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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3> 김주영의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나옹왕사 스토리'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 있는 반송 유적지에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종조(宗祖) 태고보우(太古普愚), 지공무학(指空無學)과 더불어 3대화상(三大和尙)으로 추앙 받는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영각이 지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620여 년을 의연한 모습으로 견디다가 고사한 소나무 자리에는 반송을 다시 심고,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사적비를 세웠다. 나옹화상은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의 왕사(王師)로 책봉되었으며 조선 건국에 기여한 공이 큰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그런 고승이 바로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에서 태어났다. 살점을 도려낼 듯 매서운 삭풍이 가차없이 불어닥치는 1320년(고려말)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지금의 가산리 불미골이라는 궁벽한 산골 마을 변두리에 있는 초가삼간에 서슬 시퍼런 포졸들이 소매 바람을 일으키며 들이닥쳤다. 무슨 까닭 때문인지 눈에 핏발을 곤두세우고 집 안팎을 뒤지던 포졸들은 안방구석에 엎드려서 떨고 있던 아낙네를 발견하고 불문곡직 밖으로 끌어냈다. 욕설과 불호령과 발길질에 혼비백산 밖으로 끌려 나온 아낙네는 궁핍한 생활에 지쳐 남루한 몰골이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굳이 따지자면 영산 정씨(靈山 鄭氏)로 불리는 그 아낙네는 공교롭게도 출산을 바로 코앞에 둔 만삭이었다. 포졸들도 정씨가 만삭이란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전혀 사정을 두지 않고 아낙네를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그들에게는 잡아들이라는 관부의 명령만 지엄할 뿐이었다. 잡아들이지 못하면 그들 자신이 혹독한 처벌을 당할 것이었다. 그래서 포졸들은 끼니를 굶어 얼굴에 부황까지 있는 아낙네였지만 일말의 동정심도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은 걸음조차 임의롭게 떼어놓지 못하는 아낙네의 턱 밑에 종주먹을 들이대며 관아로 몰아 부쳤다. 불시에 들이닥친 변고인데 다가 마땅히 하소연 할 곳도 없었던 아낙네는 순순히 포졸들의 불호령을 따라 관아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 떠날 때부터 진통이 있었던 아낙네는 영해부 관아가 바로 코앞에 빤히 바라보이는 논두렁길 엎어져 뒹굴다가 사내아이를 출산하기에 이르렀다. 포졸들의 횡포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포졸들은 아낙네가 해산을 하거나 말거나 금방 태어난 아기를 개울가에 버려 둔 채 아낙네만 관아로 끌고 갔다. 그러나 부사가 끌려온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핏자국이 낭자한 것을 수상히 여기고 그 연유를 물었다. 포졸들로부터 내막을 알게된 부사는 분기 탱천하여 포졸들을 크게 꾸짖고, 아낙네를 아기 곁으로 빨리 돌려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부사의 은덕을 입어 압송에서 풀려난 아낙네는 허둥지둥 아기가 버려진 논두렁길로 달려갔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을 그 곳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모르지만, 수백 마리의 까치 떼들이 날개를 펴서 논두렁에 뒹구는 아기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까치소”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는 그 곳에서 태어난 아기는 훗날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는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1320-1376)이었다. 어머니 정씨 부인이 금빛의 새매 한 마리가 오색의 영롱한 알을 떨어뜨려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다음 잉태한 아기가 바로 나옹이었다. 그러나 잉태할 당시만 하더라도 나라에서 부과하는 부역이나 세금을 물지 못해 걸핏하면 관가로 끌려가서 온갖 수모와 치도곤을 치러내야 할 만큼 궁핍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태몽 때문일까. 출가하기 전까지 아씨(牙氏) 성을 가졌던 나옹은 자라나면서 공상이 남다르고 행동 또한 범상치 않았다. 일찍이 출가를 염두에 두었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20세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절친하게 지내던 이웃의 친구가 역병으로 숨지고 말았다. 인생의 무상함을 가슴 저리도록 느낀 그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러나 모두 고개만 가로 저을 뿐 속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이것이 나옹으로 하여금 입산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바로 그 길로 태연히 길을 나서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으로 가서 당대의 명필이었던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출가하고 말았다. 묘적암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점심 공양을 할 때였다. 개울가로 상추를 씻으러 났던 나옹이 오랜 시간이 흘러갔는데도 공양간으로 돌아오는 기색이 아니었다. 기다리다 진력난 한 스님이 나옹을 찾아 개울로 나가 보았다. 그런데 그때, 나옹은 상추 잎사귀를 물에 적셔 바구니에 담지 않고 허공에 뿌리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찾아 나섰던 스님이 물었는데, 나옹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상추를 씻다가 멀리 가야산 해인사를 바라보았더니 때마침 절이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기에 상추 줄기에 물을 묻혀 불을 끄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해괴하게만 여겼을 뿐 누구도 그 말을 믿었을 리 없었다. 그 뒤 해인사에서 객승이 찾아와 방부를 들었기에 무턱대고 며칠 전에 해인사에서 화재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절에 불이 일어나 몽땅 타버릴 뻔했는데, 맑았던 하늘에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져서 불이 꺼져 무사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날이 바로 나옹이 개울가에서 상추를 씻던 날이었다. 그가 출가의 길을 오를 때, 창수면 신기리(지금의 영덕군 창수면 사무소 옆)에 자신의 반송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 놓고 “이 나무가 자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곳에 꽂아둔 소나무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 잎이 나고 가지가 뻗어 낙락장송이 된 반송이 620여 년을 살다가 1965년경에 고사하였다. 묘적암에 출가한 이후 나옹은 1344년 회암사로 가서 밤낮으로 수행하여 크게 깨닫고, 1348년 중국의 대도 법원사에서 지공화상을 친견하고 한 해를 머물렀다. 그리고 1358년에 귀국하였다. 그후 신광사 주지로 있다가 구월산과 금강산에 머물렀고 1367년 청평사에 있을 때, 지공이 보낸 가사와 편지를 받았고, 그로부터 4년 후에 회암사에서 지공의 사리를 친견하였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여 다시 왕의 스승으로 추대되었으나, 불에 탔던 회암사를 중창하고 난 후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서기 1376년 5월 15일의 일이었고, 세수 57세, 법랍은 불과 38세 였다. 그 후 2010년 나옹왕사 현창 사업으로 출가지에 반송정이란 누각을 건립하고 그의 당호인 강월헌(江月軒)이란 정자를 건립하여 왕사의 위업을 재조명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옹왕사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는 이런 시구도 남아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김주영<소설가>연필일러스트=김성태 화백
2021.05.29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2> 김정현의 '신수라의 황금보검(下) - 임전무퇴, 그 영원한 우정
공주가 보이는 눈빛의 의미가 사뭇 심상했다. 은근한가 싶으면 그윽했고, 그윽한가 싶으면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다. 무엇이란 말인가? 신수라는 가슴이 다 먹먹할 지경이었지만 공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자비심 없는 마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부처의 법이 전해진지는 제법 되었지만 아직 불법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기에 공주의 처지로서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불법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연민의 마음 때문이었다. 끊이지 않는 전란 속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붉은 피를 흘리며 사라져가는 숫한 생명들. 사랑조차 지키지 못해 애태우고 눈물짓는 그 청춘들에는 자신도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공주를 사랑하는 이기에 더욱 앞장서야 하고, 공주이기에 기껏 말발굽이나 살펴줄 뿐 눈물조차 짓지 못하지 않는가. 그래서 살생유택의 계율은 더욱 가슴에 와 닿았고 세상 모든 전장에서 지켜지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황금보검을 품고 찾아온 저 사내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적을 멸하고 나면 그때는 평온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또한 부처의 뜻과 다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 겁니까?” 밝은 얼굴로 들어서는 유강의 모습에 공주도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닙니다. 신수라님이 벌써 몇 번이나 부처를 물으셨는데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허허, 왕께서 즉위하시고 삼년 째 되던 해에, 사람을 순장(殉葬)하는 장례법을 금지하라 명하신 그것도 같은 마음 아니셨습니까?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그것처럼, 세상만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그것이 시작일 테지요.” “그렇네요. 참으로 유 장군님은 명쾌하십니다.” 신수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어떤 신도 이루지 못한 영원한 숙제 아니던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면 혹시 모를까. 그런다 할지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유린당하는 것인 세상살이인데. 그래도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를 정겹게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차라리 숭고하다 여겨지는 것은 무슨 또 까닭인가.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당장 대전으로 드시라는 명이십니다!” 꼬꾸라질 듯 허둥거리며 들어선 전령의 숨이 턱에 찼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인가?” “적군이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우리 수비군이 있지만 워낙 중과부적이라 벌써 성을 내주었다 합니다.” “아……!” 장군보다 먼저 비명을 흘리며 사색이 되는 공주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래도 한 마디 위로마저 건네지 못하고 황급히 일어서는 유강을 따라 신수라도 발길을 서둘렀다.다급하게 소집된 증원군의 숫자를 더했지만 수적인 열세는 여전했다. 게다가 이미 패전으로 쫓겨 온 방비군의 사기마저 바닥이었다.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세 방향에는 적의 깃발이 촘촘했고, 한쪽 방향이 뚫려있기는 했지만 돌아서는 그 순간 적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될 게 뻔했다. “어쩔 것인가?” 신수라가 물었다. “우리가 먼저 돌진한다.” 유강은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느 순간에, 어디로?” “적장이 모습을 보이는 순간, 그곳으로 모두.” “그런 뒤에는?” “적장이 소수의 적을 피해 등을 돌리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무조건 돌진해 쓰러뜨려야지. 그럼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다.” “군사가 월등히 부족한 건?” “그건 일당백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허, 그게 작전인가?” “그럼 다른 계책이라도 있나?” 신수라는 어이가 막혔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유강은 등을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고 섰다. “형제여, 벗이여! 우리는 지금껏 칼날을 겨누지 않은 한 찾아오는 이 누구든 막지 않았다. 배신하지 않는 한 떠나는 자 역시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하는 한 신라의 국민이며, 신라국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한 지금껏 적을 죽임에서도 살생유택의 정신을 지켰다. 하지만 이제 저 무도한 적들은 우리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물러서면 형제며 벗인 신라국의 무고한 신민들이 적들에게 도륙 당한다. 그들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 설령 도륙 당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도륙 당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우리가 신민을 지키면 신라는 천년 왕국으로 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도 그저 한낱 생명이었을 뿐이다. 나는 앞장설 것이다! 지금 여기를 떠나는 자 신라의 국민이 아니니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다! 떠날 자는 떠나고, 남을 자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자!” 와――! 갑자기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때마침 적장의 깃발이 맞은편 중앙에 나타났다. 장검을 뽑아든 유강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우리들 부모와 형제를 위해, 사랑하는 님과 벗을 위해, 적장의 목을 베라! 돌격!” 전장의 흐름이 그렇게 변하는 것은 신수라는 아직 한번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죽음을 찾아 나서는 병사의 돌진은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듯하던 군사를 천 배로 늘린 듯 노도와 같았다. 졸지에 혼전이 된 전장에서 유강의 검은 햇빛의 춤을 추며 어느새 적장의 코앞까지 바싹 다가갔다. 신수라도 그런 유강의 뒤를 지키며 전신을 피로 물들였다. 마침내 적장의 칼과 맞닥트린 순간, 수십 개의 칼날이 한꺼번에 유강을 향해 짓쳐들었다. 신수라는 몸뚱이를 날려 유강을 향한 칼날을 받았다. “신수라!” 하지만 유강도 미처 다 막지 못한 칼날을 등에 꽂고 말았다. “어서 적장의 목부터 베라!” 신수라는 칼날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피를 받아 목을 적시며 검을 휘둘렀다. 가물거리는 시선 속에 유강을 칼날 아래 적장이 꼬꾸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적장이 쓰러졌다!”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한순간 전장이 숨을 죽인 듯 가라앉았다. 돌아선 유강은 쓰러진 신수라를 껴안았다. “안 된다! 눈을 감지마라! 너는 신라국 사람이 된지 이제 겨우 이태를 넘겼을 뿐이다!” “흐흐, 이처럼 죽을 수 있어서 기쁘다. 권력의 음모와 협잡으로 죽기는 억울해서 떠나왔는데, 마침내 사람답게 죽는구나. 살생은 가리되 전장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다니…… 참으로 신라는 천년왕국이 될 것이다.” “오, 신수라…… 적을 물리쳐라! 신수라의 원수를 갚아…….”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유강마저 신수라의 피로 물든 몸뚱이 위에 허리를 꺾었다. 장렬한 두 사람의 주검 앞에 남은 병사들은 두 눈에 핏빛 불을 켰다. 때맞춰 저 멀리에서 지원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왕께서 비통한 낯빛을 감추지 않은 채 입술을 뗐다. “유강과 신수라는 신라의 위대한 장군이었으며 아름다운 벗이었다. 그들의 충성과 신의와 우정이 영원히 함께하도록 두 사람을 합장하라! 또한 대장군의 예로써 장사지내도록 할 것이며, 그 분묘는 왕릉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잡아 영원히 왕실과 함께하도록 하라!” 공주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나섰다. “국왕이시여! 이미 영원한 신라의 사람인 신수라의 황금보검을 그의 허리춤에 두어 그의 그리운 옛사람들과 가문도 잊지 않도록 배려하소서!” “네 뜻이 옳다! 그리하여 언제라도 훗날의 사람들이 신라의 정신을 기리도록 하라!”신라 22대 왕 지증왕(智證王) 조(祖)에 있었을 이야기이다. 불교와 관련한 이차돈의 순교는 그 다음 23대 법흥왕 조에 있으며, ‘화랑’은 24대 진흥왕 조에 공식화 되었다. 신라가 천년동안 왕국을 유지한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발굴된 무덤에는 두 남자가 합장되어 있었으며 그 중 한 사람의 허리춤에는 황금보검이, 다른 사람에게는 장검(長劍)이 각각 여러 기물과 함께 부장되어 있었다. <끝> 김정현<소설가>'황금보검(黃金寶劍)'의 1973년 발굴 당시 모습. 미추왕릉지구(현 대릉원) 정화사업에 따라 경주시 황남동 계림로 공사 중에 출토됐다. 보검에 붙어 있던 의복 흔적과 부장품의 배치, 남아 있는 치아 등을 고려할 때 무덤의 주인은 성인 남자 2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신수라 스토리'는 이 황금보검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경주시청 제공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1> 김정현의 '신수라의 황금보검(中) - 살생유택의 갈등'
몇 달 후, 몸을 회복하고 어느 정도 말까지 익힌 씬스라로프는 왕을 알현했다. “이름이 씬스라로프라……. 그래, 원하는 것이 있는가?” 체격이 장대한 왕의 묵직한 음성에는 간단치 않은 담력이 배어있었다. 그래도 씬스라로프는 감히 두 눈을 들어 왕을 정시했다. “청하옵건데 저를 신라의 백성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신민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뭐라, 신라의 백성? ……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왕은 생각에 잠겼다. 씬스라로프는 왕이 떠나온 까닭을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까 고민했다. 이유야 어떻든 나라를 버린 사람이 미더울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마침내 왕이 입을 열었다. “좋다. 내 백성이 되겠다니 네게 신라의 이름을 내려주겠노라. 신수라(新守羅), 신라를 지킨다는 뜻의 그것이 지금부터 너의 이름이다.” 너무도 선선했다. 신수라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뒤 허리춤에 두른 황금보검을 꺼내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고맙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충성의 징표로 제 가문의 상징인 이 보검을 왕께 바치겠습니다.” 왕은 시종의 손에 의해 올려진 보검을 받아 유심히 살폈다.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눈부신 황금보검을 장식한 붉은 석류석과 유리는 미추(味鄒)이사금 시대에 초원을 건너 온 서역사람들이 가져왔다는던, 말로만 들었던 보석과 유리구슬에 비슷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까닭이 무엇이든 그 먼 곳에서 찾아온 사람이 스스로 이 나라의 백성이 되겠다는데 내칠 수는 없었다. 설령 그가 다시 배신하고 도망친다 할지라도 거두어주기를 청하는 데 껴안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그러움의 부족일 뿐이었다. 설령 그가 간자(間者)의 목적을 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때의 일! “훌륭한 보검이다. 그렇지만 이 보검이 네 약속보다 값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네가 스스로 바친다는 이 보검은 너를 거둔 공주에게 보관하도록 하겠다. 가문의 상징이라니, 언제든 네가 떠날 때는 공주에게서 찾아가도록 하거라.” “왕이시여, 저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 저는 신라 가문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뜻이 가상하구나. 그렇더라도 내 명을 가슴에 받아두어라. 또한 너는 용사였던 자인 듯하니 유강과 함께 이 나라를 지키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마침 해적들이 나라의 해안을 어지럽히고 있다. 유강은 신수라를 데리고 `출전하여 어민을 지키고 해안을 안정시키라!” 출전을 배웅하는 공주의 정성이 자못 지극했다. 특히 유강을 위해 공주는 직접 갑옷을 점검하고 마구간에 임해 말의 발굽을 살피기까지 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세간의 풍문이 사실인 듯싶었다. 신수라는 더욱 간절해지는 소피아를 향한 그리움에 고교한 달빛 아래를 거닐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공주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고 말 타기를 즐겼다. 금발의 긴 머리카락과 붉은 망토를 바람에 휘날리며 푸른 초원을 달릴 때, 그 정열의 아름다움이란…… 함께 나서겠다는 그녀였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고 기약할 수 없는 길에 그녀를 동행하지 못했다. 기어이 연못가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실 때 발걸음 소리도 없이 공주가 다가왔다. 그녀가 말없이 건네주던 하얀 손수건……. 유강 장군과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갑옷 속의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 신수라는 왠지 큰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까닭모를 질투심도 일렁거렸다.해안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해적은 멀리서 보기에도 왜소한 몸집이었다. 게다가 그 숫자도 일백이 될까 말까. 신수라는 혼자서 짓쳐 들어가도 단박에 물리칠 것 같았다. “곧장 쳐들어가자, 유강.” “안 된다. 밤이 되길 기다린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도륙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무고한 어민도 다친다. 또한 전장에서는 군령이 엄하다. 복종하라!” 어둠이 깃들면 아군의 병사도 위험해진다. 전광석화의 돌진이면 약간의 어민 피해는 있겠지만 손쉽게 완승을 거둘 텐데. 희생 없는 전투라니…… 하지만 어쩌랴, 동서를 불문하고 군령은 엄정한 것이니. 마침내 해가 지고 어둠이 깃들고 해적의 진영에 화톳불이 밝혀지자 유강은 은밀한 진군을 명했다. 그리고 적진의 코앞에 이르자 장검을 뽑아든 그가 날듯이 앞장섰다. “공격하라!” 고함 소리에 기함한 해적들이 재빨리 불을 끄며 방어의 칼을 휘둘렀지만 전투라 할 것도 없었다. 워낙 은밀한 기습인데다 수적으로도 아군이 월등했다. 오히려 어민들을 보호하려는 아군 병사끼리 어둠 속의 혼란으로 부딪혀 발생한 피해가 전부라 할 정도였다. 지리멸렬, 작달막한 키에 종종걸음으로 구르듯 해안에 정박시켜둔 배를 향해 도주하는 적을 신수라는 무지막지하게 도륙하며 뒤쫓았다. 장검을 휘두를 때마다 물씬 물씬 풍겨지는 피비린내에 그는 순간 광기마저 내보였다. 앞선 두 명의 등 뒤를 공중으로 껑충 뛰어 양발차기로 꼬꾸라트린 신수라가 장검을 곧추세워 내리꽂으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유강의 칼등이 신수라의 칼날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무슨 짓인가? 적이다!” “불필요한 살생이다! 차라리 사로잡아라!.” “뭐라고? 이건 전투다! 적을 살려주면 우리가 떠난 뒤 다시 공격해 올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사로잡으라는 거다.” “사로잡아서 노예로 삼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교화시켜 원하면 백성으로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낼 것이다.” “뭐,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복종하라!” 그리고 보니 여기저기 다시 밝혀지는 화톳불 옆에는 등 뒤로 양손을 묶인 해적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신수라는 기가 막혔다. 노예로 삼겠다면 또 모르겠지만 교화라니? 해적을, 적을 어떻게 교화한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전투와 전쟁에서는 끝까지 쫓아가 적의 씨를 말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은 놈들이 더욱 복수심에 불타 다시 쳐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승리한 아군과 패배한 적군의 사기가 뒤바뀌는 수도 있었다. 서쪽 땅에서 수없는 전쟁을 치르며 배운 것이었고, 전장에서 직접 확인한 생생한 교훈이었다. 그것은 씨를 말려 멸종시켜도 적은 언제든 새로 생기는 법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살생유택이다. 까닭 없는 죽임은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죄악이다.” “살려준 적이 다시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라도 있다는 것이냐?” “아무리 죽여도 적은 언제나 있다. 한번 죽여서 끝날 것이라면 세상에서 전쟁은 진즉 사라졌을 것이다.” 결과는 같은데 생각하는 방법은 정반대였다. 신수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을 치러도 자신이 더 많은 전쟁을 치렀을 것이었다. “미쳤구나. 아니면 죽임이 겁나기라도 하는 것이냐?” “말을 삼가라! 우리 신라군을 모욕하는 언사는 결코 누구라도 용납하지 못한다!” 정색한 유강의 칼날이 어느 틈에 목 끝에 서늘하게 와 닿았다. 신수라도 지지 않고 칼자루를 치켜드려는 순간 등 뒤에서 창끝의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신라의 백성으로 감히 항명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벌써 배신인가?” “뭐, 배신! 모욕이다! 차라리 죽여라!” 칼날에 제 목을 들이미는 신수라의 기세에 유강은 칼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눈짓을 받은 병사도 등 뒤의 창을 바로 세웠다. “모욕을 아는 사람은 신라국의 백성이다. 항명은 이번 한번만 눈 감는다. 돌아가면 공주님께 부처를 물어보아라.” 부처? 그건 또 누구란 말인가. 기이한 것은 병사들 누구도 더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금세 신수라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포로가 된 해적들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 <계속> 김정현<소설가>그림=김영규 서양화가(한려대 미술학과 교수)위에서부터 황금보검 주인 씬스라로프(신라명 신수라), 신라공주, 유강 장군.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0> 김정현의 '신수라의 황금보검(上) - 초원을 건너 온 사나이'
(1973년 5월, 경북 경주시 계림로 도로공사 중 붉은빛 석류석 등으로 장식된 화려한 황금보검이 부장된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이야기의 탄생이다) 이제 떠나온 곳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문득 우유빛 대리석으로 쌓은 거대한 성의 둥근 첨탑이 구름 위로 뿌옇게 솟아오르다가 사라진다. 그 성 안 돔형 천장에는 신과 전사와 사랑의 그림들이 황금색과 붉고 푸른 안료로 채색되어 있었던가. 왕의 황금 술잔, 금과 은 ․ 청동과 주석으로 빚어 온갖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한 눈부신 조각과 기물들…… 다 무슨 소용이랴. 마침내는 검붉은 죽음의 핏빛으로 얼룩져버린 것을. 몸을 피하라고, 떠나라고, 오직 동쪽으로, 끝아 보이지 않는 바다가 나타나는 곳으로. 길은 멀지만 의심과 죽임이 아니라 관용과 포용이 있는 곳으로. 날마다 새롭고 사방을 망라하는 곳으로. 금(今)이나 간(干)이 통치하는 곳으로. 백년도 전에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다녀왔고 아버지의 아버지와 그 형제와 친구들이 찾아간 곳으로…… 어머니는 그것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얼어붙은 겨울 강을 건너고, 해바라기 줄기만 빼곡히 들어차 더욱 을씨년스러운 벌판의 눈보라를 헤쳐 왔다. 구름은 중턱에 걸리고, 하늘을 나는 새마저 날갯짓을 쉬어가는 아득한 산을 넘을 때는 차라리 되돌아가 죽임의 칼을 휘두르다 피를 쏟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산을 넘으니 과연 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제 곧 바다가 나오겠거니 말을 달렸다. 하지만 초원의 끝에는 타는 햇살 아래 죽음의 흔적이 여기저기 뼈 무더기로 남아있는 모래와 자갈의 사막이 나왔다. 그 사막을 건너면 한동안 초원이 이어지다가 다시 끝 모를 황토 벌판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분노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제(帝)의 병사, 왕의 신하, 칸(Khan:汗)의 부하 등등 제각각의 사람들. 마주치면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부터 치켜뜨고 주변을 맴돌다가 황금보검과 친구들의 보석을 보는 순간 단박에 칼을 빼어들고 짓쳐드는……. 친구들은 그렇게 하나 둘 스러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바다가 나타났을 때, 또 다른 공격자 무리와 마주쳤고 마지막 남은 친구마저 눈을 감아야 했다. 소피아의 오빠이자 혈육과도 같은 친구 퀸투스. 부디 서로를 지켜주라고 그녀가 애원의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는데. 아! 내 사랑 소피아, 그리고 어머니……. “정신이 드시려나 보구나. 어서 가서 유 장군님을 모셔오너라.” 여자였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분명 여자의 음성이었다. 씬스라로프는 화들짝 눈을 떴지만 몸뚱이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기척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복색에 흰 피부와 큰 눈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아직 움직이기에는 무리입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곧 그쪽 말을 잘하는 분이 오실 겁니다.” 뜻밖에도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씬스라로프, 그들의 언어였다. 여인이 조금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까마귀가 구름처럼 모여 있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 타고 오신 듯한 말은 이미 뼈만 남아있었고요. 뼈나마 거두어서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아, 나의 애마 블라키! 씬스라로프의 눈가에 옅은 이슬이 비쳤다. 그랬다. 벌써 수년 전부터 자신과 일상을 함께했던 애마 블라키는 얼마인지도 모를 그 먼 길을 달려오는 동안 단 하루도 발굽을 쉬지 못했다. 퀸투스가 화살 맞은 말 등에서 떨어졌을 때는 두 앞발을 치켜들며 머뭇거렸지만, 그마저 칼날에 피를 내뿜자 되돌아가라는 채찍질에도 씬스라로프를 등에 실은 채 무작정 남쪽을 향해 죽을힘으로 달렸다. 칼에 베인 등짝을 흐르던 피가 말라가고, 화살 박힌 허벅지가 무감각해질 무렵 블라키의 숨결도 가물거렸다. 하늘에서 검은 까마귀가 떼를 지어 쫓아오고 있음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두 눈이 감기는 데 이제 다시는 뜨지 못하겠구나 생각할 때 블라키는 주저앉고 자신은 의식의 끈을 놓았던가……. “그가 깨어났다고요, 공주님?” 이번에는 남자의 음성이었다. 씬스라로프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예, 장군님. 어서 들어오세요.” 시녀를 따라 들어서는 사내는 햇볕에 잘 그을린 듯한 구리빛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자신과는 또래로 보였다. 얼핏 선한 듯 보이지만 가슴이 서늘하도록 깊은 눈빛은 강하고도 인상적이었다. 사내의 허리춤에 찬 칼을 보자 씬스라로프는 비로소 자신의 황금보검이 생각났다. 힘겹게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 그를 보고 사내가 선한 웃음을 머금었다. “보검을 찾으시오?” 유창한 자신들의 말이었다. 그래도 씬스라로프는 허리춤만 더듬거렸다. “공주님, 보검을 찾고 있습니다.” “예.”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침대 건너편 장(欌) 문을 열더니 황금보검을 꺼내 가져오자 사내는 그 보검을 받아 씬스라로프의 허리춤에 내려놓았다. “치료를 받는 사람인지라 잠시 보관해두었던 거요. 내가 하는 말은 알아듣소?” 씬스라로프는 대답 대신 두 눈을 끔뻑였다. 말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경계심이 풀어지지 않아서였다. “허허, 마음을 놓아도 괜찮소. 우리에게는 남쪽과 동쪽 바다를 통해서도 손님들이 찾아오지만 가끔은 북쪽에서 초원을 달려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소. 물론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친구를 찾아가기도 하고요. 백여 년 전쯤에 당신의 보검을 장식한 것과 비슷한 보석들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소. 일부는 돌아갔고, 우리 땅에 남아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소. 그들에게서 말을 배운 사람이 있어 내게도 전해진 거요.” “이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오?” 씬스라로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마 우리 사정을 들었다 할지라도 나라 이름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거요. 우리도 최근에 들어서야 그동안 사라(斯羅)니 사로(斯盧)니 신라니 하던 것을 신라(新羅)라 하기로 확정한 터요.” “그게 무슨 뜻이오?” “신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오. 특히 라의 의미는 그동안 우리가 사해만방의 어떤 이들이든지 우리를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환영하고 서로 교류하기를 즐겼기에, 그 뜻이오.” “이 나라의 통치자는 무엇이라 부르오?” “이전에는 이사금(尼師今)이나 마립간(麻立干)으로도 불렀소만 이번에 국호를 정하며 국왕이라 부르기로 결정했소.” 씬스라로프는 가슴이 벅찼다. 바다가 보이고도 먼저 칼을 겨누고 보검과 보석을 탈취하려는 자들만 보았던 터인지라 어머니가 들은 이야기가 모두 헛된 것인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비로소 찾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세상 끝 가장 동쪽의 남쪽 땅에 이처럼 가슴 열린 사람들의 나라가 있게 된 것인지……. “염치없지만 당신들 나라의 국왕을 뵙고 싶소.” “당연히 만나게 될 것이니 우선 몸부터 추스르시오. 그런데 염치없다는 게 무슨 이야기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소. 처음부터 많은 것을 갖고 출발하지도 못했지만 오는 도중 마주치는 대부분의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모두 잃어버렸소.” 부끄러운 기색의 그의 말에 사내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손님이 찾아왔으면 온 손님이 중요한 것이지 그까짓 물건이야 아무리 진귀한 보화라도 뭐 그리 대수겠소. 심려치 마시오.” 이상한 나라였다. 아니, 그래서 아버지의 아버지 일행이 이곳을 찾아 떠났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복색이나 장식물은 특별히 아름답고 품위가 있었다. 탐욕 없이도 누릴 것은 누리는 삶이라니, 새삼 기이하게 생각됐다. “나는 유강(柔剛)이라 하오. 장군의 직분으로 국왕을 보필하고 있소. 그리고 이분은 이 나라 공주님이시오. 당신을 구한 분이시니 은혜를 잊지 마시오. 특히 말 등에 당신을 싣고 오다가 말이 지쳐 꽤 먼 길을 걷기까지 하셨소. 혼자 나다니기를 좋아하시거든요.” “아니 유 장군님은 무슨 그런 말씀까지…….” 수줍음에 낯빛을 붉히는 여인의 자태가 가슴을 뛰게 했다. 씬스라로프는 소피아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올리며 두 눈을 감았다. <계속> 김정현<소설가>1973년 경북 경주시 계림로 도로공사 중 발굴된 황금보검. 경주시청 제공그림=김영규 서양화가(한려대 미술학과 교수)
2021.05.28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9> 이상국의 '인현왕후 살린 불영사 스님의 夢行記'
여자들의 전쟁이라고 할 만했다. 조선 숙종은 첫 왕비인 인경왕후가 죽고나서 인현왕후 민씨를 맞았다. 하지만 왕은 나인이었던 장옥정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장옥정은 그 유명한 장희빈이 되는 여인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당시 정치세력인 서인계열과 남인계열을 등 뒤에 두고 있었다. 두 여인을 간판으로 내세운 두 정파는 살벌한 권력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민씨는 아기를 낳지 못했고 장씨는 아들 균을 낳았다. 숙종은 장씨를 깊이 사랑했기에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균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한다. 서인의 대표격이었던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서 이를 비판했다. 남인은 다시 송시열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남인의 상소를 받아들여 송시열을 귀양보냈다가 사약을 내린다. 이것이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1라운드 대결인 기사환국(1680년)으로, 인현왕후는 폐출되어 서인이 되고 장희빈은 왕후가 된다. ‘인현왕후전’의 주인공으로 후덕한 국모(國母)로 칭송받았던 민씨가 숙종에게 미움을 받게된 까닭은 뭘까. 복합적인 정황이 있겠지만 인현왕후가 어느 날 털어놓은 꿈 얘기도 한 몫 했으리라. “마마, 제가 꿈을 꾸었는데 선왕(先王)께서 나타나 장희빈이 전생에 여우였다고 말해주더이다. 마마가 사냥을 갔다가 여우를 쏘아죽였기에 원한을 갚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더군요. 남인계의 나쁜 무리와 어울리게 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장희빈을 험담하기 위해 부친까지 끌어들이다니...숙종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기사환국 때 쫓겨난 영의정 김수항은 유배지 진도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의 세 아들(창집, 창협, 창흡)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다. 1691년 이른 봄날 율곡 이후의 최대 유학자로 꼽히는 김창흡(1653-1722)은 울진 불영계곡에 들러 시 한 수를 읊었다.일계설수등은폭(一溪雪水謄銀瀑) 이월춘운막취미(二月春雲幕翠微) 향효보수원월거(向曉步隨圓月去) 좌망대상담망기(坐忘臺上淡忘機)(한 줄기 계곡에 눈녹은 찬물은 은빛 폭포로 솟아오르고 / 이월의 봄구름은 천막처럼 둘러쳐 산안개가 되었네 / 흘러가는 둥근달 새벽까지 따라 걸어 / 좌망대(세상일을 내려놓는 참선을 하는 누대)에 올라 담담히 망각에 드네)“평생에 들어본 바 없는 절창이십니다.” 환한 새벽달빛에 취한 김창흡이 좌망대에서 만난 노승은 양성법사(1622-1696)였다. 38세의 유학자는 잠을 못이뤄 계곡 길을 걷고 있었고, 69세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마치고 달빛을 따라 걷다가 서로 만난 것이다. “어제 저녁 소승은 염불삼매에 들어 시를 한 수 읊었는데, 새벽에 귀인을 만나는 인연을 지으려 그랬던가 봅니다.” “그러셨소이까? 어떤 시인지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물론이지요.”삼라불경일이혼(森羅佛經日已昏) 송풍나월엄시문(松風羅月掩柴門) 유거자득유거취(幽居自得幽居趣) 일경청한몽불번(一境淸閑夢不煩)삼라만상이 부처 말씀인데 해는 이미 노을 /솔바람에 비단달 뜨니 사립문을 닫네 / 숨어 살며 스스로 얻는 것은 숨어 사는 즐거움 / 오로지 맑고 한가로운 경지에 드니 잠자도 꿈을 꾸지 않네양성법사는 법명은 혜능(慧能)이며 울진 원남연 금매리 태생이다. 신선이 품에 드는 꿈을 꾼 뒤 잉태를 했다 하여 속명을 몽선(夢仙)이라 했다. 12세때 불영사에서 수계(受戒)를 한 뒤 8년간 불경을 통달하고 척조(尺照)대사에게서 배워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이후 두류산,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니 사람들은 그를 도인이라 우러렀다. 어느 날 문득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다가 “도(道)는 어디에 있는가? 부질없이 떠돌아 무엇을 찾겠는가? 근본을 찾아 바탕을 궁구하는 것만 못하구나”라고 말하며 불영사로 돌아왔다. 김창흡을 만난 것은 그때였다.창흡은 양성법사에게 당쟁으로 어지러운 정치 현실을 설명하며 개탄했다. 특히 인현왕후가 희빈의 계략에 내몰린 일은 대의가 땅에 떨어진 참극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양성법사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실은, 소승이 왕후에게 큰 죄를 지은 일이 있습니다.” 창흡은 의아해서 물었다. “깊은 산중을 떠도는 승려가 어떻게 왕후와 관련이 있을 수 있었소?” 법사는 대답했다. “저는 원래 천축산의 신령으로 인간이 되고싶어 태몽 속으로 들어왔사옵니다. 오랫 동안 심산유곡에서 수행하여 제가 읊어드린 시에 있는 몽불번(夢不煩, 꿈을 꾸지 않음)의 경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스스로 꿈을 꾸지 않는 대신 타인의 꿈 속에 들어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몽선(夢仙)이 된 것입니다. 몇 해 전 인현왕후의 꿈에 들어가 현종(숙종의 부친)으로 환신(換身)하여 장희빈이 예전에 짐승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왕비가 이 꿈을 왕에게 고하자, 숙종은 애인을 참소(讒訴)하는 질투심으로만 받아들여 일을 더욱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왕후는 내쫓기고 말았습지요.” 3년 뒤인 1694년. 인현왕후가 머물러 있던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 폐서인이 된 민씨는 외할아버지 송준길(1606-1672)의 시를 기억해내 읊조렸다.천수오유감(天數吾猶憾) 인모혹후군(人謀或後君) 고신일국루(孤臣一掬淚) 쇄향북귀운(灑向北歸雲)하늘의 운수가 내겐 근심 뿐이어서 / 사람은 중상모략하고 임금은 뒷전으로 내쳤네 / 외로운 신하가 움켜쥔 눈물 한 줌 / 북쪽 임금 계신 곳을 향해 던져 뿌립니다외할아버지의 심경이 지금 나의 심경과 어찌 이리도 같은가. 왕은 아직 기별도 없다. 장씨 무리들이 나를 죽이라고 왕에게 날마다 속살거리고 있을 것이다. 누추하게 생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어 깨끗해지리라. 인현왕후는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문득 시 한편을 더 읽는다. 유명한 ‘기몽(記夢, 꿈을 기록함)’이란 시이다. 평생흠앙퇴도옹(平生欽仰退陶翁) 몰세정신상감통(沒世精神尙感通) 차야몽중승회어(此夜夢中承晦語) 각래산월만창롱(覺來山月滿窓瓏)평생 우러른 것은 퇴계선생 / 세상 떠나셔도 정신은 여전히 느끼고 통하니 / 오늘밤 꿈 속에 주자말씀 전해들었네 / 느낌이 오니 산의 달빛이 창문 가득히 환하네꿈 속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외할아버지처럼 나 또한 꿈 속에서 왕을 한번 더 만나보고 죽으리라. 민씨는 살풋 잠이 든다. 꿈 속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마마의 감수(憾數, 슬픈 운수)는 곧 끝이 나옵니다. 부디 은인자중하시어 옥체를 귀히 여기소서. 사흘만 더 기다리면 기다리던 소식이 올 것입니다.” “노인은 누구시오.” “저는 양성 혜능이라 하옵니다.” 사흘 뒤, 민씨는 입궐하라는 전갈을 받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여자들의 전쟁 2라운드. 왕후가 된 장씨는 인현왕후의 화근을 없애려고 확인사살에 들어간다. 폐비 민씨가 복위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런 상소를 올리게 한다. 숙종은 안 그래도 민씨에게 너무 가혹하게 한 것에 대해 가책이 있었는데, 장씨 쪽의 행위를 보니 욱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는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의 역할도 있다. 무수리 출신인 그녀는 강력한 민씨 우군(友軍)이었다. 그녀는 장희빈을 견제하면서 폐비의 억울함을 왕에게 설명했다. 마음이 바뀐 숙종은 남인인 우의정 민암을 죽이고 서인에게 재집권하게 하는 조치를 내린다. 이른 바 갑술환국(1694년)이다. 이때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희빈(후궁)으로 강등된다. 인현왕후는 꿈 때문에 곤역을 치른 적이 있었는지라, 몇 해 동안 자신의 복위를 알려준 예언몽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자진(自盡)까지 결심한 그녀에게 삶을 가져다준 고마운 백발선사를 잊을 수 없었다. 1698년 왕후는 전국의 사찰에 명을 내려 양성 혜능이라는 승려를 찾아 그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 궁궐로 보내도록 했다. 그녀는 울진 불영사에 있는 양성법사임을 알아냈다. 그는 이미 2년 전 입적을 했다. 왕후는 불영사 사방 10리 안에 있는 산과 전답을 사찰에 시주했다. 꿈에서 꿈으로 이어진 인연이 오롯하고 묘하다. 1867년 4월 승려 유찰은 불영사에 있는 인현왕후 원당의 상량문을 쓴다. “본사(불영사)의 산천초목과 승려들이 두루 성후(聖后, 인현왕후)의 은덕을 입어서 지금까지 지탱해오고 있다. 마음 속에서 그리워한 것이 몇 년이며 잊을까 조바심을 낸 것은 또 얼마 만이겠는가. 감히 좋은 해 좋은 달 좋은 날을 가려 절의 서쪽 깨끗한 곳에 원당을 건축하고 억만년 동안 성덕이 무강하고 나라가 평안하기를 봉축한다.”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 ◆스토리 메모양성법사 혜능에 관한 기록은 불영사 남동쪽에 있는 부도 비문에 나와 있다. 울진군지와 부도 안내간판에 나와있는 생몰연도(1425-1516)는 모두 잘못이다. 비문에 적힌 입적 연도인 병자년은 1696년이다. 비문을 지은 최석정(1646-1715)과 비문을 중간에서 청탁한 양성법사의 지기(知己)인 홍만종(자는 宇海, 1643-1725)의 생존 기간을 고려하면 그렇다. 불영사 의상전 상량문에서 ‘인현왕후원당’이라는 묵서명이 나와, 이 꿈의 인연이 전혀 근거없는 일이 아님을 확인해주었다. 김창흡이 불영사에 머무른 때와 양성법사가 이 절에 돌아온 때가 비슷한 것은 사실이나 두 사람은 만남은 상상의 산물이다. 불영사는 천축산 한 자락과 광천(光川)이 서로 휘감아도는 산태극 수태극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의상대사가 연못 속에 있는 용을 쫓아내고 지었다 한다. 서쪽 산에 있는 부처바위가 연못에 비치니 그것이 불영(佛影)이다. 여름이면 연못 속 어리연꽃, 가을이면 피단풍이 서럽도록 아름답다. 인현황후의 꿈 속을 넘나든 ‘몽선(夢仙)’이 거닐던 마당엔 그림자 없는 무영탑이 소슬하게 섰다.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경북 울진군 서면 하원리 불영사 전경. 영남일보 DB불영사 의상전에 있는 인현왕후 인물화.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8> 이상국의 '淸황제를 죽이러 가다, 울진 장대룡장군'
1644년 여름, 불영계곡을 건너는 다리 앞에서 말을 탄 사내 하나가 큰 소리로 시를 읊었다. 삼척용천만권서(三尺龍泉萬卷書) 황천생아의하여(皇天生我意何如) 산동재상산서장(山東宰相山西將) 피장부혜아장부(彼丈夫兮我丈夫) (석자의 용천검은 만권의 책이로다/하느님이 나를 만드셨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산동에는 재상이 있고 산서에는 장수가 있도다/저들이 대장부라면 어찌 나는 대장부가 아닐소냐)그때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니 계곡의 바위 끝에 한 스님이 서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판에 후리후리한 키, 백팔 염주를 목에 걸고 해진 가사(袈裟)에 찢어진 장삼을 입었다. "뉘기에 감히 내 뜻을 비웃는가?" "그대의 뜻을 비웃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 궁벽한 곳에서 임경업장군의 대의(大意)를 접하니 감개가 무량하여 나도 몰래 웃음이 터진 것이옵니다." 말을 타고 있던 사내는 거구에 푸른 눈썹을 지녔다. 이름은 장대룡(張大龍, 1592-1645). 그는 고려 때 울진부원군을 지낸 장말익의 19대손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그 해 봄에 울진읍 호월리(옛 지명은 무월(舞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태몽에 큰 용 한 마리가 몽천(蒙泉, 울진군 원남면 금매리 산밑에서 솟는 샘물)에서 솟아올라 품으로 들어와 안기더니 함께 하늘로 올라가 큰 불을 뿜어냈기에 이름을 대룡이라 했다. 어릴 때부터 덩치가 컸던 그는 '장군소년'으로 불렸는데 어느 날 그의 집 앞 연못에 검은 말 한 마리가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7세 소년은 달려들어가 그 말을 구해냈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 위에 올라타서 들판을 내달렸다. 이 지역 이름이 마평(馬坪)으로 불리는 건 그 때문이다. 그와 임경업장군은 인연이 깊다. 1618년 두 사람은 똑같이 무과에 급제를 한다. 1633년 청북방어사에 임명된 임경업은 별장(別將)으로 장대룡을 불렀다. 3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은 국경의 백마산성에서 침입해올 여진족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후금(後金, 이후에 淸) 선발대였던 마부태(馬夫太)는 백마산성의 임경업부대를 우회하여 한양으로 내달린다. 1637년 정월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화의를 했을 때 두 사람은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2월에 청나라는 조선에 병력 동원을 요청한다. 이때 임경업은 수군장에 임명되어 명나라를 치러 간다. 이때 장대룡은 말한다. "저는 어제의 동지인 명을 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임경업은 그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나 또한 그러하네. 하지만 나라의 명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만 시늉만 할 터이니 나를 도와주게." 대룡은 고개를 저었다. "장수가 되어 시늉만 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어찌 장부의 도리이겠습니까. 저는 고향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울진으로 돌아온 그는 날마다 통음하다 불영계곡에서 개남(介南)을 만났다.개남은 명나라 사람이었는데, 명나라가 풍전등화에 이르자 출가하여 천리를 방황하다가 조선에까지 들어왔다. 그가 임경업을 만난 것은 1643년 봄이었다. 임장군은 끝까지 대명(對明)의리를 지키며 명나라와의 싸움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청나라에 이같은 사실이 알려졌다. 조선관군은 임경업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넘겼다.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 부근에서 압송 중이던 임경업은 밤을 틈타 도주했다. 그는 몰래 들여온 승복을 갈아입고 양주 회암사로 들어왔다. 개남은 이때 '소명'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절치부심하는 임경업장군을 보살폈고 그와 함께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망명하는 길에 동행했다. 중국말을 잘 하는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명은 상선으로 가장한 배 위에서 임장군의 칼에 새겨진 검명시(劍銘詩)를 보았다. 임경업은 명나라 황종예 군문의 마등고 휘하에 들어가 평로장군이 되어 4만의 병사를 이끄는 장수가 된다. 임장군은 모신 소명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 불영사에 머물렀다. 인연은 이렇게 다시 엮이는가. 소명은 법명을 속명(俗名)이던 개남으로 바꾸고 정진하던 중에, 장대룡을 만난 것이다. "장군의 얼굴을 보니 화기(火氣)가 가득하오." "허허. 하긴 내가 태어날 때 어머니 꿈에 불을 뿜는 용이 승천을 했다 하오." "태생적으로 지닌 화기에 풀지못한 원한의 화기까지 뒤섞였으니 온 몸이 불붙을 것 같소이다. 명나라 명의(名醫)였던 장개빈(張介賓)은 '경악전서'라는 책을 남겼소이다. 거기엔 화증(火症, 홧병)이 생겨나는 비밀에 대해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지요. 소승이 그걸 조금 읽었기에 장군의 불붙는 속을 달랠 처방을 좀 해드릴까 하오." "고마운 말씀이오. 하지만 나라가 이꼴인데 나 혼자 몸이 좋아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차라리 이 몸의 화기로 오랑캐를 모두 태워 없애고 싶은 심정이외다." "소승 또한 국망에 이른 나라의 사람으로 장군의 그 심정을 왜 모르겠습니까?" "조선이 건국하던 무렵 여진의 우두머리 퉁밍거티무르는 한양으로 와서 태조에게 토산물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렸소. 조선은 그에게 상만호(上萬戶)라는 벼슬을 주었소. 퉁밍거티무르의 직계 후손이 바로 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탈한 태조 누르하치가 아니오? 명나라의 승려이시니, 오랑캐에 대한 적의가 나보다 덜하지 않을 듯 하오." "그러하옵니다. 조선과 명의 의리는 참으로 귀한 것인데, 오랑캐의 힘에 밀려 서로 싸우고 있는 형국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 명이 저렇게 쇠락한 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다가, 여진의 발호를 제압하지 못한데도 있었습니다. 임경업장군이 그토록 의리를 중시한 까닭도 사대(事大)적 망집이 아니라 국가간의 신뢰를 중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임장군은 시호시래부재래 일생일사도재연(時呼時來否再來 一生一死都在筵, 때를 부른다 때는 한번 오면 다시 오지 않느니/ 한번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이 자리로다)이라 하였습니다. 나, 장대룡. 이 몸에 가득찬 화기를 불태워 누르하치, 홍타이지에 이어 황제에 오른 순치제를 죽이려 하오." "소승, 청나라 수도 심양(瀋陽)으로 떠나는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주막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두 사람은 문득 손을 맞잡으며 의기투합했다. 1644년 추위가 살갗에 파고드는 겨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끼던 말 흑비(黑飛)를 꺼내서 덜미를 어루만졌다. "이제 우리가 오랑캐의 심장에 가서 불이 되어 죽으리라." 흑비가 마치 그 말을 알아듣는듯 큰 소리로 울었다. 기다리던 개남이 왔다. "자, 이제 떠납시다." 흑비의 등에 무기를 싣고 장대룡이 올라탔다. 불영사에 들러 장대룡은 승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서 심양까지 강행군을 했다. 개남은 그를 황제가 사는 궁궐까지 안내했다. 그날 밤 대룡은 궁궐에 잠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궁궐에서 불꽃이 치솟거든 흑비와 함께 고향에 돌아가 이것을 전하라.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불꽃과 함께 달려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그러면서 그는 속옷 하나를 벗어주었다.장대룡은 황제가 사는 궁전의 위치를 파악했다. 경계가 삼엄하기 이를데 없었다. 몇 명의 병사를 죽였는지 모른다. 마침내 황제의 침소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는 칼을 뽑아 들고 조심조심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우선 옆 건물에 불을 질러 소란한 틈을 타서 침소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가 목표한 곳으로 가기도 전에 수백 명이 그를 에워쌌다. 마치 풀을 베듯 베어넘겼으나 역부족이었다. "비켜라, 이놈들아. 조선을 능욕한 너희들의 황제를 나 장대룡이 심판하러 왔다. 나는 너희들의 궁궐 안에서 불과 함께 죽을 것이니 나와 함께 죽을 자는 따라 들어오라." 그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궁전으로 뛰어들었다. 이 일에 관한 기록은 중국정사 조선조 4편(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에 짧게 전한다. "순치 2년(1645, 인조23년) 5월, 임경업의 별장 장대룡이란 자가 궁중에 잠입하여 폭역(暴逆)을 감행하다 체포되어 육시(戮屍)로 벌하고 조선에 이를 힐책하다." 한편 궁궐에서 불이 치솟자 밖에서 지키던 개남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는 흑비를 타고 달리며 뒤로 고개를 돌려 불타는 궁궐을 보았다. 개남은 불꽃과 함께 달려오겠다던 장대룡의 말이 생각나 소리쳤다. "장군! 어디에 계십니까?" 그때 궁궐의 황색 연기기둥 가운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소." 개남은 다시 소리쳤다. "장군! 오고 계십니까?" 공중의 연기 구름 한 무리 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가고 있소이다." 개남은 계속해서 그를 불렀고, 허공에서 장대룡은 대답했다. 압록강을 건넜을 때 대답이 사라졌다. 개남이 호월리에 돌아왔을 때 온 동네가 울음바다를 이뤘다. 장대룡의 옷을 울진읍 정림리 동쪽 사리곡에 묻었다. 장례가 끝났을 때 그의 말 흑비가 구슬프게 울더니 갑자기 푹 쓰러져 죽었다. 사람들은 그의 묘 옆에 말도 묻었다. 개남은 그 뒤 불영사에서 정진하다가 돌아갔는데, 지역의 선비들이 그를 다비하지 않고 장대룡장군의 묘 옆에 묻었다. 말과 개남의 무덤을 합쳐 개마총(介馬塚)이라 불렀다.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스토리 메모울진의 용장(勇將) 장대룡장군은 이 고장사람들도 잘 알지 못할 만큼 역사의 기억에서 소외된 인물이다. 임경업장군과 함께 전공을 세웠고 의리를 저버린 왕조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린 기개있는 장수였다. 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강토를 유린한 청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단신으로 궁궐에 잠입해 '의거'를 도모했던 용기 또한 놀랍다. 그의 생가가 있었다는 울진읍 호월리에 기념동상(2999년 건립)이 만들어져 있다. 또 울진읍 정림리 사리곡 천지봉에 있는 개마총은 오래된 사진이 전하나 장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불영사 역사(力士)스님으로 전해지는 '개남'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 길 없으며 임경업 장군과 개남의 인연은 상상력을 보탰다.
2021.05.26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7> 이상국의 '울진대게의 비밀 - 성류굴 500인과 육촌대왕'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진 뒤 두어달 만에 한양을 삼킨 왜군의 한 줄기는 동해안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울진 성류사(聖留寺) 주지인 해율(蟹律)은,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왕피천의 물줄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서쪽 하늘에 먹장구름이 까맣게 몰려들었다. 그는 스승 해일(蟹一)선사가 들려주시던, 격암(格菴, 울진 출신 남사고(1509-1571)선생의 호)의 예언을 떠올렸다. 1550년 효렴(孝廉)으로 참봉 벼슬에 천거되었던 격암선생은 “40년 뒤 임진년과 계사년 사이에 남해에서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계사년에 침입하면 나라가 결딴날 것이고, 임진년이면 그보다는 낫지만 강토를 유린당할 걸세. 지금 열세살이 된 왜국의 소년 하나(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년생)가 스스로 태어난 날을 기해 전쟁을 꾀할 것이네. 그런데 이 나라 사직은 동서가 붕당(朋黨)으로 갈라져 칼이 코 끝에 닥쳐드는 날까지도 서로 싸우고 있을 걸세. 큰일이야. 지금부터 2년쯤 뒤에 그 병란을 감당해야할 왕재(王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나중에 선조가 되는 이연)가 태어날 것일세.” 이때 해일선사가 물었다. “전란이 나면 우리 울진은 어떤 방도를 써야 할지요.” “너무 걱정은 마시게. 붉은 옷을 입은 육촌대왕이 도와줄 거야.”해율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낯익은 성류사 불자(佛子) 이십여명이 달려왔다. “스님, 왜적들이 수천리를 짓밟고 사람들을 벌레같이 베어넘긴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해율은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말을 꺼낸다. “울진은 신라가 점령하기 전(봉평 신라비는 그 무렵 세운 비석)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고구려에선 왕이 울진국으로 와서 직접 제사를 지낼만큼 이곳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굴신(窟神, 혹은 수신(隧神))을 왕국의 수호신으로 삼았기 때문이지요. 고구려는 매년 10월이면 성류굴에서 큰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굴은 사실 큰 원력(願力)을 지닌 곳입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실직국의 왕(삼척, 울진지역 지배세력)이 예국(강릉 지배세력)에 쫓겨 숨어살던 곳이고, 가까이는 고려말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굴에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아래 왕피천(王避川)은 그래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우리들도 잠시 병란을 피하여 굴 속에 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류사의 부처를 거기 함께 옮겨 예불을 드리도록 합시다.” 이런 제안에 마을 사람 500여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상당히 오랫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준비해 굴 속으로 이동했다. 대웅전에 모셔져있던 부처를 떼어 이동할 때였다. 청년들은 좁은 굴 입구에 서서 불상을 밀어넣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부처의 크기로 봐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폭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상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저절로 굴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율스님과 마지막 어린 아이가 들어온 다음, 사람들은 준비해놓은 바윗돌로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바깥에 남은 사람들도 도왔다. 감쪽같이 입구의 자취를 숨긴 것이다. 약 10m 폭의 돌벽을 쌓아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안은 점차 깜깜해졌고 사람들은 소리와 촉각으로 서로를 인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양식은 거의 바닥나고 모두들 어둠에 지쳐 있을 때 좁은 굴 한쪽에서 희미한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적에게 들켰다고 생각하고, 무기를 들었다. 다가온 것은 놀랍게도 연꽃 잎을 온몸에 걸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불상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부처는 붉고 큰 게 한 마리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때 해율스님이 가만히 나섰다. “여러분, 이 자해(紫蟹, 대게가 붉다 하여 예전엔 이렇게 불렀다)대왕님은 바로 우리를 지켜주는 굴신(窟神)입니다. 저 연화님은 동해 여신의 궁녀이고요. 우리 울진국은 자해대왕에게 제사를 지내온 부족입니다. 성류굴의 성류(聖留)란 바로 성스러운 대왕이 머무르는 곳이죠. 원래 울진 바다는 해포(蟹浦), 해진(蟹津), 기알게, 거일로 불리어왔습니다. 모두 게와 관련된 이름들이지요. 게는 다리가 여섯인지라 육촌(六寸)이라 불렀고 그것이 대나무 마디처럼 생겼다 하여 죽촌(竹寸), 죽육촌으로 부르기도 했고요. 동해 연안의 사백 길 해저에 있는 왕돌짬(대륙붕)에 사는 대게들은 대왕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덕을 상징하는 진미객(珍味客)들입니다. 저는 대왕의 신하로 굴을 지키려 성류사에 와 있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물었다. “대게의 신은 사람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괴롭혔다고도 하던데요.” 해율은 말했다. “뭍에 사는 멧돼지 부족이 만든 옛날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멧돼지와 곰이 산골을 떠나 멀리 바닷가로 놀러가는데 어떤 마을에서 굴에 사는 대게가 여인을 제물로 바치도록 강요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멧돼지는 꾀를 써서 대게를 죽이고 사람들은 멧돼지에게 크게 감사를 하죠. 이건 이방의 종족들이 퍼뜨린 얘기일 뿐입니다.” 해율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자해대왕이 사람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도록 했나니... 이제 연화님을 따라 동해로 가보시게.”사람들이 서로 쭈뼛쭈뼛하고 있을 때 연화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한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자 함께 손잡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저절로 마치 게가 움직이듯 부드럽게 횡보(橫步)로 이동을 시작했다. 성류굴(472m)은 갑자기 땅밑으로 큰 길이 열리더니 끝없이 이어졌다. 500명의 사람들은 걸어서 잠깐만에 동해 밑바닥에 이르렀다. 굴이 열리면서 눈앞에 물이 펼쳐졌으나 습기처럼 젖어드는 느낌이었고 숨이 차지 않았으며 수압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환한 태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저는 신라의 보천(普天)태자입니다. 장천굴(성류굴) 신에게 불교의 뜻을 전파했지요. 하늘에서 날아온 저는 대게들에게 동해의 태양 형상을 불어넣었습니다. 둥근 몸에 여섯 가닥으로 퍼져나가는 다리가 그것입니다. 동해에 뜨는 태양과 빛을 상징합니다. 대게는 바다 밑바닥에 사는 태양인 셈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해(蟹)인 것도 바로 그런 연유이죠. 우리의 몸 중에서 가장 발달한 것은 눈입니다. 우리는 섣불리 보지 않고 사방 팔방을 다 점검하고 살피며 그것을 다시 내성(內省)의 눈으로 확인하여 일을 처리합니다. 또 대게의 횡보는 진전없는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형편에 맞게 몸을 움직이는 처신의 미덕입니다. 마지막으로 대게의 집게발은 한번 물면 놓지않는 끈기와 집념을 말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본성의 미덕들입니다. 전란이 끝나는 날까지 여러분들은 바다밑 진경(珍景)과 진미(珍味)를 누리며 지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몇 백년이 지나면, 대게들이 여러분들을 크게 먹여살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보천태자는 이들을 동해의 여신이 있는 용궁으로 안내했다.왜란 이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물밑으로 감춰졌다. 성류굴은 다시 열렸고, 울진에는 배 성주(成主) 제사를 지내는 사람 중에서 대게를 그린 한지묶음을 무명실로 묶어둔 형태로 놋좆(배의 뒷전에 튀어나온 나무못)에 매달아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례가 끝나면 바다밑에서 함께 지내던 지인들을 모시고 가만히 동도름(음식을 나눠먹는 일)을 했다.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 ◆스토리 메모 울진의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성류굴은 주변 암벽의 측백나무(수령 수천년)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하금강'으로 불린다. 2억5천만년 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로 종유석이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다. 신라 신문왕의 태자 보천이 이곳에 머물러 수도를 했으며 장천굴의 신에게 수구다라니경을 전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또 고려말 학자 이곡의 '관동유기'에는 성류굴 암벽 밑에 성류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굴신(窟神) 신앙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다. 임진왜란 때 주민 500명이 피신했고 성류사 불상을 옮겼다는 내용과 배의 성주에게 제사를 지내는 민속과 관련한 내용은 울진군지(2001년 발행)에 적혀 있다. 울진의 봉평신라비는 국보 242호로 신라가 이 지역을 고구려에서 빼앗은 뒤 이곳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고 세웠다는 내용이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건립 연대는 524년으로 추정) 남사고의 임진왜란 예언과 선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예언은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흠의 문집에 있다. 굴에 사는 대게의 신에 관한 이야기는 떠도는 설화를 이원수선생이 정리한 '저동이와 웅남이', 그리고 만화 '멧돼지 도사'를 참고했다. 단편적인 내용으로 제각각 떠도는 스토리들을 엮어 풀어낸 것이다. 이 울진의 굴신 '대게 스토리'는 팬터지와 어드벤처 콘텐츠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테마파크와 게임콘텐츠로 활용할 만한 흥미진진한 '스토리자원'이다.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6> 이하석의 ‘망부석 촛대바위’
울릉도에는 이런 노래가 있다. 해중(海中)에 솟은 섬이 아마도 명지(名地)로다 산천에 있는 풀이 약초가 반이 넘고 지중(地中)에 솟은 물이 물맛도 기이하다 풍토가 순하기로 인가에 병이 적고 육지가 머자 하니 인품도 후하더라 술을 하야 서로 청코 밥을 하야 논아 먹고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가사이다. 울릉도는 그렇듯 좋은 곳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바다 안의 무릉도원이라 해서 무릉도라 부르기도 했다. 섬에 사는 이들의 마음이 온후하고 정이 끈끈함은 예부터 잘 알려져 왔다. 그런 마음은 ‘산을 지고 집을 짓고 난글 비고 밭을 내’는 한 평생에서 한결같았다. 그래서 사람 사는 일에 따르는 불행과 궂은일에도 짐짓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멀리 앞을 내다보는 것이리라. 그런 마음으로 지아비는 지어미를 챙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우러르며, 부모는 자식을 참으로 귀히 여기고 자식은 부모를 지극하게 섬기고 봉양해왔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곳, 후덕한 인심의 섬에서 조차 기쁜 일 보다는 슬픈 일이 더 잘 드러나니, 세상살이가 참으로 묘하고 요상하지 않은가. 저동마을에 그런 슬픈 얘기가 전해온다. ‘먼, 먼 옛날, 바닷가 오막살이집에 한 늙은 아버지와 어린 딸이 살고 있었다’라는 말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내는 일찍 죽었다. 달랑 하나 남은 딸이 곱다. 아비는 그런 딸을 늘 감싸 안고 돈다. 딸은 그런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챙긴다. 그러나 가난이 늘 문제다. 부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조그마한 배 한 척과 손바닥 만 한 밭뙈기가 전부다. 그래도 틈틈이 고기를 잡고, 밭에는 옥수수를 심어 거름을 주고 김을 맨다. 그런데, 올해는 옥수수 농사가 엉망이다. 날씨 탓인가, 흉작도 그런 흉작이 없다. 옥수수 농사가 잘 되면 그해 겨울은 그런대로 굶지 않고 지낼 수 있는데, 당장 끼니가 걱정이다. “큰일이다. 고기나 많이 잡아 그걸 팔아 양식을 마련할 수 있기를 바라야지.” 노인은 어구를 챙겨 배에 싣는다. 작은 배니, 파도가 조금만 쳐도 가랑잎처럼 흔들린다. 그런 배로 너울이 잦은 먼 바다로 나가는 건 무리다. 그래도 노인은 매일 배를 타고 제법 먼 데 까지 가서 고기를 잡곤 한다. 노인 혼자인데다 자그마한 배니, 고기가 많이 잡힐 리 만무하다. 겨우 몇 마리 씩 잡아 그걸 팔아 옥수수랑 조를 사선 거친 끼니를 때운다. 말린 푸성귀를 넣고 그걸로 죽이라도 끓이면 그 맛이 그저 그만이려니 여긴다. 다만 제 어미를 닮아 눈이 초롱초롱하고 얼굴이 갸름하니 예쁜 딸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 그렇게 하루하루 끼니를 마련하는 판이니, 쉴 틈이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다로 나가야 한다. 해거름 무렵이면 딸은 바닷가에서 언제나 아버지를 기다린다. 자그만 파도에도 마음을 졸인다. 그러다가 멀리 아버지의 배가 보이면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누르며 비로소 안심한다. 때로는 혼자서 먼저 간 어미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기다리는 불안을 달래보기도 한다. 보고 제라 보고 제라 우리 엄마 보고 제라 이산 저산 남산 밑에 그 밑에라 쾨산 밖에 끝끝 없는 동박남게 우리 동상 앞에 찌고 청태산 꾀꼬리야 망태산 비들기야 저 새 소리 들어봐라 옷을 바래 저래 우나 옷도 싫고 밥도 싫고 어린 동상 앞에 찌고 청태산 꾀꼬리야 영매대왕 들가거든 우리 엄마 보시거든 구름 거게 젖 한 방울 전해주소 바람 거레 젖 한 방울 전해주소 물론 동생은 없지만, 흡사 어린 애를 업고 있기라도 한 듯이 등을 추스르기도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부르고 또 부르고 몇 곡이나 부르다보면 멀리 아버지의 배가 돌아오는 게 보이는 것이다. “아이고 아부지. 아부지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될 뻔 했네.” 딸의 어리광에 아버지는 고기를 내려놓다 말고 “큰 일 날 소리. 이렇게 애를 태우면서 바닷가에 서 있지 말고, 느긋하니 집에서 기다리거라.”라고 짐짓 타이른다. “파도 소리에 맘이 졸여서 그렇게 되나요.” “나는 괜찮다.” 그날도 아버지는 배를 타고 나간다. 쾌청하고 바람도 없는 날씨였는데, 오후 늦게 눈발이 뿌리더니 파도가 거세다. 딸은 걱정이 되어서 자주 마당에 나와 포구 쪽을 바라본다.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진다. 먼 바다 쪽은 너울이 자꾸만 넘어오고 있다. 불안하다. 그 작은 배로 저 너울을 건너오는 건 참으로 위험하다. 딸은 바닷가로 달려 나간다.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다. 이맘때면 몇 사람이 나와 배를 기다리곤 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이 달랑 혼자다. 날씨를 예측하고 아무도 배를 내지 않았던 것 같다. 딸은 더욱 불안해진다. 겨울 저녁은 빨리 온다. 벌써 제법 눈이 쌓였다. 어둠이 이내 짙게 내려앉으면서 파도소리가 거세진다. 이런 날은 노래를 부를 수도 없다. 눈을 두 손으로 문지르면서 자꾸만 바다 만 바라본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 바다 쪽으로 기우는 딸을 끌어당긴다. 딸은 밤새 뜬 눈으로 지샌다. 그 이튿날에도 딸은 바닷가에 종일 서 있다. “아버지, 아버지, 왜 돌아오지 않으세요? 이러다가 망부석이 되겠네!” 딸은 섧게 운다. 먹는 것도 잊고, 자는 것도 잊은 채 바닷가에 서성이며 아버지를 기다린다. “애구, 이러다 큰 병이 나겠네. 뭐라도 좀 먹으렴. 아버지는 못 돌아오실 거다. 너는 우짜든동 기운 차려 잘 살아야지.”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밥과 죽을 쑤어서 갖다 주면서 딸을 달래지만 딸은 막무가내다. “아버지는 돌아오실 거예요. 꼭 돌아오실 거예요.” 딸은 자신의 믿음을 다짐이라도 하듯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한사코 바닷가에 나간다. 며칠을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은 채 바닷가를 서성인 딸의 정성을 하늘이 도와서였을까? 문득 아버지가 며칠 뒤에는 돌아오리라는 이상한 예감이 든다. 바닷가로 달려 나간다. 반가움에 왈칵 눈물이 솟구치면서 어서 배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보고 또 본다. 멀리 파도 사이로 배가 돛을 단 채 섬으로 오는 게 보인다. “배가 들어온다!” 딸이 소리친다. 손을 흔든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딸은 자꾸만 손을 흔들며 “아버지! 아버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친다. 그러자 배에서 “곧 가마!”라는 화답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제가 마중을 나갈게요.” 딸은 배 있는 쪽으로 달려 나간다. 바다 속으로 텀벙 뛰어든다. 딸의 소리에 놀라 나온 동네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능숙하게 헤엄쳐나가기 시작한다. 다시 눈발이 뿌리기 시작한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저것이 헛것을 보고 미쳐버렸어!” 동네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른다. 남자들은 딸을 건지려고 배의 줄을 푸느라 부산하다. 그러나 배가 뜨기도 전에 딸의 몸이 스르르 차가운 파도 속으로 잠겨든다. “아버지!” 딸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문득 몸을 솟구쳐 올린다. 아아, 동네 사람들은 그 때 장엄한 광경을 본다. 솟구친 몸이 그대로 바위가 되어 우뚝 서는 것을. 저동 해안의 물 위에 서 있는 큰 바위가 그 때 그 바위라 한다. 사람들은 ‘효녀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촛대바위’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망망대해를 향해 선 그 바위를 보며 자상한 아비와 지극한 효녀의 넋을 떠올린다. 이하석<시인>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5> 이하석의 ‘우산국을 삼킨 나무사자’
1 우해왕은 강성한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왕의 기운이 거세고, 신체가 강건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역대 왕의 누구보다도 우산국의 힘이 바다에서 나온다는 걸 잘 알고 대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육지처럼 헤집고 다녔다. “또 왜구가 노략질을 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자 그는 말했다. “도대체 그놈들은 어디서 출몰하는가?” “대마도가 근거지입니다.” “그렇다면 가서 뿌리를 뽑아야지.” 왕은 군사를 모았다. 군함의 편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대마도로 향했다. 대마도는 당시 아주 후진 상태에서 해적들의 근거지였다. 우해왕은 대마도주를 만나자마자 기선을 제압할 정도로 우해왕의 군사력은 셌고, 그의 풍모는 당당했다. 대마도주는 해적들의 노략질이 도주의 뜻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자생적으로 이합집산하여 벌이는 일이며, 통제가 안 된다고 양해를 구했다. 이런 상태니 대마도주와의 담판은 거의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우산국을 침범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마도주는 항서에 가까운 문서에 서명했다. 해적들을 철저하게 단속하며 우산국과 잘 지내겠다는 뜻이었다. 우해왕은 으쓱하니 어깨에 힘을 주며, 좀 더 확실한 보장책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 약속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니, 도주와 내가 사돈이 되는 게 어떻겠소?” 사실상 도주의 딸을 인질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도주가 오히려 이를 반겼다. “그거야, 저희가 바라는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대마도주의 셋째 딸인 풍미녀를 데리고 와서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아주 예뻤다. 왕은 왕후에게 온 정신과 몸을 빼앗겨버렸다. 풍미녀는 온갖 사치로 몸을 치장하고는 그 교태로 왕을 흔들어댔다. 차츰 왕은 정사를 소홀히 했다. 지금까지 베풀었던 선정이 왕후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더니 나중에는 폭정으로 치닫게 된 게다. 게다가 사치를 좋아하는 왕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우해왕은 군사력을 바람직하지 않게 소모했다. 우산국에서 구하지 못할 보물을 구하기 위해 신라를 침범, 해적질 같은 노략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는 큰 나라인데, 그런 신라에 해를 끼치는 이런 짓은 우산국의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지적하고 말리는 신하들은 바다에 처넣어 버릴 정도로 우해왕은 모든 귀를 닫고 포악해졌다. 이러니 국정은 문란해지고, 바른 말하는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군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나라가 망할 징조로다”라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왕후는 마녀야, 마녀”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왕후의 환심을 사려는 우해왕의 신라 침범과 노략질은 점점 더해질 뿐이었다. 신라는 군사력을 모으면서 우산국 정벌을 도모할 기세였다. “임금님, 신라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대비하소서.” 한 신하가 용기를 내어서 이마를 땅에 대고 간했다. “제깟 것들이 감히 우리를 넘볼 수 있단 말인가?”하고 왕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바다에서의 싸움은 우산국이 한 수 위라고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하가 다시 고언을 하자, 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신하를 바다 속에 던져버렸다. 2 마침내 신라는 우산국 토벌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신라왕은 하슬라(강릉지역)군주 이사부를 서라벌로 불렀다. “우산국이 왜 겁도 없이 이런 짓을 하지?” “우해왕이 왕후의 미모에 빠져 그 환심을 사려고 온갖 보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노략질이 도를 넘고 있다.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호소가 계속 올라오는군. 이 기회에 우산국을 쳐서 후환을 없애야겠다. 가서 우산국을 정벌하라.” 이사부는 군사와 배를 정비하고 바다로 나갔다. 이 급보에 우해왕은 거만하게 대응했다. “신라는 육지에선 강할지 모르나 해전에는 우리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우해왕은 직접 바다에 나가 해전을 진두지휘했다. 비록 전에 비해 기강이 해이해졌다하나 우해왕의 불같은 성격은 단번에 군기를 장악하여 그 면모를 뚜렷이 했다. 이사부 역시 막강한 신라의 국력을 등에 없고 있어서 만만치 않았다. 신라와 우산국의 해전은 치열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의외로 빨리 나고 말았다. 바다를 누벼온 우산국 선단의 위력 앞에 신라군은 턱없이 무너져버렸다. 신라군이 퇴각하자 우해왕은 기고만장했다. 이사부는 참담했다. “작은 섬에 불과하다고 너무 경솔하게 생각했다”고 그는 분을 삭이며 중얼거렸다. “면밀한 작전이 필요하겠군.” 이사부는 군사를 다시 정비했다. 강한 훈련으로 군사들을 단련했다. 한편으로는 우산국 군사들의 심리를 뒤흔들 계략을 세웠다. 다시 우산국 토벌의 출항을 알리는 고동소리가 길게 울렸다. 우산국의 함선들도 신라 함선들을 마주하여 진열을 갖추었다. 문득 신라 쪽에서 한 척의 작은 배가 우산국 함선 쪽으로 다가왔다. 싸우기 전에 사신을 먼저 보낸 것이다. 사신은 우해왕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지난 번 싸움에 이긴 우해왕은 이에 코웃음을 쳤다. 사신의 목을 베어 보냈다. 신라군은 군선을 앞으로 디밀었다. 군선의 앞이 이상했다. 멀리서 살펴보니 무슨 거대한 짐승 같은 게 모든 군선들의 뱃머리에 도사리고 앉은 것 같았다. 풍성한 짐승의 갈기가 누런 빛깔로 흩날리는 듯했다. “저것들이 무슨 짐승이지?” 우해왕과 군사들은 의아했다. 갑자기 그 짐승들이 입에서 불을 뿜어냈다. 우산국의 군사들은 놀라움과 함께 겁을 먹었다. 섬 가 해변 바위 위에 모여 이 싸움을 지켜보던 섬 주민들도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갑자기 우산국의 진지 쪽으로 앞 쪽 함선이 불쑥 다가오더니 선미에서 신라군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이 짐승은 사자다. 모든 짐승의 제왕이다. 아주 사납지. 즉시 창과 칼을 거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사자들을 풀어서 섬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먹게 할 것이다.” 우산국 병사들은 불을 뿜고 강인한 이빨을 드러낸 사자들 앞에서 전의를 상실했다. 우해왕은 어쩔 수 없이 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깨달았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워봤자 결과가 번함을 깨달은 것이다. 우해왕은 투구를 벗어 던졌다. 항복의 표시였다. 전선을 거두고 신라군을 받아들이자, 신라군함들이 빽빽하니 해안에 포진한 가운데 이사부가 배에서 내렸다. 우해왕은 항복을 정식으로 선언했다. 그리고는 그 무서운 사자들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아아, 우리가 속았구나.” 우해왕은 신음소리를 냈다. 사자는 나무로 깎아 뱃머리에 세워둔 것이었다. 속을 파서 불이 나오도록 장치를 해두었다. 위해왕은 땅을 쳤다. 이사부의 꾀로 만든 사자들이 우산국을 망하게 한 것이다. 우해왕은 우산국에서 축출됐다. 우산국은 신라의 속국이 되어 매년 공물을 바치게 됐다. 울릉도 남양 포구에 우뚝하니 서 있는 사자바위, 그리고 그 옆 사자굴과 투구바위는 그날의 전장을 떠올려주는 흔적이라 전해진다. 이하석<시인>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4> 이하석의 ‘울릉도 성하신당 童男童女神 이야기’
1(울릉도를 무릉도(武陵島)라 부르던 때의 이야기다)이상한 꿈이었다. 짙은 해무(海霧) 속에서 문득 나타났다. 생김새가 용을 닮았다고 할까? 고기비늘 같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해무가 온몸을 휘감아서 다리 아래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흰 수염이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김인우 안무사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동해의 신이니라.” “……” “그대가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면 이 섬이 비겠군.” 해신은 노기를 띤 듯했다. 안무사는 간신히 대답했다. “임금의 명입니다. 섬주민들을 육지로 옮기라 하셨습니다. 육지에서 부역을 피해 이 섬에 도망온 이가 더러 있습니다. 또한 왜의 노략질이 심해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지요.” “그래? 그래도 섬을 다 비울 수는 없지.” 해신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둘만 남겨두어라. 어린 총각과 처녀 두 명이니라. 이들이 섬을 지킬 것이다.” “모두 옮기라는 명인데…….” “내 말 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이 섬을 나갈 수 없다.” 안무사가 뭐라 말하려 하는데, 짙은 해무가 앞을 막았다. 눈을 비비며 해무 속을 헤쳐 봐도 아무도 없었다. 파도 소리만 해신의 노기 띤 음성의 여운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안무사는 잠자리를 떨치고 밖으로 나왔다. 바다는 잔잔했다. 지금이야말로 배를 띄울 적기였다. 며칠 동안 바닷바람을 가늠해 파도가 없는 오늘을 잡아 떠나려던 참이었다. 간밤 꿈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내 꿈에 대한 생각을 떨쳤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다보니 그런 이상한 꿈을 꾸는 거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애썼다. 삼척의 만호인 그는 태종 17년 무릉도 안무사로 명을 받아 험한 뱃길을 열어 힘겹게 섬으로 왔다. 병선 두 척을 태하 황토구미 바닷가에 정박시켰다. 무릉도의 해변은 험한 벼랑 투성이라 배 대기가 어려워, 비교적 해안이 완만한 이곳을 잡은 것이다. 해안 가까운 곳에 유숙지를 정하고, 바로 섬 순찰에 나섰다. 나라에서 그에게 내린 명은 거주민의 쇄환(刷還)이었다. 섬에 거주하는 이들이 꽤 됐는데, 육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라의 통제 밖에 버려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러 육지에서는 부역을 피해 이 섬으로 도망하는 이가 있었다. 또한 수시로 출몰하는 왜의 노략질이 심했다. 이런 이유로 섬사람들을 모두 뭍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날이 밝자 서둘러 사람들을 모았다. 짐들을 먼저 배에 실었다. 이어서 사람들이 승선하여 곧 떠나려했으나 조금 전까지 괜찮았던 바다가 갑자기 심한 너울 파도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표정에 불안함이 역력했다. “이상한 일이네. 그 좋던 바다가 왜 갑자기 사나워지지? 전에 없던 일이야.” 이런 심한 너울 위에 배를 띄울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바다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사람들이 배에서 내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파도는 더욱 심해져만 갔다. 하루를 보내고 다시 하루를 보냈으나 바다의 동요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수일이 지나갔다. 안무사는 문득 며칠 전 배 띄우려 하던 전날 밤의 꿈이 생각났다. 설마, 싶었지만, 지금의 이런 상황은 예삿일이 아니어서 자꾸만 꿈속의 해신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려 되씹혔다. “해신의 위협이 정말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섬 주민들을 다시 모았다. 배에 물건들부터 실었다. 그런 다음 그 중 어린 머슴애와 계집애 둘에게 말했다. “얘들아, 유숙지에 필묵을 두고 왔구나. 발 빠른 너희 둘이 빨리 가서 가져오너라.” “네.” 둘은 얼른 대답하고 안무사의 유숙지로 내달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안무사는 재빨리 주민들을 배에 태우고 출항을 서둘렀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순풍까지 불었다. 안무사는 병사들을 재촉하여 배를 포구 밖으로 끌어냈다. 그런 다음 돛을 올리고는 순풍을 타고 빠르게 섬에서 멀어져갔다. “아이고, 쟤들을 어떡하노?”라는 탄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바라보니, 섬에 남은 동남동녀가 해안에서 팔을 저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안무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배를 돌릴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조금 전의 그 심상찮았던 파도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라의 명을 수행하는 게 급하기도 했다. 그는 애틋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부디 둘이서 잘 살아라. 다시 들릴 때까지 버텨다오. 해신이여 저 어린 애들을 도우소서.” 2 모처럼 순풍이라 배는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그러나 배보다 그의 마음이 더욱 빨리 물살을 가르고 나아갔다. 벌써 수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김인우는 무릉도에 다녀온 이후 언제나 마음에서 두 아이를 지우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당장 가서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쉬운 게 아니었다. 그가 있는 삼척에서 곧장 동쪽으로 나가면 되지만, 험한 파도의 망망대해를 건너야 했다. 나라의 명이 없이는 병선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음만 매일 바다 위를 내달려갈 뿐이었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죄스러운 일이었다. “해신이 두 아이를 원했으니, 잘 지켜주겠지”라고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 가운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세 해가 지났다. 세월이 가도 두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 마음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던 차에 몇 해가 지나 무릉도에 갈 일이 생겼다. 조정으로부터 무릉도 안무의 명을 다시 받은 것이다. 버려진 섬이긴 했으나 그래도 우리의 국토이니 몇 년에 한 번 씩은 들러서 살펴봐야 했다. 그는 출항하기 전부터 들뜬 나날을 보냈다. 마침내 파도가 잔잔한 날을 잡아 뱃길을 열어갔다. 그는 뱃전에 기대서서 먼 수평선을 향해 설레는 마음을 지그시 눌렀다. 수평선상에 작은 점이 나타났다. 무릉도였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온통 바위로 에워싼 섬에 다가서서 태하 해안으로 향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해안의 바위와 숲 속을 기웃댔다. 혹 두 남녀의 모습이 보일까 해서였다. 태하에 정박했다. 서둘러 배에서 내렸으나 섬은 조용하기만 했다. 병사들을 집결시킨 다음 섬의 수색을 명했다. 두 아이를 우선 찾아야 함을 강조했다. 소식은 의외로 빨리 왔다. “사람이다!”라고 한 병사가 소리쳤다. 전에 유숙했던 자리 부근이었다. 두 사람의 시신이 있었다. 살은 다 삭아 내리고 흰 백골뿐이었다. 크기로 봐서 두 동남동녀가 틀림없었다. “아아, 이럴 수가.”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시신 앞에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꼭 껴안은 채였다. 뼈만 남은 걸로 봐서 죽은 지 몇 해나 된 듯했다. 공포와 추위에다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은 것이다. 서로 꼭 껴안고 떠나간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리워하면서 죽어간 것이다. 안무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다. “해신의 해코지를 어찌할 수 없어 두고 가긴 했지만, 그래도 나의 잘못이다. 나의 잘못이다.” “원한이 사무쳤을 텐데. 풀어주어야지요.” 병사들이 말했다. 안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혼들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시신이 있던 자리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낸 다음 돌아왔다. 그 후 이 섬에 다시 바람처럼 스며든 사람들로 인해 마을들이 생기면서 두 동남동녀를 모신 사당은 신당으로 바뀌었다. 성하신당이라 불렸다. 눈망울 초롱초롱한 동남동녀상도 밀랍으로 조성, 사당에 안치됐다. 풍작과 풍어, 바다일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으로 모셔져 매년 음력 2월 28일에는 제사를 지냈다. 지금껏 그러하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생활인만큼 누구나 바다에 삶이 메이게 마련이다. 그 바다생활의 안전을 성하신당은 지금도 책임지고 있다. 배를 건조하여 진수(進水)할 때 이 신당에 특별히 제사상을 차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하석<시인>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3> 성석제의 '진경, 자연의 마음'(겸재 정선과 내연산 삼용추폭포)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그가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 향청이 있는 쪽에서 이방이 쫓아나왔다. 동작이 민첩하되 입이 무거워 그의 신뢰를 사고 있었다. “내연산으로 가려 하네. 차비를 해주게.” 이방은 눈을 내리깔고 준비를 하겠노라고 했다. 그는 세숫물을 가져오게 한 뒤 대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이 쉰여덟, 백발이 희끗거리는 장년의 사내가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병방이 말을 내왔다. 구종과 통인 예닐곱 명에 지필묵과 음식을 등에 실은 말 두 필이었다. 한두 번 행차를 한 것도 아닌데 어쩐 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에 올라 길을 나섰다. 그가 수령으로 부임한 청하현(淸河)은 일천여 가구, 오천 명 남짓한 사람이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사는 작은 고을이다. 청하라는 맑은 이름은 인근의 산악들이 거느린 계곡에서 모인 물 덕분에 나왔다. 들은 넓고 바다는 가까워 식물(食物)이 풍부하다. 부자들이 더 큰 부를 누리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흉년으로 백성이 허기져 죽지만 않는다면 살기에 이만한 데도 없다. 자연히 관아에 몰려들 송사도 많지 않았고 인근의 감사, 부사, 목사가 무엇을 바쳐라 오너라 가느라 괴롭히는 일도 적었다. 한 마디로 그는 특별한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임금은 그의 손을 거쳐 나올 조선 방방곡곡의 절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직 그림에만 빠져 세상 물정조차 모르는 자에게 고을 수령 자리를 주는 게 가당키나 하냐며 벌떼처럼 일어나 공격하던 벼슬아치들로부터 임금은 귀를 막아버렸다. 이전부터 그를 떠받쳐주고 이끌어주던 사람들, 특히 스승과 지기, 선후배들은 또 어떤가. 그들 역시 뭔가 눈을 크게 뜨게 할 결실이 있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까지 한 청하 읍성의 회화나무 아래를 지나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관아에서 보경사까지의 삼십리 길이 서너 식경밖에 안 걸렸다. 군노와 통인들이 헐떡거리며 뛰어올 것이 가엾어서 몇 번 말고삐를 당기긴 했지만 황금빛 들판을 달리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가 온 기미를 알고 천년 고찰 보경사의 주지승이 마중을 나왔다. 그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산길로 접어든다. 짐승이 길을 내고 나무꾼들이 넓혀 놓은 산길은 평탄하다. 워낙 많이 갔던 터라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다. 울창한 수림이 좁은 산길을 감싸안고 있는 듯, 비장하고 있는 듯하고 작은 집채만한 바위덩이가 별스럽지 않게 흩어져 있는 계곡은 올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절승 속에서 평탄한 길을 골라가며 사는 것도 한 가지 인생이 아닐까. 그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의 인생 역시 비교적 평탄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주변에서 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하면 무슨 그림이든 늘 선선하게 그려주었다. 도화원의 화원으로서 의무적으로 그려야 하는 그림도 있었지만 일에 앞서 그는 언제나 그림을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야만 마음이 편했다. 명성도 얻었다. 큰 문제가 없이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그림과 함께 살아오면서 언제나 충분치 않은 게 있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가장 그림을 많이 그린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그이지만 아무리 그리고 그려도 손에 닿지 않는 무엇인가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더는 안 되는가.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조선 산천경개의 본질, 그 스스로의 내면이 하나로 합일되는 신천지가 열릴 것 같은데. 어쩌면 그 한 걸음은 영원히 이승에서 디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첫번째 고개에 다다른다. 보통 계곡은 하류가 넓지만 고갯마루 위에서 보면 오히려 내연산 상류가 활짝 더 벌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윽고 내연산 열두 폭포 가운데 첫번째 폭포인 상생폭포가 나온다. 위압적이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정다움이 있다. 나도 그랬지. 잘 알지. 그는 스스로의 인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길이 가팔라진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땀이 흐른다. 숲은 깊어지고 깊어진다. 이런 굴곡이 있어야 무엇이라도 된다. 굴곡이 없는 인생이 복받은 것이라고? 외로움이 싫으면 사람을 만나면 된다고? 그는 고개를 젓는다. 청하에서 그는 외로웠다. 외로움은 그의 예술혼을 날카롭게 벼리는 숫돌이었다.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마음 속의 그림을 화선지로 옮기고 또 옮겼다. 중국에서 건너온 화성(畵聖)들의 화첩을 보면서 그는 한 번도 통쾌하게 뜻이 통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건 중국의 것, 중국의 자연과 사람과 삶에서 우러난 것일 뿐 그가 얻으려는 그림의 궁극적인 뜻과는 달랐다. 시정에서 사람 사이에서 얻을 뜻이 있다면 금강산에서도 내연산에서도 얻을 그림이 있다. 피와 땀은 체화로 가는 과정일 뿐. 금강산을 예닐곱 번이나 갔지만 거기서는 내연산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다. 금강산이 장엄하다면 내연산은 인간적이다. 번드르르한 외면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비밀스러운 진실을 간직한 강직한 선비 같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발을 내딛는다. 가진 힘을 몽땅 써버림으로써 높이를 얻는다. 홀연 그의 시야가 툭 터진다.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난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일대(仙逸臺), 신선이 날아서 내려왔다는 비하대(飛下臺), 신선이 타고 온 학의 집이 있다는 학소대(鶴巢臺), 학소대 위의 소나무가 늠름한 골격과 기상으로 자연의 붓질, 준법(峻法)을 보여준다. 그는 못 박힌 듯 서서 천연의 산수화를 빨아들인다. 그대로 모사만 해도 천하절경, 그림으로서는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건 그가 그리려는 그림이 아니다. 수많은 풍경이 그의 마음 속, 인생에 낙관을 찍었다. 그는 사생을 하기 위해 조선의 산천을 떠돌면서 수없이 많은 발자국을 찍었다. 그가 그리려는 그림은 신선이 노니는 별유천지가 아니다. 서로가 발자국과 낙관을 찍어댄 끝에 하나가 된 물아일여의 그 경지다. 실경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복속되지 않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통인들이 헐떡거리며 따라왔다. 폭포는 요란하게 귀청을 두드리고 절벽은 하늘 위로 코끝을 들어 올리고 있다. 그는 풍경의 선정, 화의(畵意)의 삼매에 빠져 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요, 사또.” 조심스럽게 통인이 말을 건넨다. 그는 천천히 몸을 옮겨 자리에 앉는다. 화선지, 먹, 붓. 오십여 년을 마주해온 다정한 벗들. 그러나 오늘은 그, 정선 스스로가 달라졌다. 붓을 잡은 그는 먹을 듬뿍 찍어 첫 점을 찍는다. 붓 아래쪽 털이 휘며 먹물이 위로 올라간다. 그는 도끼로 내리찍듯 단숨에 내리긋는다. 상단의 털 속에 갇혀 있던 먹물을 뿜으며 붓은 자재하게 화선지를 유영한다. 숨쉴 새도 없이 그는 다시 붓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거침없다. 망설임이 없다. 멈추지 않는다. 덧칠조차 하지 않는다. 삽시간에 높이가 어린아이만한 크기의 그림이 그려진다. 고요가 찾아온다. 노을이 그림을 엿보듯 번지기 시작한다. 그는 눈을 감고 앉아 있다. 이제 시작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는 귀속에 울려 퍼지는 뇌성을 듣는다. 하늘이 때를 베풀고 산천은 도량이 되어 주었다. 한 인간의 쉬지 않던 발걸음이 쌓여 도약의 위대한 한 걸음, 진경(眞景)으로의 진보를 만들어냈다. 성석제<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2> 성석제의 '진각국사와 명마'
그는 말에 올라탔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이 들 때까지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했던 말이었다. 그는 말을 믿었고 말은 그에게 감응했다. 말은 천리 준마였으며 말을 탄 사람 역시 말과 짝할 만한 영웅의 기개가 넘쳐흘렀다. 흥해의 넓은 들판은 물론이고 바닷가 모래밭, 인근 수십 리 안에 있는 언덕, 초원이 모두 말과 사람의 놀이터이자 훈련장이었다. 사람들은 말을 용마로, 말을 탄 사람을 배장군이라고 불렀다. 벼슬은 없지만 장군의 기상을 압도하고도 남을 그의 이름은 배천희(裵千熙)였다. 오래도록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온 고려는 국권을 되찾을 영웅의 출현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혼란한 세상은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고 기아와 병마, 전쟁의 위협에 신음하는 백성에게 활로를 열어줄 진정한 장군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배장군은 한껏 호기가 치솟아 힘찬 휘파람 소리를 냈다. 말 역시 긴 울음소리로 화답했다. 배장군은 등자에 발을 깊숙이 밀어 넣은 뒤 고삐를 안장에 비끄러맸다. 이어 안장에 걸려 있던 화살통에서 꺼낸 화살을 각궁에 단단히 매긴 배장군은 말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내가 이 화살을 저 산을 향해 쏠 것이다. 네가 용의 피를 받아 이 땅에 현신한 것이라면 바로 지금 네 능력을 보여다오. 너는 분명 이 화살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을 게다.” 장군은 맑은 호통소리와 함께 활을 반공에 들어 화살을 날렸다. 동시에 말의 배를 차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말은 장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어느 때보다 힘차고 빠르게 달렸다. 몸을 최대한 숙인 장군의 귓가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아지경으로 말과 사람은 한몸이 되어 달리고 또 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은 예정한 장소에 다다른 듯 걸음을 멈추었다. 장군이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의 활 실력을 확신하고 있던 장군은 화살이 박혀 있어야 할 거대한 나무 둥치를 살폈다. 화살은 없었다. 좌우 옆으로 한 장, 앞 뒤로 한 장 그 어디에도 화살은 없었다. 장군은 몸을 떨었다. “내가 뱀을 용인 줄 알고 잘못 키웠구나!” 말에서 뛰어내린 장군은 등 뒤에서 장검을 뽑아들어 말을 겨누었다. 믿음과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배신감이 격렬하게 엄습했다. 장군의 칼이 휘둘러지고 공중에 피보라가 일며 말은 무릎을 꿇었다. 말의 몸 높이가 낮아진 뒤 장군의 눈이 말의 뒷부분으로 향했다. “아아!” 하고 놀람과 슬픔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장군이 날린 화살이 말의 엉덩이에 꽂혀 있었던 것이었다. 말은 결코 화살보다 느리지 않았다. 몸에 화살이 박힌 채로도 화살보다 빨리 달려왔던 것이다. 장군은 피 묻은 장검을 바위에 내리쳐 부러뜨렸다. 죽어 넘어진 말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의 경솔함을 사죄하고 또한 통곡했다. 말이 죽은 자리에 무덤이 하나 생겨났다. 그 앞에 그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으리. 생명으로 생명을 구한다? 너를 죽여 나를 살린다? 다 어이없는 말놀음이로다.” 장군은 그 날 이후 칼을 버렸다. 생명과 인연이 가진 오의에 한층 깊이 마음을 묻고 수도에 들었다. 스님이 된 그는 19세에 승과에 급제한 후 금생사, 덕천사, 부인사, 개태사등 십여 사찰의 주지로 지냈고 원나라에 들어가 강남의 몽산(蒙山) 스님에게서 의발(衣鉢)을 전해 받았다. 귀국한 후에 치악산에 은거하다 양양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 공민왕 16년(1367)에 왕이 직접 대사를 찾아가 고려 승려의 최고 직책인 국사를 맡아달라고 간곡히 청하므로 이에 국사로서 선교(禪敎)를 아우르는 도총섭(都摠攝)의 직위에 올랐다. 왕은 국사를 배출한 흥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원래 국사의 암자가 있던 깊은 산중에는 맹수가 많아 사람이고 가축이고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국사가 수도를 할 때 이곳에서 닭을 많이 키웠는데 이상하게도 맹수들이 닭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생명을 끔찍하게 아끼고 존숭하던 국사의 마음에 동물들이 감응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에도 닭들은 대를 이어가며 살아갔다. 후손들은 국사의 유허비가 있는 사당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제물로 산에 살고 있던 닭을 잡아 바쳤다고 한다. 생닭을 제사상에 제물로 올리는 것은 유례가 드문 일로 지금도 진각국사의 제사를 지낼 때는 생닭을 쓰고 있다. 하루는 어느 장사치가 산을 넘어 갯목(浦項) 쪽에 물건을 팔러가다가 고갯마루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배가 고팠던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장사치에게 달려들 기세였고 장사치는 호랑이를 보자마자 놀라 넋이 달아나 버렸다. 마침 국사가 근처를 지나가다 그 광경을 목도했다. 호랑이가 땅바닥에 널부러진 사람의 목을 향해 앞발을 내리치려는 순간 국사는 지팡이를 뻗어서 호랑이를 제지했다. 국사에게서는 일찍부터 닦은 출중한 무예와 정신력이 뒷받침하는 태산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호랑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흉폭한 모습으로 으르렁거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국사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한낱 미물인 산짐승이 감히 천지지간에 가장 귀한 사람의 생명을 해하려고 한단 말인가. 너는 바닷가의 나루 끝에 빠져죽고 말리라.” 호랑이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기세가 꺾여 큰 울음소리를 남기고 떠나갔지만 장사치는 두려움으로 길을 더 갈 수 없었다. 국사의 배려로 하룻밤을 암자에서 머물 게 된 장사치는 다음날 아침 고개를 넘어오는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조심조심 갯목으로 향했다. 장사치가 바닷가 나루 끝 마을에 이르고 보니 큰 소동이 벌어져 있었다. 집채만 한 호랑이가 수심이 두어 뼘밖에 되지 않는 바닷물에 코를 박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장사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국사가 호랑이에게 했던 언행에 대해 털어놓았고 사람들은 새삼 생명을 거룩하게 여기는 국사의 이야기를 전해 내리게 되었다. 공민왕 19년, 왕은 사자 편에 인장과 법의를 보냈다. 다음해 국사는 금강산을 순유했는데 왕이 사자를 보내 돌아오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국사는 오히려 사자에게 자신은 번다한 시정을 떠나 영영 산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왕에게 아뢰어 달라고 청했다. 이듬해 국사는 부석사에 들어가 절의 전각을 다시 짓는 큰 불사를 이루었다. 우왕 8년(1382년), 광교산 창성사에서 입적하니 향령(享齡) 76세, 법랍(法臘) 63세였다. 국사가 입적한 후에 사람들은 일반 스님들처럼 시신을 다비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부도를 만드는 대신 국사의 고향인 흥해에 무덤을 만들어 안장했다. 그 자리는 바로 국사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말이 묻힌 무덤 바로 옆이었다. 성석제<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 성석제의 '忠婢 단량과 물동이 아기'
소문은 발보다 빨랐다. 조선의 호랑이로 일컬어지던 좌의정 김종서가 수양대군 수하의 역사들에게 맞아죽었다. 그 직후 왕명으로 한밤중에 궁으로 호출을 당한 영의정 황보인과 수십 명의 대신이 궁성 문 앞에서 참살 당했다. 황보인의 집에서는 비통해 할 겨를도 없이 아들들이 다급하게 피난 짐을 꾸렸다. 언제 수양대군이 보낸 군사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황보인의 차남 황보흠은 부인 석을금에게 가장 믿을 만한 여종, 단량을 불러오게 했다. 단량이 오자 황보흠이 다급하게 일렀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한 데 뭉쳐 가다가 혹 저들에게 붙들리기라도 하면 한 두름에 모조리 죽고 말 것이네.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해. 우리 아기, 단이를 부탁하네. 우리가 죽고 나면 이 집안의 핏줄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것이 유모 손에 달렸네.” 단량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들키지 않고 도성을 빠져나갈 것인지부터가 문제였다. 단량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받아 들고는 조심스럽게 빈 물동이에 집어넣었다. 짐에서 꺼낸 은덩어리를 물동이에 넣은 석을금이 주저없이 머리에 꽂혀 있던 금비녀를 뺐다. 이어 손가락의 금반지를 뽑았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까지 몽땅 물동이에 집어넣은 석을금은 단량의 주름진 손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골목 밖 큰길에서 누군가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지 불빛이 어른거렸다. 단량은 물 길러갈 때 이고 다니던 물동이를 답삭 들어서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식구들을 향해 제대로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뒷문으로 달아났다. 도성 곳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단량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걷고 또 걸었다. 땀이 나면서 추위가 가셨다. 불빛이 없는 쪽으로만 가다 보니 어느새 동소문에 다다랐다. 웬일인지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수직 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단량은 문을 빠져나온 뒤 왕십리에 이르러서야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강보 속의 아기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울지도 않았고 보채지도 않았다. 단량은 아기를 다시 물동이 속에 넣은 채 걷기 시작했다. 단량이 아는 도성 밖 사람이라곤 어릴 적 단량의 젖을 먹고 자란 주인집의 둘째 딸밖에 없었다. 몇 해 전에 경상도 봉화 출신으로 주부 벼슬을 지내던 윤당과 혼인하여 떠나가며 단량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울었더랬다. 그로부터 보름 남짓 지난 어느날, 한양에서 천 리나 떨어진 봉화 땅에 거지꼴을 한 여자 하나가 흘러들어 윤당의 집이 어디인지 물었다. 물동이에 아기를 넣은 단량이었다. 발 없는 소문은 천리 준마보다 빨랐다. 윤당의 부인은 한양에서 단량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버선발로 달려나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뒤이어 집에 돌아온 윤당은 단량과 물동이에서 나온 아기를 보고는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눈을 뜬 윤당은 단호하게 말했다. “부인,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으시오. 도성에서 이 아기가 무사히 빠져나온 게 밝혀지는 건 순식간이오. 이 아기가 갈 곳으로 첫 번째 지목받을 곳이 바로 우리집이 아니겠소. 한시라도 더 머물면 우리집이 화를 입는 것은 물론이고 황보 씨의 가통 역시 영영 끊어지고 말 것이오. 아직 집 안팎의 사람들이 단량이가 떠도는 거지라고만 알고 있을 때 떠나보내는 것이 좋겠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쩌면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친정의 피붙이를 떠나보내며 황보 부인은 소리없이 통곡했다. 윤당의 예견은 정확했다.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십 년 가까운 귀양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량은 황보 부인이 준 쌀과 노자를 넣은 자루를 들고 물동이를 머리에 인 채 다시 길을 떠났다. 아기가 배고파 울 때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쌀을 씹어서 아기의 입에 흘려넣었다.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다. 때로는 방긋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꼭 빼닮아 잘 생기고 눈망울이 컸다. 단량은 땅끝에 닿을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호랑이도 늑대도 두렵지 않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이요 관아였다. 포졸들의 오랏줄과 육모방망이를 든 손이었다. 세상 끝에 가면 그들의 눈길과 손길이 미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단량이 구비구비 고개를 넘자 바다가 나왔다. 바닷가 마을에서 단량은 젖동냥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땅끝이 어디인지 물었다. 인심이 후한 마을 아낙들은 아기에게 기꺼이 젖을 먹였을 뿐만 아니라 장기현에서 만을 돌아가면 동쪽 땅의 끝이 나온다고 알려 주었다. 이레 후 동쪽 땅끝 구만리에 아기를 업은 여자가 나타났다. 구만리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는 땅끝이라 더 갈 수가 없다, 그만 가라’ 할 때의 그 ‘그만’에서 나왔다고 했다. 여자는 구만리의 이정을 찾아가 아들과 며느리를 돌림병으로 잃고 손자와 자신만 살아 남았다며 짚신마을에서 살 집을 마련해 달라고 청했다. 물론 빈 손으로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의 손에는 마지막 남은 아기 어머니의 금비녀와 금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여자에게서는 이정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품마저 느껴졌다.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바닷가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초가집에 할머니와 손자 하나가 살게 되었다. 집에는 황소와 암소가 한 마리씩 매져 있었고 암소의 배는 송아지를 배어서 늘 불러 있었다. 마당에서 닭을 쫓으며 뛰어노는 아기를 지켜보는 할머니 곁에는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가 마르고 있었고 콩과 벼를 담은 가마니가 쌓여 있었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흘렀다. 아기는 소년이 되었고 어느덧 열다섯 살, 호패를 찰 때가 되었다. 하루는 할머니가 소년을 불러 앉혔다. 한참동안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쓰던 단량은 일어나서 황보단에게 큰절을 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할머니?” 소년은 몸을 돌리며 단량을 만류했다. 단량은 손을 잡힌 그대로 소년에게 도련님, 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불렀다. 거기에는 소년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외침이 담겨 있었다. 단량은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모든 것을. “지금까지의 제 이야기는 봉화에 사는 윤 주부의 부인께서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간절히 비옵나니 그동안 이 무지한 종년이 주제넘고 불손하게 행동한 것을 용서해 주소서.” 소년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는 북쪽을 향해 꿇어앉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울음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부모에 대해 물을 때마다 어미인 자신보다 일찍 죽어버린 불효한 인간들에 대해 알 것 없노라고 모질게 대답하던 할머니에게서 느꼈던 두려움, 야속함, 뼛속 깊이 느껴지던 외로움이 울음과 눈물로 흘러나왔다. 이윽고 소년은 몸을 바로 세웠다. “할머니, 할머니는 영원히 나의 할머니시오. 이제부터는 제가 할머니를 봉양하리다.” 단량은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흔들었다. “제가 도련님을 모시고 산 것은 마땅히 할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 집안의 상하가 엄연히 다르며 상하 간의 충성이 있어야 집안이 지탱됩니다. 집안의 충이 있어야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도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학문을 힘써 닦으시고 가문을 다시 일으키시기를 비옵니다. 그리만 된다면 늙은 이 몸이 구천에서 할아버님을 뵈올 때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소년과 할머니는 다시 얼싸안고 울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으로 공을 세워 훈련원사평 벼슬을 제수 받은 황보순은 여종의 물동이 덕분에 살아나온 황보단의 5세 손이었다. 훗날 충신으로서의 명예를 되찾은 황보인의 비석과 황보단, 그리고 그의 후손의 비석들 곁에 작고 수수한 비석이 하나 더 세워졌다. 바로 스스로 알고 있는 바 충절을 다한 의로운 여종 단량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성석제<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9·끝> 성석제의 '예천, 꿈의 샘에서 봉황을 기다리다'
예천군의 예천(醴泉)은 ‘단술(醴)이 나는 샘’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인지 예천에는 샘이 많다. 또한 그 샘들은 꿈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천의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조선 중기에 다섯 번이나 판서를 지내고 좌·우의정을 역임한 명재상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다. 그는 어느날 예천의 고평리에 집을 짓고 우물을 팠다. 웬일인지 아무리 깊게 파도 물이 나기는커녕 뽀송뽀송하기만 했다. 고민을 하던 중 어느날 꿈에 용이 나타나 꿩 알만 한 돌을 주며 그 돌을 구덩이에 넣으면 물이 날 것이라고 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금당실에 볼일이 생겨 살았던 옛 집에 들렀다. 그때 그의 눈에 꿈에서 용이 주던 알처럼 생긴 돌이 눈에 띄었고 그 돌을 가지고 온 그는 마른 구덩이에 돌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구덩이에서 물이 펑펑 솟아나기 시작했다. 예천읍 고평2리에 있는 `중간샘'이라는 우물이 바로 이 우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샘에 관련된 꿈은 약포만 꾸었던 게 아니다. 예천읍의 청복리 마을에 박 씨와 김 씨, 두 씨족이 살았다. 어느날 두 씨족은 마을의 식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아 샘을 파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 곳에 샘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박 씨 노인의 꿈에 어떤 도인이 나타나 ‘이곳 마을 가운데의 논을 깊이 파면 물이 콸콸 쏟아질 것이다’라고 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샘을 파자 갑자기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물이 용솟음쳤다. 그리하여 그 샘을 용정(龍井)이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도 용정이라고 하였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용정 인근에는 오랜 옛날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도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두천(龍頭泉)’이라고 부르던 샘이 있기도 했다. 옥황상제가 다녀간 이후로 이 샘물을 마시면 피부병이 없어지고 옻이 오르지 않는다고 하여 ‘옻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질이 빼어난 온천이 나는 감천면, 샘을 찾는 선비와 동자의 전설이 있는 풍양면 청감리 등 예천에서 샘의 흔적을 찾는 것은 너무도 쉽다. 삼국시대에 예천을 지칭하던 명칭은 수주(水酒)였으니 물맛이 술처럼 향기롭고 좋다는 데서 나왔다. 수주와 예천의 글자 하나씩을 딴 이름인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예천읍 노하리에 있는데 이 샘은 물맛이 달 뿐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철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고 한다. 바로 이 샘 때문에 통일신라 때 예천이라는 행정 지명이 생겼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으나, 참고 문헌이나 구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샘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다. 깊이가 팔 미터나 되는 이 샘은 지하에서 용출하는 자연수로 지역민들에게 감로수(甘露水) 같은 역할을 했다. 주천이 있는 군방골은 조선 중기까지 관아와 함께 활을 만들던 궁방(弓房)이 모여 있었으며, 일설에는 동헌을 지키던 군방(軍房)이 있던 곳이라 하여 궁방골샘 또는 군방골샘이라 구전되고 있다. 예천의 명궁이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예천에 주천은 또 있다. 예천읍 서본리 선산봉으로 난 길 지고개에는 박샘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에 술이 나는 샘이 있다 하여 주고개(酒峴)라 했고 샘은 주천이라 했다는 것이다. 옛날 추운 겨울에 어느 가난한 집 아낙네가 남편에게 줄 술을 사서 조그마한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급히 고개를 올라가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나고 술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힘들게 구해온 술을 버리게 된 것이 슬프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남편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어 아낙은 그만 대성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울고 또 울다 아래를 보니 조그만 구덩이에 아까 쏟은 술이 괴어 있는 것이었다. 아낙은 그 술이나마 바가지에 담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남편에게 주었다. 이튿날 같은 고개를 지나다 보니 또 그 자리에 술이 괴어 있는 것이었다. 이 술을 가져다 또 남편에게 주고 하기를 반복했다. 곧 이 소문이 인근 주민들에게 퍼졌다. 이 샘에서 나는 물은 한 그릇을 마시면 술이고, 두 잔을 마시면 취하고, 세 잔을 마시면 물이 된다고 하여 사람들은 경계를 하면서도 애용했다. 어느날 이 고개를 넘던 물정 모르던 나그네가 있었다. 그는 물을 한 그릇 퍼마셔보고는 술임을 알자 마시고 또 마셔서 얼큰히 취한 뒤에도 마구 퍼마셔댔다. 그때부터 샘의 술이 모두 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상리면 도촌리에는 수수암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 맑은 옹달샘이 있다. 원래 이 옹달샘은 바위구멍이었다. 옛날 바위 옆에는 작은 암자가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암자에서 스님이 바위구멍에 대고 몇 사람이 왔다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사람 숫자만큼 국수가 나와서 사람들이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암자의 스님이 자리를 비웠다. 젊은 행자승이 욕심을 부려서 바위구멍에 대고 사람이 한 사람임에도 두 사람이라고 하자 국수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행자승은 나무작대기로 그 구멍을 쑤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벼락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갈라지며 붉은 물길이 솟아오르고 행자승은 놀라 그 자리에서 혼절하여 죽고 말았다. 이후 암자는 없어지고 국수가 나오던 구멍은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 되었다고 한다. 보문면 산성리 아랫마을에는 ‘원터’라는 돌로 쌓은 집터 모양의 돌담이 있었다. 옛날 이 곳은 안동, 의성 방면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 하여 길이 험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다녔다고 한다. 고을 원님이 이 곳을 지나는 행인들을 위해서 돌로 집을 짓고 이곳에 밥을 갖다 놓게 하여 오고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상하게도 밥을 먹고 가는 사람이 꼭 밥값에 해당하는 돈을 놓고 가곤 해서 그 돈으로 다시 그곳에 밥을 차려 놓을 수 있었다. 주천과 수수암의 비밀은 실상 이런 게 아닐까. 샘물이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듯 샘과 밥의 은혜와 덕으로 기갈과 굶주림을 면한 사람들이 돌아와서는 뒷사람들이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이 먹고 마신 만큼을 채워놓은 게 아닐까. 나그네에게 샘물을 나눠주는 것을 ‘급수공덕(汲水功德’이라고 한다. 예천에는 고개가 많고 그 고개를 넘는 사람들에게 샘은 예천의 무상(無償)의 선의를 맛볼 수 있는 약수였다. 그 공덕이 평화와 인의의 풍속을 예천에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수많은 샘에서 솟은 물이 계곡물을 이루고 시내가 된 뒤 합쳐져서 내성천이 되고 낙동강이 되어 누천년의 세월을 흘러갔다. 강은 회룡포의 절경을 빚고 삼강 주막과 사통팔달의 길 위로 무수한 나그네를 실어 날랐다. 중국의 <시경>에는 ‘봉황은 예천의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봉황은 신령스러운 새로서 수컷을 봉이라 하고, 암컷을 황이라 한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으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설명은 <산해경>에 있다. 내성천변 고고한 은행나무 소나무 왕버드나무여, 삼강의 회화나무여, 석송령이여, 금당실의 소나무들이여, 용궁의 팽나무 황목근이여, 보지 못하였는가. 예천에 부리를 적시러 날아온 봉황을. 성석제<소설가>
2021.05.25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8> 우광훈의 '인각사(麟角寺)로 향하는 길'
“얘야, 읍내에서 미꾸라지를 사야겠다.” 신녕 읍내에서 민물고기를 사자는 건 전적으로 고모님의 아이디어였다. 대구에서 산 물고기들은 장거리 이동에 따른 후유증으로 매번 물 속에 풀어두면 제자리에서 빙빙 맴돌 뿐이었다. 방생이란 숭고한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그 아이러니한 장면이 고모님은 매번 안타까우셨다고 한다. 그렇게 우린 신녕 읍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화북리로 향했다. 새벽에 한차례 소나기가 퍼부었던 터라 도로는 약간 질퍽했다. 그날은 고모부님의 기일이었고, 나, 고종형님, 그리고 고모님은 인각사 앞 학소대에서 방생을 할 예정이었다. 영천시와 군위군의 경계가 되는 고로면을 지나자 화북리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타났고, 이어 위천(渭川)이 펼쳐졌다. 그 맑은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다보면 화산(華山)과 옥녀봉 사이에 위치한, 마치 폐허 같은 절 하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인각사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만년에 이곳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천 삼백 여년이 지난 지금, 학자와 세인들의 무관심 속에 철저히 잊혀지고 훼손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은 관심도, 관심은 반가운 법, ‘인각사 복원 불사를 위한 천일관음기도’를 알리는 복원관련 플래카드며, 일연스님의 생애와 삼국유사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된 ‘보각국사 일연기념관’ 등 인각사는 복원에 대한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부산에서 온 단체관람객들이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인각사 경내를 자유로이 관람하고 있었다. 우린 관광버스 틈 사이에 주차를 한 다음, 곧장 옥녀봉이 바라다 보이는 학소대 앞으로 갔다. 8월의 햇살은 실눈조차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풍광은 그 뜨거운 열기를 단숨에 식히기에 충분했다. 고모부님은 작년 이맘 때 돌아가셨다. 치매와 그에 따른 휴유증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주소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는 등 가벼운 증상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외출 시 집을 찾지 못할 정도로 병환이 깊어지자, 고모부님은 고향인 이곳 신녕으로 내려오셨다. 당시 고모님 역시 편찮으셨던 터라 고모부님의 병간호는 전적으로 큰형님 몫이었다. 직장에 1년 간 병가를 내신 형님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고모부님을 바로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이곳 인각사에 들러 고모부님의 쾌유를 위한 108배를 드리셨다고 한다. 위천에서의 방생이 끝나고, 우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각사 남쪽에 위치한 화산을 올랐다. 고모부님이 직접 만드신 돌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3년 전인가 아내와 함께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난 마치 마이산 돌탑을 재현해 놓은 듯한 신묘한 광경에 감탄사를 연발해야만 했다. 원뿔과 사각뿔의 형태로 산재해 있는 이 돌탑의 무리를 역사라고 하기엔 그 기간이 너무 짧고, 문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적이었지만, 그 둘을 아울러 표현하더라도 결코 부족함이 없는 광경이었다. 칠순을 넘어선 노인이 5미터 가까이 되는 높이와 3미터 이상의 직경을 가진 돌탑을 그것도 가파른 언덕길에 10여 개 이상이나 쌓았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그 탑을 쌓기 위해 주위 나무들을 베고, 땅을 파헤치느라 인근 마을 주민들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와 주의를 받기도 했지만 고모부님은 결코 탑에 대한 집착을 꺾지 않으셨다고 한다. 형님은 잠시 탑의 언저리에 돋아난 잡초를 정성껏 뽑으셨다. 그리고 우린 돗자리를 펴고 앉아 고모님이 손수 준비하신 도시락을 먹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선 옥녀봉의 가파른 지맥이 곤두박질치듯 위천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앞으로 국사전, 명부전, 산령각 등 인각사의 당우가 듬성듬성 펼쳐져있었다. 넓은 땅덩어리에 비하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었다. 지난 가을, 오대산 월정사에 들렀을 때 느꼈던 그 인위적인 비만과는 또 다른 불균형이었다. 난 그 황량함이 비만의 전초가 되지 않길 기원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대구로 향하기 전, 우린 새로 리모델링한 보각국사 일연기념관에 잠시 들러 일연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흔적들을 관람했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은 일연과 삼국유사에 대한 나의 놀라운 무지였다. 그것은 나의 얄팍한 역사의식에 편승해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악화되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한 감정도 잠시, 고속도로를 내달려 대구로 접어들 때면 난 어김없이 그리이스 로마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서재에 꽂혀있는 ‘한권으로 읽는 삼국유사’나 ‘사진으로 읽는 삼국유사’와 같은 책들도 나의 이러한 증상을 완화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무지와 편견 속에서도 나를 감동으로 몰아넣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다. 일연스님은 당시 승려로서 최고의 위치인 국사에 책봉되었지만 항상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시는 인각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 뜻이 매우 간절했기에 거듭 청하자 충렬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 스님이 내려온 이듬해 어머니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윤기 선생은 자신의 저서 <꽃아 꽃아 문 열어라/열림원> 서문에서 ‘일연 스님에게 고려의 신화 설화 시가 등의 유사(遺事)는 사기(史記)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마침내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하고 있다. 선생은 삼국유사의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고자 우리 신화를 ‘어머니’에 비유했을 터이지만 나에겐 왠지 어머니란 그 본래 의미에 더 애착이 갔다. 아니, 솔직히 고백컨데 나에게 인각사는 삼국유사의 산실이었다는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김견명(일연의 속명)이란 한 효성스런 아들이 자신의 만년을 노모와 함께 했다는 그 감동적인 사실이 더 눈물겨웠다. 그것은 아마 ‘당시 승려로서는 최고의 위치인 국사에 책봉되었지만 항상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시는 인각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는 일연의 전기와 자신의 직장까지 쉬어가며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병간호했던 큰형님의 지극한 효성이 중첩되어 빚어낸 결과이리라. 사실, 치매란 가까운 사물과 사람으로부터 시작해 결국 자신의 모든 것까지 깡그리 잊어버리는 무서운 병이다. 고모부님 또한 그러셨다. 화투를 치실 때 상대방의 패까지 고려하시던 분이, 어느 날부터인가 눈에 보이는 패에만 집착하더니 결국 같은 패도 맞추지 못하는 비극. 그 비극의 종점은 결국 자신의 아내와 작은 아들마저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니라 큰 형님에 대한 잊지 않은 사랑이셨다. 그렇다. 고모부님은 자신의 큰 아들인 형님만은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 단편적 기억까지도 끝까지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고모부님은 임종 전까지 “정우야, 나의 아들아……”하시며 눈물 흘리셨다고 한다. 나는 인각사에만 오면 고모부님과의 추억과 더불어 수백 년 전 이곳에 살았다는 한 효성 깊은 아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나에게 인각사는 위대한 역사가이자 저술가의 숨결이 깃든 곳도, 당대 최고의 고승이자 불교학자의 엄정함을 기리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은 78세의 아들이 77년을 홀로 산 95세의 노모를 모시며 1년 남짓 자신의 말년을 보낸 곳, 그리하여 이듬 해 자신의 노모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그 불효를 통곡하며 남은 생을 그리워한 한 효성 깊은 아들이 살다간 곳이었다. 세상 그 어떤 풍경보다, 아니 그 어떤 예술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역시 인간이란 사실을,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삶의 기본을 이곳에서 다시 한번 돋을새김 한다. 우광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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