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11] 애국지사 수봉 문영박(1880~1930)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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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15   |  발행일 2020-10-15 제9면   |  수정 2020-12-01
日帝 감시 피해 10여년간 臨政자금 지원한 독립운동 숨은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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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세거지인 인흥마을은 주택 9가구와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로 구성돼 있다. 원래 인흥사가 있던 곳에 인산재 문경호가 터를 잡아 세거지를 형성하게 됐다.

대구 달성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가문이 있다. 바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세거 중인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이다. 남평문씨 문중서고인 '인수문고(仁壽文庫)'에는 고서만 8천500여 책이 보존돼 있다. 이는 영남학파의 총본산인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이 보유하고 있는 장서보다 두 배가량 많은 양이다. 남평문씨 가문이 이렇게 많은 도서를 보유하게 된 데에는 수봉(壽峰) 문영박(文永樸)의 영향이 크다. 그는 부친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과 함께 인수문고의 전신인 만권당을 세우고 도서를 수집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의 발로로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교육을 통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조직이나 단체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10여 년간 소리 소문 없이 자금을 후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상하이 임시정부는 추조문을 보내 그의 업적을 치하할 정도였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인물 11편'에서는 수봉 문영박의 삶에 대해 다룬다.

◆인흥사 터에 세거지를 세우다

남평문씨가 달성 화원 본리리에 세거지를 형성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대구 입향조인 문세근(文世根)의 9대손 문경호(文敬鎬·1818~1874년)가 마을 터를 닦았다. 풍수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인흥사(仁興寺)가 있던 자리를 새 보금자리로 택했다. 일연 선사(一然 禪師)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인흥사 터를 후손들이 대대손손 번창할 '길지(吉地)'라고 판단한 것이다.

인흥사는 창건 연대와 창시자는 알려진 바 없으나 일연 선사가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중수해 인흥사로 개칭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돼 폐사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인흥마을 주변에는 아직도 인흥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려정(高麗井)이라는 우물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3층 석탑도 건재하다.


남평 문씨 세거지 인흥마을서 출생
광거당·만권당 매개로 폭넓은 교유
가족 모르게 비밀리 독립자금 후원
1930년 사망하자 임정 추조문 보내
정부 건국포장·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문경호의 바람대로 남평문씨는 인흥마을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번성했다. 특히 문경호의 손자인 문봉성 대에 이르러 막대한 부를 쌓았다. 문봉성은 학문은 물론 경제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만석꾼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그가 소유한 토지는 160여만㎡(50만평)에 달했다고 한다.

문봉성은 인흥 세거지를 개척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공사에 직접 참여해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후학을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1910년 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한 교육장소로 지었던 용호재(龍湖齋)를 헐고 광거당(廣居堂)을 조성한 뒤 서고를 뒀다. 광거당은 공부를 하고 싶은 선비에게 언제나 열려 있었다. 문중 사람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누구든지 광거당에서 머물며 수학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당시 인흥마을은 유학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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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인흥마을에 위치한 광거당(위)과 수백당. 광거당은 일제 강점기 국내의 수많은 유학자들이 모여 강론하고 공부하던 문화의 산실이었다. 문영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수백당은 현재 손님을 맞는 사랑채로 활용되고 있다.

◆독립운동 역사의 숨은 영웅

광거당을 세우게 된 배경에는 차남인 문영박의 역할이 컸다. 1880년 8월3일 달성군 화원면 인흥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인품이 남달랐다고 한다. 자는 장지(章之), 호는 수봉이다. 치주(恥宙) 손정은(孫廷誾)과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에게 수학해 학문에도 성취를 이뤘다.

그는 일찍이 견문을 넓히는데 치중했다. 전국 곳곳을 둘러보며 많은 학자들과 교유했다. 특히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는 막역한 사이로 왕래가 잦았다. 조긍섭은 남명학 계승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또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이정(彛庭) 변정상(卞鼎相),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 백괴(百愧) 우하구(禹夏九), 소암(素巖) 김현동(金鉉東) 등 당대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도 어울려 지냈다.

문영박이 수많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광거당과 만권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거당은 당시 학자와 문인들의 교류 장으로 활용됐다. 만권당에는 중국과 전국 각지에서 구한 도서들이 소장돼 있어 이를 보기 위해 많은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광거당은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문영박이 광거당을 세운 것은 시대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터였다. 이에 문영박은 여러 인물과 뜻을 함께하고, 인재를 양성해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광거당을 짓고 수많은 양서를 확보한 것이다. 또한 후손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문영박은 조긍섭은 물론 중국에 망명 중이던 사학자 창강 김택영 등과 논의해 자료를 선별하고 책을 확보했다고 한다.

광거당의 이름에서도 그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광거'는 맹자(孟子) 제2장의 대장부론에 나오는 '거천하지광거'란 말을 차용했다. 맹자가 말하는 대장부는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리를 행하고,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에도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않으며 위세와 무력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일제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고 백성과 함께 도리를 행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문영박은 독립운동에도 동참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10여 년간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송달했다. 임시정부 요원을 통해 보내기도 하고, 중국에서 책을 구입하는 방법으로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수문고에 보존된 책들은 인재 양성의 밑거름이 된 것은 물론 독립운동 자금의 통로로도 활용된 셈이다.

문영박의 독립운동은 철저히 비밀리에 붙여졌다. 가족들조차 그의 활동을 전혀 몰랐을 정도다. 1929년 2월27일 고등계 형사들이 4시간 동안 가택 수색을 한 뒤 그를 체포했으나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석방하기도 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그는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독립을 지켜보지 못하고 1930년 12월18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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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후은공파 문중 총무인 문석기씨가 인수문고에 보관돼 있는 서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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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6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영박 추조문(위)과 문원만 특발문.

◆32년 만에 전달된 임시정부의 편지

1963년 경남 창원의 한 민가에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들이 발견됐다. 집수리를 위해 뜯어낸 천장에서 찾아낸 독립역사의 숨겨진 조각이었다. 문서들은 빛바랜 보자기 속에 쌓여 수십 년간 고이 간직돼 있었다. 보자기의 주인은 창원 출신 독립지사 이교재(李敎載)였다. 임시정부 경상남북도 상주 대표였던 그는 1931년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 체포됐고, 1933년 고문 후유증으로 출소 뒤 1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보자기는 그가 체포되기 전 발각되지 않게 자신의 집 천장에 숨겨 놓은 것이었다. 다급한 상황이었던 만큼 다른 이에게 보자기의 존재를 알리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서류 중에는 수신처가 대구 달성 인흥마을인 문서가 두 점 포함됐다. 1930년 세상을 떠난 문영박에 대한 추조문과 특발문이었다. 추조문은 분홍빛이 감도는 비단에 16×20.8㎝, 특발문은 22.3×18.7㎝ 크기로 제작됐다. 추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문영박의 유족에게 조의를 표명한 문서이고, 특발은 그의 아들인 원만(元萬)에게 독립활동을 위한 지원금을 요청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추조문에선 문영박을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 칭했는데 이는 '대한국 역사의 주인이 되는 어른'이란 뜻이다. 임시정부가 그의 업적을 얼마나 높이 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두 문서는 달성 인흥마을로 전달됐다. 발송된 지 32년 만에 수신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편지가 전해지기 전까지 후손들은 그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추조문과 특발문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았다. 당시 임시정부의 궁핍한 사정과 주변 정세에 대한 기대감, 광복을 위한 의지를 엿볼 수 있어 지난 2월6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74-2호로 지정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해설사
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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