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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9> 주왕산국립공원 주방계곡 지구 ‘주방천 페퍼라이트’
길과 천(川)이 나란하다. 거의 기울기를 느낄 수 없는 주왕산의 초입, 주왕산의 심장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주방천(周房川)이 낙낙한 품으로 흘러간다. 대전사 입구를 지나면 천(川)의 품은 점점 좁아진다. 길은 상쾌한 그늘에 싸여 ‘이제 산에 들었구나’라는 느낌이 단번에 드는데, 경사는 완만하고 산길은 부드럽게 사각거린다. 그러는 동안 계류는 풍성한 빛을 안고 착하고 순한 사람처럼 바위들을 어르며 상냥하게 흘러간다. 천변에는 수달래 관목들이 무성하다. 주왕이 흘린 피가 꽃으로 피어났다고 했던가. 꽃 지고 초록이 우거진 계곡이건만 얼핏 수달래 꽃 그림자를 본 듯하다. 아니 어쩌면, 오래된 핏자국이었나. #1. 한순간에 일어난 사건의 흔적 주왕산은 약 7천만 년 전 용암과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산이다. 산을 피라미드로 그려보면 맨 아래에는 현무암, 그 위에는 응회암, 그 위에는 안산암과 퇴적암, 그리고 다시 응회암이 맨 꼭대기를 차지한다. 화산 폭발은 아홉 번 이상. 그 중 처음으로 터져 나온 용암이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자리한 현무암이다. 이는 대전사 부근에 소규모로 나타나 ‘대전사 현무암’이라 부르는데, 대전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는 한동안 길벗이 되어주는 딴딴한 암벽이 그것이다. 일명 ‘후추암’ 페퍼라이트1억년전 지각 융기로 분출된 용암완전히 굳기 전의 퇴적암과 부딪쳐불꽃처럼 깨지고 퍼즐처럼 하나 돼 다양한 모습의 페퍼라이트표면 거칠고 요철이 많은 ‘아아용암’퇴적층 뚫고 나온 상중하 위치 따라유동·아각·구상형 3가지 형태 보여 현무암층 아래에는 두꺼운 퇴적암층이 깔려 있다. 주왕산이 존재하지 않았던 1억 년 전에 지각의 융기로 호수가 생겨났고 이후 모래와 진흙 등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이다. 용암은 이 퇴적암이 완전히 굳기 전에, 아직 차갑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할 때 터져 나와 흘렀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부딪치자 둘은 폭발적으로 뒤섞여 불꽃처럼 깨지고 퍼즐처럼 서로를 채워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암석이 ‘페퍼라이트’다. 길고 긴 시간을 다루는 지질학에서 페퍼라이트의 생성은 한순간의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왕산의 페퍼라이트는 대전사부터 자하교(제1폭포)까지 등산로를 따라 관찰된다. 페퍼라이트가 관찰되는 등산로를 이웃해 주방천이 흘러 ‘주방천 페퍼라이트’라고 한다. 주왕산의 주방천 페퍼라이트는 현무암질의 용암과 셰일이 혼합되어 있는 암석으로, 현무암 내에 적색의 셰일이 작은 입자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쉽다. 설핏 보면 붉은 꽃 그림자 같고, 문득 떠올리면 주왕이 흘린 피같고, 거울 보듯 하면 볼에 핀 기미 같은데, 누군가에게 그것은 ‘땅 위에 후추를 뿌려 놓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페퍼라이트, 일명 ‘후추암’이라 불린다. 페퍼라이트는 대전사 현무암층에서 쉽게 볼 수 있다.#2. 대전사 현무암과 페퍼라이트분출된 용암은 현무암질 용암류의 일종인 ‘아아용암’으로 분류된다. ‘아아’는 거칠고 들쑥날쑥한 요철이 많은 가시모양의 표면을 가리키는 하와이 원주민의 언어라 한다. 아아용암은 비교적 점성이 높아 멀리 흐르지 못하고 표면이 거친 용암지대를 만든다. 대전사 현무암층이 소규모로 분포하는 것은 아아용암의 성질 때문일 것이다. 용암은 여러 번 분출했다. 반복된 분출로 축적된 대전사 현무암층은 최고 약 60m 두께를 가지는데, 7m에서 10m의 현무암층 내에서 페퍼라이트가 협재되어 나타난다. 학계에서는 12매의 용암과 9매의 페퍼라이트가 교호하면서 대전사 현무암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각 용암층과 페퍼라이트 층의 두께는 다양하고, 실제 눈으로 확인되는 현무암은 매우 치밀한 모습이다. 페퍼라이트를 구성하는 현무암은 깨진 부스러기(쇄설)의 형태로 나타나고, 셰일은 현무암 쇄설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불규칙한 형태를 이룬다. 이러한 형태는 둥근형, 유동형, 모서리가 둥근 각형(아각형), 또는 불규칙한 괴상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주왕산의 페퍼라이트에서는 세 가지 형태를 관찰할 수 있다.#3. 세가지 형태의 페퍼라이트맨 처음 분출된 용암은 두껍고 촉촉한 퇴적층을 뚫고 나왔다. 용암의 엄청난 열기에 퇴적물 속의 수분이 기화되면서 셰일과 현무암 사이에 증기막이 쳐졌다. 증기막이 온도차를 상쇄시키고 둘 사이의 직접적인 반응을 막자 셰일은 부드럽게 유동하며 둥글어졌다. 이것이 하부에 형성된 구상 페퍼라이트다.중부에는 셰일과 현무암의 경계가 대체로 둥그나 각을 가지고 있는 아각형의 페퍼라이트가 나타난다. 구멍이 많은 붉은 현무암편과 치밀한 현무암편이 뒤섞여 있고 이들 사이를 소량의 셰일이 메우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처음의 분출 이후 부유했던 퇴적물이 다시 내려앉아 소량의 퇴적층을 형성했고, 그것이 굳기 전에 다시 현무암질의 마그마가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상부에는 유동형의 페퍼라이트가 형성되어 있다. 이는 용암에 사로잡힌 셰일이 용암을 타고 흐르면서 생겨난 것이다. 결국 퇴적물의 공급량, 그에 따른 수분량이 페퍼라이트의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쓱 만져본다. 야무진 고집쟁이처럼 단단하고 견고하다. 부드럽지 않다. 그러나 음지에서는 시원하고 양지에서는 따스하며 현무암과 셰일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연분처럼 서로를 꽉 붙잡고 있다. 뜨겁고 뾰족하고 들쑥날쑥한 아아용암은 차갑고 부드러운 셰일과 만나면서 꽤 원만해진 것같다. 주방천 페퍼라이트는 대전사 현무암층이 겪은 사건의 전말을 보여준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공동 기획:청송군 ■ 주방천 수달래제>>> 5월 계곡 붉게 물들이는 꽃…개울에 띄워 주왕의 넋 위로해마다 5월이면 주방천 계곡 주변으로 수달래가 무리지어 피어난다. 진달래보다 더 짙고, 하나의 꽃잎에 스무 개의 반점을 가진 선득하고 처절한 붉은 꽃. 이는 진(晉)나라의 후예 주왕(周王)이 이곳에서 흘린 피라는 전설이 있다. 진나라의 재건을 위해 반역을 일으키다 실패한 그는 주왕산 주왕굴에 숨어 지내다 신라 장군의 화살에 최후를 맞았다. 그가 흘린 피가 주방천을 붉게 물들였고, 그 이듬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꽃이 물가에 흐드러졌다. 그것이 수달래였고 사람들은 그를 주왕의 넋이라 믿었다. 수달래 꽃이 필 때면 주방천 계곡에서는 축제가 열린다. 사람들은 수달래의 꽃잎을 개울물에 띄워보내며 주왕의 넋을 위로하고,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기원한다. ■ 주왕굴과 무장굴>>> 주왕 은거하다 최후…병장기 보관하던 곳주왕산 등산길을 따라 오르다 자하교를 건너면 주왕굴 가는 길이 있다. 300m쯤 가면 먼저 주왕암(周王庵)에 닿고 그 오른쪽 골짝으로 접어들면 햇살 한줌 들지 않는 협곡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협곡을 오르는 철 계단 끝에 주왕이 숨어 지냈다는 주왕굴이 자리한다. 굴 입구 한쪽으로 물줄기가 흐르는데, 큰 비가 내리면 폭포로 돌변하고 한겨울에는 얼음벽이 된다고 한다. 주왕은 이곳에서 잠깐 고개를 내미는 사이 신라의 마장군에게 들켜 화살을 맞았다. 주왕암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난 희미한 샛길을 오르면 주왕의 군대가 병장기를 보관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무장굴(武藏窟)이 나온다. 무장굴에서 바라보이는 주왕산 기암단애의 모습은 대전사에서 보는 기암의 묵중한 존재감에 비견될 만하다. ☞ 여행정보주방천 페퍼라이트는 대전사 입구에서부터 동쪽으로 주방천을 따라 약 800m까지 분포하는 대전사 현무암층에서 가까이 관찰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대전사까지 600m 정도의 주방천변에서 주왕산의 기반암인 퇴적암층도 볼 수 있다.주방천 페퍼라이트는 주왕산 대전사 입구에서부터 등산로를 따라 나타나는 ‘대전사 현무암층’에서 쉽게 관찰된다.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관광객들의 길벗이 되어주는 지질명소다. 페퍼라이트는 완전히 굳기 전의 수분 함량이 많은 퇴적암과 땅속에서 분출한 뜨거운 용암이 만나 뒤섞여 생겨난 암석이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주방천 페퍼라이트 분포 지역. 초록빛 숲에 가려진 등산로와 풍성한 빛을 품은 주방천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풍화에 의해 절벽에서 떨어져나온 암석이 사면에 쌓여 만든 애추(talus)지형.
2016.06.14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8> 주왕산국립공원 주방천 계곡 지구 ‘기암 단애’
그들이 온다. 신들의 행차시다. 살랑대는 큰 키의 가로수들과 조각을 이어 붙인 긴 띠 같은 사하촌의 가겟집들 저 너머에서부터 둥둥 구름 탄 듯 오고 있다. 선조 때 사람 운천(雲川) 김용(金涌)은 저들을 보고 ‘은하수 가운데 옥경을 열었네’라고 했다는데, 아예 옥경을 열고 나와 위풍당당히 다가오신다. “등산 잘 하고 오세요.” 식당 아주머니의 선드러진 음성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다. 신들은 금세 일곱 개의 바윗덩어리로 변신해 있다. #1. 단애의 탄생일대는 호수였다. 그때가 약 1억 년 전. 이후 호수 바닥에 잠겨 있던 고생대와 중생대의 시간 위로 천천히 퇴적물들이 흘러들어와 쌓이고 쌓였다. 시간이 흘러 그 퇴적층이 무려 600m에 다다른 어느 날, 지반은 융기하여 육지가 되었다. 그리고 중생대의 끝 무렵에 이르러 퇴적층의 약한 틈을 뚫고 격렬한 화산 폭발과 함께 용암과 화산재가 쏟아져 나왔다.용결 회류응회암이 비·바람에 침식수직절리 따라 거대 암봉으로 분리손가락 모아 하늘 가리키는 모양새세상 모든 근심·걱정 없애주는 듯용암은 불의 강으로 흘렀고 그 위로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덮쳤다. 300℃에서 800℃에 이르는 고온에 점성이 강한 화산재였다. 그것은 공중으로 흩어지지 못한 채 지표면을 따라 흘러내려 저지대를 메웠다. 그 높이는 최고 350m에 달했고, 쌓인 화산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식어 굳어졌다. 날지 못한 뜨거운 화산재는 점점 식어가는 동안 응어리처럼 치밀하고 단단해졌다. 이것이 용결 회류응회암이다. 그 동안 몸에는 생채기와 같은 세로로 긴 틈이 생겼다. 이것이 절리다.이후는 비와 바람의 몫이었다. 수직의 절리를 따라 침식이 이루어졌고, 약한 부분은 조각되었으며 강한 부분은 남아 웅장한 봉우리들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이 되었다. 바로, 주왕산(周王山)이다. 산을 이룬 그 절벽들 중 하나, 폭 150m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는 6개의 수직 절리를 따라 7개의 암봉으로 분리되어 무더기로 펼쳐졌다. 그것이 ‘기암 단애’다.#2. 깃발 휘날리던 자리엔 소나무가주왕산. 청송에서 가장 이름난 산이다. 옛날에는 바위로 병풍을 친 것 같다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 했고, 골 깊어 숨어살기 좋다 하여 대둔산(大遯山)이라고도 했으며, 신라의 왕족 김주원(金周元)이 머물렀다 하여 주방산(周房山)이라고도 했다. 옛 지도에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는 이름은 주방산이다. 그러나 현재 이름(주왕산)을 갖게 된 연유는 진(晉)나라의 후예 주왕(周王)의 전설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전설에 의하면 중국 당나라 시대에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진나라의 재건에 나선다. 주왕은 곧바로 반역을 일으키지만 실패해 이곳으로 숨어들어왔다. 주왕을 잡아달라는 당의 요청에 신라는 마일성(馬一聲) 장군과 그의 형제들로 하여금 주왕을 토벌케 한다. 신라군은 산 깊은 굴 속에 숨어 있던 주왕을 찾아내었고 이에 마 장군은 산의 첫 봉우리에 깃발을 꽂는다. 가장 도드라진 봉우리, 가장 잘 보이는 봉우리, 바로 기암(旗岩)이다. 대개 ‘기암’이라고 하면 ‘기이하게 생긴 바위(奇巖)’를 떠올리지만, 기암단애의 기(旗)는 깃발을 의미한다. 일설에는 주왕이 전투를 시작할 때 깃발을 꽂아둔 곳이라고도 한다.기암은 주왕산의 초입에서부터 사하촌을 지나오는 동안 내내 시선을 압도한다. 그 풍경이 장엄하다. 주왕산의 얼굴이고 상징이며 항구적인 위용이다. 그 옛날 마 장군의 선택에는 머뭇거림이 없었을 것이다. 기암의 봉우리들은 둥그스름하다. 그 자리가 응회암이 흐르던 표면이거나 분출 시기가 서로 다른 응회암 간의 경계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응회암이 냉각되면서 굳을 때 어느 정도 완만한 구릉대의 평탄면을 유지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 기암 꼭대기는 약 231㎡(약 70평)의 두꺼운 흙으로 덮여 있다. 이어져 온 침식과 삭박의 결과다. 그리고 거기에는 깃발 대신 소나무와 관목이 스스로 자라고 있다.#3. 아홉 번 이상의 화산 분출검독수리의 두툼한 가슴같기도 하고, 검은 명주로 지은 익선관(翼善冠, 임금이 정무를 볼 때 쓰던 관)같기도 하다. 기암단애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묘사는 그 모습이 산(山)자와 비슷하다는 것과 사람의 손가락을 모아 하늘을 가리키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참으로 정직하고 담백한 표현이다. 기암은 손가락이 나뉘듯 수직 절리가 발달해 있다. 또한 손가락의 마디나 주름처럼 지표와 평행한 판상절리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손가락의 굵기가 서로 다른 것처럼 직경이 큰 주상절리와 직경이 작은 주상절리들이 나란한데, 이들은 손가락을 모은 듯 띠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다.이러한 모습은 고온의 화산재가 짧은 주기를 가지고 여러 번 분출하면서 어느 정도 독립적인 냉각과정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학계에 의하면 주왕산 응회암에서 9개 이상의 흐름 켜가 나타난다고 한다. 적어도 아홉 차례 이상 화산이 반복적으로 분출했다는 이야기다. 그 분출구는 주왕산에서 남동쪽으로 수㎞ 떨어진 곳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기암단애는 주왕산의 대표적인 들머리인 대전사 앞마당에서 바라볼 때 가장 묵중한 존재감을 가진다. 보광전의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올려 진 손은 마치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처럼 보인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없애주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손짓. 동국여지승람의 청송도호부 편을 쓴 옛사람도 그렇게 느꼈을지 모른다. ‘반드시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니더라도 그대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갈 수 있으리라’ 했으니….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참고=△청송지질공원 △지리교사 이우평의 한국지형 산책 △청송의 향기 △한국 민속 문학사전 △황상구, 2015, 청송국가지질공원 추가지질명소 개발 및 인증조건 보완, 청송군 공동 기획:청송군 ■ 주왕암 아래에 자리한 대전사>>> 임란때 사명대사가 승군 훈련 ‘호국사찰’대전사는 주방천 계곡을 옆에 끼고 저 육중한 기암 아래 자리한다. 신라 문무왕 12년인 672년 의상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고려 태조 2년인 919년 주왕(周王)의 아들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대전사는 거듭된 화재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데, 이곳이 배가 바다에 떠서 항해하는 지세라 조선 중기 앞뜰에 우물을 판 것이 화재의 원인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찰의 오른쪽 밭에 우물을 메운 흔적이 전설의 전달 매개체로 남아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570호인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 산령각 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하던 호국사찰이었다고 한다.■ 주왕산 지명유래 또 다른 전설>>> 신라 왕족 김주원 은거…주원왕으로 불려주왕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주왕 전설의 실체가 중국 주왕이 아닌, 신라 왕족 김주원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설이 있다. 김주원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7세손으로, 선덕여왕 죽음 후 원성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주왕산에 은거하며 ‘명주군국(溟州郡國)’이라는 독자적인 국호를 세운다. 또한 그에 걸맞은 통치조직을 구축하고 군사기반까지 다진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다. 사후에는 ‘주원왕’으로 불리게 된다. 그의 아들 김헌창과 손자 김범문이 대를 이어 왕권쟁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물론 중국 주왕과 김주원 두 이야기 모두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행정보31번 국도 주왕산휴게소에서 914번 지방도를 타고 부동면 쪽으로 가다 주왕산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상의리로 들어가면 된다. 주차료는 5천원, 입장료는 어른 2천800원, 청소년과 군경은 1천원, 어린이 600원이다. 주차장에서 대전사까지는 600m 정도. 기암을 바라보면서 전진하는 길이다. 장군봉에서도 기암의 수직 절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드론으로 촬영한 주왕산 기암단애. 수직 방향의 침식으로 인해 크게 7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손가락을 모아 하늘을 가리키는 모양새가 절경이다.기암단애 벽면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형태의 절리. 주상절리가 주를 이루고 지표와 평행한 판상절리도 부분적으로 발달해 있다.기암단애는 주왕산 들머리에 있는 대전사 앞마당에서 바라볼 때 가장 묵중한 존재감을 가진다.
2016.06.07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7> 보현천변 ‘수락리 주상절리’
백두산 천지의 한가운데에 조각배를 띄우고 누우면 어떤 기분일까. 청송 현서면의 수락리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천지는 화산의 분출로 만들어진 함몰 칼데라다. 지금 서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과 같다. 너무 크고 또 너무 오래되어서 한번에, 단숨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오래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칼데라, 그 안. 한때 뜨겁게 흔들렸고, 천천히 냉정과 고요로 돌아오는 동안 깊게 주름진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다. 조각배를 탄 듯 짜릿하다. #1. 수락리 보현천변의 돌기둥들맑은 보현천(普賢川)이 북쪽으로 흐른다. 좁은 길과 수수한 마을과 작은 밭들은 이 맑은 천과 얼마나 다붓한지. 갈천(葛川)마을을 지나 수락리(水洛里)에 들어서자 길은 서서히 하늘로 날아올라 허공을 가르며 뻗어 나간다. 천(川)과 옛길이 저 아래로 함께 멀어진다. ‘조선지지자료’에 보현천은 수락리 수락천(水洛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갈천에서 발원하여 안덕면에서 길안천과 합류해 낙동강으로 가는 여정에서 ‘시냇물이 폭포처럼 흐른다’는 수락리는 중요한 땅이었던 모양이다. 화산재가 굳어서 형성된 용결응회암주상절리 중에서 드물게 생기는 형태 중생대 백악기 형성된 칼데라 중심에풍화·침식 겪고 무성한 숲 사이 ‘우뚝’ 길의 양쪽으로 500m에서 800m 고도의 높은 산들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산 중턱에는 이따금 세밀하게 주름진 바위가 무성한 숲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수락2교에 다다르자 보현천은 까마득한 아래에 있었고 옛길은 물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가장자리에는 사각, 오각, 육각형 등의 돌기둥들이 길게 늘어서있다. 수락리 주상절리다. 몇 마리 두루미들은 주변을 서성이며 산수화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다각형의 기둥 암벽을 주상절리라 한다. 일반적으로 주상절리는 용암과 같은 뜨거운 화산암이 식을 때 수축에 의해 발달할 수 있다. 그러나 수락리 주상절리의 바위는 화산재가 굳어서 된 응회암이라 한다. 그중에서도 화산 폭발 시 고온의 화산재가 흘러내리면서 쌓인 회류 응회암이며, 매우 높은 온도의 화산재가 함께 들러붙고 변형되고 뭉쳐져서 만들어진 용결응회암이다. 이러한 응회암 주상절리는 드물게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2. 화산재로 만들어진 주상절리수락리 주상절리를 이루는 응회암은 화산 폭발에 의해 방출된 크고 작은 암편 중에서도 대부분 직경 4㎜ 이하인 화산회가 가장 풍부하다. 눈에 보일 정도의 크기를 가지는 결정은 적은 편이지만, 그중에서 사장석 반정(斑晶)이 제일 많고 석영 반정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물에 뜰 만큼 가벼워 부석이라 불리는 유리질의 경석은 들러붙어 뭉쳐지는 동안 납작해져서 피아메라 불리는 팬케이크 모양의 담회색 엽리로 나타나는데, 너무 강하게 압착되어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뜨거운 화산암이 냉각될 때는 표면이 먼저 식으면서 수축이 일어난다. 수축에 의해 틈이 생겨나는데, 수축의 중심점들이 고르게 분포하면 틈들이 서로 만나 육각형의 패턴으로 절리를 만든다. 수락리의 주상절리는 사각형, 오각형, 칠각형 등 다각형의 단면을 나타낸다. 이것은 암석 자체의 성분 차이, 혹은 점성의 차이 등과 같은 불균질성으로 인해 수축의 중심점이 흩어져 육각형 외에 다양한 형태가 함께 나타난 것이라 한다. 수락리의 이 응회암 주상절리는 이곳에 국지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화산재는 어디서 왔을까. 화구는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3. 이곳은 백악기 칼데라의 중심수락리 주상절리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6㎞ 정도에 면봉산(眠峯山)의 1천113m 봉우리가 솟아 있다. 청송의 현서면과 현동면, 포항의 북구 죽장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보현산(普賢山) 등과 함께 태백산맥을 이룬다. 면봉산은 청송의 33개 산 중에서 지질학적으로 독특한 산에 꼽히는데, 중생대 백악기의 폭발적인 화산작용으로 만들어진 칼데라의 잔류 화산체이기 때문이다. 지구 내부의 마그마가 지표를 뚫고 분출하는 출구를 화구라 하고, 그 주위에 화산분출물이 쌓여 화산체를 형성한다. 이후 큰 폭발이 일어나거나 산정부가 함몰되면서 칼데라가 만들어진다. 면봉산의 칼데라는 현동면의 남서부에서 현서면의 남동부에 걸쳐 타원형으로 나타나는데, 대규모 회류응회암의 분출로 형성된 것이라 한다. 이 응회암을 특별히 ‘면봉산응회암’이라 부른다. 면봉산응회암은 칼데라 내부에만 분포되어 있다. 수락리 주상절리는 바로 이 면봉산응회암의 중심부에 자리한다. 주변의 가파른 산들도 면봉산 칼데라에 존재하는 면봉산응회암에 해당되고, 보현천도 이 칼데라 속을 흐른다. 처음의 칼데라 지형은 오랜 세월의 풍화와 침식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화구 역시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락리 주상절리는 화산폭발과 이후의 고요를 촘촘한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참고= △한국지명유래집 △청송의 향기 △청송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황상구, 2015, 청송국가지질공원 추가지질명소 개발 및 인증조건 보완, 청송군■청송 현서면 수락리>>> 항일 의병장 임용상 고향…국내 最高 다목적댐 유명주상절리가 있는 청송 현서면 수락리는 항일 의병장 중호 임용상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1877년 수락리에서 태어난 그는 성품이 온후하고 담력이 컸으며 매우 총명했다고 전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가산을 써서 국난을 호소하는 격문을 배포했다. 이후 의병을 모아 동해창의군(東海倡義軍)을 조직해 영덕과 강구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7년에는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에 들어가 청송, 영천, 흥해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후는 전투와 체포와 복역의 반복이었다. 1977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58년 82세에 귀천했다. 수락리 마을회관 맞은편에 단 높여 세운 그의 유허비가 남아있다. 치열한 한평생이었으나 나라의 독립을 보았으니, 저 비석도 그리 쓸쓸해 보이지는 않는다. 대구 앞산공원에도 선생의 동상이 있다.수락리 주상절리에서 보현천을 따라 2.5㎞ 정도 가면 예쁘장한 호수가 펼쳐진다. 성덕호다. 보현산과 면봉산 자락의 계곡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을 모은 호수다. 잔잔한 호수를 내려다보며 성덕댐이 근엄한 표정으로 서있다. 댐 정상의 해발높이는 368.5m. 우리나라 다목적댐 중 가장 높은 곳이 위치한다. 예전에는 수락저수지가 있었다.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저수지를 대규모로 확장해 다목적댐으로 재개발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과정에서 무계리와 수락리 일부가 물에 잠겼지만, 이제 성덕댐 호수는 가뭄과 홍수를 방지하고,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등 하는 일이 많아졌다. 댐 북쪽에는 성덕 공원이 들어서 있다. 캠핑장과 축구장 등이 꽃사과 나무와 꽃복숭아 숲과 어우러져 있다. 또한 수락리 주상절리 부근에서 성덕 호수에 이르는 4.7㎞의 성덕댐 둘레길도 조성되어 있다. ☞ 여행정보영천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노귀재를 넘으면 청송 현서다. 직진하다 월정교차로에서 우회전해 908번 지방도(성덕댐로)를 따라 가면 사촌, 갈천 지나 수락리다. 수락2교에서 동쪽 산자락을 보면 보현천변에 아름다운 주상절리가 펼쳐져있다. 북쪽으로 2.5㎞ 정도 가면 성덕댐이 웅장한 자태로 자리한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수락리 주상절리. 사각·오각·육각형 모양의 돌기둥이 무성한 숲을 헤치고 길게 늘어선 모습이 장관이다.수락리 주상절리는 수락2교에서 동쪽 산자락, 보현천변에 펼쳐져 있다. 수락리 주상절리는 일반적인 주상절리와는 달리, 화산 폭발시 고온의 화산재가 흘러내리면서 굳은 응회암으로 국내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지질이다.
2016.05.31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6> 안덕면 고와리 ‘백석탄’과 지소리 ‘만안자암 단애’
이런 길을 달리면, 길의 목적지가 하늘인 것 같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데, 하늘은 세상 가장 먼 곳에서 조급해하지도 서두르지도 말라고 조근조근 말한다. 푸른 산들은 함께 이어달리며 생명을 더해주고, 푸른 물은 구불구불한 만곡으로 리듬을 더해준다. 그러자 곧 저 앞에 붉은 단애가 성벽처럼 서있고, 그 너머 더욱 깊은 곳에 눈부시게 흰 선계(仙界)가 펼쳐진다. #1. 하얀 돌 반짝이는 내, 백석탄 하얀 계곡이다. 정수로부터 푸르스름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백색의 바윗골’이다. 만년 설산으로 이루어진 지하세계가 땅을 뚫고 솟아오른 것 같고, 신선들이 유하던 선계의 호정 같다. 물은 그 중에서도 가장 투명하고 푸른빛만을 취해 도도하게 흘러간다. 백석탄(白石灘), ‘하얀 돌이 반짝거리는 내’다.임진왜란 때인 1593년, 부하를 잃은 장수 고두곡(高斗谷)은 이곳을 지나며 상처를 달래어 씻고는 ‘고와동’이라 불렀다 한다. 이후 인조반정에 가담했다는 경주사람 송탄(松灘) 김한룡(金漢龍)이 이 계곡에 반해 마을을 만들고 ‘고계(高溪)’라 했다 전한다. 슬픔을 달랠 만한 지극한 아름다움과 속세를 잊을 만한 선경의 땅, 그곳이 지금의 청송 안덕면 고와리(高臥里)다. 한자의 뜻보다는 순정한 호명에서 정착한 이름이라 믿어진다. 고와서, 고와리. 북쪽의 노래산과 남쪽의 연점산이 길게 팔 뻗어 손깍지를 낀 골짜기가 고와리의 백석탄 계곡이다.수천, 수만 년의 시간이 깎고 다듬은 흰 바위계곡, 백석탄은 개울 바닥의 회백색 바위들이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거치는 동안 파이고 깎이면서 만들어 낸 장관이다. 구르고 질주하던 물은 바위에 수많은 구멍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신들의 명경 같다. 이 구멍을 포트 홀(pot hole)이라 한다. ‘유수의 침식에 의해 암반 상에 발달한 원형 혹은 타원형의 구멍’이다. 긴 시간 동안 이 바위를 휩쓸고 지나간 물줄기가 바위에 상처를 냈고, 상처의 오목한 틈으로 들어간 모래와 자갈들이 급류를 타고 춤을 추듯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면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래서 ‘돌개구멍’ 또는 ‘구혈(穴)’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로 이웃한 구멍들은 각자가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서로 만나 하나가 되기도 한다. 백석탄의 돌개구멍은 밝은 사암층과 역암층으로 이루어진 퇴적암에 발달하고 있다. 돌들이 하얀색을 띠는 것은 풍화에 강한 백색 광물인 석영과 장석이 많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생채기처럼 그어진 절리는 태양과 바람과 물이 만든 지구의 틈이다. 산화되어 붉은빛을 띠는 절리가 흰 피부를 도드라지게 한다. 물은 흐르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 자갈들은 춤을 추고, 약 1억2천만 년 전부터 오늘까지, 포트 홀은 지금도 진행형이다.#2. 다양한 퇴적 구조들백석탄은 중생대 백악기 초 경상분지에서 형성된 퇴적암으로 역암과 사암, 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부는 역암층으로 자갈을 운반하던 강한 물줄기가 바닥의 퇴적물을 침식시키고 그 위에 퇴적층을 쌓아 그 경계면이 뚜렷하다. 그 위는 회색 또는 암회색의 사암층으로 하류 방향으로 기울어진 사층리를 볼 수 있다. 특히 오목하게 굴곡을 나타내는 곡사층리가 발달해 있다.사암층의 상부는 이암층이다. 암회색 또는 흑색의 이암층은 상부층과 침식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암층에서는 퇴적물이 완전히 굳기 전에 그곳에 살았던 생명체의 흔적도 볼 수 있다. 그것을 생흔화석, 생물교란구조라 부르는데, 백석탄에서는 지렁이와 같은 저생물들이 아래로 파고 들어간 굴착구조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주로 세립의 암회색 사암층의 층리면을 따라 아래를 향한 형태인데, 원통 모양의 관이나 파인 모습으로, 길이도 1㎝에서 7㎝까지 다양하다. 강한 물살에 떨어져 나온 이암의 조각이 사암층에 얼룩처럼 퇴적된 모습도 보인다. 강하게 흘렀던 물도, 느리게 흘렀던 물도, 모두 자신의 흔적을 이곳에 남겼다.#3. 지소리 ‘만안자암 단애’백석탄의 퇴적층은 남동쪽의 지소리로 이어진다. 성벽처럼 서 있는 붉은 단애, 자암(紫巖)의 땅이 그곳이다. 사람들은 ‘적벽(赤壁)’ ‘붉은 병풍바위’ ‘붉은덤’ 등으로 부른다. 자암을 구성하는 암석은 사암이다. 그러나 자암의 내부에는 퇴적구조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떤 환경에서 퇴적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의 퇴적층에 기초해 판단해봤을 때 같은 하천환경에서 퇴적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퇴적된 후, 지각이 아래로 서서히 침강하면서 그 위로 두꺼운 퇴적층이 쌓였고, 지하 깊이 묻힌 퇴적물은 딱딱한 암석이 되었다. 이후 다시 지각이 위로 융기해 지하 깊은 곳의 암석이 지표면 위로 올라왔다. 이후 오랫동안 절리를 따라 쪼개지고 강물에 의해 깎여 지금의 아름다운 단애로 서있다.자암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층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절리가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수직에 가까운 고각도의 절리가 가장 뚜렷하게 발달한다. 수많은 절리가 수천의 시선처럼 보인다. 압도적인 자암, 거침없이 육박해오는 단애. 그것은 결코 잠드는 일 없는 아르고스처럼 선계(仙界)를 파수하고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참고=△한국지명유래집 △청송의 향기 △청송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황상구, 2015, 청송국가지질공원 추가지질명소 개발 및 인증조건 보완, 청송군공동 기획:청송군■ 청송 제1경 신성계곡…백석탄 구간은 ‘백미’청송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 중 하나가 신성계곡이다. 안덕면 신성리에서 백석탄이 있는 고와리까지 길게 뻗어 있다. 청송 8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힐 만큼 눈 닿는 곳마다 선경이다. 그중 백석탄 구간은 백미로 꼽힌다. 특히 백석탄 계곡에는 마을을 개척한 송탄 선생이 부친인 대양 김몽화(金夢和) 장수의 갑옷과 투구를 묻었다는 장군대가 있고, 다섯 신선이 낚시를 했다는 조어대(釣魚臺)가 있다. 조어대 아래에는 고기를 낚다 보면 저절로 시상(詩想)이 떠오른다는 가사연(歌詞淵)이라 부르는 소(沼)가 있다. 신성계곡의 하천은 환경부가 발행한 ‘건강한 하천, 아름다운 하천 50선’에 소개되어 있는 길안천이다. 낙동강의 지류 가운데 생태환경이 가장 잘 보전된 곳이다. 우리나라 고유 어종이 많이 서식해 ‘어류도감’ 하천으로 연구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상류에서부터 하류까지 ‘참다슬기’가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어, 매년 여름이면 ‘백석 다슬기 축제’가 열린다. 지소리의 새마을교 일원에서 열리는 축제에는 다슬기 줍기 체험, 다슬기 빨리 까먹기 대회, 피라미 낚시, 메기낚시, 지역 농산물 맛보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된다. ☞ 여행정보청송읍에서 영천방향 31번 국도로 내려가다 부남면사무소 지나 안동 길안면 방향 930번 지방도로 가면 된다. 지소리 만안삼거리 다리에서 만안자암 단애를 볼 수 있고 조금 더 가면 고와리 버스정류장 가기 전 왼쪽에 백석탄 안내판이 있다. 백석탄 입구에 ‘송탄경주김공조기백석탄 입구’란 비석이 서 있다. 영천쪽에서는 908번 지방도로 갈 수도 있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백석탄 전경. 하늘에서 본 백석탄의 풍경이 마치 신선들이 유하던 선계(仙界)의 호정처럼 눈부시다. 무엇보다 푸른 광채처럼 뿜어져 나오는 물과 백석의 바위골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2016.05.24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5> 청송자연휴양림 퇴적암층
화산폭발로 솟은 봉우리 아래 분지에퇴적물 층층이 쌓여 화석처럼 드러내삼자현 쪽으로 오르는 서능골 사면엔사암층-이암층 서로 번갈아 차곡차곡바람골 향하는 길엔 사층리·연흔 관찰1억년 전에도 바람은 불었다. 뜨거운 날이 지속되기도 했고 오랫동안 비가 내리기도 했다. 당연히 그랬겠지. 그러다가도, ‘그런가?’ 싶은, 너무 먼 이야기다. 그러면 확신은 불신의 손목을 잡고 공간을 가로질러 그때의 시간으로 이끌고 가 시간을 가로지르는 공간을 펼쳐 보인다. 거기에는 태백산맥이 높이 솟아오르기 전, 동해가 생기기도 전인 먼 옛날 그때의 바람이, 그때의 물길이, 그때의 목마른 나날들과, 그때의 홍수 진 나날들이 화석처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이, 그 증명이, 청송 자연휴양림의 퇴적암층이다. #1. 중생대 백악기 퇴적층의 교본, 청송자연휴양림 지질탐방로단풍나무 가로수가 이어지는 삼자현(三者峴) 고갯길. 험하고 좁았던 옛 길을 넓히고 닦았지만 여전한 예각의 길이다. 동북 방향으로 열린 하늘에는 먼 산들이 덩어리째로 광대하게 굽이치고, 고갯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삼자현 북쪽의 오목한 골짜기는 서로 다른 녹색들이 점묘파의 그림처럼 경쾌하고 가뿐하게 내려서 있다. 이름난 봉우리들은 비교적 멀리에 있지만 이 일대는 태백산맥에 속하는 산지로 울창한 원시림이 보전되어 있는 곳이다. 청송 자연휴양림은 우듬지마다 베일 같은 빛들이 흐르는 저 풍성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청송 부남면 대전리의 서능골과 바람골 사이의 숲이다.약 1억년 전의 일이다. 한반도에 공룡시대가 전개되었던 백악기 말, 화산 폭발과 함께 위로는 화강암 덩어리들이 산으로 솟았고 아래로는 넓은 분지가 생겨났다. 이후 오랫동안 분지에는 물이 흘러들었고 바닥에는 퇴적물이 쌓였다. 이렇게 중생대 백악기에 경상도와 전라남도에 걸쳐 형성된 큰 호수를 경상호 또는 경상분지라 한다. 경상분지에 쌓인 퇴적암층을 층서적으로는 경상누층군이라 부르는데, 암석의 특징을 기준으로 다시 여러 층군과 층으로 세분화된다. 청송 자연휴양림은 경상누층군의 하양층군 춘산층에 속한다. 이러한 지질 계통을 특징짓는 것이 사암과 이암의 퇴적층이다. 백악기의 퇴적암층은 휴양림의 산책로를 따라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대부분 풍화에 옅어지고 풀과 흙에 덮여 잘 보이지 않지만, 몇몇 곳에서는 그 당시의 환경을 알려주는 다양한 지질학적 구조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곳들을 이어 5.5㎞의 지질탐방로가 개설되어 있다. 표본을 보며 지질학 사전의 백악기 퇴적암 페이지를 읽어 나가는 것 같은 길이다. #2. 건기·우기를 알려주는 이암과 사암의 교호삼자현 쪽으로 오르는 서능골. 나무가 기분좋게 우거진 쾌적한 길을 잠시 오르면 첫 번째 퇴적암 층리가 오른쪽 사면에 펼쳐진다. 짙은 색과 옅은 색의 지층이 교대로 차곡차곡 밀도 있게 쌓여 있다. 먼저 밝은 색의 사암이 층을 이루고 그 위에 흑색 또는 녹색이 감도는 회색의 이암이 짙고 얇게 선을 그린다.홍수와 범람이 반복되고 이어지는 동안 모래 퇴적물들이 운반되어 와 사암층이 되었다. 비가 오지 않는 건조한 날 동안에 물길은 흐름을 멈추었고, 물속에서 부유하던 이질(泥質)의 물질들은 그대로 가라앉아 어두운 녹회색을 띠는 이암층이 되었다. 그 위에 다시 사암층, 그 위에 이암층, 이렇게 서로 번갈아 반복적으로 쌓여 있다. 이것은 퇴적 당시 건기와 우기가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파편들의 총체가 조형해 놓은 ‘층진 과거’는 무수한 책들이 시기별로 꽂혀 있는 오래된 책장 같기도 하고, 무인도에 표류된 사람이 큰 바위에 그어 놓은 매일 매일의 표식 같기도 하다. #3. 물·바람의 방향을 알려주는 사층리와 연흔삼자현을 저 위에 두고 침엽수림을 맞닥뜨린 길은 동쪽으로 꺾여 나아간다. 서능골에서 골짜기를 가로질러 바람골로 향하는 길이다. 길은 골짜기의 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지그재그로, 오르내리기를 거듭한다. 정복해야 할 봉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잊을 만큼 가파른 길도 아니어서 내내 평온하고 나른한 매력이 넘친다. 숲의 상부에는 낙엽송을 비롯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고르게 섞여 자라고 있다.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공기가 맑은 곳이라는 대기환경 측정 결과가 있다. 곧 만나게 되는 퇴적암층은 두꺼운 사암이 아래의 이암을 침식해 들어간 형태를 보여준다. 주변의 사암층보다 상대적으로 두꺼운 사암층은 퇴적 환경의 변화를 증명한다. 잠시 후 나타나는 퇴적층은 비스듬하다. 평행하지 않은 이런 퇴적층을 사층리라 하는데, 수심이 얕은 곳에서 흐르는 물에 의해 퇴적물이 경사져 쌓인 것이다. 주로 사암에 발달된 사층리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다. 이 사층리에는 바람이나 물의 흐름이 새겨놓은 연흔도 나타나 있다. 살코기처럼 조밀한 표면에 그려져 있는 물결 모양은 역시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에 의한 것이다. 1억년 전의 시공간과 현재의 시공간이 갈마들던 길이 바람골로 접어들면서 내내 하강하며 현실 감각을 조금씩 일깨운다. 왕성한 활엽수의 길에 점점 하늘이 열린다. 그러다 층층이 쌓인 퇴적암을 단칼에 잘라낸 암맥이 별사탕처럼 나타난다. 지층을 뚫고 올라온 마그마가 지금도 여전히 땅은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디선가 딱딱딱딱 하고 나무 둥치를 두드리는 새 소리가 들린다. 대나무처럼 굵고 마디진 스트로브 잣나무가 시원스레 솟아 한동안 이어지고 그 사이 개오동나무, 미선나무, 좀작살나무, 박태기나무, 회양목, 은행나무, 느티나무들이 환송객처럼 천수(千手)를 흔든다. 그들의 손짓 너머로 청송자연휴양림의 안내사무소가 보인다. 21세기로의 회귀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참고문헌=△한국지명유래집 △국토지리정보원 △황상구, 2015, 청송국가지질공원 추가지질명소 개발 및 인증조건 보완, 청송군공동 기획:청송군■ 전설 품은 삼자현>>> 세 사람 모여야 넘던 고갯길...휴게소는 커피 맛으로 명성삼자현은 세 사람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삼자(三者)’ 고개다. 옛날에는 지대가 높고 울창해서 산적이나 산짐승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두 사람은 위험해 적어도 세 사람은 돼야 했다. 그때는 남쪽으로 자초산과 유현(柳峴, 버들고개)이 삼자현과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진다고 보았는데, 그곳은 청송과 포항 죽장을 잇는 고갯길로 지금도 그러하다. 이 고개에는 영천이나 대구 등지에서 시집오던 새댁이 세 번을 울며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옛날 한 가난한 총각이 어렵게 얻은 신부를 산적에게 빼앗겨 종일 통곡하다 소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숨어들기 좋았던 이곳에는 6·25전쟁 후 공비들이 자주 출몰하기도 했다 한다. 지금 삼자현은 부남면 대전리와 현동면 도평리를 연결하는 고개이고, 더 길게는 31번 국도가 이 고개를 넘고 있다. 삼자현 휴게소의 커피가 우리나라 제일이라는 ‘현대의 전설’도 있다. ☞ 여행정보청송읍에서 포항방향 31번 국도를 타고 가면 부남면사무소 지나 삼자현으로 오르는 고개 중간쯤에 청송자연휴양림의 입구가 있다. 관리사무소를 시작점으로 가장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5.5㎞의 지질탐방로가 있다. 그 외에도 짧은 산책과 조금 더 긴 길이 있어 등산을 할 수도 있다. 휴양림에는 숙박할 수 있는 통나무집과 산막, 유아들을 위한 숲, 농구장, 족구장, 전망대, 다목적광장 등이 있고 야영장, 취사장, 샤워장 등의 부대시설도 갖추고 있다.청송자연휴양림 퇴적암층은 산책로를 따라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일부에서는 당시의 환경을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지질학적 구조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곳들을 이어 5.5㎞의 지질탐방로를 개설해 놓았다.사암과 이암이 반복적으로 쌓인 층리구조.사암층에 발달한 절리.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청송자연휴양림 일대 전경. 삼자현으로 오르는 고개 중간쯤에 휴양림이 있고, 주변은 높은 산이 굽이치듯 늘어서 장관을 연출한다.청송자연휴양림에는 통나무집을 비롯해 유아들을 위한 숲, 다목적광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2016.05.17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4> 청송읍 부곡리 달기약수탕
그곳은 달이 뜨는 곳이라 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동에서 서로 내려뻗은 긴긴 골의 한가운데, 또한 골 따라 흐르는 초수의 한가운데, 천중의 자리. 우물처럼 어두운, 밤마다 높이 에워 선 능선의 실루엣을 서늘히 밝히며 천구를 여는 달은 영묘한 신비로움이었을 터. 하여 오래전 이곳에 발 디딘 순정한 이들은 그 골의 이름을 ‘달기동’이라 했다. #1. 사람에게 약이 되는 물 시원은 알 수 없으나, 1914년 부(府)와 군(郡)이 통폐합되기 전까지 마을은 ‘달기동’이었다. 달이 뜰 때면 장막같이 보인다는 계곡 들머리의 ‘월막(月幕)’과 달의 바깥이라는 달기동 상류의 ‘월외(月外)’는 지금도 그 이름 고유하다. 그러나 골짜기를 협시하는 월외산은 태행산(太行山)으로, 월명산은 720봉으로 바뀌어 옛 이름 희미해졌고, 그 한가운데 달기라는 이름은 지워져 ‘부곡리’가 되었다. 조선 철종때 수리공사중 용천수 발견비릿한 쇳물맛에 산초나무 물로 기록탄산·무기질 가득…철분 함유량 높아마시면 속병 나아 약수로 널리 알려져닭 고아내면 한결 담백…백숙집 성업골 따라 흐르는 천은 괘천(掛川)이라 한다. 태행산과 대둔산, 금은광이 등에서 시작된 물이 합쳐져 흘러 내려와 월막의 끝자락에서 용전천으로 유입된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괘천의 상류 유역을 따로 ‘약수천’이라 기록하는데, 그 연원은 1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조선 철종 때의 금부도사 권성하(權成夏)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해 터 잡은 곳이 바로 달기골이었다. 볕바른 들에 계수는 소용보다 궁했던지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수리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샘을 발견하는데, 그 물을 마시니 곧 트림이 나오고 이내 뱃속이 편안해졌다 한다. 이후 위장이 불편한 사람들이 즐겨 마시기 시작했고, 사람에게 약이 되는 물로 널리 이름났다 전한다.‘여지도서’에는 괘천을 ‘초수(椒水)’라 기록하고 있다. 산초나무 물이라는 뜻이다. 왜 초수라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물맛이 산초의 그 쌉싸름한 맛과 닮아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철종 대 훨씬 이전에도 이 유별난 물맛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게다. 싸늘하고 비릿한 금속성의 맛, 누군가는 쇳물 맛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핏물 맛이라 하고, 일반적으로는 단맛을 뺀 사이다 맛이라 하는 이 별난 맛을. 지금 마을의 이름은 달기동에서 부곡리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 물을 찾아 마시고 그 이름을 ‘달기약수’라 부른다. 약수가 솟을 때 닭이 우는 소리 같다고 해서 달기약수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지워졌으나 잊히지 않는 ‘기억의 유산’은 힘이 세다.#2. 계곡 따라 줄줄이 샘청송 부곡리 달기약수는 아무리 가물어도 끊어지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양은 언제나 일정했고, 짱짱한 추위에도 어는 법이 없었다. 색도 냄새도 없는 것이 신기하게도 솟아 흐르는 자리마다 붉게 물들였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연스레 알게 된 달기약수의 신통방통한 면이다.자연의 조화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현대 과학은 달기약수의 실체를 좀 더 선명하게 밝혀준다. 약수탕 주변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의 화강암 위에 쥐라기의 퇴적암이 덮여 있는데, 지하 심부의 이산화탄소가 화강암의 틈을 타고 올라와 퇴적암 내의 광물과 반응해 무기질과 탄산이 가득 든 천연 광천수를 만든 것이다. 무기질 중 특히 함유량이 높은 것은 철분. 그것이 주변을 붉게 물들이는 녀석이다.그 사이 사람들은 더 많은 샘을 찾아냈다. 지금은 하탕에서 상탕까지, 계곡을 따라 줄줄이 10여 군데의 암반에서 약수가 솟아난다. 심지어 계곡물에서도 뽀글뽀글 탄산이 올라온다. 1915년에 발견된 하탕은 ‘약수탕 중에 가장 인기가 있고 약 효과도 좋고 물맛이 순수하여 항상 사람이 붐비는 곳’으로 ‘원탕’ 혹은 ‘본탕’이라 불린다. 최초의 샘물은 상탕으로 추정된다. ‘달기 약물이란 지금의 상탕을 의미하나…(중략)…하탕이 발견된 후 하탕만 찾게 됨으로 지금의 상탕은 언제나 한산하다’는 기록이 있다. 샘마다 물맛은 조금씩 다르다. 상탕의 물맛은 하탕에 비해 약하다. 그래서 오히려 상탕만 찾는 사람도 있다.#3. 약수탕의 법칙약수터 앞 가겟집에는 늘 물통이 산더미다. 몸이든 마음이든 급한 사람들을 위해 미리 약수를 채운 물통을 팔기도 한다. 물통 값에 물은 서비스란다. 물통 1말(20ℓ)을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정도다. ‘약수는 마시는 사람이 우선!’이란 게 약수탕의 법칙. 그러니 빈 물통을 채워 가려는 사람들은 물 마시는 이들의 긴 줄 끝에서 느긋이 기다린다. ‘약수를 10ℓ 이상 담을 시에는 다른 탕을 이용해 주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귀도 있다. 이 부드러운 권고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성마른 사람들은 이미 푸른 새벽에 다녀갔을 터. 동네 사람들도 낮 동안에는 물을 받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약수터 옆에 동그란 들돌이 놓여 있다. 기다림이 무료한 사람들은 들돌 들기에 도전하기도 한다. 가소롭게 여기다간 부끄럽기 쉽다. 자신 있게 도전한 젊은 아빠의 몸이 부들부들 벌겋게 달아오른다. 덩달아 나섰던 사람들의 얼굴에 낭패의 표정이 역력하다. 바윗돌은 흘깃 보기엔 대수롭잖은 크기지만 힘깨나 쓴다는 사내도 들기 힘들다고 한다. 여기에는 언젠가 한 병든 노인이 약수를 마시고는 번쩍 들어 올려 기력을 회복했다는 풍문도 스며있고, 한때는 돌을 들어 올리는 사람에게 먼저 약수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바가지 속에 동그란 기포들이 그득하다. 꿀꺽, 한 모금 넘기고 움찔 한다. 역시 목 넘김이 쉽지 않다. 약수탕 옆에서 판매하는 약수엿에 절로 눈길이 간다. 단 엿은 약수를 조금 편하게 마시도록 돕는다. 소년은 꿀떡꿀떡 잘 마시는데, 볼이 실룩실룩 한다. 턱 하니 빈 바가지 내려놓는 폼이 당당하다.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물을 많이 먹기 위해 짭조름한 장떡을 쪄서 먹었다고 한다. 그것을 ‘장떡 먹고, 물 마시고, 속병 고친다’고 했다. 약수를 많이 쉽게 마시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있지만, 제일은 역시 ‘이쯤이야’ 하는 호기다.#4. ‘약수백숙’의 원조약수터 주변에는 닭 요리 집이 성업 중이다. 어느 음식이나 언제나 관건은 물이다. 마을에서는 달기약수로 음식을 한다. 밤늦은 시간이나 이른 새벽 달빛 속에서 받은 물로 밥을 짓고 닭을 고아낸다. 그러면 밥은 파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알알이 반드르르한 윤기가 난다. 닭은 한결 담백해져 맛의 온도가 달라지는 순간을 선사하는데, 약수에 들어 있는 철분 그득한 탄산수가 지방을 다스려 고기를 부드럽게 하고 특유의 거슬리는 냄새도 없애기 때문이다. 요즘은 옻나무를 넣은 옻닭백숙, 오골계요리 등도 별식으로 자리 잡았다. 닭 가슴살을 떡갈비처럼 석쇠에 구운 닭 불고기는 새로운 인기 메뉴다. 산송이가 채취되는 가을철이 되면 송이백숙으로 변신하고 청송의 산에서 나는 다양한 한약재를 넣고 토종닭을 고아내면 더할 나위 없는 약선 음식이 된다. 손님 체질에 따라 맞춤형 한방백숙도 가능하다. 어떤 한약재를 쓰느냐에 따라 빈혈과 산후조리, 위장병 등에 더 큰 효능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수닭백숙은 청송 달기약수 영천제(靈泉祭)가 그 시작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3월 말에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달기약수로 백숙(白熟)을 끓여 하늘과 땅에 감사를 전했다 한다. 물이 항상 솟아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물이 항상 솟아나게 해 달라고. 그러한 풍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참고문헌=△서울대학교 규장각 △청송의 향기, 1982, 청송군 △청송군지 △황상구, 2015, 청송국가지질공원 추가지질명소 개발 및 인증조건 보완, 청송군공동기획 : 청송군 ☞ 여행정보 청송읍사무소에서 동쪽으로 3㎞만 가면 부곡리다. 부곡1리 마을회관 지나 약수1교 건너 100m 앞에 원탕(하탕), 300m 거리에 신탕, 350m에 중탕, 400m에 천탕, 700m에 상탕이 이어져 있다. 달기약수는 외씨버선길 1코스인 주왕산 달기약수길 18.5㎞에 속해 있으며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에는 산악자전거 코스, 철인 코스, 산책 코스 등이 마련되어 있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부곡리 달기약수탕 일대 전경. 약수탕 주변 동서남북은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어 마치 수목이 울창한 심산유곡에 들어온 느낌을 자아낸다.청송 부곡리 달기약수탕 중 하나인 천탕의 모습. 달기약수는 무기질과 탄산이 가득한 천연 광천수로, 무기질 중 특히 철분 함량이 많아 붉은색을 띤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기포도 입안을 상쾌하게 한다(위). 철분을 함유한 약수가 지표면에 노출되어 공기와 접촉하면 산화해서 침전되고 이 때문에 약수터 주변은 붉게 물든다.청송 달기약수탕 중 가장 인기가 좋은 원탕(하탕). 탄산이 많아 톡 쏘는 맛이 강하고 위장병, 신경통, 빈혈 등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2016.05.10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3> 지각의 기억 저장소 ‘송강리 습곡구조’
깊고 선명하고 촘촘한 주름들이다. 이들은 휘어지고, 꺾이고, 굽이치고, 기울어져 흐른다. 이렇게 단단한 것이 이토록이나 주름지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과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청송 파천면 송강리 마을의 동쪽, 용전천 기슭에 주름진 바위들이 있다. 바위라기보다는 바윗돌처럼 단단한 지층의 피부라고 하는 것이 옳다. 한반도 땅은 선캄브리아기 이후부터 중생대 동안 몇 번의 엄청난 지각 변동을 겪었다. 송강리에서 볼 수 있는 지표면의 주름들은 그러한 지각 변동이 남긴 ‘경험의 형상화’이고, ‘그 시간의 저장소’다. 한반도, 몇차례 엄청난 지각변동 겪어송강리 지표면 주름은 ‘경험의 형상화’용전천 기슭을 따라 170m가량 드러나암석 입자가 줄무늬로 배열된 변성암류단층운동 등으로 복잡하게 변형된 모습지역 지질명소 중 습곡의 종합선물세트 #1. 파천면 송강리 습곡 청송의 남쪽 부남면에서 발원한 용전천(龍纏川)이 굼실굼실 북쪽으로 향한다. 천은 파천면 송강리에 이르러 갑자기 서쪽으로 크게 굽이돌아 곧 반변천과 합류한다. 용전천은 청송군 내에서 유로 연장이나 유역면적이 가장 큰 강으로 파천면을 관통해 송강리를 가로지른다. 옛날에는 파천(巴川) 혹은 파질천(巴叱川)이라 했다.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긴 뱀과 같은 모습 때문이 아닌가 싶다. 면의 이름도 천의 옛 이름에서 왔다. 현재의 이름은 광복 이후 하천 지명을 정비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추정되는데, 청송읍 용전천변에 있는 용전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용전천이 서쪽으로 큰 반원을 그리며 곡류하는 남쪽에 송강마을은 골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천의 심한 사행이 만들어놓은 충적층이다. 정리되지 않은 밭들은 제 각각의 모양으로 펼쳐져 있고 천변의 야생 초지가 밭의 가장자리를 소복이 감싸고 있다. 마을의 남쪽에는 해발 500m가 채 안 되는 천마산 자락이 흘러내려오는데, 활엽수들이 우세한 완만한 경사면에 작은 밭들이 일구어져 있다. 국도변에서 바라보면 그리 높지 않은 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로 보인다. 용전천 물길도 보이지 않고 집도 거의 보이지 않아 가까운 밭만이 사람 사는 곳임을 알려준다. 용전천을 가로지르는 송강2교를 건너 송강1리 마을회관으로 향하는 오른쪽 곳티길로 들어간다. 옛날 자연마을이었던 곳티는 길의 이름으로 남아 기억되고 있다. 마을회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굽어들어가면 송강마을의 동쪽 천변에 닿는다. 그곳에 송강리 땅의 ‘오래된 주름’이 용전천 기슭을 따라 약 170m 드러나 있다. 지질학적 명칭은 ‘습곡’이다. 비교적 익숙하게 알고 있는 명칭이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은 기묘하고 역동적이고 깊고 촘촘한 주름이다.#2. 노두에 기록되어 있는 3번의 습곡 3번의 관입 1번의 단층 송강리 일대의 기반암은 선캄브리아기 변성암류인 호상 편마암, 화강암질 편마암, 석회규산염암과 그를 관입하는 동시대의 화성암류인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낯선 이름이지만 약 5억4천만년보다 이전에 화성암이나 퇴적암이 높은 열과 압력을 받아 새로운 암석으로 변한 것으로 생각하면 쉽다. 이 중 송강마을의 기반암은 석회규산염암과 화강편마암이다. 석회규산염암은 석회질의 암석이 변한 것이고, 화강편마암은 화강암이 변한 것이다.변성암의 구조적 특징이 바로 주름이다. 학계에서는 구성 입자들이 줄무늬로 배열된 것을 엽리(葉理), 광물입자가 변형되어 선상으로 늘어선 가는 주름을 편리(片理), 편리의 재결정작용으로 엽리가 약해진 것을 편마(片麻) 구조라 한다. 송강마을의 기반암에는 편리상 내지 편마구조상의 엽리구조가 발달해 있는데,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휘어진 주름, 끊어져 어긋난 주름, 사이에 뭔가가 끼어든 주름 등 복잡하게 변형된 다양한 모습이다. 이는 기반암이 지각의 깊은 곳에서 지표면으로 상승하는 동안에 경험한 습곡작용, 단층운동, 암맥의 관입작용 등과 같은 지각변동과 변성작용의 기록이다. 습곡은 지하 깊은 곳에서 지층이 양쪽에서 미는 힘을 받아 연성변형에 의해 휘어진 지질구조를 말하고, 단층은 지표면 근처에서 외부의 힘을 받은 지각이 취성변형을 일으켜 두 개의 조각으로 끊어져 어긋난 지질구조를 뜻한다. 암맥은 지하 깊은 곳의 마그마가 기반암의 갈라진 틈으로 관입해 굳어진 것이다. 송강리의 지질 표면에 기록되어 있는 복잡 다양한 구조는 3회의 중첩된 습곡 작용과 관입시기를 달리하는 3회의 산성 암맥들의 관입작용, 그리고 1회의 단층운동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 한다.#3. 습곡의 종합 선물세트송강마을이 겪은 습곡과 관입은 먼저 일어난 변형작용에 의해 형성된 구조 요소들이, 후에 발행한 변형작용에 의해 형성된 구조 요소들에 의해 절단되거나 습곡되었다. 즉 첫 습곡작용 이후 첫 암맥의 관입과 둘째 습곡이 일어났고, 이후 둘째 암맥의 관입과 셋째 습곡이 일어났으며, 그리고 셋째 암맥의 관입이 일어났다. 습곡과 관입이 마치 돌림노래처럼 발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압축력에 의한 역단층이 일어났다. 중첩된 작용에 의해 변형은 더욱 다양해졌다. 개방, 밀착, 등사, 층간, 중첩습곡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습곡구조와 역단층구조, 소시지처럼 잘록해져서 연속되어 있는 부딘구조와 암맥, 그리고 Z자형의 비대칭 습곡 등 당기고 밀고 저항하는 힘들에 의해 생성된 다양한 형태의 지질구조 등 송강마을에서 볼 수 있는 각양의 주름은 ‘습곡의 종합 선물세트’라 할 수 있다.한반도는 선캄브리아기 이후 신생대 이전까지 적어도 네번의 지구조운동을 경험했다. 첫째는 고생대 말에서 중기 초에 일어난 ‘송림조산운동’으로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분포해 있는 고생대의 지층이 습곡을 받았다. 둘째는 중생대 쥐라기에서 백악기에 걸쳐 일어난 ‘대보 조산운동’이다. 이는 한반도의 지형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현재와 같이 복잡한 지형특색이 나타났다. 셋째는 전기 백악기의 ‘청마리 지구조운동’으로 중부 옥천 지방을 중심으로 백악기 퇴적분지를 형성시켰고, 그 이후에 발생한 것이 ‘금강 지구조운동’으로 습곡을 수반하는 단층운동이었다. 송강마을의 변성암류에 발달한 습곡작용과 암맥의 관입작용은 한반도의 지구조 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된다고 한다. 작은 구조를 통해 큰 구조를 이해하는 유추의 방법론일 것이다.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류는 청송군에서 송강리에 소규모로 분포하며, 청송의 여러 지질명소 중 시대와 성인, 그리고 암석 분류상 변성암에 해당하는 유일한 지질명소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참고문헌=△양승영, 지질학사전, 교학연구사, 1998 △황상구, 2015, 청송국가지질공원 추가지질명소 개발 및 인증조건 보완, 청송군 △한국지명요람, 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국토지리정보원 △경북지명유래집공동기획 : 청송군☞ 여행정보청송읍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진보, 어천리 방향으로 간다. 파천면사무소 지나 왼쪽 송강2교를 건너 오른쪽 곳티길로 들어가면 송강마을이다. 청송한지체험장 가람공방은 송강교 앞 송강장로교회 골목길로 들어가면 된다. 체험비는 5천원에서 1만원 정도.송강리 습곡은 청송군 파천면 송강마을의 동쪽, 용전천 기슭을 따라 펼쳐져 있다. 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송강리 습곡 일대 전경.송강리 습곡은 지층이 양쪽에서 미는 힘을 받아 휘어진 지질구조로, 지각변동을 거치면서 새겨진 지표면의 주름처럼 보인다. 한반도의 지구조 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2016.05.03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2> 법수도석으로 빚은 그릇 ‘청송백자’
백옥 같은 낯빛에 진주 같은 광이 난다. 가만 쓰다듬으면, 모래알 같은 결정이 지문의 등고선을 스친다. 계란 껍데기처럼 얇고 공기처럼 가벼워, 투박하게 만지면 바스라질까 사발 들어 올리는 손끝이 예민해진다. 무심한 곡선은 담백하게 우아하다. 이것은 왕실이나 반가의 것이 아닌 민간에서 사사로이 쓰던 그릇이다. 오롯이 땅이 내어주는 것만으로 담담히 빚어 낸 효율적인 선, 이것이 청송백자다. #1. 돌로 만든 도자기 어째서 이리도 희고 얇은가 했더니 그 이유는 재료에 있었다. 청송에서는 백자를 제작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고령토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흰빛의 돌인 도석(陶石)을 가루 내어 그릇을 빚는 독특한 기술이 태어났다. 곱게 빻은 돌은 설백색(雪白色) 혹은 우윳빛을 띠었고, 그것을 잔잔히 거르고 걸러 가장 미세한 가루만을 그릇의 재료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리 만들어진 돌가루(陶土)를 ‘명주 고름같이 보드라운 청송의 흙’이라 했다.주왕산의 남쪽, 안개를 품은 무포산 자락에 청송백자의 주재료인 도석을 캐던 광산이 있다. 청송읍 부동면 신점리 법수골의 법수광산이다. 옛날 이 광산 주변 10㎞ 반경 안에 물 흐르고 푸른 소나무 빼곡한 골짜기마다 도요지가 있었다. 도석을 운반하는 지게꾼과 소의 걸음에 산길은 반질반질했다고 전한다. 도석은 가소성이 높고 내화력이 강했지만 점력이 약했다. 그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무른질’을 살짝 섞었다. 무른질은 법수 인근에서 나는 청색의 도토로 점력이 우수했다. 유약은 이웃한 파천면에서 나는 석회석 성분의 회돌과 포항 죽장면에서 나는 장석 성분의 보래를 혼합해 썼다. 반짝반짝 광택이 났다는 회돌과 노란빛을 은근히 머금은 흰색의 보래는 도석과 병행해 빻아 쓰기에 용이했다. 무포산 자락 법수골 광산서 캔 도석 가루로 빻은 후 도토 섞어 그릇 빚어 16세기부터 만들어진 조선 4大 民窯 임원경제지에 ‘청송 특산물’로 기록 2009년 전수장 법수공방 다시 문열어 기능보유자 고만경 옹 ‘마지막 불꽃’돌을 캐내고 도토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공력은 매우 컸다. 때문에 재료는 귀했고, 자연히 그릇은 얇았다. 산 높고 골 깊은 청송이라 그릇들은 등짐장수들에 의해 각지로 나갔다. ‘혹여 깨질까봐 지게에 지고선 징검다리도 못 건너니’ 드센 장수들도 청송백자 진 걸음만은 순했다. 그렇게 청송백자는 경북의 동·북부 지역 민간에 두루 사용되었다. 강원도 양구, 함경도 회령, 황해도 해주 자기와 더불어 ‘조선의 4대 민요(民窯)’로 꼽힐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지방의 거의 모든 가마들이 일본식 사기인 ‘왜사기(倭沙器)’의 대량생산 공세에 밀릴 때도 청송백자는 일본으로 수출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양은 냄비나 스테인리스 식기들이 시골 장터까지 파고들었고, 어느 날 등짐장수들의 발길은 뚝 끊겼다.#2. 청송백자 500년, 그 끝과 시작청송백자에 대한 기록은 매우 인색하다. 19세기 초반에 저술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청송백자가 청송지역의 특산물이라는 기록이 있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편찬한 ‘조선산업지’에 ‘청송군 내 3개 마을에 가마 수는 4개로 1년간 생산액을 500원으로 적었다’는 기록이 있는 정도다.2005년 청송군은 청송백자의 가마터 지표 조사 연구를 실시, 원료 출토지를 중심으로 청송 내 36개소에서 48개의 백자 가마터를 찾았다. 그 결과 늦어도 16세기부터 청송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청송백자 500년 역사를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15세기에 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청송군이 ‘백토의 산지’라는 언급이 있다. 백토가 도석을 의미한다면 청송백자의 역사는 500년보다 더 먼 과거로 소급된다. 그에 비해 청송백자의 마지막은 선명하다. 증언에 따르면 1958년 법수광산 앞 법수공방 가마에 불을 지핀 것이 청송백자의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나, 지금 법수골이 다시 뜨겁다. #3. 부활의 진원지 ‘청송백자 전수장’ 여전히 하얀 속살을 내보이고 있는 광산 앞에 2009년 법수공방이 다시 문을 열었다. 500여 년 역사의 청송백자를 복원·전승하기 위한 ‘청송백자 전수장’이다. 예전 청송백자를 굽던 그대로 공방과 가마 등이 들어서 있고, 마지막 사기대장인 고만경옹(85)과 전수자들이 전통 방식대로 청송백자를 복원·전승하고 있다.고만경옹은 청송백자 기능보유자이자 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다. 그는 15살이던 1944년 생계를 위해 사기공방에서 일하기 시작해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몇 년 뒤 어엿한 사기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실험과 실패와 좌절과 성공을 통해 자신만의 비법을 축적했고, 법수공방의 가마불이 꺼질 때까지 장인으로서 그릇을 빚었다. 이후 긴 시간 가마를 떠났던 그는 이제 백발성성한 노인으로 돌아와 마지막 사기대장으로서 청송백자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법수골의 가마를 지키고 있다.전수장에 들어서면 먼저 육중한 초가지붕을 깊이 눌러쓴 공방이 도드라져 보인다. 움집같이 생겨 ‘사기움’이라 부르는 공방은 특이하게 원형이다. 이는 청송만의 특징으로 오래된 형태가 유지되어 온 것이라 한다. 움 안에는 돌을 빻는 디딜방아와 돌가루에서 부드러운 앙금만 걷어내는 지당, 성형을 위한 물레와 건조를 위한 봉내방 등 각 공정에 필요한 기구들이 최소의 동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원료 준비와 성형, 건조, 보관에 이르는 대부분의 공정이 이루어진다.사기움의 뒤쪽 가장자리에 가마가 위치한다. 굴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기굴’이라 한다. 가마는 40도 정도로 경사진 산비탈에 5개의 봉우리가 사다리꼴로 솟아있다. 도토로 빚은 그릇은 급작스러운 소성이 가능하고, 불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속성을 지녔으며, 둥근 봉우리는 열기를 머물게 한다. 경사지게 가마를 지었기에 열효율을 높일 수 있다. 사기굴의 모양은 이러한 돌과 불의 특성을 이용해 초벌구이만으로 사기를 완성시킨다. 그것은 연료와 노동력을 절약하고 짧은 시간에 많은 사기를 생산하기 위해 오랜 시간 최적의 형태를 찾아 실험을 거듭한 노력의 결과다. 주막도 복원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쉬며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다. 몇 년 전에는 일본인 부부가 찾아와 주막에서 머물며 청송백자를 배워간 적도 있다 한다. 옛날에는 성마른 등짐장수들이 주막에서 숙식을 하며 그릇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가마에서 사기를 내는 날은 ‘점날’이라 했는데, 그날 사기움 앞마당은 각지에서 온 장사꾼들로 북적였다. 점날이 장날이었고, 마당이 장터였다. 청송백자 전수장이 들어선 신점리(新店里)라는 지명은 아주 오래전 이 골짜기에 공방이 들어서고 장터가 열리면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참고문헌=△강병극, 2005, 도석을 이용한 청송사기 제작기술의 특화양상, 안동대학교 △황상구, 2015, 청송국가지질공원 추가지질명소 개발 및 인증조건 보완, 청송군 공동기획 : 청송군 ☞ 여행정보 주왕산휴게소에서 주산지 방향 908번 도로를 타고 가면 부동면사무소 전에 청송군 부동면 신점리 법수마을이 있다. 바깥법수 마을에서 약 1.5㎞ 가면 안법수 마을이다. 마을의 길 끝에 청송백자전수장이 있다. 전수장에 마련된 체험관에서는 청송백자 만들기 등 다양한 도예체험을 할 수 있다. 청송군 부동면 하의리 주왕산 관광지 내에도 청송백자에 대해 한눈에 알 수 있는 도예촌이 있다. 도예촌에는 사기굴과 사기움, 주막이 재현되어 있고, 청송백자의 특징과 제작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시관이 자리한다. 전시관에서는 고만경옹의 작품을 비롯해 옛 청송백자 40여 점도 만날 수 있다. 청송백자전시관 맞은편에는 심수관도예전시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1598년 정유재란 때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만개시킨 청송심씨 심수관가(沈壽官家)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청송 도예촌에서는 전통 도자기 만들기, 다도체험, 민화 그리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청송백자 마지막 사기대장 고만경옹. 그는 청송백자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마지막 투혼을 불태우고 있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청송백자 전수장 전경. 사기움을 비롯해 사기굴(가마), 주막, 체험관 등을 조성해 500여 년 역사의 청송백자를 복원·전승하는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주왕산 관광지 내에 있는 청송백자전시관.
2016.04.26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 지지 않는 꽃, 청송 꽃돌 ‘구과상 유문암’
▨ 시리즈를 시작하며 청송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지질자원의 고장이다. 2014년에는 국내 넷째로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국가지질공원은 지구과학적인 가치와 경관이 뛰어난 지역을 환경부가 인증한 공원을 말한다. 국내에는 청송을 비롯해 제주도(2012), 울릉도·독도(2012), 부산(2013), 강원 평화 지역(DMZ·2014), 무등산권(2014), 임진·한탄강(2015) 등 7개 지질공원이 운영 중이다. 이 가운데 제주도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청송도 지난해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기 위해 유네스코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오는 9월 제7차 세계지질공원네트워크(GGN)를 열고 최종 인증 여부를 가린다. 청송의 지질명소는 총 24곳으로 청송읍, 부동·진보·안덕·부남·파천·현동·현서면 등 8개 읍·면에 산재해 있다. 이들 명소는 지역의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원동력으로 청송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별화된 콘텐츠다. 특히 최근 들어 지오투어리즘(Geo-tourism)이 새로운 관광 패턴으로 자리 잡으면서 ‘미래 먹거리’로 주목받고 있다. 지오투어리즘은 천연의 지질 자원을 활용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지질 관광’을 일컫는다. 영남일보는 청송군과 공동으로 지질명소 24곳을 찾아 떠나는 시리즈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지질명소로 떠나는 여행’을 연재한다. 청송을 무대로 펼쳐진 지질자원의 가치를 되짚어 보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풀어낸다. 청송, 국내 넷째로 국가지질공원 지정새로운 관광 콘텐츠로 지질관광 주목40여년전 괴정리 산사태때 암맥 발견유리처럼 반짝이는 결정 가진 화산암동그란 꽃핵 정확히 찾아내 절단한 후10여 차례 연마 통해 꽃돌로 재탄생 적도의 태양과 같은 해바라기, 우아한 낯빛의 모란과 서늘한 품위의 매화가 눈부시다. 달리아는 겹겹의 꽃잎을 풍성하게 부풀려 놓았고, 국화는 도도한 꽃잎들을 하나하나 정교하게 펼쳐 놓았다. 탐스러운 장미들은 다투어 반짝거리고, 앙증맞은 소국은 무리지어 산들거린다. 이 꽃들의 정원에 들어서면, 시간은 멈춘다. 멈춘 채로 영원하다. 계절이 오고 가도 이곳은 언제나 꽃 계절. 숲 짙고 골 깊은 청송에 ‘지지 않는 꽃들의 마을’이 있다. 옛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꽃내리’라 불렀다. #1. 꽃을 품고 있던 골짜기주왕산 줄기가 북쪽으로 달리다 대둔산(大遯山)으로 봉긋 솟는다. 맑은 날 산봉우리에서는 동해가 가까이 보인다. 그 산 중턱에 춘추시대 월나라 미인의 이름을 가진 서시천(西施川)이 흐른다. 이 골짜기에 처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라 전해진다. 난을 피해 깊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온 사람들은 칡넝쿨 등을 걷어내고 서시천의 자태고운 물길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었다. 바로 청송군 진보면 괴정리다. 회나무 정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괴정리의 가장 큰 자연부락은 음지양지 마을이다. 32가구가 골짜기의 크고 작은 평지를 갈아 사과와 고추, 파프리카를 키우며 산다. 서시천 상류의 이슥한 갈평(葛坪)에는 단 두 집이 고집스레 마을을 지키고 있다. 계곡의 첫 마을이었던 둔골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 이제 미인의 속눈썹처럼 풍성한 물푸레나무만 무성하다. 갈평과 둔골 사이에는 그윽한 에메랄드빛의 갈평지가 동공처럼 열려 있다.40여 년 전의 일이다. 큰 비가 괴정리를 휩쓸었던 그때, 가장 깊은 둔골의 산 사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천을 따라 꽃들이 화르르 쏟아졌다. 깨진 바윗돌 속에 꽃들이 피어 있었던 게다. 꽃은 꽃인데 돌이고, 돌은 돌인데 꽃이었다. 학자들은 먼 옛날 이 땅 곳곳이 요동치던 시대가 있었고, 그때 땅 속에서 솟은 뜨거운 마그마가 지표 부근에서 빠르게 굳어져 꽃이 되었다고 했다. 수 천만년 간 땅 속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꽃돌은 그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언제부터 이 마을을 ‘꽃내리’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옛날 옛적 칡넝쿨 걷어내고 돌 캐어 집 지을 적에 사람들은 이미 꽃돌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괴정리는 꽃돌마을로 불리고 이 이름 속에 ‘꽃내리’는 긴 호흡으로 스미어 있다.#2. 국제적으로도 희귀한 지질자원 ‘꽃돌’학계에서는 청송 꽃돌을 ‘구과상 유문암’이라 한다. 유문암은 석영 등과 같이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결정을 가진 화산암을 말한다. 구과상은 ‘한 점으로부터 섬유상 결정이 방사상 형태로 성장하여 구 형태의 알갱이가 만들어진 구조’를 뜻한다. 보통 방사형이나 타원형의 조직을 보여주는 암석을 구상암이라 하는데 일명 꽃돌 혹은 화문석이라 부른다. 이러한 꽃무늬 돌은 국내외 여러 곳에서 나타나지만, 구과상 유문암은 유독 청송의 산에서만 나고 특히 괴정리 일대 갈평지를 중심으로 집중 분포되어 있다. 게다가 다른 꽃돌에 비해 매우 다양한 구상조직을 갖고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매우 희귀하다. 청송 꽃돌은 백악기 하양층군의 퇴적암류 속에 암맥으로 산출된다. 구과상 조직을 포함한 암맥의 절대 연령은 5천만 년. 꽃돌은 땅 속 유문암질의 마그마가 퇴적암을 뚫고 지표면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냉각 속도의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피어났다. 수증기가 빠져나가거나 기포가 생긴 지표면 근처의 꽃은 더욱 다양하고 정교하다. 구과는 형태에 따라 국화 형, 민들레 형, 매화 형, 카네이션 형, 목단 형, 장미 형, 해바라기 형, 달리아 형 등 수십 가지다. 이들은 성인에 따라 방사상 구과와 층상 구과로 분류되고 크게 1단계 성장으로 끝난 단식구과, 다단계 성장으로 연결된 복식구과, 여러 개의 구심점을 가진 복합구과로 구분된다. 깊은 곳의 꽃돌은 청자색을 띠고, 지표면에 가까울수록 붉은색이나 노란색을 띤다. 가장 빠르게 냉각된 암맥에서는 방사상의 국화와 민들레, 해바라기, 달리아가 피고 가장 천천히 냉각된 암맥에서는 층상형의 장미와 목단 등이 피어난다. 장미가 화원을 이루고 국화가 무리지어 있는가하면 카네이션과 달리아가 나란히 피기도 하고, 국화 아래에 민들레와 목단이 함께 피어있기도 한다. 5천만 년 동안 땅이 숨겨온 비밀의 정원이다.#3. 원석을 가공해 꽃 피우기까지…그리고 꽃돌 체험장괴정리에서 발견된 꽃돌 암맥은 40개 이상이다. 갈평마을 당나무 계곡의 목단과 꽃알산(봉)의 홍국은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채굴된 꽃돌이라 한다. 현재 꽃돌 광산은 모두 폐광되어 더 이상 꽃돌 원석을 구하는 일은 어렵다. 다행히 옛 채석장은 지금 꽃돌 체험장으로 변신해 있다. 꽃을 찾아 땅을 파고 들어갔던 사람들의 모습이 재연되어 있고, 꽃을 품고 있는 암석과 돌이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도 볼 수 있다. 돌 속에 살짝 드러난 꽃에서는 옅은 유황 냄새가 난다. 꽃돌의 원석은 평범한 돌덩이와 큰 차이가 없다. 돌 속에 꽃을 심은 건 자연의 솜씨지만 거기에 사람의 공이 더해져야 반짝이는 꽃으로 핀다. 꽃돌 장인은 원석의 겉모습만 보고도 꽃이 새겨져 있는지를 판별해 낸다. 동그란 꽃핵을 정확히 찾아 절단한 후 중심이 지나간 것은 들어내고 덜 나온 것은 찾고, 꽃을 몇 송이나 피울 것인지, 어느 정도 피게 할 것인지, 어느 면을 중심 꽃밭으로 둘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최소 10여 차례의 연마와 연마를 거듭해 마침내 꽃잎을 피워낸다.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 신비로운 윤이 나는 꽃돌은 장인의 안목과 기술과 정성으로 새로운 영원을 시작한다. 같은 원석이라도 장인에 따라 꽃의 선명도가 다르다. 꽃돌은 꽃의 선명도와 색깔, 크기에 따라 상품가치가 매겨지는데 적게는 몇 만원부터 많게는 수천 만원대에 이른다. 꽃이 바탕색과 대조를 이뤄 도드라져 보이는 것, 꽃송이 하나하나가 온전히 제 색깔을 내는 것이 좋은 꽃돌이다. 괴정리 곳곳에는 꽃돌 전시장이 있다. 이 꽃들의 정원에는 활짝 피어 매혹적인 꽃도, 봉오리 져 고운 꽃도 그대로 영원하다. 우주를 유영하는 듯 대기도 중력도 잊는 이 영원의 꽃밭에 놀라운 향내가 퍼져 있다. 그것은 뜨거운 불의 냄새, 유황 냄새, 수천 만 년 전 지구의 속내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참고문헌= △김효진, 2007, 청송 진보 괴정리 유문암맥의 구과 패턴과 성인, 안동대학교 대학원 △오창환 외, 2004, 청송 주왕산 북부 일대의 구과상 유문암에 대한 연구, 한국암석학회지 △황상구 2015, 청송국가지질공원 추가지질명소 개발 및 인증조건 보완, 청송군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2011, 국토지리정보원 ■ 청송꽃돌과 일본꽃돌 간 관련성 지상에 꽃피는 식물이 등장한 것은 백악기 말에서 신생대 들어서면서다. 현재 우리가 흔히 보는 식물들과 직접 연결되는 속씨식물의 쌍떡잎 류가 많이 나타났다. 그때 한반도는 중국, 일본과 한 몸이었다. 이 때문에 신생대 초반까지는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식물 화석이 동일하다. 땅속에 꽃돌이 피어났던 5천만 년 전도 바로 그 시기다. 이후 전반적으로 온난했던 신생대 초기를 지나는 동안 기온은 점차 차가워졌고 격심한 지각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약 2천300만년 전 신생대 제 3기 마이오세에 이르러 한반도 땅은 크게 요동쳤다. 일본이 대륙에서 떨어져 나갔고, 동해가 열렸다. 청송 꽃돌은 세계에서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대량생산되지만 일본의 나가사키와 후쿠오카 일대에서도 미량 발견된다. 동일한 식물 화석처럼 동일한 꽃돌이다. 그것은 땅이 흔들리고 바다가 열릴 때 훨훨 떨어져 나간 몇 송이 청송 꽃돌이 아니었을까. ☞ 여행 정보청송읍에서 31번 국도 안동방향으로 가다가, 진보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영덕 방향으로 간다. 신촌리 청송야송미술관을 지나 우회전해 들어가면 괴정꽃돌마을이다. 주차장에서 나무계단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꽃돌체험장이 있고, 다양한 휴양 시설이 괴정리에 조성되어 있다. 특히 괴정리 일대에서는 수많은 꽃돌 전시장을 만날 수 있다. 부동면 하의리 주왕산 관광지 내에도 2014년 개관한 청송군 수석꽃돌박물관이 있다. 갈평지 서쪽 태행산에는 꽃돌 생태탐방로가 조성되고 있으며 현재 일부 구간(2.9㎞ 정도)은 완성되었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청송 진보면 괴정리 꽃돌체험장 전경.).꽃돌 체험장에는 원석으로 꽃돌을 만드는 모습을 재연해 놓았다.청송군 부동면 하의리 주왕산 관광단지 내에 개관한 청송군 수석꽃돌박물관.
2016.04.19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30·끝> 시리즈를 마치며
영남일보가 지난 5월부터 연재한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시리즈가 막을 내린다. 이번 시리즈는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을 재조명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삼국사기 등 역사기록을 근거로 감문국의 흔적을 찾는 데 주력했다. 연재를 통해 김천지역이 보유한 역사·문화적 자산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성과다. 신석기 집터와 청동기 고인돌 등 선사유적에서부터 삼한시대 고분과 삼국시대 산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감문국 관련 유적과 유물을 통해 고대 김천지역이 한반도 권력 이동과 문화의 교차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남일보는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박보생 김천시장을 인터뷰했다. ‘감문국 이야기나라 조성사업’을 통해 감문국을 널리 알리겠다는 박 시장의 계획을 들어봤다. 삼국사기·동사 등 자료 토대로선사유적서 삼국시대 山城까지역사·문화적 가치 확인 큰 성과군사 활동서 유래된 ‘빗내농악’항전지인 감문·속문·고소산성애인고개·광천리우물 전설 토대연극 등 문화콘텐츠 제작 구상금효왕릉 부지엔 체험·전시시설 -이번 스토리텔링 시리즈는 삼한시대 읍락국가의 역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총평을 부탁한다.“김천시는 1949년 대구, 포항과 함께 시(市)로 승격된 곳이다. 1991년 지방자치시대 개막 후부터 전국체전 개최, 산업단지 확장 등으로 활력을 되찾고 있다. 김천혁신도시 조성으로 향후 3만여명의 새로운 인구 유입도 기대된다.이러한 성장과 함께 지역 역사·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상황에서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시리즈는 큰 의미가 있었다. 김천의 뿌리인 감문국 역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했기 때문이다. 영남일보의 이번 시리즈가 김천시민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고취시킬 것이라 믿는다.”-김천의 감문국은 다른 읍락국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감문국과 김천시민의 정체성 간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나.“감문국의 흔적은 김천시민의 마음속 깊이 각인돼 있다. 감문국 군사활동에서 비롯됐다는 금릉 빗내농악의 힘찬 가락만 봐도 감문국과 김천의 정체성이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천시민들 또한 토기 등 감문국 유물에 대한 전시 및 연구를 통해 고대 감문국의 문화·예술을 전승하고 있다. 감문국은 김천시 개령·감문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삼한시대 읍락국가다. ‘위지 동이전’ ‘삼국사기’ ‘동사’ 등 역사자료로 볼 때 독자적 문화 세력을 구축해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라의 전신 사로국은 가야를 공략하고 금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감문국을 정복, 지방행정과 군사거점으로 활용했다. 반면 ‘친가야 반사로국’ 정책을 추구한 감문국은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표방해 사로국의 정복야욕에 희생됐다. 사로국 장군 석우로는 철저히 감문국을 파괴했지만 다행히도 김천시 일원에는 감문국 관련 유적이 남아있다. 감문국이 사로국에 맞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감문·속문·고소산성의 성벽 일부는 여전히 견고하다. 관련 전설도 구체적이다. 감문국 여인과 사로국 남성의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는 ‘애인고개 전설’의 고개는 지금도 존재한다. 사로국에 맞서 싸운 나씨 장군 집안터인 ‘나벌들’도 마찬가지다. 이 밖에도 원룡장군이 마셨다는 ‘광천리 우물’을 비롯해 ‘말무덤’으로 불린 금효왕릉까지 다양한 유적이 있다. -김천만의 다양한 문화콘텐츠(스토리)를 공연물이나 관광상품으로 만드는 산업화가 앞으로의 관건이라 생각한다. 계획이 있다면.“‘감문국 이야기나라 조성사업’을 중심으로 감문국 주제 연극과 소설을 제작해 다양한 아이템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한 감문국의 빗내농악 경연대회를 더 활성화할 계획이다. 기존의 경연대회를 보완해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축제가 되도록 다양한 콘텐츠를 준비하려 한다. 지난 7월부터 시행 중인 감문국 관련 기본계획 용역은 관광활성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현재 금효왕릉 부지 매입을 위한 보상절차를 진행중에 있고 사업예정지에 대한 감정과 보상도 곧 시작할 예정이다. 금효왕릉 부지 매입을 시작으로 국·도비 92억원을 포함해 2018년까지 총 160억원이 투입될 계획이다. 2016년, 6억원의 예산으로 실시설계 후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하고 고대유적 체험 전시시설과 감문국 역사교육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 -이 밖에 김천시의 문화관광산업 활성화 전략이 있다면. “미래관광은 감성·체험을 중시하면서 다른 산업과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융·복합관광이 대세다. 김천시 또한 가족단위 관광객이 체류할 수 있고 역사·문화가 어우러진 창조적 관광콘텐츠 발굴에 심혈을 기울이겠다. 김천시는 역사·문화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2013년 ‘깨달음의 땅, 김천 한강정구와 무흘구곡 스토리’, 2013년 ‘감천 백오십리를 가다’, 2015년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등 스토리텔링 사업을 꾸준히 진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김천시는 직지사권역, 부항댐권역, 증산권역을 3대 관광권역으로 개발 중이다. 먼저 직지사권역은 역사와 함께하는 관광지로 만들 계획이다. 직지사 인근의 ‘황악산 하야로비공원 사업’은 현재 토목 공정률이 50%를 넘어섰다. 공원에는 ‘한옥체험마을’ ‘문화박물관’ ‘평화의 탑’을 비롯해 ‘치유의 숲’과 같은 공공편익시설 등이 들어선다. 인근 친환경 생태공원에 들어서는 ‘선인장 온실’ ‘삼림욕장’ 역시 시민의 휴식처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김천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추풍령과 추풍령휴게소 일대도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현재 추풍령 관광자원화 사업이 실시설계용역 중에 있다. 국·도비 200억원을 투입해 백두대간 등산로, 레이싱 존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부항댐권역은 체류형 관광의 중심지로 변모 중이다. 지난해 문을 연 부항댐 오토캠핑장은 주말 예약률 100%로 큰 인기다. 이러한 댐 주변 정비사업은 생태휴양도시의 기반을 다질 것으로 보인다. 부항댐 주변에는 카트체험시설, 숲속레포츠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증산권역은 자연힐링 관광지로 탈바꿈시킨다는 구상이다. 증산권역은 청암사와 수도계곡이라는 천혜의 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을 연 수도산자연휴양림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탐방로를 조성하는 ‘무흘구곡 경관가도 사업’ 역시 내년에 완료된다. 수도계곡캠핑장 또한 큰 인기를 누릴 것으로 기대된다.”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달라. “김천시를 전국의 관광객이 모여드는 관광도시로 발전시키겠다. 지역 관광산업과 경제활성화를 위해 많은 분들이 김천을 방문해 주시리라 믿는다. 산과 하천이 조화를 이룬 ‘삼산이수의 고장’ 김천의 원형을 보전하고 효율적 개발을 병행해 관광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 많은 응원 부탁한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공동기획 : 김천시영남일보가 지난 5월부터 7개월간 30회에 걸쳐 연재한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시리즈의 주요 지면들.박보생 김천시장이 영남일보의 스토리텔링 시리즈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에 대해 총평하고 있다. 박 시장은 “‘감문국 이야기나라 조성사업’을 통해 감문국을 널리 알리고 김천지역 관광산업을 활성화시키겠다”고 밝혔다.
2015.12.16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9> 감문국 이전의 김천 ②
◇ 스토리 브리핑1980년대 말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에서는 대규모 선사유적이 발견됐다. 이후 집터와 가마터 등이 발굴됐는데 이는 한반도 남부권에서도 큰 규모에 속하는 신석기 유적이었다. 발굴에 나선 학자들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송죽리가 서울 강동구 암사동처럼 대표적 선사유적지가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예상은 빗나갔다. 당시 우리나라의 정책은 역사·문화 유산의 보호보다 경제성장을 우선시했다. 송죽리 유적은 산업단지로 조성되는 운명을 맞았다. 2015년 현재 송죽리의 너른 들판에서 옛 사람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유적을 굽이쳐 흐르던 강물은 말라버렸고 원래 주민이 살던 마을조차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9편은 ‘감문국 이전의 김천’에 관한 이야기다. 소중한 역사·문화 자원을 보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송죽리의 사례가 향후 진행될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甘文國) 유적발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영원히 잊힐 뻔한 유적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출토 선사유물은 신석기인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신석기시대를 중심으로 청동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흔적이 발견된 덕분이지만 하마터면 그 존재는 영원히 묻힐 뻔했다. 김천 구성지방산업단지 건설로 해당 유적이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사라질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1989년 계명대박물관 발굴팀의 김천지역 문화재 지표조사 과정에서 송죽리 유적이 발견돼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송죽리를 방문한 발굴팀이 우연히 마을의 논에서 신석기 토기를 발견한 것이다. “감천유역 고인돌 축조 집단이세력 확장해 나라를 세운 곳”이형우 영남대 명예교수 논문청동기-건국 연관성에 힘실려“감천상류 집단 농사 짓기 위해개령면 옮겨 개국” 일부 견해도이후 계명대박물관의 요청에 따라 송죽리의 신석기 유적 발굴이 이뤄졌고 산업단지 건설은 잠시 미뤄졌다. 1991년에는 시험조사발굴이 진행됐으며, 1992~93년에는 계명대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본격 진행됐다. 발굴 이후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송죽리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U’자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면 감천(甘川) 물길은 구성지방산업단지 부지 동편에 낸 산 절개지로 흐름을 바꾸었다. 한반도 남부권에서 보기 드문 규모의 선사유적지는 골퍼들의 즐거움을 위한 장소로 변모했다. 송죽리 출토 유물도 흩어졌다. 유물 상당수는 대구 계명대 행소박물관을 비롯한 지역 대학의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20여년 전 송죽리 유적을 직접 발굴한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은 “만약 송죽리 유적이 제대로 보존만 됐더라면 국내 최고의 역사·문화 유산 중 한 곳이 됐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 성장시대의 이면을 보다 현재의 김천은 경북에서도 그 발전 속도가 남다른 고장이다. 2013년부터 입주를 시작한 김천혁신도시 내 공공기관·기업은 제자리를 잡고 ‘지방화 시대’의 문을 활짝 열고 있다. 혁신도시는 수도권 과밀해소와 지방자립을 위해 주요 공공기관을 지방에 배치하는 국책사업이다. 이러한 김천의 발전과 대비되는 사례가 바로 송죽리 유적의 산업단지 개발이다. 의도되지 않은 실패는 성장시대의 그늘로 남았다. 더 안타까운 점은 산업단지 조성으로 인해 송죽리 유적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이다. 계획대로만 됐다면 김천시 구성면 송죽·금평리 일원의 구성지방산업단지는 구미나 대구 성서산단처럼 대규모 산업단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입지도 나쁘지 않았다. 구성지방산업단지는 경부고속도로 김천IC에서 14㎞ 거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경부선철도와 가까워 물류에 유리했다. 구성면 지역은 1960년대에도 공업단지가 들어설 최적의 입지로 주목을 받았다. 50여년 전부터 산을 절개해 감천 물길을 돌리고 공단부지를 조성하려 했지만 자금부족으로 실패했다. 이후에도 절산 공사가 진행된 적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6월17일 감천을 돌리는 직강공사를 완료했다. 1996년 12월, 80만4천㎡ 너비의 산업단지 조성이 마무리된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구성지방산업단지는 분양가 인하에도 불구하고 입주업체를 찾지 못했다. 분양 당시 3.3㎡당 22만원이었던 분양가를 1996년 17만원으로 인하했지만 입주기업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유적을 개발했지만 제조업 침체와 인근 구미산단과의 경쟁에 밀리면서 구성지방산업단지의 생명은 끝났다. 구성지방산업단지는 결국 2003년 폐지됐다. # 송죽리와 감문국 송죽리 유적은 선사시대 김천에서도 인간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청동기를 거친 김천지역에는 감문국이 들어섰다. 이에 향토사학계에서는 신석기 이후 송죽리에서 감천하류로 내려온 특정 세력이 감문국을 건국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감천 상류의 집단이 농사를 짓기 좋은 개령면으로 이동해 나라를 세웠다는 짐작이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기록도 없고 시간차는 있지만 송죽리와 감문국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신석기 연구자들은 김천지역 신석기 유적을 감문국과 같은 삼한시대의 읍락국가와 연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은 “감문국과 송죽리 유적 간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농사를 짓기 좋은 곳마다 큰 나라가 들어서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청동기시대의 경우 감문국 건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형우 영남대 명예교수는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감문국’이라는 논문에서 “감천 유역과 부항천, 직지천, 아천, 외현천 등지의 고인돌 축조집단이 차츰 세력을 확장하면서 낙동강 유역의 여러 소국과 비슷한 형태의 초기국가인 감문국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의 주장대로 김천지역에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이 산재한다. 송죽리 유적에서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고인돌 19기가 발견됐다. 비파형동검 등 금속류까지 출토돼 지배세력이 등장했음을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이와 함께 돌을 갈아 만든 마제돌검과 돌촉이 발견돼 사회조직 확대에 따른 전쟁도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실제로 김천시 구성·지례면 지역을 비롯한 상당수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흔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난 10월 김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김천향토사연구회 소장유물 전시회에서도 청동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검과 돌화살촉 등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도움말=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甘文國’ ‘영남 문화의 첫 관문 김천’▨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 기획:김천시20여년 전 선사 유물이 출토된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고목마을) 일원은 현재 골프장으로 바뀌어 있다. 골프장 뒤쪽의 나지막한 산을 제외하고는 옛 흔적을 찾기 힘들다. 송죽리 선사 유적 발굴 당시의 모습. 지난 10월 김천향토사연구회 소장유물 전시회에서 전시된 돌검. 최근까지도 김천 일원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심심치 않게 발견됐다.
2015.12.09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8> 감문국 이전의 김천 ①
■ 스토리 브리핑 삼한시대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았다. 1천500여년 전 사라진 김천 지역의 읍락국가 감문국(甘文國) 이전의 김천도 그랬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와 부항면 지좌리 일원에서 대거 발견된 선사 유적이 이를 증명한다. 선사시대에도 김천지역은 사람이 활동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특히 송죽리 유적은 한반도 남부 내륙의 대표적 신석기 유적으로 가마터 흔적까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또한 송죽리에는 신석기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유구(遺構, 토목건축의 구조를 알 수 있는 흔적)가 남아 있어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일부에서는 송죽리 등 김천의 신석기 유적을 감문국 건국 세력의 뿌리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증명된 사실은 전혀 없다. 감문국과 송죽리 유적 간 직접적 연계성은 없지만, 선사시대 김천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8편은 감문국 이전의 김천에 관한 이야기다. # 송죽리 신석기 유적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약 1만년 전에 시작됐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따뜻해지자 한반도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주로 강이나 바닷가에서 움집을 짓고 채집·수렵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여년 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고목마을)에서도 신석기 유적이 대거 발굴됐다. 송죽리에서는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구가 다수 발견됐다. 특히 신석기 시대의 유구가 주를 이뤘는데 10동의 집터와 부속시설 등이 발견됐다. 집터 내부에서는 불 땐 자리 또는 둥근 모양의 화덕시설과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됐다. 주거지 바깥에서도 다양한 흔적이 드러났다. 화덕시설과 토기를 구운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 이밖에도 송죽리의 신석기 유물은 다채로웠다. 빗살무늬토기는 물론 석창 등의 무기류와 돌도끼·돌보습·어망추 등의 생활용구들이 발견됐다. ◇ 송죽리엔…빗살무늬토기와 가마터 흔적20여년 전 고목마을서 발굴돼돌도끼·어망추 등 생활상 반영집터 등 토목건축 구조도 남아◇ 지좌리엔…‘길쭉한 도랑형’ 후기 대표 가마2009년 부항댐 수몰지서 발견‘원형 구덩이’인 송죽리와 차이토기제작기술 변화 짐작게 해이러한 생활유물의 출토는 선사시대 도구의 변천상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송죽리 유적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은 “송죽리 유적은 영남 서북부 내륙지역의 문화적 특색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출토된 유물·유적으로 미뤄 송죽리는 선사인들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죽리 유적은 하천이 지형을 끼고 도는 곡류하천(曲流河川)의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배후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산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터전을 따라 강이 돌아가며 흘렀기에 물을 구하기 쉬웠고 퇴적물이 쌓인 땅은 비옥했을 것이다. 수렵·채집으로 삶을 꾸려나갔던 선사인들의 생업에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 송죽·지좌리의 토기가마 유적 송죽리의 신석기 유적은 토기로 대변된다. 송죽리에서는 한반도 중부권인 금강 지역과 남해안 지역의 토기문화가 모두 나타난다. 출토 토기로는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적이다. 특히 송죽리 토기가마는 신석기 중기를 대표하는 주요 유적으로 손꼽힌다. 송죽리 유적 발견 당시 주거지와 먼 북쪽지역에서 돌을 쌓아올린 흔적이 발견됐다. 당시만 해도 조리시설인 줄 알았지만 해당 돌무더기는 추후 조사와 실제 토기를 굽는 실험을 병행한 결과 토기가마로 확인됐다. 당시 발굴팀의 조사 결과 송죽리 토기가마는 직경 3m 정도의 원형 구덩이 중심에 돌을 쌓아 불의 영향을 고루 받도록 한 구조로 밝혀졌다. 이러한 형태의 토기가마는 경기 하남 미사리 유적, 강원 강릉 하시동리 유적 등 전국적으로 확인된다.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은 “주거공간과 떨어진 곳에 별도로 가마를 조성한 점과 온도를 높일 수 있는 돌무더기로 보아 토기가마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편, 송죽리에서 감천(甘川) 상류로 10㎞가량 떨어진 부항면 지좌리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도 토기가마가 확인됐다. 지좌리 유적은 2009~2010년 부항댐 수몰지구 발굴조사 과정에서 알려진 신석기 후기 유적이다. 지좌리 유적은 부항천변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부항댐 준공으로 수몰된 상태다. 지좌리 유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신석기 후기를 대표하는 ‘지좌리식 토기가마’라는 새로운 모델의 토기가마가 확인된 것이다. 송죽리의 것과는 다른 길쭉한 도랑형의 가마터가 발견됐다. 지좌리 유적은 유구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신석기 후기의 마을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비록 지좌리 유구의 경우 대홍수 등으로 훼손이 심해 자세한 조사는 어려웠지만 7기의 토기가마가 확인돼 꽤 큰 규모의 마을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송죽리와 지좌리의 가마터 유적을 통해 신석기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토기 제작 기술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실제로 토기를 굽는데는 많은 노동력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데, 토기를 굽는 실험을 통해 기술의 변화상이 확연히 드러났다. 대동문화재연구원의 토기굽기 실험 결과 송죽리식 토기가마를 이용했을 때는 토기 20여점을 굽는데 3t의 나무와 5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했다. 반면 지좌리 형식의 토기가마에서는 같은 양의 토기를 굽는데 1t의 나무와 2명의 인원만 있으면 충분했다. # 송죽리 암음(巖陰, 바위그늘) 유적김천 시내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3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인근의 산기슭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를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은 암음유적 내부에 있는 석상을 모시는 기도처로 활용되고 있다. 암음유적은 화강암 절벽의 아래쪽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는 모양이어서 비를 피할 수 있지만 그 면적은 크게 넓지 않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암음에서 도로쪽을 바라보면 송죽리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송죽리 유적과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사실은 없다. 20여년 전 직접 암음유적 발굴에 나섰던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은 “이 암음유적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주거지일 수도 있지만 제사와 같은 모종의 의식을 행한 공간이거나 질병·출산·혼례·성인식 등과 같은 한시적인 격리공간으로도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향후 암음유적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송죽리 유적과의 관계가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도움말 =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공동 기획:김천시▨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 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甘文國’▨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선사 유적 발굴 당시의 모습. 송죽리를 감싸듯이 굽어 흘렀던 감천은 사진 위쪽 산의 절개지 아래로 물길을 바꿨다. 계명대 행소박물관이 소장중인 ‘영남 문화의 첫 관문, 김천’ 특별전 도록에서 발췌한 송죽리 출토 빗살무늬토기(높이 43.7㎝). 신석기 중기의 송죽리 토기가마(위쪽)와 신석기 후기의 지좌리 토기가마를 재현한 모습. 양 지역의 토기가마 실험을 통해 토기 제작 기술의 발전을 엿볼수 있다.
2015.11.25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7> 소국 속의 소국을 찾아
1천500여년 전 신라에 병합된 읍락국가 감문국(甘文國)은 김천지역에서 일어선 소국이다. 감문국은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를 도읍지로 삼고 백두대간과 감천(甘川)유역을 아우르는 지역을 지배했다. 흥미로운 점은 감문국의 영역에 다른 소국이 있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감문국의 영역에 주조마·문무·어모·배산·아포국 등 여러 나라가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7편은 감문국 외에 김천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국에 관한 내용이다. “김천 조마면에 주조마國 있었다”일본서기 바탕한 이병도 주장에“김해·합천이 주조마국” 異見도삼국사기엔 감문국 외 언급 없어“일부 문헌 옛 지명서 추측해 기술”고분 산재한 아포읍도 소국 주장#주조마국을 아시나요김천지역에서 감문국 외에 다른 소국이 존재했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감문국의 멸망이 기록된 삼국사기에는 감문국 외 김천지역 읍락국가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여러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이 같은 주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형우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역사(삼국사기)에는 감문국만 나오지만, 김천의 초기 정치집단 가운데 다른 소국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 또한 주조마국(走漕馬國)이라는 나라가 김천시 조마면에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졸마(卒麻)’를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주조마국으로 보고 있는데, 이곳이 김천시 조마면 일원이라는 것이다. 김천시사 또한 조마면은 삼국시대부터 조마부곡이 있던 곳이라 적고, ‘조마’라는 지명이 김천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주조마국이 김천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나라라는 반론도 있다. 주조마국이 경남 김해와 함안의 중간 지역이라는 설이 학계에서 제기됐기 때문이다. 일본학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주조마국의 위치를 경남 김해로, 역시 일본학자인 스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경남 합천군 초계면을 주조마국의 위치라고 밝힌 바 있다. 주조마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일단 김천 향토사학계는 이병도의 조마면 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문무·어모·배산·아포국은 존재했을까 김천지역에는 주조마국 외에도 구전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소국이 있다. 문무·어모·배산국의 존재가 그것이다. 문무국은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소국이다. 문무리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철기시대의 횡혈석실묘(橫穴石室墓) 등이 집중돼 있어, 문무국의 존재를 추정해볼 수 있다. 실제로 김천시 감문·어모면 일원의 노인 사이에서는 최근까지도 문무국에 관해 구전되고 있다. “여산(余山)이 망해서 아산(牙山)이 되고 아산이 망해서 김산(金山, 김천시의 옛 이름)이 됐다”는 말이 그것이다. 문무국의 도읍지는 여산이라고 전해지는데, 여산은 문무리의 옛 지명이다. 여산이 망해 바뀌었다는 아산은 현재의 김천시 어모면 중왕리로 면사무소가 있는 중심지역이다. 현재 아천(牙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어모국의 존재에도 눈길이 간다. 김천시 금산동에 도읍을 두었다고 전해내려오는 어모국은 통일신라 때 설치된 어모현에서 이어졌다는 것이 향토사학계 중론이다. 향토사학계는 삼한시대 어모국의 이름을 따 어모현이라 명명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 밖에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에 배산국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는 배산이라는 산이 있다. 김천시 아포읍 지역에도 소국이 존재했다는 주장이 있다.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 일원에는 고인돌 유적 등 고분이 산재하고, 토기와 청동제 숟가락 등이 출토됐다. 제석리 인근 묘지 뒤편은 ‘옛날 작은나라’ 터라고 불렸으며, 제석리 뒷산은 제석궁·왕비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물론 아포지역이 감문국의 속국인지 독립적 세력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조선 역사학자 이종휘가 쓴 역사서 동사(東史)에는 “아포가 조공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중략)…대군을 동원해 진압하려 나섰지만”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감문국이 왜 토벌에 나섰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반면 감문국 외 김천지역 소국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견해가 있다. 감문국을 제외한 김천지역 소국에 대한 기술 대부분이 구전이나 추측에 의존하고 있어 실제 존재 여부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감문국을 제외한 김천지역 소국의 존재는 역사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주조마국, 배산국 등 감문국 외 김천지역 소국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김천시 개령면 지역이 감문국의 수도 격인 국읍(國邑)이었고, 나라로 추정되는 나머지 지역은 감문국에 정치·경제적으로 부속된 읍락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甘文國’▨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기획 : 김천시 ■ 감문국과 감로국 정약용 “中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된 ‘변진감로국’은 감문국” 학계·향토사학계·김천시사 등 삼한 이전 김천 감문국 國號로변한과 진한 영역 甘路國 추정현재 김천지역 읍락국가 감문국(甘文國)의 국호는 당연시되고 있지만, 감문국의 국호가 현재의 것과는 달랐다는 의견이 있다. 삼한시대 소국들의 존재가 기록된 중국 고문헌에는 감문국이 아닌 감로국(甘路國)이라는 국명만 있어 의문점을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중국 역사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감문국이 아닌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으로 기록돼 있다. 변진, 즉 삼한시대 변한과 진한의 영역인 영남지역에 있는 감로국쯤으로 해석하면될 듯하다.이유야 어찌되었든 변진에 위치한 감로국이라는 나라를 감문국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학계·향토사학계 모두 이견이 없다. 김천에 위치한 감로국이 가야연맹체 일원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거리상 경남 김해의 구야국과 떨어져 있지만 감천과 낙동강 등의 수로를 이용하면 활발한 소통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김천시사는 삼한시대 감로국이 감문국으로 바뀐 것은 삼국사기에 감문국의 멸망이 기록된 때부터로 보고 있다. 이후 ‘감로’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감문’이라는 이름만 남았다는 것이다.학계 또한 감로국을 감문국으로 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전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권주현 박사의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와 문화’라는 논문에 잘 나와 있다. 감로국의 한자 ‘로’자는 ‘길’이라는 훈(訓, 한자의 음을 풀이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감문국 ‘문’자의 훈 또한 ‘글’이어서 ‘길·글’로 비슷하게 발음되는 두 음절 간에 충분한 연계성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와 실학자이면서 역사학자인 정약용(1762∼1836) 또한 변진감로국을 김천의 감문국으로 보았다. 감문국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했던 일본인 역사학자 이마니시류(金西龍, 1875~1931)조차 감로국이 감문국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하고 있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배산국이 위치해 있었다는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 일대 전경. 감문국 외 김천지역 소국에 대한 기술 대부분이 구전이나 추측에 의존하고 있어, 실제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다. 옆에 작은 사진은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의 고인돌. 구전에 따르면 문무리에는 문무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2015.11.11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6> 김천, 감문국을 기리다
<스토리 브리핑> 영남(嶺南)의 첫 관문 김천은 백두대간 아래 아름다운 자연과 근대 상업발전의 거점으로 다양한 역사·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한때 급격한 산업화 물결에서 벗어나며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김천혁신도시 등 새로운 성장동력을 기반으로 도약을 꾀하고 있다. 지역발전이 탄력을 받으면서 향토의 역사·문화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근에는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 감문국이 김천 역사·문화의 원류로 새삼스레 주목받고 있다. 특히 감문국을 재조명하려는 민간 차원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 열린 김천향토사연구회 주최 소장유물전시회에는 1천400여명의 관람객이 찾아 성황을 이뤘다. 전시회 첫날에는 ‘감문국’이라는 주제의 초청강연회까지 열렸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6편은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 감문국을 기리려는 김천시민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다. 김천향토사硏 소장 읍락국가 유물김천 역사·문화의 원류로 재조명민간차원의 감문국 알리기 큰 의미이형우 영남대교수 주제특강 눈길“감문은 경북 서북부 아우른 큰 나라감천물길 따라 백두대간까지 아울러” ◆ 감문국을 기억하라 지난 20일부터 3일간 김천문화예술회관 지하 향토대전시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행사가 열렸다. 김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석호)가 주최한 소장유물전시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홍보도 없었고, 화려한 부대행사도 없었지만 2001년 이후 14년 만에 김천에서 열린 지역유물 전시회답게 문전성시였다. 전시회 첫날 오후 2시부터 열린 개막 행사에는 박보생 김천시장 등 김천시 관계자와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등 원로학자까지 총 4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김천향토사연구회 이석호 회장은 인사말에서 “김천의 역사를 시민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해 소장품을 전시하게 됐다. 특히 감문국 역사를 알릴 수 있어 흐뭇하다”고 말했다. 축사에 나선 박보생 김천시장 또한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감문국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타지에 있는 김천 출토 유물들을 돌려받아 깨끗이 보존하는 것이 우리 임무”라며 감문국의 역사를 알리는 데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전시회에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원 소장 유물 300여점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특히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등 김천향토사연구회원 4명이 보유한 토기 등 100여점의 유물은 선사시대부터 감문국 시대(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돌을 갈아 만든 칼에서부터 접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석기와 토기가 전시됐다. 해당 유물들은 수십년에 걸쳐 김천향토사연구회원들이 직접 수집한 유물로, 직접 발견하거나 버려진 것들을 보관해온 것이다. 대부분 이번 전시회에서 최초로 공개돼 그 의미가 컸다. 문 위원은 “지역에서 감문국 관련 유물을 선보여 기쁘다. 조만간 감문국에 관한 학술세미나를 열어 감문국 알리기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원들의 자부심도 컸다. 회원 정기호씨(67·김천시 대덕면)는 “수십년간 많은 이들의 무관심 속에 모은 유물들이 빛을 보게 돼 기쁘다. 감문국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김천지역의 역사성이 부각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날 전시회에서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됐다. 조선시대 영조의 어필과 과거시험 답안지를 비롯한 서화와 고서·가구·도자기에 이르기까지 옛 김천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유물이 전시됐다. ◆ 감문국의 국력을 추정하다전시회 첫날 이형우 영남대 명예교수(국사학과)의 ‘감문국’ 주제특강도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감문국에 대한 학술연구 발표회는 종종 있었지만, 유물전시회와 더불어 관련 강연이 열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날 “감문국을 그저 소국(小國)으로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경북 서북부권을 아우르는 큰 나라가 감문국이었다”며 감문국 역사의 재조명을 주문했다. 개령 일대를 중심으로 한 감문국의 세력이 컸으며, 신라의 감문국 정벌은 중고기 신라 성장의 큰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감문국의 규모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구체적 설명도 덧붙였다. 신라의 모태인 경주의 사로국과 대구의 읍락국가였던 달벌국이 넓은 분지를 기반으로 일어섰는데, 감문국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현재 감문국의 중심지였던 개령면 일대를 감문국 영역의 전부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감문국은 개령면의 넓은 분지와 감천 물길을 기반으로 일어선 나라”라고 설명했다. 감문국 지배세력이 감천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온 정치집단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감문국은 감천 하류의 김천시 개령·아포면부터 상류인 조마·구성·지례·대덕면 등 백두대간까지 아우르는, 당시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닌 나라였다는 것이다. 특히 이 교수는 김천시 어모면(禦侮面)의 지명을 예로 들며 감문국의 국력을 추정했다. 이 교수는 “한자 ‘어모(禦侮)’의 의미는 외부로부터 당하는 모욕(侮辱)을 막아낸다는 의미다. 이는 감문국이 다른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 감문국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김천향토사연구회의 이번 전시회를 통해 감문국박물관 건립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먼저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형우 영남대 명예교수였다. 이 교수는 “의성 조문국과 고령 대가야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지만, 김천에는 감문국박물관이 없어 아쉽다. 박물관 건립이 김천 향토문화 발전과 지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감문국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김천인의 발자취를 모으자. 오늘 전시된 유물만 정리해도 박물관을 만들기에는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시안(西安)이나 이집트 카이로 등 고대유적을 가진 도시들이 별다른 자원 없이 유지되는 것처럼 박물관을 통한 도시의 역사·문화 전승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또한 감문국박물관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문 위원은 “종종 지방 박물관이 예산낭비의 전형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지역 특수성과 문화가치를 고려한다면 박물관 건립은 바람직하다. 현실적으로 박물관 건립이 어렵다면 소규모의 김천향토관이라도 만들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에 박보생 김천시장은 지역민들과 향토사학계 및 학계의 의견에 귀 기울이겠다고 답했다. 박 시장은 “우리 시에서 박물관을 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중앙정부의 예산심사 탓에 어려움을 겪었다. 김천의 귀중한 문화자료들을 김천으로 가져오는 데 힘쓰는 한편, 감문국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감문국 이야기 나라’ 사업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甘文國’▨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김천향토사연구회 주최 소장유물전시회에 전시된 삼국시대 전후 토기들을 향토사연구회원과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소장유물 전시회 개막행사에 참석한 김천시 관계자와 지역 문화계 인사들이 테이프 커팅을 준비하고 있다.
2015.10.28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5> 철(鐵)의 나라 감문국
<스토리 브리핑> ‘철(鐵)’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창이나 칼, 갑옷 등 무기의 원료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철정(鐵鋌, 덩이쇠)’은 교역의 대상물품으로 국가의 부(富)를 축적하는데 도움이 됐다. 철은 이전의 청동기를 능가하는 최첨단 소재였으며, 제철기술은 국력을 키우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도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는 가야지역에서 철이 생산돼 왜 등에 수출됐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 중심의 변한연맹체 일원이었던 감문국 또한 철을 생산해 가야에 공급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5편은 김천지역에 남아있는 감문국의 철 생산 흔적이다. 직접적인 흔적은 찾기 어려웠지만, 철과 관련한 수많은 지명이 김천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울산 달천·전북 달궁터의 ‘달’은 ‘甘’의 훈으로 ‘철 유적지’ 유추학계 “감문국 國號도 철과 밀접”삼국지위지동이전 등 옛기록선변한연맹체 내 철 공급지로 무게향토사학계 “달은 쇠 다룬단 뜻”‘달’이 ‘月’로 바뀌었다는 주장도‘甘’의 변형으로 ‘거’‘가’도 제시관련 땅이름서 철 생산 추론해내 ◆ 금속문화를 받아들이다선사시대부터 한반도 남부지역은 금속문화를 왕성하게 받아들였다. 이형우 영남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논문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감문국(甘文國)’에서 “대륙으로부터 금속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한반도의 남부 지역은 급속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서력 기원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보다 우수한 철기문화 집단이 육·해로를 통하여 파상적으로 이동해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옛 감문국의 영역에서는 금속문화의 흔적이 어렵지않게 발견되고 있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등의 유물들은 일찍이 김천지역에 금속관련 기술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김천시 문당동에서도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등 김천지역은 금속문화의 주요 유입경로로 간주되고 있다. 감문국이 철 생산국이었다는 의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옛 문헌기록은 감문국이 철 생산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변한 지역의 산업경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서 철이 생산돼 마한의 예(濊)와 왜국에 무역하고 이군(二郡)에도 공급하여 물품을 매매함이 마치 돈(錢)으로 거래하는 것과 같다”고 적고 있다. 만약 감문국에서 철이 생산됐다면, 감문국이 축적할 수 있는 부의 크기는 더 컸을 것이며 연맹체 내의 위상도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김천시사(金泉市史) 또한 김천이 변한지역의 철 생산지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김천시사는 김천지역이 철 생산이 왕성했던 가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적고 있다. 김천 남부권 지역이 현재 성주지역인 성산가야와 접하고 있으며, 낙동강과 연결된 감천을 통해 가야문화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1965년 조마면 장암리 출토 토기가 1968년 경남 창녕 출토 토기와 양식이 동일한 가야 토기로 밝혀짐으로써, 김천지역의 상당 부분이 가야문화권과 관련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김천시사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변한은 비옥한 토지가 많아 일찍부터 철의 산지로 제철기술이 발달했다”며 낙동강 지류 감천(甘川)을 낀 감문국이 철 생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 철(鐵)과 밀접한 감문국의 국호학계는 감문국에서 철이 생산됐다는 구체적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변한의 특산물인 철은 김해 이외의 여러 소국에서 생산됐는데, 감문국이 주요 철 생산지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계명사학 제23집에 수록된 권주현 박사의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와 문화’라는 논문은 감문국이 철 생산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감문국이 철 생산지라는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감문국의 국명과 현재 김천지역의 지명에 철 관련 명칭이 녹아있다는 것이 논문의 주된 내용이다. 이 논문은 감문국의 국명이 철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감문국 국명 중 ‘감(甘)’자의 훈(訓, 한자의 음을 풀이한 뜻)이 ‘달’인데, 이 ‘달’과 관련된 지명이 철과 관련돼 있다는 설명이다. 이 논문은 울산의 ‘달천’ 유적이 철 관련 유적이며, 전북 남원 산내면의 ‘달궁터’가 철과 관련된 유적임을 지목하고, 감문국의 ‘달 감(甘)’자 또한 철과 관련된 지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해도호부 편에도 ‘감(甘)’자가 쓰인 감물야촌(甘勿也村)이 나오는데 이 지역에서도 철이 생산됐다.김천 향토사학계 또한 비슷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달 감(甘)’자가 철과 관련돼 있다고 설명한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달’이라는 음절(音節)이 쇠를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 위원은 “요즘 유기를 제작할 때도 ‘달련’이라는 말을 쓴다. 때린다는 의미로 이름 붙여진 방짜유기의 ‘방짜’처럼 때려 가공한다는 뜻이 담긴 음절이 바로 ‘달’자”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김천시 대덕면 화전리의 월매동이 철과 관련된 지명이라는 의견이 있다. ‘감(甘)’자의 훈인 ‘달’이 ‘월(月)’로 바뀌어 월매동이 됐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김천지역에는 철 생산과 관련된 듯한 여러 지명이 있다.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과 머지 않은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에는 ‘쇠내(金川)’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김천시 지례면에는 철과 관련된 한자인 ‘감(甘)’자가 변형된 듯한 지명이 남아있다.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의 ‘거물’은 ‘감(甘)’자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거물리는 거무실, 검물, 거물, 거문리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에도 ‘가물’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조마면 신곡리의 지명 또한 감문국이 철 생산지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곡리에는 소점골, 시점골, 철수동(鐵水洞)이라는 지명이 있다. 감천(甘川)의 쇠를 파서 가져와 마을의 뒷산에서 쇠를 만들 때 쇳물이 흘렀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철수동’이라 불린다고 한다. 물론 김천의 해당 지명들이 반드시 감문국 시대에 붙여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 반응이다. 하지만 권주현 박사는 “김천지역 지명 상당수가 철과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감문국이라는 국호 또한 철생산과 관련해 붙여진 명칭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의견을 자신의 논문에서 밝혔다. 글=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고대 김천지역의 역사 지리적 환경과 甘文國’▨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김천시 대덕면 화전리 월매동 전경. 학계는 철 생산지를 의미하는 ‘감(甘)’자의 훈인 ‘달’이 ‘월(月)’로 바뀌어 월매동이 됐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김천시 지례면 거물1리 입구. 김천시 지례면에는 철과 관련된 한자인 ‘감(甘)’자가 변형된 듯한 지명이 남아있다. ‘거물’ 역시 ‘감’자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의 국명 또한 철 생산지라는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됐다는 의견이 있다.
201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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