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3] 고려말 충신 율은 김저...공민왕 충심으로 보필…뛰어난 지혜·경륜으로 쓰러지는 나라 지탱

  • 김진규 소설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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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31 07:14  |  수정 2022-10-31 08:03  |  발행일 2022-10-31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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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은풍면 율곡리 작은 밤실마을. 김저는 공민왕을 모시고 홍건적의 난을 피해 있던 이곳에 은둔하면서 밤나무 1천여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밤나무를 심은 것은 밤나무가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김저가 그토록 모셨던 공민왕은 요승 신돈의 세치 혀에 휘말려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김저까지 내쳤으나, 그는 공민왕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생전의 공민왕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되새기며 함께 피란했던 예천에 남하정(南下亭)을 짓고 밤나무를 심었다. 밤나무가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자, 불사이군의 충정으로 이성계에게 맞서 죽음을 맞았다.

어릴적부터 총명해 19세 대과 급제
공민왕 시해 당하자 관직까지 버리고
왕과 은둔했던 예천 은풍현으로 가
1천여 그루 밤나무 심고 절의 지켜
지역 위해 학사고 짓고 남하지 편찬


#학문을 사랑한 소년

고려 충렬왕 30년인 1304년 11월4일(양력 12월1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장흥부(長興府·현 전남 장흥) 벽계리(碧溪里)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율은(栗隱) 김저(金佇·1304~1389)였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후예이자 흥무대왕 김유신의 후손이라는 어마어마한 배경이 그를 따라왔다. 아울러 그는 훗날 명장이자 충신이 될 최영의 조카이기도 했다.

김저는 외모와 지능, 어디 한 군데 부족한 곳이 없는 소년이었다. 집안의 기대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김저가 평소처럼 공부하던 어느 날이었다. '서경(書經)'의 '우공편(禹貢篇)'을 읽다가 벌떡 일어섰다. 함께 독서 중이던 아버지가 깜짝 놀라 어찌 그러느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가(可)와 부(否)의 어려움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김저의 나이 고작 10세였다. 옳고 그름에 대한 문리를 깨우친 김저는 이후 성현의 말씀에 더 집중했다. 그리고 15세가 되던 1318년(충숙왕 5)에 당시 단산(丹山·현 단양)에 머물던 석학 우역동(禹易東) 선생을 찾아갔다. 성리학에 정통한 데다 성품까지 강직한 그의 문하에서 김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러는 동안 김저의 명민함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까지 흘러들었다.

모두의 바람대로 김저는 1320년(충숙왕 7)에 생원시에 합격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진사시까지 통과했고, 이태 뒤에는 19세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했다. 당시는 원나라의 간섭 속에서 왕이 수시로 교체되고 왕실과 권신 간의 내분이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와중에도 김저는 차근차근 관로를 밟았고, 48세가 되던 1351년(충정왕 3)에는 통훈대부 순천부윤(通訓大夫順天府尹)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해가 채 바뀌기도 전에 충정왕이 유명을 달리하고 그의 뒤를 이어 원나라에서 10년 동안 볼모 생활을 하던 공민왕이 돌아와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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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보문면에 자리한 율은전시관에는 김저 선생 영정과 각종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배 그리고 유배

공민왕은 지와 덕을 갖춘 군주였다. 신료와 백성의 신망을 얻어 원나라에 빼앗긴 국권 회복에 힘을 기울인 과감성과 결단력도 있었다. 이를 원나라가 곱게 볼 리 없었다. 공민왕을 내치라는 협박이 시작되었다.

김저는 격분했다. "신 김저, 원국의 정부에 부당함을 항의하겠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각오한 바입니다."

사신과 함께 원나라에 닿은 김저는 원순제 앞에서 공민왕의 폐위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원순제가 격노했음은 당연한 이치여서 김저는 남황(南荒·베트남)으로 유배를 당했다. 귀양살이를 이어가던 김저는 1355년(공민왕 4) 봄이 되어서야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초췌한 모습의 김저를 왕이 버선발로 나가 맞이했다.

"내 그대에게 새 이름을 줄 것이다. 사명은 손(遜), 자는 충국(忠國)이다."

왕의 신임 속에 성균관사성·정당문학(政堂文學·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종이품 문관) 등의 고위관직을 이어가던 1359년(공민왕 8) 겨울이었다. 원나라의 농민반란군 홍건적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을 하고 사라졌다. 약 한 달 뒤에는 의주가 함락됐고, 정주와 인주를 거쳐 서경까지 점령당했다. 이후로도 홍건적은 간헐적인 침략으로 고려를 괴롭혔다. 그리고 1361년(공민왕 10) 10월, 다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침입했다. 1차에 비해 규모가 커서 고려군은 수세에 몰렸고, 왕은 개경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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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표절사 전경. 1864년에 화마를 입었으나 1989년에 중건됐다.

김저는 왕을 모시고 예천 은풍현으로 향했다. 그곳에 머물면서 어림성(御臨城)을 쌓는 등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후 안동·상주·청주 등지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 2월에 환도하기까지 김저는 충심으로 왕을 보필했다. 돌아온 개경은 어수선했다. 안 그래도 풍전등화인데 왕비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으면서 왕이 정사에서 손을 놓아버리기까지 했다. 요승이라 일컬어지던 신돈(辛旽)이 중용되면서 나라는 더 엉망이 되었다.

"신돈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 자를 내치셔야 전하께서 사시고 이 나라도 삽니다." 김저의 고언에 왕은 발끈했다. "감히 나를 거스르느냐. 김저를 진도로 유배하라."

하지만 목은 이색 등이 귀한 인물을 그리 버려선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구명해 반년 만에 송환되었다. 이후로 김저는 성균관대사성·예문관대제학 등의 자리에서 무르익은 학문과 경륜으로 스러지는 나라를 지탱했다. 어느덧 그의 나이가 일흔을 향하고 있었다.

#밤나무 1천 그루와 함께한 삶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살해당했다. 때로는 원망한 적도 있으나 공민왕은 김저가 사랑해 마지않는 군주였다. "아침 내내 뒤숭숭한 것이 마음이 그리도 불편터니 국상을 당하려고 그러했구나." 김저는 피눈물로 통곡하며 만시를 지어 공민왕을 배웅했다.

一生毓慶終無得/千古凶音遽不當/今日宮前輓素輦/深恩遙憶淚滂滂.

일생 동안 가꾼 경사가 끝내 부질없어졌으니/ 천고의 흉음을 내 어찌 감당하리오/ 이제 궁 앞에 와 상여를 매고 보니/ 님의 은혜가 북받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구나.

김저는 생전의 공민왕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되새기며 관직을 버리고 피란지였던 예천 은풍현 사동(巳洞·현 은풍면 율곡리)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공민왕의 손때가 묻은 어림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저는 그곳에 남하정(南下亭)을 짓고 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밤나무가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밤나무는 종자에서 싹을 틔우고 그 껍질을 밀어 떨어뜨리며 올라가는 여타의 식물과 달리, 내려가는 뿌리와 올라가는 줄기가 맞닿는 경계에 껍질을 매다는 특징이 있었다. 길게는 100년 이상도 달려 있어 선조를 잊지 않는 나무라 일컬음을 받았다. 나라가 흔들릴지언정 고려의 선비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그에게 맞춤한 나무였다. 김저는 그 밤나무를 1천여 그루가 넘게 심고 지근에 머물렀다. 일명 율은거사(栗隱居士)의 은둔이었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1378년(우왕 4), 왕이 김저를 찾았다. 난세를 헤쳐가는 데 힘을 보태 달라는 간곡한 청이었다. 김저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대호군(大護軍·대장군)을 제수받아 책임을 다했으나, 이듬해에 다시 예천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가꾼 밤나무숲에 닿고서야 그는 숨다운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이후 김저는 예천에서의 일상에 집중했다. 학사고(學士庫)를 짓고 남하지(南下誌)를 편찬하는 등 지역을 위한 일에도 앞장섰다. 겉으로는 조용한 생활이었으나 실상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눈에서 피눈물이 마를 새가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국충정의 한을 품고 옥사

1388년(우왕 14), 나라가 뒤집어졌다. 명나라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우왕은 폐위돼 황려부(黃驪府·여주)로 유배되었고, 충신이자 명장인 최영은 처형되었다. 김저는 경악했다.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달음에 개경으로 올라가 우왕의 신임을 받았던 정득후·곽충보·변안렬 등과 접촉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황려부로 향해 우왕을 만났다.

"나는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피를 토할 것 같은 이 한은 이성계가 죽어야만 풀릴 터. 율은 그대의 충심을 익히 안다. 명하노니 그를 척살하라."

"불사이군(不事二君)입니다. 신, 받잡겠나이다."

김저는 팔관일(八關日)을 거사일로 잡았다. 당시 고려는 팔관회를 매년 10월15일과 11월15일에 서경과 개경에서 국가적 행사로 개최하였는데, 이성계가 반드시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사 당일에 곽충보의 밀고로 붙잡혀 순군옥(巡軍獄·조선의 의금부)에 갇혔다. 심문 끝에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고, 김저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성계는 그의 시신을 저자로 끌고 나가 베어버리게 했다. 집안도 풍비박산 났다. 정경부인 경주김씨는 스스로 남편의 뒤를 따랐고, 아들 김전과 손자 김두 또한 끝내 목숨을 버렸다. 사람들이 일문삼세(一門三世)의 충절이라 칭했다.

처참한 죽음이었으나 김저의 충절은 스러지지 않았다. 조선 제11대 왕 중종이 추구한 덕치주의의 흐름에 따라 신원이 복원된 데 이어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표절사(表節祠)가 건립된 것이 그것이다. 후손들은 목은 이색·야은 길재·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사은(四隱)으로 추앙받아 마땅한 김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제향을 올렸다. 이후 표절사는 1864년(고종 1)에 화마를 입었으나 1989년에 중건되었다. 공교롭게도 김저가 유명을 달리한 해로부터 정확히 600년이 되던 해였다.

오래전 김저의 장례를 치르던 날 푸른 새 한 마리가 홀연히 날아와 그의 시신 위를 날며 '고려충, 고려충!' 하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표절사 사방이 죄다 나무숲이고 풀숲인 바,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뭇 새 중에 그 푸른 새의 후손이 있을지도 모르리라.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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