자락에서 매화나무 가로수가 시작된다. 비가 후드득 내리기 시작했고, 우중 매화는 더없이 청초하다. 매화나무는 1.5㎞ 정도 이어지다 자취를 감춘다. 백미러 속으로 마지막 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은 것은 활짝 열린 골짜기와 그 밑동을 적시는 강물과 눈빛의 바위들과 흔들리는 갈대들과 멀리 보이는 한 줌의 촌락들 때문이다. 길이 강과 조금씩 멀어지며 산을 오른다. 하나둘 집들이 나타난다. 길가에 무더기로 쌓인 비료 포대에 박○○, 김○○, 공○○, 허○○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다양한 성씨들이 모여 사는구나. 그리고 다시 매화가 우수수 이어지더니 버스정류장과 뾰족뾰족 잎만 오른 수선화와 '매실의 고장 구담마을'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길의 끝이다. 길 끝 구담마을은 강변 산비탈에 둥지를 친 듯 앉아 있다. 지붕을 세어보니 약 12개 정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있으니 대략 10가구 정도일 것이다. 1680년쯤 해주오씨가 정착해 형성되었다는 구담마을은 마을 앞 섬진강에 자라가 많다 하여 구담(龜潭)이라고도 하고, 또 저 섬진강에 아홉 개의 소(沼)가 있어 구담(九潭)이라고도 한다. 옛 이름은 '안담울'이다. 강 건너 보이는 지형이 마치 학이 알을 품은 형세와 같다고 생긴 이름이다. 지금도 안담울이라 즐겨 부르는 이들이 많다. 마을은 약 20년 전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수익창출을 위해 하나둘 매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후 '매실의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지금 마을의 매화나무는 조금씩 무리 지어 듬성듬성 환하다. 새알 같은 집들, 새알 같은 텃밭들, 새알 같은 꽃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마을회관 옆 쉼터 유리벽에 김용택 시인의 시가 적혀 있다. '당신을 만나/ 안고 안기는 것이/ 꽃이고 향기일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지금 그리고 가고 싶어요.' 하나뿐인 당신이 온 우주이듯 한 송이 꽃도 온 우주이지.◆아름다운 시절마을의 남쪽 끝에 당산 숲이 강을 내다보고 있다. 느티나무와 서어나무가 숲을 이룬 당산 가운데에 소박한 제단이 있다. 슬쩍 봉긋한 것은 삼신할머니 무덤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이 세운 영화촬영 현장비가 있다. 이 마을에서 이광모 감독의 1998년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촬영했다. 6·25전쟁 때의 이야기다. 감독은 '비록 괴롭고 아픈 시절이었지만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을 잘 말하기 위해 전국을 7개월간 돌아다닌 끝에 구담마을을 만났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 한 가족이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는 모습이 4분 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고난과 절망의 시대에도 늘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고 사셨던 할아버님과 아버님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자막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 산길은 이곳이 아니지만 그들의 뒷모습은 저 강을 닮았다. 매화 꽃잎 속에 강물이 흐른다. 강 건너는 순창의 회룡마을이다. 멀리 희미한 것은 용궐산이다. 대 슬래브의 허연 가슴 때문에 용궐산이구나 알아본다. 지난해 이른 봄 용궐산 하늘길에 올랐을 적에 이곳 구담마을을 마음에 담아두었더랬다. 이 물굽이를 보려고. 사람들은 섬진강 오백리길에서 임실의 장산, 천담, 구담을 거쳐 용궐산 장구목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가장 아름다운 물굽이로 꼽는다. 그 아름다운 물굽이를 전부 보았으니 으쓱하다. ◆산책로 따라 강변으로 긴 연통에서 불내가 난다. 어디선가 카레 냄새가 난다. 어느 집 축대에 노란 수선화가 두어 송이 피었다. 어느 집 모퉁이에는 홍매 한 그루가 입을 꼭 다물고 서 있다. 마을 안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강 쪽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따른다. '꽃이 핍니다/ 꽃이 집니다/ 꽃피고 지는 곳/ 강물입니다/ 강 같은 내 세월이었지요.'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모양의 바위에 김용택 시인의 시 '강 같은 세월'이 새겨져 있다. 머리와 꼬리는 아직 겨울잠 자고 등만 내놓은 구렁이네 하곤 저 아래 미동 없는 강을 본다. 매화가 제법 화사한 작은 밭을 지난다. 작고 하얀 꽃잎이 검은 길 위에 점점이 내려앉았다. 한 줌 푸른 대숲 속으로 오솔길이 가파르게 내려간다. 저 아래 수묵화 같은 풍경 속에서 세 여인이 까르르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앞서 끌고, 뒤서 밀며, 세 사람은 같은 속도로 오르막을 오른다. 그녀들을 모로 스치며 가운데서 환히 웃는 여인의 손 주름을 보았다. '징검다리 가는 길' 앞에서 잠깐 고민을 한다. 돌계단을 따라 곧장 강변으로 내려설 수도 있고 조금 길게 휘돌아 갈 수도 있다. 먼 길을 간다. 강이 가까워지자 '구담마을 닥나무 삶던 솥'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덕치면은 옛날부터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물이 깨끗해 질 좋은 한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제는 사양길에 들었지만 구담마을 앞 강변에는 지금도 돌을 쌓아 만든 120년 된 닥나무 가마솥이 있고 삶은 닥나무를 두들기던 너벙바위가 많다고 한다. 쏜살같이 내려가 두리번두리번 '닥나무 삶던 솥'을 찾는다. 까맣고 푸르고 붉은 돌로 쌓아올린 '솥'을 찾아내지만 어떻게 삶는지 상상이 안 된다. 돌솥밥 정도만 겨우 생각해 내는 조무래기가 뭘 알겠나. 저기서 한그루 매화나무가 부른다. 꽃 너머로 평평한 바위가 보인다. 오호라, 너벙바위는 알겠다. 건너편 회룡마을에도 군데군데 꽃나무가 희다. 두 마을을 잇는 징검다리는 오늘 낮고 긴 낙수대다. 세 여인이 떠난다. 부릉 시동을 건 차에서 한 여인이 후다닥 내린다. 그녀는 어느 집 축대로 달려가 노란 수선화를 카메라에 담는다. 아름다운 시절이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가다 순창IC에서 내린다. 순창IC교차로에서 12시 방향으로 나가 직진, 관서삼거리에서 좌회전, 순창고교교차로에서 우회전해 27번 국도를 타고 직진한다. 약 10㎞ 정도 가다 장암교차로에서 회문산, 장암리 방향으로 빠져나가 우회전, 50m터 앞에서 다시 장암리 방향으로 좌회전해 400m 앞 천일슈퍼에서 우회전해 계속 직진하면 장산마을, 천담마을 지나 길 끝에 구담마을이 자리한다.구담마을 매화 꽃잎 속에 섬진강이 흐른다. 강 건너는 순창의 회룡마을, 멀리 희미한 것은 용궐산이다. 대 슬래브의 허연 가슴 때문에 용궐산이구나 알아본다.구담마을은 강변 산비탈에 둥지를 친 듯 앉아 있다. 지붕을 세어보니 약 12개 정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있으니 대략 10가구 정도일 것이다.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숲을 이룬 구담마을 당산. 숲 가운데에 한국영상자료원이 세운 이광모 감독의 1998년 영화 '아름다운 시절' 영화촬영 현장비가 있다.
[주말&여행] 울산 장생포 문화창고, 폐건물에 불어넣은 문화재생의 숨결…울산의 새로운 바다가 되다
건물 외벽에 푸른 고래가 헤엄치고 있다. 장생포로 들어서는 초입, 부드러운 고개를 넘어 급히 휘어지는 도로변이다. 턱을 치켜들면 길 건너 높은 축대 위에 장생포 초등학교가 올라앉아 있고 고개를 돌리면 바다에 늘어선 커다란 뱃머리의 둥근 코끝이 만져질 듯 가깝다. 그들 뒤로 연기를 내뿜는 석유화학단지와 각종 공장, 다채로운 항만 시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 자리에서 1962년 울산공업센터 특정공업지구 기공식이 열렸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이었고 대한민국 산업수도 울산의 시작이었다. 그 후 이 자리에 1973년 냉동 창고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양고기를 가공하던 남양냉동이었다. 1993년에는 명태, 복어, 킹크랩을 가공하는 세창냉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0년도 채 안 돼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고 건물은 폐허가 된 채로 남아 있었다. ◆냉동창고에서 문화창고로푸른 고래 옆에 '제19회 대한민국 지방자치경영대전 문화관광분야 최우수상'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또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지역명소'라는 걸개도 보인다. 냉동 창고는 2021년 복합 문화예술 공간인 '장생포 문화창고'로 변신했다. 건물 매입 후 공식 개관까지 약 5년이 걸릴 만큼 많은 공을 들였다. 건축공간재생 분야의 전문컨설턴트, 문화예술단체, 대학생과 주민 등 100여 명이 폐산업시설의 문화재생에 대한 정보를 나눴고 새로운 예술 공간 조성을 위해 수차례 모임을 가졌으며 3번의 공간 실험을 거쳤다. '장생포 문화창고'는 장생포가 간직한 한국공업화 역사의 가치를 보존하고, 문화 인프라가 부족했던 울산 남구의 미래 문화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문화의 보물창고'라는 의미다. 입구는 기둥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이다. 고래 조형물 뒤로 바다가 바짝 다가와 있다. 저렇게 큰 배가 이렇게 바짝 접안되어 있다는 건 바닷속이 얼마나 깊은 벼랑이라는 뜻일까. 입구는 '청춘마당'이라 불리며 종종 버스킹 공연이 열린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커다란 통 창 너머로 장생포 바다가 펼쳐진다. 맞은편에는 음식을 먹으며 쉴 수 있는 푸드코트 '어울림마당'이 자리하고 있다. 2층에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 있다. 울산의 공업지구 지정 이후 오늘에 이르는 역사와 변화 과정이 소품, 사진 자료, 그림 등 다양한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맞은편에는 체험공간이 자리한다. 그리고 만들고, 쓰고, 몸으로 표현하는 등 유아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3층은 갤러리B와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층 가운데 과거 냉동창고의 모습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4층에는 갤러리C와 울산의 창작자들이 만든 '시민창의광장'이 있다.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를 통해 완성한 '시민창의광장'은 공간 전체가 바닷속 것 같다. 입체작품 18점, 평면작품 62점, 영상작품 6편, 공간구성 2식 포함 88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개 울산 도시와 고래에 관한 것이다. 작품 중 하나인 '빛의 방'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빛 그리고 그 속에 한 점 빛으로 존재하는 '나'를 느낄 수 있는 방이다. 5층은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남구구립교향악단의 전용 연습실이 있고, 공유 작업실과 연습실, 녹음실, 회의실 등이 있다. 전 층의 중앙에 통 창을 가진 홀이 있다. 각 층에 들어설 때마다 가장 먼저 장생포를 만난다. ◆멈추어 바라본다, 지관서가6층에는 각종 공연과 상영회, 강연 등이 가능한 '소극장 W'와 서점 겸 카페인 '지관서가(止觀書架)'가 들어서 있다. 입구에 이런 문구가 있다. "도심 속 현대인의 분주한 일상에 성찰의 피난처로써 책을 통한 '사유'와 '대화' 그리고 '문화'의 경험의 장을 마련하여 우리의 삶에 참 쉼과 성장, 행복을 찾고 나누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지관서가입니다."지관서가는 울산에서 오랫동안 석유화학공장을 운영해 온 <주>SK의 재원을 기반으로 인문학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가 기획하고 지방자치단체가 공공 공간을 제공해 만들어진 복합 인문 문화공간이다. 스르륵 유리문이 열리자 커피 향이 훅 풍겨온다. 눈길 가닿는 곳마다 책이고, 장생포고, 고요한 사람들이다. 지관서가는 평일, 휴일 가릴 것 없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이곳에서 강연회가 열리고 북 토크와 음악회도 열린다. 현재 울산에는 6곳에 지관서가가 있는데 각각 다른 주제들로 책을 선정하고 공간을 구성했다. 울산대공원은 '관계', 장생포는 '일', 남구의 선암호수공원은 '나이 듦', 울주의 유니스트는 '명상', 울산시립미술관은 '아름다움', 북구의 박상진호수공원은 '영감'을 주제로 한다. 2026년까지 울산에 스무 곳의 지관서가가 들어설 계획이라 한다. 또한 울산 외에도 여러 지역에 지관서가를 열 예정이라고 한다. 묵직한 커피잔을 들고 장생포를 본다. 배들과 굴뚝들과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 웅장하다. 편안한 차림의 연인이 나란히 책 앞에 앉는다. '지관(止觀)'은 멈추어서 바라보는 일을 뜻한다. 문득 전깃줄에 빼곡히 앉아 날개 쉼 하는 새들이 떠오른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책시렁에 앉아 날개 쉼 하는 새들 같다.◆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별빛마당6층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운영되지만 옥상으로 가는 길은 계단이다. 계단실의 문을 열면, 파란 동화나라로 들어선 듯하다. 피아노 건반 모양의 계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하고 말을 건다. 계단을 밟으면 '도도 솔솔 라라 솔' 피아노 소리가 나고, 벽면의 노란 별 음표가 반짝 빛을 낸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노래를 흥얼거리며 옥상 문을 연다. 와락 하늘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유리 벽을 가진 옥탑방이다. 큼직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가지런히 창밖을 내다본다. 한쪽 벽은 장생포 문화창고를 방문했던 사람들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하나하나 개성이 넘친다. 새로운 장소에서 즐거운 경험을 한 이들의 '신남'이 느껴진다. 유리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간다. 옥상정원은 '별빛마당'이다. 귀여운 천국의 계단이 하늘을 담고 있다. 물멍을 한다. 배멍을 하고, 굴뚝멍을 하고, 연기멍을 하고, 하늘멍을 한다. 새처럼, 지관 한다. 작은 배들이 빠르게 오가고 커다란 배가 천천히 지나간다. 입출항하는 배들의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원활한 흐름을 위해 속력 규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멈추어야 보이는 것들 앞에서 속도를 생각한다. 현재 장생포 문화창고는 고래문화재단이 위탁운영 중이다. 2012년 창립된 고래문화재단은 울산 최초 기초 지역문화재단이다. 울산고래축제와 고래문화마을, 남구거리음악회 등 고래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예술의 일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대구에서 경주 방향 경부고속도로로 가다 경주 지나 언양분기점에서 부산, 울산 고속도로 울산 방면으로 간다. 울산 톨게이트로 나와 울산항 방향으로 가다 신여천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장생포로를 따라가다 매암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장생포고래로를 따라 가면 어린이보호구역이 시작되고 바다가 처음 보이는 자리에 장생포 문화창고가 자리한다. 이용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며 매주 월요일은 쉰다. 주차와 입장은 무료다.울산의 창작자들이 만든 '시민창의광장'.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되었으며 88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필로티 공간인 입구는 '청춘마당'이라 불리며 종종 버스킹 공연이 열린다. 고래 조형물 뒤로 바다가 바짝 다가와 있다.2020 공공미술프로젝트 작품 중 하나인 '빛의 방'.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빛을 주제로 한다.
2024.03.15
[주말&여행] 부산 기장군 신평리 신평소공원, 우뚝한 돛대·반짝이는 조타륜…배 조형물 전망대 금방이라도 출항할 듯
신평리(新平里) 바닷가 마을 앞길이 아주 넓다. 아예 운동장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빽빽하다. 아예 주차장이다. 마을은 작고, 대지의 기울기는 미미하고, 마을 뒤로 멀리 산도 낮다. 땅이 마을 이름의 뜻을 알려준다. 신평은 평탄한 들 가운데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다. 고종 때 신평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지명을 한자화하기 전에는 새들, 새버든, 새버들, 새각단이라고도 불렀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센 편이지만 마을은 평온해 보인다. 마을의 남쪽 끝은 암석지대다. 카페와 곰장어 식당 사이 고샅길을 지나 벼랑에 오른다. 철썩, 부서지는 파도가 얼얼하다.◆신평소공원벼랑의 가장자리를 따라 산책로가 나 있고, 길 따라 벤치와 정자, 운동기구, 야외무대, 뱃머리 모양의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 일대를 신평소공원이라 한다. 공원은 바다와 좁은 도로 사이에 압도적이지도 않고 실망스럽지도 않은 규모와 풍광으로 자리한다. 도롯가에는 식당과 카페들이 다닥다닥 늘어서 있다. 반투명한 창속에 사람들의 형상이 빼곡하다. 뱃머리 전망대로 오른다. 길이는 18.86m, 폭이 12m인 배다. 돛대의 높이는 15.5m로 곧 출항할 기세다. 공원이 준공된 것은 2010년 봄이다. 준공 표지석에 공원녹지계장과 지방시설서기가 함께 설계, 부산의 건설업체가 시공, 농림과장과 또 다른 공원녹지계장이 준공검사를 했다고 새겨져 있다. 한 지역 사람들의 합작품이다. 배의 이름은 없지만, 오늘은 2024년의 봄, 14년 된 조타륜은 반짝반짝하다. 뱃머리 옆에 툭툭 놓여있는 새알 같은 하얀 조형물도 생채기 하나 없이 말갛다. 역시 이름은 없다. 쓰레기도 하나 없다. 잘 관리한다는 뜻이겠다. 이곳에서 종종 웨딩 촬영을 한단다. 산책로 초입에 윷판대라는 바위가 있다는데, 안내판만 보일 뿐 실물을 찾지 못하겠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우리나라 장수와 왜나라 장수가 맞붙었다고 한다. 몇 날을 겨루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자 윷놀이로 결판을 짓기로 했단다. 칼로 바위에 윷판을 새겨 종일 겨루어도 승부는 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왜장은 바다를 향해 서서 윷판이 잘 보이도록 더욱 깊고 굵게 새겼는데, 그때 우리 장수가 왜장을 바다로 뻥 차버렸다고 한다. 왜장을 바다로 던져버린(擲) 대(臺)라고 하여 척사대(擲柶臺)라고도 한다. 벼랑의 윷판대 안내판 앞에서 줄곧 저 아래 바위만 열심히 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서 있던 그 벼랑이 바로 척사대였던 듯싶다. 줄곧 열심히 보았던 바위들은 신평소공원에서 가장 멋있고 신비로운 요소다. 이 일대의 바위들에는 퇴적층이 아주 뚜렷이 나타나 있는데 후기 백악기 이천리층이라 불린다. 경상분지의 동남부다. 뱃머리 앞쪽의 암석은 이천리층 중 가장 하부에 해당하는 퇴적단면을 보여준다. 아래에서부터 습윤, 건조, 습윤한 기후변화가 나타나는데 건조한 기후였던 중층부에서 공룡 발자국과 침엽수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곰장어 가게가 올라앉아있는 벼랑은 이천리층의 가장 상부에 해당하는 퇴적단면이다. 영암과 사암, 이암층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습윤한 기후가 지배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야외무대 앞쪽의 암석은 하층부에서는 습윤한 기후가, 중상부로 갈수록 건조한 기후가 지배적인 호수 주변부의 퇴적모습이 나타난다. 이곳의 건조한 시기 퇴적층에서 각종 공룡 및 특이형태의 척추동물, 새의 발자국 화석과 식물화석, 공룡 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그러고 보니 새알 같던 조형물은 공룡의 알일까. ◆백악기의 공룡발자국야외무대의 축대 아래에 신평리 공룡발자국과 화석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공룡발자국은 2020년 3월에 발견된 것으로 영남지방의 공룡 발자국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닷가로 내려선다. 거친 파도에 움찔한다. 그러나 파도는 거칠게 바위를 때리고는 저만 부서지기를 반복하고, 부글거리는 거품들이 바위 안쪽에 갇혀 풀풀 날린다. 공룡 발자국이 여럿 있다는데 하나의 보행렬 만이 확연하다. 공룡은 바위 면을 기준으로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걸어갔다. 20㎝ 안팎 크기의 발자국이 10여 개, 걸음새는 쿵---쿵이 아니라 쿵, 쿵, 쿵, 쿵, 제법 경쾌하고 재다. 발견된 보행렬은 3점으로 두 발로 걷는 조각류의 것이 2점, 목이 긴 용각류의 것이 1점 확인됐다고 한다. 추정되는 지층의 나이는 대략 9천만년 정도다. 백악기 때 기장군 일대에는 건조한 기후의 영향을 받는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호수는 공룡을 비롯한 동물들의 서식지였고 물과 먹이를 제공하는 공급처였다. 토양은 끈적끈적한 성질의 흙으로 이루어져 있어 공룡이 거대한 몸으로 쿵쿵 걸을 때면 발자국이 그대로 남곤 했다. 발자국은 대부분 금세 지워졌지만 드물게는 다른 흙이나 암석, 용암 등에 덮여 굳어졌다. 굳어진 발자국은 오랜 세월 동안 지층 속에서 변성작용을 거쳐 지금과 같은 형태의 화석이 되었다고 한다. 초식공룡이 먹이로 삼았을 식물의 흔적도 곳곳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공룡화석과 먹이인 식물화석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국내에서 드문 사례다. 물결무늬도 발견되는데, 호숫가에 물이 차올랐다가 빠지는 잔물결이 반복되면서 생긴 것으로 분석된다. 눈 밝은 사람은 처트(규질암)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평리층에 콕콕 박혀 있는 붉은 색의 암석인데, 선캄브리아시대 이후 바다에 떠다니며 사는 원생동물(방산충)이 무수히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이 암석의 모체는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처트는 한반도의 공룡 시대에 동해가 없었다는 증거로 꼽힌다. 그때는 한반도와 일본이 연결되어 있었다. 백악기 이곳에 발자국을 남긴 공룡들, 이곳에 살았던 식물들, 잔물결 일던 호수는 저 바다를 보지 못했다. 무섭게 파도치는 바다, 성난 거품을 일으켰다가 풀풀 날려버리는 바다, 저 깊고 넓은 바다를 그들은 보지 못했다. 괜히 으쓱해진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부산 방향으로 간다. 대감분기점에서 600번 부산외곽순환도로 기장 방향으로 가다 기장IC로 나긴 뒤 기장일광 톨게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톨게이트 앞 사거리에서 온산, 서생방향 31번 국도를 타고 약 3.2㎞ 직진, 청광리, 동백리, 신평리 방향으로 나가 우회전해 직진, 동백교차로에서 왼쪽 동백리 방향으로 간다. 동백리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북향하면 바로 윗마을이 신평리다. 동백리 지나 신평리가 시작되는 언덕바지에 신평소공원이 위치한다. 공원 주차장은 5대가량 규모로 협소하다. 길가에 주차할 공간도 여의치 않다. 공원 주차장에서 약 130m 더 직진해 신평리 마을로 들어서면 바닷가에 공터가 아주 넓다.신평리 남쪽 끝은 암석지대로 산책로와 벤치, 정자, 야외무대, 뱃머리 모양의 전망대 등을 갖춘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해안 끝에 아주 작은 몽돌 해변도 있다.뱃머리 전망대와 알 모양의 조형물. 전망대는 길이 18.86m, 폭이 12m인 배다. 돛대의 높이는 15.5m로 곧 출항할 기세다.신평리 공룡발자국. 용각류의 보행렬 화석으로 작은 것은 앞발, 큰 것은 뒷발이다. 추정되는 지층의 나이는 대략 9천만년 정도다.이천리 암석지대의 바위에는 퇴적층이 아주 뚜렷이 나타나는데 후기 백악기 이천리층이라 불린다. 당시의 다양한 지질과 생물기록들이 압축되어 있다.
2024.03.08
[주말&여행] 전남 남원 수지면 내호곡마을 몽심재 …호랑이 기운 품은 고택…살금살금 발가락 걸음이 저절로
남원 지리산 서쪽에 호음실(虎音室)이란 마을이 있다. '호음'은 호랑이 울음소리라는 뜻이다. 보통 홈-실이라 부른다. 마을을 두르고 있는 호랑이 머리 모양의 호두산(虎頭山)에 호랑이가 많아 생긴 이름이다. 그리 오래지도 않은 옛날에는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많았는데 영조 때 전라감사 이서구가 호두산을 견두산(犬頭山)으로 바꾸자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 이름도 호곡리(虎谷里)에서 호곡리(好谷里)가 되었다. 호곡리의 내호곡마을은 죽산박씨(竹山朴氏) 집성촌이다. 고려 말의 충신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는 두문동으로 들어가며 가족들을 고향인 남원 초리로 내려보냈다. 300여 년간 초리에 살던 죽산박씨가 옆 마을인 내호곡으로 들어온 것은 1700년대 초반이다. 지리산 서쪽 호두산이 두른 마을에영남 선비들 거쳐가던 고택 사랑채집터는 누워있는 호랑이 머리 자리◆내호곡마을 몽심재마을 입구에서 마을의 내력을 읽고 안길로 들어선다. 마을 회관처럼 생긴 하얀 건물에 '수지도서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마을이장이 기부 받은 책으로 만든 도서관이란다. 흘끔 들여다보니 책이 많다. 마을 가까이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이정표를 보았으니 도서관 이용자도 꽤 될 듯하다. 마을 광장에 죽산박씨 충현공파의 사적비가 커다랗게 자리하고 그 뒤로 경로당이 조용하다. 어디선가 나타난 할머니 한 분이 씩씩하게 걸어오시더니 도서관 옆길로 사라지신다. 쪼르르 따라간 자리에 여성 경로당이 있다. 영인당 현판이 걸린 여성 경로당 안에서 음악소리 들린다. 이건 분명 체조용 선율이렷다. 생각해보니 뚝 떨어져 마주 선 두 개의 경로당이 별스럽지 않다. 텅 빈 듯 고요한 안길을 따라 들어간다. '남원의 숨은 보석 몽심재(夢心齋)'라는 안내판을 본다. 돌담 너머로 상체를 드러낸 꽃나무들이 꽃봉오리를 잔뜩 매달고 있다. 봄비가 지나가면 꽃이 피겠지. 대숲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터 앞에 고택의 삼문이 단정하다. 이 집은 18세기 후반에 죽산박씨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이 지은 고택으로 몽심재는 사랑채의 이름이다. '몽심'은 박동식의 선조인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보낸 시에서 유래한다.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며 잠자고(隔洞柳眠元亮夢)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구나(登山薇吐伯夷心)' 도연명을 꿈꾸는 '몽'과 백이의 마음 '심'을 합해 '몽심'이다. 어쩐지 살금살금 걷게 된다. 경사진 땅의 높은 자리에 몽심재가 자리한다. 축대까지 높아 건물은 더욱 우뚝하다. 누마루가 있는 정면 5칸 집, 크다. 사랑채 뒤편의 안패는 더욱 높다. 'ㄷ'자형에 양쪽 누마루 방이 다락처럼 설치되어 더욱 높아 보인다. 누마루 방 창문 앞에 덧댄 난간이 전망대처럼 느껴진다. 몽심재는 지리산 만복대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한 견두지맥 기슭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다. 산자락에 둘러싸인 비교적 폐쇄적인 땅이지만 경사진 터를 그대로 이용해 문간채에서 사랑채와 안채로 갈수록 건물을 시원하게 높여 답답함이 없다. 집 동쪽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죽산박씨 종택과 사당이 자리하는데 역시 터생김 그대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종가 대문에는 충신, 효자, 열녀가 모두 배출된 집안임을 나타내는 삼강문(三綱門)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주일암, 요요정, 천운담몽심재에서 뒤돌아보면 문간채를 가리고 엎드린 커다란 바위가 보이다. 바위에 주일암(主一巖)이라 새겨져 있다. '주일무적' 즉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잡념을 떨친다는 뜻에서 따온 이름이다. '존심대(存心臺)' '청와(淸窩)' 등의 각자도 보인다. 집터가 누워있는 호랑이의 머리 자리인데 지리산의 기운이 견두산을 타고 내려와 이 바위에 모인다고 한다. 주일암과 문간채 사이에는 200년 된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호족시'라 불린다. 드러난 뿌리 모양이 호랑이 발을 닮았단다. 바위에 모인 기운 덕에 바위 앞 문간채에서 잠을 자면 큰 인물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산달을 앞두고 묵으러 오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다고 한다. 이 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문간채의 대청마루와 그 앞의 연지다. 대청마루는 요요정(樂樂亭)이라 부른다. 난간을 두르고 앞쪽에 낮은 연지를 둔 누마루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연지는 천운담이다. 연지 중심에 바위섬이 있고 디딤돌 4개가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는데 봄비 덕에 디딤돌은 보이지 않는다. 빗물이 수로를 따라 흘러내려 연지를 이루고 담장 아래 배출구를 통하여 집 밖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연못을 가진 즐겁고 즐거운 정자, 요요정. 하인들의 공간에 마련된 누마루는 처음 본다. 집주인의 배려와 너그러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더운 여름에는 연지의 수면에 머문 시원한 공기가 사랑채의 대청마루로 시원하게 불어 올라간다고 한다. 연못가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는 시절이 그려진다. 고려 말 충신 박문수 후손이 지어후한 대접으로 손님들 끊이지 않아전란땐 온 마을 함께 건물 지켜내◆몽심재의 주인들 마을 사람들은 박동식을 박진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심 좋고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소문난 박진사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구례, 순천 쪽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 또는 함양 쪽에서 넘어오는 영남의 선비들에게 몽심재는 늘 거쳐 가는 사랑채였다고 한다. 또한 몽심재의 쌀 창고는 늘 열려 있어서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 가져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 몽심재의 두 번째 주인은 박주현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승지를 지내다 러일전쟁 이후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1910년 경술년 국권피탈 직전 일제는 합방의 정지작업으로 각 지역에 민회(民會)를 만들었다. 일제는 남원의 유력인사인 박주현을 회장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박주현은 심한 고문을 받고 몇 달 후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몽심재의 세 번째 주인은 박주현의 장남인 박해창이다. 그는 홍문관 시강 벼슬을 지냈으며 마을에서는 비랑공이라 불렀다. 고조, 증조 때부터 근검절약하여 모은 재산이 그에 이르러 만석이 되었으며, 남원의 3대 만석꾼에 꼽힌다. 그의 땅은 구례 산동까지 뻗어 있었고 추수기에 쌀을 저장하는 창고가 구례의 이평과 산동, 남원 읍내 세 군데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소작인들을 후하게 대하였고 1923년에는 사재를 털어 초등학교를 세웠다. 지금도 건재한 수지 초등학교다. 그가 죽자 영호남의 과객들이 여러 곳에 자발적으로 유혜비(遺惠碑)를 세워 그를 기렸다고 한다. 남원은 동학농민전쟁과 6·25전쟁 때 아주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몽심재가 불타지 않은 것은 온 마을이 함께 지켰기 때문이라 한다. 문중에서 최근 몽심재를 원불교 교단에 기증했고 현재 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집안에서 사람소리 들린다. 엄지발가락으로 살금살금 걸었던 것은 집의 기운 때문이지 사람소리 때문이 아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대구광주고속도로 남원IC에서 내려 직진, 요천과 만나는 삼거리에서 광한루원 방향으로 우회전해 직진한다. 노암동사거리에서 좌회전, 노암사거리회전교차로에서 10시 방향 구례, 수지 방면으로 나가 약 3㎞ 직진, 동학농민운동유적지 표지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수지, 고달 방면으로 우회전해 간다. 6㎞ 정도 직진하면 호곡리다. 원불교 수지 교당을 지나면 몽심재 이정표가 있다. 내호곡2길 따라 들어가면 된다. 몽심재 솟을대문 앞에 너른 주차공간과 몽심정 쉼터, 간이 화장실이 있다. 개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관이다.남원 수지면 내호곡 죽산박씨 집성촌의 몽심재. '몽심'은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보낸 시에서 유래한다. 도연명을 꿈꾸는 '몽'과 백이의 마음 '심'을 합해 '몽심'이다.문간채를 가리고 엎드린 커다란 바위, 주일암. 집터가 누워있는 호랑이의 머리 자리인데 지리산의 기운이 견두산을 타고 내려와 이 바위에 모인다고 한다(위). 연못을 가진 즐겁고 즐거운 정자, 요요정. 하인들의 공간에 마련된 누마루는 처음 본다. 집주인의 배려와 너그러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문간채를 가리고 엎드린 커다란 바위, 주일암. 집터가 누워있는 호랑이의 머리 자리인데 지리산의 기운이 견두산을 타고 내려와 이 바위에 모인다고 한다(위). 연못을 가진 즐겁고 즐거운 정자, 요요정. 하인들의 공간에 마련된 누마루는 처음 본다. 집주인의 배려와 너그러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2024.03.01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고흥 팔영산 능가사~중산 일몰
능가사로 가는 길은 고즈넉했다. 몸집이 큰 겨울 나목 몇 그루가 휑뎅그렁하게 서 있었다. 천왕문을 지나자 경내는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명산 팔영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능가사는, 다른 세계처럼 꿈꾸는 풍경이었다. 그 겨울의 절집 능가사는, 무언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신(神)의 서식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대루를 통과하고 작은 연못에서 멈춘다. 마치 불사리(佛舍利)처럼, 가운데 섬이 있고, 거기에 즉심시불(卽心是佛)이 석 비에 새겨져 있다.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간결하고 명쾌한 문구인가. 마음은 나의 내면의 문제이다. 내 안의 마음에, 부처가 있다는 의미다. 내가 저 문구를 보지 못했다면, 나는 내 마음에 부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안 어디에 부처가 있는 걸까. 그걸 찾는 건, 고르디우스의 복잡한 매듭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그러나 그것보다 차라리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이고, 그들이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오늘이 교회 가는 주일이므로. 아무튼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가설은 나의 인식에 새로운 발광체가 되었다. 바로 그 뒤에 종각이 있다. 능가사 범종은 현존하는 김애립(金愛立) 작품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인 1698년에 제작된 것으로, 김애립 범종의 원숙한 기량이 유감없이 녹아있는 17세기를 대표하는 수작이다. 이 범종은 맑은소리, 긴 여운, 뚜렷한 맥놀이가 있고, 낮은음의 더딘 울림과 사뭇 자비로운 중심음이 멀리 길게 이어지며, 아득한 허공으로 선을 그으면서 퍼져나가, 사바세계로 스며드는 신비감이 있다고. 한다.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대웅전으로 간다. 대웅전은 60평 면적이다. 그런데 중간에 기둥이 없다는 점이 놀랍다. 어떤 건축 공법이었을까. 대웅전이 품고 있는 그 많은 뜻을 다 말할 수는 없고, 기둥의 주련만 한번 해석해 보기로 한다.김애립 대표 수작 '능가사 범종'뚜렷한 맥놀이현상에 긴 여운중산 일몰 전망대 풍경 장관드넓은 갯벌 위 철새들 비행'겹겹이 늘어선 누각이 화장의 세계요(樓閣重重華藏界). 보랏빛 비단 장막 뒤에는 진주를 뿌린 듯하네(紫羅帳裏撒眞珠). 사오백 그루가 늘어진 버드나무 숲(四五百株花柳巷). 이삼천 척의 범음이 울리는 누각(二三千尺管絃樓). 물소는 달을 감상하며 아롱진 달무늬 뿔에 새기고(犀因玩月紋生角). 코끼리는 우레에 놀라 번개무늬를 상아에 입히네(象被驚雷化入牙)' 정말 아찔하며 훅 가게 하는 선(禪) 시(詩)다. 이렇게 아름다운 주련의 시가 대웅전을 마음의 귀향지로 만들고 있다.절 뒤편에 있는 사적비를 찾아간다. 사적비는 1726년(영조 2년)에 세웠다. 불교 유래와 절의 사적을 기록해 놓은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석은 처음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력으로 지금 장소로 옮겼다는 전설이 있다. 사적비에 의하면, 기원후 417년(신라 눌지왕 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보현사라 하였다고 하나,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후, 1644년(인조 22년)에 벽천 정현 대사가 다시 짓고 능가사로 사명을 바꾸었다. 당시 벽천은 나이 90세 노승으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현몽을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다시 지었다고 한다. 또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능가사는 팔령산(현, 팔영산) 아래에 있다. 아득한 옛날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 태자가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태자는 이 절 관음보살에게 엎드려 밤낮을 기도하며, 고국에 돌아가기를 빌었다. 기도 7일 만에 어떤 승려가 나타나 태자를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법당에 그 내용을 그려 놓았던 벽화가 조선 영조 때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건 물론 전설일 수 있다. 현대는 의식의 비대화와 과학이라는 양 수레바퀴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이끌어 줄 신화(神話)를 엉뚱하게 미신으로 비과학으로 몰아붙이는 영혼 상실, 방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설과 신화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의미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쾌락과 자유만을 추구하는 사르트르적인 세계에 내던져진 채, 생명의 에너지를 물질의 추구에만 소모하는 게 아닐까. 돌아 나온다. 공터였던 응진전 앞마당에 의상조사가 화엄경을 210자 7언 30구로 요약한 법성게를 담은 '화엄 일승법계도'를 본떠서 만든 차밭 길이 있다. 이제 수행과 신행의 공간으로 탈바꿈된 이 길을 따라 걷는 '요잡'은 자기 마음에 숨어있는 부처를 찾는 의식이다. 고개를 들어 팔영산을 바라본다. 겨울의 오후 햇살과 산의 나무들이 부르르 몸을 떠는 어스름 위로 여덟 개의 암 봉이 너무 수려해 눈시울을 비비고 다시 봐야 했다. 팔영산에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옛적, 중국의 위(魏, 한나라의 뒤를 이어 조비가 220년에 세운 나라) 왕이 어느 날 아침 세수 물을 받았더니 그 대야에 8개의 빼어난 산봉우리가 비쳤다. 기이하게 여겨 신하를 보내 찾게 했는데, 그 산이 팔영산이었다. 그때까지 팔전산이라 부르던 것을, 세수 물에 비친 그림자 영자를 써서 팔영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에서 좌로 여덟 봉우리가 빼어난 자태로 공제 선을 만드는데, 신비하기만 하다. 산이 신령하다 하여, 한때 신흥종교가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또 팔영산에는 조선 시대 봉수대가 있고, 일제강점기에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로, 광복 후에는 빨치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한다. 주위를 살펴보는데, '이제염오 진흙탕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간판을 단 능가사 한옥 카페가 보인다. 들어가서 고흥 특산물인 유자차를 주문해서 마신다. 창밖으로 벙글은 야산과 절 풍경이 내 정수리까지 흘러와 번뇌를 씻어준다. 실내는 한적한 분위기에 경쾌하고 은은한 음악으로 가득 차 정말 행복했다. 이제 곧 중산 일몰 전망대로 출발해야 했다. 오늘은 년 중 해가 짧은 겨울날이었으므로.중산 일몰 전망대는 의외로 여행객이 많았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기도 했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황혼의 겨울 하늘은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썰물이 나간 겨울 바다에는 여럿 섬과 회청색 갯벌이 흐릿한 이내처럼 아슴아슴하게 보였다. 해는 기울수록 더 붉게 탔다. 그럴수록 길고 긴 갯벌과 먼바다는 차츰 눈이 시린 검푸른 색으로 변해갔다. 구름이 짙었으나 노을빛이 퍼지는 전망이 좋았으므로 우리는 숨죽여 더욱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찬 허공을 가로지르며, 그 노을의 하늘 위로 철새가 날아간다. 그건 비현실 같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러시아의 노래 백학을 들려주었다. 우리 민족 한의 정서와 비슷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곡이었다. 그 리듬과 가사는 떨고 있는 우리의 몸을 슬픔으로 얼어붙게 하였다. '…그 대신 하얀 학이 되었나. 그들은 옛날부터 하늘을 날면서 우리를 부른 듯하여, 그 때문에 우리가 자주 슬픔에 잠긴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지.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 하늘의 지친 학의 무리들.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 지은 대오의 조금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가 아닐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함께 나는 회청색의 어스름 속을 끝없이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둔 그대들의 이름자를. 천상 아래 새처럼 목놓아 부르면서.' 이 중산 전망대가 어쩜 그렇게 백학의 노랫말 얼개를 부둥켜 안아버리는지. 우리는 어둠이 내렸음에도 음악이 다할 때까지, 검푸른 바다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떠날 줄 몰랐다. 글=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 사진작가중산 전망대의 일몰.고흥의 명산 팔영산.능가사 대웅전과 팔영산.범종각과 즉심시불 석비.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주말&여행] 전남 곡성 섬진강 침실습지, 물안개·일출·동악산 노을…침실습지 10경 황홀하구나
가자 나의 침실로, 가자. 상화의 시를 중얼대며 침실로 간다.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그러나 설마 그 침실이 이 침실이겠어? 하는 생각을 한다. 곡성읍으로 향하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나고 한산한 섬진강 기차마을을 지나 오곡면 오지마을의 흙돌담 길 따라 강변으로 간다. 기차마을의 예쁜 기차가 눈앞을 천천히 지나간다. 굴다리 지나 제방 아래 주차장이 넓다. 설마 이 침실이 그 침실이겠어? 잠길 침(沈)에 집 실(室)이면 딱 맞춤이겠네. 제방으로 오른다. 섬진강이다. 습지다. 침실습지다. 침실(寢室). 세상에, 그 침실이 맞다. ◆침실습지곡성읍 곡성천이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오곡면 오곡천이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강 건너 고달면 고달천이 또 그렇게 섬진강이 된다. 세 개의 천은 어찌 예서 만나기로 했을까. 침실습지는 그들이 한데 만나는 길목에 넓게 형성된 하천습지다. 면적은 203만㎡(약 61만5천평)로 남원의 요천, 수지천과 합류하는 곳부터 오지리 끝자락까지 엄청난 규모로 펼쳐져 있다. 침실은 오지리 남쪽의 침곡(寢谷)에서 온 이름이다. 옛날 유씨(柳氏) 선산에 묘를 쓰던 중 침혈(寢穴)의 명당이 나타나 '침실'이라 했고 후에 침곡이라 개칭했다고 한다. 침실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는 명당'이라는 뜻이다. 옛 이름이 오늘에 이르러 뜻대로 안착한 듯하다. 데크 길이 오지리 제방에서 곡성천을 건너 곡성읍 신리로 이어진다. 버드나무 줄기가 제법 윤기를 띠기 시작했고 주변 습지에는 푸릇한 기운이 퍼져 있다. 저 길을 걷고자 했건만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며칠 지난하게 내린 비 때문일 것이다.강폭이 제법 넓다. 섬진강은 원래 물이 많은 강이었다. 본래 이름이 '모래내' 또는 '다사강'이었을 만큼 모래밭도 넓었다. 섬진강댐과 동화댐 등이 들어서면서 물길이 막혔다. 저장된 물은 김제평야의 농업용수나 섬진강 주변지역의 상수도 용수로 쓰이면서 하천을 유지하는 강의 수량은 줄었다. 강물이 줄어들다 보니 강변은 이렇게 습지가 되었다. 지금 침실습지는 국가보호습지다. 가끔씩은 노루도 뛰어다니고 버드나무와 갈대 무성한 강변 초원에는 수달과 삵, 남생이 같은 귀한 야생동물이 산다. 이 외에도 흰꼬리수리를 비롯해 새매, 큰말똥가리 등 665종의 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마을 사람들이 무시로 다니는 동네 습지가 보호종으로 지정된 야생동물의 터전이다. 국내 하천습지 중 가장 많은 한국 고유어종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침실습지를 '섬진강의 무릉도원'이라 부른다. 침실습지는 빼어난 풍경과 생물 다양성을 인정받아 2016년 11월, 강 중류 하도습지로는 유일하게 환경부로부터 22번째 국가습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침실습지 10경, 상선약수 퐁퐁다리무지개를 건넌다. 오곡천 습지를 가로지르는 침실목교다. 훌쩍 높지만 오곡천 하상의 모래가 일렁일렁 환하다. 섬진강 건너 동쪽은 고달면 고달리다. 고달리와 오지리를 연결하는 납작한 다리가 놓여 있다. 침실습지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퐁퐁다리'다. 100m 정도 되는 철제 다리로 상판에 구멍이 퐁퐁 나 있어 강물이 불면 구멍을 통해 물이 퐁퐁 올라온다. 홍수가 져서 물이 세차게 흘러도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는 것은 다리에 구멍을 퐁퐁 뚫은 부력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고달리 잠수교'다. 고달리 주민들이 빠르게 읍내로 나갈 수 있는 통로로 사람도 다니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도 다닌다. 침실습지에는 10경이 있다. 1경은 '침실습지 일출', 3경은 침실습지를 옆에 끼고 둑방길을 걷는 '묵언명상 강변길', 4경은 '바람공장 자전거길'로 '섬진강 종주 자전거길'의 일부분이다. 5경은 '호락산 흰꼬리수리길'로 침실습지 동쪽에 위치한 호락산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6경은 '동산정 팽나무'로 마을을 지켜온 노거수, 7경은 '황홀채색 동악산 노을'로 곡성읍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동악산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이다. 8경은 '청강속살 달뿌리풀 군락'으로 침실습지의 급류에도 목숨 줄 질기게 달뿌리풀이 군락으로 피어나는 모습이다. 9경은 '생명보고 황새밥상'이다. 과거 넓게 펼쳐져 있던 모래밭과 버드나무 군락을 일컫는 말로 세월의 흐름에 모래는 하류로 많이 흘러가 지금은 하동을 지나는 섬진강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10경은 '침실습지 상고대'로 쉽게 관찰되지는 않는다. 한겨울 일교차가 심한 날,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고 때마침 지나가는 동장군이 온도를 영하 이하로 빠르게 떨어뜨리는 순간, 안개 속 작은 물방울이 버드나무 군락에 그대로 얼어붙는다. 침실습지 2경이 '상선약수 퐁퐁다리'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최상의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아니한다.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라는 의미다. 퐁퐁다리는 '물멍'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다. 아예 드러누워 물소리와 함께 흘러도 좋겠다. 생각만 해도 좋은 걸. ◆안개와 노을의 정원, 연하원퐁퐁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제방 이편에 둥그런 새집 하나 앉힌 전망대가 있다. '생명의 나무'라는 전망대다. 주변으로 연못과 정자 등이 보인다. 침실습지 수변공원을 조성하는 중이라 한다. 완공은 2022년 혹은 2023년 이랬는데 이제 곧 개장할 것 같은 태세다. 전망대를 비롯해 방문자 센터, 체험 및 관찰습지, 탐조대, 생태 놀이공간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숲과 들, 습지, 화원 등 전통 경관을 극대화한 산책로도 만들고 계절 별로 다양한 식물을 체험할 수 있는 수련지와 창포원도 만들어진다. 침실습지 수변공원의 테마는 연하일휘(煙霞日輝)다. 안개와 노을과 햇살이 빛난다는 뜻으로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 경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천연의 경관에 대한 감탄의 말이다. '연하원'이라는 이름이 관목으로 조각되어 있다. 안개와 노을의 정원이다. 물안개는 4월에서 6월 사이 또는 9월과 11월 사이 일출을 전후해 많이 피어오른다고 한다. 오는 내내 지리산마저 지워버린 비구름을 보았기에 약간의 기대와 설렘이 있었지만 초봄의 한낮에 물안개를 볼 수는 없었다. 침실습지는 2021~2022 한국관광공사가 봄 시즌 안심관광지로 선정한 24선 중 한 곳이다. 연두로 빛나는 완연한 봄날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봄날의 이른 아침에, 침실로 오시라.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대구에서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방향으로 간다. 남원 분기점에서 순천완주 고속도로 순천방향으로 가다 서남원IC로 나간다. 순천방향 17번 국도를 타고 가다 곡성읍으로 나가 섬진강 기차마을 쪽으로 간다. 기차마을 앞을 지나 조금 가면 오곡면사무소가 나오는데 조금 더 직진하면 왼편에 GS25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을 끼고 좌회전해 오지8길 따라 직진, 오동교 앞에서 좌회전해 700m 정도 가면 침실습지 주차장이 위치한다. 주차는 무료다. 곡성, 오곡, 고달천이 합해진 섬진강은 침곡리에서 침곡천을 만나 청둥오리 모가지 빛깔의 압록으로, 또 구례로, 하동으로 간다. 그 길 따라 내리 걸어도 좋겠다. 침곡리 맞은편은 고달면 호곡리다. 호곡나루에 동동 뜬 줄 배를 볼 수도 있다.데크 길이 오지리 제방에서 곡성천을 건너 곡성읍 신리로 이어진다. 버드나무 줄기가 제법 윤기를 띠기 시작했고 침실습지 전역에 푸릇한 기운이 퍼져 있다.고달리와 오지리를 연결하는 퐁퐁다리. 상판에 구멍이 퐁퐁 나 있어 '퐁퐁다리'다.'생명의 나무' 전망대. 주변으로 방문자 센터, 체험 및 관찰습지, 탐조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침실습지 수변공원에 자리한 '연하원'. 안개와 노을의 정원이다.
2024.02.23
[주말&여행] 경남 함양 용유담, 푸른 물빛, 꿈틀대는 바위…용이 노니는 듯
계곡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에 습한 초록의 이끼가 소복하다. 주변의 풀숲에는 햇살이 몇 점 뿌려져 있었고 흙빛의 작은 새들이 먹이를 찾듯 빛을 찾아 포르르 날아올랐다 내려앉았다. 모든 수목의 밑동과 눈 맞춤하며 나아가는 골짜기의 사면은 상당한 조심성을 요구했다. 길이라기보다는 앞선 사람들의 흔적이라는 게 옳겠다. 흙과 이끼와 낙엽을 지나 비로소 바위를 디뎠지만 얼음이다. 17℃의 낮 기온에도 음지는 아직 얼음이다. 4월 수달래가 필 즈음에 왔어야 했나,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한발 한발 집중해 전진한다. 그리고 마침내 물을 본다. 깊고 푸른 물, 미동도 없는 고요한 물빛. 뇌에서 깅- 소리가 들린다. 세계가 천천히 회전한다. 정신을 잃은 채 천궁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용이 노는 연못, 용유담 움찔 고개를 내젓는다. 휘청거리는 몸을 다독인다. 바위들은 대개 희고, 반죽처럼 매끈하고, 조각처럼 다채롭다. 축구공만 한 돌개구멍도 있고 수십 명이 들어가도 너끈한 대형 돌개구멍도 있다. 층층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층리는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듯하고 암맥으로 보이는 청색의 암석들은 불끈불끈 꿈틀대는 듯하다. 상류의 소실점을 바라보고서야 물소리가 들린다. 첩첩의 바위들 사이로 물줄기가 소리를 내며 하얗게 떨어지고 있다. 안도감이 든다. 눈앞의 푸른 물빛은 너무 오래 바라보면 안 된다. 정신을 차렸지만 오싹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곡 입구에 수영금지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있었는데 참으로 당치않다. 누가 저 물빛으로 뛰어들 수 있겠나.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용이 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유담(龍遊潭)이다. 성종 때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오늘도 어둑한 바위틈에 촛불 하나 밝다. 저절로 비손하게 되는 세계다. 지리산 천왕봉의 정북 아래다. 뱀사골, 칠선골, 한신골 등 지리산 북쪽 계곡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 임천이 된다. 첩첩으로 쌓인 바위를 타고 거세게 흐르던 임천은 어느 순간 넓어지며 큰 소(沼)가 되어 잠잠해지는데 그곳이 용유담이다. 임천은 용유담을 지난 후 엄천(嚴川)이 된다. 그러니까 임천과 엄천은 용유담을 가운데 두고 이름을 달리하지만 같은 강이다. 엄천(嚴川)은 신라 때 엄천사라는 큰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절이지만 낙성식 법회에 헌강왕이 거둥하였고 최치원이 사찰의 발원문을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중요한 절이었는지 알겠다. 과거 지리산 유람에 나선 선비들은 엄천사에 들러 쉬고 용유담에 멈추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김종직은 '돌의 오목한 곳에 물이 고여 있었는데, 내 발이 미끄러져서 신과 버선이 모두 젖었다. 작은 것은 술동이(窪樽, 와준) 같고 큰 것은 구덩이(空, 감공) 같다'고 하였다. 광해군 시절의 남원부사 유몽인은 '돌이 사나운 물길에 깎여 움푹 파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조선 정조 때 학자 이동항은 '시내에 커다란 바위들이 쌓여있었다. 지붕의 용마루, 평평한 자리, 둥근 북, 큰 항아리, 큰 가마솥, 성난 호랑이, 내달리는 용, 서 있는 것, 기대 있는 것, 웅크리고 있는 것 등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계곡에 가득 차 있어 온갖 기괴한 형태의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전설과 역사로 가득한 용유담 용유담 바위에는 300여 개의 각자가 있다고 한다. 독조대, 심진대, 경화대, 용유동천, 세신대, 영귀대, 강선대 등이 있고 누군가의 이름 각자도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그중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恩思惠平姜公顯之地)'라는 붉은 글씨다. '인종이 전직 형조판서였던 강현(姜顯)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의미다. 당 현종이 벼슬을 마친 당나라의 한 시인에게 '물길의 한 굽이'를 하사했다는 고사를 본 딴 자랑이다. 조금 부럽지만 보다 놀라운 것은 그 옆에 나란히 새겨진 4명의 이름이다. 문충공점필재김선생, 문정공남명조선생, 문민공탁영김선생, 문헌공일두정선생. 조선 성리학의 조종(祖宗)들이 모두 이곳에 왔었다. 더 오래전인 신라시대에는 마적도사가 용유담에 마적사를 짓고 은거했다. 도사에게는 나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식량이 떨어지면 나귀를 장에 보냈고 돌아와 울면 도술을 부려 쇠 지팡이로 임천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어느 날 마적도사는 지리산 천왕할매와 장기를 두느라 정신이 팔려있었고 때마침 용유담의 용들은 서로 승천하려 소란스레 싸우고 있었다. 그 통에 장에서 돌아온 나귀는 울다 지쳐 그만 죽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적도사는 장기판을 던져 버리고 용유담의 아홉 용 가운데 눈먼 용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쫓아버렸단다. 용유담 주변에는 마적도사 전설과 관련된 이름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마적동'이라는 지명, 눈먼 용이 굴 안에 잠들어 있어 늘 거품이 떠오른다는 '거품소', 마적도사가 물을 마신 '도사 우물', 마적도사가 던진 장기판의 깨진 반쪽이라는 '장기판 바위', 도사의 이름을 딴 소나무인 '마적송'도 있다. 이렇게나 생생한 전설이 또 있나.가사어(袈裟魚)란 말이 있다. 못 위로 드리워진 소나무 그림자를 보다가 제 몸의 무늬마저 그 그림자와 같게 된 물고기, 그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袈裟)와 같다 하여 '가사어'라고 한다. 가사어는 지리산 서북쪽에 있던 달공사(達空寺)의 저연(猪淵)에서 태어나 가을이면 물 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다시 올라갔다고 한다. 물빛처럼 투명하고 물살보다 빨라 눈에 띄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한다. 조선의 국가공식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가사어의 서식환경과 관측기록, 심지어 포획방법까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김종직은 '달공사 아래에 있는 물고기는/ 붉은 갈기 얼룩 비늘에 맛이 더욱 좋구나'라 했으니 필시 잡아먹은 것이다. 유몽인은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고 했다. 지리산의 기반암이 조성된 것은 18억 년 전이다. 까마득한 지질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역사시대까지 용유담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과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고여 있다. 가장 근래의 것은 1984년부터 거의 30여 년 동안 수많은 갈등과 논란을 빚었던 '지리산 댐' 건설을 무산시킨 일이다. 댐 건설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용유담이 물에 잠긴다'는 것이었다.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했는데 나는 인간의 낭만이 세계를 구한다고 화답하고 싶다. 물론 작은 소리로. 지리산이 연두가 되는 봄이면, 용유담 골짜기에 수달래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주변 마을은 산벚과 홍매화, 복사꽃으로 뒤덮인다. 꽃 그림자 아롱대는 용유담에서 누군가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가사어를 볼지도 모른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여행 Tip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함양IC에서 내린다. 톨게이트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함양 방향으로 간다. 주차장사거리에서 24번국도 남원 방향, 난평삼거리에서 지리산, 남원, 마천 방향으로 가다 '지리산 가는 길' 이정표 따라 좌회전해 1023번 지방도를 타고 간다. 지안재, 오도재를 넘어 금계리에서 '지리산 가는 길'이 끝나고 60번국도 '천왕봉로'가 임천 따라 이어지는데 좌회전해 3㎞ 정도 가다 고양터, 송대, 모전마을 이정표 따라 오른쪽 골짜기로 내려가면 바로 용유교다. 다리를 건너면 공중화장실이 있고 곁에 반야정사가 위치한다. 반야정사 마당을 가로질러 계곡 쪽으로 가면 된다.용유교에서 본 용유담. 첩첩으로 쌓인 바위를 타고 거세게 흐르던 임천은 어느 순간 호수처럼 넓어지며 잠잠해진다.붉은 글씨는 '인종이 강현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의미의 각자다. 그 왼편에 점필재 김종직,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남명 조식의 이름이 희미하다.깊고 푸른 물, 미동도 없는 고요한 물빛이다. 크고 작은 포트홀과 층층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층리, 암맥으로 보이는 청색의 암석층 등이 용유담을 기묘하고 다채롭게 만든다.곧 굴러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바위는 독조대, 뒤로 보이는 다리는 용유교다. 원래의 출렁다리는 태풍 루사 때 유실되었고 2004년에 용유담을 가로질러 용유교를 놓았다.
2024.02.16
[주말&여행] 경남 밀양 삼랑진읍 트윈터널…터널 들어서자, 빛의 세상이다
삼랑진나들목을 나와 밀양 방향으로 간다. 곧 오른쪽으로 미전 농공단지가 보이고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이 고갯길을 미전고개라 한다. 미전리의 고개다. 옛날 미전고개 근처에 무흘역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무을이역(無乙伊驛)이라 했고 조선시대에는 무흘이역(無訖伊驛), 무걸이역(無乞伊驛), 무흘역 등으로 불렸다. 미전리 서편에 있는 200m가 조금 넘는 산을 무흘산이라 했고 그 아래 마을도 무흘이라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흘은 일제 강점기에 무월(無月)이 되었다. 무흘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월은 알겠다. 달이 없다는 뜻이다. 미전고갯길에서 트윈터널 이정표를 따라 무월산 북쪽자락을 밟고 넘는다. 넓은 하우스 밭이 큰 강처럼 펼쳐지고 그 너머로 밀양강 둑이 희미하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KTX 경부선과 대구부산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 무월산 터널과 화성 마을무월산을 뚫는 경부선 터널과 고속도로의 터널 입구가 보인다. 그 앞쪽에 더 오래된 두 개의 터널이 있다. 오른쪽 터널은 조금 크고 밋밋한 콘크리트 터널이다. 왼쪽 터널은 조금 작고 전면에 장식을 가미한 벽돌 터널로 아치 위에 식산흥업(殖産興業)이라 새겨져 있다. 1897년 10월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종은 형식적인 칭제(稱帝)가 아닌 실제로 막강한 황제권을 보장하도록 제도를 마련하였고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정책을 추진해갔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근대적 경제체제 건설을 위한 식산흥업정책이다.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은 철도와 통신 등 기간산업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대한제국 정부를 주체로 하는 철도 부설이 추진되었지만 실현은 어려웠다. 경부선 철도는 1898년 일본과 한국이 공동 경영한다는 조약을 체결하지만 결국 일본이 부설권을 장악하게 된다. 식산흥업 터널은 경부선 철도 구포~밀양 구간의 하행선 터널로 1902년에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후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했고,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각종 광물을 원활하게 실어 나르기 위해 전국에 기찻길을 만든다. 부산항으로의 물자수송이 증가하자 경부선 대전~삼랑진 구간을 복선화하면서 1940년 또 다른 터널을 개통하게 된다.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터널은 '무월산 터널'이라 불렸다. 터널이 뚫리고 기차가 달리면서 무흘마을은 화성(火聲, 火城)마을이 되었다. 화통차가 소리를 지르며 달리는 마을이다. 무월산 터널은 2004년 밀양에 KTX가 개통되면서 역할을 마감했다. 폐 터널로 13년여간 방치되어 있던 터널들은 2015년부터 시작된 재생사업을 거쳐 2017년 6월27일 빛으로 가득한 새로운 모습으로 개장하였다. 지금은 '트윈터널'이다. 나란한 아치가 쌍둥이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출구로 이용되는 하행선 터널은 길이가 443m, 입구로 이용되는 상행선 터널은 길이가 457m이다. 터널 앞 잡풀 우거졌던 터에는 식당 겸 매점과 달고나 체험, 카트체험, 닥터피시 체험, 모래놀이장, 그네놀이터, 풍선 놀이터가 자리 잡았다. 입구 터널 상단에 보선차량이 놓여 있다. 실제 사용하던 전기식 모터카차량이다. 제 역할을 다하고 철길에서 내려온 저이도 이곳에서 새로운 임무를 맡은 셈이다. ◆ 빛의 세상, 트윈터널입구 가림막을 헤치고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뭉클해진다. 빛의 세상이다. 엄청난 빛의 세상이다. 은하수 속이다. 1억 개의 LED빛이 온몸을 감싼다. 걷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유영하는 듯하다. 수천 개의 유성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어느 사막에서 유성비를 맞는 기분이다. 이제 물속으로 들어선다. 푸른빛이 신비로운 블루크로우 가재, 로켓 모양의 로켓가아피시, 오묘한 색상의 칼라테트라, 천사 같은 엔젤피시, 귀여운 도롱뇽인 우파루파, 쥐라기 중기에 처음 출현한 역사 깊은 폴립테루스, 현대에 교잡되어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플라워 혼, 무지갯빛이 나는 글라스켓, 민물에 산다는 파하카 복어, 호랑이처럼 줄무늬가 있는 수마트라, 그리고 거북이와 철갑상어도 있다. 어둡고 긴 터널의 가운데에서 저들만의 빛의 세계에서 헤엄치고 있다. 수족관에 이마를 붙이고 보고 또 본다. 물고기들의 세계를 지나 더욱 깊은 물속으로 들어선다. 바다거북과 고래가 노는 해저계곡을 빠져나가면 용궁과 같은 성이 나타난다. 갑자기 수많은 물방울들이 뿜어져 나온다. 사람을 이렇게 홀리나.용궁 앞에서 하행 터널로 넘어간다. 물속은 갑자기 하늘이 된다. 하늘과 가까운 성이 오색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 사랑 많은 공주님처럼 땅으로 향한다. 각종 소원과 사랑의 맹세로 빼곡한 하트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은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보리밭이다. 아니 밀밭인가? 붉고 푸르고 노란 단풍나무가 있으니 벼라고 하자. 황금빛 가을의 끝에는 카페가 있다. 숨 가쁘게 왔으니 조금 쉬어가라는 듯. 커피와 차, 에이드, 스무디, 각종 디저트류가 있고 딸기맥주와 사과와인도 판다. 딸기 시배지인 삼랑진의 딸기와 밀양 사과로 만든 술이다. 맥주도 사고 와인도 사고 땅콩 한 봉지 얻어 들고 든든하게 겨울나라로 간다. 북극곰이 있고 산타와 루돌프가 있고 눈 속에 기차가 다니는 마을을 천천히 지난다. 저기에 'see u'라고 적힌 마지막 장막이 보인다. 그 길을 연분홍 벚꽃 잎들이 빽빽이 늘어서서 배웅한다. 겨울 지나 봄을 맞듯 세상으로 나간다. 트윈터널은 신비한 해저 세계를 탐험하는 '해저터널'과 빛의 향연이 펼쳐지는 '빛의 터널' 두 구간으로 나뉘어 있고 아쿠아 빌리지, 피시솔저, 아쿠아 캐슬, 차원의 길, 별빛마을, 드래곤 캐니언, 페스티벌, 트윈카페 등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프린세스 캐슬, 밤하늘 우주 드래곤, 사랑의 약속, 요정의 숲, 카툰갤러리, 사계절 카페, 꽃 터널 포토 존, 용궁 캐슬, 물고기나라, 바닷속 친구, 빛의 요정터널 등의 이름도 언급된다. 정신을 놓고 못 본 것인지 안내가 없는 것인지 혹은 종종 테마가 바뀌는 건지 모르겠지만 몇몇 구간의 명칭은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곳곳에서 만나는 캐릭터들도 이름을 몰라 인사도 못 건넸다. 뭐 어떤가. 많이 미소 짓고 많이 뭉클했으니 그만이다. 시간의 무게도 질료의 무게도 잊는다. 꿈같은 빛 속에서 계절도 잊고 시간도 잊고 추위와 더위도 잊고 진세도 잊는다. KTX 열차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다. 잠시 후 또 다른 기차가 쌩하니 지나간다. 아마도 화물열차겠지. 또 잠시 후 색색의 컨테이너를 줄줄이 매단 기차가 지나간다. 그리고 젊은 연인이 팔짱도 끼지 않은 채 트윈터널을 향해 걸어간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대구부산고속도로 삼랑진IC로 나간다. 톨게이트 앞 삼거리에서 밀양방향으로 우회전해 직진, 정면에 신세계푸드 건물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트윈터널 이정표 따라 우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고개를 넘으면 트윈터널 공영주차장이 자리한다. 주차는 무료다. 트윈터널 입장료는 어른 8천원, 청소년 6천원, 어린이 5천원이며, 체험료는 별도다. 연중무휴이며 운영 시간은 평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주말과 공휴일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8시까지다.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할 수 있다.밀양트윈터널의 입구 가림막을 헤치고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뭉클해진다. 엄청난 빛의 세상이다. 은하수 속이다. 1억 개의 LED빛이 온 몸을 감싼다.자줏빛 세상에서 푸른빛의 세상으로 이어진다. 수천 개의 유성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어느 사막에서 유성비를 맞는 기분이다.더욱 깊은 물속으로 들어서면 바다거북과 고래가 노는 해저계곡이 길게 이어진다.해저계곡을 빠져나가면 용궁과 같은 성이 나타난다. 갑자기 수많은 물방울들이 뿜어져 나온다. 용궁 앞에서 하행성 터널로 넘어간다.하트터널 혹은 사랑의 터널. 사람들이 남겨놓은 각종 소원과 사랑의 맹세로 빼곡하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었다.하트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은 황금빛 밭이다. 붉고 푸르고 노란 단풍나무가 있으니 벼라고 하자. 가을이다.
2024.02.02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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