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정신, 청도에서 꽃피우다 .2] '원광에게 길을 묻다' 세속오계 스토리

  • 류혜숙
  • |
  • 입력 2020-11-11   |  발행일 2020-11-11 제13면   |  수정 2020-11-27
가슬갑사 머물던 원광이 내린 '세속오계' 삼국통일의 구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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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산 서쪽 자락 개살피 계곡 입구에 조성된 세속오계 조형물. 개살피 계곡은 '가슬갑사 옆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진평왕 22년인 600년에 수나라에서 돌아와 청도 가슬갑사에 머물고 있던 원광법사는 당시 그를 찾아온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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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리 마을 입구에 자리한 '삼국통일의 초석 화랑정신의 발상지 청도' 조형물.

물소리 장장하다. 숲은 크고 깊어 동굴처럼 서늘하다. 운문사 일원의 사람들은 수많은 골짜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고 입을 모은다. 문복산 서쪽 자락의 '개살피 계곡'이다. 개살피 계곡은 '가슬갑사 옆의 계곡'이라는 뜻을 가졌다. 계곡 입구에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새긴 비가 있다. 두 명의 화랑이 비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 두 명의 화랑은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인 귀산과 추항이다. 둘은 맹우(盟友)였다. 그들에게는 교양과 인격을 갖춘 인물이 되어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들을 이끌어 줄 스승을 갈망했다. 어느 날 그들은 평생의 교훈으로 삼을 만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청도의 이 계곡으로 들어왔다.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곧 '가슬갑사터 1.8㎞, 35분'이라 쓰인 이정표를 지난다.

#1. 화랑, 원광에게 길을 묻다

계곡을 끼고 완만한 오르막을 오른다. 강돌이 맑게 비치는 얕은 계류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만드는 다채로운 소와 폭포들에 거듭 마음을 빼앗긴다. 두 그루 소나무가 하나 된 일명 '문복산 연리목'의 신비로운 모습도 만난다. 너덜지대를 지난다. 10여분쯤 지났을까, 황량한 터가 나타난다. 길섶에 무릎 높이의 표지석이 서 있다. 작고 하얀 몸에는 '가슬갑사유적지'라고 새겨져 있다. 절터 앞 계곡은 더 없이 아름답다.

화랑 귀산과 추항이 이 계곡으로 들어 온 그 때, 가슬갑사에는 진평왕 22년인 600년에 수나라에서 돌아온 원광법사가 머물고 있었다. 원광은 25년 넘게 수나라에서 유학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서로 기뻐했고 진평왕과 신하들은 그를 성인처럼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원광은 성품이 겸허하고 여유로웠으며 정이 많아 모든 사람에게 두루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띠고 성난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니 온 나라가 받들어 원광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맡기고 도의로서 교화하는 방법을 물었다.


가르침 구하러 나선 화랑 귀산·추항
개살피 계곡 가슬갑사서 원광 만나
큰 깨달음 얻고 평생동안 실천 맹세

602년 백제전투서 임전무퇴 본보기
전쟁 승리로 이끌고 부상 입어 전사
세속오계 점차 신라인 계율 자리잡아



원광법사를 찾은 귀산과 추항은 "저희는 몽매하고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한 말씀 내려주시면 평생의 교훈으로 삼겠습니다"라고 했다. 원광은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어서 그 조항이 10가지나 되지만, 자네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이 되었으니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대신 '세속의 5계'가 있으니, 첫째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둘째는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셋째는 교우이신(交友以信) 벗을 사귀되 믿음이 있어야 하며, 넷째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살생유택(殺生有擇)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려서 행하라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가 세속에서의 좋은 계율이라 할 수 있다. 자네들은 이것을 실행하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귀산과 추항은 거듭 물었다. "다른 것은 이미 알겠습니다만, 이른바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려서 행하라는 것을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원광은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몸을 바르게 하고 경건하게 보내야 하는 6재일(六齋日)과 봄·여름철의 번식기에는 산 것을 죽이지 않는데 이것이 때를 가린다는 뜻이다. 생업에 필요한 가축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소·닭·개를 이르는 것이요, 작은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은 고기가 한 점도 되지 않음을 이르는 것이니 불필요한 살생을 가린다는 뜻이다. 결국 살아 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꼭 필요한 만큼만 행하라는 것이다." 크게 깨달은 귀산과 추항은 "지금 이후부터 받들어 두루 행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세속오계는 바로 청도 가슬갑사에서 내려졌고, 이는 화랑정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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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대웅보전 뒤뜰에 위치한 화랑오계비에는 원광법사가 내린 세속오계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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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법사가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하는 모습을 그린 운문사 대웅보전의 벽화.

#2. 길을 행하다

원광의 가르침을 받은 2년 뒤인 602년, 귀산과 추항은 백제와의 전투에 나선다. 남원 운봉에서의 아막성(阿莫城) 전투다.

백제 무왕은 남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남원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요충지인 아막성을 포위했다. 이에 신라 진평왕은 포위된 아막성을 구하기 위해 수천의 기병을 급파했다. 신라군에는 귀산의 아버지 무은(武殷)이 있었고 귀산과 추항도 소감(少監)이라는 하위 무관으로 전선에 나갔다. 신라군은 백제군을 격퇴시키고 아막성을 탈환한 뒤 역공을 단행했다. 아막성에서 남원 방향으로 진격한 것이다. 신라군이 몰려오자 백제 무왕은 4만 병력으로 대항했고,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그 가운데 천산성(泉山城) 부근의 전투가 특히 치열했다. 그러다 백제의 유인술에 걸린 신라군이 늪지까지 들어가게 된다. 철수를 단행하려던 신라군은 백제군의 역습을 받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때 귀산의 아버지 무은이 백제군에게 사로잡힐 위기에 처했다.

귀산은 큰소리로 외치며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있어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날까 보냐!" 하며 적 수십 명을 격살하였고, 틈을 타 자신의 말에 아버지 무은을 태워 피신시켰다. 곧이어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니 모든 군사들이 이 광경에 용기를 얻어 적과 싸웠다.

귀산과 추항은 원광에게서 받은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한 것이었다. 그들의 전투는 물러섬이 없는 것이었고, 부모를 섬기는 것이었고, 또한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 것이었으며 이 모든 일을 믿음 깊은 벗과 함께 행한 것이었다. 결국 신라는 백제의 4만 대군에 맞서 승리했다. 들판에는 적의 시체가 가득했고 한 필의 말도 한 채의 수레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귀산과 추항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도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왕은 신하들과 함께 맞이하여 시신 앞에 나아가 통곡했고 예(禮)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그리고 귀산에게는 나마(奈麻), 추항에게는 대사(大舍)의 관직을 추증했다.

이후 귀산과 추항은 화랑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속오계는 화랑도의 윤리덕목으로 이해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라인이 지켜야 할 대표적 계율로 자리매김했다.

선덕왕 11년인 642년 백제와의 대야성(大耶城) 전투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한 죽죽(竹竹)과 16세의 어린 나이에 출전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해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은 관창(官昌)의 예는 세속오계의 정신이 신라 사회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세속오계의 가르침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정신적 구심점이었고, 그 뿌리는 청도에 있다. 청도를 화랑정신의 발상지로 일컫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정토교와 원광세속오계의 고찰, 한국사연구, 신현숙, 한국사연구회, 1988. 원광법사와 세속오계에 대한 신고찰, 신라문화, 이종학,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90. 신라사상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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