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흑백 TV
하루는 작은놈이 물었다. “엄마, 엄마 어릴 때 TV가 흑백이었다고 했지, 그치?” “응, 그랬지.” “그럼 정말 하늘이 회색이었어? 나무는? 친구는? 안 답답했어? 어떻게 살았어?” 맙소사, 지금 이 아이는 모니터가 흑백이면 세상도 흑백인 줄 아는 거다! 세상이 무채색이니 그걸 찍은 화면 역시 흑백이라는 이 당당한 논리.
하하, 미안하지만 세상은 지금보다 찬란했다. 무엇보다 하늘이 파랬다. 황사나 미세먼지 없이 눈이 시리도록 파란색을 맘껏 누렸지. 빨강과 노랑, 또 초록은 어떻고. 티브이는 ‘흑백’이라도 세상만은 선명한 ‘컬러’였다.
정작 흑백 세상은 여기에 있다. 로이스 로리의 소설 ‘기억전달자’에 나오는 마을. 이 마을 사람들은 아예 색이 뭔지 모른다. 세상은 그대로다. 언제나처럼 다양한 색깔을 품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색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들 눈엔 모든 것이 회색의 변조일 뿐이다. 그러다가 조너스라는 아이가 사과에서 처음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알아차린다. 그것이 ‘빨강’이라는 ‘색’이라고, 유일하게 색을 기억하는 ‘기억전달자’가 가르쳐준다. 차차 조너스는 숲에서 초록색을, 하늘에선 파란색을 보게 된다. 알고 봤더니 세상은 컬러풀했다.
1994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복원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쑥덕댔다. 여태까지 보아온 어두운 저채도의 ‘천지창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450여년 묵은 때를 벗겨내자 구약성서 속 군상은 화려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밝고 다채로운 색의 향연 같았다. 이를 어쩌나, 이미 어두침침한 갈색의 색조가 미켈란젤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랜데. 본보기 삼아 따라한 후배 화가들이 부지기순데.
방금 창조해 따끈따끈한 황금빛 해를, 때 묻은 겨자색이라 믿고 살았을 그들이 안타깝다. 조물주의 펄럭이는 분홍색 옷자락을, 천사의 눈부신 주홍색 의상을, 칙칙한 정체불명의 색으로 알았을 그들이 안됐다. 딱하긴 조너스의 마을 사람들만 하랴. 회색 사과가 맛나 보인다며 덥석 베어 무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그런데 이러는 나를 도리어 누군가가 동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쯧쯧, 고작 무지개 색상 말곤 보이는 게 없다니! 자외선 색을 못 보니 저렇게 나다니는구먼. 전자파 색도 안 보이는 모양일세. 휴대폰 끼고 사는 걸 보니. 그런데도 잘난 체하는 게 꼭 흑백 TV 같으이.”
2016.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