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가기 딱 좋은 청정 1번지 영양] <8> 상계폭포와 하계폭포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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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02   |  발행일 2020-11-02 제11면   |  수정 2020-11-27
문상천 따라 아담한 폭포…바위·소나무 어우러져 청정한 가을 정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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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폭포의 높이는 3m 안팎으로 아담하고, 양쪽으로 석벽을 이룬 바위는 용소를 안은 듯 펼쳐져 있다. 지난여름 장마로 폭포 아래의 용소는 흙빛이지만 아랑곳없이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는 명랑하다.

지난여름 장마는 거세었다. 결국 지나가기는 했지만 무겁고도 길게 느껴지는 장마 동안 골짜기는 언제나 울음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온몸으로 고스란히 비바람을 견디며 여러 날을 지내는 것은 고행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제 소나무의 초록이 더욱 짙어지고 잎 가진 수목들이 갈색과 노랑, 그리고 이따금 눈이 번쩍 뜨이는 담홍색으로 변하는 계절. 조용히 흘러가는 지상의 시간에 싸인 골짜기는 지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천천히 그리고 끈기있게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를 가르며 떨어지는 폭포 아래의 용소(龍沼)는 흙빛이었지만 아랑곳없이 선 물줄기는 명랑한 음성을 유지한 채 금강석처럼 차갑게 빛났다.

#1. 문상천 계곡의 계리

일월에서 수비로 드는 한티재를 오르다가 왼쪽으로 스며드는 산기슭에 큰 계곡이 있다. 일월산의 동쪽 기슭이고 수비면을 동해지역과 내륙지역으로 가르는 낙동정맥의 골짜기다. 여기서 문상천(門上川)이 시작된다. 천은 내륙 쪽으로 흘러 일월면에서 반변천에 합류한다. 이 천을 따라 계리(桂里)가 들어서 있다.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가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동구 길에 들어서면 촌락이 띄엄띄엄 자리한 넓은 골짜기가 열린다. 천년 묵은 뱀이 착한 일을 많이 해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용화곡(龍化谷)을 곁가지로 보내고 들 가운데에 자리한 계1리 마을회관을 지난다. 계1리의 중심은 갯골(桂谷·溪谷)이라 한다. 예부터 계수나무의 꽃이 떨어져 있는 형국이라 곗골이라 했다는데 본래는 갯마을이었다고 전한다.

넓고 평탄하던 골짜기가 조금씩 기울어질 즈음 계2리 마을 숲을 지난다. 솔숲이다. 그리 무성하지는 않지만 윤기 감도는 주황색 수피가 싱싱한 생명력을 뽐낸다. 보통 계리를 '사시사철 푸른 나무가 울창하다'고 표현한다. 소나무가 장한 낙동정맥에 감싸여 있어서 일 게다. 옛날에는 소나무를 태워 모은 그을음인 송연(松煙)으로 먹을 만들었다고 한다. 소나무 연기로 만든 먹이라니 너무 멋지지 않나. 송연을 모아 소가죽을 삶아 만든 아교를 섞어 모양을 만들고 '청석'에 올려 연마했다고 한다. 포장을 한 뒤에는 생산지를 나타내는 도장을 찍었는데 계리 먹에는 소나무 그림이 찍혀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이름을 걸고 중국까지도 수출되었던 '계동 먹'은 명실상부한 이 지역의 명품이었다. 주위 산들을 검푸르게 기어오르는 솔숲들이 한결 늠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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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법사는 시원한 대지에 법당과 요사채, 나한전, 산신각 등이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교회와 계2리 마을회관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차츰 좁장해진 밭들이 이내 사라지고 관법사 표지석이 도로 옆 샛길을 가리킨다. 문상천을 따라 절집까지 이어지는 짧은 길이지만 그윽하게 속삭이는 듯한 정취가 있다. 샛길을 외면하고 도로를 조금 더 오르면 극락교 건너 관법사에 닿을 수 있다. 20년 정도 되었다는 절집은 시원한 대지에 법당과 요사채, 나한전, 산신각 등이 편안하게 자리 잡았고 무서운 얼굴의 역사상, 십이지신상, 관음상, 돌하르방, 사자상, 두꺼비, 포대화상 등 다양한 석상들이 경내를 지키고 있다. 정교하게 쌓은 원추형 돌탑이 늘어서 있는 오솔길을 따라 간다.

용소 안은 듯 폭포 양쪽 거대한 석벽
상계폭포 바위엔 '居然坮' 각자 남아
신행가던 두 일행 다투다 추락 전설도
2010년 천연기념물 산양 카메라 잡혀
인근 계리는 남자현 독립지사 출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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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폭포는 하계폭포보다 규모가 조금 더 크고 양쪽 거대한 바위 사이로 슬며시 비껴 흐르는 모양이 은근한 멋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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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법사에 조성한 출렁다리 밑으로 난 좁고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사이에서 떨어지는 하계폭포와 마주한다.

#2. 하계폭포와 상계폭포

물줄기의 낙하 소리가 멀리 않은 곳에서 들려온다. 출렁다리를 지난다. 절에서 만들어 놓았다는 다리의 이름은 '용왕 가는 길'로 안전상의 문제로 통제되어 있다. 다리 밑으로 난 좁고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사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마주한다. 하계폭포다. 폭포의 높이는 3m 안팎으로 아담하다. 양쪽으로 석벽을 이룬 바위는 용소를 안은 듯 펼쳐져 있다. 원래 용소는 동그란 모양에 위압적일 만큼 검푸른 물빛을 가졌다. 지금 용소는 흙빛이고 가장자리 일부에는 바닥돌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용소로부터 가느다란 물줄기가 다시 전진하며 하류에 2단의 짧은 폭포를 떨군다. 1987년까지만 해도 하계폭포의 석벽에는 이상향을 나타내는 '계은동천(桂隱洞天)'이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100여 년 전 즈음 계2리에 살던 정맹섭(鄭孟燮)이라는 사람이 쌀 한 말을 주고 새긴 것이다. 바위는 태풍 셀마로 유실되었다. 자연은 변하고 또 한결같다.

극락교 앞에서 길을 따라 오른다. 300m 정도 앞에 길이 나누어지는데 오른쪽 다리를 건너지 말고 정면의 좁은 길로 계곡을 따라 가야 한다. 그러면 곧 상계폭포가 나타난다. 하계폭포보다 규모가 조금 더 크고 양쪽 거대한 바위 사이로 슬며시 비껴 흐르는 모양이 은근한 멋을 풍긴다. 오른쪽 바위에는 거연대(居然坮)라는 각자도 보인다. 이 또한 정맹섭이 새긴 것이라 한다. 주변 바위와 소나무, 그리고 무르익어가는 가을이 절경이다. 청정하고 청정하다. 2010년에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이자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는 산양이 상계폭포 인근 무인카메라에 찍히기도 했다 한다.

상계와 하계 폭포에는 신행(新行)을 가던 두 일행이 서로 양보하지 못해 결국 모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옛날에 화려하게 치장한 혼인 가마가 폭포 아래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용소에 가까워지면서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졌을 때 마침 똑같은 차림새의 가마행렬이 맞은편 길로 막 들어섰다. "어이, 우리가 먼저 들어섰으니 잠시 기다리게!" "아니, 우리가 먼저 들어섰는데 무슨 말인가!" 두 행렬이 뒤에서 떠밀듯 걸음을 멈추지 않으니 오도 가도 못하게 중간에서 딱 마주치게 되었단다. 사람들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지면서 우르르 밀고 나아가다 그만 사람도 말도 가마도 중심을 잃고 하나둘씩 용소로 떨어져 버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이 용소가 크게 물결치며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그 많던 사람이 한순간에 물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로 비만 오면 이곳 용소 깊은 곳에서 신부의 놋요강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상계일까, 하계일까? 가만히 귀 기울여 보지만 물소리만이 맑다.

상계폭포 위쪽은 과거 절터(寺谷)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500년 전에 황룡사(黃龍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저수지가 들어서 있다. 수변 길 끝에는 더욱 깊은 골짜기가 낙동정맥의 마루금을 향해 올라간다. 왼쪽으로 뻗은 골은 신배나무골, 가운데로 쭉 뻗어 오르는 골은 용터진골이다. 용터진골은 과거 골 안에 용이 놀던 커다란 호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산줄기가 터져 나가면서 놀던 용이 그만 승천을 못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어느 골짜기로 들던 몇 발자국 만에 시리도록 맑은 물과 눈부신 숲에 안기게 된다. 심산유곡이다. 계곡의 너덜에서 덩그러니 놓인 청석을 발견한다면 쓰윽 쓰다듬어 볼 일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지명유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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