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8> 거북 바위에 살아 숨 쉬는 충절, 충재 권벌(봉화)
◆ Story Briefing충재 권벌(齋 權, 1478~1548)은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이며 학자다. 그의 인생은 두 번의 사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로, 조광조의 개혁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이후 14년간을 봉화의 닭실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 당시에 그가 지은 정자 청암정(靑巖亭)은 명승 60호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아름답다. 1533년 정치일선으로 복귀했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때 다시 해를 입었다. 평안도 삭주(朔州)에 유배된 것이다. 그곳에서 1548년(명종 3) 71세로 별세했다. 선조 초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에 제정(祭亭)되었다. 닭실마을은 안동권씨 후손들이 400여 년간 대를 이어 살면서 봉화 제일의 반촌(班村)이 되었다. 평생 그가 탐독했다는 근사록(近思錄, 보물 262호)과, 그가 쓴 충재일기(보물 261호)는 ‘충재박물관(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 보관돼 있다.충재 권벌은 재직 당시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고,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다. 중종 때에는 조광조·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8편은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을 떨친 충재 권벌에 대한 이야기다.
#1. 기묘사화(己卯士禍) 그리고 닭실 청암정(靑巖亭)
1533년(중종 28) 6월15일 해거름이었다. 청암정(靑巖亭) 돌다리 위로, 물기를 잔뜩 머금은 향나무 향이 무심히 번져 내렸다. 충재의 가슴 속에 만감이 오고 갔다. 늦은 소나기가 막 그치자마자 숨이 턱에 받쳐 도착한 소식 때문이었다.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에 임명한다는 어명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당시 정적에 의해 내쳐진 지 14년 만의 부름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아홉 달 전, 충재 권벌은 예조참판으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이미 만연해진 사화의 조짐을 파악하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로 나갔다. 그럼에도 그는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조광조 등 기호사림파 중심으로 추진된 개혁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정적들은 충재를 일컬어 조광조 무리에게 뇌화부동하여 일을 그르친 것이 많은 자라고 비난했다. 파직당한 충재는 봉화의 닭실마을로 낙향했다. 닭실은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서 경주의 양동(良洞), 안동의 천전(川前), 풍산의 하회(河回)와 더불어 삼남(三南)의 4대 길지라고 평한 곳이다. 그 닭실에 충재의 외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선산이 있었다. 충재는 담담했다. 정치란, 파당이란, 그런 법이었다. 그는 청암정을 짓고 경학(經學)에 몰두하며,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청암정은 영남 최고의 정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귀한 정자다.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춘양목(春陽木, 금강송)으로 건축했다. 암반 주위를 연못으로 둘렀고 버드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향나무 등의 나무를 심어 놓았다. 처음 지을 때만 해도 청암정은 온돌방이었고, 연못 또한 없었다. 그런데 방에 불만 넣으면 바위에서 우는 소리가 나는 일이 반복됐다. 그 괴이한 이야기를 듣고 정자를 둘러본 스님이 일렀다. “이 바위는 곧 거북입니다. 그러니 방에다 불을 지피는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니 울 밖예요.”믿건 믿지 못하건 끔찍한 해석이었다. 하여 아궁이를 막고 바위 주변을 파 못을 만들어 거북에게 물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암정에서 가장 운치 있는 것은 정자 바로 옆에 놓인 다리다. 별채 뜰과 정자를 오갈 수 있도록 배려한 낮은 돌다리다. 계절과 날씨를 따라 나무 그늘이며, 꽃향기며, 새소리며, 갖가지가 다리를 품는다. 그리고 정자의 마루 위로 올라서면 역대 명현들의 글이 현판으로 늘어서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70), 관원 박계현(灌園 朴啓賢, 1524~80),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86),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 1674~1756), 번암 채제공(樊庵 蔡濟恭, 1720~99) 등의 솜씨다. 게다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72)의 작품인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眉 許穆, 1595~1682)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 정자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충재가 지낸 청암정에서의 시간이 서정적으로 녹아 있는 시 한 편이 있다. 퇴계 이황이 지었다. 퇴계는 충재를 존경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먼 인척간이기도 했다. 충재의 증조부가 퇴계 외조부였던 것이다.‘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였으니/ 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물굽이는 고리처럼 둘러있어라/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고/ 맑은 연못에 연꽃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구나/ 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하고/ 벼슬길 연모하지 않으니 마음에 걸림일랑 없어라/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니 그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려’.#2. 대왕대비와의 대립, 그리고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년) 8월22일 한낮이었다. 경복궁(景福宮) 후원, 충순당(忠順堂) 안의 공기가 팽팽했다. “이는 윤임 때문이다. 윤임은 지금 큰일을 저지를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화가 이미 박두했는데 어찌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발 안쪽에 앉은 대왕대비(문정왕후 文定王后, 1501~65)의 날선 목소리가 대신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11세의 어린 임금(명종 明宗, 1534~67)은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수렴청정의 때였다. 실질적인 임금은 대왕대비였다. 대왕대비는 어떻게든 윤임을 제거하려는 작정이었다. 윤임은 대윤의 우두머리였다. 당시 소윤(小尹)과 대윤(大尹)의 갈등의 골은 깊디깊었다. 소윤이란 중종(中宗, 1488~1544)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 1509~65)의 정당을 이름이다. 대윤은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의 아우 윤임(尹任, 1487~1545)의 정당을 가리킴이었다. 문정왕후는 현 임금인 명종의 어머니였고, 장경왕후는 전 임금인 인종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여인은 모두 파평윤씨였다. 따라서 소윤, 대윤으로 구별되었다. 중종의 두 아내와 두 아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외척 간의 권력 쟁탈전이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소윤으로 기운 터였다. 살아있는 사람은 문정왕후와 명종이었다. 죽은 자(장경왕후와 인종)에겐 힘이 없었고, 대윤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작은 죄로도 큰 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없던 죄도 생길 판이었다. 대신들의 의견이 충순당 안을 들끓었다. 그때 원상(院相) 권벌이 나섰다. 원상은 국왕의 국정 수행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경우, 국정을 의논하기 위해 재상들로 구성한 임시관직이었다. “우선,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는 설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소신은 모르겠습니다. 또한 윤임에게 음험하고 사특한 마음이 있었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만, 형벌이 지나치면 인심이 화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치를 처음 펼 때에는 모름지기 인심을 얻어야지 형벌의 위협으로 진정시켜서는 아니됩니다. 위에서는 공명정대하게 마음을 쓰셔야 합니다. 조정이 아뢴 대로 사실만을 따르셔야지 의심하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대왕대비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나온 직간이었다. 나아가 공명정대하게 국사를 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발이 가리고 있어 대왕대비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대신들로서는 다행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얼굴은 살벌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결국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는 일어나고야 말았다.충재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죄없는 대신을 귀양 보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는 대의에 몰두하고 그 뜻을 외칠 뿐이었다. 매서운 내용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놀라 충고했다.“이렇게 하면 화변(禍變)을 더욱 일으키게 할 뿐입니다. 몇 부분은 지우는 것이 낫겠습니다.”이에 충재는 탄식했다. “지워버리느니 차라리 아뢰지 않는 것이 옳소.”
하지만 주변의 만류가 거듭되었고, 충재는 결국 문제의 원고를 조금 고쳐 상소하는 것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문정왕후는 노여워했고, 권벌은 귀양을 면치 못했다. 71세의 고령으로 평안도 삭주(朔州)에 유배된 충재는 결국 나이와 북방의 험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1548년(명종 3) 그곳에서 운명했다. 큰아들인 청암 권동보(靑巖 權東輔)에게 남긴 글이 거의 유언이 됐다.‘옛날 중국의 범충선(范忠宣, 송나라 시대의 문인)은 나이가 70인데도 만리 길 유배를 갔다. 네 아비의 죄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국은을 저버려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검소하게 장례 지냄이 옳을 것이다.’운구가 행해졌던 천리 길 동안 백성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 닭실로 돌아온 운구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힘을 보탰으면, 또 그 상여를 붙들고 얼마나 애통해했으면, 그때 상여가 지나갔던 마을 앞 고개 이름이 부여현(扶輿峴)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충재는 문정왕후 사후 2년 뒤인 1567년(명종 21)에 신원돼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고, 1571년(선조 4)에는 ‘충정공(忠定公)’ 시호를 하사했다.
▨참고문헌=‘조선왕조실록’
글=김진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공동기획:Pride GyeongBuk
◆충재 권벌과 근사록>>> 주자학 입문서 늘 갖고 다니면서 탐독
충재 권벌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근사록(近思錄)’이다. 근사록은 주자가 편찬한 책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어 주자학 입문서이자 마음을 수련하는 교과서였다. 충재의 근사록 탐독은 임금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중종이 연회에서 누군가 흘린 근사록을 보고 단번에 “아마 권벌의 옷소매에서 빠졌을 것이다. 돌려주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 때 충재가 늘 가지고 다니던 근사록은 고려 공민왕 9년(1370)에 간행된 목판본이었는데, 훗날 더 늘었다. 먼저 중종이 다른 판본을 충재에게 직접 하사했다. 귀한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9권3책이었다. ‘초주갑인자’라 함은 세종(世宗, 1397~1450)조에 처음 만들어진 동활자(銅活字)로 우리나라 활자본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그리고 영조(英祖, 1694~1776)도 충재의 이야기를 안 후 감동받아 후손(6세손 권만, 權萬)에게 또 하사했다.
‘무인자본(戊寅字本)’ 14권4책이다. ‘무인자’는 세조(世祖, 1417~1468) 때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로, 특정한 책을 찍어내기 위하여 주성되었기 때문에 드물게 전해지고 있어 매우 희귀한 인쇄문화자료이다. 이 책들은 보물262호와 보물896호로 지정되어 충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충재 권벌이 기묘사화로 파직당한 후 봉화 닭실마을에 내려와 지은 청암정. 충재는 이곳에서 14년간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청암정은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지은 정자로, 암반 주위에 연못을 만들어 운치를 더했다.청암정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은 정자 바로 옆에 놓인 돌다리와 연못이다. 왼쪽에 보이는 한옥은 충재 권벌이 평소에 기거했던 별채다. 수면 위로 엷게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충재박물관. 근사록, 충재일기 등 충재 권벌의 유품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김진규충재 권벌이 평생 탐독한 근사록. 근사록은 조선 선비들에게 있어 주자학의 입문서나 다름 없었다. 권벌은 평소에도 옷소매에 근사록을 지니고 다니며 마음의 교과서로 삼았다고 한다. 봉화읍 충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3.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