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8> 거북 바위에 살아 숨 쉬는 충절, 충재 권벌(봉화)
◆ Story Briefing충재 권벌(齋 權, 1478~1548)은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이며 학자다. 그의 인생은 두 번의 사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로, 조광조의 개혁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이후 14년간을 봉화의 닭실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 당시에 그가 지은 정자 청암정(靑巖亭)은 명승 60호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아름답다. 1533년 정치일선으로 복귀했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때 다시 해를 입었다. 평안도 삭주(朔州)에 유배된 것이다. 그곳에서 1548년(명종 3) 71세로 별세했다. 선조 초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에 제정(祭亭)되었다. 닭실마을은 안동권씨 후손들이 400여 년간 대를 이어 살면서 봉화 제일의 반촌(班村)이 되었다. 평생 그가 탐독했다는 근사록(近思錄, 보물 262호)과, 그가 쓴 충재일기(보물 261호)는 ‘충재박물관(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 보관돼 있다.충재 권벌은 재직 당시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고,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다. 중종 때에는 조광조·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8편은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을 떨친 충재 권벌에 대한 이야기다. #1. 기묘사화(己卯士禍) 그리고 닭실 청암정(靑巖亭) 1533년(중종 28) 6월15일 해거름이었다. 청암정(靑巖亭) 돌다리 위로, 물기를 잔뜩 머금은 향나무 향이 무심히 번져 내렸다. 충재의 가슴 속에 만감이 오고 갔다. 늦은 소나기가 막 그치자마자 숨이 턱에 받쳐 도착한 소식 때문이었다.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에 임명한다는 어명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당시 정적에 의해 내쳐진 지 14년 만의 부름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아홉 달 전, 충재 권벌은 예조참판으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이미 만연해진 사화의 조짐을 파악하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로 나갔다. 그럼에도 그는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조광조 등 기호사림파 중심으로 추진된 개혁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정적들은 충재를 일컬어 조광조 무리에게 뇌화부동하여 일을 그르친 것이 많은 자라고 비난했다. 파직당한 충재는 봉화의 닭실마을로 낙향했다. 닭실은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서 경주의 양동(良洞), 안동의 천전(川前), 풍산의 하회(河回)와 더불어 삼남(三南)의 4대 길지라고 평한 곳이다. 그 닭실에 충재의 외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선산이 있었다. 충재는 담담했다. 정치란, 파당이란, 그런 법이었다. 그는 청암정을 짓고 경학(經學)에 몰두하며,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청암정은 영남 최고의 정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귀한 정자다.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춘양목(春陽木, 금강송)으로 건축했다. 암반 주위를 연못으로 둘렀고 버드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향나무 등의 나무를 심어 놓았다. 처음 지을 때만 해도 청암정은 온돌방이었고, 연못 또한 없었다. 그런데 방에 불만 넣으면 바위에서 우는 소리가 나는 일이 반복됐다. 그 괴이한 이야기를 듣고 정자를 둘러본 스님이 일렀다. “이 바위는 곧 거북입니다. 그러니 방에다 불을 지피는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니 울 밖예요.”믿건 믿지 못하건 끔찍한 해석이었다. 하여 아궁이를 막고 바위 주변을 파 못을 만들어 거북에게 물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암정에서 가장 운치 있는 것은 정자 바로 옆에 놓인 다리다. 별채 뜰과 정자를 오갈 수 있도록 배려한 낮은 돌다리다. 계절과 날씨를 따라 나무 그늘이며, 꽃향기며, 새소리며, 갖가지가 다리를 품는다. 그리고 정자의 마루 위로 올라서면 역대 명현들의 글이 현판으로 늘어서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70), 관원 박계현(灌園 朴啓賢, 1524~80),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86),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 1674~1756), 번암 채제공(樊庵 蔡濟恭, 1720~99) 등의 솜씨다. 게다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72)의 작품인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眉 許穆, 1595~1682)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 정자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충재가 지낸 청암정에서의 시간이 서정적으로 녹아 있는 시 한 편이 있다. 퇴계 이황이 지었다. 퇴계는 충재를 존경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먼 인척간이기도 했다. 충재의 증조부가 퇴계 외조부였던 것이다.‘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였으니/ 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물굽이는 고리처럼 둘러있어라/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고/ 맑은 연못에 연꽃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구나/ 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하고/ 벼슬길 연모하지 않으니 마음에 걸림일랑 없어라/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니 그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려’.#2. 대왕대비와의 대립, 그리고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년) 8월22일 한낮이었다. 경복궁(景福宮) 후원, 충순당(忠順堂) 안의 공기가 팽팽했다. “이는 윤임 때문이다. 윤임은 지금 큰일을 저지를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화가 이미 박두했는데 어찌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발 안쪽에 앉은 대왕대비(문정왕후 文定王后, 1501~65)의 날선 목소리가 대신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11세의 어린 임금(명종 明宗, 1534~67)은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수렴청정의 때였다. 실질적인 임금은 대왕대비였다. 대왕대비는 어떻게든 윤임을 제거하려는 작정이었다. 윤임은 대윤의 우두머리였다. 당시 소윤(小尹)과 대윤(大尹)의 갈등의 골은 깊디깊었다. 소윤이란 중종(中宗, 1488~1544)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 1509~65)의 정당을 이름이다. 대윤은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의 아우 윤임(尹任, 1487~1545)의 정당을 가리킴이었다. 문정왕후는 현 임금인 명종의 어머니였고, 장경왕후는 전 임금인 인종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여인은 모두 파평윤씨였다. 따라서 소윤, 대윤으로 구별되었다. 중종의 두 아내와 두 아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외척 간의 권력 쟁탈전이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소윤으로 기운 터였다. 살아있는 사람은 문정왕후와 명종이었다. 죽은 자(장경왕후와 인종)에겐 힘이 없었고, 대윤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작은 죄로도 큰 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없던 죄도 생길 판이었다. 대신들의 의견이 충순당 안을 들끓었다. 그때 원상(院相) 권벌이 나섰다. 원상은 국왕의 국정 수행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경우, 국정을 의논하기 위해 재상들로 구성한 임시관직이었다. “우선,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는 설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소신은 모르겠습니다. 또한 윤임에게 음험하고 사특한 마음이 있었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만, 형벌이 지나치면 인심이 화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치를 처음 펼 때에는 모름지기 인심을 얻어야지 형벌의 위협으로 진정시켜서는 아니됩니다. 위에서는 공명정대하게 마음을 쓰셔야 합니다. 조정이 아뢴 대로 사실만을 따르셔야지 의심하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대왕대비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나온 직간이었다. 나아가 공명정대하게 국사를 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발이 가리고 있어 대왕대비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대신들로서는 다행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얼굴은 살벌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결국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는 일어나고야 말았다.충재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죄없는 대신을 귀양 보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는 대의에 몰두하고 그 뜻을 외칠 뿐이었다. 매서운 내용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놀라 충고했다.“이렇게 하면 화변(禍變)을 더욱 일으키게 할 뿐입니다. 몇 부분은 지우는 것이 낫겠습니다.”이에 충재는 탄식했다. “지워버리느니 차라리 아뢰지 않는 것이 옳소.” 하지만 주변의 만류가 거듭되었고, 충재는 결국 문제의 원고를 조금 고쳐 상소하는 것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문정왕후는 노여워했고, 권벌은 귀양을 면치 못했다. 71세의 고령으로 평안도 삭주(朔州)에 유배된 충재는 결국 나이와 북방의 험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1548년(명종 3) 그곳에서 운명했다. 큰아들인 청암 권동보(靑巖 權東輔)에게 남긴 글이 거의 유언이 됐다.‘옛날 중국의 범충선(范忠宣, 송나라 시대의 문인)은 나이가 70인데도 만리 길 유배를 갔다. 네 아비의 죄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국은을 저버려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검소하게 장례 지냄이 옳을 것이다.’운구가 행해졌던 천리 길 동안 백성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 닭실로 돌아온 운구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힘을 보탰으면, 또 그 상여를 붙들고 얼마나 애통해했으면, 그때 상여가 지나갔던 마을 앞 고개 이름이 부여현(扶輿峴)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충재는 문정왕후 사후 2년 뒤인 1567년(명종 21)에 신원돼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고, 1571년(선조 4)에는 ‘충정공(忠定公)’ 시호를 하사했다. ▨참고문헌=‘조선왕조실록’ 글=김진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공동기획:Pride GyeongBuk ◆충재 권벌과 근사록>>> 주자학 입문서 늘 갖고 다니면서 탐독 충재 권벌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근사록(近思錄)’이다. 근사록은 주자가 편찬한 책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어 주자학 입문서이자 마음을 수련하는 교과서였다. 충재의 근사록 탐독은 임금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중종이 연회에서 누군가 흘린 근사록을 보고 단번에 “아마 권벌의 옷소매에서 빠졌을 것이다. 돌려주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 때 충재가 늘 가지고 다니던 근사록은 고려 공민왕 9년(1370)에 간행된 목판본이었는데, 훗날 더 늘었다. 먼저 중종이 다른 판본을 충재에게 직접 하사했다. 귀한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9권3책이었다. ‘초주갑인자’라 함은 세종(世宗, 1397~1450)조에 처음 만들어진 동활자(銅活字)로 우리나라 활자본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그리고 영조(英祖, 1694~1776)도 충재의 이야기를 안 후 감동받아 후손(6세손 권만, 權萬)에게 또 하사했다. ‘무인자본(戊寅字本)’ 14권4책이다. ‘무인자’는 세조(世祖, 1417~1468) 때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로, 특정한 책을 찍어내기 위하여 주성되었기 때문에 드물게 전해지고 있어 매우 희귀한 인쇄문화자료이다. 이 책들은 보물262호와 보물896호로 지정되어 충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충재 권벌이 기묘사화로 파직당한 후 봉화 닭실마을에 내려와 지은 청암정. 충재는 이곳에서 14년간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청암정은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지은 정자로, 암반 주위에 연못을 만들어 운치를 더했다.청암정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은 정자 바로 옆에 놓인 돌다리와 연못이다. 왼쪽에 보이는 한옥은 충재 권벌이 평소에 기거했던 별채다. 수면 위로 엷게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충재박물관. 근사록, 충재일기 등 충재 권벌의 유품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김진규충재 권벌이 평생 탐독한 근사록. 근사록은 조선 선비들에게 있어 주자학의 입문서나 다름 없었다. 권벌은 평소에도 옷소매에 근사록을 지니고 다니며 마음의 교과서로 삼았다고 한다. 봉화읍 충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3.09.16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7> 명심보감에 실린 효자 도시복(예천)
◆ Story Briefing예천 출신의 도시복(都始復·1817~91)은 조선 후기의 이름난 효자다. 명심보감 효행편에 소개될 만큼 효심이 남달랐다. 숯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형편이었만, 그의 어진 효심에 하늘과 짐승까지 감동했다고 한다. 명심보감에는 ‘솔개가 날라준 고기’ 이야기를 비롯해 ‘한여름 호랑이를 타고 얻어온 홍시’ ‘한겨울에 얻은 수박’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등 네 가지 이야기가 상세하게 실려 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시묘살이를 하며 애통해했는데, 호랑이도 그의 효심에 감동해 곁에서 지켰다고 한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7편은 명심보감에 실린 효자 도시복에 대한 이야기다. #1. 하늘이 낳은 효자…솔개가 날라 준 고기 여름이 깊어가는 음력 유월. 길손이 소백산 아랫녘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리는 절뚝거리고, 얼굴은 부어터지고 피멍이 들었다. 마침 목이 말라 물이나 얻어 마실 생각에 산골마을로 들어섰다. 어느 초가집 앞에 시원한 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 길손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초가집 마당을 훔쳐보니 한 노인이 싸리나무 가지로 빗자루를 만들고 있었다. 길손은 한숨 돌릴 겸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제가 예천장(醴泉場)에 나갔다가 우스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천에 도효자(都孝子)라는 사람이 있다던데, 영감님 아시오?”노인도 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사람이기에 이름을 효자라 지어 부른답디까. 허허,듣기에 민망합니다.”“영감님 생각도 그렇지요? 하늘이 낳은 효자랍니다. 그 효심에 날짐승 길짐승들까지 감동을 한대요.”노인이 웃음을 거두고 혀를 차면서 물었다.“어쩌다가 얼굴을 상했습니까?”“내가 그 도효자 때문에 얼굴이 이 모양이 됐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길손이 말한 이는 예천 사람 도시복이다. 1817년 5월15일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야목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그럼에도 부모를 모시는 정성이 남달라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도효자라 불린 것이다. 명심보감 속편(明心寶鑑 續篇) 효행편에도 그의 이야기가 나온다.시복은 젊을 때 숯을 구워 팔았다. 예천에 장이 설 때마다 지게에 숯을 져 날라 양식과 바꿔 왔다. 집에서 장터까지 오가는 길이 백리(百里). 새벽에 나서 서둘러야 해 지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그날도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를 사서 첩첩산중을 헤치고 오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시장해할 것을 걱정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덮쳤다. ‘어~’ 하는 사이 솔개 한 마리가 지게머리에 매달아 놓은 고기를 낚아채 가는 것이었다. 시복이 쫓아가 봤지만 공중으로 솟구쳐 산을 넘어가버린 솔개를 어떡하겠는가. 울면서 집에 돌아가는 수밖에. 시복이 빈손으로 돌아온 까닭을 설명하자 아내가 천만뜻밖의 말을 했다. “쌀을 씻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와 봤어요. 커다란 솔개가 지붕에 앉아 있기에 기절할 뻔했지요. 솔개는 곧 날아가고, 정신을 차리고 봤더니 마당에 고기가 떨어져 있었어요. 그것으로 국을 끓여 어머니 저녁을 먼저 올렸어요.” 시복은 고개를 들고 솔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깊은 산골의 하늘은 이미 칠흑 같았고, 별들이 몰려나왔다. 이제부터 솔개를 원수로 삼으려던 시복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시복의 어머니는 병이 잦았다. 시복은 저를 고생스럽게 기르다 어머니가 일찍 병을 얻었다 여기며 애달파했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약값을 대기에 바빠 살림은 늘 궁핍했다. 어머니는 정신도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시복은 어머니가 원하는 일이라면 소홀함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하루는 시복이 마당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소리쳤다. “얘, 시복아. 너 일은 안 하고 왜 거기 서서 빈둥빈둥 거리냐. 저기 텃밭에 널어놓은 보리는 언제 타작할 거냐!”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은 배추밭이었다. 시복은 어머니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배추밭으로 들어갔다. 속이 막 차오르고 있던 배추를 도리깨로 쳐서 남김없이 뭉개 버렸다.“잘한다! 우리 시복이가 일을 참 잘한다!” 배추통을 퍽퍽 칠 때마다 시복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방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시복은 따라 웃었다. #2. 한겨울에 때아닌 수박 이런 일도 있었다. 음력 섣달. 문 밖에 잠시만 서있어도 이가 덜덜 떨리는 한겨울 날. 어머니가 수박을 먹고 싶다고 했다. 아내의 만류에도 시복은 옷을 두껍게 껴입고 집을 나섰다. 일단 나오긴 했지만 정해놓은 데는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지난 여름 수박밭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요, 내년 여름 수박밭을 미리 다녀올 수도 없었다. 시복의 발길은 안동 풍산 들판으로 향했다. 수박이 유명한 곳이었지만, 거기라고 사정이 다를까. 사람들에게 수박밭을 물었더니 미친 사람 보듯이 쳐다봤다. 어느 밭 한가운데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는데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갔다. 부리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까마귀야, 네 입에 문 것이 무엇이냐. 섣달 겨울날 개구리를 잡았느냐, 대추알을 주웠느냐. 무얼 입에 물고 가느냐. 늙은 어미한테 주려느냐. 까마귀야, 까마귀야. 그러면 네가 효자다. 네가 효자다.”시복은 까마귀를 부러워했다. 무심코 까마귀가 날아간 쪽을 따라갔다. 그렇게 하염없이 걸었더니 다 무너져가는 원두막이 한 채 서 있었다. 시복은 제 눈을 의심했다. 난데없이 원두막 안에 푸른 넝쿨이 이리저리 펼쳐져 있는데, 그 한가운데 수박 한 덩이가 달렸지 않은가. 시복은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정말 수박이었다. 시복은 누가 주인인지 모르는 원두막에 대고 큰 절을 올렸다. 수박을 안고 돌아오는 시복을 보고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는 씨앗을 발라주기 바쁘게 붉게 익은 수박을 입안에 감추었다. 그러나 서너 조각 입에 대고 물리니 시복은 또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이토록 지극한 보살핌을 받다가 시복이 서른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3. 한여름에 호랑이를 타고 얻어 온 홍시 “엄동설한에 수박이라니. 웃기지 않습니까?” 길손은 콧방귀를 꼈다. 그는 예천장터에서 이런 얘기를 듣고 사람들과 시비가 일었다고 했다. 도효자에게 생긴 일을 믿지 않는 그에게 사람들이 나서서 여러 얘기를 더 보탰나 본데, 들으면 들을수록 그는 더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주먹다짐까지 갔다는 거였다.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하나같이 이상하게만 들렸던가 봅니다?”“거짓말도 그럴싸하게 꾸며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참 믿기지 않는 얘기지요. 겨울에 수박이라니. 맞습니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아예 나서질 않았다면 그 수박은 절대 못 구했을 겁니다. 그런데 찾다가 찾다가 보니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생기기도 하나 봅니다. 허허.”길손은 씩씩거렸다.“생각해 보십시오. 솔개가 제 먹으려고 생선을 채 갔지, 효자를 위한답시고 그랬겠습니까. 솔개가 다리에 힘이 빠져서 놓쳤는지 어쨌는지 우연히 그 집 마당에 떨어진 것이면 말이 되지만.”노인은 여전히 웃음을 띤 채 말했다.“솔개 마음을 사람이 알 수는 없지요. 하늘이 도왔는지도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신기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덕분에 어머니를 잘 대접해드렸으니 솔개가 고마울 수밖에요.”“영감님도 설마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요? 그런 효자가 세상천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불효자가 되게요. 부모에게 불효하기로 작정한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갑자기 길손이 꺼이꺼이 울었다. 노인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길손이 울음이 섞인 말을 이어나갔다.“나는 효도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님은 내가 효도할 때를 기다려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죽어 저세상에 가서나 뒤늦게 효도를 하겠지요. 내일이 어머니 제삿날입니다. 난 비쩍 마른 조기나 한 마리 겨우 상에 올리고 곡이나 할 뿐입니다.”노인은 길손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뒤란으로 사라졌다. 길손은 혼자서 울 만큼 울다가 눈물을 닦았다. 생판 모르는 마을에 들어와 남 앞에서 처량한 꼴을 보인 게 부끄러웠다. 길손이 다시 길을 떠나려 할 참에 노인이 나타났다. 작은 광주리를 내밀었다. 홍시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영감님. 음력 유월에 웬 홍시입니까? 이게 정말 홍시가 맞습니까?”“어머니 살아계실 제 밥은 못 넘기고 홍시가 먹고 싶다고 해서 난처한 때가 있었지요. 지금 이때였는데, 다행히 강원도 강릉 땅에서 홍시를 구했지요. 음력 유월에 홍시라니 나도 참 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배웠지요. 가을에 딴 감을 토굴에 넣고 잘 간수하면 몇 개는 건질 수 있다는 걸. 가져가서 어머니 제사상에 올리시오.”길손은 마을을 빠져나와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마침 나뭇단을 지고 내려오는 아이가 있어 물어봤다.“저기 샘터 가에 서있는 초가집 사는 어른이 누구시냐?”“도시복 어른 댁이지요. 우리 마을에서는 도효자 어른이라고 부릅니다.”아이는 그대로 마을로 내려가고, 길손은 한참 마을을 내려다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효자 어른….’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초가집을 향해서 허리를 숙였다. 그런 다음 홍시가 짓무르지 않게 조심히 안고 고개를 넘어갔다. 실제 명심보감에는 도시복이 한여름에 호랑이를 타고 얻어 온 홍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병든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어갔다.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해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난데없이 홍시를 찾았다. 그때가 음력 6월, 한여름이었다. 가을에야 나는 홍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시복은 감나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홍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둑했다. 속상한 마음에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았다. 호랑이는 긴 꼬리로 제 등을 툭툭 치며 타라는 시늉을 했다. 해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을 안 시복은 조심스럽게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시복을 태운 호랑이는 산속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한참을 달린 호랑이가 멈춘 곳은 강원도 강릉의 어느 외딴집이었다. 깊은 밤중이었지만 시복은 주인을 찾아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했다. 얼마 후 주인이 제삿밥을 차린 음식상을 내왔다. 그날은 마침 주인의 아버지 기일이었다. 상을 받은 시복은 눈을 의심했다. 음식상 위에 홍시가 탐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너무 기쁜 마음에 시복은 주인에게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어떻게 한여름에 홍시가 있느냐”며 주인에게 되물었다. 주인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홍시를 몹시 즐겼다고 했다. 이를 잊지 못해 제사 때 쓰려고 매년 가을에 홍시를 따 토굴에 저장해 왔다고 했다. 이맘때면 대부분 홍시가 상하지만, 그나마 예닐곱 개는 건질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올해는 이상하게 상하지 않은 홍시가 쉰 개가 넘어 마침 의아해하고 있었다고 했다. 주인은 시복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며 홍시를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담아주었다. 홍시를 구한 시복은 그길로 문을 나섰다. 그런데 호랑이가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여전히 마당에 엎드려 시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복은 다시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다. 기뻐할 어머니의 얼굴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4. 도시복 스토리가 담긴 효공원 시복이 살던 집과 자주 거닐던 곳은 효공원(孝公園)으로 조성되어 지금도 도효자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효공원은 도시복의 효행을 재조명하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됐다. 목조 초가 형태의 도시복 생가와 샘터, 장독대 등을 복원하고 효자각, 홍살문 등을 세웠다. 특히 명심보감 효행편에 수록된 솔개가 날라준 고기, 호랑이를 타고 얻어 온 홍시, 한겨울에 얻은 수박,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등 네 가지 스토리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볼 만하다. 글=조정일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공동기획:Pride GyeongBuk 경상북도‘솔개가 날라준 고기’ 이야기를 형상화한 조형물. 도시복이 어머니의 식사가 늦어질까 걱정하던 차에 솔개가 고기를 가로채 집으로 날라 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도시복이 어머니를 위해 엄동설한에 수박을 구한 이야기를 형상화한 조형물.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효공원에 조성된 호랑이 조형물. 왼쪽으로 효자각이 보인다. 효공원은 명심보감에 실린 도시복의 효행을 재조명하기 위해 조성한 곳이다. 명심보감에는 시묘살이를 함께 하거나 한여름에 홍시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준 호랑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아버지를 위해 한겨울에 잉어를 구해준 도시복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조형물도 효공원에서 볼 수 있다. 명심보감 조형물에는 도시복과 잉어 이야기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조정일·
2013.09.09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6> 영남 3대 의병장 김면의 충절(고령)
◆ Story Briefing 고령에서 태어난 송암(松菴) 김면(金沔·1541~1593)은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의령의 곽재우, 합천의 정인홍과 함께 ‘영남 3대 의병장’으로 불린다. 성리학의 대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문하에서 수학했고, 한강 정구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산야에 묻혀 오직 학문에만 전력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일어선 이유는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임진년 왜구가 침략하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의병의 선봉에 섰다. 이후 왜군과 30여 차례 전투를 치르며 큰 공을 세웠다. 전투를 치를 때는 한여름의 땡볕과 한겨울의 혹한에도 절대 갑옷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6편은 고령 출신 의병장 김면에 대한 이야기다. #1. 왜군과 30여 차례 전투를 치르다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게 선조 24년(1592) 4월14일이다. 이내 동래성을 빼앗고 파죽지세로 경상좌도로 북진했다.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대패하고 도순변사 신립마저 충주에서 패하자, 한성의 함락이 코앞에 닥쳤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피했다. 왜군은 평양으로 진격해 왔다. 선조는 또 의주로 몽진했다. 한편으로는 조선반도 깊숙이 들어온 왜군은 군량미 확보가 관건이라 여기고 호남 진출을 꾀했다. 그러나 남해에는 이순신이 버티고 있고, 진주 쪽은 곽재우에 막혀 부득이 경상우도(낙동강 서편의 경상도)인 거창으로 해서 호남을 공략할 수밖에 없었다.이에 각 지역의 의병장들이 발호하고, 관군들이 합세하여 왜군에 대항했다. 그중에서도 고령의 김면 의병장, 의령의 곽재우 의병장, 진주부사 김시민이 철저한 방어를 해, 왜군의 호남 진격을 막았다. 특히 군수물자의 수송로인 낙동강 수로를 중심으로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의병들 가운데서 경상우도의 3대 의병장으로 고령의 김면, 의령의 곽재우, 합천의 정인홍 등이 꼽히는데, 이들은 조식의 문하인 남명학파 선비였다. 송암 김면(1541~1593)은 고령에서 태어났다. 15세 때에 대구감영의 백일장에서 장원하였으며, 17세 때 남명 조식에게 수학, 송암(松菴)이란 현판을 받아 호를 삼을 만큼 조숙했다. 18세 때는 최영경과 김우옹, 정구, 박승 등과 시로써 교류했고, 20세에는 이황에게 수학했다. 성정이 강직하고 정의심이 강했다.부친이 함경도 경원도호부 부사로 재직하다가 병사함에 김면은 2천리 길을 염천에 도보로 왕래하여 시신을 고향 고령 선산에 옮겨 안장하였다. 그의 효행과 학문이 알려져 선조는 공조좌랑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잠깐 상경하여 부임했을 뿐, 이내 모친의 병을 핑계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다.이러한 그를 일으켜 세운 게 조선 초유의 국난이었다. 임진년 왜구가 침략하자 그는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하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의병의 선봉에 섰다. 그의 일족과 가동 향민 700여명이 뒤를 따랐다. 먼저 왜군이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린다는 점을 중시, 강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후 거창으로 나아가니, 거창 지역 의병들이 그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이에 문위, 곽준, 윤경남, 류중룡, 박정번, 오장 등을 참모로 하고 박성을 군량담당의 수속관(搜粟官)에 임명, 군량을 비축하면서 곳곳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2천여명이 모였다. 인근에서 함께 싸우겠다고 몰려드는 이들이 나날이 늘어났다. 당시 의병들은 곳곳에서 봉기하여 관군과 협력하기도 했는데, 자료에 따르면 관군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 휘하에 1만5천(합천), 경상우도 절도사 김시민의 휘하에 1만5천(진주), 그리고 의병장 김면 아래에 5천(거창), 의병장 정인홍 아래에 3천(합천), 의병장 곽재우 아래에 2천(의령)으로 총 5만이었다. 그 외 초계의 이대기 등 여러 의병이 수백명을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김면은 지례(知禮), 사랑암(沙郞巖), 성주(星州), 두곡(豆谷), 변암(弁巖) 등지에서 30여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중 중요한 게 고령 전투와 우척현 전투, 그리고 성주 전투다. 고령 전투는 낙동강 포구 개산포(오늘의 개포)에서 벌어졌다. 낙동강의 창녕 박진과 대구 화원 포구의 중간에 위치한 개산포는 고려시대 강화도에서 만든 팔만대장경을 서해안 남해안을 거쳐 낙동강으로 역류하여 이곳에서 하역해 합천 해인사로 운반했다 하여 ‘개경포(開經浦)’라 하기도 한다. 물굽이가 크게 휘돌아 들며, 양안의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김면은 강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주도면밀하게 전투에 임했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박정번을 불렀다.“왜군들이 배를 타고 오는 길목인 강의 물속에 말뚝을 박는 게 어떤가?”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튼튼한 나무를 대거 수거해 와서 강물 속에 말뚝을 박았다. 왜선이 지나가면 말뚝에 걸려 좌초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고는 문위와 곽준에게 당부했다. “너희 군사들은 요처에 숨어 적의 동태를 감시하라.”임진년 6월9일에 현풍에서 내려오는 적선 80여척이 걸려들었다. 말뚝에 배가 받쳐 뒤집히거나 좌초하자 왜군들은 물에 뛰어들어 우왕좌왕했다. 모두 섬멸했다.왜적이 정진(鼎津) 남쪽에 진을 치고 있다는 첩보가 잇따라 올라왔다. 김면은 군사를 정비하여 은밀하게 그리로 이동했다. 인근의 피란민들이 남부여대하여 김면의 군대를 따라붙는 기이한 현상도 나타났다. 피란 가는 것보다 김면의 군대가 신출귀몰하니, 따라가는 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김면은 정진과 무계에서 적을 크게 이겼다. 그리하여 왜선을 나포하고 수백여 왜군의 목을 벴다. 왜선에 실려있던 내탕고의 보물도 압수하는 전과를 올렸다.#2. 거창 전투 승리로 왜의 호남진출 막아다시 첩보가 날아들었다.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 대군이 금산(김천)을 점령하여 지례 우척현을 넘어 거창으로 진격하려 합니다.”금산에 집결한 왜적은 남으로 거창 함양을 거쳐 전라도로 진출하려고 우척현(牛脊峴)으로 들어왔다. 우척현은 당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였다. 이에 김면의 부대는 거창으로 이동, 7월10일 우척현에 매복했다. 김면은 이 전투에 특히 약초꾼들과 포수들이 대거 참여도록 독려했다. 산척(山尺= 산에서 짐승을 잡고 약초를 캐어 사는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참전시켜 산악전에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었던 것이다. 산악 곳곳에 군사를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내려치는 기습전을 벌였다. 적은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김면의 의병들에 혼비백산하여 북으로 달아났다. 이 전투는 임진란 산악전투의 대표적 사례다. 이 전투는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총지휘를 했는데, 진주부사 김시민과 김면, 금산 의병장 여대로 등이 합심하여 협공을 실시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이 전투로 왜군들의 전라도 진출이 좌절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당시 거창 전투 때 김면이 쓴 시 ‘행군도신창유감(行軍到新倉有感)’이 전해온다. 나라가 깨어지고 가문이 망함에 오랑캐 복수에 바빠/ 군사 거느리고 세 번이나 신창에 왔는데/ 적병은 많고 우리 군사 적다고 말하지 말라/ 고향 그리는 민심을 어찌 잊으랴國破家亡虜報忙/ 領軍三度到新倉/ 莫言敵衆吾兵少/ 思漢民心不敢忘김면이 치른 세 번째의 큰 전쟁은 성주지역에서 벌어졌다. 왜장 모리(毛利揮元)가 성주성에 웅거하고 있었다. 이에 김면이 전라 의병장 최경희에게 지원을 요청, 경상우도 의병장 정인홍과 부장 장윤을 보내어 성주성을 공격했다. 12월4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다음 해인 계사년 1월5일까지 수차례 공격함에 왜군은 버티다가 달밤에 성을 빠져나가 도망쳤다.#3. 왜병 공략 준비 중 과로로 쓰러져조정에서는 김면의 공을 높이 인정하여 수차 벼슬을 내렸다. 합천 군수를 제수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의병을 이끄는 대장이 한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라는 게 이유였다.다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리고 이어서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의 의병활동은 열을 더해갔다. 김성일은 그러한 김면의 혁혁한 공을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의병대장의 칭호와 함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직함을 받게 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의병을 모두 관할하면서 관군까지 통솔하는 위치였다.전투를 치르면서 김면은 주야로 갑옷을 벗지 않았다. 한여름의 땡볕과 폭우는 물론 한겨울 혹한의 눈서리에도 노출되었으나 잘 버텨나갔다. 그런 그를 염려하여 주변의 참모들이 “그러다 죽습니다. 몸을 좀 챙기면서 하십시오”라고 말렸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병을 칭탁하여 싸움을 물릴 수 없다며 버텼다. 그가 쓰러졌을 때에야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는데, 불행하게도 목숨을 바치려 하니 하늘이 실로 무심하도다”라고 탄식했을 정도였다.2월에 왜군은 한계를 느꼈다. 명나라의 원군이 들어와서 평양을 수복한 데다 겨울을 겪으면서 전세가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후퇴하면서 선산(善山)에 집결하였다. 이를 호기로 여긴 김면은 적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전투를 치르느라 쌓인 피로가 겹쳐 병을 얻었다. 그리하여 계사년 3월11일 금산 진중에서 순국하였다. 향년 53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남에 김성일(金誠一)은 크게 애통해하며 장계를 올려 “그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은 맑고 훤하기가 단사(丹沙)와 같았고, 그 가솔이 10리 밖에 있어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장성(長城)이 한 번 무너지니 삼군이 모두 눈물을 삼키고 하늘이 돕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하였다. 선조임금은 애도하여 예관(醴館)을 보내고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서했다. 김면은 명문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함경도 경원부사를 지냈다. 조부 탁(鐸)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에 이르렀다. 증조부 장생(莊生)은 참판으로 아들 6형제를 두었고 아들 셋이 등과했으며, 장생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그의 7대조 김남득(南得)이 고려조에 큰 공을 세워 고양부원군이 되었으며, 후손들이 고령에 세거하여 고령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면에 관한 자료는 많지는 않다. ‘삼강략(三綱略)’ ‘심유지(心遺誌)’ 등 많은 저술들이 있었으나, 유실됐다. 전쟁 중에 순찰사 김성일, 곽재우 장군과 주고받은 서찰, 전쟁 중에 쓴 시문이 다수 남아 있다.그의 사후 뜻을 기리기 위해 고령에 도암사(道岩祠)가 세워져 뒷날 도암서원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2002년에 복원되었다. 도암서원을 비롯해 사당, 신도비, 묘소 등을 일괄 지정한 김면장군 유적지가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에 있다. 1988년 경북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된 유적지는 2011년 성역화사업을 완료했다. 6천769㎡의 부지에 도암서원 보수와 함께 강당과 동서재, 누각 등을 신축했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공동기획:Pride GyeongBuk2011년 성역화 사업을 완료한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김면 장군 유적지 전경. 6천769㎡의 부지에 도암서원, 사당, 신도비, 묘소 등이 들어서 있다.유적지에 들어서면 오래된 배롱나무가 눈길을 끈다.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자태가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김면의 의로운 삶을 닮은 듯하다.김면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신도비와 묘소는 유적지 오른쪽 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이하석
2013.09.02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5> ‘바보성자’ 김수환의 유년시절 추억과 성직자의 길(군위)
◆ Story Briefing‘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5편은 군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김수환 추기경(1922~2009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 추기경은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구미 선산에 살다가 다섯 살 무렵 군위로 이사 와 군위보통학교(현 군위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대구가톨릭대학교 전신인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해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1993년 3월, 군위를 떠난 지 59년 만에 생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위에서 살던 당시, 추기경의 어머니는 포목행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지만, 신앙심만은 남달랐다고 한다. 장사꾼이 되고 싶었던 김 추기경이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던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이 때문에 군위는 김 추기경이 신앙과 꿈을 키운 정신적 고향이자 유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1. 소년 김수환의 군위 추억서편 하늘의 노을이 장엄하면서도 곱다. 기도를 할 때의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 표정과 닮아 있다.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자리한 초가삼간 툇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쳐다보던 소년 김수환(세례명 스테파노)은 눈을 돌려 멀리 야산 사이로 길게 이어진 고갯길을 본다. 가난하지만 옹기종기 정겹게 모여 앉은 마을 초가지붕들 위로 홍시빛깔 노을이 내리고 있다. 머지않아 대지에는 어둠이 찾아들 것이다. 하지만 아침 일찍 포목 보따리를 이고 장마당으로 떠나간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소년의 마음에 문득 고적감이 조수처럼 밀려든다. 이럴 때 동한(카를로) 형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객지로 돈 벌러 떠나간 나이든 형들이나 누이들은 그다지 그립지 않았다. 그러나 세 살 터울인 동한 형만큼은 몹시 보고 싶었다. 소년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던 형이었다. 동한 형은 재작년에 대구의 소(小)신학교(성 유스티노신학교)로 떠나고 없다. 아마 방학 때나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대구는 어머니가 옹기장수를 하던 아버지(김영석, 요셉)와 만나 결혼해서 정착한 곳이자 소년의 출생지였다. 남산동에서 태어났다고 들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보다 선산에 살다가 다섯 살 무렵 이곳 군위로 이사한 기억이 더 또렷했다. 어릴 적부터 마음껏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던 군위 용대리는 소년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언제까지나 이 정든 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오래도록 살고 싶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는 내년이면 어머니의 명에 따라 이곳 용대리를 떠나 대구의 소신학교로 가야 할 것이다.“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몇 년 전인가 어머니가 형 동한과 소년에게 당부한 말이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할 정도로 지극한 신앙심을 가진 분이었다. 포목행상을 마치고 돌아온 늦은 저녁에도 피곤함을 무릅쓰며 몇 시간씩 기도를 했다. 그런 후 소년에게 종종 옛날 성서나 순교자, 성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소년의 할아버지(김보현, 요한 공) 얘기도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병인박해(1866∼1868년) 때 충남 연산에서 붙잡혀 서울 감옥에서 아사(餓死)하셨다고 했다. 할머니(강말손)도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되었고, 그때 풀려나서 낳은 아이가 소년의 아버지 김영석이었다.천주교로 인해 멸문지화를 당한 집안의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평생 옹기장수를 하며 가난하고 힘겹게 살았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신앙심만 믿고 시집와서 옹기와 포목행상을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항상 굳은 신앙심과 자식에 대한 사랑과 교육열을 잊지 않았다. 그건 대대로 이어져온 순교자 집안의 순정(純正)한 내력이기도 했다.군위로 이사한 다음에도 어머니는 옹색한 초가삼간을 마다않고 공소(公所)를 열었다. 그래서 소년의 집은 봄가을 두 차례 방문하는 신부님을 모시기 위해 동네에서 유일하게 도배를 하는 집이기도 했다. 집에 신부님이 오시면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신도들 모두 땅에 엎드려 “찬미 예수님”하며 공경을 표했다. 그럴 때의 신부님은 하느님처럼 높고 존귀하게 보였다. 하지만 소년은 어머니의 말을 좇아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차라리 세상을 떠도는 장사꾼이 되고 싶었고, 돈을 벌어 오순도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게 소년의 동경이자 꿈이었다.#2. 청년 김수환, 그리고 성직자의 길학도병으로 일제에 강제징집 당했던 청년 김수환은 광복이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사랑하는 형 동환은 부산 범일성당의 보좌신부가 되어 있었다. 후일에 지병인 당뇨를 앓으면서도 결핵환자들을 위해 대구결핵요양원을 인수하여 사회복지에 열심히 힘을 쏟다가 세상을 뜬 형은 당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얼마 뒤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났고, 어렵게 신학교 졸업을 앞뒀을 때 청년 수환은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청년은 자신의 하느님에 대한 겸허하고 부족한 마음을 담아 시편 51장의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 사제 서품식이 있던 날은 1951년 9월15일로 음력 팔월 보름이었다. 열세 살 나이에 어머니의 명을 좇아 대구의 소신학교에 들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였다. 그날따라 유서 깊은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올려다본 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고 높았다. 대구교구 신부님과 교우들이 서품식장을 가득 메웠다. 그날 서품식에 참석하여 자식이 신부가 된 것을 본 어머니는 기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건 막내아들이 대견해서겠지만, 눈물로 지낸 인고의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사제가 된 수환은 곧장 대구대교구 안동본당(지금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는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해 궁리 끝에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편지를 들고 부산의 안 제오르지오 주교님(메리놀외방전교회)을 찾아갔다. 그렇게 얻은 적지 않은 돈으로 궁핍한 신자들을 위해 얼마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후일에 돌이키면 신념대로 행하고, 열과 성을 다했던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본당 사목을 하던 그는 교구장 비서로 발령받았다. 대구에 내려온 그는 대구대목구장이었던 최덕홍 주교(1902∼54년)의 일을 도왔다. 그에겐 아버지처럼 엄격하면서 자상한 분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다음 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온전히 사랑을 실천한 분이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사랑에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임을 일깨워준 분이었다.어머니를 여읜 다음해에 그는 해성병원 원장직과 김천본당(지금의 황금동 본당)을 맡았다. 아울러 유치원과 성의중·고교 교장을 지냈다. 학생들과 어울려 스스럼없이 지냈던 시기였다.1956년 독일로 유학을 간 그는 뮌스터대학 요셉 희프너 교수 신부님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공부였다. 후날 종교의 사회참여와 헌신에 대한 의식이 이때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1963년)한 그는 대구에서 가톨릭시보사(지금의 대구대교구 가톨릭신문사) 사장직을 맡아 사원들과 함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며, 한국 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려면, 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의지를 품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교도소를 수시로 드나들며 재소자들을 만나 교화하며 예수님 사랑을 증거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또 행려병자와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립복지시설 ‘희망원’을 자주 방문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삶에 애정을 쏟았다. 마산 교구장이 된 것은 사제서품을 받은 지 15년이 된 해였다. 당시 그는 주교직 사목 표어를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et Pro Mulitis)’로 정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소명의식의 발로였다. 그 뒤 그는 1968년에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을 맡게 되었다.다음해인 1969년에 마침내 그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나이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이었으며,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그는 성직자로서 평생을 누구보다 겸허하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 고통받는 사람과 약자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항상 낮은 자세로 그들 편에 서서 사랑을 행하는 일에 앞장섰다. 노동자들이 있는 산업현장과 평화시장, 산동네와 난지도 쓰레기장, 사북탄광을 비롯하여 사회적 약자가 있는 곳이면 그는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바보 성자’라고 불렀다. 노자가 말한,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인다(大智若愚)라는 말처럼 세상의 시각으로는 어리석고 바보처럼 보이는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펼치려 애썼던 것이다. 참으로 진정한 목자의 삶이었다.이처럼 사랑과 나눔을 몸소 실천하며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향년 87세를 일기로 선종에 들었다. 추기경이 살았던 군위 생가는 군위읍에서 가까운 용대리에 있으며, 생가와 1㎞쯤 떨어진 곳에는 천주교 공원묘지도 있다. 군위군은 이 지역에 새롭게 ‘사랑과 나눔’ 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소규모 성당인 ‘경당’과 김 추기경의 부모가 옹기를 구웠다는 옹기굴을 복원하는 한편 추모체험관 및 수련원을 계획 중에 있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김수환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초가 내부. 1993년 3월, 59년 만에 이곳을 찾아 추억에 잠긴 김 추기경의 생전 모습 사진이 걸려있다.김수환 추기경이 다섯살 무렵 이사와 유년시절을 보낸 초가. 추기경의 형 동한이 대구 소신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이 집에서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소박해 보이는 초가삼간이, 평생 남을 위해 헌신한 김 추기경의 모습을 닮은 듯하다.박희섭
2013.08.26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4> 주막 주인 김설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여인의 숲(포항)
◆ Story Briefing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에는 ‘여인의 숲’이라 불리는 어여쁜 숲이 있다. 조선 말기인 1897년, 김설보(金薛甫, 1841~1900)가 조성한 숲이다. 당시 김설보는 역촌(驛村) 하송리에서 큰 주막을 운영하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하송리는 해마다 침수 피해가 잦았다. 상습적인 재해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김설보는 수구(水口)막이용 숲을 만들 수 있도록 식수헌금을 마을에 기부했다. 실제로 숲이 들어선 후 홍수 피해는 물론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 숲은 ‘식생이수(食生而藪)’라고도 불린다. 숲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 허물어졌다가, 2003년 6월 ‘여인의 숲’으로 재탄생했다. 김설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숲을 지켜내자는 지역 노거수회(회장 이삼우)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2011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4편은 김설보의 숭고한 뜻이 담겨 있는 포항 여인의 숲에 대한 이야기다.#1. 나무와 여인 “어떤 사람의 인격이 정말로 비범한지 알려면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이 따라야만 합니다. 만약 그 행동이 어떤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더없이 고결한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았으며, 게다가 이 세상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에 나오는 말이다. 책의 주인공은 양치기 부피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알프스 고원 지대의 헐벗고 황폐해진 땅을 오랜 시간 공들여 숲으로 가꾸어 낸 한 남자의 이야기다. 실화이며 실존 인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있다.조선 조,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는 봉수대를 머리에 인 역촌(驛村)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당시 하송리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다. 장마가 지거나 태풍이 닥치면 지류들이 넘쳐 마을을 휩쓸었다. 해마다 피해가 극심했다. 풍수적으로도 수해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하송리가 속한 삼송리(三松里, 상·중·하송리) 일대는 마을의 생김새가 배 모양이었다. 즉 바다를 향해 떠내려가는 형국이었다.어느 날, 초로의 한 여인이 나섰다. “숲을 만들어야 합니다.”김설보였다. “동편 바다쪽을 숲으로 가리면 됩니다. 마을이 제아무리 배 모양을 하고 있다 해도 바다만 만나지 않으면 떠내려 갈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숲이 수구막이가 되어줄 겁니다.”수구(水口)란 마을 공간을 흐른 물길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을 막는 것을 두고 수구막이라 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수구막이의 중요성을 이렇게 풀어내고 있다.“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넓은 곳에서는 비록 좋은 밭이 만 이랑이 있고, 집이 천간이 있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을 때는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보아 구할 것이다.”집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마을임에야, 두말이 필요 없었다.“모든 경비는 제가 감당하겠습니다.”김설보는 큰 주막의 운영자로 재력가였다. 당시의 주막은 식당, 술집, 여관을 겸했다. 특히 하송리는 역촌이었다. 당연히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마련이어서, 그녀는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부(富)를 마을의 덕이라고 여겼다.김설보는 말에서 그치지 않았다. 거금을 들여 관아로부터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느티나무, 쉬나무, 이팝나무 등이 땅을 채워갔다. 돈도 돈이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사대부 여성조차도 홀대받던 시절, 한낱 주막집 여인이 마을을 위해 정성과 성의를 다하자 마을은 술렁였다.“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습니다.”“장하고 장한 여인이오. 어지간한 사내도 못하는 일 아니오.”“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하는 일도 아닙니다.”“숲을 꾸리는 일이 어찌 여인만의 일이겠는가. 마을과 우리들의 삶, 전부가 걸린 문제인 것을….” 마을사람들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들도 말에서 끝내지 않았다. 십시일반 성금을 거두어 숲 한 모퉁이에 작은 송덕비를 세워 그녀의 뜻을 기렸다. (당시 세워진 비석은 지금 여인의 숲에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씁쓸하다. 이 송덕비에는 ‘김설보’가 아니라 ‘윤기석 공의 처’로 돼 있다.)재물을 희사하여 임년에 조성한 우리 숲을 백대로 송덕하노니 보기 드믄 그 분이 거의 사라질 것을 다시 새롭게 하였으매 옥돌을 캐어다 여기에 새겨두노라 出義捐財(출의연재)/壬年我藪(임년아수)/百堵頌德(백도송덕)/罕覩基人(한도기인)/幾滅更新(기멸경신)/銘此采隣(명차채린)#2. 나무와 생명비가 그치지 않았다. 결국 북서쪽 안청계리(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호룡골(虎龍谷) 저수지가 붕괴됐다. 그러자 소하천이 범람해 마을을 덮쳤다. 물은 빠르고 무거웠다. 집이 무너졌고, 가구며 살림살이가 떠내려갔으며, 볏단도 쓸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가축에 이어 사람까지 휩쓸리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바다로 떠내려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숲이 막아섰다. 바로 김설보가 가꾼 그 숲이었다. 울창하게 버티고 선 숲에 사람이며 물건이며 곡식더미가 걸렸다. 숲이 재산과 생명을 구한 것이었다. 숲의 효험을 두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고마워했다. 이때부터 숲은 ‘식생이수(食生而藪)’‘식생이숲’이라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여인의 숲은 활엽수림으로 일종의 방풍림이자 방수림이다. 방풍림, 방수림이란 강풍이나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하는 숲의 이름이다. 김설보가 가꾼 숲은 이후로도 바다 쪽으로 뚫린 마을의 해문(海門)을 막고, 동편에서 불어오는 샛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토를 보호해주었다. 진정한 수구막이였다.#3. 나무와 세월사람들은 탄식했다. 그날도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통째로 베어져 나갔다. 일제가 총대와 개머리판, 가미카제용 항공기 프로펠러와 날개를 만든다며 나무를 건드리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달째였다. 숲은 나날이 비어갔다. 일본이 떠나고 전쟁도 끝이 나자 사람들은 숲을 살려야겠다고 마음을 모았다. 하여 1960년대 들면서 상수리나무 위주로 다시 숲을 가꾸기 시작했다. 나무는 잘 자라주었고 곧 울창해졌다. 단오 때면 숲에서 그네뛰기며 씨름판이 열렸다. 어른을 따라나섰던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맬 정도로 숲이 벅적거렸다. 하지만 그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 숲의 상황은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취락구조 개선사업이라는 명분하에 숲이 다시 헐리게 되었다. 나무가 밀려난 자리에 수십여 채의 주택과 논이 생겨났다. 숲은 또 비어졌다. 언제나 사람의 욕심이 화근이었다. 하물며 그 사람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미욱한 존재임에야 재앙은 불을 보듯 뻔했다. #4. 나무와 우리 자연보호단체 ‘노거수회’ 회장이자 기청산식물원(포항시 북구 청하면 덕성리)을 운영하는 이삼우 원장은 안타까웠다. 김설보의 숲에 대한 사랑, 기부 정신 그리고 숲을 아끼고 지켜온 마을의 공동체 정신 등은 기념해야 마땅할 자산이었다. 그는 발 벗고 나섰다. 결국 숲의 의미를 알렸고, 포항시의 지원도 얻어냈다.2003년 6월, 많은 사람의 참여와 축하 속에 숲은 ‘여인의 숲’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녀가 숲을 만들어 희사한 해가 1897년이니, 어언 100년 하고도 6년이 더 흐른 뒤였다. 현재 이 숲은 3만㎡(9천평)의 면적에 상수리나무 위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수난과 고난의 과정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느티나무도 십여 그루 섞여 자라고 있다. 그밖에 소나무 20여 그루와 더불어, 쉬나무며 말채나무며 느릅나무와 같은 활엽수들도 보기좋게 어우러져 있다.송덕비도 새로 세워졌다. 숲의 무궁한 생명력과 번창을 기원하는 뜻에서 합장한 손으로 도토리를 감싼 모습을 형상화했다. 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여기 한 여인이 숲 사랑의 씨를 뿌려 전설 같은 향토 사랑의 미담으로 피어나게 하였더라. 이 숲 있으매 뭇 생명들 수마에서 건져지고 이 숲 무성하매 이 고을 또한 흥왕하였으니 여인의 고운 손이 이렇게 고귀한 업을 일구어 후세를 가르치는 도다. 그 뜻 기리며 뒤쫓아 가려는 의지를 함께 이 비에 새겨두노라.’▨ 참고문헌=이정옥·김명화·박은미 연구보고서 ‘경북 여성상 정립을 위한 경북여성인물사 연구 및 활용’, 대구경북연구원 대구경북학센터 ‘창조의 멘토 33인’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공동기획:Pride GyeongBuk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에 있는 ‘여인의 숲’은 조선말기 주막을 운영하던 김설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곳이다. 당시 김설보의 식수헌금으로 조성된 숲 덕택에 마을은 홍수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도 구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후반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헐리게 된 여인의 숲은 2003년 지역 노거수회의 노력으로 다시 태어나 현재 3만㎡(9천평) 면적에 상수리나무 위주로 되어 있다.김설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03년 세운 송덕비.김진규
2013.08.19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3> 천년고찰 고운사 4人4色 스토리(의성)
◆Story Briefing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는 고운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지금은 조계종 16교구의 본사 역할을 하고 있다. 의성을 비롯해 인근 안동, 영주, 봉화, 영양 등에 있는 60여 곳의 사찰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다. 원래 이름은 ‘높이 뜬 구름’이라는 뜻의 고운사(高雲寺)였지만, 최치원이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151호)와 우화루를 지은 후 그의 자인 고운(孤雲)을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불리게 됐다. 특히 가운루 현판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노국공주가 죽자 전국을 유람하던 공민왕이 고운사에 들려 글씨를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고운사는 또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승병기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밖에 현재의 연수전은 1902년 왕실의 요청으로,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3편은 최치원을 비롯해 공민왕, 사명대사, 고종 등 고운사와 관련이 있는 인물과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1. 최치원, 산중선계(山中仙界)를 실현하다“이곳은 능히 구름 끝에서 해와 달의 기운을 마시고, 휘어진 무지개를 건너 북두성을 밟을 수 있는 곳이로다.”고운사(高雲寺) 산문 앞에서 초로에 접어든 최치원은 탄복했다. 지난 몇 해 어둠의 근원 속을 배회하고 다닌 터라, 천하의 길지에 자리잡은 절을 보자 그는 환희에 사로잡혔다. 등운산(騰雲山) 자락 부용반개형(芙蓉半開形, 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지세는 명당임이 분명했다. 더욱이 화엄종주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내 옛일이 몽환인 양 떠올랐다.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 아버지 견일은 득난(得難, 6두품)이었다. 생애가 늘 서늘하고 적막했다. 개운포에서 열두 살 된 아들 치원을 당나라 장삿배에 태워 유학을 보낸 것은 신라의 철저한 골품제가 명민한 아들의 앞날을 막을 것임을 예견한 조처였다.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공부하거라.” 아들 치원은 이러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6년 후인 874년(신라 경문왕 14) 빈공과(賓貢科, 당(唐)의 외국인 과거제)에 급제해 고변의 회남종사가 되었다. 이후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명을 떨치고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사륙집(四六集)’을 펴내는 등 이른바 세계적인 지식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그에게 매료된 헌강왕은 신라로 돌아올 것을 간청했고, 조국에 대한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던 그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 직을 제수받아 서라벌(경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다.그러나 당나라와 달리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신라는 헌강왕에 이어 정강왕, 진성여왕대를 거치며 쇠망해가는 중이었다. 특히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진골출신 왕족과 귀족들이 포진한 주류사회는 육두품인 그를 태생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귀국 10년째인 894년 개혁안인 시무책(時務策)을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무능하고 부패한 그들에 의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으로, 애오라지 뜻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삶과 죽음의 영역을 한 가지로 하여 가슴 속에 슬픔이 없는 존재로 살리라.”세속에 환멸을 느낀 그는 자청해 외직을 떠돌다가 급기야 관직을 버리고 지리산과 가야산 등지로 소요자적(進遙自適)했다. 그러던 중 고운사에 이른 것이었다.일세를 풍미하는 천재로 불리던 그는 유불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통합사상가였다. “나라에 오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을 풍류(風流)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마련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그것은 실로 세 가지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 있어 뭇 사람을 교화시킨다. 예컨대 집에 들어와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취지이고, 작위(作爲)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주장이다. 모든 악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실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최치원, ‘난랑비서(鸞郞碑序’)”고운사에 머물면서 그는 곧 여지(如智), 여사(如事) 두 대사와 함께 가허루(駕虛樓)를 지었다. 기둥이 계곡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어 마치 양쪽 언덕에 걸친 다리나 떠있는 배와 같은 형상이었다. 백두와 한라에 버금가는 천하의 명당에 어울리는 누각이었다. 가허루와 함께 우화루(羽化樓)도 지었다. 흐르는 계곡물에 벚꽃이 흩날릴 때면 마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이 나는 누각이었다.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 같다’는 옛 기록대로 최치원은 고운사에 산중선계(山中仙界)를 실현한 것이었다. 후에 절은 최치원의 자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라 불리게 되었고, 세월이 더 흘러 가허루는 가운루(駕雲樓)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우화루라고 적힌 현판은 특이하게 두 개가 있다. 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누각 밖에는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 의미의 우화루(羽化樓)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꽃비가 내린다는 불교적 의미를 담은 우화루(雨花樓) 현판이 있다.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는 해인사에서 은거하던 최치원이 어느 날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밖에 나간 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그가 신던 신발과 쓰던 갓만이 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옛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고 신선이 되었다고 믿었다. 선계를 꿈꾸던 최치원이었기에, 옛 사람들의 믿음처럼 신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2. 공민왕, 공허한 마음을 현판에 남기다솔숲을 지나 마사토가 깔린 산문을 들어서자 왕은 더욱 공주가 그리웠다. 돌이켜 보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와 함께 이 지방으로 피신했을 때, 몸은 고단하였으나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고운사 가운루의 청명한 바람(駕虛淸風)은 여전하였다.‘기묘일에 지진이 있었다. 2월 정유일에 공주가 임신하여 만삭이 되었으므로 참형, 교형 이외의 죄수를 사하였다. 갑진일에 공주의 병이 위독하였으므로 또 1죄(참형)의 죄수를 사하였다. 이날 공주가 죽었다.(고려사 제41권, 세가 제41 공민왕 을사 14년, 1365년)’왕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그날 이후 웃지 않았다. 웃어도 웃음이 아닌 것을 모두 알았다. 다만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미뤄둔 채 생전의 공주와 다녔던 길을 더듬고 다녔다. 그런 왕을 신하들은 저어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왕은 또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노국대장공주진(魯國大長公主眞),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현존),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등은 화공들의 진심 어린 찬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왕은 당대의 명필이었다. 보수파였던 이제현도 ‘익제난고(益劑亂藁)’에서 ‘천 년이나 곧게 자란 나무를 찍어서 지은 집같이 필력이 굳세고 웅후하여 그 기품이 천지를 비추어 가득하게 한다’고 평했다.왕은 새벽예불을 드린 뒤 가운루에 올라 새벽달을 바라보았다. 한 점 구름이 달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고운사에서 공주의 명복마저 빌고 나니 왕은 더욱더 만사를 잊고 저 구름에 몸을 싣고만 싶었다. 허(虛)하고 허(虛)하니 모든 것이 허(虛)하도다. 왕은 지필묵을 가져오라 명했다. 그리고 ‘가운루(駕雲樓)’라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바람은 청명했다.지금 고운사에 있는 가운루 현판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전국을 유람하던 중 고운사를 찾게 된다. 당시 만사를 잊고 선인으로 살고자 하는 공민왕의 염원이 현판의 글씨에 담겨있다.#3. 사명대사, 임진왜란 때 승병의 기지로 사용하다우화루(雨花樓) 옆으로 꽃이 떨어졌다. 부상당한 승병들이 신음을 참으며 들것에 실려 오갔다. 문득 상동암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꽃들을 보고 느꼈던 무상과 불살생(不殺生)의 불교계율을 유정(惟政, 사명대사의 법명)은 다시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새가 없다. 스승 휴정(休靜)께서도 ‘중생을 대신해 고통받는 것이 곧 보살이 할 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극악무도한 적도가 하늘의 이치를 거슬러 함선 수천 척으로 바다를 건너오니 그 독기가 조선 천지에 가득하다. 삼경(三京)이 함락되고 우리 선조들이 누천년 이룬 바가 산산이 무너지고 있다. 저 악귀들이 조국을 무참히 짓밟고,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는 광란을 벌이니 이 어찌 사람이 할 짓이랴.’ 스승께서는 이런 격문을 띄우셨고 조선의 승려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그렇다. 국가는 어려움 많고 파도도 거센데, 나라생각에 유(儒)나 선(禪)이 다를 수 있으랴. 유정은 다시 우화루 서쪽 벽면에 그려진 형형한 눈빛의 호랑이가 되어 옆에 두었던 칼을 들고 일어나 외쳤다.“이곳 고운사는 천혜의 요충지로 극악한 무리들이 근접하지 못할 곳이다. 하여 우리 승군의 전방기지로 삼았으니, 이기기에 가장 중요한 식량을 이곳에 비축하여 전장으로 후송하고, 부상당한 승병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치료케 하라.” 우화루의 호랑이도 함께 크르릉 포효하고 있었다. 현재 고운사 우화루 서쪽 벽면에는 실제 호랑이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진품은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4.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다 고운사 연수전(延壽殿) 터는 나침반의 바늘이 꼼짝달싹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기가 센 곳으로 유명하다. 풍수사가들도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입을 모은다. 연수전은 영조 갑자년에 어첩(御牒, 왕실의 계보를 간략하게 적은 책)을 봉안하기 위해 지어졌다가 왕실의 요청으로 1902년(고종 39)에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다시 지은 것이다. 왕실의 원당(願堂)인 셈이다.왕실의 위엄을 나타내듯 ‘만세문’ 현판을 단 솟을대문과 목가구를 짜듯 정교한 가구식(架構式) 석재 기단(基壇) 위에 팔작지붕인 연수전 사방 천장은 운룡도(雲龍圖), 봉황도(鳳凰圖) 등으로 장식되어있다. 부귀장수를 기원하는 글귀(富似海百千秋 龍樓萬歲, 壽如山長不老 鳳閣千秋 등)와 내부 천장에는 해와 달을 중심으로 용과 봉황, 거북, 기린 등도 그려져 있다. 연수전 현판의 힘 있는 행서체는 당대의 명필가였던 해사(海士) 김성근(1835∼1919)의 글씨다. 글=박미영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기획:pride GyeongBuk최치원이 고운사에 머물며 지은 가운루. 기둥이 계곡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어 마치 떠있는 배와 같은 형상이다.가운루와 함께 지은 우화루.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 의미의 우화루(羽化樓)와 꽃비가 내린다는 불교적 의미의 우화루(雨花樓),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는 고운사 전경. 최치원을 비롯해 공민왕, 사명대사, 고종 등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박미영
2013.08.12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2>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단야(김천)
◆ Story Briefing김천 출신의 김단야(金丹冶 1900~38)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상하이 트로이카’로 불린다. 대구 계성학교 재학시절, 일제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하는 미국인 교장에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주동하다가 퇴학당하기도 했다. 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배재학교 시절부터다. 당시 학생비밀결사 단체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고향 김천으로 내려온다. 낙향 후 만세운동을 주동하면서 독립투사의 길로 접어든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다. 1938년 처형된 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굴레에 갇혀 오랫동안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2편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단야에 대한 이야기다. #1. 고향 김천에서 만세운동 주도재판정에서 처형장까지는 멀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점점 짙어져 갔다. 길은 스무 걸음쯤 앞에서 구부러져 있었는데, 막다른 길임이 분명했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일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는 게 억울하고 분하다.’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회한은 내려놓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어른거리는 얼굴이 있었다. 아들 비탈리아, 아내 주세죽, 아버지,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조국과 그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숨져간 동지들….김태연(金泰淵)은 1900년 1월16일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김단야(金丹冶)’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다. 유년기에 한학공부를 잠깐 거친 뒤 줄곧 기독교계열의 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았다. 조선이 일본에 자주권을 빼앗긴 시기에 학원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산파 역할을 했다. 그래서일까. 대구 계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6년 11월 단야는 일본의 조선 지배가 정당하다고 떠들어대던 미국인 교장에게 항의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1919년은 만세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해였다.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뒤로 학생들의 자발적인 동맹휴학과 당국의 학원폐쇄로 고향으로 돌아간 학생들이 많았다. 천안의 유관순(柳寬順)처럼 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배재학교에 다니고 있던 단야도 고향 김천에 내려와 있었다.3월24일, 김천 개령면 동부리에는 여느 날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개령공립보통학교 졸업식과 은씨 가문의 혼인 잔치가 있었다. 이 일 저 일로 겸사겸사 어울리니 꼭 장날 같았다. 오랜만에 마주친 얼굴끼리 안부가 오가고 잔치음식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 뒷산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만세, 대한독립만세!”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산봉우리에 서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두 팔을 번쩍번쩍 들면서 만세를 외쳤다.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그때 한 청년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바로 단야였다. “여러분, 지금 온 나라와 나라 밖 동포들이 일제에 맞서 독립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교사와 공장인부, 어린 학생, 심지어 기생들까지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습니다. 일본헌병대의 총칼에 쓰러지고 피 흘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란 듯이 외면하시렵니까.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단야의 기백에 눌려 모두 아무 대꾸를 못했다.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온 사람도 있었고,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사람들이 다치고 잡혀간 것도 알고 있었다.“그렇소. 잔치는 여기서 멈추고 우리 뛰어나가 외칩시다. 대한독립만세!”한 사람이 감격에 차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얼떨떨해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다.“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너나없이 나라 잃은 울분이 가슴에 한 짐 쌓여 있었던 터라 이렇게 목청껏 소리치니 속이 시원했다. 단야는 사람들을 이끌고 동료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는 유동산을 향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집 밖에 나왔던 사람들까지 하나둘 따라왔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던 대열은 곧 헌병대를 만나 흩어졌고, 단야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됐다. 하지만 개령면에서는 이 사건에 자극받은 만세운동이 연이어 벌어졌다.단야는 곤장 90대를 맞고 풀려났다. 그해 여름에는 적성단(赤星團)이라는 비밀결사조직에 들어갔다.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으며, 독립군에 지원할 의용군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아서 만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일본경찰에 쫓기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 상하이로 망명을 택했다. 도망자의 삶이 어떤 운명으로 귀결될는지 스무 살 청년은 그때 예감했을까.#2. 상하이로 망명…제2의 만세운동 계획3·1만세운동 이후 망명했던 수많은 지사들은 중국과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접했다. 단야 역시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고, 조선의 독립과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한 뜻으로 지사들과 의지를 불태웠다.1922년 봄, 단야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박헌영(朴憲永), 임원근(林元根)과 함께였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체포되었고,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을 보냈다. 세 사람의 귀국 목적은 서울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악랄한 고문에도 그 목적만은 숨겼고, 출옥한 다음 비밀리에 조직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25년 조직이 발각되어 위협을 느낀 단야는 다시 상하이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1926년 4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6월10일로 정해졌다. 국내외 동포들의 대대적인 애도열기를 보며 단야는 3·1만세운동을 떠올렸다. 그때도 고종(高宗)의 장례를 앞두고 몰린 군중이 운동의 핵심동력이었다. 고향 김천에서 자신이 벌였던 만세운동의 기억까지 돌이켜보았다. 단야는 순종의 장례가 온 민족의 열망을 다시 한데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믿었다. 그러나 머리가 아팠다. 역량을 집중하려면 민족의 단합이 필요한데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사이가 나빴다. 뭐든 맞들면 낫다는 것을 어느 쪽인들 모를까. 하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단야의 동료들조차 단야의 생각에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단야는 계속 설득했다. “사회주의자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민족의 유일무이한 과제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합니다.”단야는 자신이 국내에 심은 조직을 좌우합작을 위한 창구로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그런 한편 민족주의 진영과 접촉하며 교감을 넓혀 나갔다. 한달여 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던 거사는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났다. 당일 배포하려고 숨겨뒀던 격문이 우연히 일본경찰의 눈에 띄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국내 사회주의 조직은 다시 한번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야의 계획과 기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6·10만세운동은 폭발적으로 전개되어 3·1운동 이후 숨죽여 있던 민족의 공통된 열망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념을 넘어선 해방운동을 펼쳐보자는 단야의 꿈은, 이듬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한 민족운동단체 신간회(新幹會)를 만든 밑거름으로 평가된다.그후 단야는 상하이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국제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을 중개하는 거점역할을 주로 맡았다. 1934년부터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한국과장을 역임했다. 1937년이 되자 드디어 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단야도 조국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직 해방되지 않은 조국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모스크바의 공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스탈린은 불안을 피바람으로 다스리는 위인이었다. 일본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 늘 꺼림칙했던 그는 조선인을 일본에 부역하는 민족쯤으로 치부했다. 그는 조선반도에 가까운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중이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거나 잡아가두고 있었다. 이른바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창 진행되는 시기였다. 1937년 11월 단야는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요원에게 체포됐다. ‘일본제국의 간첩이며, 반혁명폭동과 테러활동단체를 결성한 1급 범죄자.’ 이것이 1938년 2월1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이 내린 판결이었다. 단야는 즉시 처형당했다.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진영에 속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들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이념을 넘어 조국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외길을 걸어간 이들로 평가받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단야다. 글=조정일<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공동기획:Pride GyeongBuk 경상북도1919년 김단야가 고향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나섰을 당시, 행진해 갔던 김천 개령면의 유동산. 김단야는 이때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고 풀려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단야는 본격적으로 독립투사의 길로 접어든다.김단야가 태어난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마을 전경.김단야의 아버지가 세운 개령교회. 그의 아버지 김종원은 초기 개신교 신자인 선친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남달랐다. 김단야가 기독교 계열인 대구 계성학교에 진학한 것도 이러한 집안 내력 때문이었다.조정일
2013.08.05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1> 북비(北扉)로 의리를 세운 이석문(성주)
◆ Story Briefing 호가 돈재(遯齋)였던 이석문(李碩文, 1713~73)은 북비공(北扉公)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739년(영조 15) 27세에 무과에 급제해 사도세자의 선전관(전령 겸 호위무사)으로 발탁됐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자,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영조에게 직언하지만 오히려 관직을 삭탈당해 고향 성주로 낙향했다. 성주로 내려온 이석문은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사립문을 북쪽으로 내고 두문불출한다. 북쪽에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충절과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때부터 ‘북비공(北扉公)’으로 불렸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1편은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를 지킨 북비공 이석문에 대한 이야기다. #1.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의 문돈재 이석문의 손자 규진(奎鎭)이 성균관의 제과(制科)에 뽑힌 것에 집안은 크게 기뻐했다. 바로 정조 임금이 보자고 해서 대궐에 들었다. 정조는 그를 가까이 불러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대가 돈재의 손자란 말이지?”“네.”“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로군. 나는 돈재를 잘 알고 있다. 너의 조부는 의리 있는 사람이지. 그래, 그때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참으로 가상하였다.”규진은 조부의 함자가 임금의 입에서 거론되는 것에 감격했다. 또한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경연에서의 은근한 하문도 그러했다. “북비(北扉)가 아직 고향집에 있는가?”규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새삼 할아버지의 과거행적의 위대한 자취를 되새겼다. 그의 향리 한개에서 북비댁으로 불리는 할아버지의 거처가 이처럼 온 천지에 회자될 줄을 잘 알지 못했는데, 이제 비로소 그 의미의 깊음을 실감하는 것이었다.그렇게 돈재 이석문의 이야기는 이제 전설처럼 그의 집안에 내려오고 있었다. 이석문은 골격이 크고 우람했다. 힘이 장사였다. 그리하여 1739년(영조 15) 27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문인의 집안에서 무인이 나타난 것도 큰 복이라고 마을에서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곧바로 선전관에 제수되었다.“장수의 재목이로군.”문무조신들이 관복을 입은 그의 풍채의 늠름함을 찬탄했다. 이후 10여년 만인 1750년(영조 26),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된 사도세자가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발탁했다. 이어서 다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자리에 그를 앉혔다. 사도세자를 옆에서 지키면서 보필하게 된 것이었다.그러나 조정의 분위기가 침울해지면서 사도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졌다. 따라서 그의 지위도 불안한 전망을 보이는 듯했다. 무엇보다 세자를 흔드는 무리의 목불인견이 크게 눈에 거슬렸다. 권력에 연연하여 유리한 쪽으로 줄서기에 바쁜 대신들의 행태도 그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그래, 차제에 낙향하여 집안을 건사하고 학문에 힘써야겠다.”그는 차츰 마음을 다잡아 갔다. 그러자 노론세력인 김상로와 홍계희가 넌지시 그의 마음을 돌릴 것을 제의해 왔다.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시의를 따르게. 그래야 자네도 제대로 설 수 있을 것이네.”강직한 의리를 고수하는 이석문은 이 말에 역정을 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영남사람이라 시의를 살피지 못합니다. 또 천성이 남을 우러러 매달리는 구차한 짓을 하지 못합니다.”그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버렸다. 1762년, 50세에 무겸(武兼)을 제수받고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일이 비극적으로 전개됐다. 사도세자 선()은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가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그러나 노론의 일당전제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모략에 휩싸였다. 그를 싫어하는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병이 발작할 정도였다. 1762년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지적한 10조목의 상소를 했다. 영조가 크게 노해 사도세자를 죽이고자 휘녕전(徽寧殿)으로 거동,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려 했다.그리고는 “간신을 들여보내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문지기에게 명하였다. 이에 사도세자를 살리려고 애쓴 이들이 몰려들었다. 설서(設書) 권정침(權正枕)과 사서(司書) 임성(任誠)이 세자의 아들인 세손(훗날의 정조)을 모시고 와서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문지기가 가로막았다. “이놈들아, 아비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세손의 효심을 막지 말라.”그래도 문지기들이 완강하게 막았다. 이에 이석문이 나섰다. “부자가 서로 헤어지는 마당에, 어찌 임금의 교서를 기다리겠소?” 그는 세손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임금은 대로했다.“아무도 들지 말라고 했거늘, 누가 짐의 말에 불복하는가? 어서 나가지 못할까!”그러나 이석문은 임금 앞에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은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했다. 세자는 이미 체념한 표정이었다. 말없이 뒤주에 들어가자 ‘꽝’ 하고 임금은 뒤주 뚜껑을 덮고는 이석문에게 말했다. “큰 돌을 들어 위를 눌러라.”이석문은 세손을 어루만지며 단호하게 말했다. “신은 죽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정말 죽고 싶으냐? 다시 한 번 더 명을 내린다. 어서 돌을 들어 뒤주 위에 올려놓아라.”“신은 할 수 없나이다.”영조는 큰 소리로 이석문을 끌고 가라고 명하면서 말했다. “내 말을 거역한 죄를 친히 물을 것이다.”그리하여 다음 날, 영조의 친국(親鞫) 끝에 장(杖) 50대의 벌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죽었다. 사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광무 3)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만신창이의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세자를 살리지 못한 원통함으로 가슴을 쳤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벽에 써 붙여 놓고 읊으며 두문불출했다. 마침내 거처하는 집의 사립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사도세자가 있는 북쪽을 향한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는 “시류에 아첨하는 무리와 접하고 싶지 않다”며 그 집에 은거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북비공(北扉公)으로 불렀다.그 후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하고 있던 영조는 그를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사람이 뜻을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구차히 굴복된다면 무엇이 그 사람에게 귀하겠습니까? 나는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무공도 세우지 못하였고 사헌부를 드나들며 간신을 베어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지도 못하였으니 저의 뜻은 끝내 펼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초야에 묻혀 편안히 쉬면서 유유자적하겠습니다.”#2. 경침(警枕)과 의리 지킴의 사상으로 세운 집안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한개마을은 북비고택으로 인해 그 의리의 뜻이 고양되는 곳이다. 한개마을의 서쪽 안길인 돌담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응와종택이 있다. 솟을대문에는 ‘정헌공응와이판서구택(定憲公凝窩李判書舊宅)’이란 현판이 걸렸다. 이석문의 증손자인 이원조가 조선 고종 때 공조판서를 지냈음을 표한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편에 북비(北扉), 즉 북쪽으로 난 사립문이 있다. ‘북비’라고 적힌 사립문을 들어서면 남쪽을 향해 앉아 있는 건물이 보인다. 북비고택(北扉古宅)이다. 고택은 1774년(영조 50), 이석문이 터를 잡은 후 손자인 이규진이 1821년(순조 21)에 북비고택 뒤편으로 정침(正寢)과 사랑채를 새로 지어 확장했다. 증손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1866년(고종 3)에 사랑채를 다시 고쳐 지었다. 응와종택과 별도의 담으로 구획된 북비고택은 여느 고택에 비해 초라해 보이지만 소박한 맛이 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의리를 숭상하는 선비의 거처로 더 격에 어울리는 것 같다.응와종택은 조선조 유학자 집안의 멋과 격이 잘 드러난다. 안대문채는 초가로 되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이 세상에는 항상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자손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것”이란다.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이란 현판이 걸린 아래채는 서재다. 이 현판은 원래 작은 사랑채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원조가 증조부인 이석문의 가르침을 되새겨 건 것인데, 독서를 통해 가문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사랑채의 당호도 응와 이원조가 ‘경침(警枕)’의 가르침을 내린 조부 이민겸(李敏謙)의 호를 따서 사미당(四美堂)이라 써서 걸었다. 경침이란 자식을 가르치는 엄격함이 서려 있는 말이다. 자식들을 꾸짖을 때 목침(木枕) 위에 올려 세우고 종아리를 때린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응와종가에서는 자식 교육의 중요성을 들어 나무로 만든 베개인 이 목침을 특별하게 ‘경침(警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쩌면 이 경침의 정신이야말로 이 집안을 일으킨 매서운 기운이라고 할 만하다. 이규진(李奎鎭)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그의 어머니 진주강씨는 곧장 “우리 집 경침의 덕이다”라고 했다고 한다.이 ‘경침’의 사상과 의리지킴의 사상이야말로 한 집안을 세우는 기둥임을 응와종택과 북비고택은 잘 보여준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북쪽으로 낸 사립문인 북비(北扉).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석문의 충절과 의리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북비라고 적힌 사립문을 들어서면 북비고택이 보인다.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이곳은 여느 고택에 비해 초라해 보이지만, 의리를 지킨 이석문의 거처로 더 격에 맞는 듯하다.성주 한개마을의 응와종택 솟을대문에는 ‘정헌공응와이판서구택(定憲公凝窩李判書舊宅)’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응와 이원조는 이석문의 증손으로 고종 때 공조판서를 지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편에 북쪽으로 난 사립문인 북비가 있다.이하석
2013.07.29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0> 대마도를 정벌한 이순몽 장군(영천)
◆ Story Briefing영천 출신인 이순몽(李順蒙, 1386~1449) 장군은 세종때 대마도와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명문가의 아들이었지만 무예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무과에 응시해 관직에 나섰다. 특히 세종 원년인 1419년, 우군절제사로 대마도 정벌에 나서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1433년에는 중군절제사로 여진족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워 세종의 총애가 두터웠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0편은 대마도를 정벌한 영천 출신 이순몽 장군의 이야기다. 흥미를 더하기 위해 픽션을 가미했다. #1. 이름없는 탁발승의 예언 영천사람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 후일의 태종)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어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진 이응(李膺)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이 순몽(順蒙)으로 인물이 준수하고 성격이 활달했다. 하지만 응석받이로 키운 탓인지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고 학문은 등한시하였다. 타고난 개구쟁이로 항시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이런저런 말썽을 일삼았다. 잡아다놓고 꾸짖어도 그때뿐이어서 부모의 속을 태웠다.순몽의 모친은 전주최씨로 판서 병례(丙禮)의 딸이었다. 심성이 후덕하고 사려가 깊었다. 하루는 최씨가 안방에서 자수를 놓고 있을 때 탁발승이 대문을 두드렸다. 행색이 남루하여 하인이 쫓아내려는 것을 만류하고 불러들여 마루에 앉게 하고 손수 차를 건네고 시주를 하였다. 때마침 바깥에서 놀던 순몽이 흙먼지를 덮어쓴 후줄근한 모습으로 집안에 들어섰다.“대대로 학식 높은 인물이 나온 가문인데, 저 아이는 어쩌자고 저렇게 공부를 안 하는지 원.”최씨의 한탄을 들은 스님이 유심히 순몽의 관상을 살피더니 말했다.“부인의 친절한 마음씨를 생각해서 한 마디 드리겠소이다. 자제의 자질은 뛰어나지만 액운이 끼어서 쉬 벼슬길에 오르기 어렵고, 후일 벼슬이 높아져도 큰 화를 당할 운수요.”이어서 스님은 가까운 선친 중에 백성의 원성을 산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최씨는 깜짝 놀랐다. 순몽의 조부되는 이희충(李希忠)은 밀직부사를 지낸 관리로 성품이 강직하고 엄혹하여 좀체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경기 수군절제사로 봉직할 때는 부하의 잘못을 따져서 3명을 장살(杖殺)시킨 적도 있었다. 나중에야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자의 무고로 밝혀졌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걱정이 된 최씨가 액운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물었다. 간절한 최씨의 부탁에 스님은 마지못한 듯 학문보다 무예를 가르칠 것을 권했다. 무엇보다 활쏘기를 능숙하게 익혀두면 후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로 최씨는 자식에게 무예를 가르칠 스승을 널리 구했다. 다행스럽게 순몽은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에 재미를 느꼈는지 나날이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이윽고 열아홉이 되는 해에 순몽은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궁궐에서 한직으로 지내던 어느 날, 그는 궁중에서 벌어진 활쏘기 경연에 나갔다. 그날, 순몽의 활솜씨에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입사면 입사(立射, 서서 쏘는 활), 보사면 보사(步射, 걸으면서 쏘는 활), 속사(速射)까지. 열 발이고 스무 발이고 정곡을 맞히지 못한 화살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세 사람의 무관과 결승전을 앞뒀을 때는 백관을 거느린 태종이 친히 관전에 나섰다.“내 듣기로 궁술에는 통원군 이종무가 뛰어나다더니 여기 또 한 사람의 젊은 궁수가 출현하였구나.”결승전에서 우승한 그에게 태종이 손수 상을 내리며 격찬한 말이었다. 그 뒤로 태종은 신하와 병사들을 데리고 떠나는 사냥에 그를 친히 불러서 데려가곤 했다.몇 년 뒤였다. 한번은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후일의 세종)을 반 강제로 대동하고 사냥에 나선 적이 있었다. 다른 왕자들과 달리 학문에 탐닉하여 눈병이 나도록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충녕의 건강을 우려했던 것이다.고려 때 동주(東州)로 불렸던, 짐승이 많기로 유명한 철원에 도착한 태종 일행은 곧 무리지어 사냥을 시작했다. 각자 넓게 산개하여 사냥감을 쫓아 우거진 숲으로 달려가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범 한 마리가 흉흉한 기세로 충녕이 탄 말을 향해 달려왔다.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었고, 그 바람에 고삐를 놓친 충녕이 말안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말은 달아났고, 범은 곧장 풀밭에 쓰러진 충녕을 향해 달려들었다.마침 주변에는 호위무사들도 없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때마침 말을 타고 달려오던 순몽이 급하게 활을 쏘았다. 정확히 정수리에 화살을 맞은 범은 그 자리서 즉사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무관과 병사들은 범을 잡은 순몽의 놀라운 활솜씨와 충녕대군을 구한 일에 너나없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이 일을 계기로 충녕과 이순몽은 서로 흉금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위험에서 구해준 공로도 있지만 궁중법도에 깍듯한 다른 신하들과 달리 거칠지만 솔직담백한 순몽의 언행에 충녕의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태종은 순몽에게 충녕대군의 호위무관을 겸해 무예를 가르치는 직무를 맡겼다. 하지만 무예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는 충녕은 순몽에게 무예를 배우려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궁궐 바깥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일을 더 흥미롭고 재미있어 했다. #2. 대마도 정벌에 나서다 1417년에 순몽은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말직으로 10여 년을 보낸 후였다. 비로소 운수가 트였는지 다음 해에 그는 궁궐의 병력을 통솔하는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겸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고 이어 우군절제사에 임명되었다.그 당시 고려 말기부터 출몰하던 왜구들은 조선 조정의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태종이 왕권을 바로 세우려고 힘을 쏟는 중에도 충청도와 황해도 해안지역에 출몰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1419년(세종 1)에는 대마도의 왜선 50여 척이 충청도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하여 조선의 병선을 불태우고 민가의 식량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장계를 받은 세종은 조정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왜구들의 근거지를 발본색원하기로 하고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인 이종무(李從茂) 장군을 최고지휘관으로 삼고, 우박(禹博), 황의(黃義) 등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 박초(朴礎) 등을 좌군절제사로, 이순몽, 김을지(金乙知)를 우군절제사로 삼아 출정했다.마산포를 떠난 이종무 부대는 전함 227척에 1만7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대마도의 아소만으로 진격하여 요충지인 두지포(豆知浦)에 상륙하였고, 적의 선박 129척을 빼앗아 쓸 배 20여 척만 남기고 모두 불살랐다. 또 가호(家戶) 1천940여 호를 소각하고 왜적 백여 명을 참수하고 20여 명을 포로로 잡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여기에다 순몽은 왜적들에게 포로로 잡혀와 있던 조선인 8명과 중국인 130여명을 구출하기도 했다.한편으로 이종무 장군은 대마도의 육상 통로이자 요충지인 훈내곶(후나고시·船城)을 장악하고 수색을 벌여 왜구들의 잔당을 토벌하는 작전을 벌였다. 특히 상현(上縣)지역인 니로군에 왜구들이 집결해 있다는 첩보를 접한 정벌군들은 이들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누카다케(糠嶽)산 아래의 요처에 미리 방어진을 치고 기다리던 왜구들의 기습공격에 의해 정벌군에게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때 뒤늦게 토벌전에 참가한 이순몽 장군의 활약은 자못 눈부신 바가 있었다. 다른 장수들이 기습적인 왜적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후퇴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순몽의 부대는 용전분투하며 적을 물리쳤으며, 순몽이 선두에서 활을 쏘아 적장을 몇이나 꺼꾸러트려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로써 다른 장수들과 군사들이 가까스로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지포로 철수한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철군을 결정했을 때 이를 반대한 것도 순몽이었다. 독초는 반드시 뿌리까지 뽑아야 후환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얘기를 전해들은 대마도주 사다모리(宗貞盛)가 마침내 항복을 청하였으며, 얼마 뒤 대마도주는 신하의 예로써 조선을 섬길 것을 맹세하였고 세종의 허락으로 경상도의 일부로 복속되게 되었던 것이다.이 공적으로 세종의 신임을 얻은 순몽은 중군도총제를 거쳐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5년에는 진하사(陳賀使)로 중국에 들어가서 선종(宣宗)의 즉위를 축하하였다.이후 중군절제사가 된 순몽은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여진족)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는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서 판중추원사로 승진했다. 이때 세종은 ‘복장군’이라고 부르며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하는 자도 적지 않아서 그 뒤 몇 번이나 조정 중신들의 탄핵을 받아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지만 세종의 각별한 총애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따져보면 그건 예전 세자였던 충녕을 위기에서 구한 그의 뛰어난 궁술 실력 때문이니, 어릴 적 탁발승의 예언이 신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몽 장군이 살던 집은 현재 영천 성내동에 남아있다. 바로 1433년 지어진 ‘숭렬당(崇烈堂)’이다.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중국식 고택이다. 세종이 장군을 특별히 아껴 중국인 기술자를 직접 불러 하사했다고 한다. 배바닥의 간략(草刻) 등 건축형식은 조선 전기의 양식을 띠고 있지만 일부 재료의 경우 조선 후기의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1970년 문화재로 지정된 뒤 해체 복원되어 원형을 회복했다. 현재 보물 제5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위양공(威襄公) 이순몽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영천이씨 문중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렬당 앞에는 2009년 준공한 2천380㎡ 규모의 숭렬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공동기획:Pride GyeongBuk영천시 성내동에 있는 숭렬당. 조선 세종 때 대마도와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이순몽 장군의 집으로, 1433년(세종 15)에 중국식으로 지은 건물이다.숭렬당 앞에는 2009년 준공한 숭렬공원이 있다. 2천380㎡ 규모로 나무와 조형물,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다.숭렬당 대문 안쪽에는 이순몽 장군의 신도비(왼쪽)와 송덕시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박희섭
2013.07.22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9> ‘마지막 신라인’ 고청 윤경렬(경주)
◆Story Briefing “내 평생의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다.”향토사학자이자 풍속인형가였던 고청(古靑) 윤경렬(尹京烈, 1916~99) 선생이 남긴 말이다.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 경주로 내려와 50여년을 살았다. 그 시간을 풍속인형 제작자로, 초중등학교 미술교사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강사로, 신라 문화를 지키고 알리는 데 앞장섰다. 경주로 내려온 그해부터 ‘고청인형’을 운영했고, 1954년에는 진홍섭 당시 경주박물관 관장과 함께 어린이박물관학교를 열어 교육을 시작했다. 어린이 박물관 교육으로는 국내 최초였다. 1956년에는 신라문화동인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1999년 별세할 때까지 경주시 인왕동 양지마을 고청사에서 머물렀다. 선생이 손수 지은 고청사는 문화유산신탁과 고청기념사업회 주관으로 현재 기념관 조성이 진행 중이다. ‘경주 남산 고적 순례’ ‘경주 남산’ ‘신라이야기’ 등 수많은 저서도 남겼다. 1980년 동아일보 햇님상(어린이보호부문), 외솔상, 경주시문화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국민훈장 은장’이 추서됐다. 그가 평생 가지고 있었던 신라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마지막 신라인’이라고도 불린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는 평생 동안 경주와 신라문화를 사랑했던 고청 윤경렬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1. 아름다운 운명… 인형에 사로잡히다온천으로 유명했던 함경북도 주을은 북방의 마을답게 5월이나 되어야 꽃이 피었다. 선생의 집은 양지쪽 산비탈에 위치한 과수원이어서 배꽃, 능금꽃, 살구꽃, 복사꽃, 오얏꽃이 한꺼번에 흐드러지곤 했다. 또한 북방의 고장답게 이른 겨울부터 눈이 찾아왔다. 김삿갓이 노래했듯이 송이송이 날아오는 눈송이는 삼월 봄나비 같았고, 밟을 때마다 나는 꾸드득 꾸드득 소리는 칠월 개구리 소리 같았다. 그런 곳이었다.선생이 학교에서 제일 처음 배운 노래는 ‘학도가’ 등의 일본 창가였다. 임진왜란을 배우면서도 이순신 장군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고, 석굴암이나 불국사를 공부하면서도 당나라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알았다. 역사, 문학,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가 그런 식이었다. 일본은 우리의 문화전통을 불모지라 했고, 그나마 있는 것도 천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 시절이었다.그렇게 아름다운 곳, 그렇게 모진 시절,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바로 인형이었다.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토우 인형가게에서 처음 접하면서였다. 흙으로 빚어 구운 다음 색칠한 것들이었다. 인형을 구경하느라고 수업 첫 시간에 지각을 하거나, 가게 창에 매달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집에 늦게 돌아가기 일쑤였다.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찰흙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아내선 그 흙을 파다가 했는데, 구울 줄을 몰랐기 때문에 말린 흙 위에 그냥 채색했다. 그래도 그 인형들을 학교에 가져가면 동무들이 좋아했다. 인형을 만들고 새기느라 방바닥이며 옷이 흙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어머니한테 야단도 들었다. 선생은 점점 더 인형에 몰두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인형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만든 풍속 인형은 조선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들이었다. 모멸스럽고 불쾌했으며 자존심이 상했다. 선생은 생각했다.“만일 내가 인형을 만드는 재주가 있다면 더 아름답고 좋은 모습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인형에 대한 선생의 열망은 결국 그를 일본으로 이끌었다. 1935년 일본 규슈 하카타의 나카노코 인형 연구소로 떠나기에 이른 것이다. #2. 열정의 여정… 균형과 조화를 향하다 1938년, 3년 반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선생은 주을에 새로 세워지던 절에서 잠시 단청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3년 개성에 자리를 잡고부터 ‘고려인형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때 고유섭(高裕燮) 선생을 만나면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고유섭 선생은 고고미술학의 선지자로 1944년 당시 개성박물관 관장이었다. 그가 윤경렬 선생에게 던진 화두는 이러했다.“자네 일본에는 왜 갔는가? 자네 손끝에 일본 놈의 독소가 3년 배었다면 그 독소를 빼는 데는 10년 이상 걸릴 걸세.” 선생은 고통스러웠다. 일본에서의 그 긴 시간을 얼마나 어렵게 견뎌냈던가. 하지만 윤경렬 선생에게도 민족의식은 강했다. 주을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있었던 선생의 부모도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었고, 무엇보다도 고향에서 겪은 광주학생운동이 남긴 불덩이가 가슴에 뜨겁게 살아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전남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 항일운동을 말한다.)선생은 결심했다.“일본 놈의 독소를 빼기 위해서는 역사가 깊은 곳으로 삶의 터를 옮겨야겠다. 백제 유적이 부드럽고 따스하니 부여나 공주도 좋겠지만, 통일신라 유물은 고구려, 백제, 가야 등 우리 겨레의 지혜가 뭉쳐 이루어진 것이니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바로 경주였다. #3. 천년의 만남… 나는 마지막 신라인이라1948년, 선생은 경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치 기갈이 든 사람처럼 계림으로, 첨성대로, 괘릉으로, 석굴암으로 헤매고 다니면서 신라의 향기에 한없이 취했다. 선생은 확신했다. 경주야말로 일본의 독소를 지우고 우리 풍토에 맞는 밝고 찬란한 예술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이다. 선생은 먼저 교육에 눈을 돌렸다. 경주 시민 모두가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려면 아직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952년 경주박물관 관장이던 진홍섭 선생을 만나면서 그 뜻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경주 어린이 박물관 학교의 탄생이 그것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절이라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이 모이고 쌓였다. 드디어 1954년 10월10일, 박물관에서의 첫 수업이 이루어졌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돈은 어떠한 명목으로도 받지 않았으며, 수업 시에는 존댓말을 썼다.그러는 동안 선생은 점점 더 깊어졌다. 훗날 신라문화가 백제문화를 배척하지 않았느냐는 시비에 대한 선생의 답이 인상 깊다. “석굴암의 조각을 보면 남자처럼 엄격하면서도 여자처럼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운 건 백제적 요소이고, 엄격한 건 고구려적 요소입니다. 신라인들은 그런 요소들을 합쳐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했으니 삼국의 문화가 조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온조 왕조가 막을 내린 것일 뿐입니다. 권력이 바뀐다고 민족이 멸망하는 거라면 지구상에 남아있을 민족은 없습니다. 백제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숨 쉬고 있는데 멸망했다는 말은 하지 맙시다.”또 하나, 선생이 무섭도록 집중한 것은 경주 남산이었다. 서라벌 남쪽에 있다 해서 이름이 붙은 남산은 신라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쪽의 나정(蘿井)은 신라 첫 임금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곳이었고, 근처 양산재(楊山齋)는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에 있었던 6촌의 시조를 모신 사당이었다. 포석정은 신라 말기에 경애왕(신라 제55대 왕, 재위 924∼927)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곳으로 신라의 종말을 상징했다.그뿐만 아니라 경주 남산은 최고봉인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4골과 180봉을 안고 있는데 여기엔 고분, 왕릉, 절터, 불상, 탑 등 엄청난 유적이 있었다. 발길 스치고 눈길 머무는 산골짝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인 셈이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서라벌에 대한 일연 스님의 비유 부분이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사사성장 탑탑안행)절들이 별처럼 펼쳐지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날아간다.어쩌면 위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붙여도 될 정도로 남산은 서라벌의 상징이었고, ‘산속의 노천박물관’이었다. 선생도 ‘남산을 보지 않고서는 신라를 안다고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선생이 남산을 조사하기 위해 들인 시간과 공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600여 차례 산을 오르내렸고, 자료를 모아 정리했다. 그 성과로 ‘경주 남산 고적 순례’ 등 여러 책을 출판해 남산을 더 자세히 알릴 수 있었다.#4. 운명의 땅… 양지마을에 남다경주 남산의 북쪽 끝자락과 경주박물관 사이에 아담한 마을이 있다. 양지마을이다. 남천을 중심으로 동쪽을 양지마을, 서쪽을 음지마을, 그렇게 부른다. 양지마을은 아침에 뜬 해가 온종일 마을을 비추다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나면, 그 남긴 마지막 열이 동네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남천 제방이 생기기 전에는 남천의 양쪽 강변에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어 경치가 아주 좋았다. 이 양지마을을 선생은 무척이나 사랑했다. 경주에 처음 왔을 때부터 살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새천년을 한 달여 남겨둔 1999년 11월30일, 선생은 마을을 떠났다. 하늘의 부름이었다. 고향이 이북인 탓에 하고자 하는 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더운밥이 단 줄도 모르고, 살얼음판 딛듯이 살아온 긴 시간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겨울을 택해 떠난 것이었다. 시인 서영수는 선생을 이렇게 노래했다.곱슬머리 타래진 얼굴 저편에/ 천년 신라가 누워 앓고 있는데/ 흰 두루막 고무신을 솔가지에 걸어놓고/ 삼화령 높은 봉에 꿈을 캐는 그림자여꿈을 캐는 그림자…. 그랬다. 그림자란 홀로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이나 사물에 따라붙는 것이 그림자다. 그렇다고 그림자의 가치가 떨어질까? 아니다. 그림자가 있음으로 해서 사람이나 사물은 자신이 가진 생명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은 신라의 그림자였다. 선생으로 인해 신라문화는 더 빛날 수 있었다. 또한 선생은 남산을 지키는 산신령으로, 신라를 지키는 마지막 신라인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는 떠났어도 떠난 것이 아닌 것이다. ‘인생이란 완전한 발판 위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불완전한 발판을 쌓으면서 사는 것이라 생각된다. 가끔 오랫동안 남의 생각에 맞추어 움직여온 손끝이 아닌가 싶어 솔직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솔직해지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솔직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때는 어릴 때 제일 처음으로 흙으로 만들었던 것을 다시 만들어본다. 불완전한 발판들이 쌓이고 쌓여서 몇 대가 흐르면 그래도 뭔가 꽃이 피지 않을까 간절히 기대해보면서……’-자서전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 중에서 ▨참고문헌=마지막 신라인 윤경렬(학고재)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경주시 인왕동 양지마을에 있는 윤경렬 선생의 옛집인 고청사. 1999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무르며 어린이박물관학교 운영과 신라문화 연구에 힘썼다. 현재 전시공간과 체험장 등이 있는 기념관으로 조성 중이다.고청사에 전시되어 있는 윤경렬 선생의 공예품. 선생은 우리 고유의 풍속인형을 만드는 것을 평생의 보람으로 여겼다.1954년 윤경렬 선생이 처음 시작한 어린이박물관학교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청 윤경렬김진규
2013.07.15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8> 천혜의 요새 가산산성(칠곡)
◆ Story Briefing 칠곡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잇단 외침에 대비해 축성된 산성이다. 당시 경상도 60고을의 산성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금오·천생산성 3곳밖에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지(適地)에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할 수 있는 산성을 쌓기로 하고, 가산산성을 축성한다. 1639년(인조 17)에 성을 쌓기 시작해 1701년까지 60여년에 걸쳐 축성됐다. 국내에서 드물게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뤄진 산성이다. 처음 내성을 쌓을 때는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해 민심이 동요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공사를 총괄했던 경상도관찰사 이명웅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반면에 외성 축성을 담당했던 관찰사 이세재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내성이 완성된 후에는 이곳에 칠곡도호부를 설치·운영하기도 했다. 가산산성은 오랜 기간 힘들게 쌓았지만 성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6·25전쟁 때야 ‘요새’로의 역할을 한다. 현재 성벽 대부분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8편은 칠곡 가산산성에 대한 이야기다. #1. 인조임금의 불안 가산(架山· 해발 901.6m)은 칠곡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다. 팔공산 비로봉에서 시작되는 산맥의 서쪽 끝자락을 가산이라 부른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활약했던 천생산성과 낙동강전투의 최후 보루였던 유학산, 다부동이 가깝다. 꼭대기는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 요새를 만든 것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1595~1649)때 일이다. 인조는 유독 성(城)과 인연이 많은 임금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충청도 공주까지 내려가 공산성에 몸을 의지했다. 정묘년에 후금(後金)이 침입했을 때는 강화도로 가서 성문을 닫아걸었고, 후금이 청(淸)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남한산성에 있었다. 바로 병자호란이다. 한 달을 넘게 버티다가 성문을 열었다.“오직 대의(大義)를 지켜야 한다는 것만을 생각하며 외로운 성에서 포위당한 채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다. 군졸이 부족하자 학사(學士)들에게 창칼을 쥐어주고, 콩 반쪽으로 배를 채웠으며, 지붕을 뜯어 말에게 먹이고 나무뿌리로 불을 땠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죽음을 다해 굳게 지킬 것을 맹세하면서 외부의 구원을 기다렸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포탄이 성벽을 때려 맞는 곳마다 부서졌고, 사람 수와 식량을 계산하니 열흘을 지탱하기가 어려웠다.”인조는 쪽빛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서 백마를 타고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갔다. 청나라 황제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세자를 볼모로 보내고 젊은 여인을 조공으로 바쳤다. 굴욕적인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뒷감당을 하면서 인조는 이를 갈았다. 청의 눈치를 봐가며 조선은 남한산성과 강화성을 보수하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성을 축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일은 은밀하게 진행됐고, 때로 추궁을 당하면 왜(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허술한 틈을 타 왜가 임진년과 같은 일을 벌이지 않을까 항상 불안했다. #2. 이곳을 두고 어디에 성을 짓겠는가1639년 4월, 이명웅(李命雄·1590∼1642)이 경상도관찰사로 내려가며 인조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인조가 물었다. “경상도는 왜인(倭人)이 통하는 중요한 길목임에도 부산에서부터 문경새재까지 마땅한 요새가 없다고 한다. 금오(金烏)와 천생(天生)에 대해서 아는가?”“천생산성은 기세는 험하나 우물이 없으니 실로 지킬 만한 곳은 못되며, 금오산성은 안팎이 바위에 둘러싸여 성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합니다. 뺏기지 않을 요새이긴 하지만 터가 비좁아 성을 지키는 쪽도 곤란을 겪긴 마찬가지라 들었습니다.” 인조는 새로 성을 쌓을 만한 데를 물색해보라고 주문했다. 얼마 뒤 관찰사가 가산(架山)을 추천했다.“신이 살펴보니 가산은 본영(本營,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과 50리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동쪽으로는 40리,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두 길로 통하며, 서남쪽 40리 거리에 낙동강이 흐릅니다. 또 금오산성과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응원하는 형세를 이루니, 남쪽 지방의 방비하는 곳으로는 실로 천혜의 요새입니다.” 인조는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대견해했다.“만약 성을 짓는다면 이곳을 놔두고 어디에 짓겠는가? 산은 일찍 추워지니 하루라도 서둘러라.”1639년 9월부터 이듬해 1640년 봄까지 공사가 이어졌다. 10만 장정이 동원되어 돌을 산꼭대기로 날랐다. 경상도에서 끌어 쓸 수 있는 물력과 인력이 이곳에 집중되었고, 서둘러 일을 마치려는 관찰사의 욕심에 인명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자연히 민심은 나빠졌고, 헌부(憲府)에서 관찰사를 탄핵했다.“관찰사 이명웅은 왕명에 부응해 일처리를 신중히 해야 함에도 형장(刑杖)을 지나치게 썼습니다. 백성들은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며 공사장에서 죽은 자가 몹시 많습니다. 이명웅을 파직하소서.”인조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날 최우선은 성을 짓는 것이다. 성을 만드는 일은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명웅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다.”헌부도 물러서지 않았다. “성이 한갓 백성을 고달프게 하는 도구라면, 비록 성의 높이가 10장(丈)이고 양식 쌓인 것이 언덕과 같다 하더라도 누가 산성을 곱게 쳐다보겠습니까?”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당했던 치욕이 떠올랐다. 장졸들은 무기를 버리고 숨기에 바빴고, 아무도 구원하러 오지 않던 그때. 그 겨울날의 처절한 공포와 외로움이 새삼 몸에 사무쳐왔다. 더욱 쓰디쓴 말이 왕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다.“옛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을 피곤하게 해서 완성했고 백성의 기름을 짜서 채워놓고는 또 목숨을 바쳐서 지키라고 한다면 그 누가 함께 하겠는가’ 했습니다.” 인조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오로지 일을 성사시키는 것에 힘쓰고 백성의 고통은 돌아보지 않았다. 원망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으니 성이 있은들 내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왕은 관찰사를 교체했다. 공사는 이미 마무리 단계여서 1640년 5월, 가산성(架山城)에 칠곡부(漆谷府)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때는 정상 부근의 내성(內城)만 있었으며, 그 뒤로 60년에 걸쳐서 중성(中城)과 외성(外城)이 완공되었다.하지만 관아를 산 정상에 두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전쟁에 활용하기엔 유리한 공간일지 몰라도, 이용하는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전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결국 1819년에 와서야 관아를 산 아래로 옮긴다. #3. 또 다른 관찰사 이세재조선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산성은 조용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적이나 오랑캐도, 화살과 포탄이 날아든 적도 없었다.1950년 여름, 인민군 게릴라부대가 가산산성을 장악했다. 낙동강을 넘어 다부동 전선을 돌파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적군이 국군 방어선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적은 동명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1사단 사령부를 습격한 다음 산성으로 숨었다. 인민군이 천혜의 요새를 차지해 농성을 벌이고 국군이 공성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약 열흘간의 전투 끝에 성을 탈환했지만 국군에게도 많은 손실이 따랐다. 이제 총성은 멎고 산에는 정적이 감돈다. 1971년, 가산산성은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팔공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도중에 표지판을 보고 발길을 멈춘다. 산성길을 거닐다가 남문 앞에서 오래된 비석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 작은 비각 안에 서 있는 비석은 또 한 사람의 경상도관찰사를 기억하고 있다. 바로 이세재(李世載·1648~1706)였다. 그는 아주 엄격한 관리였다. 일찍이 평안도관찰사로 일할 때는 그곳을 지나던 청나라 사신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조선 관찰사의 위엄이 청에도 널리 알려져 그가 연경(燕京)을 방문했을 당시 각별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이세재는 1700년 가산산성의 외성 공사를 지휘하기 시작해 이듬해인 1701년 완료했다. 그는 자신의 공을 쌓는 일에 산성과 백성을 이용하지 않았다. 노역을 감당할 장정을 뽑을 때는 공정했고, 시한을 정해놓고 몰아붙이지 않았으며, 손이 바쁜 농사철과 추운 겨울을 피했다. 성내에 항시 비축해야 할 군량미가 모자랄망정 집집마다 사정을 봐가며 거두었다. 외성을 만든다고 했을 때 고달픔을 예상하고 한숨짓던 경상도 백성들은 관찰사의 선정을 칭송했다. 조정에서 외성의 공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묻자 이세재가 대답했다.“높은 성을 완성하지 않았는데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은 피곤하며, 외환이 있기 전에 내환이 먼저 싹튼다면, 그때에 비록 뉘우치더라도 일을 돌이키지 못할 것입니다.”민심을 헤아리고 어루만질 줄 알아서였을까. 경상도를 떠난 뒤에도 그는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관으로 자주 기용되었고,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자자했다. 형조참판으로 있던 1706년, 59세로 세상을 떠나니 모두 안타까워했다. 너그러운 경상도관찰사를 잊지 못하던 지역민들이 1708년 가산산성 한쪽에 ‘관찰사이공거사비(觀察使李公去思碑)’를 세웠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왔는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조정일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공동기획:pride GyeongBuk칠곡 가산산성(사적 제216호) 전경. 잇단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60여년에 걸쳐 쌓은 산성이다.외성축성을 지휘했던 경상도관찰사 이세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심을 헤아리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 이세재를 잊지 못한 민초들은 가산산성 한쪽에 ‘관찰사이공거사비(觀察使李公去思碑)’를 세워 그의 뜻을 기렸다.조정일
2013.07.08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7> 오누이탑은 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나(구미)
◆Story Briefing‘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7편은 구미 선산의 오누이탑에 대한 이야기다. 예부터 오누이탑이나 쌍둥이탑은 서로 나란히 서 있으면서 그 모습도 닮은 것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계룡산 청량사지 오누이탑은 닮은 모습에, 피붙이 남매처럼 다정하게 붙어 서 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동사 쌍둥이탑도 서로 외로울세라 짝이 되어 한자리에 서 있다. 그런데 구미 선산에 있는 오누이탑은 그렇지 않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 모양도 다르다. 한쪽은 오층석탑이고 한쪽은 삼층석탑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어느 쪽에서도 서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두 탑을 오누이탑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연 때문일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거인 오누이의 힘자랑 “어쩌다 저런 거인들이 내 배에서 나왔는지……” 어머니는 싸움질에 여념이 없는 남매를 보며 혀를 찬다. 아침부터 저 모양이다. 먼저 잠을 깬 딸이 남자 동생을 깨우는가 싶더니, 부리나케 함께 산으로 내달아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누가 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지 내기를 한다. 돌을 들어 올려 내던지는 소리가 쿵쿵 난다. 동네 사람들이 마을 앞에 나와 산을 올려다보면서 감탄을 한다. “장사 났네. 장사 났어.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봐도 예사 아이들이 아닐세.” 열 살도 안 된 꼬마들이 어른도 들지 못하는 돌들을 가볍게 들어 던지는 것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덕진 곳에는 남매가 내기 삼아 던져 놓은 돌들이 산처럼 이쪽에 쌓였다가, 다시 저쪽으로 옮겨지곤 한다. 어머니는 그런 딸과 아들을 향해 목청을 돋우어 부르곤 한다. “얘들아, 밥 먹으러 오너라!” 그러면 남매는 서로 먼저 내려오려고 산비탈을 내달려 온다. 비호같다. 얼마나 체구가 좋은지 그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천둥 치는 듯하다. 그러고는 보리밥일지언정 푸짐하게 차린 상 앞에 앉아 폭풍우처럼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것이다. 고봉밥을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밥이 더 없는지 입맛을 다신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린 것들이 살림을 거덜 낸다고 푸념을 하면서도 한 그릇씩 더 퍼서는 상에 올려놓는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남매는 태어날 때도 예사롭지 않았다. 딸은 태아 적부터 덩치가 커서 낳는 데 생고생을 했다. 그 울음소리가 웬만한 사내아이보다 커서 가히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살림밑천이라는 첫딸 아닌가? 어머니는 그 우람한 딸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기의 손이 엄마의 주먹을 감싸자,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아이쿠, 얘 힘 좀 보소. 이게 어찌 어린애 손힘이오?”라며 자랑을 해댔다. 이어서 또 애가 들어섰는데, 낳고 보니 아들이었다. 역시 힘이 장사였다. 먼저 나온 딸이 동생을 밀쳐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힘이 대단했다. 둘은 가까이 두면 언제나 티격태격했다. 어머니는 그런 남매가 든든하기도 했지만, 내심 겁이 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덩치가 커서 제대로 거두어 먹이기가 여간 벅차지 않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집안에 장사가 났다는 소문이 다른 동네까지 퍼져나가 돌아다니는 모양이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예부터 고을에 장사가 나면 나라에서 가만 놔두지 않았지 않은가. 혹시라도 그 힘으로 나라에 해를 끼칠까 봐 미리 제거를 하기도 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만 보이면 힘 단속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고민을 알 리 없었다. 타고난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어디든 내닫기 예사였고, 무거운 것을 들어 올려 돌리거나 멀리 던지기가 예사였다. 곰처럼 작은 나무들은 뿌리째 뽑아 내던지기도 했다. 남동생이 생기자 누나의 힘자랑은 더욱 기세가 높아졌다. 매일 동생을 부추겨 내기를 하느라 온 천지가 우당탕거렸다. 그런 애들의 힘을 누그러뜨리려고 밭뙈기를 넓히거나 돌밭을 개간하는 일을 시키면 그것도 남매가 내기로 하면서 순식간에 일을 쳐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힘이었다. 덕분에 수확이 늘어나 살기는 나아졌지만, 남매의 기세 때문에 어머니의 불안은 더욱 높아만 갈 뿐이었다. 열 살을 넘어서면서 그 기세는 더욱 강성해진다. 남매는 산과 들을 내달리면서 종일 내기에 골몰한다. 산과 들에서 풋나무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면서 며칠을 집에 들르지 않을 때도 있다. 어머니는 자주 딸과 아들을 부르지만, 대답을 듣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어머니는 자주 사립문 밖에 서서 앞산과 들을 내다보며 불안해한다. 산과 들, 그리고 강가에서는 남매의 숨결이 거칠게 배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 기세가 야성적이어서 누구든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저 기세를 어떻게 누그러뜨려야 하나? 무슨 방법이 없을까?” 어머니는 언제나 그 생각에 골몰한다. #2. 탑 쌓기에 목숨 걸다 어느덧 장사 오누이의 나이가 스무 살 안팎에 이른다. 어머니도 늙음을 느낀다. 마을의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강을 사이에 두고 질펀하니 들이 펼쳐져 있다.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가던 승려가 어머니에게 탁발을 한다. 감자와 보리쌀을 한 바가지 퍼서 승려의 탁발 주머니에 부어준다. 승려는 인사를 하면서 잠시 들을 내려다보며 쉰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참 좋은 자리네. 이 자리에 탑이라도 세우면 얼마나 멋질까?” “탑이라니요. 우리 집터가 절 자리란 말입니까?” “뭐 그렇다는 얘깁니다. 탑을 세우는 일은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건 아니지요. 큰 인연이 닿아야 가능할 뿐입니다.” 승려는 인사를 하고는 가 버린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하여 남매를 불러 앉히고는 말한다. “나도 이젠 꽤 늙었구나. 너희들 앞에서 내가 원을 세우고 싶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무슨 원인데요?” “스님이 이 자리가 절터라는구나. 내세의 복을 짓기 위해서 우선 탑이라도 조성하고 싶다만……” “그거야 제가 쌓지요.” 딸이 말했다. 아들 역시 지지 않고 말한다. “아니요. 제가 쌓겠습니다, 어머니.” 둘은 금세 으르렁거린다. 어머니는 말한다. “그래, 너희들은 힘이 세니 그런 일을 쉬 해낼 수 있겠지. 힘을 합해서 탑을 지으면 더 좋지 않겠니?” 이에 남매는 고개를 흔든다. 혼자서 해내겠단다. 어머니는 말한다. “그렇다면 내기를 하면 어떻겠니? 누이는 여기서 오층탑을 쌓고, 저 큰 강 건너편에는 동생이 탑을 쌓는 거야. 먼저 쌓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남매는 좋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잘 됐다고 여긴다. 탑을 쌓다 보면 그 거친 성정이 순화가 되리라고 믿은 것일까? 그리하여 오층탑 먼저 쌓기 내기가 바로 이루어진다. 여기서부터 두 가지 얘기가 전한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 누이는 죽장동에서 탑을 쌓고 동생은 낙동강 건너 해평면 낙산동에서 탑을 쌓는다. 그런데 처음부터 누이가 남동생을 앞지른다. 아들이 먼저 쌓기를 원했던 어머니는 이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궁리 끝에 딸에게 말 일천 필을 한양에 몰아다 주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딸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양에 갔다 와서도 여전히 누이가 먼저 탑을 쌓는다. 어머니는 다시 궁리한다. 딸에게 뜨거운 팥죽을 먹이면 먹는 시간이 길어 아들이 따라 붙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팥죽을 팔팔 끓여주면서 배고프니 먹고 하라고 억지로 권한다. 그래도 누이가 더 빠르다. 결국 딸이 먼저 죽장동에 오층석탑을 쌓는 바람에 아들은 탑 쌓기를 그만두어 지금의 낙산동 삼층석탑이 된다. 두 번째 얘기는 딸을 더 사랑한 어머니의 모습을 강조한다. 어느 해 오누이는 심한 의견 충돌이 있어 힘을 겨루어 이기는 쪽이 지는 쪽을 죽여 버리기로 한다. 아들은 오십 리나 떨어진 금오산 중턱에 있는 큰 돌을 가지고 오고, 딸은 돌을 열두 자 높이로 쌓아 올리기로 약속한다. 이튿날 아침 해뜨기 전까지 먼저 끝내는 쪽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남매의 어머니는 성질이 아주 사납고 괴팍스러웠다. 딸이 이기기를 바라서 일부러 아들을 먼 곳까지 심부름을 보내고 많은 일도 시킨다. 이튿날 날이 밝자 딸은 탑 꼭대기에 돌을 얹었으나 아직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늦게야 돌아오던 아들은 동네 어귀에서 멀리 쌓아 놓은 탑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그는 죽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그만 바위를 그곳에 던지고 멀리 도망해 버린다. 아들이 버리고 간 돌은 아직도 절 아래의 동네 어귀에 남아 있다고 한다. #3. 국보로 우뚝 선 탑 아들과 딸을 선호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두 이야기 속에서 극단으로 달리 나타나는 게 이상하고 재미있다. 아들 선호는 오래전부터 있어 온 풍습이지만,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현상은 흔하지 않다. 굳이 아들을 제쳐 두고 딸이 이기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심리상태는 어떠했을까? 아들을 싫어하는, 일종의 남성혐오증을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을까? 남성 혐오는 남편과의 불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일까? 남편이 죽은 후 남편으로부터 받은 학대와 멸시를 떠올리면서 그것이 상처가 되어 남성을 미워하게 돼 그 반작용으로 왜곡된 딸 사랑이 나타난 것이라는 분석을 하는 이들도 있다. 말하자면 어머니에게 있어서 아들은 죽은 남편을 떠올리는 존재이며, 딸은 어머니 자신의 자아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설화 속에 나오는 오누이탑은 이야기의 현장에 남아 있다. 딸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탑은 구미 선산읍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죽장리의 한 사찰(죽장사)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높이 10m에 달하는 오층석탑이다. 반면에 동생이 쌓은 탑은 낙동강을 사이에 둔 해평면 낙산리 허허벌판에 있다. 내기에서 진 아들이 탑 쌓기를 그만두어 삼층석탑으로 서 있다. 이야기의 전개가 그렇듯 승자인 누이가 만든 오층탑은 당당하고, 패자인 남동생(또는 오빠)이 만든 (또는 만들다 만) 삼층탑은 초라하다. 생김새가 그렇고, 보존상태도 그렇다. 특히 죽장리 오층석탑은 국보 제130호로, 오층석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탑에 속한다. 안동과 의성 지역에서 유행했던 모전석탑(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석탑) 계열로, 웅장하고 세련된 통일신라 석탑의 우수한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힘이 장사인 남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미 오누이탑. 내기에서 이긴 누이가 쌓은 죽장동 오층석탑(위)은 현재 구미 선산읍 죽장리의 한 사찰(죽장사)에 자리하고 있다. 1968년 국보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반면 동생이 쌓은 삼층석탑은 낙동강 건너 해평면 낙산리 허허벌판에 서 있다. 1968년 보물 제469호로 지정되었다.이하석
2013.07.01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6> 구국의 횃불, 의병장 이강년(문경)
◆ Story Briefing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1858~1908)은 문경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내려지자, 분을 삼키지 못하고 문경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해 일제에 저항했다. 1907년 정미의병 때는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돼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908년 7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붙잡힌 뒤, 그해 10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는 삼국시대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모두 22명의 호국인물을 선정해 흉상을 세워 기리고 있는데, 운강이 포함돼 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6편은 문경 출신 의병장 이강년의 치열했던 삶과 그의 항일투쟁사를 다뤘다. #1.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다서대문형무소 안은 어둡고 서늘했다. 추위가 찾아드는 시월 중순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쇠창살로 막힌 창문 사이로 죄수들의 밭은 기침소리와 병자의 무거운 신음이 간간이 새어들었다. 이층 벽면에 난 작고 네모진 환기창에 푸른 기운이 비치는 걸 보면 조만간 아침이 밝아올 터였다.좁은 독방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맨 상투바람의 50대 남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혹독한 수인생활로 인해 몹시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엄이 감돌았다. 그는 구석으로 가서 미리 준비한 한지 한 장과 붓과 벼루, 그리고 그릇에 담긴 물을 가져왔다. 차가운 바닥에 정좌한 그는 곧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수양이나 하듯 묵묵히 먹을 갈던 그의 눈길에 문득 깊은 회한이 스쳐갔다. 지나온 어린 시절을 회상이라도 하는 것일까.이강년(李康秊). 어릴 적의 자는 낙인(樂仁)이었고, 호는 운강(雲崗)이었다. 그가 태어난 해는 오랜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국정이 문란하던 1858년(철종 9) 12월이었다. 문경 가은읍 완장리에서 그는 태어났다. 불운하게도 두 살 무렵 부친을 여읜 그는 백부의 집에서 자라야 했다. 여러모로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성장하면서 남보다 훤칠한 기골을 드러냈고, 장중한 외양만큼이나 불의와 부정에 굴하지 않은 강직한 성품을 가진 그를 두고 주위사람들은 장래 나라를 구할 장군감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주위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는 1880년 스물둘 젊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곧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조정은 그야말로 난국의 분란과 권력의 몰염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 점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지고 고향에 은거하여 학문에 열중하였다.하지만 격랑의 역사는 그를 온전히 놔두지 않았다. 1894년경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민초들의 고통과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분연히 동학군에 투신했다. 그러나 물밀듯 밀려드는 외세에 의해 오백 년 종묘사직은 힘없이 기울었고, 끝없이 타오를 것 같던 동학혁명의 불길도 일본군과 결탁한 관병들의 공세로 안타깝게 사그라지고 말았다.얼마 뒤인 1895년(을미년), 나라의 운세가 기운 것을 기화로 일본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가 자국의 낭인들을 궁궐에 침입하도록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에 불까지 질렀던 것이다. 여기에 김홍집 친일내각은 유길준 내부대신을 시켜서 전국에 단발령까지 내렸다.평소 누구보다 투철한 애국정신을 가졌던 그로선 거듭되는 일본의 흉악무도한 만행에 심한 의분을 느꼈다. 그는 왜적을 소탕하기로 하늘에 맹세하고 사재를 털어서 의병들을 모집하였다. 그는 먼저 왜적들의 앞잡이로 고을 양민들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을 비롯한 3명을 생포하여 시장터에서 그들의 반역행위와 죄상을 백일하에 들추어내어 효수하였다.뒤이어 제천으로 간 그는 당시 의병대장이었던 의암 유인석에게 사제의 예를 표하고 의진에 합류하였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던 농민과 유생들로 이루어진 의병부대를 이끌던 유인석은 동학전투에 참가하여 실전경험까지 갖춘 그를 기꺼이 맞아들였다. 의병부대의 유격장이 된 그는 문경전투와 수안보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문경의 조령을 장악하고 제천대회전(堤川大會戰)에 임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전세는 의병들의 열세였다. 관군에 패한 유인석의 의병부대는 요동으로 향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가려던 그는 영월에서 진로를 차단당한 채 소백산에 진을 치게 되었다. 이후로 아관파천과 관군의 회유, 보급물자 조달의 어려움이 겹치면서 그의 의병부대는 해산의 길을 걷게 되었다.#2. 광무황제의 밀서를 받고…단양 금채동에 은거한 그는 학문을 연마하는 틈틈이 후일에 있을 일본군과의 전투를 대비했다. 의병부대의 전술과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의병의 조직도를 비롯하여 진격과 후퇴요령까지 기록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예견은 헛되지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맛본 일본은 마침내 그 흉악한 강제합병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친일대신들을 앞세워 수차례 광무황제를 협박하고, 불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1907년(정미년) 3월.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던 그는 몸을 떨치고 일어나 원주와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제2차 의병전에 돌입했다. 그는 원주읍의 무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갖추고 군세를 확장하였다. 그해 7월에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의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의진을 위시한 여러 의병들과 연합하여 적군 500여 명을 토벌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당시 외세를 내몰기 위해 내정개혁을 실시했던 광무황제는 이 전투소식을 들은 뒤 곧 그를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는 직위인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했다. 아울러 그에게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의병으로 선발, 소집하는 권한을 주었고, 만일 그의 명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일지라도 파직하고 내쫓으라는 밀서를 내렸다.한편으로 제천에서의 승전보를 듣고 의기충천하여 각지에서 몰려든 40여 의병진은 제천에서 그를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준비된 사람만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했던가. 이후로 여러 전투에서 있었던 그의 활약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제천 추치와 죽령에서 적 400여 명을 사로잡고, 단양 고리평에서 80여 명,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도 적 100여 명을 사로잡는 뛰어난 전과를 올리는 등 의병부대의 선봉에서 거듭 승리를 이어나갔다. 그런 놀라운 승전의 바탕에는 그의 뛰어난 용병술은 물론, 유인석 선생을 위시한 유림과 선비들과의 돈독한 교분과 광무황제의 도체찰사로의 신임, 무엇보다 아들 3형제를 모두 의진에 참가토록 하는 등의 자신과 가족의 안위보다 나라를 걱정하는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가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패배도 없지 않았다. 눈보라 치는 추운 날씨에 산중에서 적과 대치하던 그는 결국 과로로 병을 얻게 되고, 11월 풍기 북상동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큰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부하 장령들을 보며 그는 몹시 슬퍼하며 통탄했다. 그가 의병으로 나선 지 십여 년 만에 처음 맞이한 지독한 패배였던 것이다.그러나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강인한 용기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 후로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모여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을 때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연합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은 일제의 발악적인 저지와 혹독한 폭설, 식량과 탄약의 부족으로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에겐 천추의 한이나 다름없었다.#3. 이 몸 죽은들 싸울 뜻까지 사라지랴상념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붓을 손에 들었다. 어느덧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굳센 결의의 빛이 흘렀다. 삼엄한 감방복도를 울리는 구둣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는 붓으로 한지에 몇 줄의 짧은 글귀를 일필휘지로 써나갔다. 곧 그의 감방 앞에서 구둣발소리가 멎었다. 그는 그게 무슨 뜻인 줄 짐작했다. 일전에 재판부로부터 이미 교수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다. 자물쇠 따는 소리와 함께 감방 문이 열리고, 제복차림의 간수가 그를 호명했다. 기다렸다는 듯 결연히 몸을 일으키던 그가 일순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누런 광목천으로 동여맨 왼쪽 복사뼈 부위가 퉁퉁 부어오른 채 괴사해가고 있었다. 지난 유월에 충북 청풍의 까치성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자리였다. 돌이키면 참으로 통한에 찬 전투였다. 당시 심한 장맛비로 인해 의병들의 화승총이 못 쓰게 되지 않았거나, 발목에 심각한 총상만 입지 않았어도 백전불굴의 의병장인 그가 일본군의 손에 사로잡히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터였다.감방 안으로 들어온 두 명의 간수가 은연중 경외감을 드러내며 그를 양쪽에서 부축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이상 다른 죄인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간수도 들어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재판정에서 ‘국가의 세금을 축내는 것이 의병인가?’라는 판사의 질문을 받은 그는 가슴을 펴고 의연히 ‘임금의 마음을 받들어 국가의 어려운 일에 앞장서서 나라의 공금을 사용한 것이 역적이냐, 아니면 원수인 적의 세력에 의지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적은 섬기면서 국가의 녹을 받는 것이 역적이냐?’라고 되묻고는, ‘내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이 나라를 삼키려는 왜놈들을 섬멸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박제순을 비롯한 을사5적, 7적을 죽여 국가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 한 것이다!’라며 통렬히 재판장을 꾸짖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것 좀 전해주게.’간수에 둘러싸인 채 형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가 품속에서 꺼낸 한지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그의 처절한 심경을 여실히 드러낸 시였다.五十年來判死心 到今寧有苟生心 盟師再出終難復 地下猶存昌劍心오십 평생 살아오며 한 목숨 던진 바에 이제 와서 구차하게 삶을 구하랴만 적을 무찌를 일 돌이키기 어려워라. 이 몸 죽은들 싸울 뜻까지 사라지랴. ◆운강 이강년 기념관 운강의 치열했던 삶과 그의 항일투쟁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운강 이강년 기념관’이다.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다.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운강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02년 4월 개관했다. 기념관은 전시관, 사당, 관리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에서는 의병활동 연보를 비롯해 훈장 및 포장, 재산 전투 디오라마, 운강 의병부대 활동상 등을 볼 수 있다. 또 의병의 전술이 기록된 ‘속오작대도’와 ‘운강선생문집’, ‘운강 선생 무과급제 교지’ 등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조총, 의병창, 화약통, 활, 화살, 관복, 문서통 등도 관람할 수 있다. 영정은 사당에 봉안돼 있다. 입장은 무료,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동절기에는 오후 5시까지 단축 운영한다.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pride GyeongBuk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운강 이강년 기념관’에 있는 동상.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진 운강의 곧은 결기가 느껴진다.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이강년신도비.기념관에는 운강의 의병활동 연보를 비롯해 속오작대도, 문집, 교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박희섭
2013.06.24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5> 조선조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 ‘존애원’(상주)
◆Story Briefing 상주 존애원은 조선조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무렵인 1599년(선조 32) 유림들이 조직한 낙사계를 기반으로 설립됐다. 진료건물인 ‘존애당(存愛堂)’은 3년 뒤인 1602년에 세워졌다. 전쟁 직후여서 백성들은 전염병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약 한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더욱이 지방의 의료환경은 극히 열악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13개 문중(무송 윤씨가 빠져 지금은 12개) 24명(후일 30명)이 계를 모아 설치·운영한 것이 존애원이다. 질병으로부터 ‘향토민은 향토민이 구한다’는 취지였다.존애원 설립은 상주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난 유학자 정경세를 비롯해 성람, 이준, 김각 등이 중심이 되었다. 지도층인 유림들이 동참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가 담겨 있는 민간 의료구휼 활동으로 평가 받고 있다. 존애원의 이름은 ‘본심을 지켜(存心) 만물(남)을 사랑(愛物)한다’는 뜻을 지닌 중국 송나라 학자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 사상에서 따왔다. 진료는 관에서 물러나 처가인 상주에 머물고 있던 성람이 맡았고, 운영은 계원들이 판매한 약재의 이윤 등으로 충당했다.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5편은 백성을 위해 생명존중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상주 존애원에 대한 이야기다. #생사의 기로에 선 백성들을 걱정하며…초당(草堂)에 월계화가 피었다. 율촌 집이 임진년(壬辰年)에 불타 없어졌다는 전언을 들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저 꽃을 떠올렸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푸른 빛이 도는 앵앵거리는 파리 떼, 청승(靑蠅)을 피해 낙향해 이곳에 거처를 마련할 때 가장 먼저 저 꽃을 심고 싶었지만 구할 수 없었다. “우복(愚伏) 대감, 또 꽃을 보고 계시는구려.”뒤를 돌아보니 이준(李埈)이 종복도 없이 홀로 문을 들어선다. “궁려(窮廬,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의 누추함을 저 꽃이 제 향으로 감싸기에 감탄하는 중이오.”창석(蒼石) 이준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다. 그때 공교롭게 이질이 발병해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형 이전이 그를 업고 왜적과 싸우며 적진을 탈출해 백화산에 숨어 무사할 수 있었다. 후에 이준이 감복해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의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들이 그 그림을 보고 극찬하며 시를 짓기도 했다.“소식을 듣자하니 남도로부터 괴질(怪疾)이 돌아 조만간 우리 고을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 하오.”“저도 듣고 걱정하고 있던 참입니다. 참화(慘禍) 후엔 역질(疫疾)이 거르는 적이 없으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괴질은 근육 경련이나 발열은 없지만 소변이 나오지 않고 급속도로 탈수증세가 나타나 발병 며칠 후 곧 죽게 되는 무서운 병이었다. 온 산하 곳곳에 널린 말과 사람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균이 기근에 든 민초의 삶을 칼보다 빨리 쓰러뜨리고 있을 터였다.“이제 그 병마가 우리를 덮치는 것은 일도 아닐 거요.”이준이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더니 몸서리를 친다. 자신의 지난 병력과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환란에서 백성을 구휼할 방도가 조정에도 만무할 터. 제생원(濟生院), 의생방(醫生房)은커녕 혜민국(惠民局)이나 활인원(活人院)은 제대로 운영되는지 모르겠소이다.”진휼의 어려움을 아는 이준이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나마 상주(尙州)는 민관군 800여명이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북천전투로 복호(復戶, 조세감면)조치를 받아 그나마 사정은 나았지만, 이태 전 정경세가 경상도 관찰사로 적을 두었을 때 살펴본 그 재정으로는, 괴질에 대한 대비책을 따로 세울 방도가 도무지 없어 보였다. 말을 이어가던 정경세가 갑자기 무릎을 쳤다.“시보어물 유보어국(施普於物 有補於國, 널리 남에게 베풂이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하는 일)이라 하지 않았소. 우리 계(契) 말이오.”상주는 인후지지(咽喉之地, 사람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지역)의 땅으로 국토의 중심지이자 전략적 군사 요충지였다. 때문에 왜(倭)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기도 했지만 충효와 의리있는 인물이 많이 나오고, 대동단결 또한 잘 되는 지역으로 이름 높았다. 불기당(不欺堂) 노기(盧麒) 등의 병인계(丙寅契), 참봉 윤진(尹) 등의 무인계(戊寅契) 등이 오래 전에 조직되어 상호 친목을 도모하고 출향인사와도 향사의 협력을 잘 유지해 오고 있었다. 임란 후인 지금은 물론 잠정적으로 모임을 중지하고 있었다.#낙사계를 결의하다“자, 저랑 어디 급히 좀 가 봅시다.”“어딜 말입니까.”“지금 조정을 믿고 있다간 아무래도 시간을 놓쳐 손쓸 도리가 없을 것만 같지 않소.”“그러니까 향리의 일은 향리가 해결한다, 이 말씀이군요.”“그렇소. 언제 괴질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촌각(寸刻)을 다투는 일이니, 먼저 의원부터 만나러 갑시다.”“아, 청죽(聽竹) 말이군요.”아호가 청죽인 성람(成濫)은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와 의학에 밝은 이른바 유의(儒醫)였다. 마침 임란 후 처가인 상주에 거처하고 있어 그들은 자주 달빛을 맞거나 시회를 가지며 꽃을 완상하곤 했다. 그가 잔볕에 말린 약재를 뒤적이다가 반갑게 맞았다.“웬일들이십니까.”자리에 앉아 서로 안부를 물은 후 정경세는 말을 꺼냈다.“지금 온 나라에 괴질이 창궐했다 합니다. 모름지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 몸이 한서(寒暑)의 침해를 받아 저러한 병이 오는데도 한두 가지 약도 갖추지 못해 백성은 비명에 죽어갑니다. 그것은 바위 담장 아래서 질곡에 죽어가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갑자기 눈이 시큰해지고 조갈(燥渴 목이 마름)이 왔다. 이준의 표정도 정경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성람은 짐작이 간다는 듯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동이 내어온 찻물로 목을 적시며 정경세는 말을 이어 나갔다. “공께선 시와 서, 학문이 뛰어나고 황제(黃帝)와 같이 의약의 술법에 능통합니다. 공의 마음 또한 고인이 영사에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과 같으니, 어찌 저 고통을 막연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정경세는 어머니와 동생 홍세가 왜군에게 조총과 칼에 맞아 죽어가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임란때 의병을 꾸려 대항한 그도 안령산에서 적에게 화살을 맞고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입술이 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기미를 알아챘는지 이준이 옆에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동지와 더불어 약재를 모으겠습니다. 이제 병을 진찰하고 약을 조제하는 일은 공이 맡아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성람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튿날 정경세, 이준, 성람은 강응철, 김광두와 함께 향당의 장로인 송량, 김각에게 자문을 받아 병인계와 무인계를 합계(合契)하여 낙사계(落社契)라 이름 붙였다.“낙사계를 결의한 이 자리, 계금에서 쌀과 베(布)를 출연하여 약재를 사고, 주치의를 두고 염가로 진료합시다. 약값에서 얻은 이윤으로 의국을 운영하되 진료는 지역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하는 것이 어떻겠소.”남촌(청리, 외남, 공성, 내서 등) 지역 열세 문중의 스물네 명(후일 서른 명)의 낙사계원들은 흔쾌히 찬성했다. 조선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실로 상주는 향기롭기 그지없는 군자향(君子鄕)이었다. ‘본심을 지켜 만물(남)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중국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당호(堂號)를 따 이준이 ‘존애원기(存愛院記)’를 지었다.대저, 남과 내가 비록 친소는 다르나, 한 가지로 천지간에 태어나 한 기운을 고르게 받은즉, 만강(滿腔)의 차마 못하는 어진 마음을 미루어 동포를 구활(救活)함이 어찌 사람의 본분을 다함이 아니랴… 유마힐(維摩詰)은 위(位)가 있는 자가 아님에도 능히 백성의 병을 보기를 자기의 병을 보듯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유자(儒者)이며 또 나와 남이 한 가지라 여기는 자임에랴. ◆경로효친과 예절교육의 장으로… 낙사계를 기반으로 설립된 존애원은 생명존중 정신의 집약체였다. 신분차별도 없었고, 지역의 경계도 없었다. 오로지 백성을 구휼한다는 인도주의 정신이 존애원의 근간이었다. 설립 당시 낙사계의 조약은 사중조약(社中條約)으로, 전체 11조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①진덕근행(進德謹行, 덕으로 나아가고 행동을 삼감) ②과실상규(過失相規, 과실은 서로 간하여 고침) ③성애상접(誠愛相接, 성심과 사랑으로 맞이함) ④ 환란상구(患難相救, 환란은 서로 구제함) ⑤유경상하(有慶相賀, 경사시 서로 축하함) ⑥유상상조(有喪相弔, 상사에 서로 조문함) ⑦부의(賻儀, 초상시 베 3필, 풀자리 5장, 상지(常紙) 5권, 대지(大紙) 2권, 장례시 미곡 20두, 콩 5말, 보리 10말) ⑧존의(尊儀, 영전에 물건을 드림, 형편에 따라) ⑨선영개장(先塋改葬)과 비갈(碑碣)을 세울 때 쌀 20두 부조 ⑩회일(會日)은 봄 가을 중 달 보름, 우천시 연기 ⑪ 유사(有司)와 주계약장(主契約長)의 임기는 1년으로 한다. 부칙으로 ‘11목은 큰 강령이니 효제덕행(孝悌德行)을 근본으로, 위반이나 사사로이 여긴 자는 경계를 하되 그래도 뉘우치지 않으면 축출한다’고 밝혀 놓았다.존애원의 의료활동은 1782년, 상주지역의 한 향민에 의한 무고로 중단되고 만다. 다행히 16년 후인 1797년, 누명을 벗었지만 의료사업 기반은 이미 무너져 맥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존애원의 설립 목적은 의료기관 운영에만 그치지 않았다. 경로효친과 예절교화의 장으로 역할을 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지금의 경로잔치인 ‘백수회’가 그것이다. 의료활동이 한창이던 1602년부터 1894년까지 매년 열렸던 백수회는 많을 때는 100명이 넘는 어르신들이 모였다고 한다. 존애원 설립을 주도한 정경세는 당시 백수회의 풍경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의 성인식과 같은 관례(冠禮, 남자는 상투를 짜고, 여자는 쪽을 찌는 성년례)도 존애원에서 열려 1908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또 1747년 간행된 상주의 역사기록인 ‘상산지(商山誌)’에는 존애원을 서당(書堂)에 포함시키고 있어, 교육기관의 역할도 맡았다. 수 차례 중수와 중건으로 그 원형은 다소 변형되었지만, 현재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가면 존애원 건물을 볼 수 있다. 2005년 ‘존애원 의료시술 재연행사’가 열린 것을 계기로, 2009년부터는 해마다 재연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존애원을 설립했던 낙사계(현 대계) 후손들이 2007년 ‘존애원 보존회’를 만들어 선조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글=박미영<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기획: pride GyeongBuk 경상북도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있는 존애원.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13개 문중이 뜻을 모아 세운 조선조 최초의 사설의료기관이다.상주에서는 매년 ‘존애원 의료시술 재연행사’를 열어 선조의 생명존중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2005년 처음 재연행사를 연 것을 계기로, 2009년부터는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2013.06.17
[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4> 목숨 끊어 일제에 저항한 이명우·권씨 부부(안동)
◆Story Briefing1910년 한일합병조약 이후, 우리 국민은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중에서 자정순국(自靖殉國)이 가장 극단적이고 강렬한 항거였다. 자정순국은 일제의 침략이 왜 부당한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증명한 항쟁이다. 나라를 빼앗긴 이후 순국의 길을 택한 이는 전국에서 90명에 달했으며, 목숨을 건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0년 다시 순국자가 나왔다. 안동 사람 이명우와 그의 아내 권씨 부인이었다. 퇴계의 후손이었던 이명우는 갑오개혁 전 마지막 과거시험에서 진사가 된 인물이다. 고향 안동에서 부모를 모시며 처사로 살아가려 했던 그에게 경술국치의 비보는 날벼락 같았다. 여기에 집안사람인 이만도와 이중언이 단식에 들어가 결국 순국했다는 소식마저 들려왔다. 이때 이명우는 자신도 순국의 길을 택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고종 황제와 부모가 살아 있어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고향 안동을 떠난다. 결국 충청도로 이사한 지 3년 만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치르고 고종마저 승하하자 자정순국을 결심한다. 남편의 뜻을 헤아리고 있던 부인 권씨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1920년 12월19일(음력) 이명우와 권씨 부부는 독약을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1918년 12월20일(음력)에 서거한 고종의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이었다.‘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4편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저항한 안동의 이명우·권씨 부부의 이야기다. 부부의 마지막 날 모습을 이야기 형식으로 담아냈다.#1. 이것은 의리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촛농이 지글거리면서 푸른 불꽃을 한껏 피워 올렸다. 이명우와 권씨 부인, 두 사람의 그림자 위로 검은 파문이 일렁였다.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이겠지요.”이명우는 집중했다. 평소 말을 아끼던 아내였다. 그런 아내의 마지막 목소리를 한 음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허나 당신과 함께 가기에 그 두려움도 복으로 받으려 합니다.”이명우의 가슴께로 묵지근한 울림이 지나갔다. 아내가 마지막을 함께하겠다고 했을 때 돌덩이처럼 쏟아져 내리던 비통의 무게감을 이명우는 아직도 느끼고 있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시오. 뜻을 돌이킨다 해서 내가 당신을 탓한다거나 원망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오.”“당신은 어떠하십니까?”“나는 확고하오. 당신도 잘 알다시피 경술년 이후에도 내 한 목숨을 부지한 것은 오로지 양친께서 모두 살아계시기 때문 아니었소. 양식 준비를 비롯해 자식으로서의 책임과 도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효심이 넓고 깊은 이명우였다. 젊어서의 어느 날이었다. 도적 떼가 나타나 마을을 약탈하다가 이명우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이명우가 혼자서 무리의 소굴로 찾아갔다.“아버지를 풀어주게. 대신 나를 잡아 두면 되지 않겠는가.”“기세는 가상하오만, 그리 쉬이 내줄 거면 애초에 잡아오지도 않았소. 허니 두 사람이 함께 살아서 가려거든 몸으로라도 때우고 가시오.”그날 이명우는 몸이 엉망이 될 때까지 맞고 또 맞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사할 수 있었다.다른 일도 있었다. 벗이 찾아와 이명우에게 권했다.“세상이 바뀌어 과거가 폐지되는 바람에 벼슬길이 멀어진 줄 알았더니, 다행스럽게도 추천을 받아 관리를 임명한다 하는군. 자네, 진사가 된 지도 제법 되었는데 방법을 궁리해 봄이 어떻겠는가?”“알고 있네. 허나 그리 되면 집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 들었네. 발령지가 어디로 될지 모른다 하더군. 그러니 그것은 내게 불가하네. 부모님 곁을 지키는 것이 출사보다 중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네.”#2. 슬프고 슬프다, 피눈물이 흐르누나이명우의 얼굴에 극심한 고통의 흔적이 나타났다.“하여 분노를 머금고 아픔을 참고, 그렇게 견딘 세월이 벌써 십 년이나 되었소. 이제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상황의 종상도 끝났으니 운명을 결정할 때가 온 것이오.”“예. 저 또한 더는 번민이 없습니다. 의리는 제게도 있기 때문입니다.”이명우는 아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열여덟에 네 살이나 어린 자신에게 시집와 서른다섯 해를 더불어 온 사람이었다. 모든 고락이 그 세월 안에 있었다. “당신이 품고 계신 의리가 나라에 대한 충의라면, 제가 지키려는 의리는 남편에 대한 도리입니다.”권씨 부인은 안동권씨의 집성촌인 닭실마을 사람이었다. 을미의병 때의 안동 의병대장 권세연이 닭실 사람이었고, 3·1독립선언 당시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파리장서’를 보낸 유림의 일원인 권명섭·권상원·권상위가 또 그러했다. 중국의 쑨원과 우페이푸에게 보낼 제2의 독립청원서를 지은 권상익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 책무를 외면하지 않는 집안이었고 마을이었다. 그것은 아녀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비록 변변한 이름도 없이 ‘권씨 성을 가진 여인’이라는 뜻의 권성(姓)으로만 기록될 것임에도…. 아내가 지키려는 의리와 도리가 이명우는 느꺼웠다.“고맙고 장하시오.”이명우는 아내에게 무슨 말이든 더 해주고 싶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보니 아내는 가족이라기보다 동지였다. 하지만 이명우는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아내는 다 알 것이라고 믿었다. 펼쳐진 종이 앞에 이명우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성심과 성의를 다해 적어 가기 시작했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슬프고 슬프다. 이 몸 어디로 돌아갈까. 황제의 단과 부모님 빈소에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니, 들어갈 땐 오동지팡이가 나와 보니 죽장이구나. 불충불효하니 어찌 신하와 자식이라 하겠는가. 십여 년 분을 품고 부끄러움 참아내니, 어찌 복수할지 하늘의 벌을 기다릴 따름이라. 십여 대를 은혜 받았으니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해야 하거늘. 서산으로 올라갈까, 동해에 뛰어들까, 삼 년을 다하니 피눈물이 흐르누나. 내 임금께 돌아가리라.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꼬.#3. 들어라, 형제여! 보아라, 아들아! 비통사(悲痛辭)를 마친 이명우가 다른 종이에 ‘경고(警告)’를 벼락같이 적어 갔다. 동포들아, 나의 슬픈 말을 들어 보라. 종사는 어디 있는가. 웅담을 맛보고 피눈물로 옷깃을 적신 지 무려 십 년이라. 돌아보니 무상한데, 재주는 성글고 힘은 한 가닥 실과 같구나. 뜻을 같이하면 바다도 메울 수 있고, 우공은 산도 옮기었거늘. 죽음만이 복수할 수 있으나 베풀 계책은 없구나. 누가 원통하지 않으랴. 종실, 주친을 협박하였으니 아들 된 자 무리를 이룬 자 누가 힘쓰지 않으리. 곧음과 어짊을 방패로 하여 의기를 내걸며, 악인은 반드시 벌하고야 만다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태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며 (나라를 되찾을) 큰 공적을 세우라.적막이 내려앉았다. 시간조차도 숨을 죽였다. 잠시 후 눈을 감고 앉았던 이명우가 입을 열었다.“이제 갑시다.”권씨 부인이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약이 담긴 사발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촛불의 불투명한 빛이 약의 색을 더 어둡게 비추었다. “바꽃 뿌리를 다렸습니다. 약이 강하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명우가 일어섰다. 부인도 함께 일어섰다. 하직 인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황제의 단이 있는 곳을 향해서였고, 다음으론 부모님의 묘가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섰다. 마주한 얼굴로 따뜻한 눈길이 오고 갔다. 이명우와 권씨 부인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어쩐지 어색하기만 했던 혼례청에서의 절이 첫 절이었다면, 이것은 부부 사이의 마지막 절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다해 서로에게 예를 표했다. 권씨 부인이 남긴 글은 이러했다.아해야, 삼형제 보아라. 네게 유서로 부탁할 말이 허다 많건마는 어둑 정신 수습 못, 단문 졸필 대강 부탁 일다. 너 어르신께옵서 평생에 의리 가득 하시와 이제 뜻과 같이 이루실 듯하시니 나도 같이 따르리라. 노소 간에 생사가 그 한 몸에 달렸으니 부부지의는 군신지의와 일반이라.이명우는 생을 마감하면서 ‘비통사(悲痛辭)’ ‘분사(憤辭)’ ‘경고(警告)’를 비롯해 자식들에게 ‘유계(遺戒)’를 남겼다. 나라를 잃고 10여년 동안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충의의 길을 가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후손들에게는 외세의 침략을 경계하고 백성과 신하 된 도리를 다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권씨 부인도 아들 삼형제와 친정동생·시숙부·시숙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한글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부부와 군신의 도리가 같은데 남편이 충의의 길을 떠나니 부부의 도리를 따라 함께 자결한다"고 적혀 있다. ▨ 참고문헌 및 도움말= 김희곤 저 ‘안동 선비 열 사람’, 심상훈 논문 ‘忠義의 길, 夫婦의 길을 함께한 순국자정’,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공동기획:pride GyeongBuk ◆부부가 같은날 동시 순국 전국에서 유일 이명우·권씨 부부가 순국한 곳은 계룡산 남동쪽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지금의 대전시 유성구 송정동이 그곳이다. 1912년 봄 이명우는 고령의 부모와 함께 고향 안동을 떠난다.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처음 정착한 곳은 속리산 아래 갈평리(지금의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평리)였다. 하지만 이사한 지 3년 만인 1915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다. 3년상을 마친 뒤 부부는 다시 계룡산 남동쪽에 있는 봉서리로 이사한다. 이 마을에서 부부는 자정순국의 길을 택한다.이명우·권씨 부부의 순국 소식은 고향 안동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사해서 머물렀던 충청도 지역에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장례식에는 무려 1천여명이 참석해 부부의 뜻을 기렸다. 특히 충청도 지역 유림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부부의 순국 사실은 한동안 관련 자료가 없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안동지역에는 10명의 순국지사가 있었지만 이들 부부만 애국지사 포상에서 늘 누락됐다. 그러던 중 2009년 2월, 손자인 이일환씨가 ‘비통사’와 ‘유계’ 등 부부가 남긴 자료를 공개하면서 새롭게 조명받게 된다. 이듬해인 2010년 정부는 3·1절을 맞아 이명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전문가들은 “부부가 같은 날 동시에 순국한 사례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특히 여성이 자결하고 한글 유서를 남긴 것도 처음 있는 일로, 유서 자체의 국문학적 사료 가치 또한 크다"고 입을 모은다.이명우가 생을 마감하며 남긴 비통사(悲痛辭). 나라와 부모를 잃고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자정순국의 길을 가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남편을 따라 순국의 길을 택한 권씨 부인은 한글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남편을 따라 가는 것이 부부의 도리’라며 생을 마감하는 이유와 의지가 적혀 있다.
2013.06.10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20일까지 전공의 복귀해야"…전문의 취득 늦어질 가능성 커
의대 증원 '확정 vs 제동'…의정 갈등 '운명의 한주'
많이 본 뉴스
오늘의운세
호랑이띠 5월 14일 ( 음 4월 7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영남생생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