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 김주영의 머리카락 미투리 - 청백리 안동권씨와 그 아내

  • 입력 2021-05-24 18:11  |  수정 2021-05-3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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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자면 아직 먼 2월 초순 어느 날, 고을의 관속들이 오리 정까지 나와 새로 도임 하는 수령을 맞이하고 있었다. 행차를 기다린 다섯 시간이 흐른 오후 드디어 수령의 행차가 멀리 바라보였다. 

 

그러나 비루먹은 조랑말과 마부 한 사람을 데리고 모습을 드러낸 수령의 행색은 누추하고 남루하였다. 행차에 수행한 절름발이 마부 역시 늙어 구접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 가장자리에 눈곱조차 너절하게 끼어있어 바라보기 매우 민망하였다. 

 

수령을 모셔오기 위하여 서울까지 올라간 원탐리인 이방의 행색이 오히려 깨끗하고 근엄하여 수령으로 잘못 알아볼 정도였다. 

 

지금까지 숱한 수령들이 전라도의 곡창 지대로 회자되는 이 고을에 도임 하였다가 과만(瓜滿)이 되어 돌아갔지만, 이처럼 초라한 수령을 맞이하기는 처음이었다. 

 

새로 도임 한 안동 권씨는, 수령으로 제수 되기 전까지 향리에 파묻혀 글만 읽어온 선비였다. 그러나 본래부터 있어온 제도가 뚜렷하고 또한 견문도 없지 않았을 터인데, 행차가 이토록 빈약하고 너절함에 아연실색이었다. 

 

늘어선 육방관속들이 허리는 조아리고 있었지만, 입 귀를 비쭉거리고 서로 의미심장한 눈짓을 몰래 주고받으며 수령의 행차를 비웃고 있었다.


수리(首吏)로 불리는 이방을 비롯한 육방관속들이란 십중팔구 그 고을 태생으로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원들을 아양과 교태로 보위해온 터였다. 

 

아전들이 다른 고을로 전임하는 경우나 교류 따위는 그 사례가 없었고, 실정의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예로부터 정도에 넘치는 그들의 행패와 침탈에 대항하여 감히 맞섰던 수령은 없었다. 

 

그들은 고을 사람들의 살림 규모와 형편을 거울 속 같이 꿰뚫어 보았다. 논밭의 몇 두렁이며 그 집안의 식솔들 숫자까지도 보름달 바라보듯이 훤하게 꿰고 있었다. 

 

누에 똥 갈 듯 과만으로 6개월마다 자리를 바꾸어온 수령들은 고을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전들을 앞잡이로 세워 가렴주구를 일삼아 왔고, 아전들은 앞잡이 노릇해준 대가로 수령의 눈을 요리조리 비켜가며 백성들을 상대로 착복과 침탈을 일삼았다. 

 

수령이 혹은 그들의 횡포를 알아챘다 하더라도, 수령 자신이 권력을 휘둘러 백성들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두고만 보는 것이었다. 

 

고을로 도임 할 적에는 말 두어 필에 종자가 두 셋에 불과했던 수령들이 과만이 되어 돌아갈 적에는 수십 필의 말에 종자는 스물이 되어 돌아가는 가는 경우가 그래서 허다하였다.
 

아전들이 고개를 숙이고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은 것에는 도임하는 수령의 행색이 보기 드물게 남루했기 때문이었다. 

 

수령이 그처럼 가난하다면, 중앙의 권력자에게 바친 뇌물을 벌충하기 위하여 재임중의 가렴주구가 혹심할 것은 뻔한 일일 것이고, 아전들은 그것을 빌미삼아 고을 백성들에게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침탈로 배를 채울 것이었다. 

 

육방관속들은 수령의 행차를 뒤따랐다. 그런데 수령은 늙은 마부에게 곧장 동헌으로 들라하지 않고, 말을 비석거리로 몰 것을 분부하였다. 

 

초라한 행차는 머지않아 비석거리에 당도하였다. 곡창지대일수록 비석거리는 더욱 화려했다. 

 

수령은 비석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송덕비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때 뒤따르던 아전들이 또 한번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킥킥거렸다. 

 

선정 베푼 것을 칭송하는 내용의 송덕비들은 그 곳 고을에 부임했었던 수령들이 과만이 되어 돌아간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 아니라, 모두가 수령들이 재임 시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송덕비를 세우려면 고을 백성들로부터 준조세 격인 건립비를 징수해야했다. 그 건립비는 비석을 세우는 실제 경비의 몇 십 배를 징수하여 나머지는 관원과 아전들이 다투어 착복하는 것이었다. 

 

그 날 밤 수령은 우선 객사에 머물렀다. 닳고닳은 이방이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렸다가 고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기로 하여금 은밀히 수청들게 하였다. 

 

수령의 부임은 미설가(未 家)가 상례였기 때문에 관기의 수청 역시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수청들러 갔던 관기는 불과 몇 분만에 퇴짜를 맞고 쫓겨났다. 

 

그로부터 열흘 동안 관기들로 하여금 끈질기게 수청들게 하였으나 결과는 도임 첫 날 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었다. 수령 권씨는 얼마 후 형방을 불러 감옥에 수감중인 죄인들의 도류안(徒流案)을 내놓으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리고 죄인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구문(勾問)한 다음, 그들 대다수를 방면해버렸다. 

 

갇혔던 죄인들은 지난날 재임했던 수령들의 착취에 시달림을 받던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죄인들을 방면 할 때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아전들이 달려와 손사래를 쳤다.


"나으리 죄인들을 무턱대고 방면해서는 아니 됩니다."
"본인이 죄인들을 무턱대고 방면하고 있다는 것이오?"
"황송하오나 그러하옵니다."
"그게 무슨 하찮은 말이오? 무고한 백성들을 무턱대고 포박해서 가둔 것은 누구였소?"
"전임 수령께서 죄적을 엄중하게 따진 다음에 잡아 가둔 것입니다."
 

수령은 들은 척도 않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밤새 등촉을 밝히고 글을 읽거나 안동 본가의 아내에게 편지로 안부를 묻는 일과를 계속하였다. 

 

육방관속들은 안절부절이었다. 가렴주구나 뇌물 알선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할 일이 없어져 관아에 나와서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일과를 보냈다. 

 

그런 중에 이방이 꾀를 내었다. 스스로 손뼉을 쳤던 이방은 안전으로 나아가 지나간 수령들처럼 송덕비를 세울 것을 품의 하였다. 도임 하던 날, 비석거리를 유심히 살피던 광경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방의 말을 듣고 있던 수령은 색구를 불러 물을 한 그릇을 떠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방이 바라보는 면전에서 그 물로 귀를 씻었다. 

 

그 뒤부터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섭취한 자는 모질게 다스리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배려하였다. 

 

그런 중에 문득 고을에 역병이 돌았다. 관아에 죽치고 있었으면 탈이 없었으련만 글을 읽고 쓰는 일 이외에는 고을의 곳곳을 쏘다니며 민정을 살피던 수령이 남 먼저 역병에 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객사하고 말았다. 

 

아전들이 시신을 놓고 좌고우면하는 중에 고을의 원로들이 모여들어 공론하였다. 도임 할 때 입었던 도포를 죽을 때까지 기워 입으며 지낸 수령의 청렴결백과 선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장례나마 안동 본가에서 치를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싶었다. 원로들은 상두꾼 십 수명을 선발하여 안동 본가까지 송장을 메고 가기로 하였다. 때는 뙤약볕이 내려 쪼이는 한 여름이었다. 

 

송장을 하루만에 썩기 시작하여 냄새가 진동하였다. 밤낮으로 달려 안동 본가에 당도한 것이 출발한지 엿 새 만이었다. 지금의 안동군 서후면, 권씨 본가에 당도한 상여꾼들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늙으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안상제의 슬하에는 어린 삼 남매를 거느리고 있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안상제의 곡소리는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도려내는 듯 슬펐으나, 공교롭게도 전라도에서 멀고 먼 이곳 안동 땅 까지 시신을 메고 당도한 상여꾼들에게 끼니를 대접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허기진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머리를 수건으로 가린 안상제가 상두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퉁퉁 부어오른 안상제가 말했다.

 

"고을의 원로들과 시신을 여기까지 메고 와준 댁들의 은혜에 보답할 길을 찾다가 지난밤을 지새워 겨우 미투리 한 짝을 삼았습니다. 댁들의 은혜에 비하면 만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겠습니다만, 이것이나마 정표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두꾼들은 소중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짐작하고 보자기를 펴 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을의 원로들에게 보자기를 건네 드렸다. 

 

보자기를 펴 본 고을의 원로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앉았다. 그리고 한평생을 오직 남에게 베풀며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받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물건을 무턱대고 받아온 상두꾼들을 꾸짖었다. 

 

그 물건은 안상제가 머리를 잘라 꼬아서 밤을 새워 미투리 한 짝을 삼은 것이었다. 원로들은 상두꾼들에게 보자기를 건네주며 또 다시 안동까지 당도할 동안 소중하게 받들어 모시어 안상제에게 돌려드리고 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김주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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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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