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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5> 철(鐵)의 나라 감문국
<스토리 브리핑> ‘철(鐵)’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창이나 칼, 갑옷 등 무기의 원료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철정(鐵鋌, 덩이쇠)’은 교역의 대상물품으로 국가의 부(富)를 축적하는데 도움이 됐다. 철은 이전의 청동기를 능가하는 최첨단 소재였으며, 제철기술은 국력을 키우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도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는 가야지역에서 철이 생산돼 왜 등에 수출됐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 중심의 변한연맹체 일원이었던 감문국 또한 철을 생산해 가야에 공급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5편은 김천지역에 남아있는 감문국의 철 생산 흔적이다. 직접적인 흔적은 찾기 어려웠지만, 철과 관련한 수많은 지명이 김천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울산 달천·전북 달궁터의 ‘달’은 ‘甘’의 훈으로 ‘철 유적지’ 유추학계 “감문국 國號도 철과 밀접”삼국지위지동이전 등 옛기록선변한연맹체 내 철 공급지로 무게향토사학계 “달은 쇠 다룬단 뜻”‘달’이 ‘月’로 바뀌었다는 주장도‘甘’의 변형으로 ‘거’‘가’도 제시관련 땅이름서 철 생산 추론해내 ◆ 금속문화를 받아들이다선사시대부터 한반도 남부지역은 금속문화를 왕성하게 받아들였다. 이형우 영남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논문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감문국(甘文國)’에서 “대륙으로부터 금속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한반도의 남부 지역은 급속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서력 기원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보다 우수한 철기문화 집단이 육·해로를 통하여 파상적으로 이동해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옛 감문국의 영역에서는 금속문화의 흔적이 어렵지않게 발견되고 있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등의 유물들은 일찍이 김천지역에 금속관련 기술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김천시 문당동에서도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등 김천지역은 금속문화의 주요 유입경로로 간주되고 있다. 감문국이 철 생산국이었다는 의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옛 문헌기록은 감문국이 철 생산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변한 지역의 산업경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서 철이 생산돼 마한의 예(濊)와 왜국에 무역하고 이군(二郡)에도 공급하여 물품을 매매함이 마치 돈(錢)으로 거래하는 것과 같다”고 적고 있다. 만약 감문국에서 철이 생산됐다면, 감문국이 축적할 수 있는 부의 크기는 더 컸을 것이며 연맹체 내의 위상도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김천시사(金泉市史) 또한 김천이 변한지역의 철 생산지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김천시사는 김천지역이 철 생산이 왕성했던 가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적고 있다. 김천 남부권 지역이 현재 성주지역인 성산가야와 접하고 있으며, 낙동강과 연결된 감천을 통해 가야문화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1965년 조마면 장암리 출토 토기가 1968년 경남 창녕 출토 토기와 양식이 동일한 가야 토기로 밝혀짐으로써, 김천지역의 상당 부분이 가야문화권과 관련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김천시사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변한은 비옥한 토지가 많아 일찍부터 철의 산지로 제철기술이 발달했다”며 낙동강 지류 감천(甘川)을 낀 감문국이 철 생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 철(鐵)과 밀접한 감문국의 국호학계는 감문국에서 철이 생산됐다는 구체적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변한의 특산물인 철은 김해 이외의 여러 소국에서 생산됐는데, 감문국이 주요 철 생산지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계명사학 제23집에 수록된 권주현 박사의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와 문화’라는 논문은 감문국이 철 생산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감문국이 철 생산지라는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감문국의 국명과 현재 김천지역의 지명에 철 관련 명칭이 녹아있다는 것이 논문의 주된 내용이다. 이 논문은 감문국의 국명이 철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감문국 국명 중 ‘감(甘)’자의 훈(訓, 한자의 음을 풀이한 뜻)이 ‘달’인데, 이 ‘달’과 관련된 지명이 철과 관련돼 있다는 설명이다. 이 논문은 울산의 ‘달천’ 유적이 철 관련 유적이며, 전북 남원 산내면의 ‘달궁터’가 철과 관련된 유적임을 지목하고, 감문국의 ‘달 감(甘)’자 또한 철과 관련된 지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해도호부 편에도 ‘감(甘)’자가 쓰인 감물야촌(甘勿也村)이 나오는데 이 지역에서도 철이 생산됐다.김천 향토사학계 또한 비슷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달 감(甘)’자가 철과 관련돼 있다고 설명한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달’이라는 음절(音節)이 쇠를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 위원은 “요즘 유기를 제작할 때도 ‘달련’이라는 말을 쓴다. 때린다는 의미로 이름 붙여진 방짜유기의 ‘방짜’처럼 때려 가공한다는 뜻이 담긴 음절이 바로 ‘달’자”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김천시 대덕면 화전리의 월매동이 철과 관련된 지명이라는 의견이 있다. ‘감(甘)’자의 훈인 ‘달’이 ‘월(月)’로 바뀌어 월매동이 됐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김천지역에는 철 생산과 관련된 듯한 여러 지명이 있다.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과 머지 않은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에는 ‘쇠내(金川)’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김천시 지례면에는 철과 관련된 한자인 ‘감(甘)’자가 변형된 듯한 지명이 남아있다.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의 ‘거물’은 ‘감(甘)’자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거물리는 거무실, 검물, 거물, 거문리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에도 ‘가물’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조마면 신곡리의 지명 또한 감문국이 철 생산지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곡리에는 소점골, 시점골, 철수동(鐵水洞)이라는 지명이 있다. 감천(甘川)의 쇠를 파서 가져와 마을의 뒷산에서 쇠를 만들 때 쇳물이 흘렀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철수동’이라 불린다고 한다. 물론 김천의 해당 지명들이 반드시 감문국 시대에 붙여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 반응이다. 하지만 권주현 박사는 “김천지역 지명 상당수가 철과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감문국이라는 국호 또한 철생산과 관련해 붙여진 명칭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의견을 자신의 논문에서 밝혔다. 글=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甘文國’▨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김천시 대덕면 화전리 월매동 전경. 학계는 철 생산지를 의미하는 ‘감(甘)’자의 훈인 ‘달’이 ‘월(月)’로 바뀌어 월매동이 됐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김천시 지례면 거물1리 입구. 김천시 지례면에는 철과 관련된 한자인 ‘감(甘)’자가 변형된 듯한 지명이 남아있다. ‘거물’ 역시 ‘감’자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의 국명 또한 철 생산지라는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됐다는 의견이 있다.
2015.10.21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4> 감문국의 전설 ④ 신라에 항거한 결사대
◇ 스토리 브리핑삼국사기(三國史記)는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이 3세기 초 신라에 의해 정벌됐다고 적고 있다. 감문국 패망과 관련한 전설도 전해내려온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감문국 병사와 백성 70~80명이 김천시 감문면 속문산 정상부의 속문산성에 모여 항거하다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감문국 병사와 백성의 원혼이 구름이 되어 산을 덮었다고 해서 속문산은 백운산(白雲山)으로도 불리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4편은 최후까지 감문국을 지켰던 결사대에 관한 내용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상상력을 전설에 덧대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 감문국 최후의 군대 서기 231년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햇살이 잘 들지 않는 숲 속은 오후 들어 몰려든 먹장구름으로 한층 어둑어둑했다. 곧 한바탕 소나기라도 퍼부을 듯 음산한 날씨였다.자연석으로 축조된 산성 성벽에 몸을 숨긴 채 아래쪽을 주시하던 단오의 시선에 무장을 갖춘 한 무리의 병사들이 산비탈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다들 낯익은 감문국의 병사들이었고, 개중에는 평민 차림의 사내도 두 명 끼어있었다. “너도 여기 와 있었구나.”손을 번쩍 치켜드는 단오를 발견한 평민복의 사내가 반가움에 소리쳤다.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형님 아우 하며 지내던 을주라는 이름의,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삼십 대의 사내였다. 성문을 통과한 을주는 창을 든 채 곧장 단오 곁으로 걸어왔다.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라니. 나는 감문국의 백성이 아닌가.”단오의 인사에 을주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을주의 눈빛에는 비장하리만치 단호한 항전의 결의가 내비쳤다. 사실 을주는 몇 년 전까지 감문국의 병사로 복무하였고, 나이가 차면서 퇴역하여 농부로 지내고 있었다. 이번에 신라군의 침공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처하면서 비록 정규 병사는 아니었지만 직접 무기를 장만하여 속문산성을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석우로에 힘도 한번 못쓰고 괴멸전투서 패한 병사·백성 70∼80명오랜 역사·문화 한순간 상실 애통결사 항전 의지로 속문산성 모여수십배 넘는 병력에 맞서다 최후원혼은 구름돼 산 덮었단 전설도“이제 얼추 다 온 셈이야.”앞으로 얼마나 많은 지원병이 이 산성으로 올 것 같으냐는 단오의 물음에 을주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대강 셈하여 80여 명쯤 될 터였다. 과연 이 병사들로 수십 배는 넘을 병력에 잘 발달된 무기, 뛰어난 전투력까지 갖춘 신라군을 맞이해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웠지만 단오는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산 아래쪽을 전망하는 을주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낯빛이 꽤나 어두웠다. 사로국(斯盧國)으로 불리던 신라가 감문국에 항복을 요구해온 것은 이달 중순경이었다. 그 이전부터 신라는 잘 준비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여러 읍락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영역을 확장하면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남쪽 중심부에 위치한 감문국은 금강유역은 물론 서해안과 북방으로 뻗어나가려는 야심을 품은 신라에는 반드시 복속시켜야 할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감문국이 백제와 고구려, 가야와 신라가 각축을 벌이는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영남내륙을 관통하여 한강 이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인 추풍령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속문산성에 잠들다신라는 이사금의 동생이자 전쟁 경험이 풍부한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으로 진격해왔다. 국경에 많은 병사들을 포진시킨 석우로는 감문국에 전령을 보냈다. 항복하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뜻밖의 요구를 받은 감문국 조정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그동안 신라가 주변 소국들을 정벌하면서 보여준 놀라운 군사력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으로 괜한 인명 손실만 가져올 터이니 무조건 항복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반면, 오랜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감문국의 위상을 고려해서라도 싸워보지도 않고 적에게 투항하는 것은 그동안 국가와 조정을 신뢰하고 따른 백성과 병사들을 배반하는 일이니 끝까지 결사항전하자는 측이 있었다. 인자한 성품을 가졌던 감문국의 왕은 병사와 백성들이 이기지도 못할 전쟁에 피해를 입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가혹할 정도로 많은 공물까지 요구하는 석우로의 안하무인격 태도에 분노하여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실 석우로의 이런 오만한 태도는 신라의 잘 조직된 군사력을 이용해 단숨에 감문국을 정벌하는 위업을 보여줌으로써 사벌국 등 주변 소국들의 항전의지를 애초부터 꺾어놓으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신라의 침공에 감문국의 병사들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괴멸상태에 빠져들었다. 종내 감문국 궁궐까지 짓쳐든 신라 병사들에게 포위된 채 감문국의 왕은 석우로가 지켜보는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감문국의 일부 병사들은 오랜 역사와 독자적인 문화를 지녔던 감문국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비록 전투에는 패배했지만 불굴의 용기와 항전의지, 뜨거운 애국심을 잃지 않은 병사들과 백성들은 식수로 쓸 2개의 우물과 못까지 갖추어 방어에 용이한, 오랜 세월 감문국을 지켜온 속문산성에 집결하여 마지막 한 명까지 신라와 싸우기로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놓았지. 재가를 원하면 승낙해주시라고.”집에 두고 온 형수는 어떡하느냐는 단오의 말에 을주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문득 단오는 몇 년 전부터 정을 나누던 이웃마을 처녀 보름이의 예쁘장한 얼굴을 떠올렸다. 아마 그녀도 다른 남자를 만나 잘 살아갈 것이다.“나라가 없어져도 이곳 속문산성에 모여든 우리 민초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의지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야.”저 멀리 산 아래쪽에서 대오를 이룬 수많은 신라 병사들이 창검을 번쩍이며 산성을 향해 진격해오는 장면을 지켜보던 을주가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오는 뜨거운 결의가 심장이 터질 듯이 모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단오는 재창이나 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 우리가 죽더라도, 역사는 오래오래 남을 것이야.”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기획 : 김천시김천시 감문면 속문산(백운산) 중턱에서 속문산성으로 향하는 등산로.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에 위치한 속문산성은 방어의 거점으로 유리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속문산(백운산) 정상부에 흩어져 있는 속문산성의 흔적. 감문국 결사대 전설과는 달리 학계는 속문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 멸망 이후로 보고 있다.
2015.10.14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3> 감문국의 전설 ③ 애인고개(개령면 신룡리∼대광동 길목)
김천시 개령면 신룡리에서 대광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은 ‘애인(愛人)고개’로 불리고 있다.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의 공주와 신라 청년이 사랑에 빠졌는데, 상사병에 걸린 감문국 공주가 이 고갯마루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3편은 적국의 청년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감문국 공주에 대한 이야기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상상력을 전설에 덧대었음을 미리 밝혀둔다.봄날 몰래 궁궐 빠져나온 공주신라와 국경 접한 고갯마루서청년 도움으로 다친 발목 치료그후 둘만의 미래 약속했지만약정한 날 고갯길 은행나무 밑그가 남긴 손수건만 덩그러니… ◆ 외로운 감문국 공주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따라 푸르스름하게 새벽빛이 번져오는 시각이었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인적 없는 들길에 돌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꾼에게 내몰리는 짐승마냥 바쁜 걸음을 서두르는 이는 뜻밖에도 묘령의 처녀였다. 해맑은 피부에 빼어난 미모를 갖췄지만 그동안 남모를 고초를 겪은 탓인지 수척한 뺨에 불안과 수심의 그림자가 짙게 어린 모습이었다.들길을 가로지르자 하얀 모래밭이 나타났고, 곧 억새풀이 듬성하니 우거진 사이로 맑게 흐르는 강물이 앞을 막았다. 아래쪽으로 가면 그녀가 자주 건너다니던 돌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쪽으로 둘러갈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결심한 듯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차가운 새벽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건너자 다시 강변을 따라 논밭 사이로 난 들길이 기다랗게 이어졌다.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서둘러 들길을 가로질렀다. 조금 지나면 인근 고을사람들이 곤한 잠에서 깨어날 시각이었다. 그녀가 이처럼 이른 새벽길을 도망치듯 나서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녀는 현재의 김천지역을 지배하던 감문국의 공주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얼굴이 예쁘고 총명하여 양친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왕비였던 어머니가 원인 모를 병으로 세상을 뜬 다음에 부친은 후비를 맞아들였고, 자연히 그녀는 뜬구름처럼 외로운 신세로 성장해갔다.마음 의지할 곳 없던 그녀에게 자연은 유일한 벗이 되었다. 내성적이고 다소곳한 성품에다 유난히 감수성이 뛰어난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궁궐 뒤편의 연못이나 갯버들이 우거진 강변, 혹은 철따라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들판에 나가기를 즐겼다. 당시 국경엔 불길한 전운이 감돌고, 군사력을 배가한 신라가 가야와 이웃한 감문국을 호시탐탐 넘보고 있다는 불길한 소문이 들려왔지만 그녀에겐 먼 나라의 얘기나 다름없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봄이 오면서 감문국 산하에 아름다운 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났고, 그녀는 오전부터 시녀 하나만을 대동한 채 답답하게만 여겨지던 궁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강과 계곡, 들판과 하늘, 구름과 바람, 풀꽃과 나무가 빚어내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인적 드문 들판을 정처 없이 쏘다녔다. ◆ 신라 청년과 사랑에 빠지다 그렇게 얼마를 다녔을까. 서편 하늘에 해가 뉘엿한 것을 보고 궁궐로 돌아가려고 길을 서두르던 그녀는 고갯마루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발목을 삐고 말았다. 어찌 일어서보려 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미는 통증을 견디기 힘들었다. 궁궐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나와 있었다. 계속 통증을 참으며 걷기도, 그렇다고 비슷한 또래의 시녀 등에 업혀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던 시녀가 궁궐로 사람을 부르러 떠난 사이에 문득 고갯마루 저편에서 훤칠한 남자가 다가왔다. 스물 남짓한 젊은이로, 단아한 용모에 특히 눈매가 서글서글했다. 청년을 쳐다본 공주는 불현듯 마음 한 구석에 바윗덩이 같은 게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마음의 격정이었다. 청년 역시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제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는지요?”그녀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청년은 부친에게 약간의 의술을 배운 바 있다며 그녀에게 발목을 보여줄 것을 부탁했고, 염치불고하고 내민 그녀의 아픈 발목을 어루만져 통증을 없애주었다. 다친 발목이 나았다는 기쁨보다 청년의 손길이 닿은 살갗의 느낌이 더욱 그녀를 황홀하게 했다.“내일 다시 여기서 그대를 기다려도 될는지?”머뭇대던 청년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지 못한 약속 연분홍 꽃비가 분분하게 흩날리는 어느 봄날, 그렇게 그녀의 미칠 듯한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공주와 청년은 고갯마루 으슥한 곳에서 뜨거운 만남을 이어나갔다. 사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고갯마루는 신라와 감문국이 국경을 마주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사람들 왕래가 없고, 민가와도 떨어진 호젓한 장소이기도 해서 두 남녀가 은밀한 사랑을 나누기에 적당했다. 게다가 청년은 국경을 경비하는 신라국의 병사였기에 더욱 그랬다.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어쩌면 맺어질 수 없는 극단적인 신분 차이가 젊은 두 사람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쪽 산자락이 아침노을에 붉게 물들 즈음에 그녀는 청년과 사랑을 속삭이던 장소인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익숙한 몸짓으로 야산 숲속의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문득 그녀는 은행나무 밑둥치의 작은 곁가지에 묶인 감빛 손수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평소 청년이 지녔던 것으로, 그녀를 기다리다 남기고 간 징표가 분명했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과 안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빛이 차례로 스쳐갔다. 만약 그녀가 낯선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왕의 귀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격노한 왕명에 의해 별궁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또한 그녀를 가엽게 여긴 시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처럼 몰래 새벽길을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는 은행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선 아래쪽 고갯마루길이 잘 내다보였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일은 꿈에도 잊지 못할 청년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리하여 닷새 전에 약정했던, 먼 나라에 가서 오순도순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키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치미는 허기를 애써 참으며 청년이 나타날 고갯길을 눈이 아프도록 지켜보았다. 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공동 기획:김천시김천시 개령면 신룡리의 애인고개. 신라 청년과 사랑에 빠진 감문국 공주가 이 고개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전설이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2015.10.07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2> 감문국의 전설 ② 나벌들·장수천(개령면 신룡리)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은 1천500여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전설은 현재까지 남아 전해진다. 해당 전설은 감문국이 남긴 무형(無形)의 유산으로, 감문국이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상상력을 전설에 덧대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2편은 ‘나’씨 성을 가진 감문국 장군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는 나벌들과, 물을 마시면 힘이 세어진다는 장수천 전설에 관한 이야기다.“임신할 아이는 장차 장군될 인물남서쪽으로 가 새의 안내 받으라”노인의 말 듣고 정착하고선 득남하지만 아들 유난히 병치레 잦아어느날 다시 찾아온 노인 말하길“여의주 같은 돌 놓인 곳에 우물 파그 물 마시면 금방 힘이 세질 것”신비한 ‘장수천’ 전설로만 전해 ◆ 노인의 예언을 듣다가을 해가 설핏하니 서편으로 기울 무렵, 소나무가 우거진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남녀가 있었다. 먼 길을 떠나온 듯 지치고 피곤한 기색의 젊은 남녀였다. 등에 진 허름한 봇짐이나 남루한 입성으로 봐선 몹시 가난한 집안의 부부로 보였는데 여인은 임신한 듯 배가 불러 있었다. “다리가 아프군요. 잠시 쉬었다 가면 어떨까요.”가쁜 숨을 내쉬며 여인이 물었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가까운 소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동안 남자는 이마에 흐른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문득 남자의 얼굴에 반가운 표정이 떠올랐다.“여보, 저길 보구려. 당시 노인이 예언했던 게 바로 저 산 아니오?”남자가 가리키는 산등성이에 시선을 주던 여인의 표정에도 기쁨과 경이의 빛이 어렸다.“그렇군요. 완연히 곰이 머리를 내민 모양새네요.”부부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까치 한 마리가 길섶에 내려앉더니 두어 번 깍깍거리며 울었다. 그런 다음 종종거리며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어서 자신을 따라오라는 몸짓 같았다.“노인의 예언이 틀림이 없는가 보오. 어서 저 까치를 따라갑시다.”남자가 여인을 독촉해 길을 서둘렀다. ◆ 까치를 따라온 부부사실 그들 부부는 난생 처음으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먼 길을 떠나온 것으로, 그렇게 된 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원래부터 가난한 집안에다가 어려서 양친을 여읜 탓에 남자는 머슴살이 등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천성이 어질고 착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어느덧 청년이 된 남자는 이웃집 노파의 중매로 역시 가난한 집안의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해가 어둑할 무렵, 고을을 지나던 한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부잣집 대문을 두드렸다. 욕심 많고 성정이 사나운 부잣집 주인은 걸인을 당장 내치라고 하인들에게 호통을 쳤다. 당시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남자는 쫓겨난 노인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초옥으로 데려갔고 하찮은 좁쌀죽이나마 정성껏 대접했다.음식을 먹으며 형형한 눈길로 부부의 관상을 살피던 노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이렇게 고생을 하며 살 팔자가 아니오. 곧 부인이 임신을 할 것이고, 그 아이가 자라면 나라에 큰 공을 세울 장군이 될 것이니 속히 여길 떠나시오.”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부에게 노인은 길을 떠나 남서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곰이 고개를 내민 형상의 산을 만날 것이며, 새가 안내한 자리에 터를 잡으면 장차 훌륭한 인물이 날 것이라는 기묘한 예언을 남겼다. 노인이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놀랍게도 임신을 했고,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부부는 결국 길을 떠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까치를 따라 얼마간 산길을 내려와 보니 소담한 고을이 부부의 눈에 들어왔다. 앞쪽은 맑고 깨끗한 시내가 흘렀으며 양편으로 비옥한 토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또 고을 뒤편으론 나직한 산들이 팔로 감싸듯 둘러서 있어 첫눈에도 여유롭고 살기 좋은 지형이었다. 고을에서 약간 떨어진 외진 곳에 오막살이를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는 아이를 낳았다. 사내아이였는데, 무슨 까닭인지 유난히 병치레가 잦아서 부모의 속을 끓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잘 자라지도 않고, 몸이 비쩍 말라가기만 하는 것이 조만간 죽을 것만 같았다.◆ 감문국 장군이 된 소년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집을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예전의 그 노인이었다. 아이의 상태를 살피던 노인은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차며 말했다.“내 이럴 줄 알고 부러 시간을 내어 여기를 찾아왔소이다. 깜빡 잊고 말하지 못했지만 이 고을 위쪽 산 아래에 연못이 하나 있소. 그 연못은 뒤편 산자락의 물줄기가 내려온 것으로, 마치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국으로 생겨 있어 장차 장군이 될 아이의 기를 억누르고 있소. 따라서 그 물을 마실수록 아이의 기운은 더 약해질 뿐이오.”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부부에게 노인이 방법을 일러주었다.“저 아래쪽 초지를 살펴보면 여의주처럼 둥글고 하얀 돌이 놓인 장소가 있을 터이니 그 자리에 우물을 하나 파시오. 그 물을 마시면 아이는 금방 건강을 되찾아 튼튼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장차 나라에 큰 공을 세울 장군이 될 것이오.”노인의 예언대로 새롭게 판 우물의 물을 먹은 뒤로 아이는 놀랍도록 건강하게 성장했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완력이 장정 열 명을 상대할 정도였다. 열다섯에 자진하여 병사가 된 소년은 곧 힘과 지략, 용맹을 인정받아 마침내 감문국의 장군으로 발탁되었다. 노인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이후 감문국 사람들은 나 장군이 마시고 힘이 세진 신비의 우물을 장수천(將帥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울러 후일에 감문국을 정벌한 신라장수 석우로가 장수천의 물을 마시고 감문국에 훌륭한 장군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장수천이 있던 하신마을을 통째로 폐동시켰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온다. 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기획:김천시 ■지명 유래>>>> 장수천 있던 들판 ‘나벌들’이라 불려나벌들·장수천 전설의 배경인 김천시 개령면 신룡1리의 다른 지명은 ‘곰내기’다. ‘곰내기’는 마을 뒷산인 광덕산의 형태가 곰과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광덕산의 모습이 마치 곰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 같다고 해 ‘곰내미’라고 하다가 ‘곰내기’로 바뀐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곰내기는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서면에 속했으며, 상신·중신·하신마을로 구성돼 있었지만 하신마을은 일찍 폐동됐다고 전해진다. 상신·중신 두 마을은 1914년 인근의 오룡동과 통합해 중신의 ‘신(新)’자와 오룡의 ‘용(龍)’자를 합쳐 신룡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수천은 지금은 폐동이 돼 농경지로 변한 옛 하신마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감문국 시절, 나씨 성을 가진 장수가 장수천의 물을 마시고 힘이 세어졌다고 한다. 또 장수천이 있던 마을 앞 들판은 나 장군의 성을 따 ‘나벌들’이라 불리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김천시 개령면 신룡리에 위치한 나벌들. 감문국 시절 나씨 성을 가진 장군이 들판에 있던 장수천의 물을 마시고 힘이 세어졌다고 해서 나벌들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2015.09.30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1> 감문국의 전설 ① 원룡장군과 사달산 샘물(개령면 광천리)
■ 스토리 브리핑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의 전설은 현재까지 전해내려올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전설의 수가 적고 단순한 스토리 구조지만, 감문국이 남긴 무형(無形)의 흔적으로 손꼽힌다. 이에 영남일보는 감문국 전설을 이번 시리즈에서 연재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상상력을 전설에 덧대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1편은 신비의 샘물을 마시고 천하장사가 된 감문국 원룡장군에 관한 이야기다. ◆ 효심 지극한 소년 신라와 백제가 나라의 기틀을 갖추기 전인 삼한(三韓)시대에 한반도의 남쪽인 금릉(현재의 김천시 개령면)지역에 감문국(甘文國)이란 읍락국가가 있었다. 백두대간에서 내려오는 수량이 풍부한 강줄기를 끼고, 그 물길이 빚어낸 넓고 비옥한 평야를 가진 덕택에 백성들의 생활은 여유롭고 인정이 넘쳤으며 고유의 문화가 발달했다. 따라서 이를 탐낸 인접 국가들의 침범 또한 잦았다. 그것은 읍락국가들의 중심부에 위치했던 감문국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기도 했다. 이 감문국의 동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이름이 진동(陳童)이란 소년이 살았다. 두 살 무렵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와 함께 어렵게 자랐지만 성품이 착하고 유순했으며, 남달리 효심이 지극해서 마을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농부였던 아버지 또한 소년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동북쪽 작은 마을 사는 孝子 진동전투 부상으로 죽은 아버지 묘서샘물 신비 알게 된 후 괴력 얻어사달산의 용천바위 통째로 뽑아마을 앞 냇가 징검다리 놓으려다헛발질에 놓친 큰 바위 땅에 박혀장군 임명되고 號‘원룡’ 하사받자겁먹은 주변 小國 서로 화평 청해감문국 평화·번영 구가 일등공신그런 어느 해 여름, 감문국의 북쪽국가인 사벌국에서 적병들이 쳐들어왔고, 당시 수자리로 차출되어 취적산(또는 감문산)에서 국경 수비를 맡고 있던 소년의 아버지는 적군의 공격을 막다가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요행히 다른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부상이 심한 탓에 소년의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보름을 못 넘기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소년의 상심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이웃들과 친척의 도움으로 마을에서 가까운 사달산(四達山) 기슭에 부친을 장사 지냈고, 생전에 효도하듯 부친의 무덤을 찾아가서 인사를 올리는 것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그날도 부친의 무덤 옆을 지키던 소년은 문득 가까운 숲 속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부귀한 집안의 사동인 듯 보이는 두 명의 동자였는데, 차를 끓일 물이라도 길으러 가던 중이었던지 손에는 붉은 띠를 맨 작은 물병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둘 다 용모가 해맑고 옷차림이 단아해서 세속사람 같지 않았다. 소년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두 동자는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다.“아무리 도사님이라도 그렇지, 하필이면 이 멀고 외진 곳까지 물을 길으러 보낼 게 뭐람.”한 동자가 불만스럽게 투덜대자 다른 동자가 달래듯 말했다. “그건 다 이유가 있어.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샘은 예사롭지가 않거든. 도사님께 듣기론 지하를 흘러 다니는 땅의 정기가 사달산 지하에 수천 년간 모여서 솟아나는 샘물로 만일 이무기가 마시면 곧장 용이 되어 승천하고, 사람이 마시면 힘이 세져서 천하장사가 된다고 했어. 정말 신비한 샘물인 셈이지. 그렇지 않다면 왜 굳이 도사님이 우리에게 이곳 금릉까지 물을 떠오라고 보냈겠어.”“그렇다면 얼른 샘물을 떠 가도록 하자. 도사님이 기다리시겠다.” ◆ 샘물의 비밀을 알아내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을 차린 소년은 자신이 부친의 묘소 옆에서 잠시 선잠이 든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방금 꾸었던 꿈이 너무 또렷해서 현실처럼 여겨졌다. 기이하게 생각한 소년은 꿈에서 몰래 동자의 뒤를 쫓았던 기억을 떠올렸고, 숲 속으로 찾아 들어갔다. 너른골 기슭을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장소가 나타났다. 소년이 손으로 바위 사이에 수북이 쌓인 낙엽더미를 걷어내자 숨어 있던 맑은 샘이 요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샘물은 맑았으며 차고도 달았다. 그 뒤로 소년은 부친의 묘소를 찾을 적마다 샘물을 마시길 잊지 않았다. 그렇게 샘물을 마신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소년은 불현듯 몸에서 알지 못할 힘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장난삼아 숲 속에 있던 바위를 들었더니 놀랍게도 짚단처럼 가볍게 들리는 게 아닌가. 또한 어른 허리 굵기의 소나무도 소년이 힘을 쓰자 풀포기처럼 쉽게 뽑혔다. 소년은 비몽사몽간에 본 동자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신비한 샘물의 비밀을 혼자만 간직하기로 했다. 만약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샘을 차지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또한 소년은 자신의 힘을 좋은 곳에 쓰기로 했다. 먼저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에 돌다리를 놓기로 마음먹었다. 비가 조금만 와도 급격히 물이 불어나서 마을사람들이 시내를 건너기 힘들었던 것이다. 소년은 인적이 끊어지는 야밤을 틈타 사달산 산기슭에 있던 돌덩이를 들어다가 시냇가에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힘이 세진 것은 물론 밤눈마저 밝아진 소년은 서너 명의 장정이 들어도 꿈쩍 않을 큼직한 돌덩이를 들어다가 징검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거운 돌덩이를 옮겨 다리를 놓기를 수십 차례, 저만치 먼동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커다란 돌덩이 몇 개만 더 옮겨놓으면 징검다리가 완성되는가 싶었지만, 주변의 돌덩이가 바닥을 드러냈다. 마땅한 돌이 없나 사방을 둘러보던 소년의 눈에 사달산 기슭에 박혀 있는 커다란 용천바위가 들어왔다. 소년은 바위를 깨어서 남은 징검다리를 놓기로 했다. 하지만 바위는 너무 크고 단단해서 깨어지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소년은 바위를 통째로 옮겨놓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천하장사의 힘을 얻은 소년으로서도 집채보다 큰 용천바위를 통째로 옮기는 것은 무리였다. 한동안 용천바위와 씨름이나 하듯 용을 쓰던 소년은 땅에 박힌 바위를 가까스로 뽑아내어 등에 업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위를 빼내느라 힘이 빠진 탓일까. 산길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뎠고, 등에 지고 있던 바위가 아래쪽으로 굴러 내려갔다. 이어서 시내 옆의 깊숙한 웅덩이에 큰 굉음을 내며 처박혔다. 소리에 놀란 마을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기척이 들려왔다. ◆ 감문국을 지켜내다그 뒤로도 소년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어느 사이엔가 소년이 천하에 드문 장사라는 소문이 감문국은 물론 주위 소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이를 알게 된 감문국 왕은 소년을 궁전으로 불러들여 완력을 시험해본 뒤에 감문국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친히 ‘원룡(元龍)’이란 호를 하사했다.몇 년 전에 병사로 전투에 나섰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부친의 일을 잊지 않고 있던 원룡장군은 병사들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상시의 엄격한 훈련만이 전쟁을 미연에 막고, 전투에 나선 병사들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뛰어난 통솔력과 지혜, 그리고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천하장사의 힘을 가진 원룡장군에 대한 소문은 주변 소국으로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이에 겁을 집어먹은 주변의 아포국과 주조마국, 어모국과 문무국, 배산국 등이 지극한 예를 갖춰 화평을 청해왔다. 또한 당시 자주 분쟁을 일으켰던 사벌국 역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어지면서 감문국은 오래도록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후일 사람들은 사달산에서 소년이 샘물을 마시고 힘이 세어졌다는 샘을 찾아내었고, ‘원룡장군수(元龍將軍水)’라 불렀다고 한다.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 기획:김천시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사달산 기슭에 위치한 원룡장군수. 감문국 소년 진동이 이 샘물을 마시고 나라를 지킨 원룡장군이 됐다는 전설이 김천지역에서 전해져오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2015.09.23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0> 유물로 본 감문국 ②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3~4세기경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했다. 이는 5세기까지 신라의 중앙집권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감문국 등 옛 읍락국가의 정체성은 한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실제로 토기 등 경상도 지역 신라 유물에는 각 읍락국가의 독자성이 잘 남아있다. 하지만 6세기 이후 경주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면서 경상도 각 지역의 유물도 신라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감문국의 유물 또한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지 않았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0편은 감문국 출토 유물에 관한 둘째 이야기다. 특히 신라 편입 이후 감문국 토기의 변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신라 병합후에도 독자성 지키다6세기 중앙집권·경주영향 확대로토기 기둥과 접시모양 확 달라져화염무늬 구멍 사라지며 신라化개령면 양천리 가는고리귀걸이고령 대가야 지산동 유물과 흡사옛 김천의 정치·문화 면모 보여줘 ◆ 토기에 깃든 감문국의 문화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은 국력의 크기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 강대국은 군사적 패권은 물론 경제·문화적 측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있다. 수백여년 전 대항해시대 당시 서양 나라들 역시 식민지에 대한 군사·경제적 진출에 앞서 종교·문화적 측면에서 해당 지역을 장악한 경우가 많았다. 삼국시대 신라도 마찬가지다. 삼한시대 진한지역을 바탕으로 일어선 신라는 국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주변 읍락국가들을 복속시켰고, 문화적 측면에서도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 때문에 신라 편입 전후 각 읍락국가의 고유 문화는 신라식으로 변화했다. 김천지역의 읍락국가 감문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천 출토 감문국 유물의 상당수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지만, 후대로 갈수록 신라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2005년 10월,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린 ‘영남 문화의 첫 관문, 김천’ 특별전은 감문국 유물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김천시 감문·개령면에서 출토된 5~6세기 토기 상당수가 대중에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접시, 귀걸이 등의 유물이 전시됐는데, 제기(祭器)나 무덤에 넣을 부장품으로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시된 감문국 유물 상당수는 감문국의 중심지인 김천시 개령·감문면 일원에서 출토됐다. 개령·감문면 일원에는 5~6세기경 조성된 고분군이 산재해 있는데, 당시의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다. 물론 출토 토기 상당수는 감문국 멸망 이후의 것이지만, 해당 유물에는 멸망 이후 감문국의 신라 편입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감문국과 신라,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감문국이 향유했던 독자적 문화를 엿보기에도 손색없다는 평가다.실제로 상당수 감문국 토기가 제작된 5세기 신라는 중앙집권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읍락국가가 있던 지역의 유물에는 특유의 지역색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 비록 신라에 의해 나라의 운명을 다했지만 옛 소국(小國)의 독자적 문화가 토기를 매개체로 명맥을 잇고 있었던 것이다. 감문국의 토기도 신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유의 지역색을 담아낼 수 있었다. 언뜻 보면 신라 토기와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학계는 김천출토 감문국 토기를 ‘가야양식’이나 ‘재지(在地)양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김천지역이 낙동강 유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국시대 토기 양식은 주로 ‘신라양식’과 ‘가야양식’으로 나뉘는데 낙동강을 경계로 구분되는 경향이 있다. 낙동강 서편의 김천에서는 신라와 가야 양식이 섞인 형태의 토기가 출토됐다. 경주의 것과 비슷하지만 김천지역만의 특징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재환 경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감문국이 가야권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출토 유물의 경우 가야와의 유사성이 있다. 또한 김천지역만의 특색도 분명히 있는데, 이는 옛 김천지역의 정치·문화적 면모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 신라의 성장으로 사라진 지역색대표적인 5세기경 감문국 토기로는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출토 뚜껑굽다리접시를 꼽을 수 있다. 접시의 모양이나 기둥의 구멍이 신라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해당 접시의 기둥에 난 구멍은 ‘화염무늬’인데, 감문국 토기의 특성으로 꼽힌다. 물론 화염무늬 구멍은 경남 함안 출토 가야 토기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대가야 유적인 고령 지산동 고분 출토 토기도 감문국 토기와 비슷한 것이 많다. 기본적으로 곡선이 완만한 데다 접시 기둥에 난 창의 모양도 김천의 것과 비슷하다. 결론적으로 감문국 토기는 가야양식과 신라양식의 조합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가야적 전통과 신라의 영향력이 감문국 토기의 모양에 영향을 미쳤다. 감문국의 토기는 옛 김천지역이 가야와 신라문화가 교체하는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신라 병합 이후에도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이 밖에도 개령면 양천리 출토 가는고리귀걸이의 경우 신라보다는 대가야의 것과 가깝다. 반면 6세기 감문국 토기의 경우 5세기의 것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가야양식이 섞인 감문국 토기 고유의 특성이 사라지고, 급격히 신라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인 6세기 감문국 토기로는 감문면 삼성리 출토 뚜껑굽다리접시를 꼽을 수 있다. 접시의 모양이나 기둥의 모양이 신라의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감문국 출토 유물의 변화를 바탕으로 감문국 멸망 이후의 신라의 중앙집권화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6세기 들어 중앙집권을 완성한 신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각 지역의 항토색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6세기의 신라는 경주를 제외한 전국을 4개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방마다 군주(軍主)를 파견해 통치권을 행사했다. 옛 감문국 지역에서 생산되던 토기 또한 정치체제의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화된 것이다. 경상도 각 지역의 토기가 지역색을 잃은 것은 감문국의 사례뿐만이 아니다. 경북지역에서도 여러 사례가 발견되는데, 의성 조문국 출토 유물의 경우에도 감문국의 것과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신라의 중앙집권 전까지 감문국이 있던 김천지역과 조문국이 있던 의성지역 토기는 다른 모습이었다. 같은 신라였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감문국 출토 유물을 통해 감문국과 신라의 역사를 유추해 볼 수 있었지만 아쉬운 점은 있다. 감문국 출토 유물이 태부족인 탓에 김천지역 읍락국가의 연구에 한계가 있다는 학계의 지적이다. 이재환 경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나마 확보한 감문국 유물마저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감문국 유적의 발굴·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공동 기획:김천시▨ 도움말= 이재환 경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김천시 개령면 양천리에서 출토된 5세기 제작 뚜껑굽다리접시. 좌측 굽다리접시(높이 25㎝)의 기둥에 난 화염무늬 창은 가야식 토기와 김천 감문국 토기의 특징이다. 아래 사진은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에서 출토된 6세기 제작 뚜껑굽다리접시(높이 17㎝)로 신라화된 경향을 보인다. 기둥의 화염무늬 창은 사라졌고, 접시의 모양도 1세기 전의 것과는 다르다.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출토 가는고리귀걸이. 감문국 귀걸이는 신라보다 가야의 것과 형태가 비슷하다. ‘영남 문화의 첫 관문, 김천’ 특별전 도록 발췌고령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 출토 귀걸이의 모습. 감문국 귀걸이와 그 모습이 흡사하다.
2015.09.16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9> 유물로 본 감문국 ①
◇ 스토리 브리핑 감문국(甘文國)은 1천500여 년 전 신라에 편입된 김천지역의 읍락국가(邑落國家)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옛 문헌에 감문국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만, 옛 김천사람들의 삶을 꿰뚫어 볼 정도로 풍부하지는 못하다. 또한 상당수 기록이 승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쓰였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다행인 점은 김천시 일원에서 다양한 감문국 관련 유물이 출토됐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출토유물은 감문국 멸망 후인 5~6세기의 것이지만, 김천시 모암동 마을유적에서는 삼한시대 감문국의 것으로 보이는 2~4세기의 토기가 발견됐다.‘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9편은 출토유물로 바라본 감문국에 관한 이야기다. 신라 편입 이후 감문국 유물에 대해서는 시리즈 20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 영남 문화의 첫 관문, 김천 특별전2005년 10월, 국립대구박물관에서는 ‘영남 문화의 첫 관문, 김천’ 특별전이 열렸다. 특별전은 감문국과 관련한 궁금증을 지녔던 김천시민과 지역민에게 의미 있는 전시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국립대구박물관은 경산을 시작으로 대구·의성을 비롯해 상주와 성주 등 대구·경북지역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지역특별전을 연이어 개최하고 있었다. 그 여섯째 순서로 김천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특별전이 대구에서 열렸는데, 감문국 유물의 비중이 컸다. 특별전은 김천의 역사 흐름을 총 7장으로 구성하고, 각 시대의 성격을 보여주는 유물 200여점을 전시했다. 19세기에 제작된 ‘조선전도(朝鮮全圖)’ ‘동여도(東輿圖)’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조선 후기 김천의 읍지인 ‘금릉지(金陵誌)’는 가치있는 향토사료로 대중에 소개됐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출토 신석기 토기류·석기류 등 선사시대의 귀중한 자료도 전시됐다. 두귀달린 항아리·짧은목 항아리물 스미는 재질로 유리질 미형성토기 제작기술 미완성 단계 입증손잡이를 달아 실용성과 멋 가미주둥이는 용도 따라 달리 제작해신라 편입 이전 것이라 더 큰 의미특히 특별전 3·4장에서 소개된 감문국 관련 유물은 세간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2005년 이전까지 감문국 유적과 유물에 대한 체계적 조사·전시가 이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감문국 유적 일부가 발굴됐지만, 역사왜곡과 문화재 침탈이 목적이었다. 광복 이후 간헐적으로 김천지역 고분이 발굴됐지만 대대적인 조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김천지역의 고대사 또한 지역민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옛 감문국의 중심지역인 개령·감문면 지역의 유적은 발굴이 더딘 상황이었다. 개발과는 거리가 있는 지역이고, 경주처럼 확연히 눈에 띄는 유적이 없었기에 원활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김천시와 경북대박물관은 김천지역 고대사 연구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김천시와 경북대박물관은 2004년 2월부터 2005년 5월까지 ‘감문국 유적 정비를 위한 지표조사’를 진행했다. 감문국 유적의 실질적 조사를 담당한 경북대박물관은 김천시 감문·개령면 일원 87.28㎢의 면적에서 감문국 유적을 조사했다. 감문국 중심부 지역의 고분과 산성 등을 실측했다. 각 지역에 흩어진 감문국 관련 유물의 소재도 파악했다. 당시 국립대구박물관의 특별전 또한 김천시와 경북대박물관의 조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때 전시된 유물들은 감문국과 김천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토기에서 엿본 감문국의 독자성 당시 특별전에 전시된 유물 중 김천시 모암동 마을유적 출토 토기는 감문국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모암동은 경북대박물관이 조사한 개령·감문면 지역과는 거리가 있지만, 삼한시대인 2~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개령·감문면 출토 유물 대부분이 감문국의 신라 편입 이후(5~6세기)의 것이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모암동 출토 토기는 사실상 거의 유일한 감문국 시대 유물인 것이다. 모암동 유적의 대표적인 감문국 토기로는 두귀달린항아리와 짧은목항아리 등을 들 수 있다. 주거지 유적에서 발굴된 탓인지 항아리의 모양은 매우 실용적인 듯하면서도 나름 멋을 부린 티가 난다. 대체적으로 둥근 모양이지만 물을 담을 때 편리하도록 손잡이가 달려 있다. 항아리 주둥이는 펼쳐지거나 오므려져 있어 용도에 따라 달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모암동 출토 토기는 물이 스며드는 재질의 ‘와질토기’다. 이는 당시 감문국의 토기 제작 기술이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유리질이 형성되지 않아 무르지만, 김천지역에서 발굴된 감문국 시대 유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감문국 중심지인 개령·감문면 지역 경우 5~6세기보다 앞선 시기의 고분이 발굴된 적이 없다. 감문국 역사 연구에 모암동 출토 토기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다. 토기의 독특한 형태는 감문국이 독자적인 문화를 향유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재환 경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모암동 출토 토기의 경우 발굴된 감문국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다. 비록 출토 유물이 소수지만 신라의 영향을 받기 전 감문국의 독자성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공동 기획:김천시▨ 도움말= 이재환 경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김천시 모암동 마을유적 11호 주거지에서 발견된 삼한시대 감문국의 항아리. ‘두귀달린항아리’(높이 18㎝)로 불리는 이 토기는 감문국이 존재하던 2~4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와질토기다. 사실상 거의 유일한 감문국 시대 유물 중 하나다. 김천시 모암동 마을유적 11호 주거지에서 발견된 높이 25.5㎝의 ‘짧은목항아리’. ‘영남 문화의 첫 관문, 김천’ 특별전 도록 발췌
2015.09.09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8> 무형문화재 제8호 ‘빗내농악’
■ 스토리 브리핑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1천500여년 전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김천시민의 놀이문화 속에 남아있다. 김천 특유의 가락과 정서를 담은 빗내농악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감문국 유산으로 알려진 빗내농악은, 1984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김천시사 등 여러 기록은 빗내농악에 대해 ‘농악의 역사는 삼한시대로부터 전해 왔다’고 적고 있다. 빗내농악을 삼한시대 감문국의 군사활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빗내농악은 농사에 지친 김천지역 민초들의 힘을 북돋워준 최고의 놀이이기도 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8편은 김천시 개령면을 중심으로 전해내려오는 빗내농악에 관한 이야기다. ◆ 감문국에서 비롯된 농악 빗내농악은 김천시 개령면 광천2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농악이다. 향토사학계에 따르면 빗내농악은 3~4세기경 신라에 편입된 읍락국가인 감문국의 군사활동에서 시작됐다. 실제로 빗내마을은 옛 감문국의 도읍지 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신라·가야·백제와 접경한 감문국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빗내농악의 원류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빗내마을 일원의 풍요로운 자연 또한 농악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김천의 젖줄’ 감천(甘川)이 유유히 흐르고, 주변에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예전의 강 폭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1900년대 초까지 소금배가 감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등 빗내마을 인근은 물자의 이동이 활발한 물류의 거점이었다. 도읍지의 중심부인 빗내마을서 탄생현재 개령면 광천2리 중심으로 발전군사력 육성·과시 위한 목적서 출발300여년 전 승려인 정재진이 재완성별신굿·농악 결합 독특한 형식 눈길북채 두 개 사용…남성·종교적 색채이승만정권 땐 타파의 대상이었다가전두환 신군부가 정치목적으로 부활오래전 감문국의 백성들 또한 감천의 수운과 충적평야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감문국의 주도권과 관련한 다툼도 있었다. 동사(東史)에는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국가 경영의 주도권과 관련한 군사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감문국 멸망 당시의 구전 역시 감문국의 군사적 능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 속문산성에서 80여명의 결사대가 끝까지 신라에 항전했다는 구전은, 빗내농악이 군사활동에서 비롯되었다는 향토사학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경상도 내륙의 전형적 풍물굿빗내농악이 감문국에서 유래됐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현재의 형태가 삼한시대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초대 빗내농악 상쇠이자 수다사 승려였던 정재진이 300여 년 전 빗내농악을 재완성했기 때문이다. 이후 빗내농악은 제2대 이군선·3대 윤상만·4대 우윤조에 이어 5대 이남문·6대 한홍엽·7대 한기식·8대 손영만 상쇠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빗내농악의 형식은 매우 독특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별신굿과 농악이 결합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경상도 내륙의 전형적 풍물굿인 빗내농악은 기본적으로 ‘농사굿’이 아닌 ‘진굿(군사굿)’이다. 농사굿은 모내기와 타작 등의 모습을 담아내지만, 진굿은 군대의 훈련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보통 40~50명이 모여 풍물패를 구성하고 인원 제한은 없다. 빗내농악의 전체구성은 1시간30분 정도지만 다양한 구성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 놀이패는 흰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군대처럼 민첩하게 대형을 형성했다 풀기를 반복한다. 빗내농악 특징은 ‘강하다’라는 단어로 정리된다. 매우 남성적이며 종교적 색채가 짙다. 특히 북은 빗내농악이 지닌 힘의 원천이다. 북을 칠 때는 북채 두 개를 이용해 두 손으로 치는데, 전남 진도 등에서도 두 개의 북채를 쓴다. 또한 진도의 북 치는 모습이 화려한 춤에 가깝다면, 김천의 것은 소의 움직임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하다. 빗내농악 제8대 상쇠인 손영만씨(52)는 “빗내농악의 북 두드리는 방법은 스님들이 법고를 치는 것에서 유래됐다. 네 발로 걸어다니는 짐승, 즉 축생들이 북소리를 듣고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환생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농악대가 쓴 흰 고깔에도 의미가 있다. 흰색은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국을 상징한다. 웅장한 김천의 징소리 또한 빗내농악이 발산하는 힘의 원천 중 하나다. 예로부터 김천에서 생산되는 유기와 징의 품질은 유명했는데, 김천의 징에서는 ‘우~웅’하는 황소의 울음소리처럼 웅장한 소리가 난다.◆ 현대사의 굴곡을 겪다1945년 광복 이후 근대화의 흐름 속에 빗내농악이 사라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졌지만 미국 유학파 출신의 이승만 정권은 농악을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제1공화국 당시 정부는 경찰 등 공권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미신 타파운동을 펼쳤다. 굿의 형태를 포함하고 있는 빗내농악 또한 타파 대상에 포함됐다. 1960년대 이후 진행된 산업화도 빗내농악이 잊히는 계기로 작용했다. 경북지역에서 섬유·전자산업 등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농악을 계승할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도시의 산업현장으로 떠났다. 손 상쇠에 따르면 1962년 김천의 빗내농악단이 서울민족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을 끝으로 빗내농악은 오랜 침체기를 겪는다. 흥미로운 점은 빗내농악의 부활이 1979년 12월12일 군사쿠데타를 감행한 신군부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1981년 전두환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차단하고 지식인층인 대학생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국풍(國風)81’이라는 문화행사를 열었다. 10만명이 넘는 인원이 행사에 동원됐고, 주최 측의 계산에 따르면 1천만명이 행사를 관람했다. 전 국민에게 건전한 전통문화를 보급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정부 주도의 행사로 덮으려는 속셈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기조 아래 김천의 빗내농악 또한 재발굴될 수 있었다.비록 안타까운 현대사의 굴곡에서 재조명됐지만 김천 시민들의 빗내농악에 대한 자부심은 굳건하다. 김천지역의 읍·면·동마다 있는 풍물패는 빗내농악에 대한 시민들의 열정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현재까지도 김천 시민들은 빗내농악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년마다 빗내농악 경연대회가 열리는데, 김천 각 지역의 풍물패가 갈고닦은 기량을 겨룬다.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 기획:김천시2014년 제5회 빗내농악경연대회에 참가한 한 농악대원이 두 개의 북채를 들고 북을 치고 있다. 빗내농악의 북치는 방법은 스님들이 법고를 치는 데서 유래됐다.빗내농악은 기본적으로 ‘진굿(군사굿)’으로 분류되는데, 농악대의 움직임이 마치 군대의 모습과 흡사하다.
2015.09.02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7> 창녕비와 감문국<하>
<스토리 브리핑>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 일원은 신라 병합 후에도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의 창녕비(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제33호)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비문에는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급척간(及尺干)’이라고 적혀 있는데, 당시 신라의 행정체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감문’이라는 국호가 신라시대에도 여전히 사용됐음을 알 수 있으며, 옛 감문국 지역의 위상을 가늠할 수도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7편은 신라 감문군(甘文郡)이 감문주(甘文州)로 승격된 역사적 배경과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의 천하관에 관한 내용이다. 삼국통일 의지 담긴 四方 철학으로지방행정 개편한 4개 州 중의 하나上州 중심지로 57년 군사·행정 거점중앙정부서 진골인 軍主 파견 통치백제 접경 탓…지리·전략적 요충지九州체제로 바뀔 때까지 위상 굳건 ◆ 신라의 사방관념과 감문주 6세기 당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은 삼국통일 이전까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군주다. 진흥왕은 한강유역과 함경도 지역은 물론, 남쪽의 가야권 일부까지 정복하며 신라의 위세를 떨쳤다.특히 영토를 확장한 진흥왕은 경주를 제외한 지방을 상주(上州)·하주(下州)·신주(新州)·비열홀주(比列忽州)의 4개 지방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상주의 경우 법흥왕 12년(525)에 설치됐지만, 신주·하주·비열홀주는 진흥왕대에 설치됐다.주목할 만한 점은 옛 감문국을 포함하는 상주 지역만이 원래 신라의 땅이라는 점이다. 각각 현재의 서울과 함경도 지역인 신주와 비열홀주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의 땅이었다. 경남 창녕을 중심으로 한 하주의 상당수는 가야의 영역이었다. 반면 경북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상주는 일찍이 신라에 편입된 소국이 많았다. 감문국(김천), 사벌국(상주) 등이 신라의 상주 지역에 있던 대표적 읍락국가다.당시 신라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은 진흥왕의 천하관인 ‘사방(四方)관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방은 ‘천하사방(天下四方)’이란 뜻으로 온 천하를 뜻한다. 이러한 사방관념은 지증왕(智證王, 437~514)이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지증왕은 국호를 정하면서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지배)한다”는 뜻으로 신라의 번성을 기원하는 의미다. 국호에 포함된 ‘사방’은 삼국통일을 갈망한 신라의 의지였다. 진흥왕은 이러한 의지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정복군주가 됐다. 지방을 4개 주(州)인 ‘사방’으로 나누고, 각 주마다 사방군주(四方軍主)로 불리는 군주(軍主)를 파견했다. 비록 삼국통일 전이었지만 고구려·백제·가야의 영토였던 곳을 사방에 포함시켜 통일을 향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 사방의 중심 중 하나가 옛 감문국의 영역인 감문주다. ◆ 왕명의 대행자, 감문군주현재의 김천 지역인 감문주가 신라 사방의 중심 중 하나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신라는 진흥왕이 사방을 완성한 뒤인 577년 상주(上州)의 주치주(州治州, 현재의 도청 소재지 격)를 사벌주(상주, 尙州)에서 감문주(김천)로 바꾸었다. 요즘과 비교하면 중소도시가 대구나 부산 정도의 지위를 지닌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신라시대 당시 주(州)로 지정된 지역이 드물기에 더 큰 관심이 간다. 경북지역에서는 김천(감문주)과 상주(사벌주), 선산(일선주)만이 신라의 주로 승격됐다. 사방군주의 한 명인 감문군주(甘文軍主)가 김천에 파견된 것은 주치주인 감문주가 누렸을 권위를 보여준다. 당시 중앙정부가 파견한 군주(軍主)는 진골 귀족 출신으로, 자체 행정조직을 꾸리고 백성을 다스렸다. 군주가 지방관으로 파견되면 중앙관리인 조인(助人)을 함께 데려왔지만, 지방 토호세력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중앙집권이 완벽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정부는 지방 토호세력들을 촌주(村主)로 임명한 뒤 군주를 돕도록 했다. 군주의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세를 거두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노동·군사력의 동원이었다. 상주의 주치주가 사벌주에서 감문주로 바뀐 근본적 원인은 백제와 관련이 있다. 신라는 554년, 백제와 맞붙은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통일을 향한 새 판도를 구상하고 지방행정 개편에 나섰다.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와의 접경지인 옛 감문국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신라의 ‘사방관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백제와 인접한 옛 감문국의 영역을 다잡아야 했다. 결국 신라는 상주(上州)의 주치주를 감문주로 옮겨 백제 접경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이후 감문주는 577년부터 57년 동안 상주의 중심지역으로 신라 군사·행정의 거점 역할을 담당했다. 감문주 전·후로 상주 주치주였던 사벌주(23년), 일선주(54년)와 비교해도 긴 시간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지방행정체제가 사방(四方)에서 구주(九州) 체제로 바뀔 때까지 옛 감문국 지역의 위상은 굳건했을 것이다.계명대 사학과 노중국 명예교수 역시 “신라가 삼국통일 기반을 다지던 시기의 감문주는 사방의 중심 중 하나였다. 감문군주의 존재 또한 옛 감문국 지역이 지녔던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 기획:김천시경남 창녕군 창녕읍 만옥정공원의 창녕비. 창녕비의 감문군주에 대한 내용으로 미뤄 옛 감문국 지역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라 국호에 관한 내용. 오른쪽 둘째 줄 아래부터 ‘신자덕업일신 나자망라사방(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사방의식의 표현이었다.
2015.08.26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6> 창녕비와 감문국<상>
<스토리 브리핑>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신라에 병합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그 흔적은 후대까지 남았다. 대부분 유적이 김천시 일원에 산재해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감문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경남 창녕군 창녕읍의 창녕비(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감문국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비에는 ‘감문군주(甘文軍主)’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데, 학계는 이를 감문국의 신라 병합 이후 김천지역이 지녔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6편은 창녕비로 추정해 본 신라 병합 이후 감문국에 관한 이야기다.561년 세워진 창녕 진흥왕 척경비碑文에 ‘감문군주는…’글귀 존재중요 국가회의에 참석했다고 기록신라 편입에도 위상 여전 보여줘# 창녕비와 감문국경남 창녕군에 위치한 창녕비는 창녕읍 만옥정공원에 있다. 원래 화왕산에 있던 것을 192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창녕비는 신라가 대가야를 복속시키기 1년 전인 561년 신라에 의해 세워졌다. 창녕비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로도 불린다. 창녕비가 세워진 6세기 신라는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진흥왕(眞興王, 534~576)대의 신라 영토는 통일 전까지 신라가 확보한 최대의 영토였다. 신라는 555년 창녕지역을 점령한 뒤 하주(下州)를 설치하고 군주를 파견했다. 가야권이었던 창녕지역의 지배를 탄탄히 하고 가야세력의 반발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또한 신라가 창녕에 주를 설치한 것은 끝까지 저항하던 대가야를 멸망시키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창녕비에서는 당시 신라의 행정체제를 엿볼 수 있다. 창녕비는 창녕에서 열린 신라 귀족들의 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그 관직과 직위가 나열돼 있다. 당시 신라 최고 의결기관인 화백회의 수장 상대등을 비롯한 고위 귀족과 각 주의 군주(軍主,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신라의 지방관)가 창녕에 모인 것이 적혀 있다. 1천여년의 세월 속에 비문 상당 부분이 지워졌지만, 감문국의 흔적은 ‘감문’이라는 글귀로 비문 속에 남아있다. 김천을 포함한 경북 서부 지역을 다스리던 감문군주(甘文軍主)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비문에는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급척간(及尺干)’이라고 적혀있다. 감문군주에 대한 기록은 신라 편입 이후 옛 감문국 지역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감문군주가 창녕에서 열린 중요 국가회의에 참석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비문을 바탕으로 신라 관리가 ‘감문’이라는 감문국의 국호(國號)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신라에 편입된 감문국시기에 대한 이견은 존재하지만, 신라가 감문국을 정복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신라는 효율적 통치를 위한 고민 끝에 감문국을 감문군(甘文郡)으로 편제한다. ‘군’은 오늘날 기초자치단체 규모의 행정단위다. 대규모 행정단위로 현재의 광역시·도와 비슷한 ‘주’보다는 작지만, 면 단위인 ‘성·촌’보다는 크다. 감문국 또한 ‘주-군-성(촌)’ 순서로 대변되는 신라의 지방통치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당시 신라는 읍락국가를 병합한 후 해당 지역의 경제·교통·군사적 중요성과 멸망 당시의 힘 등을 고려해 지방행정 체제에 포함시켰다. 주목할 만한 점은 경북 지역 대부분 소국들이 하급 행정단위인 성·촌 단위로 신라에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감문국이 군으로 편제된 것은 경북지역의 읍락국가 중에서는 그런대로 규모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명대 사학과 노중국 명예교수 또한 “감문국이 개령군이 된 것은 여러 소국 중에서도 위상이 높았던 국가였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신라는 지증왕(智證王, 437~514)대에 주-군-성(촌)제를 편제하면서 최초로 실직주를 설치한 이후 주의 설치를 늘렸다. 이후 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 수도 경주를 제외한 전국을 4개 주(州)로 나눈다. 신라는 전국을 상주(上州), 하주(下州), 신주(新州), 비열홀주(比列忽州)로 나누어 통치했다. # 주치(州治)로 승격된 감문군(甘文郡)신라는 요즘의 도청 소재지에 해당하는 주치(州治)를 각 주마다 설치했다. 상주(上州)의 경우 오늘날 상주(尙州)를 주치로 삼았으며, 하주는 경남 창녕을, 신주는 서울을, 비열홀주는 함경도 안변을 주치로 삼아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주의 중심인 주치는 신라 지방행정과 군사활동의 중심이었다. 주치를 담당하는 지역은 필요에 따라 바뀌었는데, 실제로 577년 상주(上州)의 주치가 상주(尙州)에서 감문(甘文)으로 바뀌었다. 상주(上州)의 주치를 감문으로 옮긴 이유는 기록에 없지만, 당시는 감문군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매우 부각되던 시기였다. 감문군이(甘文郡)이 감문주(甘文州)가 되면서 김천지역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을 것이다. 각 주는 군주(軍州)가 다스렸다. 군주는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고위관리다. 6세기 들어 중앙집권화를 탄탄히 한 신라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했다. 군주는 또한 왕의 대행자였다. 왕을 대신해 통치하는 것은 물론 지방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자가 군주였다. 진골 귀족이 개령(감문)으로 파견돼 상주(上州)를 다스리는 감문군주(甘文軍主)가 되었다. 특히 신라 4개 주에 파견된 군주는 창녕비에 구체적으로 거론돼 있다. 비자벌군주(창녕)·한성군주(서울)·비리성군주(안변)·감문군주(김천)가 적혀있다. 당시 신라는 지방통치의 최고수장인 4개 지역의 군주를 ‘사방군주(四方軍主)’라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557년 감문지역에 군주를 설치해 청주(靑州)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지리지의 청주 설치 기사를 오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공동 기획=김천시▨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경남 창녕읍 만옥정공원에 위치한 창녕비(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의 모습. 창녕비에는 감문군주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신라 병합 이후 옛 감문국 지역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창녕비의 내용을 해석한 안내판의 모습. 당시 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신라 귀족의 직급과 관등이 기록돼 있다.
2015.08.19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5> 일제의 역사왜곡과 감문국
<스토리 브리핑>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해 자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연구한다는 구실로 전국의 유적을 파헤쳤으며, 김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917년 김천을 찾은 일본인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는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甘文國)을 일본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5편은 식민사학 연구에 감문국을 이용하려 했던 일본 제국주의에 관한 내용이다. 한반도 식민통치 정당화하려 학자 동원1917년 장부인릉 등 유적 발굴조사 나서감문국 통해 임나일본부설 증명 안간힘“감천유역은 고대 日 보호로 후대 남아…”어떠한 증거도 제시못한 채 억지주장만학계 “애초 김천에 倭 있었단 전설 없어”일제시대 연구방식의 불순한 의도 지적 #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라18세기 이후, 서구 열강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과 르네상스를 바탕으로 근대 산업혁명을 일궈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강대국들은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국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 서구의 자신감은 부러운 것이었다.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역사적 열등감은 늘 고민거리였다. 조선 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지만, 고대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여 왔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이 가야지역을 지배했다는 학설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또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로도 불린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으니 조선이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논리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한 실증적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임나일본부설은 역사를 도구 삼아 서구 열강과 어깨를 견주고자 했던 일본의 노림수였다. 1917년 경상도 일대의 유적 조사에 나선 역사학자 이마니시 또한 일본 제국주의에 동참한 인물이다. 일본 기후현 출신인 이마니시는 일본 도쿄대 학부에서 사학을, 대학원에서는 조선사를 전공했다. 이마니시는 조선총독부 부설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회원과 경성제국대 교수로서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 이마니시와 감문국1917년 김천에 도착한 이마니시는 조선의 상황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10여년 전 경주를 방문해 신라 유적을 조사·연구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마니시는 얼마 뒤인 1913년, 교토대 조교수로 임명됐지만, 일본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다시 조선행을 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황금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수많은 일본인이 문화재 약탈에 나선 상황이었다. 일부는 대구의 골동품점에 유물들을 팔아 큰 이익까지 남기고 있었다. ‘발굴’을 가장한 일본인들의 ‘도굴’에 조선의 강토가 신음하고 있었다. 학자인 이마니시조차 1906년 자신의 보고서에서 “경주에서 발굴이 성행해 이들 발굴품이 고물상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밝혔을 정도다. 조선총독부의 ‘대정육년도(1917년) 고적조사보고(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에 따르면 이마니시는 경상도 발굴일정의 마지막 방문지로 김천을 선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사업’을 명분 삼아 조선의 유적을 발굴 중이었다. 이마니시가 김천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감문국이 고대 일본세력의 지배를 받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마니시는 김천 개령면 지역의 유적 일부를 직접 실측했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제1호분과 서부리 장부인릉의 경우 직접 나서 조사했다. 이외에도 이마니시는 감문산성과 감문국 태자궁터 등을 조선총독부 보고서에 언급하는 등 감문국 유적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마니시의 진정한 관심사는 감문국이 아니었다. 이마니시가 작성한 조선총독부 보고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보고서는 김천 개령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감천유역은 일본의 보호 하에 감문으로 후대에까지 남아서 일본에 의해 백제에 주어진 지방인데, 개령이 감문국이었다는 전설(傳說)은 귀중한 것인데(중략) 감문천 하류인 개령이 오랫동안 신라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세력이 가라(가야)지방에 있었던 결과였다.” 보고서 내용은 이마니시의 감문국 유적조사가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기초조사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마니시는 감문국의 일본세력설에 대해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의 주장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학계 또한 이마니시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계명대 사학과 발간 계명사학 23집에 수록된 논문은 “애당초 이 지역(김천)에 왜(일본)가 있었다고 본 일본학자(이마니시)의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전설이나 유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오히려 전설을 바탕으로 연구결과를 도출한 이마니시의 연구방식이 조선총독부의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 지키지 못한 역사이마니시의 김천 방문 후에도 김천지역에서 일제의 문화재 약탈은 지속됐다. 특히 개령면 일대는 김천에서도 큰 규모의 고분군이 형성돼 있어 일본인들의 관심이 매우 컸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인들이 고분 내부의 부장품을 가져갔다. 안타깝지만 주민들의 무지 속에 잃어버린 문화유산도 많다”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문 위원은 자신이 직접 들었다는 개령면 주민의 일화도 소개했다. 1930년대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당시 김천시 개령면의 한 농민이 양천리 고분군 주변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농민은 밭에서 넙적한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농사일을 위해 돌을 걷어냈더니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김이 솟아나왔다. 놀란 농민이 김이 나온 곳의 구멍을 파보았는데, 오래된 무덤의 것으로 보이는 석실을 발견했다. 밭을 갈다 고분을 발견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주재소 순사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순사는 당장 농민의 개간작업을 중지시키고서는 전문가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을 데려온다. 그들은 곧 고분 안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고분 내부에는 일본인들이 놔두고 간 철갑옷 조각이 있었는데, 그 양이 두 가마니나 됐다. 그마저도 밭을 갈던 농민이 가져다 보관하다 마을에 들른 고물상에 헐값에 팔아넘기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김천의 사례와 같은 일은 전국에서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조선고적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수많은 유물을 일본으로 보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조선의 유물들을 전시, 판매하는 등의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공동기획=김천시▨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석실고분 내부의 모습. 1967년 이 고분에서 금제이식(귀걸이), 화살통장식,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돼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안타깝게도 김천지역 고분 전체가 온전히 보존되지는 못했다. 향토사학계에 따르면 고분 상당수가 일제강점기에 도굴 당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일본인들은 엄청난 양의 우리나라 유물을 전시·판매했다. 1941년 대구에서 열린 ‘신라예술품전람회’ 리플릿. 아래쪽에 한문으로 적힌 ‘김천’이라는 지명이 눈에 띈다. 영남일보 DB
2015.08.12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4> 금효왕릉
<스토리 브리핑>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대장군 석우로(昔于老)는 서기 231년 김천지역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했다. 이후 신라는 진한지역의 소국(小國)을 규합하고 국운 융성의 기회를 마련했다. 반면 신라에 복속된 감문국은 1천700여년의 세월 속에 잊혔다. 하지만 김천 곳곳에는 감문국 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 여럿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동부연당과 장부인릉 등의 감문국 유적이 잘 알려져 있지만,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金孝王陵)에 가장 눈길이 간다. 이는 금효왕릉이 감문국 왕의 무덤이라는 구전이 김천지역에서 전해내려오기 때문인데, 김천의 옛 이름인 ‘금릉(金陵)’ 또한 금효왕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4편은 감문국 금효왕과 그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다. 김천 감문면 삼성리 구릉지에 위치5∼6세기 조성추정 너비 15m 고분감문국의 마지막 왕 무덤으로 구전학계는 ‘신라 병합후 조성’에 무게향토 사학계 ‘감문국 개령지’ 근거"개령에 살던 김간의 역모 가담으로고초겪던 후손이 조상 기록물 없애감문국 관련 기록도 함께 사라진듯” #‘말무덤’으로 알려진 고분(古墳)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에는 감문국 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금효왕릉이 있다. 이 오래된 무덤은 감문면사무소에서 삼성리로 향하는 도로변 인근 구릉지에 위치해 있다. 무덤은 6m 정도의 높이에 15m가량의 너비로 일반 봉분보다는 훨씬 큰 규모다. 경주의 거대한 왕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그 위용은 남다르다. 삼성리 출토 토기가 5~6세기의 것이기에 금효왕릉의 조성시기 또한 이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금효왕릉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무덤 남쪽에는 일반인의 무덤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금효왕릉이 위치한 삼성리 주민들조차 왕릉의 존재를 몰랐다. 주민들은 금효왕릉을 단지 ‘말(馬)’의 무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또한 감문국과 관련이 있다. 향토사학계는 ‘말무덤’이 지배세력의 무덤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말’이라는 음절은 ‘크다’는 의미가 있는데, 주민들이 말하는 ‘말무덤’이 ‘큰 수장의 무덤’이라는 주장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금효왕릉 인근 도로변에 안내판이 설치된 것이다. 금효왕을 비롯한 감문국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이 점차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금효왕은 과연 누구인가김천지역의 구전에 따르면 금효왕은 감문국의 마지막 왕, 또는 첫째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옛 문헌에 금효왕릉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만, 대부분 후대의 것으로 유적의 위치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금효왕과 장부인의 러브스토리 또한 감문국 멸망 한참 뒤인 조선 선비의 시 속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지리서 신동국여지승람은 ‘현의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감문 금효왕릉이라고 전한다’고 기록했다. 지리서 조선환여승람에도 금효왕릉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며 무덤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학계는 금효왕릉의 감문국 유적설에 대해 다소 부정적 입장이다.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금효왕릉을 신라 병합 이후 감문국의 영역을 다스리던 토착세력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 교수는 “(감문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 토착세력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신라시대, 김천을 다스리던 감문국 지배층 후손들이 서라벌(경주)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조성한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강종훈 교수 또한 “금효왕릉이 옛 감문국의 영역에 파견된 신라인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금효왕릉의 감문국 유적설에 회의적 입장을 드러냈다. 반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와 관계없이 금효왕릉 자체가 감문국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의견도 있다. 계명대 사학과 발간 계명사학 제23집에 수록된 ‘고대 김천지방의 역사와 문화’라는 논문에 이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논문은 “감문국 관련 유적과 전승이 그대로 남아 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 진위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김천 개령면 지역민의 정체성이 고대의 독립국이었던 감문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단 금효왕릉이 감문국의 중심지인 개령면 일원이 아닌 감문면에 위치한 점은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고 밝혔다. #개령면의 아픈 역사와 감문국 금효왕릉의 진위 논란은 감문국 유적에 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불거졌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 관련 기록이 태부족인 이유로 김천시 개령면의 아픈 역사를 들고 있다. 개령면 일원에서 반란사건이 계속 이어졌고, 조정이나 문중에 의해 지역과 관련한 기록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이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개령면 일원은 중앙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반골적 기질이 강했다. 이는 신라에 저항한 감문국 후손의 유전자가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천지역의 구전에 따르면 감문국 백성은 신라에 병합되기 전까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중앙정부의 권위에 대항하는 개령면민의 성향이 신라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건이 개령지역에서 일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개령들 일원에서 물자보급기지를 운영했고, 수많은 개령 주민이 부역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뒤인 1600년(선조 33) 6월에는 개령 출신 길운절(吉雲節) 등이 제주도에 건너가 반란을 시도했다 미수로 끝난 적이 있다. 이 사건으로 개령현이 일시 폐현된 일이 있었다. 조선말기인 1862년(철종 13)에도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인해 진주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이 민란의 여파가 개령까지 미쳤으며 일명 ‘개령민란’으로 불린다. 특히 감문국 관련 기록이 거의 다 사라진 데는 김간(생몰년대 미상)이라는 인물과 관련한 사건이 결정적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개령면의 선비 우준식이 쓴 향토지 감문국개령지에는 ‘김간’과 관련한 기록이 있다. 감문국개령지의 해당 내용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찾아봐도 임진년(1592년) 이상은 자세하지 못하고 사관의 성명이나마 임진년 이후의 것뿐이니(중략) 이보다 더 자세한 개령읍지가 있었지만 약 100년 내외 전에 없앴다는 말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개령면에 살던 ○○김씨 조상이던 ‘김간 역적기’가 있으므로 항상 그 자손들의 불명예가 되므로 자손들이 읍지의 기록을 말소케 하고서 노력한 바 오래이다.”감문국개령지를 보면 고려말인지 조선초인지 알 수 없지만 개령에 살던 김간이라는 사람이 역모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고초를 겪던 김간의 후손들이 조상과 관련한 모든 기록물을 없앤 것으로 보인다. 향토사학계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감문국과 금효왕에 관한 기록이 함께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 위원은 “김간이 언제 난을 일으켰는지조차 기록이 없다. 조선초까지 남아있던 감문국 관련 기록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사적 부침 탓인지 감문국개령지는 개령 사람들을 깐깐한 성품으로 묘사하고 있다. 개령지는 “자고로 개령사람은 근면해 재물을 쌓고 부를 얻는 데 능하니, 좀 지나치게 말하면 타향사람이 말하기를 개령사람이 앉은 자리 풀도 안 난다고 하니…”라며 개령지역이 겪은 아픔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김천시 감문면 삼성리 금효왕릉의 모습. 김천지역 구전에 따르면 금효왕은 감문국의 첫째 왕이거나 마지막 왕이다.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말무덤’으로도 불리고 있다.일제강점기 당시 김천 개령면의 선비 우준식이 쓴 감문국개령지 16페이지. ‘김간 역적기’ 때문에 불명예를 겪은 그의 후손들이 (개령)읍지의 기록을 없앴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15.08.05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3> 장부인릉
<스토리 브리핑>김천시 개령면 서부리의 한 언덕에는 삼한시대(三韓時代) 감문국(甘文國)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부인릉(獐夫人陵)이 있다. ‘장릉(獐陵)’으로도 불린다. 장부인릉은 현재 포도밭으로 변해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장부인에 관한 구전은 김천지역에서 매우 유명하다. 장부인이 감문국의 마지막 왕, 금효왕(金孝王)의 부인이었다는 설과, 금효왕의 어머니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장부인과 금효왕이 애틋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었을 것만 같은 뉘앙스의 시(詩)도 전해진다. 반면, 학계는 장부인릉의 진위 여부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지만 사료적 가치에는 주목하고 있다. 감문국 장부인릉의 사례를 통해 고대사회 여성의 정치적 역할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학계는 장부인이 나라의 제사를 주관한 사제(司祭)나 풍년을 빌었던 무녀(巫女)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3편은 감문국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부인릉에 관한 이야기다. 신라때 창건된 사자사 터에 위치 조선환여승람 등‘왕비 무덤’기록 왕과 러브스토리 담은 詩도 전해 인근 고분 상당수 6∼7세기 추정 학계 “삼한때 조성으로 보긴 곤란”고대여성의 정치적 역할 등 주목 풍요·다산 비는 제의 주관 추정 # 장부인릉에 대한 역사적 기록장부인릉은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 웅현 도로변의 사자사(獅子寺) 터에 있다. 사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훗날(1473년)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에 의해 허물어졌지만, 그 자재는 개령향교를 세우는 데 쓰였다.현재 장부인릉과 그 주변은 포도밭으로 변해 고분의 존재를 가늠할 수 없지만, 감문국과의 연관성은 충분해 보인다. 장부인릉이 위치한 포도밭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이 저 멀리 보인다. 이어 동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감문국의 진산인 감문산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솟아 있다. 장부인릉이 감문국 왕비의 무덤이라는 구전이 설득력을 갖는 대목이다.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구릉지에서 감문국 백성들의 터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장부인릉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장릉현의 서쪽 웅현리에 있는데, 속칭 감문국 때의 장부인릉이라고 한다”면서 그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지리서 조선환여승람과 교남지에도 각각 ‘장부인릉이 감문국 왕비의 무덤’이라고 밝히고 있다. 1934년, 김천 개령면의 선비 우준식 선생이 간행한 감문국개령지에는 장부인릉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감문국개령지에는 ‘일명 장부인릉이라 하고 일명은 장희릉이라고 하나니 현재 서부동 서변 웅현에 있으니(중략)’라고 적혀 있다. 또한 감문국개령지에 수록된 우준식의 시를 통해 장부인에 대한 김천사람들의 애틋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사랑하는 獐姬(장희)가 어이가단 말가/ 한번 가면 못올 길을 어이가단 말가宮闕(궁궐)에 계옵신 임금님의 옷깃에/ 구슬같은 눈물 떠러트리고千百年(천백년) 잘있으라 祝願(축원) 드리였거든/ 어인일가 오늘의 메여진 무덤우에/ 無心(무심)한 까마귀 앉았다 날너더라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역사가인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또한 그의 시집 이십일고회고시에서 ‘장부인은 간 지 오래인데 들꽃은 향기롭다’는 표현으로 장부인에 대해 다루었다. 이처럼 여러 문헌이 장부인릉을 언급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김천문화원 발행 향토사료집의 경우에도 ‘장부인릉이 삼한시대에 조성됐다’면서도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 일본인의 눈에 비친 장부인릉장부인릉에 대한 최초 유적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진행됐다. 1917년, 경상도 일대 유적조사에 나선 일본인 동양역사학자 이마니시 류(西金龍, 1875~1932)가 김천에 들러 장부인릉을 조사했다. 당시 이마니시는 감문국 관련 유적에 대해 집중 조사했는데, 장부인릉의 경우 직접 실측했다. 그러나 무덤의 훼손이 심해 고분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장부인릉은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고분은 파헤쳐져 있었고, 석실을 덮었던 덮개돌은 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이마니시는 김천 방문 3년 뒤인 1920년 조선총독부 보고서에서 장부인릉에 대해 언급했다. 이마니시는 “‘장릉’은 ‘장부인릉’의 약자인데, 조선시대 일대에서 구전된 감문소국의 장부인릉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이다. ‘장(獐)’은 크다는 의미가 있고 거기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전설이 깃든 것으로 추정되었다”라고 밝혔다. 이마니시는 장부인릉 남쪽에 위치한 폐사지인 사자사터와 장부인릉의 관련성을 의심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실제로 장부인릉이 위치한 사자사터에는 삼층석탑이 있는데, 그 모습에 꽤 단아하면서도 웅장한 면이 있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인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 새로 다듬어 조성했다.# 장부인은 과연 왕비였을까김천지역의 구전에 따르면 장부인은 금효왕의 부인 또는 금효왕의 어머니다. 하지만 학계는 이미 알려진 장부인의 이미지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다. 장부인릉의 조성 시기가 감문국 시대의 것으로 보기 어렵고(장부인 인근 고분 상당수가 6~7세기 것으로 추정), 상당수 문헌이 구전을 기반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계는 장부인릉의 존재를 고대 여성의 역할과 연계시켜 주목하고 있다. 특히 계명대 사학과 발행 계명사학 제23집에 수록된 ‘고대 김천지방의 역사와 문화’라는 논문은 고대 여성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이 논문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나 성덕왕대의 수로부인, 금오신화의 재매부인 등 고대사회 여성의 역할이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의 역할에 가깝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논문은 장부인의 이름을 바탕으로 고대 여성의 정치적 역할을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장부인의 ‘장’ 자는 노루 ‘장(獐)’ 자, 즉 노루부인이라는 명칭인데,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1903~77)의 해석에 따르면 ‘노루’는 산골짜기를 의미한다. 이는 고대 농업의 기반이 산골짜기 사이의 땅이었다는 주장이다. 즉, 산골짜기에서 풍요와 다산을 비는 의식이 행해졌고, 여성 사제들이 이런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따라서 장부인 또한 생산과 관련한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나 무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다. 한편, 오랜 세월 유적이 방치된 탓인지 한동안 장부인릉의 위치가 잘못 소개된 적도 있었다. 실제로 최근까지 언론에 소개된 장부인릉의 위치와 사진이 엉터리로 표기되어 있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조선시대 청백리 학암 강석구(姜碩龜, 1726~1810) 선생의 부인과 그 며느리의 묘가 장부인릉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장부인릉은 강석구 선생 부인묘 뒤편에 있지만 포도밭을 경작하면서 그 흔적을 웬만해서는 찾을 수 없게 돼 이런 일이 벌어진 듯하다”고 말했다. 이에 김천향토사연구회는 장부인릉의 정확한 위치를 알리기 위해 표지석을 제작 중이다. 장부인릉의 표지석에는 ‘속전감문국시 장부인릉지(俗傳甘文國時 獐婦人陵址, 감문국 때의 장부인릉터)’라는 문구가 들어갈 예정이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기획:김천시장부인릉이 위치한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의 포도밭에서 바라본 개령면 일원의 전경. 사진 중앙부의 탑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인 서부리 석탑이며, 왼쪽의 작은 산 아래가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이다.김천향토사연구회가 제작 중인 장부인릉 표지석 안내문.
2015.07.29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2> 궁궐터 동부연당(개령면)
◆스토리 브리핑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는 김천지역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의 궁궐터 일부가 남아있다. 현재 동부연당(東部蓮塘)으로 불리는 감문국 궁궐터는 김천에서 구미로 향하는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연잎 가득한 연못과 그 주변을 둘러싼 무성한 수풀은 감문국 왕이 거닐었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한때 번성했을 왕국의 궁궐터는 1천700여년이라는 세월의 풍파 속에 쇠락을 거듭했다. 원래 동부연당은 감천(甘川)제방에서 개령면 동부리까지 이어져 있었지만, 그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최근 100여년 동안 경작지 확장과 도로 개설로 인해 규모 또한 현저히 줄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2편은 감문국 궁궐에 관한 이야기다. 향토사료집·감문국개령지 등에서도‘동부리의 연꽃 연못’ 동부연당 지목주변의 주춧돌·기와조각 옛터 입증옛 동부연당은 甘川제방부터 이어져조경기능 외 배수지·유희시설 활용‘김종직 버드나무’감천물 유입 방증 # 감문국 성장의 증거감문국은 서기 231년(조분왕 2)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신라에 병합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감문국의 궁궐유적은 현재까지 남아 옛 소국의 영화로움을 전하고 있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의 동부연당이 감문국의 궁궐 일부로 알려져 있다. 동부연당은 ‘동부리의 연꽃이 자라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감문국 궁궐터의 남단에 있다. 동부연당은 연못의 조경적 기능과 함께 갈수기 때 물을 모아두었던 배수지 역할을 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각 감문국 왕과 왕비(모자 관계라는 구전도 있다)로 알려진 금효왕(金孝王)과 장부인(獐夫人)이 동부연당에서 정을 나누었다는 구전이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동부연당에서) 인근 감천이 범람할 때 물을 모아두었다가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감문국 지배세력이 유희를 즐기던 장소로도 활용됐을 것”이라며 동부연당의 기능에 대해 추측했다. 실제로 동부연당 남편의 도로변에는 조선 전기 영남 예학의 종주인 김숙자(金淑子)·김종직(金宗直) 부자가 심었다는 버드나무가 있다. 김숙자·종직 부자는 감천의 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삼한시대나 조선시대나 동부연당 인근은 감천의 물이 드나드는 장소였던 것이다. 현재 동부연당 한가운데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에는 궁궐 건축물에 쓰였을 법한 주춧돌 몇 개가 남아있다. 옛 문헌에는 감문국 궁궐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감문국 궁궐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전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궁궐 옛터 유산 북쪽 동원 곁에 감문국 때의 궁궐터가 남아 있다’며 감문국 궁궐의 위치를 지목했다. 학계 또한 감문국 궁궐에 대한 문헌기록을 의미 있게 평가한다. 계명대 사학과 노중국 명예교수는 ‘신라 중고기의 감문군주’라는 논문에서 감문국 궁궐터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노 교수는 논문에서 “궁궐터라든가 왕릉 등은 정치적 성장이 어느 정도 이뤄진 후 나올 수 있다. 따라서 감문국과 관련되는 궁궐터 등은 감문국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 감문국개령지와 감문국 나라가 사라진 지 1천여년이 흘렀기에 도읍의 흔적을 더듬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나마 최근의 기록인 향토사료집(1986년 김천문화원 발간)에도 감문국 궁궐터에 대한 내용은 턱없이 부족해 고대사 연구에 대한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사료집에는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개령면사무소 뒤편의 유산(柳山) 또는 유동산(柳東山) 아래에 삼한시대 감문국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한다’ ‘수백년 전까지만 해도 연지(蓮池) 근처에 초석(礎石, 주춧돌)과 와편(瓦片, 기와조각)이 산재했다.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오히려 1934년 우준식이라는 인물이 집필한 감문국개령지(甘文國開寧誌)에 감문국 궁궐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동부연당이 위치한 동부리는 단양우씨 집성촌이었다. 구한말 대부호로 자선에 앞장선 우상학(禹象學) 등 우씨 성의 인물이 많이 배출됐지만, 정작 우준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 개령면에 살던 선비로 추정할 뿐이다. 어쨌든 우준식은 감문국개령지를 통해 감문국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려 했다. 감문국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물론, 김천이 예사롭지 않은 고장임을 보여주려 시도했다. 또한 감문국개령지는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에 쓰였기에 비교적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감문국개령지의 머리말을 보면 우준식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준식은 감문국개령지의 필요성과 감문국 연구에 대한 이유를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머리말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내 이제 개령지를 쓰는 데 있어 신라와 동시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감문국시절의 형편을 쓰고자 한다. 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개령읍지 등의 기록이 있었지만 거의 사라져 도저히 구할 수 없게 됐다. 몇 개 재래읍지가 있지만 보잘것없는 간략한 것이어서 기록의 가치가 없었다.(중략)”감문국개령지는 감문국으로부터 이어받은 정통성도 강조하고 있다. 감문국개령지는 ‘개령은 현재 1개 면으로 그 체면이 졸하나 과거 감문국으로서, 감문주로, 청주로, 개령현으로 변화했다’며 유사 이래 감문국의 영역이 김천의 중심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감문국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향토지라면 어느 책에나 있을 법한 편집위원 명단이나 후원자의 이름은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천학불식(淺學不識, 학문의 깊이가 얕고 지식이 부족한)의 몸으로 이 책을 다 하였다 할 수 없나니 후일의 대가를 기다려 수정되기를 바라는 바’라는 머리말 끝부분의 문구로 보아 우준식 홀로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 감문국 궁궐터와 세자궁지감문국개령지에는 감문국 멸망에 대한 아쉬움과 감문국 궁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저자 우준식은 “감문국의 궁궐은 1천700여년 전 신라에 의해 사라졌지만 현재까지 궁궐의 자취와 주춧돌이 남아있으며 현대인으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궁궐에 대한 기록은 다른 문헌의 것과 비슷하다. 감문국의 궁궐지가 현재의 개령면 유동산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부연당 부근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의 눈물의 자취가 역력하다’는 표현을 덧붙여 망국의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감문국개령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감문국 세자궁터에 관한 내용이다. 세자궁에 관한 기록은 다른 문헌에서 찾기 힘들기에 가치가 있다. 감문국개령지는 ‘(감문국) 세자궁도 감문국 시절의 이야기니 (중략) 동부동 호두산 좌측 아래다. 그 터에 지금 팽나무 다섯 그루가 있는데 옛말을 일러주는 듯하며 세칭 이 터를 세자궁터라 한다’고 적고 있다. 한편 현재까지 남아있는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은 동부리 주민의 휴식처로 쓰이고 있다. 연못 동편의 정자는 마을 주민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연못 남편에는 족구장 등 체육시설이 있지만 늘 고즈넉한 풍경이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 기획 : 김천시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는 감문국 궁궐유적인 동부연당이 위치해 있다. 최근 100여년 동안 경작지 확장과 도로 개설로 그 규모가 크게 줄었다.동부연당의 연못 주변에는 건물의 주춧돌로 쓰였을 법한 큰 돌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문헌들은 현재의 동부연당 인근이 감문국 궁궐터라고 지목하고 있다.
2015.07.22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1> 감문산(개령면)과 감문산성
◆ 스토리 브리핑한반도에서 한 나라의 도읍(都邑)과 산(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산은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상징되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도읍지가 갖춰야 할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매서운 겨울철 북서풍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 ‘방어’와 ‘감시’라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실제로 조선 제1궁인 경복궁 북편에는 북악산(北岳山)이 버티고 서 있으며, 고려 수도인 개경 역시 진산(鎭山)으로 송악산(松岳山)을 두었다. 신라 수도 경주의 경우에는 남산(南山)을 통해 불교의 이상향을 실현하려 했다. 1천700여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 또한 마찬가지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 궁궐지로 추정되는 김천시 개령면의 동부연당 인근의 감문산(甘文山)을 감문국을 지키던 진산으로 보고 있다. 감문산은 감문국 방어의 최일선이면서 선산·김천·상주를 잇는 교통의 중심 역할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감문산 정상부의 감문산성(甘文山城)은 감문국 방어의 1차 관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감문산성에는 봉수대 등의 군사시설 흔적이 남아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1편은 감문국의 진산인 감문산과 감문산성에 관한 이야기다. 궁궐터 동부연당 인근 위치한 진산‘취적’‘성황’‘봉수’이름으로도 불려 나팔·해자 등 군사목적과 밀접 관련속문·고소산성보다 낮지만 요충지탁 트인 시야에 개령들·감천 펼쳐져동태 감시와 수륙 교통관리에 최적아도화상의 계림사 창건설화 흥미등산로 중간 ‘108계단’도 눈길 끌어# 여러 이름을 가진 감문산 감문산은 김천시 개령면에 위치한 해발 320m의 낮은 산이다. 개령면사무소를 지나 인근 동부리와 양천리 경계에 난 산길을 따라 오르면 감문산 정상으로 향할 수 있다. 감문산은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과 가까이 있으며 감문국의 진산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한 점은 감문산의 이름이 여러 가지라는 것인데 그중 하나가 ‘취적산(吹笛山)’이다. ‘취적(吹笛)’이란 ‘피리를 분다’는 뜻인데, 해당 명칭은 김천시 개령면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김천에서는 감문국 시절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났을 때 취적봉에서 나팔을 불어 급변을 알렸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나팔’이 ‘피리’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군사활동이 취적봉 전설로 남았다는 의견도 있다. 2005년 경북대의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지표조사’에 따르면 신라 병사의 나팔 소리가 취적봉 전설의 원류다. 삼국시대 나팔소리를 이용한 군대 간 연락법이 후대에 이르러 봉수로 대체되었고, 전설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지표조사 결과는 ‘취적봉 전설이 고대 연락체계와 주민동원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감문산의 또 다른 이름은 성황산(城隍山)이다.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성벽과 함께 수로를 파 적의 침입을 막는 해자(垓子)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감문산에서 해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감문국 궁궐을 지킨 것으로 알려진 감문산성이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감문산은 감문국의 진산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에서 성황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감문산의 또 다른 이름은 봉수산(烽燧山)이다. 산 정상부 감문산성 한가운데의 평평한 고지에 봉수대 흔적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 초기 신라불교의 현장감문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나쁘지 않다. 완만한 오르막에다 급경사마다 계단이 조성돼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다. 특히 등산로 중간지점의 ‘108 계단’이 눈에 띈다. 김천이 맺은 불교와의 인연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감문산에는 계림사(鷄林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곳의 내력이 범상치 않다. 계림사는 신라 눌지왕 3년(419) 고구려 승려이자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아도화상이 감문산에 계림사를 창건한 이유도 흥미롭다. 감문산의 작은 봉우리가 호랑이를 닮았다 해서 호두산(虎頭山)으로 불리는데, 당시 호두산 맞은편의 감천 건너 아포의 한골 주민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 사연을 전해들은 아도화상은 직지사를 짓고 있던 승려와 목수를 불러 절을 지었다. 호랑이의 거센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와 상극인 닭 ‘계(鷄)’자에 수풀 ‘림(林)’자를 써서 계림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한골에서는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계림사 창건설화를 뒤로한 채 등산로를 오르면 감문산성의 일부인 토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무성하게 자란 풀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인위적으로 쌓은 토성이 등산로 동편의 가파른 오르막에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완만한 경사의 등산로 서편에는 별다른 구조물이 없다. 자연구릉이 5개가량 있어 인위적 구조물 없이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토성 위쪽에는 돌로 쌓은 경계의 흔적도 보인다. 또한 등산로 주변에서는 기와 파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문산성에 건물이 있었으며, 수많은 군사가 주둔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학계는 출토 기와의 상당수가 통일신라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고 있다. # 감문산성에 오르다감문산 정상부인 취적봉에 오르면 감문산성의 형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취적봉을 둘러싼 감문산성은 주로 토성으로 이뤄져 있다. 석성과 같이 웅장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성채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취적봉에서는 ‘아~’ 하는 감탄사도 절로 내뱉게 된다. 감문국 지배세력이나 백성의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면, 한 나라의 국토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문산 최고봉인 취적봉은 320m에 불과하지만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다. 김천의 곡창지대인 개령들과 감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문산성이 유사시 피난처 및 지휘소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란 학계의 연구결과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감문산성의 전망은 인근의 산성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다. 감문산성은 인근 속문·고소산성보다 낮은 위치에 있지만 개령평야가 산성 바로 앞에 펼쳐져 있어 거칠 것이 없다. 주변지형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관찰하기가 매우 유리하다. 감문산성은 김천과 선산 상주를 잇는 수로 및 내륙교통로의 관리와 주변일대에 대한 감시에 최적화된 장소다. 감문산성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 대부분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산 정상 중앙부의 흙을 파내 중심부를 평평하게 조성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성 바깥으로는 급경사를 이루도록 흙을 쌓아 방어에 유리하게 했다. 감문산성이 위치한 감문산에는 군사들이 다녔을 법한 평탄한 땅이 산 정상부 주변을 휘감고 있다. 산성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머물고, 적을 막아내기에 손색이 없다. 만약 정상부에 소나무가 없었다면, 말을 탄 장수가 지휘를 할 수 있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감문산성에서는 봉수대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봉수대는 최정상부 남북방향으로 5개가 있다고 알려졌지만, 여간해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흙을 쌓아 만든 봉수대의 흔적이 감문산 정상부에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감문산성 동편의 감문면 성촌리 뒷산에 또 다른 감문국 산성이 있다는 마을 주민의 제보도 있었다. 실제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와 일제강점기(1912년) 자료에도 김천시 감문면 성촌리에 성대산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2005년 김천시와 경북대의 조사 결과, 성대산성과 관련한 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도움말=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 기획 : 김천시감문산성이 위치한 감문산 취적봉에서는 김천시 개령면 일대와 감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주변 지형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관찰하기가 유리하다.감문산 정상부 인근에서는 다양한 모양의 기와 파편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감문산성에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201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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