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정신, 청도에서 꽃피우다 .1] 삼국통일의 요충지 '오갑사'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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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04   |  발행일 2020-11-04 제22면   |  수정 2020-11-27
신라의 가야 진출 최전방 운문…다섯개 '갑사' 세워 교육도량으로

화랑도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한 핵심동력이다. 그 핵심동력의 중심이 된 화랑정신의 발상지가 바로 경북 청도다. 원광법사는 운문령 계곡 도량 청도 가슬갑사에서 세속오계를 설파했다. 세속오계는 곧 화랑정신의 핵심이었고 통일 리더십으로 승화됐다. 뿐만 아니다. 청도 곳곳에는 화랑의 자취와 동선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고, 그들의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영남일보는 '화랑정신, 청도에서 꽃피우다' 시리즈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시리즈는 청도에 뿌리 내린 화랑정신과 화랑의 발자취를 찾아 소개한다. 청도를 무대로 펼쳐진 흡인력 있는 화랑 이야기도 함께 곁들인다. 1편은 신라의 삼국통일 요충지였던 청도의 오갑사에 대한 역사와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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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는 청도에 존재했던 오갑사 중 하나인 대작갑사에서 유래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범상치 않은 산세 가운데에 있는 운문사는 신라 화랑의 배움과 수양의 도량이기도 했다.

호랑이다. 호랑이가 내려다본다. 까마득한 백 척 봉우리에서 불쑥 고개든 백호가 소리도 없이 내려다본다. 호랑이가 엎디었다. 저 성탑 같은 능선에 강철의 등뼈를 꿈틀대며 아예 호랑이가 엎디었다. 이들을 유유히 거느리며 남쪽으로 내달은 산봉이 해발 1천195m의 장막을 세운다. 구름의 문, 운문산(雲門山)이다. 이처럼 천야만야한 산줄기가 숙위하는 요새와 같은 땅에 운문사(雲門寺)가 자리한다. 둘러보고 올려다보면 어쩐지 먹먹하다가도 가슴이 활짝 열리는 자리다. 17세기의 문인 이중경(李重慶)이 '세속의 얽매임을 떨칠 만한 장소'를 찾아 운문산을 유람할 때 한 스님께 운문 가는 길을 물었다 한다. 스님은 '지팡이 들어 아득히 먼 길 가리키며, 흰 구름 깊은 곳에 절이 있다'고 했다. 아득하고 깊은 이곳에 그보다 천년도 더 먼저 도착한 도승(道僧)이 있었다.

#1.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돕는 곳, 오갑사

때는 신라 진흥왕 18년인 557년, 운문으로 들어온 도승은 금수동(金水洞) 계곡에 작은 암자를 지었다. 현재의 북대암 근처다. 그리고 3년을 수도하며 홀연히 득도한 그는 산세의 혈맥을 짚어 도우(道友) 10여 명과 함께 다섯 개의 갑사(岬寺)를 짓기 시작했다. 가운데 '대작갑사(大鵲岬寺)'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9천 보(步) 지점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 7리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 10리에 '소작갑사(小鵲岬寺)', 그리고 북쪽 8리에 '소보갑사(所寶岬寺)' 이렇게 오갑사(五岬寺)다. 기록에 따르면 다섯 갑사의 역사(役事)는 560년에 착공해 7년 동안 이루어졌고 거의 동시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대작갑사가 오늘의 운문사다.

학계에서는 오갑사의 성격을 일반 사찰과는 달랐던 것으로 추정한다. 6세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꿈꾸며 본격적으로 뻗어나가던 시기다. 동시에 진흥왕은 불교를 구심점으로 민심을 모으고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국가 중흥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하기 위해 화랑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었다. 오갑사는 바로 이 시기에 창건됐다.


560년에 착공해 7년 걸려 모두 완공
오갑사 중 대작갑사가 현재 운문사
왕건이 937년 토지·사찰 이름 내려
가슬갑사는 신라 원광법사 머물러



특히 청도의 서쪽지역은 가야와의 접경지대이고, 청도의 동쪽지역 곧 운문지역은 신라의 왕경과 가깝다. 즉 청도는 신라의 가야 진출 통로로서 군사적·지리적 요지(要地)였다. 오갑사를 착공한 지 2년 뒤인 562년에 대가야를 합병한 것은 상징적이다. 청도는 신라군의 최전방 기지였을 것이고 대가야를 정복한 것은 장군 이사부(異斯夫)와 화랑인 사다함(斯多含)이었다.

사방이 높은 산들로 막힌 깊은 골짜기여서 적에게 쉬 노출이 되지 않는 곳. 그러므로 운문의 오갑사는 군사전략적 요충지이자 교육도량의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문사 사적기에 이곳을 '복국우세지장(福國祐世之場)'이라 부르고 있다.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돕는 곳'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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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갑사 중 하나인 소작갑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도 대비사. 중창할 때 위치를 옮겨 원래의 자리는 아니지만 소작갑사의 법등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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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경내에 자리한 작압전. 대작갑사에서 유래한 운문사의 역사가 압축돼 있는 전각이다.

#2. 오갑사는 어디에 있었나

오갑사는 한 도승이 산세의 혈맥을 짚어 그 자리를 정했다고 전해진다. 혈맥에 대해서는 '흉맥(凶脈)을 진압해 지덕을 비보한다'는 내용과 '사찰의 위치로 더 없이 좋은 뛰어난 맥'이라는 해석이 있다. 언뜻 상반되는 표현 같지만 모두 풍수지리상의 요지라는 의미로 상통된다.

운문산은 호랑이가 진호하는 범봉(형제봉), 호랑이가 엎드린 호거산(해들개봉), 호거대(장군봉), 복호산(신성봉), 지룡산(659m) 등을 거느린 주봉으로 호거산(虎踞山)으로도 불린다. 운문사 범종루의 편액에도 '호거산운문사'라 적혀 있다. 호거(虎踞)란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모양을 말한다. 이 범상치 않은 산세 가운데에 있는 운문사는 호랑이와 마주할 때 생기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자리이면서 '웅크린 채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형세'로도 비유된다. 이는 배움과 수양의 도량이자 인재를 낳는 산실을 뜻한다.

오갑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혼란 시기에 대부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다섯 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고 한다. 이후 대작갑사는 신라 말 승려 보양(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고 했다. 고려 건국의 과정에서 보양 스님의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왕건이 937년에 보은의 뜻을 담아 토지 500결(結)과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는데, 그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 현재의 운문사다.

사라진 갑사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기록과 발굴과정 등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오갑사의 위치 추정에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통해 길흉화복을 조정할 수 있다는 참위사상(讖緯思想)의 지형, 하천과 관련이 있고 지맥의 끝에 위치해 갑(岬)이 될 수 있는 비보적 조건을 갖춘 지형적 조건,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 운문산의 지정학적 역할, 당시 신라불교의 성격 등이 참고가 됐다.

'소작갑사'는 박곡리 미륵당에서 약 900m 떨어진 북쪽 계곡 중턱의 베틀바위 부근 절터로 여겨진다. 베틀바위 북동쪽의 봉우리에서 남으로 뻗은 비교적 급한 사면의 가장자리다. 절터에는 건물지의 흔적과 불상대좌의 지대석과 하대석, 석불좌상의 하반신이 남아 있고 기와 조각이 넓은 지역에 걸쳐 산재하고 있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작갑사는 운문사와 함께 중창한 대비사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보양국사가 중창 때 위치를 옮겨 원래의 자리는 아니지만 소작갑사의 법등을 잇고 있는 것이 바로 대비사라는 견해다.

'천문갑사'는 운문면의 신원리 절터로 여겨진다. 운문사 남쪽 운문천 상류의 사리암 골짜기에서 다시 상류를 따라 오르면 4개의 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 닿는데, 이곳을 천문동(天門洞)이라 부른다. 계류가 만나는 곳에 배 모양으로 튀어나온 구릉 위에 절터가 있다. 강돌로 쌓은 석축과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기단으로 추측되는 돌들을 볼 수 있다.

'소보갑사'는 운문면의 오진리 절터로 추정된다. 절터는 운문호와 옹산강에서 오진리 마을로 흘러오는 개울이 만나는 끝자락으로 갑(岬)형의 지형에 건물지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 관련 유물이나 유구는 확인되지 않지만 신라의 기와 조각이나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됐다.

'가슬갑사'의 위치는 삼국유사의 원광서학(圓光西學)조에 나타난다. 기록에는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 돌아와 가슬갑에 머문다'는 내용이 적혀 있고, '지금 운문사 동쪽 9천보(步)쯤 되는 곳에 가서현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하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라는 설명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가슬갑사는 운문면 바깥삼계리의 삼계리마을이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바깥삼계리는 운문산의 중앙부에 해당하고 운문령에서 발원하는 바깥삼계리천과 문복산에서 발원하는 개살피계곡이 만나는 골짜기의 땅이다.

원광법사는 진평왕 22년인 600년에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사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추項)이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곳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구심점이 되는 정신이자 신라인이 지켜야 할 대표적인 계율이 탄생한다. 오갑사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불교문화재연구소 누리집.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경상도 청도군 동호거산 운문사 사적. 경북도 청도군 운문사 사적. 가슬갑사지 지표 조사 보고서, 청도군·경북대 박물관, 1993. 청도 가슬갑사지 종합학술조사보고서, 청도군·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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