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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7> 이하석의 ‘문경 탄광 이야기’
1(돌숯이 약이 되더니 큰 불이 됐네) 도탄(都炭)이라 했다. 마을 이름이 그랬다. 그 마을 김 동석의 집 뒤안과 산은 옛날부터 온통 불에 탄 것처럼 그슬려 있었다. “얘, 불 놓으며 놀까?”하고 김 동석의 아들 정균은 이웃 친구에게 말했다. 두 아이는 집 뒤안을 파고 시커먼 돌들을 몇 개 골라냈다. 그걸 집 밖 공터에 쌓아놓고 마른 푸나무로 밑불을 붙이면 잠시 뒤에 그 돌들에 불이 옮겨 붙어 꽃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와 신기하다. 돌에 불이 붙다니.” 친구는 손뼉 치며 소리를 질렀다. “돌숯이야. 이걸 약으로 쓰기도 한단다.” 정균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 집 주변은 돌숯 천지야.” ‘탄(炭)’은 숯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돌숯이라 했다. 바로 석탄이었다. 도탄이란 마을이름은 돌숯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돌숯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나타났다. 일본인들이었다. 1934년 무렵, 이 지역의 광업권을 따낸 일산화학공업주식회사 직원들이었다. 조선인 인부 몇 명을 데리고 나타난 그들은 도탄마을 뒷산을 파고 지질과 탄맥을 조사했다. 마을 사람들은 일인들의 지표조사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희한해. 돌숯이 그냥 땅 속에 묻혀있는 게 아니고 맥이 있어서 그 시커먼 줄을 따라 분포한다는 거야. 왜놈들은 그 맥이 확인되면 파는 걸 중지하고 다시 몇 십 미터 가서 말목을 박아놓아. 그런 식으로 해서 산엔 온통 말목 천지야. 참 왜놈들 용해.” 그러나 신기하다고 여긴 건 잠시였다. 그들 앞에 청천 벽력같은 통고가 떨어졌다. 탄광개발을 위해 마을주민들이 강제 이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주인 김 동석은 절대로 산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일인들은 임대형식으로 사용하겠다고 김 동석을 회유했다. 그 후 조용했던 농촌마을이 탄광촌으로 바뀌면서 이 산은 결국 일인에게 팔려 넘어가고 말았다. 탄광촌 이름도 은성으로 바뀌었다. 가은의 은(恩)자와 마성의 성(城)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938년 시작된 은성무역탄광의 개발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은성탄광은 일인들이 경영하고 관리했지만, 막장에서 일하는 갱부들은 조선인들이 많았다. 본토백이 가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팔도공화국’이라 불렸다. 김정균의 친구 남 씨도 그랬다. 농사보다 수입이 많았기에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되겠다싶어 광부를 지원했다. 그리하여 어릴 때 장난삼아 불을 붙이고 놀았던 그 돌숯을 캐러 지열 뜨거운 막장의 캄캄한 속으로 들어갔다. 해방 후 은성탄광은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한국석탄공사가 운영하는 국광이 됐다. 국가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에너지원의 주요공급처가 된 것이다. 그 후 연탄파동도 겪고, 석유파동으로 다시 호황을 맞는 등 부침하다가 연탄이 유류로 대체되면서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90년대에 폐광이 속출했다. 문경탄광 최고의 요지였던 은성탄광도 1994년 봄에 문을 닫았다. 남 씨의 광부 일도 그 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이 곳 도탄리 원주민이었다는 것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호구를 위해 막장 생활을 했던 것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시커먼 석탄처럼 자신의 이력을 가슴에 꼭꼭 묻어놓을 뿐이다. 너무 아프고 캄캄한 기억 때문일까? 2(쥐, 같이, 살다) 갱부 남 씨(또는 김 씨일 수도 이 씨일 수도 있다)의 일상은 이러했을까? 그는 ‘게다짝’(나막신)을 신으려다 짜증스런 얼굴로 다시 장화로 바꿔 신는다. 출근하려니, 아내가 마음에 걸린다. 밤에 다퉜던 게다. ‘탄광 돈은 햇빛만 봐도 녹는다’고 하지만, 월급날 술을 하고는 작부와 “배꼽 맞추자”며 호기를 부린 바람에 집에 와서 보니 월급봉투가 너무 앏아져 있었던 게다. 아침에 밥을 지으면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식사 후 갱부들이 모여 사는 사택을 나서면서 더 이상 잔소리를 않는 아내에게 더욱 미안해진다. 기실 탄광촌에서는 아침 출근길에 아내가 잔소리하는 걸 금기시한다. 그런 금기사항이 참 많다. 출근할 때 여자가 앞을 가로 질러가면 출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부부싸움 후에는 가급적 갱에 들어가지 않는다. 남편이 출근한 후 신발을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출근길에 짐승이라도 치면 그날은 출근 포기다. 갱내에서는 휘파람을 불거나 뛰지 않는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갱부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할 정도로 절박한 징크스들이다. 금기를 지키지 않았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건 바로 갱 속에 파묻혀 죽는 것이다. 아내도 그런 징크스를 알기에 속이 끓어도 출근길에는 내심을 하지 않은 게다. ‘3000만원 짜리 돼지’의 안전을 위해서다. ‘3000만원 짜리 돼지’는 광부인 남편을 가리킨다. 사고로 죽으면 재해보상금 3000만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인차를 타고 한참 갱 속을 내려가선, 다시 걸어서 작업장으로 향한다. 갱 속은 후끈후끈하다. 오죽하면 월남막장이라 했겠는가? 동료들 중에는 팬티 바람으로 작업에 임하는 이도 있다. 그와 동료들은 갱 속에 들자마자 구석부터 유심히 살핀다. “있어?”라고 그는 동료에게 묻는다. “응 저기 한 마리, 저 구석에도 있는 듯해”라고 동료는 구석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검은 게 작업도구들 아래서 고물거린다. 쥐다. 반갑다. 쥐가 산다면 이곳도 안심할만하다고 그는 여긴다. 그는 도시락 속의 밥을 조금 떼 내어 쥐에게 던져준다. 광부는 쥐를 아주 친하게 여긴다. 예지력이 뛰어나 쥐는 광부들에게 생명을 지켜주는 나침반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갱내에서 자주 발생하는 가스 유출을 쥐는 아주 민감하게 감지하고는 피한다. 갱내 출수사고나 붕괴 사고도 미리 예감한다. 광부는 그런 쥐의 움직임을 보고 위험을 미리 인지하여 피할 수 있다. 낙반붕락, 운반사고, 전석, 추락 및 전도, 가스사고, 출수, 화약 발파 사고, 화재 등 탄광재해는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니 갱내 안전에 대한 주의는 아무리 해도 과하지 않다고 할 정도다. 그 역시 갱에 들자마자 각종 안전 조치를 취하고, 상황을 점검하는 것부터 일을 시작한다. “지난 번 사고는 너무 끔찍했어. 이젠 갱에 들어오기가 더 겁난다니까”라고 동료 중 한 명이 말한다. “생존자가 80여명이나 됐지만, 갱내에 사흘 동안 갇혀 있다 구출됐지. 죽은 사람은 44명이나 되었고.” “그래요? 그런데도 매스컴이 조용했잖아요?” 오늘 처음 갱에 들어온 신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난을 벗어나보자고 떼를 써서 막장으로 내려왔지만, 그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불안해서 포기해버릴까 하며 잔뜩 겁을 먹고 있는 터다. “그건 박대통령 시해사건 때문에 우리 사건이 가려져서 그랬지.” “가뜩이나 사회로부터 왕따 당한 우리 신센데, 이렇게 큰 사고가 나도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우리 몽땅 왕따를 당하는군.” 누가 자소하듯 내벹는다. “어쨌든 매사 조심하자.” 그는 안전을 다시 강조한다. “두 하늘을 덮어쓰고 사는 우리 아닌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매일 고마운 일이지.” ‘두 하늘을 덮어쓰고 산다’ 또는 ‘두 하늘을 모시고 산다’는 말을 그들은 자주 한다. 지하에서는 갱도의 천정이 광부들의 또 다른 하늘이다. 밖의 하늘과 갱도 속의 하늘을 늘 의식할 정도로 그들은 언제나 사고 위험에 대한 공포심을 떨치지 못한다. 고참인 그가 훗노미(쇠막대, 일명 꼬질대)로 탄층에 능숙하게 발파구멍을 뚫고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전한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이내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탄가루가 갱내를 자욱하게 메운다. 신참들과 다른 갱부들은 탄을 객차에 담아 갱 밖으로 실어낸다. 어느 것 하나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갱 속의 검의 하늘에 기도하는 것으로 가라앉힌다. 그리하여 작업을 끝내고 나와 푸른 하늘을 보고는 “오늘도 마지막은 아니었구먼”하고 비로소 안심하는 것이다. 3(닫힌 하늘, 새로 열리는 하늘) 그는 이제 농사를 짓는다. 가은에는 2만5000명의 광부들이 거주했으나 폐광 후 거의 다 떠났다. 은성탄광 자리에 세운 석탄박물관을 강 건너에서 늘 보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다. 석탄박물관의 여운황 학예연구사는 문경지역 박물관 자료를 모으느라 김 씨 같은 광부 출신들을 자주 찾아온다. 그 때마다 말한다. “광산 경기가 좋을 때에는 은성 광업소에만 1천500명이 일했지. 하루 3교대 근무였는데, 교대시간만 되면 광부들 소리로 이 골짝이 떠들썩했어. 지금은 다 떠나고 가은에 40명 정도가 남아있을 정도지.” “박물관을 구경하는 마음이 어떻습니까?” “은성광업소 폐광 후 그 자리에 이 지역의 석탄 산업을 관광자원화한다고 세운게지. 박물관이 생길 때 이곳에 근무하던 이들은 마음 아파하기도 했고, 큰 기대를 갖기도 했어. 특히 진폐증 환자들의 기대가 컸지. 이 박물관을 통해 진폐증 광부들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커질 것이란 기대를 많이 가졌지.” 그는 이곳에 지금도 꽤 많이 남아있는 진폐증 환자들을 안타까워한다. 문경제일병원에 있는 산재병동은 진폐병원이라 불린다. 지금도 3~400명의 환자들이 진료중이다. 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는 진폐증으로 순직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와 사당이 세워져 있다. 매년 10월초면 문경지역 진폐 순직자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다. 그는 아들내외와 손자, 손녀들이 오면 박물관을 구경시켜준다. 전에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로 위로 새롭게 오가는 레일바이크(철로 자전거)를 태워주기도 한다. 석탄박물관과 레일바이크 이용자는 휴일이면 아주 많다. 하루 세 번 씩 치러지는 교대시간마다 검은 물결을 이루던 광부들의 떠들썩함이 사라진 대신, 다양한 색깔의 여행복 차림 관광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들이 밀려들고 있다. 석탄 박물관 뒤편 산비탈에는 ‘연개소문’, ‘대왕세종’, ‘천추태후’ 등을 촬영하기 위해 평양성과 고구려마을, 신라마을 등으로 구성된 영화촬영 세트장이 있어서 관광객들을 부른다. 문경시는 석탄박물관과 오픈세트장을 통합 운영함으로써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데 효과를 보기도 한다. 석탄박물관 뒤 산에는 은성광업소가 운영되던 시절 사용했던 갱도를 활용한 갱도전시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실제갱도체험을 할 수 있다. 레일바이크는 과거 이곳의 석탄을 점촌역까지 운송하던 철로를 새롭게 이용해서 운행하는 것이다. 그 중간 역으로 석탄의 역사를 잘 떠올려주는 가은역과 불정역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런 변화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그는 80노구를 겨우 버티면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두 개의 하늘 중 한 하늘은 이제 깊은 어둠 속에 묻혀버렸네. 그 대신 이 곳에는 과거의 어둠을 새롭게 닦아 보이는 새 하늘이 열리고 있는 셈이야. 그 청천 하늘 속에서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게 바로 땅 속의 하늘이야.” 이하석<시인>
2021.05.25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6> 우광훈의 '전 턱없는 탈입니다'
저는 이메탈입니다. 안동시 풍천면 하회동에서 태어났죠.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전 턱이 없습니다. 턱이 없다보니 뭐 하나 씹을 수가 있나, 짧은 말 한 마디 내뱉을 수 있나, 영락없는 금수의 생(生) 그대로죠. 하지만 세상사 생각하기 나름. 비천한 신분이기에 세상사 탓해도 부질없고, 맘껏 욕지거리 내뱉어도 알아들을 놈 하나 없으니 나름 편한 생이기도 하답니다. 어쩌면 말이란 놈의 교활한 구속에서 해방된 셈, 나무가 말을 집어삼켰다고나 할까요. 말, 인간이 만든 말(言)이란 것,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사실 제 턱을 이렇게 만든 그 년, 참으로 예뻤어요. 허도령이 뻑 갈만도 했죠. 조그마한 입술과 초승달 같은 눈썹, 걸음은 학처럼 우아했고, 장의 속에 감추어진 두 뺨은 백옥처럼 빛났어요. 이름은 미선. 아름다울 미(美), 착할 선(善). 거묵실골 남쪽, 초가에서 홀로 기거하고 있었지요. 허도령과 여자, 사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팔월 한가위 부락잔치에서 처음 만난 둘은 휘영청 달 밝은 밤, 동사(洞祠) 처마 아래에서 서로를 품에 안았지요. 그래요. 풍문은 풍문일 뿐, 사랑은 사랑일 뿐.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마을 대장간에서 일하는 최씨가 오리나무로 가득한 허도령의 작업실을 찾았어요. “허도령.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 우리 마을에 이상한 역병이 돌아 어린 것들이 목숨을 잃고 있지. 아마 이 모든 게 신의 노여움 때문이 아닐까하는 게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라네. 그래서 돌아오는 정월대보름에 우린 아주 성대한 별신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네. 물론 별신제에 쓰일 탈이니 신경이 많이 쓰이겠지. 하지만 우리 힘없는 것들, 양반 눈치 보랴, 관리 신경쓰랴, 어찌 맨얼굴로 할 수 있겠는가. 탈조가리라도 하나 덮어써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어르신들도 쾌히 승낙하셨으니, 어떤가, 해줄 수 있겠는가?” “몇 개면 되겠소?” “양반, 총각, 각시, 초랭이, 백정, 중, 이매, 부네, 할미, 떨달이, 별채, 선비, 그리고 주지 두 개 이렇게 총 열네 개가 필요하네.” “언제까지면 되겠소?” “그게…… 정월 초하루가 네 달도 채 남지 않았으니 적어도 세 달 안엔 끝냈으면 좋겠는데……” “그건 어렵겠소.” “아니 왜?” “열네 개의 탈을 만들려면 반년은 족히 필요할 터 그걸 세 달 안에 만들라니 날 보고 죽으란 말이오.” “탈 만드는 게 그리도 힘든 작업인가?” “당신네들 탈 만드는 게 그냥 나무만 적당히 깎으면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아주 큰 오산이오. 나에게 탈은 곧 생명이오. 살아 숨쉬는 인격체란 말이오. 산모가 격한 산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새생명을 맞이하듯, 나 역시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을 이겨내어야만 제대로 된 새끼를 얻는단 말이오. 이렇듯 탈이란 자못 인간의 생명과 영혼을 나무속에 담는 작업.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뿌리박힌 채로 살려두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겠소?” 허도령의 열변에 최서방은 결국 아무런 말도 잊지 못했지요. 사실, 허도령이 탈제작을 거절한 건 노고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세상사 모든 일에는 사익(私益)이 섞이는 법. 도덕이니, 공공이니 아무리 외쳐 봐도 사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인간에겐 열정과 집착이 생기지 않는 법이지요. 허도령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에겐 마을의 안녕과 평화보다는 한 여자와의 사랑이 더 중요했던 거죠. 단 하루라도 서로를 못 본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랑. 그만큼 여자를 향한 허도령의 사랑은 깊고도 넓었어요. 하지만 그 날 밤, 한 줄기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허도령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말았지요. “네 이놈! 사사로운 정이 마을의 안녕보다 더 중요하더냐!” 벌떡 일어나 눈을 떠보니, 호랑이 형상을 한 산신령이 바로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산신령이 다시 말을 이었지요. “마을신의 노여움을 풀기에는 별신굿이 최고일터, 네 어찌 한낱 사랑 때문에 마을 전체를 나락으로 빠트리려 하는 게냐. 네가 만약 탈 만들기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내가 네 사랑을 앗으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허도령, 결국 탈 제작을 약속하고 말았지요. “탈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는 절대로 작업실 밖으로 나와서도 아니 되고, 타인이 네 모습을, 네가 타인의 모습을 보아서도 아니 된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넌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될 것이다.” 다음 날, 꿈에서 깨어난 허도령은 결국 여자에게 이 모든 사연을 전한 뒤, 화산자락 따스하고 양지 바른 곳으로 쓸쓸히 숨어들었지요. 문 앞에는 외인의 출입을 막는 금줄을 치고, 목욕재계를 한 후, 곧장 탈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죠. 허도령, 그는 우리들을 아름답게 만들려고도, 과장되게 꾸미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인간다움, 그 진솔한 삶의 흔적들을 나뭇결 깊이 새겨 넣길 원했었죠. 할미에게는 일평생 고달프게 살아온 자신의 노고를, 백정에게는 피할 수 없었던 살생에 대한 죄책과 그로인한 번민을, 부네에게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선비에게는 지체 높은 신분과 학식에 대한 가식을, 초랭이에게는 양반에 대한 반감과 경망스러움을, 각시에게는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양반에게는 여유와 허풍에 깃든 불안과 허세를, 그리고 저에겐 완벽에 가까운 익살을. 당시 마을 사람들은 겉으로는 선비와 양반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삶 속에 감추어진 위선과 모멸을 몰래 훔쳐보고, 귀엣말로 주고받으며, 비하하고, 풍자하는 그런 속된 행위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었죠. 중놈이 과부를 탐한다는 둥, 무식한 양반이 뇌물로써 관직을 샀다는 둥 높은 자들의 허물로 자신의 비루함을 자위하는 그런 이야기야말로 맛깔스런 안주였고, 야트막한 자존심이었으며, 힘든 노동을 위안하는 삶의 활력소가 된 셈이었죠. 그렇게 허도령은 인생 밑바닥에 깔려있는 저급한 삶의 기호들은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생것 그대로가 아닌) 익살과 웃음이란 양념에 한껏 버무린 다음, 우리의 얼굴 속에 차곡차곡 심어 넣어준 셈이었죠. 그렇게 여든 아홉 번의 낮과 밤이 꿈결처럼 흘렀어요. 나를 제외한 열세 개의 탈은 완벽한 모습으로 완성되어 보관함 속에 들어가고, 나 혼자 만이 작업대 위에 남아 있었지요. “이메야, 넌 어떤 턱을 원하느냐?” 새벽녘이 밝아올 때쯤, 허도령이 나에게 물었어요. 허도령의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죠. 어느새 머리는 백발로 물들었고, 피부는 깊은 주름으로 얼룩져 있었어요. 전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히죽히죽 눈웃음을 머금었지요. 그러자 허도령은 껄껄대며 소리 내어 웃더군요. “어허, 이놈이 날 놀리려 드는구나. 좋다! 너에겐 이 풍진 세상 웃음으로 견뎌낼 수 있게 익살 하나 달아주마.” 허도령은 다시 좁고 납작한 조각칼을 집어 들더니 망설임 없이 저의 턱을 파나가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턱만 완성되면, 턱만 완성되면 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죠. 그때였어요.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낯선 발자국 소리. 그 소리는 차츰 출입문 쪽으로 가까워지더니 문창살 바로 앞에서 멈추었어요. 물론 작업에 푹 빠진 허도령의 귀에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요. 잠시 뒤, 스르르하고 문이 열리더니 갸름한 얼굴 하나가 나타나더군요. 한눈에 보아도 그 여자였어요. 여자의 몰골, 가관이 아니었어요. 눈은 병자처럼 퀭하니 패여 있었고, 볼은 광대뼈가 선연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모래 같은 육체에는 물기 한 점 느껴지지 않더군요. “도령님, 탈은 다 만드셨소?” 여자는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허도령을 불렀어요. 허도령, 그제서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군요. 그렇게 여자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내 턱! 내 턱이 그만 허도령의 손에서 툭하고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마치 동백의 꽃대롱처럼 댕강하고 잘려 나가버린 내 턱. 그 찰라의 순간, 난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쳤죠. “이 못난 년, 너 때문에 내가 병신이 되는구나!” 사실, 금기가 깨어짐으로 인해 불어 닥칠 허도령의 최후보단 턱의 부재로 인해 생겨날 내 얼굴의 기형에 더욱더 화가 치밀었죠. 제기랄, 턱없이 한평생을 살아야하다니 이런 기구한 운명이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솔직히, 하늘의 형벌이란 것이 그리 빨리 찾아오는 것은 아니더군요. 풍설의 그것처럼 여자와 시선이 맞닿는 순간, 곧장 피를 토하며 죽지도 않았고요. “그 곱던 얼굴 어디가고, 주름만 남았느냐.” 허도령은 자신을 사지로 몰고가버린 여자의 성급함을 결코 탓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여자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가슴 가득히 껴안았죠. 순간, 타닥거리며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났어요. “도령님은 왜 이리 백발이 되시었소? 창작이란 것이 신을 희롱하는 작업이라더니, 그것 때문에 노여움을 사신 게요?” 허도령의 눈망울에 차츰 눈물이 괴더군요. 그렇게 흐느끼는 여자와 흐느끼는 남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진 얼굴하며 마치 솜털처럼 나풀대는 머리카락, 초점을 잃은 눈동자며 흐느적거리는 수족…… 어느 시대, 어느 장소 곤 기다리는 자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지요. 기다림에서 오는 초조함과 긴장은 사람의 피를 말리고, 뼈를 깎아 결국 사지(死地)로 내몰지요. 순간, 허도령이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기 시작하더군요. “때가 온 것 같구료.” “저도 님을 따라 가오리다.” 여자가 재빨리 옆에 놓인 조각도를 들어 자신의 손목을 그었어요. 허도령이 말릴 틈도 없었지요. 결국 둘은 손을 꼬옥 잡은 채 제 옆에 눕더군요. “행복하오?” 남자가 물었어요. “행복해요. 당신 옆에 있어 미칠 듯이 행복해요.”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제 뻥 뚫린 턱을 타고 두 눈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제 익살은 눈물이 되고, 눈물은 꽃이 되고, 그 꽃이 쌓여 조그마한 무덤이 되더군요. 그래요…… 전, 턱없는 탈입니다. 비극 속에 감추어진 구슬픈 노래입니다. 사랑에 휩싸인 한 떨기 꽃입니다. 우광훈 <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5> 이상국의 '칠곡 다부동 328고지엔 비가 내렸다'
숲을 가득 채운 매미소리를 끊고 총성이 웁니다. 총성이 그치면 매미가 울기 시작합니다. 한 병사가 간밤의 백병전에서 숨진 동료의 흙투성이 낡은 군화를 벗겨주었습니다. 쓰러진 M1소총을 세워 철모를 씌웠습니다. 주머니에서 화염에 그을린 영어사전을 꺼냈습니다. 책의 뒷장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아내... 나는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8월13일 328고지에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전날 낮에 이 고지를 점령한 뒤 적었던 글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글씨를 읽다가 산 사람의 눈물이 사전 위에 떨어져 번졌습니다. 가수 현인이 불렀던 노래 ‘전우야 잘 자라’(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는 1950년 8월에 대구 코앞까지 내몰렸던 망국의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북진하는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이 노래는 이듬해인 1951년에 나왔는데, 전쟁통에 울려퍼지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가사는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피 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에 관한 생생한 증언입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말은 바로 치열했던 경북 칠곡군의 다부동(多富洞)전투를 그린 한 장면입니다. 승승장구하는 전쟁이었다면 ‘전우의 시체(요즘은, 사람의 주검은 ‘시신(屍身)’이라고 표현합니다)’가 아니라 ‘적의 시체’를 넘고 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군의 주검을, 한번도 아니라 여러번, 그것도 비켜가지도 않고 그대로 밟고 넘어야 하는 상황이었을까요. 이 땅엔 이 뜻을 아는 세대와 전혀 모르는 세대가 지금 함께 살고 있습니다. 60년이나 지난 얘기이거든요. 저 처절한 시간을 얘기해줄 사람은 점점 사라져갑니다. 8월13일 새벽 제1대대는 다부동전선 328고지에 이미 적이 들어온지도 모른채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첨병소대를 지휘하던 제3중대 제1소대장(이신국 중위)은 선두에서 남등고개를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야, 몇 연대냐?” 300m쯤 앞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 이중위는 눈 앞이 아찔한 느낌이었습니다. 등에는 식은 땀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잠깐의 정적. 그런데 평안남도 개천 출신인 그는, 질문하는 말투가 평안도 사투리인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래, 신의주 독립연대다. 왜 그러디? 인차 올라갈게.” 그의 말에 위에서는 기다리는 듯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마침 구름이 끼어 새벽4시인데도 10여m 앞이 안보일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철모 벗어.” 이중위는 소대원들에게 속삭입니다. 연락병은 뒤에 따라오는 주력부대에 일단 정지하라는 명령을 보냈습니다. 7부 능선에 이르자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20m까지 다가가 1소대는 총을 쏘면서 덮쳐 들어갔습니다. 약 1개 소대가 전멸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기관총에 사수와 부사수 2명씩 나란히 죽어있었습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예 칡덩굴로 발을 묶어 놓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 정규군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징발한 의용군이었습니다. 그들의 입가에서는 술냄새가 감돌았습니다. 술을 먹여 겁 없이 싸우도록 한 것입니다. 어이없는 남남(南南)의 살육전이었지요.13일 밤. 328고지에는 비가 부슬거렸습니다. 30여년만의 불볕더위라는 37도 폭염에 지쳤는지라 병사들에겐 빗방울이 달콤했습니다. 나뭇잎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 뿐, 칠흑같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강 건너의 적들은 이날따라 포탄 한발 쏘지 않고 잠잠했습니다. 자정이 지난 시각, 천근만근의 무게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리느라 병사들이 자신과의 싸움을 벌일 무렵, 50m쯤 앞에서 녹색 신호탄이 허공으로 치솟아 터집니다. 이쪽에서 깜짝 놀라는 사이, 적들이 와르르 제1대대 진지로 덤벼들었습니다. 인민군들은 공격을 할 때 “만세”라는 구호를 외칩니다. 이곳에서 듣는 만세소리는 음산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장병들은 엉겁결에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부대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캄캄하고 질척거리는 산 속,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잘 안되는 상황에서 서로 쏘고 찌르고 후려칩니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불꽃이 튕기고 비명소리가 터져나옵니다. 미끄러지면서 몸끼리 뒤엉켜 육탄전을 벌입니다. 백병전이 벌어지면 피아(彼我)를 확인하기 위해 총을 만져보거나 어깨 쪽을 서로 더듬어봅니다. 인민군 정규보병은 위장용 그물망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으니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또 머리를 만져보기도 합니다. 우리 군은 대개 머리가 길었으나 저쪽은 대부분 짧은 머리였기 때문입니다. 서로 확인을 한 다음 소스라치듯 떨어집니다. 한쪽에서 칼을 내리꽂습니다. 도망치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집니다. 이번엔 다른 목소리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암호! 암호 뭐야?” 병사는 그를 떨치고 다시 뛰어내려갑니다. 이날 전투로 제1대대는 고지 뒤쪽으로 후퇴합니다. 이튿날 아침 부대가 다시 진격하여 고지를 되찾았을 때 서울 출신의 한 학도병이 시신 앞에서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피난 내려 오느라 같이 내려오지 못했던 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던 그는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의용군으로 참전했습니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형과 동생은 서로를 찌르고 쏘았던 것이지요. 이런 전투들로 12일 사이에 15번 정상을 빼앗았다 빼앗겼다를 거듭하였습니다. 이 고지에서만 3000여명의 주검이 널려 있었습니다. 더 끔찍한 일은 바위산인지라 호를 파기 어려웠던 병사들은 시신들을 쌓아올려 방호막으로 쓴 것입니다. 시신에 기대앉아 그들은 산 아래 마을에서 날라준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삼켰습니다. 요기를 하고 있을 때 적의 포격이 시작됐습니다. 호 앞에 포개졌던 주검더미가 박살이 나서 흩어집니다. 포탄이 터지면 지긋지긋한 파리떼가 잠시 사라져서 그게 후련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이번엔 모기떼가 들러붙었습니다. 헤어진 전투복 구멍구멍마다 빨대를 꽂듯 내려앉았으나 그것을 쫓는 일도 귀찮았습니다. 제3대대 수색대의 사병 박모 하사가 소총을 오발하여 전우 한 명이 숨졌습니다. 수색대장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군기 해이를 물어 즉결처분하겠다.” 순간 대원들은 모두 얼굴이 굳어지고 숙연해졌지요. 달빛이 밝은 밤이었습니다. 수색대장은 박하사를 세워놓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부모님을 만나거든 내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는 대구상업학교 6학년 재학중에 자원입대한 학도병이었습니다. 수색대장은 박하사를 구석진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10보 앞에서 총구를 높이고 4발을 속사로 쐈습니다. 사병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선임하사관이 현장에 뛰어가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잠시 뒤 수색대장은 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명사수로 이름난 내가 10보 앞에서 쏘았는데도 총탄이 맞지 않았던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니 그를 더 이상 문책 않고 충성을 다할 기회를 줄 것이다.”제3중대 제1소대 향도 정재중 일등중사는 공동묘지 모퉁이의 진지로 갔다가 화기분대장 박노식 이등중사가 호 속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가가 “박중사”하고 어깨에 손을 댔습니다. 그의 몸은 싸늘했습니다. 그는 기관총 손잡이를 붙잡고 눈을 부릅뜬 채 적진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 적의 기습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뛰어나가 기관총을 쏘던 용감한 병사였지요. 정중사는 그의 두 눈을 감겨주었습니다. 이 죽음들이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곳에서 그토록 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었고 전세는 역전되었으니까요. 그해 8월 13일 이 전투에서 남편(정모씨)을 잃고 60년을 ‘미망인’으로 살아온 여인이 있습니다. 결혼한지 한달 만에 입대한 신랑은 두 달 뒤에 전사통지서 한 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는지라 어린 며느리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살면서 시할머니, 시부모를 모셨습니다. 막내 시누이의 둘째아들인 이모씨(50세)는 유난히 외삼촌을 많이 닮았다 합니다. 또 정하사가 전사한 날과 이씨가 태어난 날이 우연히 같은 8월13일인지라, 외숙모는 이 생질(甥姪)을 전쟁에 주어버린 남편 대신 얻은, '자식'처럼 아껴왔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장롱 깊숙한 곳에서 불에 그을린 영어사전을 꺼냈습니다. 뒷장을 넘겨 외삼촌의 마지막 글씨를 이씨에게 보여줬습니다. 외숙모는 이미 얼룩진 그 위에 다시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은 건, 그날의 군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닐지요. 대한민국은 이 328고지를 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상국 <스토리텔링 전문기자>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4> 이하석의 '광주이씨의 金蘭之交'
1. 오직 최원도만이 자기를 구원하리라 믿고 은거지를 탈출했다. 개성에서 업고 온 아버지. 이집은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까지의 까마득한 길을 다시 아버지를 업은 채 걷기 시작했다. 천곡(泉谷) 최원도와 둔촌(遁村) 이집은 평생의 지기였다. 벼슬길은 둘 다 평탄하지 못했다. 사간이었던 최원도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영천으로 낙향한 것은 신돈의 득세로 권문세가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세상이 어지러워져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후 이집은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 권좌에서 끌어내릴 모의를 했다. 그러나 이웃의 밀고로 그 사실이 드러나자, 신돈은 그를 포살하라는 명을 내림은 물론, 그의 집안까지 박살을 낼 기세로 등등했다. 멸문의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집은 벼슬을 버리고 서울인 개성을 떠나 한양의 둔촌에 은거해 있다가(이집의 호 둔촌은 은거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화가 거기까지 미칠 듯하자 아버지를 업고 다시 친구를 찾아 먼 길을 나선 것이다. 등에 업힌 아버지를 추스르며, 내려놓고 쉬었다 다시 업었다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추풍령을 넘었다. 영천까지 오는데 몇 달이 걸렸다. 최원도의 집은 영천에서 경주로 가는 어귀의 구룡산 아래 궁벽한 산촌에 숨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물어물어 겨우 당도했다. 집안이 떠들썩했다. 최원도의 생일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집은 바깥사랑채에 아버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최원도에게 그가 왔음을 알렸다. 최원도가 바로 나왔다. “천곡! 날세, 둔촌일세.” 이집은 반가움과 안도의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최원도는 상거지 꼴을 한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왜 왔는가? 여긴 자네가 올 곳이 못되네.” 최원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와 아버지를 끌어내 쫒아냈다. 그리고는 냅다 사랑채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의 체취가 닿은 흔적조차 꺼리는 태도였다. 이집은 아연실색했다. 오직 친구를 찾는다는 일념으로 천리길을 죽을 고생을 하며 왔는데, 이런 천대를 받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백년지기이니, 무슨 까닭이 있겠지. 이렇게 느닷없이 죄인의 몸으로 들이닥쳤으니 내가 심했군”하고 그는 애써 친구를 이해하려 애쓰며 오리 밖에 떨어진 낫고개(蘿峴)에 숨었다. 밤이 왔다. 어둠 속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아버지를 다독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탄식을 했다. 문득 누가 저만치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이집은 놀라 숨을 죽였다. “둔촌, 날세.”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원도였다. “아깐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이네. 오해하지 말게.”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 “잘 왔네. 내가 자네를 숨겨줌세.” 최원도는 이집 부자를 아무도 몰래 집안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낮에는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이슥한 밤이면 최원도의 방에서 두 친구는 나란히 잤다. 밥 먹는 것도 표가 안 나게 항상 한 사람의 밥을 넉넉하게 차리라 하여 나누어 먹었다. 신돈의 명으로 영천의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그날의 화재 사건으로 인해 두 부자가 이 집에 숨어있는 걸 깜쪽같이 몰랐다. 2 “참으로 이상한 일이네.” 부엌일을 맡아보던 몸종 제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제부턴가 주인의 식성이 달라진 게다. 식사량이 평소와 다르게 아주 많아졌다. 밥을 고봉으로 꼭꼭 눌러서 많이 담게 했다. 상이 나올 때는 밥이고 반찬이고 남는 게 거의 없었다. 뭐든지 싹싹 비워져 있었다. 주인의 평소 식사량을 잘 아는 제비로서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루는 밥상을 들여놓고 나와서는 문틈으로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인 한 사람만 있을 줄 알았는데, 잠시 뒤에 노인과 주인 또래의 한 사람이 다락에서 내려와선, 세 사람이 한 그릇의 밥을 나누어먹는 것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은 채였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다락으로 올라가고 이어서 “상을 물려라”라는 주인의 소리가 들렸다. 제비가 방에 들어가니, 주인만이 달랑 앉아있었다. 제비는 이 기이한 일을 최원도의 부인에게 알렸다. 부인이 그 연유를 묻자 최원도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부인만 알고 있으라며 가족과 몸종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하라고 일렀다. 부인은 제비에게 “이 일이 누설되면 우리 가족은 물론 너까지 죽는다”고 입을 봉하기를 다짐했다. 제비는 행여 자신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의 화를 당할까 염려했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영원히 제 입을 막아버렸다. 3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는 세 개의 무덤이 있다. 최원도의 어머니 묘와 이집의 아버지 이당의 묘, 그리고 제비의 묘다. 이집이 최원도의 집에 숨어있기 3년만에 아버지 이당이 벽장 안에서 세상을 떠나자, 최원도는 자신의 옷으로 염습을 하여 밤중에 모친의 산소 밑, 자기가 죽으면 묻힐 곳으로 정해둔 자리에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끊은 제비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묘역 입구에 자그마하게 제비의 무덤, 연아총(燕娥塚)을 안치했다. 이당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로 꼽힌다. 그러니까 그의 무덤은 광주이씨 시조묘가 된다. 묘역의 도래솔은 국내 최대로 묘를 푸른 띠로 넓게 둘러싸고 있다. 이 무덤터는 풍수상 야자형(也字形) 대길지로 꼽힌다. ‘야(也)’자의 아랫내림획 끝 부분에 위치한 이당의 묘는 글자의 모양처럼 사방을 산이 둘러싸 보호하는 형국이다. 산을 덮고 있는 도래솔의 가지들이 한결같이 이 무덤의 혈자리를 향해 뻗어있다고 보기도 한다.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 덕분인지 광주이씨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정승 5명에 대제학 2명을 배출하는 등 크게 번창해왔다. 무엇보다 이 묘역은 함께 생사를 넘나든 최원도와 이집의 금란지교와 지극한 효심이 이루어낸 자리로 기억되어 왔다. 4 광주이씨 후손인 한음 이덕형이 영천 북안의 시조묘를 찾아 성묘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1601년이었다. 도체찰사로 영남의 여러 고을을 순찰하고 있었는데, 가을에 영천에 들린 것이다.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시조묘에 도착하자, 이 지역의 유림들과 문사들이 많이 모여 환대했다. 그 중에 노계 박인로도 끼어 있었다. 노계의 집은 영천 도천으로 이곳에서 가까웠다. 노계는 한음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던 중 마침 그가 온다는 말에 만사 제쳐놓고 참석했다. 두 사람은 인사를 했다. “무과에 급제한, 거제도 조라포 만호를 지낸 박인로입니다.” “아이구, 선생의 존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대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마흔 한 살의 동갑내기였다. 한음의 손님 대접은 조촐했다. 홍시를 접시에 담아내놓았다. 문득 한음이 노계에게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계, 저의 어머니는 임진왜란 때 돌아가셨지요. 아버지 홀로 지내시는 게 안타까워요. 재상이랍시고, 전란 후의 수습에 몰두하느라 홀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틈도 주어지지 않는군요. 선생이 시조와 가사에 탁월한 재주가 있으시니, 이 홍시를 빌어 저의 사친의 정을 표현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노계가 화답, 단숨에 네 수를 지었다. 그 중 한 수는 다음과 같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효친의 정이 절절히 우러나는군요.” 한음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이 시의 제작시기와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본 이야기는 김창규의 ‘노계 시 평석’을 참고했다: 필자주) 두 사람은 절실한 친구 사이가 됐다. 자연히 두 사람 간의 왕래는 각별해졌다. ‘조홍시가’를 지은 지 10년이 지난 51세 때는 노계가 경기도 광주 용진강 가에 살고 있는 한음을 방문, 용진강 사제(沙堤)의 풍광 속에서 노후를 보내는 한음의 유유자적한 삶을 그린 ‘사제곡’과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읊은 ‘누항사’를 짓기도 했다. 한음이 죽고 나서는 그의 아들 이여구와 이여황이 선고(先考)의 친구인 노계를 많이 챙겼다. 노계 만년의 가사 ‘상사곡’과 ‘권주가’는 이들이 선고의 ‘한음문고’를 편찬할 때 짓게 하여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우리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들이 한음과 노계의 교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니, 이들의 우정은 개인적 친분의 차원을 넘어 한국문학사의 한 사건으로 기록되어지게 되는 셈이다. 노계는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향리에는 그를 기리는 도천서원이 세워졌다. 뜻 있는 이들은 광주이씨 시조묘와 도천서원을 둘러보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는 한음과 노계의 정감 넘치는 금란지교를 새삼 되새긴다. 이하석 <시인>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3> 이하석의 ‘우륵과 가야금’
1(사랑) 그것은 영원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라고 우륵은 생각했다. 가야금이 만들어져 우륵이 연주하자, “이 악기와 이 소리는 이후 우리가 열 천년의 세월을 넘어서까지 울릴 것”이라 한 가실왕의 마음이 그러했다. 우륵은 가야금을 사랑했다. 사람 사는 마을에서든, 숲에서든, 강가에서든, 산 능선 바위 위에서든 그의 탄주는 청청했다. 그 오묘한 소리는 사람들의 귀를 적시며, 바람을 타고 궁성에까지 흘러들었다. 가실왕이 그를 불렀다. 영민했고 비범한 왕이었다. 그의 탄주 소리를 익히 알고 있다면서 새롭게 12곡을 지으라 했다. “가야 나라들의 방언이 제각기 달라 이를 하나의 소리로 통일하기 위해서”라고 왕은 그 까닭을 밝히며,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우륵은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왕이 고맙고, 기꺼웠다. 거기다 그 소리로 어지러운 천하를 하나로 정연하게 통합하려는 꿈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의 소리가 단순한 연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세상을 고르고 융화하는 예악(禮樂)으로 거듭난다니, 얼마나 장하고 대견스러운 일인가?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왕성 가까운 골에 자리를 잡고는 음률을 새삼 가다듬기 시작했다. 잦은 여행을 통해 각 나라의 소리들을 채집하고 정리해나갔다. 그것들은 가야 각 나라의 사람 사는 모습과 산천의 기운과 삼라만상의 기미를 담은 소리로 거듭났다. 하도 열심히 소리를 모으고, 새로 그려내느라 그의 집에서는 가야금 소리가 밤이나 낮이나 그치질 않았다. 그 가야금 소리를 따서 사람들이 그의 동네를 ‘정정골’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런 열정과 성심으로 젊은 악성은 대가야 통합의 꿈을 지피는 열 두 곡을 집대성해냈다. 드디어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이 한 데 모인 자리에서 그 곡들이 연주됐다.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이’,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각 나라의 대표적인 소리들이 순화되고, 재해석되어 그 하나하나의 음악들이 보다 크게 통합되고 융화되는 느낌을 자아냈다. 그 소리들은 가야의 산과 강과 들과 숲을 흔들고 쓰다듬으면서, 그 안에 깃들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오롯이 담아냈다. “그래, 이 소리다!”라고 가실왕은 소리쳤다. “이 소리는 가야 각 나라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낸 소리다. 이제 가야 제국은 이 소리를 통해 통합해나가서, 마침내는 하나의 거대한 나라로 거듭나리라.” “아아 얼마나 아름다운 꿈의 실현인가?”라고 우륵은 감격했다. 이 소리들을 통해 가야금이라는 악기는 크게 만방에 알려졌다. 천년을 내다보는 혜안과 신명에 의해 가야의 노래가 새롭게 열렸다. 2(버림과 지킴) 그러나, 위대한 노래일지라도 영원으로 온전히 이어지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가야금과 우륵의 노래를 사랑했던 가실왕이 죽자, 음악은 어지러워졌다. 새로 등극한 도설지왕은 예악의 꿈을 저버렸다. 가야금 소리를 음란한 술자리의 천박한 노래로 바꾸어버렸다. 거기다 도설지왕조의 난조의 정치상황은 차츰 망국의 기운을 띄어갔다. 말기의 정치는 어지러웠다. 한 때 가실왕의 개혁정치에 몸을 담았던 우륵의 입지는 좁아져가기만 했다. 무엇보다 대가야의 꿈이 서린 가야금과 가야의 음악을 지켜내기가 지난했다. “아아, 가야금과 가야의 음악이 이것으로 끝난단 말인가?”하고 우륵은 탄식했다. 나라가 망하는 건 눈에 불을 보듯 번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야의 자취 역시 흩어져버리리라. 허망한 일 아닌가? 우륵은 가야의 기본 정신은 가야금과 노래에 있음을 굳게 믿었다. 그걸 지켜내야 한다. 그러나 망한 나라의 음악을 누가 지켜줄 수 있단 말인가? 우륵은 절망했다. “서둘러 신라왕을 만나야겠다”라고 우륵은 마음먹었다. 신라의 진흥왕은 아직은 어리지만, 가실왕처럼 개혁적인 추진력으로 한반도의 정세를 바꾸려는 원대한 꿈을 지닌 왕재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에 의해 가야가 망한다 해도, 가야의 음악만은, 그 음악 속에 깃든 원대한 꿈과 화합과 원융의 기운만은 도외시하지 않을 게라고 우륵은 믿었다. 가뜩이나 대가야의 난조의 정치현실은 그를 구석으로 밀어내어 백척간두에 서 있는 형편이었으니, 이 쯤에서 대전환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신라로 망명했다. “가야금을 지켜야 한다. 그게 가야의 꿈과 정신을 지키는 게다”라고 그는 함께 따라나선 제자 이문에게 거듭 말했다. 가야금부터 챙긴 다음 제자와 함께 한 것은 가야음악을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나 지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륵은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았다. 신라왕을 만나 가야금과 노래를 호소할 생각이었으나, 신라조정은 그에게 국원(國原:충주지역)으로 이주하라는 명을 내렸다. 모욕이었다. 망국의 슬픔에다 이런 수모까지 주어진 것이다. 우륵은 절망했지만, 가야금을 탄주하면서 끊임없이 가야의 노래를 상기시켰다. “아아, 고향의 노래를 부르자!”라고 그는 큰 강가에서 마음을 다지곤 했다. 세월이 흘러 제법 청년티를 내는 진흥왕이 그가 사는 지역을 순행했을 때 그의 노래를 들었다. 개혁과 통합의 의지로 불타던 열혈청년왕은 바로 그 음악을 이해했다. 그리하여 가야금과 그 노래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우륵의 악기와 노래는 망국지음(亡國之音)이니, 인정해선 안됩니다”라고 신하들이 말렸지만, 진흥왕은 “가야가 멸망한 것은 가야왕의 잘못이지, 음악의 잘못이 아니다. 음악은 인정에 연유하여 법도를 따르도록 한 것”이라며, 우륵의 노래를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우륵은 비로소 큰 숨을 쉬었다. 가야금과 가야의 노래를 그가 지켜낸 것이다. “됐다. 대가야 정신을 담은 이 악기와 노래는 천년을 넘어서까지 이어갈 것이다.” 그는 감격스러워하면서, 망한 고국을 떠올리며 울었다. 3(다시 사랑) 우륵이 죽은 지 천년이 지나, 또 수백 년을 더 지난 2010년의 봄. 꽃잎들이 비처럼 후둑이며 떨어지는 정정골에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륵박물관이 선 이곳에는 사철 가야금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박물관을 찾는 이들이 들을 수 있게 음향장치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내가 박물관 마당에 서서 그 소리에 젖는다. 떨어진 꽃잎이 바람에 수런대는 마당 너머 질펀하게 누운 들판 끝에 솟은 언덕 위에 서 있는 우륵기념탑과 우륵의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곳이 대가야의 의미있는 옛터임을 새삼 깨닫는다. “비로소 이곳에 온전히 터를 잡게 됐구나”하고 그는 중얼거린다. 대가야는 사라져 흔적조차 희미하지만, 그 역사의 숨결처럼 전해지는 게 가야금 소리다. 맑고 부드러운 그 음색은 대가야가 망한 후에도 살아남아서, 천년을 훨씬 넘게 우리의 산과 들과 강과 마을을 울리면서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는 그 소리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것이다. 마흔 두 살의 김동환. 박물관의 한 구석에 자그마한 공방을 마련하고, 가야금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인 고흥권 선생의 수제자. 서울에서 20년 넘게 가야금 제작에 혼을 바쳤다. 그러다가 5년 전 고령군이 박물관을 개관하면서 그를 초청, 이 곳에 터를 잡아주었다. “처음에는 어떨떨했으나, 차츰 이 곳이 가야금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여건이 어려웠으나, 가야금을 사랑하기에 그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버텨왔습니다.” 가야금은 오동나무 공명통 위에 안족을 놓고 명주줄을 팽팽하게 당겨 올려놓아서 소리를 낸다. 명주실을 여러 가닥으로 꼬아서 만든 줄을 물에 담가놓았다가 다시 삶아내는 등 공정이 까다롭다. “오동나무는 건조하는 데만 5년이 걸립니다. 좋은 소리는 좋은 나무에서 납니다. 나무를 깎고, 붙이고, 줄을 감아올리는 공정이 쉽지 않습니다.” 가족들과도 떨어져 이곳에서 생활하느라 외롭지만 이젠 가야금이 가족이라 여긴다. 작업공간이 좁아 바깥에서 명주를 꼬는 등 여건이 어렵지만, 그는 이 지역 애호가들과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가야금의 제작과 연주 체험을 도맡아하기도 한다. 차츰 가야금 주문도 들어온다. 영남대와 경북대, 동국대 등 대학교수들의 호감으로 이들 대학들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생활이 풍족할 만큼은 아니다.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야금 제작을 전수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곳이 가야금의 발상지 아닙니까? 우륵선생의 꿈이 천여 년을 훨씬 넘게 이어와 당신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그 자리에서 제게 닿는 건 놀라운 인연이지요. 이를 다시 천 년 만 년 너머로 이어낼 징검다리가 되는 겁니다. 그 역할을 제가 떠안은 듯 여겨져 설렙니다.” 이하석 <시인>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 성석제의 '龍의 후예'
1.아득한 옛날, 넓디넓은 동쪽 벌판(沙伐)을 바라보는 터에 공갈못(恭儉池)이 만들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못 속에는 용이 살았다. 용은 겨울 한밤중이면 두껍게 언 얼음에 밭갈이라도 하듯 쪼개진 자국을 냈다. 그 때문에 밤새 천둥처럼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이튿날 나와 보면 한 자가 넘는 두꺼운 얼음을 거대한 쟁기로 갈라놓은 듯 도랑처럼 길게 못둑까지 이어지는 틈이 생겨나 있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추워도 그 틈은 얼지 않은 채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곤 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용이 얼음을 간 것이라고 하여 ‘용갈이(龍耕)’이라고 불렀다. 용갈이 자국이 얼마나 큰지, 좁은지 넓은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용은 세상의 물을 관장하며 강과 구름, 번개와 뇌운의 형상을 닮은 존재였다. 물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부들과 농부들이 생산한 오곡과 과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용은 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2.어느날 상주 공갈못 근처에 살던 김생(金生 : 김 씨 성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 경주에 갔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도중에 김생은 지극히 아름다운 미인과 만났다. 평생토록 그렇게 어여쁜 여인은 본 적이 없는 터라 그는 가슴이 뛰기도 하는 한편 뭔가 두려운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다. 나란히 걸음을 재촉한 두 사람은 대구 가까운 우명원의 숙소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방으로 들어오더니 물을 방안에 쏟고는 물의 기운에 감응하여 황룡으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김생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시 여인으로 모습을 바꾼 황룡은 “나를 도와 주겠다고 약속을 하시오. 아니면 오늘 저녁 이후 당신 목숨을 보전할 수 없소”라고 했다. 김생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용녀는 붉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경주의 용담에 사는 용녀요. 사흘 뒤 저녁 공갈못에서 세 용이 싸움을 벌일 것이오. 그 중 청룡은 내 남편이 될 용이고 백룡이 내 혼사를 방해할 암룡이니 그 백룡을 죽여주시오. 내 반드시 그 보답을 후히 하겠소.” 김생은 그러겠노라고 굳게 맹세했다. 그러자 황룡은 기이한 향기를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사흘 뒤 김생이 공갈못에 도착하니 마침 저녁이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짙은 구름이 내려깔리고 나무를 뿌리채 뽑아버릴 듯한 폭풍이 부는가 하면 뇌성벽력이 치는 가운데 세 마리 용들 간에 필사적인 쟁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생은 칼을 빼어들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백룡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허리를 힘껏 칼로 내리쳤다. 그러나 겨냥을 잘못 하여 중간에 끼어든 청룡의 허리를 자르고 말았다. 청룡은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피를 쏟으며 공갈못으로 빠져들어갔다. 그 사이에 백룡을 죽인 황룡이 김생의 앞에 다가오더니 “네가 내 남편을 죽였으니 네가 청룡 대신 나와 같이 살아야만 한다”고 했다. 김생은 체념한 얼굴로 집에 가서 부모 형제와 작별이나 하고 오겠다고 했고 황룡은 그러라고 허락했다. 김생은 집으로 가던 도중 갑자기 병이 들어 집에 도착한 뒤 죽고 말았다. 집안 사람들이 크게 놀라서 무당에게 점을 치자 용신의 조화라 하여 못가에 제단을 쌓고 굿을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큰 굿판이 벌어졌다. 그러자 공갈못의 못물이 누렇게 물들더니 거대한 황룡이 나타났다. 황룡은 제단을 향해 “당신이 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렸더니 이제야 오셨군요!” 하면서 흡사 팔로 사람을 껴안는 흉내를 내면서 다시 못 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부터 사람들은 가뭄과 물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 물 때문에 생기는 재해를 줄여달라고 공갈못의 용에게 빌게 되었다고 한다.3. 공갈못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수하는 낙동강, 그 천삼백리 길에서 가장 빼어난 경승을 보여주는 상주 경천대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자리가 있다. 제를 지낼 때 제관들이 춤을 추었기 때문에 춤추며 기우제를 지낸다는 뜻의 무우정(無雩亭)이 서 있는 곳이다. 경천대 수백 길 층암절벽 아래로 검푸른 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용소(龍沼)가 있다. 용소 물속에는 언제부터인가 용이 살고 있었다. 그 용은 물속에 실타래처럼 몸을 도사리고 있다가 경천대 바위 위에서 아이들이 용소를 내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기라도 할라치면 몸을 쭈욱 뻗어서 아이들을 확 잡아채어 물속으로 데리고 간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런데 경천대 바위에는 말에게 여물이나 물을 먹였다는 구유가 언제부터인지 생겨나 있다. 바로 그 말이 용소에서 나온 용이 변신한 용마였다. 용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바다의 이순신 장군처럼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서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불리는 불패의 명장 정기룡이 타고 다니던 말이다. 정기룡은 젊은 시절 상주 낙동강 일대의 산야에서 무예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경천대 맞은편 낙동강 강변 드넓은 모래밭에 거대한 말 한 마리가 거침없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말은 일상에서 보는 과하마나 파발들이 타고 다니는 역마에 비해 훨씬 덩치가 커서 키가 팔척이 넘었다. 게다가 여간 사나운 기세가 아니어서 여느 사람들은 범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정기룡은 원래 이름이 무수(茂壽)였다. 어느날 그는 한양에 갔던 중에 종각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마침 그때 임금(선조)이 종각의 종을 용이 감고 승천을 하는 꿈을 꾸었다. 임금은 선전관을 보내 그를 데리고 오게 해서는 이름을 기룡(起龍)으로 바꾸도록 했으니, 그는 원래 용과 인연이 깊었다. 정기룡은 모래밭에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말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조심성이 많은 용마는 처음에는 허수아비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허수아비가 움직이지 않자 아느 순간부터 가까이 다가와서 발굽으로 툭 쳐보기도 하고 입으로 짚을 물어뜯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허수아비가 무해한 존재라는 걸 알고는 어린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듯 친숙하게 굴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정기룡은 허수아비 속에 몸을 감춘 채 용마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용마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전날처럼 다가와 몸을 허수아비에 비비며 가려운 데를 긁기까지 했다. 기회를 잡은 정기룡은 재빨리 허수아비를 벗어버리고 용마 위에 훌쩍 올라탔다. 깜짝 놀란 용마는 사납게 몸을 흔들어 정기룡을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일찍이 마상무예를 최고 경지까지 연마한 적이 있는 정기룡은 몸을 찰싹 붙인 채 허벅지로 힘껏 말의 배를 조이며 갈기를 끌어당겼다. 날뛰던 용마는 정기룡을 떨어뜨릴 수 없는 걸 알고는 폭풍 같은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장군을 내면 반드시 용마를 낸다고 했던가. 바로 그 장군이 정기룡이요, 말이 경천대 아래 용소에서 나온 용마였던 것이다.4. 장군은 25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무장의 길에 들어섰다. 31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방어사 조경의 부장으로 출전, 금산에서는 포로가 된 조경을 필마단기로 구출해 나오기도 했다. 고령에서는 홀로 적군의 진중에 돌입, 왜군 장수를 생포하고 여세를 몰아 적군 5백여명을 무찔렀다. 상주 용화동 싸움에서는 중과부적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혼자 적들의 앞에 나서서 현란한 마상무예로 왜적을 현혹한 끝에 이들을 유인하여 전멸시켰으며 화공으로 상주성을 탈환했다. 화왕산, 성주, 의령, 경주, 울산 등의 총 60여 회의 대소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경상좌우병사 등의 벼슬을 지내고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올랐다가 진중에서 61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용마는 평지에서는 60척의 참호를 뛰어넘을 정도로 날랬으며 절벽과 험곡에서도 회오리바람처럼 빨랐다. 장군이 전쟁에 승리하고 위태한 곳을 벗어날 때 용마는 언제나 장군과 함께 있었다. 전란이 끝나자 용마가 죽으니 장군은 깊이 슬퍼하며 제문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용마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있다. 상주의 국민관광지 경천대 입구 폭포 앞에 구국의 상징이 되어 장검을 비껴들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장군을 태운 채, 불꽃이 튀는 듯한 발굽을 치켜들고 갈기를 용의 꼬리처럼 휘날리며. 장군과 용마의 동상을 지나 고개를 넘어가면 예나 다름없이 빼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경천대가 나온다. 그 아래 검푸른 낙동강의 용소 속에 용마의 후손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한은. 성석제 <소설가>
2021.05.24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 김주영의 머리카락 미투리 - 청백리 안동권씨와 그 아내
봄이 오자면 아직 먼 2월 초순 어느 날, 고을의 관속들이 오리 정까지 나와 새로 도임 하는 수령을 맞이하고 있었다. 행차를 기다린 다섯 시간이 흐른 오후 드디어 수령의 행차가 멀리 바라보였다. 그러나 비루먹은 조랑말과 마부 한 사람을 데리고 모습을 드러낸 수령의 행색은 누추하고 남루하였다. 행차에 수행한 절름발이 마부 역시 늙어 구접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 가장자리에 눈곱조차 너절하게 끼어있어 바라보기 매우 민망하였다. 수령을 모셔오기 위하여 서울까지 올라간 원탐리인 이방의 행색이 오히려 깨끗하고 근엄하여 수령으로 잘못 알아볼 정도였다. 지금까지 숱한 수령들이 전라도의 곡창 지대로 회자되는 이 고을에 도임 하였다가 과만(瓜滿)이 되어 돌아갔지만, 이처럼 초라한 수령을 맞이하기는 처음이었다. 새로 도임 한 안동 권씨는, 수령으로 제수 되기 전까지 향리에 파묻혀 글만 읽어온 선비였다. 그러나 본래부터 있어온 제도가 뚜렷하고 또한 견문도 없지 않았을 터인데, 행차가 이토록 빈약하고 너절함에 아연실색이었다. 늘어선 육방관속들이 허리는 조아리고 있었지만, 입 귀를 비쭉거리고 서로 의미심장한 눈짓을 몰래 주고받으며 수령의 행차를 비웃고 있었다. 수리(首吏)로 불리는 이방을 비롯한 육방관속들이란 십중팔구 그 고을 태생으로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원들을 아양과 교태로 보위해온 터였다. 아전들이 다른 고을로 전임하는 경우나 교류 따위는 그 사례가 없었고, 실정의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예로부터 정도에 넘치는 그들의 행패와 침탈에 대항하여 감히 맞섰던 수령은 없었다. 그들은 고을 사람들의 살림 규모와 형편을 거울 속 같이 꿰뚫어 보았다. 논밭의 몇 두렁이며 그 집안의 식솔들 숫자까지도 보름달 바라보듯이 훤하게 꿰고 있었다. 누에 똥 갈 듯 과만으로 6개월마다 자리를 바꾸어온 수령들은 고을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전들을 앞잡이로 세워 가렴주구를 일삼아 왔고, 아전들은 앞잡이 노릇해준 대가로 수령의 눈을 요리조리 비켜가며 백성들을 상대로 착복과 침탈을 일삼았다. 수령이 혹은 그들의 횡포를 알아챘다 하더라도, 수령 자신이 권력을 휘둘러 백성들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두고만 보는 것이었다. 고을로 도임 할 적에는 말 두어 필에 종자가 두 셋에 불과했던 수령들이 과만이 되어 돌아갈 적에는 수십 필의 말에 종자는 스물이 되어 돌아가는 가는 경우가 그래서 허다하였다. 아전들이 고개를 숙이고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은 것에는 도임하는 수령의 행색이 보기 드물게 남루했기 때문이었다. 수령이 그처럼 가난하다면, 중앙의 권력자에게 바친 뇌물을 벌충하기 위하여 재임중의 가렴주구가 혹심할 것은 뻔한 일일 것이고, 아전들은 그것을 빌미삼아 고을 백성들에게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침탈로 배를 채울 것이었다. 육방관속들은 수령의 행차를 뒤따랐다. 그런데 수령은 늙은 마부에게 곧장 동헌으로 들라하지 않고, 말을 비석거리로 몰 것을 분부하였다. 초라한 행차는 머지않아 비석거리에 당도하였다. 곡창지대일수록 비석거리는 더욱 화려했다. 수령은 비석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송덕비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때 뒤따르던 아전들이 또 한번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킥킥거렸다. 선정 베푼 것을 칭송하는 내용의 송덕비들은 그 곳 고을에 부임했었던 수령들이 과만이 되어 돌아간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 아니라, 모두가 수령들이 재임 시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송덕비를 세우려면 고을 백성들로부터 준조세 격인 건립비를 징수해야했다. 그 건립비는 비석을 세우는 실제 경비의 몇 십 배를 징수하여 나머지는 관원과 아전들이 다투어 착복하는 것이었다. 그 날 밤 수령은 우선 객사에 머물렀다. 닳고닳은 이방이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렸다가 고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기로 하여금 은밀히 수청들게 하였다. 수령의 부임은 미설가(未 家)가 상례였기 때문에 관기의 수청 역시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수청들러 갔던 관기는 불과 몇 분만에 퇴짜를 맞고 쫓겨났다. 그로부터 열흘 동안 관기들로 하여금 끈질기게 수청들게 하였으나 결과는 도임 첫 날 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었다. 수령 권씨는 얼마 후 형방을 불러 감옥에 수감중인 죄인들의 도류안(徒流案)을 내놓으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리고 죄인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구문(勾問)한 다음, 그들 대다수를 방면해버렸다. 갇혔던 죄인들은 지난날 재임했던 수령들의 착취에 시달림을 받던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죄인들을 방면 할 때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아전들이 달려와 손사래를 쳤다. "나으리 죄인들을 무턱대고 방면해서는 아니 됩니다.""본인이 죄인들을 무턱대고 방면하고 있다는 것이오?""황송하오나 그러하옵니다.""그게 무슨 하찮은 말이오? 무고한 백성들을 무턱대고 포박해서 가둔 것은 누구였소?" "전임 수령께서 죄적을 엄중하게 따진 다음에 잡아 가둔 것입니다." 수령은 들은 척도 않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밤새 등촉을 밝히고 글을 읽거나 안동 본가의 아내에게 편지로 안부를 묻는 일과를 계속하였다. 육방관속들은 안절부절이었다. 가렴주구나 뇌물 알선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할 일이 없어져 관아에 나와서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일과를 보냈다. 그런 중에 이방이 꾀를 내었다. 스스로 손뼉을 쳤던 이방은 안전으로 나아가 지나간 수령들처럼 송덕비를 세울 것을 품의 하였다. 도임 하던 날, 비석거리를 유심히 살피던 광경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방의 말을 듣고 있던 수령은 색구를 불러 물을 한 그릇을 떠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방이 바라보는 면전에서 그 물로 귀를 씻었다. 그 뒤부터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섭취한 자는 모질게 다스리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배려하였다. 그런 중에 문득 고을에 역병이 돌았다. 관아에 죽치고 있었으면 탈이 없었으련만 글을 읽고 쓰는 일 이외에는 고을의 곳곳을 쏘다니며 민정을 살피던 수령이 남 먼저 역병에 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객사하고 말았다. 아전들이 시신을 놓고 좌고우면하는 중에 고을의 원로들이 모여들어 공론하였다. 도임 할 때 입었던 도포를 죽을 때까지 기워 입으며 지낸 수령의 청렴결백과 선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장례나마 안동 본가에서 치를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싶었다. 원로들은 상두꾼 십 수명을 선발하여 안동 본가까지 송장을 메고 가기로 하였다. 때는 뙤약볕이 내려 쪼이는 한 여름이었다. 송장을 하루만에 썩기 시작하여 냄새가 진동하였다. 밤낮으로 달려 안동 본가에 당도한 것이 출발한지 엿 새 만이었다. 지금의 안동군 서후면, 권씨 본가에 당도한 상여꾼들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늙으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안상제의 슬하에는 어린 삼 남매를 거느리고 있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안상제의 곡소리는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도려내는 듯 슬펐으나, 공교롭게도 전라도에서 멀고 먼 이곳 안동 땅 까지 시신을 메고 당도한 상여꾼들에게 끼니를 대접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허기진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머리를 수건으로 가린 안상제가 상두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퉁퉁 부어오른 안상제가 말했다. "고을의 원로들과 시신을 여기까지 메고 와준 댁들의 은혜에 보답할 길을 찾다가 지난밤을 지새워 겨우 미투리 한 짝을 삼았습니다. 댁들의 은혜에 비하면 만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겠습니다만, 이것이나마 정표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두꾼들은 소중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짐작하고 보자기를 펴 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을의 원로들에게 보자기를 건네 드렸다. 보자기를 펴 본 고을의 원로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앉았다. 그리고 한평생을 오직 남에게 베풀며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받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물건을 무턱대고 받아온 상두꾼들을 꾸짖었다. 그 물건은 안상제가 머리를 잘라 꼬아서 밤을 새워 미투리 한 짝을 삼은 것이었다. 원로들은 상두꾼들에게 보자기를 건네주며 또 다시 안동까지 당도할 동안 소중하게 받들어 모시어 안상제에게 돌려드리고 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김주영 <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프롤로그: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 참여 스토리텔러의 말
◆김주영(소설가) 언어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야기의 터’위에서 살아간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역사를 이어가는 반석같은 존재가 이야기인 것이다.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문화적 원동력이다. 캐릭터를 창조하고, 갈등을 짓고, 그 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그래서 꽤나 매력적이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미학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면 더욱 의미있는 일이다. 영남일보의 스토리텔링 시리즈는 그래서 반갑다. ◆이하석(시인) 이 곳 저 곳 기웃대며, 풍경이든 사람살이든 읽는 걸 좋아하는 내겐 제대로 걸려든 일인 듯하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흥분된다. 우리네 온갖 삶들이 깃들어있는 산천의 굴곡 속 기막힌 이야기들을 찾는 일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사람살이의 뒤안을 들여다보며, 거기 깃들인 욕망과 꿈의 서사를 맛보고 싶다. 그걸 들추어내어 굽이굽이 또 새삼스럽게 얘기를 펴보이고 싶다. 다시 현장에 나설 수 있게 배려해 준 영남일보에 감사드린다. ◆성석제(소설가) 어릴 때 모깃불 연기 냄새 속에서 할머니의 무릎베개를 베고 듣던 옛날 이야기가 실은 공동체의 삶과 지혜와 재미를 담은 보배임을 몰랐다. 우리 고향 방방곡곡에 설화와 전설, 역사로 남아 있을 이 천연의 광석을 잘 캐내고 정련해서 오늘, 여기,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스토리텔링 시리즈에 초대해준 영남일보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만날 독자들과 많은 교감을 나누고 싶다. ◆이상국(전문기자) 마치 금광시대에 광맥을 캐러가듯, 요즘은 방방곡곡으로 이야기자원을 캔다. 이야기는 어떤 사물을 기억시키고 매력적으로 만들어내며 의미와 상징을 확장시킨다. 평소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 박사 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다. 영남일보의 지역스토리텔링 작업에 나를 불러준 것은, 노래부르고 싶은 아이한테 마이크를 쥐어준 격이다. 스토리는 사실과 사실 사이의 ‘생생한 상상’을 필요로 한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은, 또하나의 행복한 가상현실의 체험이리라. ◆우광훈(소설가) 이번 시리즈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날, 난 곧장 군위 인각사를 찾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곳은 불효를 반성하며 흐느껴야했던 한 효성 깊은 아들이 살다간 곳으로 더욱더 가깝게 다가왔다. 순간, 나는 다짐했다. 이 고귀한 지면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역사에 대한 세세한 해석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소박한 노래이어야 함을. 그러한 각오로 독자들 곁에 다가서고 싶다. 정리=영남일보 스토리텔링팀
[스토리텔링 2010] 프롤로그: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태초에 얘기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인류 역사의 시원은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인간이 말을 하면서 이야기는 더욱 무성해졌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자신을 드러내고 남과 소통하는 양식이 됐다. 이야기를 찾아내고 남기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만나 이야기를 낳고,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와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이루고, 그 이야기는 차츰 자라면서 또 이야기를 낳고, 그 이야기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그리하여 경북지역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사람 사는 일이 온통 이야기여서, 산과 강, 들과 마을들이 이야기의 안개 속에 싸여있다. 경북은 그런 이야기들의 총화로 피어있는 꽃밭과도 같다. 봄이면 가장 먼저 바람 앞에 미모의 얼굴을 드러내는 노루귀처럼 이야기들이 심심산골은 물론, 사람 사는 마을 어귀 어디에나 피어나 빤히 내다본다. 때로 깊은 밤 먼 데서 외따로 깜박이는 불빛처럼 이야기들은 가물거리면서 나그네를 유혹한다. 그 이야기를 찾아가면 길이 생기고, 그 길은 또 다른 이야기의 곁가지로 뻗고.... 이야기는 사람 사는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전설이 되고, 설화가 되고, 소문이 되어서 안개처럼, 꽃처럼, 무지개처럼 피어오른다. 이야기가 무럭무럭 자란다면 흥미 있는 이야기는 흥미 있는 삶을 들려준다. 영웅의 모습을 그려내고, 선비의 사랑이 저승과도 이어지게 한다. 물과 불과 같은 장애도 쉽게 통과한다. 무소불위이며 만사형통이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해학적이며, 때로는 교훈적이다. 이야기는 말이 퍼렇게 살아있는 시대의 역사적 서사이기도 하다. 경북지역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삶만큼 널려 있다. 이야기는 생성하고 변화하며 무수히 가지를 쳐나간다. 옛 이야기는 오늘의 이야기로 되살아나고, 다시 내일의 이야기로 넘겨진다. 이곳의 이야기는 저곳의 신화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이야기의 힘이고, 욕망이며, 꿈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과서이고, 어른들의 참고서이며, 정치인들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아이들과 몽상가, 예술가들은 특히 많은 이야기를 꿈꾼다. 그런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욕망이 새롭게 불붙기 시작한다. 이야기 찾기, 또는 이야기 만들기 경북도의 각 시.군들이 최근 들어 열을 올리는 게 이야기다. 스토리텔링의 발굴과 구현, 그리고 그 구체적인 관광자원화는 이야기의 힘을 실감하기 때문에 시도되는 게다. 문화콘텐츠를 스토리텔링화하여 관광산업으로 확대하는 게 대세를 이룬다. 스토리텔링 시대라 할 만하다. 각 시.군에 깃들여 있는 전설과 이야기들이 잠재된 문화콘텐츠로 둔갑하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재미로 되살아 난다. 이를 활용하여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새로운 힘이 되어 지역사회의 발전에 일대전환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경북지역에서 각 지자체들이 스토리텔링화하여 관광과 연계시키려는 사례들은 많다. 청송의 주왕산을 중심으로 한 설화들은 아름다운 경관과 정치적인 사건들이 얽어짜여진다. 봉화의 청량산 관련 이야기도 웅숭깊다. 예천의 회룡포를 감도는 물길을 따라 전해내려온 얘기들도 재미있다. 고령의 우륵이야기는 가야금과 망국의 설움이 버무려진 관련되어 있다. 김천의 방초정과 최씨담의 지극한 사랑이야기, 의성의 금성산과 조문국 이야기, 성주의 조선왕조 태실이 품은 기원의 얘기, 구미 도개면과 도리사 일대에 깔린 아도화상의 불교 전래와 관련된 얘기, 경산의 갓바위의 영험과 관련된 이야기, 영주의 청다리 전설, 군위의 인각사와 삼국유사 이야기... 그리고, 최근 들어 관심이 커지고 있는 영천의 보현산 천문대를 중심으로 별의 이야기, 칠곡의 낙동강 철교와 다부봉 전투와 관련된 전쟁이야기, 문경의 탄광촌의 애환들, 영양의 반딧불이 축제, 청도와 상주의 감 관련 이야기들. 동해지역의 각 시.군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산재한다. 그리고, 안동의 원이엄마 이야기도 최근 갑자기 유명해졌다. 4백20년 전 미라(남편)와 그 시신에서 나온 아내의 지극한 사랑의 편지로 스토리텔링, 소설, 창작오페라로 확대되고 있다. 공감의 힘의 직접성 이야기의 힘은 세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설득과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힘도 이야기를 통하면 더 강력해진다. 과거 이야기가 삶의 전부를 이루다시피 하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소통부재의 폐해는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야기가 힘이 센 것은 그만큼 공감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감하는 이야기의 현장을 보고 싶어 하고, 그 이야기의 실재를 그 곳에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성공한 스토리텔링의 경우 그 현장에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벨기에에는 오줌 누는 아이의 동상이 유명하다. 덴마크의 인어공주 동상을 찾는 이들이 세계적으로 많다. 그러나 실제로 찾아가서 오줌 누는 아이 상을 보면 목이 좋은 곳에 당당하게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고, 구석진 데 위치한 데다 초라하고 빈약한 볼거리에 실망을 하기 십상이다. 인어공주 동상도 막상 바닷가에서 대하면 그 소박하고도 특별난 것 없는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이것들을 찾아오는 이들이 해마다 엄청나다. 왜 그러할까?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얘기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오줌 누는 아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전해진다. 그곳 시장의 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어 찾느라 난리가 났는데, 막상 찾았을 때 그 아이는 길모퉁이에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 또는 프로방스 지역이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한 소년이 적을 향해 유유히 소변을 보았다는 얘기. 또는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한 소년이 그 사이에서 오줌을 누는 바람에 잠시 동안 전쟁이 중단됐다는 얘기 등등. 인어공주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안데르센 동화의 주인공이다. 이 얘기들은 세계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유명해졌다. 그리하여 생각보다 작고 구석진 곳에 있거나 바닷가에 초라하게 앉아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찾는 세계인들이 끊이지 않는다. 관련 상품과 축제들도 푸짐하고 성대하게 치러진다. 스토리텔링은 꿈으로 이어진다 경북지역에 산재하는 이야기들도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것들이 많다. 신화와 설화, 우화, 떠도는 이야기 등등. 경북지역은 예부터 큰 고을이 많고, 산하 곳곳이 깊고 그윽하여 숱한 얘기들을 피워왔다. 이들 얘기들은 역사적이면서 사람살이의 두께와 깊이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얘기들을 발굴하여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면서 그 쓰임새를 최대한 높일 여지가 충분하다. 출판으로, 또는 애니메이션과 공연, 전시,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하여 유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얘기들이 공감의 폭을 넓힌다면 축제화하거나 문화적인 상징물로 제작하여 관광객을 불러올 수 있게 개발이 가능할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꿈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상품이든 관광지든, 심지어는 각 지자체의 행정적인 시책까지 스토리를 입히지 않으면 어필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걸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설득하고 공감의 폭을 넓혀가는 게 새로이 대두되는 서사시대의 추세다. 스토리텔링은 이런 서사시대의 가장 강력한 감성 유혹장치(크리스티앙 살몽)라 말해지기도 한다. 이제 스토리텔링의 바람은 기업경영이나 마케팅 분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각종 선거에서도, 심지어 군인들의 훈련용 게임에서도 이를 이용할 정도다. 우리가 스토리를 찾아 경북지역을 뒤지고 다니는 것은 각 지역이 꿈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그 꿈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지금도 여전히 생성하며 꿈틀대는 그 힘을 밝혀내어, 우리 시대를 사는 이들의 새로운 공감과 동력을 얻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하석<시인>이하석(시인)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3] 조선 말기 음식백과 '시의전서'
꽃이다. 꽃밭이다. 아니 잘 가꾼 정원이 맞겠다. 비빔밥은 정성으로 가꾼 정원이다. 하나하나 다듬고 조리한 각종 나물에 온갖 고명을 올렸으니 그저 꽃이라면 섭섭하다. 밥은 가장 좋은 상주 쌀로 지어 고슬고슬 뽀얗다. 푹 끓여낸 황태 미역국에 감칠맛이 난다. 파김치는 돌돌돌 말려 예쁘게 앉았다. 얇은 소고기에 달걀 물을 입히고 붉은 실고추와 파란 파를 얹어 구운 육전은 솔솔 맛있는 훈기를 뿜는다. 그릇은 차분한 금빛의 유기그릇이다. 정갈하게 담긴 색색의 윤기 나는 음식들이 나무 쟁반에 얌전하게 정렬되어 내 앞에 놓였다. 깔끔하게 차려진 1인 반상. 멋있어라, 귀하게 대접받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상주군수 심환진이 필사해 전해주식류·부식류 등 422가지 소개비빔밥 용어 문헌상으로 첫 등장전통 상차림 형태도 자세히 기록상주농업기술센터 음식복원 나서전수교육 거쳐 식당 7곳에 보급뭉치구이·비빔밥·육전 등 별미#1. 바로잡아 기록한 책 '시의전서'비빔밥은 원래 골동반(骨董飯) 혹은 화반(花飯)이라 불렸다. '골동'은 '어지럽게 섞는다'는 의미다. '화반'은 꽃 같은 밥이다. 골동반은 조선시대 초기의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어 이미 오래전부터 비빔밥을 먹어왔음을 알 수 있다. 비빔밥이라는 이름은 1800년대 말의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처음 등장한다. '부밥'이라는 제목 아래 조리법이 적혀 있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서 부숴 놓는다. 밥에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계란을 부쳐서 골패 짝만큼 씩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상에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상세하다. 시의전서는 19세기 말엽의 요리책이다. 지은이는 알 수 없다. 시의전서는 1919년 상주 군수로 부임한 심환진(沈晥鎭)이 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요리책을 빌려 필사해 둔 것을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에게 전한 것이다. 책에 적혀 있는 요리법은 상주의 반가음식부터 궁중 음식까지 무려 422가지나 된다. 상하 2편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식류 27종, 부식류 189종, 기호식품 107종, 주류 19종, 장류와 조미료류 7종 등이 구체적 정리되어 있다. 또한 식기, 조리기구, 계량법, 맛 표현, 상차림 등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도 담고 있다. 시의전서에는 비빔밥 외에도 '배추통김치' 조리법이 문헌상 처음 표기되어 있다. 특히 반상도식은 매우 귀한 것으로 구첩반상, 칠첩반상, 오첩반상, 곁상, 술상, 신선로상, 입맷상 등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반상차림 같은 전통적인 상차림의 원칙이 언제부터 성립되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이런 상차림의 형태와 구성이 문자화된 것은 시의전서가 최초다. 음식명은 한자와 한글을 병기했고 부수적인 설명도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두드러진 것으로 보아 당시 경상도 지역 유력한 양반집의 요리법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인일 게다. 그녀는 긴긴 시간을 고심하고 옳다 여기는 것을 취합해 차곡차곡 써내려 갔을 것이다. 음식을 하다가도, 수를 놓다가도, 문득 천둥 같은 깨달음이 오면 조리법 곁에 첨언해 두기를 거듭했을 것이다. 시의전서는 '바로잡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다. 이는 안동 수운잡방(需雲雜方), 영양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 한정식의 근간이 되는 3대 조리서 중 하나다.#2. 상 위에 재현된 '시의전서'상주시농업기술센터는 2018년부터 시의전서에 나오는 음식을 재현하는 사업을 추진해 70여 종의 메뉴를 개발했다. 2019년에는 상표를 등록하고 시의전서 전통음식연구회와 상표 사용을 계약했다. 그리고 2020년 복원된 음식을 일반식당에 보급했다. 심의를 거쳐 사업대상자를 선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의 전수교육과 요리경연대회도 거쳤다. 선정된 업소에는 시의전서 현판이 걸려 있다. 현재 상주에서 시의전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은 백강정, 혜원식당, 안압정, 상산관, 삼백한우뜰, 수라간, 주왕산삼계탕 등 7곳이다. 백강정은 제1회 '시의전서 창업식당'으로 시의전서의 다양한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다른 음식점들은 오랫동안 상주 맛집으로 사랑받던 곳으로 각각의 특성에 맞는 음식들을 내고 있다. 모든 메뉴는 1인용 독상이다. 밥은 삼백의 고장 상주의 최고급 쌀로 지어진다. 모든 음식은 유기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사각의 나무 쟁반에 단정하게 올려져 나온다. '백강정'은 낙동강 회상나루에 위치한 한옥 레스토랑이다. 낙동강 저편에는 경천대와 도남서원, 낙동강생물자원관이 있고, 백강정 곁으로는 회상나루 객주촌과 드라마 '상도' 촬영지가 있다. 백강정의 대표메뉴는 뭉치구이 정식이다. 잘 다진 쇠고기를 수제청으로 뭉쳐 둥글둥글 빚어 구워내고 상주 곶감으로 만든 장아찌를 곁들인다. 뭉치구이는 촉촉하고 부드럽고 장아찌는 쫀득하고 매콤하다. 뭉치구이 정식 외에도 통깨를 곱게 갈아 깻국물을 내 국수를 말아먹는 '깻국국수정식', 상주 곶감으로 만든 곶감약고추장을 곁들여 먹는 '상주 부빔밥(비빔밥) 정식' 등이 있다. 또한 각종 찜, 구이, 전, 조림, 전 종류와 궁중떡볶이, 문어숙회 등의 일품요리가 있고 시의전서 도시락도 판매하고 있다. '상산관'의 시의전서 복원 메뉴는 비빔밥과 육전 그리고 천어잔생선조림이다. 천어는 민물고기를 지칭한다. 즉 피라미나 빙어와 같은 잔 생선으로 조림을 한 것으로 도리뱅뱅이와 같은 음식이다. 시의전서에는 진간장을 기반으로 한 조림과 고추장 기반의 조림 두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상산관은 고추장 조림이다. 통째 꼭꼭 씹어 먹으면 매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상산관의 비빔밥 정식 반찬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조기구이다. 20㎝ 정도 되는 가장 맛있는 조기를 쓴다. 식사 후에는 향긋한 꽃차가 나온다. '삼백한우뜰'에서는 메밀묵밥육전정식, 육전, 뭉치구이(떡갈비)를 대표 시의전서 복원음식으로 내고 있다. 원래 한우암소와 한돈을 주로 하는 식당이어서 시의전서 복원 음식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보통 메밀묵밥육전정식에 단품을 더하는 식으로 주문한다. 메밀묵은 봉평 메밀을 공수했단다. 곱게 채썬 오이와 김, 쫑쫑 썬 김치, 볶은 소고기, 곱게 부친 황백의 지단을 고명으로 듬뿍 얹었다. 맛과 색과 식감과 영양까지 고려한 조합이다. 후식은 오미자차다. 붉은 오미자청에 하트모양 얼음을 동동 띄운 차가 입안을 시원하고 깔끔하게 해준다. 한정식 맛집인 '안압정'의 시의전서 메뉴로는 비빔밥 정식, 메밀묵밥육전정식, 육전이 있다. 안압정에서는 메밀묵을 직접 만든다. 비빔밥에는 고사리, 다래순, 도라지, 호박, 숙주, 표고버섯 등 각종 나물과 뭉치 구이 완자가 들어간다. 나물은 직접 키우거나 갈무리한 것이어서 철마다 조금씩 바뀐다. 반찬은 정식의 종류에 따라 조금 다른데 미역국, 얇게 채 썬 감자볶음, 생선구이, 매콤한 양념의 더덕구이, 강황가루 입혀서 튀긴 우엉 등이 있다. '주왕산삼계탕'도 시의전서 복원 식당이다. 시의전서 복원 메뉴는 닭을 이용한 닭곰탕 정식, 닭구이 정식, 닭구이 등 3가지다. 겉절이와 상추·배추 등의 채소는 공통차림이다. 닭구이는 손질된 닭에 청주와 생강즙을 뿌려 밑간해 두었다가 양념장에 재워둔 뒤 팬이나 석쇠에 빨리 뒤집어 가며 타지 않게 굽는다. 마늘, 고추, 대파, 버섯이 딸려 나오고 견과류를 넣은 쌈장이 더해진다. 상추는 직접 재배하고 된장은 어머니가 담는다고 한다. 닭곰탕은 영계를 푹 고아 살만 발라낸 뒤 표고, 느타리, 부추, 감자, 당면 등을 넣어 갈비찜 하듯 끓여낸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다. '혜원식당'은 상주에서 오랫동안 콩국수로 유명한 집이다. 국숫집이다 보니 시의전서 복원 음식으로 낭화(장국수) 한상과 깻국국수 한상을 낸다. 낭화는 멸치육수에, 깻국국수는 멸치육수와 양지육수에 들깨가루를 넣었다. 낭화는 낯선 이름이다. 물결 낭(浪)에 꽃 화(花). 면발이 물결치듯 하고 꽃이 핀듯하다는 뜻이다. 혜원식당의 면발은 홍두깨로 밀어 낭화의 모양이 물결치는 꽃 모양 바로 그 모습이다. 메인인 국수에 5가지 반찬과 밥 한 공기가 제공된다. '수라간'은 상주의 한정식 맛집으로 근대 한옥집이다. 서까래와 마루가 반들반들하고 화단에는 각종 꽃나무가 소복하다. '수라간'에서는 비빔밥정식을 점심특선으로 낸다. 쌀밥과 미역국에 나물은 숙주, 도라지, 고사리 등 6~8가지 정도 되고 지단과 창포묵, 고기완자 등이 더해진다. 장은 깨를 듬뿍 넣은 간장과 초고추장 2가지, 반찬으로는 소불고기와 잡채·전·김치 등이 나온다. 후식은 달고 시원한 식혜다. 한낮의 호사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상주시 누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복려 외, 음식고전, 2016. 한복진 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식 백가지 1, 초판 1998, 10쇄 2011.Tip '시의전서' 전통음식 맛볼 수 있는 곳▶백강정= 상주시 중동면 갱다불길 145. ▶혜원식당= 상주시 금도랑길 21. ▶안압정= 상주시 동문1길 8. ▶상산관= 상주시 경상대로 3032. ▶삼백한우뜰= 상주시 북상주로 80. ▶수라간= 상주시 상서문 3길 119. ▶주왕산삼계탕= 상주시 북상주로 75.'상산관'의 시의전서 복원 메뉴인 비빔밥 정식과 육전. 비빔밥 정식 반찬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조기구이로, 20㎝ 정도 되는 가장 맛있는 조기를 쓴다.식사 후에는 향긋한 꽃차가 나온다.시의전서에 적혀 있는 요리법은 상주의 반가음식부터 궁중 음식까지 무려 422가지나 된다. 식기, 조리기구, 계량법, 맛 표현, 상차림 등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도 담고 있다. 〈상주시 제공〉시의전서 표지.
2021.05.17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2] 오일장·상설시장 공존하는 상주중앙시장
'뭐해여, 빨리와여.' 시장통 벽에 쓰인 쩌렁쩌렁한 부름에 걸음이 빨라진다. '오늘 저녁 뭐 해먹지?' '삼박 삼박 손칼국수.' '할매 손잡고 다니던 길.' '장바구니 한 가득, 정이 듬뿍.' 노란벽, 파란벽, 빛바랜 분홍벽이 곰살갑게 말 건다. "감 먹은 한우요! 아주 그냥 맛이 끝내줘요." "돌멩이 맨치로 딴딴한 감자!" "오늘 뽑아온 싱싱한 햇양파!" 자부심 넘치는 외침이 팡팡 터지고 와글와글 흥정하는 소리가 가득하다. 난전에는 정갈하게 손질된 할매들의 이력이 오종종히 펼쳐져 있고 시장의 높은 벽에 쓰인 'since 1912'는 장터의 내력을 알려준다. 오늘도 성성한 오래된 시장, 상주중앙시장이다. 한때 부산·대구서도 상인들 찾아와1987년 새건물 짓고 상설시장 변신규모 총 16개 동에 상점 160개 넘어2·7일 장날이면 300여개 노점 장관탈춤놀이 등 다양한 공연도 볼거리39년 된 분식점 등 시장 곳곳 맛집#1. 명실상주 중앙시장"우리 시장이 오래 됐지요. 100년이 넘었죠. 옛날옛날부터 있던 시장이죠." 상주시내 한가운데 상주중앙시장이 있다. 100년의 시간이라 하나 조선시대부터 열렸던 읍내장의 명맥을 잇고 있으니 실상은 더 오래 되었다. 조선시대 장터는 상주읍성 내 상주목 관아 동서쪽에 있었다. 1909년의 기록에 따르면 2일과 7일에 장이 섰고 멀리 부산과 대구·김천 등지에서도 상인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1910년대에 장터는 동헌의 문루로 쓰였던 태평루(太平樓) 앞으로 이동했다가 점차 도시가 커지면서 장도 커져 읍성의 남문 밖으로 밀려났다. 현재의 위치다. 1920년대 상주 읍내장은 180칸의 장옥을 가진 큰 규모의 시장이었다. 정기시장이 상설시장으로 변화된 것은 긴 시간을 뛰어넘은 1987년 상주중앙시장 건물을 지으면서다. 상주중앙시장은 정기시장(오일장)과 공존하며 곧바로 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부상했다. 2005년부터는 수년에 걸쳐 노후화된 시장을 말끔하게 정비했다. 첨단 아케이드가 설치되었고 간판이 교체되고 건물 외벽을 새로 칠했다. 2007년부터는 줄타기나 탈춤놀이를 비롯한 무형문화재 공연과 지신밟기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해왔다. 2016년에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돼 '낭만이 있고 정이 넘쳐나는 명실상주 중앙시장'으로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이름과 실제가 똑같다는 '명실상부'에 '상주'를 결합한 '명실상주 중앙시장'이다. 입소문만큼이나 살거리, 볼거리, 먹거리가 많다는 의미다. 시장의 캐릭터는 호랑이 커플인 '삼백이'와 '명실이'다. 풍요로운 삶의 수호자인 백호를 모티브로 했다. 시장통에서는 배낭을 멘 젊은이들이나 시장 투어를 하는 단체 관광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케이드가 아주 높다. 빛이 환해서 광장처럼 시원하다. 시장은 총 16개 동이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고 상점은 160개가 넘는다. 옛날에는 고추전, 어물전, 잡화전, 채소전, 곡물전, 그릇전, 곶감전 등 품목별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제 구획은 없다. 젓갈집 옆에 이용소가 있고, 고깃집 옆에 옷가게가 있고, 신발가게 옆에 통닭집이 있고, 철물점 옆에 과일가게가 있다. 단위 상가들 배면으로도 골목 시장이 넓게 형성돼 있다.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겹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매일 나오는 노점 상인들도 많다. 거리에는 근대의 건축물부터 현대의 것까지 켜켜이 쌓인 시간이 흘러간다. 현대기물, 호박양품, 영광상회, 고려분식, 무양포목과 같은 옛 간판들이 친근하다. 한눈에 들어오는 제일약국 건물은 50여 년간 약국으로 성업하다 이제 꽃집과 과일가게가 되었다.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와 긴 머리 소녀가 팔짱을 끼고 지나간다. 중년의 아줌마가 등 굽은 할머니와 손을 잡고 걷는다. "엄마, 옷 하나 사주까?" "옷은 무슨. 다 늙어가. 내한테 맞는 옷도 있을란가?" "입어봐야 알지 눈으로 입어보면 아나!" 만물가게 앞에 망연히 선 아주머니는 고심 끝에 중간 크기의 냄비 하나를 고른다. 양손이 무거워지면 고객 쉼터인 '꼭감카페'로 가면 된다. 1만원 이상 구매한 고객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제공된다.'상주곶감'이라는 간판은 시장 곳곳에서 보인다. 상주는 15세기 이전부터 최고의 곶감 산지였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왕실에 진상된 곶감이었다. 지금은 전국 곶감 생산량의 60%가 상주에서 생산되며 2019년에는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상주중앙시장의 곶감골목에는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도가(都家)가 들어서 곶감장이 형성되었고 도가마다 10~30명의 도매상인들이 소속돼 곶감을 사고팔았다. 현재는 곶감도가의 역할이 농협공판장으로 이전되었지만 설 명절 즈음에는 상주중앙시장에 곶감전이 펼쳐진다. 장관이다. #2. 풍물거리상주중앙시장 입구와 이어져 있는 남쪽 도로는 '풍물거리'다. 옛날에는 개천이 흘렀다. 상주중앙시장이 등장하면서 장터를 잃은 노점상들은 천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1990년 시장의 활성화와 교통의 편리를 위해 개천을 복개하고 노점상들을 유치했다. 그곳이 바로 풍물거리다. 매일 오전 4시30분 풍물거리에는 새벽시장이 열린다. 인근 면의 주민들이 경운기나 트럭·리어카를 끌고 나타난다. 왁실덕실한 활기는 오전 7시가 되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번개시장이라고도 부른다. 매달 2일과 7일 장날에는 풍물거리 전체가 장터가 된다. 장은 대로변에서부터 덜퍽지게 바라져 있다. 알록달록한 대형 우산과 차양막이 드리워지고 300여 개의 좌판과 노점들이 빽빽이 늘어선다. 들이 있고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갯벌이 있고 온갖 먹거리 볼거리가 있는 장터, 경북 북부지역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다. 무르익은 봄날의 난전에는 파릇한 모종들이 가득하다. 조롱박, 새싹보리, 잎들깨, 복수박, 가지, 양배추, 땅두릅, 당귀 등 키워먹는 것에서부터 눈이 즐거워지는 형형색색의 꽃모종까지 봄, 봄을 외친다. 좌판에는 할머니들이 가꾸고 갈무리해 온 싱싱한 봄나물들이 많다. 봄동, 깻순, 방풍나물, 두릅, 시금치, 냉이, 달래, 햇양파, 돈나물, 더덕 그리고 신혼초와 같이 이름도 모르는 귀한 것들이 지천이다. 깐 도라지 한 소쿠리, 깐 호두 네 봉지, 청국장 몇 봉지, 검정콩 두어 봉지, 말린 대추 두 봉지, 말간 빛깔의 쪽파 두 소쿠리, 마늘 서너 봉지, 먹기 좋고 보기 좋게 손치레 해 놓은 채소들이 옹기종기 펼쳐져 있다. 산처럼 쌓인 꽃무늬 밭일의자, 햇빛을 가려줄 챙이 넓은 모자들, 소의 해 행운을 주는 워낭과 코뚜레를 파는 좌판도 있다. 김이 솔솔 나는 햇번데기의 고소한 냄새와 어묵과 도넛의 자글자글한 기름내가 진동한다. 허리 굽은 할머니의 손두부 앞에서 젊은 부부가 발길을 멈춘다. "4천원. 손두부가 맛있어." "할머니, 발두부는 없나요?" 남편의 실없는 개그에 웃음바다가 된다. #3. 상주중앙시장의 맛집들상주중앙시장에는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며 맛집으로 이름난 식당들이 있다. 39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려분식'은 상주의 대표 맛집, 군만두와 땡초김밥, 쫄면이 유명하다. 착한 가격 모범업소, 백년가게, 생활의 달인 등 명성에 걸맞은 명패도 가득 붙어 있다. 배달 오토바이가 연신 들락날락하고 포장 주문을 기다리는 이들도 자꾸자꾸 늘어난다. 한결같은 맛으로 재료를 아끼지 않는 것이 39년의 비결이란다. 바로 옆의 '뉴 세느 빵집'도 엇비슷한 역사의 맛집이다. 특히 찹쌀떡은 타 지방에서 택배 주문을 하는 정도다. '서만통닭'과 '청리통닭'은 거의 주방을 맞대고 나란히 자리한다. 두 곳 모두 상주중앙시장 핵점포 육성사업에 선정된 가게들이다. 주문과 동시에 생닭을 작두로 자르고, 양념된 튀김옷을 입친 다음 열이 오른 커다란 가마솥에 넣어 튀겨낸다. 튀김옷은 바삭하고 고기의 육즙은 그대로 유지돼 부드럽다. '동신통닭'은 한 마리를 주문해도 프라이드·양념·간장 세 가지 맛으로 만들어주고, 소스에 상주곶감을 사용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시장통 옛날국수' 역시 핵점포 육성사업에 선정된 상주중앙시장의 이름난 맛집이다. 모자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잔치국수가 별미다. 깊고 진한 국물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푸짐한 양은 시장의 인심을 느낄 수 있다. 고기와 곶감 고명을 올린 얼큰곶감칼국수가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내놓지 않는다고 한다. '대월떡집'의 이색품목은 감말랭이를 썰어 넣은 곶감꿀떡이다. 맛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맛과 씹는 맛이 남다르다. 대로변에 있는 '남천식당'은 3대에 걸쳐 운영되고 있는 80년 전통의 해장국집이다. 메뉴는 날계란을 얹은 시래기 된장국밥 2천500원, 곱빼기 3천원, 잔 막걸리 1천원이 전부다. 이 외에도 '대구식당'은 얼큰한 육개장과 푸짐한 코다리찜으로 이름나 있고 '서울곰탕'의 돼지고기 보쌈에 상이 넘칠 만큼 푸짐한 반찬은 감동이다."이래 나와야 사람 구경하지요." "사람 구경하고 국수 한 그릇 먹고 가는 재미가 있어." 오래된 시장은 오늘도 성성하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상주시 누리집.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김상호, 상주 근대 전통시장의 변천, 2017. 주영하 외, 사라져가는 우리의 오일장을 찾아서, 2003.상주중앙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있던 상주 읍내장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으로, 총 16개 동이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고 상점은 160개가 넘는다. 발길 닫는 곳마다 자부심 넘치는 외침이 팡팡 터지고 와글와글 흥정하는 소리가 가득하다.상주중앙시장 입구와 이어져 있는 남쪽 도로를 따라 들어선 풍물거리. 노점상 전용 공간으로 매일 오전 4시30분에는 새벽시장이 열리고, 매달 2일과 7일 장날에는 300여 개의 좌판과 노점들이 빽빽이 늘어선다.'대월떡집'은 감말랭이를 썰어 넣은 곶감꿀떡이 인기품목이다. 보는 맛과 씹는 맛이 남다르다.'동신통닭'은 한 마리를 주문해도 프라이드·양념·간장 세 가지 맛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특징이다.상주중앙시장의 '시장통 옛날국수'의 별미는 잔치국수다. 깊고 진한 국물이 일품이다.
2021.05.03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1] 조선 최초 사설 대중의료기관 존애원
■ 시리즈를 시작하며상주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유서 깊은 역사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올곧은 정신문화는 시대와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독특한 무형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흡인력 있는 무수한 이야기가 고개를 넘고 깊은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펼쳐진다. 이러한 유무형의 자산은 상주라는 같은 뿌리에서 태동했고, 상주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미래 상주'를 이끌어갈 원동력이자 강력한 에너지이기도 하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시리즈를 연재한다. 자연과 생태, 역사, 문화, 인물 등 상주를 무대로 펼쳐진 다양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담아낸다. 1편에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을 보듬은 사설의료시설 '존애원'의 이야기를 따라 나선다.약배이들에 복사꽃이 피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른 것들도 대지 가득 고개를 내밀고는 부드러운 바람에 얼굴을 씻고 있다. 그 가운데 네 칸 기와집이 낮은 언덕에 기대 동그마니 앉아 있다. 언덕에 서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복사꽃은 이따금 바람을 타고 지붕의 용마루에 내려앉았고, 꽃잎이 떠난 자리에는 연둣빛 잎이 돋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오래된 평온이었다. 400년을 이어온 폭풍 같은 평온이었다.#1. '마음을 지키고 길러 타인을 사랑한다'400여 년 전 우리의 산하는 참혹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전국을 완전히 파괴했고 백성들은 전염병과 각종 질병으로 약 한 첩 못쓰고 죽어갔다. 임란은 최악의 의료상태를 야기했다. 당시 지방에는 각 도에 파견된 몇 사람이 지역민에 대한 치료와 약재 공납 등의 임무를 맡았지만 의료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왜적의 손에 죽고, 역병(疫病)에 쓰러지고, 굶주려 죽고…온 나라 백성이 거의 살 바를 잃었으니 춘궁기가 돌아옴에 굶어 죽는 자가 적병의 칼날에 죽는 자보다 몇 배나 많았다.'임진년(1592) 상주와 함창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벌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남긴 일기의 한 대목이다. 행정·경제·교통의 요지였던 상주의 피해는 컸다. 임란 사상 첫 대규모 전투였던 상주 북천전투에서도 의병 등 상주민 800여 명이 전원 산화했다. 이에 상주는 조세 감면의 은전을 받았지만 전쟁 뒤 남은 것은 지옥 같은 비참함뿐이었다. 상주 13개 문중 '낙사계' 만들어1602년 아담한 건물 짓고 진료 흉년·춘궁기엔 빈민 구휼 활동1782년 무고로 약방 철거 수난서당·경로잔치 열어 명맥 유지2009년 이후 해마다 시술 재현임란의 뒤끝인 1599년 가을,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창석(蒼石) 이준(李埈), 석천(石川) 김각(金覺), 청죽(聽竹) 성람(成濫),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 일묵재(一默齋) 김광두(金光斗), 우곡(愚谷) 송량(宋亮),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이 있었다. 우복 정경세는 지역 양반들에게 의료원 설립을 건의하고 협력을 구했다. 당시 상주의 사족은 이미 16세기 중엽부터 선비들의 모임인 유계(儒契)를 결성해 향촌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1566년의 병인계(丙寅契), 1578년의 무인계(戊寅契) 등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흩어졌던 그들이 다시 뭉쳐 낙사계(落社契)가 꾸려졌다. 상주 남촌현의 청리·공성·외남·내서 지역 13개 문중으로 계원은 24명이었다. 진료는 성람이 맡았다. 율곡 이이의 제자이며 성리학자이자 실학자였던 그는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1604년 선조가 인후증과 실음증을 앓고 있을 때 치료에 차도가 없자 내의원에서 추천한 이가 바로 성람이었다. 창석 이준은 그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천300가지나 되는 병이 침공해 오는 데도 약은 한두 가지도 갖추지 못해 죽으니…. 동지들과 대략 약재를 모아 급할 때 쓰고자 한다. 진료하고 투약하는 일은 공(성람)의 일이라고 하니 성람이 마땅한 일이라고 여기었고, 여러 사우 또한 흔연히 참여를 원하여 협력하려 하였다.' 이렇게 현존 자료상 조선조 최초 사설 대중의료기관인 '존애원(存愛院)'이 창설됐다. '존애(存愛)'란 중국 송(宋)나라의 선비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딴 이름이다. '마음을 지키고 길러 타인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2. 불인지심과 측은지심으로 늘 푸르다는 상주 청리(靑里)에 도연명이 태어난 고장과 이름이 같은 율리(栗里)가 있고 바로 그곳에 존애원이 있다. 오늘 복사꽃이 피었으니 도연명이 전하였던 도화원(桃花源)이 예와 다를까. 존애원 건물은 1602년에 건립되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조촐한 규모다. 수차례의 중수와 중건으로 그 원형은 다소 변형되었지만 매우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낙사계에서는 쌀과 베를 모아 중국의 약재인 당재를 구입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향약재는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채집을 맡겼고 일부는 존애원 앞 넓은 들에 직접 재배하기도 했다. 들은 지금도 '약배이들'이라 불린다. 약초를 길렀던 들이다.존애원에서는 남녀노소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굶주리고 아픈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곧 선비의 도리이자 책무라고 믿었다. 그 마음의 뿌리에는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불인지심(不忍之心)'과 남을 측은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다. 존애원을 찾는 사람은 날로 늘어났다. 운영은 약재를 판매한 이윤 등으로 충당했다. 약재를 판매한 이익으로는 다시 약재를 구입했고 치료비를 약재로 받기도 했다. 흉년이 들거나 춘궁기에는 빈민들에게 곡식을 빌려 주었다. 그러나 갚는 이는 드물었다. 운영 자금이 부족해지면서 재정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준은 사람의 '인(仁)이라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어지지 않는 한' 존애원의 의료 활동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3. "크도다, 이 계()여!"그러나 의료 활동은 200년이 안 돼 무너졌다. 1782년 상주지역의 한 향민에 의한 무고(誣告) 때문이었다. 약방이 철거되었고, 그간의 운영 기록이 모두 사라지는 수난을 겪었다. 1797년이 돼서야 마침내 존애원은 누명을 벗었다. 초계문신 이동(李)에 의해 전후 사정을 들은 정조(正祖)는 낙사계를 크게 칭송하며 말했다. '크도다, 이 계()여. 나도 이에 들리라.' 낙사계의 명칭은 '대계(大)'로 바뀌었으나 16년간 진료가 중단됐던 존애원은 이미 기반이 무너져 재개되지 못했다. 존애원은 그러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오늘날 경로잔치에 해당하는 '백수회(白首會)'가 그것이다. 1607년부터 지역의 노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시행된 백수회는 1894년까지 이어졌다. 백수회에서는 즉석에서 시를 짓는 '백장회(白場會)'도 열렸다. 특히 70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새해에 음식을 올리는 세의(歲儀)는 1940년까지도 지속됐으며 관례(冠禮)도 열려 1908년까지 이어졌다. 또한 존애원은 서당이자 배움터 역할도 했다. 1747년 간행된 '상산지(商山誌)'에 존애원은 서당으로 기록돼 있다. 진료가 중단됐던 시간에도 존애원은 예절교화와 후진양성의 장(場)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존애원은 1950년 제사를 지내는 단소(壇所)로 승격되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존애원은 한동안 세상에서 잊히는 듯했다. 그러다 문중 후손들의 노력으로 1956년 존애원 사적인 '낙사휘찬(洛史彙纂)'이 발간됐고, 1993년 2월에는 존애원이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2005년에는 처음으로 '존애원 의료시술 재현행사'가 열렸고 이후 2009년부터는 해마다 재현행사가 개최됐다. 또한 존애원 기록을 새롭게 모아 정리한 자료집인 '존애원지'가 2005년과 2007년에 발간됐다. 그리고 2007년 낙사계 참여 후손들을 중심으로 '존애원보존회'가 만들어졌다. 이들 후손은 지금도 해마다 음력 2월10일 존애원에 모여 선조들의 음덕을 기리고 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화재청 누리집. 상주시청 누리집. 경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경북도,1992. 김도완, 상주 낙사계의 존애원 설립과 운영, 안동대, 2018. 우인수, 조선후기 상주 존애원의 설립과 의료기능, 대구사학, 2011.임진왜란 이후 병약해진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해 설립된 상주 존애원. 현존 자료상 조선조 최초 사설 대중의료기관으로 당시 향촌사회를 이끌었던 13개 문중이 힘을 모아 건립했다. 1993년에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존애원은 의료기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글 공부를 도와주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잔치도 열었다.존애원의 현판. 존애(存愛)는 '본심을 지켜 기르고 남을 사랑함'이라는 뜻을 지닌 중국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왔다.존애원 내부에 걸린 편액.
2021.04.19
[스토리텔링 2020] 포항 12경 둘레 맛 기행<22·끝> 바다내음 가득한 모리국수 전문점 '혜원식당'
식도락 여행을 즐기기에 구룡포만 한 곳도 없다. 구룡포는 볼거리도 많지만 먹거리도 다양하다. 동해에서 잡아 올린 신선한 해산물이 지천이다. 진미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게와 과메기의 주산지이기도 하다.청어나 꽁치를 냉동과 해동을 반복해 바닷바람에 건조시킨 과메기는 겨울철 별미다. 과메기는 만드는 과정에서 DHA와 오메가3 지방산의 양이 증가하고, 핵산이 생성돼 피부 노화·체력 저하·뇌 쇠퇴 방지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구룡포의 별미는 해산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상도 3대 국수에 손꼽히는 제일국수공장표 해풍국수와 이름도 생소한 모리국수도 구룡포의 이름난 먹거리다. 특히 모리국수는 이름부터 호기심을 유발한다. 유래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그날 잡힌 생선과 해산물을 대충 '모디(모아의 사투리)' 넣고 여럿이 냄비째로 먹는다고 해서 '모디국수'로 불리다가 나중에 모리국수로 굳어졌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또 음식 이름을 묻는 이들에게 포항 사투리로 '나도 모린다'고 표현한 데서 비롯됐다는 주장과 '많다'는 뜻을 가진 일본어 '모리(森)'와 연관이 있다는 설도 있다.모리국수 집은 구룡포어시장 주변에 포진해 있다. 일본인가옥거리에서도 꽤 가깝다. 식당들은 대부분 골목 안에 위치한다. 구룡포수협에서 시장쪽으로 향하다 보면 두 번째 골목 어귀에도 모리국수 집이 있다. 혜원식당이란 상호를 쓰는 곳이다. 혜원은 임종희 대표의 큰딸 이름이다. 가족 이름을 쓰는 식당은 언제나 정겹다.식당은 오래된 건물에 위치해 노포 분위기가 살짝 난다. 하지만 이곳의 역사는 생각보다는 길지 않다. 2015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구룡포에 진을 치고 있는 여러 모리국수 집 가운데 후발주자인 셈이다. 더욱이 임 대표는 구룡포 토박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곳이 입소문을 탈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손맛'이 아닐까.제주도에서 태어난 임 대표는 30여 년간 요식업에 종사했다. 경기도 의정부·동두천, 충남 당진·서천 등지에서 부대찌개 식당, 백반집 등을 운영했다. 노하우가 쌓인 만큼 맛에 있어선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임 대표가 신경을 쓰는 부분은 육수 맛이다. 이곳 육수는 홍게와 멸치, 명태머리를 베이스로 고추씨, 다시다, 무, 파뿌리, 밴댕이를 첨가해 시원한 맛을 낸다. 재료 모두 국내산이다. 또 인공 조미료도 사용하지 않는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주재료는 아귀와 칼국수다. 이와 더불어 오징어, 홍합, 조개, 미더덕, 콩나물 등을 넣어 맛을 완성한다. 시원한 맛을 극대화한 레시피다. 꼼치(미역초·물메기)를 메인 재료로 쓰는 곳도 많지만 '모디' 넣어 만든 요리에 정해진 재료가 있을까 싶다. 더욱이 꼼치는 매년 4~7월이 제철인 터라 사계절 나는 아귀가 일정한 맛을 내기에 더 유리한 점도 있다.이곳 모리국수는 텁텁한 맛이 덜하고 꽤 얼큰하다. 칼칼한 맛도 살짝 치고 올라온다. 아귀살은 언제 먹어도 부드럽고 담백하다. 국수면과도 궁합이 꽤 괜찮다. 씹는 맛을 더해주는 콩나물과 미더덕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양도 푸짐한 편이라 가성비도 높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호미로 239-2. 운영시간 매일 오전 8시~오후 8시.▶김동석 영남대 겸임교수의 한줄평: 모리국수 한 가지만 취급하는 전문점. 동해에서 나는 신선한 해산물과 칼국수의 조합이 인상적이다. 주인장의 인심도 넉넉한 편. ▶평점(5점 만점) : 맛 ★★★★ 가성비 ★★★★★ 분위기 ★★★ 서비스 ★★★★★ 위생 ★★★★공동기획:포항시구룡포의 별미 중 하나인 '모리국수' 단일 메뉴만 파는 혜원식당. 주변 모리국수집에 비해 역사가 깊지 않지만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입소문이 난 곳이다.깔끔하게 정돈된 혜원식당 내부. 3개방과 메인 홀을 갖추고 있다.모리국수는 홍게와 멸치 등으로 우러낸 육수에 아귀와 칼국수를 넣고 끓인다.해물 매운탕과 비슷하지만 다른 맛을 내는 모리국수.
2020.10.28
[스토리텔링 2020] 포항 12경 둘레 맛 기행<21> 작은 식물원 같은 카페 '까멜리아 인 구룡포'
포항 12경의 마지막 명소는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다. 구룡포는 동해 최대 어업전진기지로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진출했던 지역이다. 당시 일본인 거주지역은 백화상점과 요리점, 여관 등이 들어서면서 구룡포의 중심상권 역할을 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일본인이 빠져나가면서 그들이 살던 거리도 점차 쇠퇴했고, 가옥도 몇 채 남지 않았다. 이에 포항시는 교육적인 차원에서 일본인이 거주하던 곳을 정비해 가옥거리로 만들었다. 당시 건물과 골목의 모습을 재현해 관광명소화한 것이다. 최근에는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 촬영지로 명성을 얻으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더욱 늘었다. '포항 12경 둘레 맛 기행' 마지막 편에서는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주변의 들러볼 만한 카페와 식당을 소개한다.구룡포는 포항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해안을 따라 곳곳에 비경이 숨어있고, 호미곶·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등 전국적인 명소도 많다.최근에는 일본인가옥거리가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 받으면서 관광지로서 스펙트럼이 더욱 넓어졌다. 구룡포수협과 근대역사관 사이에 위치한 일본인가옥거리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작은 골목 곳곳에 갈색 2층 목조 건물들이 밀접해 있어 일본의 오래된 거리 같은 인상을 준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관광객들로 북적이는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가 특히 인기가 있다.일본인가옥거리인 만큼 카페나 식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리모델링한 곳들이 눈에 띈다. 드라마 주인공이 일했던 가게 왼편에도 일본식 가옥 분위기로 연출한 '신상' 카페가 있다. 상호는 까멜리아 인 구룡포. '동백 꽃 필무렵' 애시청자였던 최원만 대표의 사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이 카페가 생기게 된 것도 드라마 덕분이다. 우연히 구룡포를 방문한 최 대표는 일본인가옥거리가 드라마의 주무대였던 것을 알고, 촬영지 탐방을 왔다가 이곳의 매력에 빠져 카페를 차리게 됐다. 최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카페 뒤편에 위치한 바위산이다. 카페를 만들 때도 최대한 바위산이 잘 보일 수 있게 꾸몄다. 2층은 물론 1층 내부에서도 바위산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바위산 앞쪽 창을 비스듬히 세워 비가 오는 날에 더욱 운치 있다. 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 뒤로 보이는 바위산의 모습은 꽤 매력적이다.이 카페의 모토는 '힐링'이다. 인테리어와 소품 모두 방문객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내부 공간을 수많은 식물로 채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휴양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열대식물이 주를 이룬다.알로카시아, 킹 벤자민, 관음죽, 몬스테라, 고무나무, 여인초 등 20여 종류의 100여 본이 카페에 둥지를 틀고 있다. 작은 식물원을 방불케 한다. 식물 크기도 상당해 배치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독특한 모양의 토분도 또 다른 감상 포인트다. 바닥도 독특하다. 일부러 하부에 깔린 고벽돌의 높이를 균일하게 맞추지 않았다.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2층으로 올라가면 좀 더 휴양지 분위기가 난다. 하얀색 천이 둘러진 야외 테이블과 곳곳에 자리 잡은 열대식물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분위기 '맛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바닥과 천장, 구조물 모두 목재를 사용한 점도 눈길을 끈다.커피와 음료, 디저트류도 기대 이상이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발리 펀치'. 레몬즙과 배, 히비스커스가 주재료로 상큼하면서 달달한 맛이 특징이다. 이름 그대로 트로피컬한 맛이 난다. 히말라야 소금 라테도 인기 메뉴다. 부드러운 라테에 적당히 짠맛이 더해져 풍미를 배가시킨다. 이곳에선 2013년 로스팅 월드 챔피언이 로스팅한 원두를 사용한다. 추출시간을 줄여 쓴맛은 잡고 부드러운 맛을 살렸다.크로플도 독특하다. 빵 위에 슈가파우더와 치즈가루가 뿌려져 나오고 바질페스토와 고구마페스토, 히비스커스를 조합한 소스가 곁들여 나온다. 이 외에도 동백이 빙수, 생과일주스, 망고패션프루트, 티라미수, 치즈케이크 등이 준비돼 있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길 133-1. 운영시간 매일 오전 10시~밤 9시.▶김동석 영남대 겸임교수의 한줄평: 수목원에 온 듯한 기분이 드는 카페. 실내외 모두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감성적 인테리어가 강점. 다양한 메뉴 구성도 돋보인다.▶평점(5점 만점) : 맛 ★★★★★ 가성비 ★★★★ 분위기 ★★★★★ 서비스 ★★★★★ 위생 ★★★★공동기획:포항시포항 남구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에 위치한 까멜리아 인 구룡포 카페. 외관은 일본 가옥의 분위기로 꾸며졌지만 실내는 푸르름 가득한 작은 식물원 같다.동남아 휴양지 분위기로 꾸며진 2층 야외 테이블.인기 메뉴인 크로플(왼쪽)과 히말라야 소금라테, 발리펀치(오른쪽).다양한 식물로 가득한 카페 1층 내부 모습.
[스토리텔링 2020] 포항 12경 둘레 맛 기행<20> 바다가 보이는 앞마당이 매력적인 카페 '일레 커피'
포항시 남구 장기면은 꽤 넓은 면적의 해안을 갖고 있다. 인접한 구룡포나 호미곶면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풍광 좋은 곳이 곳곳에 숨어있다. 모포항과 양포항을 비롯해 대진·신창간이해변도 둘러보기 좋은 곳 중 하나다. 특히 포항의 유일한 섬인 소봉대도 빼놓을 수 없다. 주변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많은 문인이 찾아와 심상을 글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구암 이정·도곡 이의현 등 조선 중후기 선비들의 작품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회재 이언적이 지은 칠언절구는 시비로 만들어져 섬 아래쪽에 세워져 있다.원래 섬이었지만 지금은 육지와 연결돼 있어 관광객은 물론 낚시꾼들도 많이 찾는다.소봉대 인근에는 지난해 문을 연 카페가 있다. 상호는 일레(ile). 프랑스어로 섬을 뜻한다. 소봉대섬에서 카페 이름을 따온 것이다.카페 앞마당이 인상적이다. 꽤 넓은 공간에 잔디와 넓적한 돌을 깔고 곳곳에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했다. 조용한 오후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야외에서 동해와 소봉대를 바라보면 절로 '힐링'이 될 것 같다. 인생샷을 남기기 위한 포토존도 있고, 바다로 향하는 데크길도 갖춰져 있다.마당에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는 팽나무도 운치를 더한다. 팽나무는 강과 육지의 경계인 자연제방이나 바다와 육지의 경계인 해안 충적 구릉지에서 주로 식생한다. 마을 어귀나 중심에 서 있는 당산나무로도 친숙한 수종이다.카페 건물은 모던하다. 무채색 외관이 시크함을 더한다. 형태는 1층 건물과 2층 건물이 서로 연결돼 있는 구조다. 내부로 들어서면 개방감이 느껴진다. 층고가 꽤 높은 데다 외벽 대부분을 커다란 창이 차지해서다. 바다는 전층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대신 안전상의 이유로 2층과 루프톱은 노키즈존으로 운영되고 있다.실내 인테리어도 간결하다. 검은색 천장에 벽은 흰색으로 마감해 깔끔하면서 세련미가 느껴진다.이곳의 인기 메뉴는 산딸기 모히토다. 장기의 특산물을 대표 메뉴로 구성해 카페의 정체성을 살렸다. 장기는 전국 최대 산딸기 산지다. 당도가 높고 품질이 좋아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매년 6월이면 축제를 여는데 카페에서도 협찬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대표 메뉴는 마카롱이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뚱카롱'에서 한발 더 나아가 캐릭터화했다. 오징어·불가사리·진주조개·고래 등 바다와 연관되는 모양으로 마카롱을 만들어 보는 재미까지 더했다. 마카롱 외에도 티라미수와 타르트, 케이크 종류가 준비돼 있다.커피류는 부드러운 맛을 추구한다. 라테는 산미가 조금 있는 반면 아메리카노는 좀 더 묵직하고 진한 맛을 낸다. 아메리카노의 경우 브라질과 과테말라, 콜롬비아 생두를 적절하게 블렌딩한 원두를 사용한다. 커피류 외에 페퍼민트, 히비스커스, 케모마일 등 차 종류와 생과일주스, 에이드류도 주문이 가능하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동해안로 2946. 매일 오전 10시~밤 10시.▶김동석 영남대 겸임교수의 한줄평: 조용한 해안가 언덕에 자리 잡은 카페.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 아기자기한 모양의 마카롱도 특색있다.▶평점(5점 만점) : 맛 ★★★★ 가성비 ★★★★ 분위기 ★★★★★ 서비스 ★★★★ 위생 ★★★★공동기획:포항시일레 커피 2층에서 바라본 전경. 분위기 있게 꾸며진 앞마당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대표 메뉴인 산딸기 모히토와 고래·문어 마카롱.진주조개 마카롱과 아메리카노.심플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일레커피 내부.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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