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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3> 마을의 자연을 정원으로 삼다 - 영이정·파서정·만취정과 만취서당·동은정
청송읍을 지난 용전천(龍纏川)이 남쪽 5㎞ 정도에 다다랐을 때, 천(川)은 보광산의 북동 자락과 성황산 사이에 붙잡혀 크게 몸부림친다. 몸부림은 단애와 소를 만들고, 부채꼴 모양의 땅을 만들고, 너르고 비옥한 땅을 만드니, 사람들은 부챗살 모양의 마을을 일구고, 산 많은 청송에서 가장 너른 들을 경작했다. 청송읍 청운리(靑雲里). 이 땅의 아름다움은 일찍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을 이룬 은자들은 대 이어 살면서 그 아름다움에 이름을 주었다. 깊은 소는 ‘가마소’ ‘은어소’라 하였고, 마을을 감싼 용전천은 ‘청운하천’이라 특별히 아껴 불렀으며, 동리의 각별한 경치를 ‘취동팔경(翠洞八景)’이라 받들었다. 그리고 단애와 산중턱과 마을의 고지대에 정자를 지어 이 모두에 스며들었다. #1. 시간과 시간을 이어 오늘에 이르다, 영이정남쪽으로 흐르던 물이 급히 서쪽으로 몸을 트는 물굽이의 절벽 위에 정자 하나 올라 있다. 영이정(詠而亭). 마을의 안산인 성황산을 동쪽에 두고 청운하천과 월구들을 내려다본다. ‘영이’란 ‘때(時)와 형세(勢)를 알고 소요자재(逍遙自在)함’을 뜻하는데, 평해황씨 청송 입향조인 황덕필(黃德弼)선생의 자호(自號)다. 선생은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낙향했다가 중종 때에 청운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영이정은 1734년(영조 15) 마을의 한가운데 창건되었다가 이후 세월이 흘러 붕괴되어 1945년 지금의 장소로 이건했다. ‘영이정이건기’를 보면 ‘바위를 끊어 대로하고 쌓아서 방정하게 하고 기와를 옛것을 쓴 것은 오래된 물건을 잊지 아니하기 위함이요 헌영(軒楹)과 기둥은 새롭게 하여 살펴보니 진실로 아름답다’고 했다.청운리 부채꼴 모양의 너르고 비옥한 땅물굽이 절벽 위에 앉은 영이정과 파서정황학이 강학하던 자리에 지은 만취서당마을 불빛이 별빛처럼 보인다는 만취정자연과 조화 이루며 취동팔경 즐기던 곳절벽 위에는 개망초와 엉겅퀴가 흐드러졌다. 그 속에 일직선의 시멘트 길이 나 있다. 길가에 영조 때의 효자 황취근의 쌍효각(雙孝閣)이 먼저 낮게 서 있고, 길 끝 흙돌담 가운데 협문이 열려 있다. 영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에는 둥근 기둥으로 권위를 세웠고, 가운데 2칸은 대청으로 열고, 양쪽에는 1칸X1.5칸 규모의 방을 두었다. 방의 전면에는 툇마루를, 측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다. 오른쪽 방에는 ‘풍평(風平)’, 왼쪽 방에는 ‘욕평(浴平)’이란 이름을 걸었다. 후면에는 벼락닫이창을 내었다. 글 읽다 졸던 선비가 바람에 창이 쾅 닫히는 소리에 퍼뜩 깨어나 무안해 하는 상상을 한다. 대청에 들면 활기찬 곡선에 둘러싸인다. 나무의 곡진 몸매가 그대로 집의 뼈대가 되어 있다. 벽에는 ‘취동팔경’ 각자판이 걸려 있다. 지금의 영이정은 2009년 3월에 증축한 것으로 뜻을 모은 문중사람들의 이름이 비에 새겨져 있다. 대개가 새로운 모습이나 이곳으로 처음 터를 옮기고 쓴 ‘이건기’ 목판은 오래된 모습이다. 마당을 거닐며 본다. 절벽에서 자라난 아카시아가 강물을 샘으로 열어 놓는데, 하얀 머릿수건을 쓴 여인이 얕은 물에 젖어 다슬기를 잡고 있다. ‘고만어화(菰灣漁火)’와 ‘벽암조수(霹巖釣)’가 또한 이와 같지 않겠는가. 마당에는 시멘트를 깔았다. 실 같은 금이 졌고, 그 틈을 비집고 몇 포기 풀이 자랐다. 촌에서 마당은 노동의 공간이고 시멘트 마당은 곧 편리를 뜻한다. 영이정 시멘트 마당을 타박할 마음이 없다. 긴 시간을 이어온 과정에는 보존과 첨삭이 내재되어 있고,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서로 시대의 간극을 두고 떨어져 있다. 사람도 땅도 풀도 저마다 최선을 다한다. 공간은 시간을, 시간은 공간을 체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2. 서녘 낙조에 아취를 더하다, 파서정마을을 기준으로 청운하천의 동쪽 물굽이에 영이정이 있다면 서쪽 물굽이에 파서정(巴西亭)이 있다. 서쪽으로 향하던 천이 다시 남쪽으로 홱 방향을 바꾸는 자리다. 파서정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옛날 ‘덕이 빛나고 풍속을 바르게 고치고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감추어 길이 은둔(隱遁)하여 유유자적하며 도를 즐기었던’ 가의대부 황정필(黃廷必)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를 기려 정자를 세우고 ‘파서정’이라 편액했다 한다. 파서정은 영이정과 비슷한 구조이나 측면 2칸의 너비가 다르다. 공포는 한결 화려하고 대청에는 문을 달았는데 대청문 인방위에 꽃을 새긴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뜰에는 들꽃이 무성한데 그 너머로 천과 들과 성황산과 남쪽으로 흐르는 장대한 능선들이 모두 한눈이다.천변에 내려서 바라보면 파서정의 풍취는 더욱 높다. 벼랑 아래로 포항 방향의 도로가 놓여 있어 하천과 동떨어진 듯도 하나, ‘파서정기’에 ‘비처럼 쏟아지는 바위의 긴 다리가 가마소에 새로 놓여 병풍과 장막 같이 둘러있어서 영롱하기가 거울 같고 큰 강이 그 아래 흐르고…봉수(烽燧)와 성대(星臺)가 그 뒤에 팔짱끼듯 하고’라는 멋진 표현이 저 벼랑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한다. ‘취동팔경’의 ‘부연모하(釜淵暮霞)’와 ‘봉산낙조(烽山落照)’는 바로 이곳이 아닐는지. #3. 흠모하고 흠모하다, 만취정과 만취서당‘청운리에 진실로 학문이 높은 선비가 있다’는 흠모의 소문은 오래되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만취동(晩翠洞) 황학(黃)이다. 선생은 평생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겨 마을을 ‘취동(翠洞)’이라 불렀다. ‘취동팔경’의 ‘취동’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26년 뒤인 1830년 후손 황대손이 황학이 강학하던 곳에 만취서당(晩翠書堂)을 지었고 그 후 1847년 다시 뜻을 모아 만취정(晩翠亭)을 세웠다. 서당과 정자는 서로 마주본다. 만취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마을의 제일 위쪽에 자리한다. 작은 건물이 고매하게 오뚝한데, 서당을 기점으로 마을은 부챗살을 편다. 만취정 역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성황산 중턱에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그곳에서도 마을의 부챗살 모양은 확연하다. 모두의 기문에 ‘서쪽 해 지면 마을 등잔불이 점점이 점철되면 별이 가득 벌려 있는 듯하다’는 표현이 있다. 찬연한 찬미다.만취정은 접근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아주 커다란 나무가 만취정 앞에 우뚝해 잡목들이 자라지 못했어. 언젠가 그 나무를 베어버렸고, 이후 잡목들이 자라나 정자를 감춰 버렸지. 강 건너 오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물이 너무 깊어. 멀리 돌아 산 사면을 타고 갈 수는 있지만 너무 위험해.” 동네 어르신의 말씀이다. 평해황씨 27세손인 황간모의 시에도 ‘좁은 숲 길 따라 소나무 검은 그늘 음지 아래 푸른빛을 밟으며 겨우 찾아 왔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닿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멀리서만 흠모할 뿐이다.#4. 은(隱)의 불행은 언덕의 행이다, 동은정성황산의 동쪽사면은 마을의 입구라 수구너미라 부른다. 파서정 아래서 남쪽으로 향한 청운하천이 곧 다시 동류해 수구너미를 가로지른다. 천변은 고만들이다. ‘취동팔경’의 ‘고만천’이 이곳의 용전천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왕산으로 가는 도로 가까운 산자락에 동은정(東隱亭)이 있다. 이곳에 ‘자취를 감추고 참다운 의취를 얻어서 인과 지로 즐기고 늘그막에는 물고기와 새를 벗하며 살았다’는 이가 있다. 그는 ‘휘(諱)는 도철(道喆), 자(字)는 중길(重吉), 호는 동은이라, 호로써 동은정을 세웠다’ 한다.높은 계단 위에 문이 열려 있다. 계단 아래 양쪽에는 18세기 사람 황태징의 창효각(彰孝閣)과 19세기 사람 황하흠의 정효각(旌孝閣)이 듬직하게 파수한다. 대문은 널판문이다. 꽃받침을 가진 광두정이 조르라니 장식되어 곰살갑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구조로 전면은 둥근 기둥이다. 가운데 대청방을 두고 오른쪽 방은 이락당(二樂堂), 왼쪽 방은 삼성헌(三省軒)이라 이름 붙였다. 대청 광창에 반투명 무늬유리가 그리 오래지 않은 은은한 멋을 풍긴다. 기문을 쓴 황공의 후손은 ‘공이 숨어 사는 불행이 이 언덕의 행’이라 했다. 은근한 낮춤의 언사가 이곳의 정취를 은근히 높인다. 청운리의 누정건축은 자연과 건축의 조화를 넘어서, 자연의 경지에 이른 인문세계를 더해 자연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별서정원’이나 ‘구곡의 경영’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청운리의 정자들은 그보다 소박하고 무구하며 따뜻하다. 그것은 삶과 동리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 기획 : 청송군취동팔경(翠洞八景)제1경 성대신월(星臺新月) : 마을 앞산인 성황산에 초승달이 뜨는 모습제2경 부연모하(釜淵暮霞) : 마을 앞 용전천의 가마소에 생긴 저녁노을제3경 은어심담(銀魚深潭) : 마을 앞 은어소에 은어가 노니는 모습제4경 봉산낙조(烽山落照) : 마을 뒷산으로 해가 지는 광경제5경 선산초적(仙山樵笛) : 맨드락산에서 버들피리 부는 모습제6경 월구청탄(月駒淸灘) : 깨끗한 물이 흐르는 월구천의 풍광제7경 고만어화(菰灣漁火) : 고만천에서 밤에 고기 잡는 광경제8경 벽암조수(霹巖釣) : 고만천 바위에서 늙은이가 낚시하는 모습청송읍 청운리 동쪽의 용전천 절벽 위에 자리잡은 영이정. 영이정의 ‘영이(詠而)’는 평해황씨 청송 입향조인 황덕필 선생의 자호다. 1739년(영조 15) 마을 한가운데에 세워졌고, 1945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었다.청송읍 청운리 서편을 돌아나가는 용전천 물굽이 위 언덕에 파서정이 자리하고 있다. 파서정은 유유자적하며 도를 즐겼던 가의대부 황정필이란 인물을 기리기 위한 정자다.성황산 중턱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만취정. 주변에 잡목이 우거져 있는 데다 산 사면을 타고 돌아가야 해 접근이 어렵다.청송읍 청운리에 자리한 만취서당. 만취서당은 조선 후기 유학자 만취동 황학 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로, 황학의 후손 황대손이 1830년 지었다.
2017.07.05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2> 다채로운 마음의 공간 - 망미정·우송당·애국정·영모재
누정(樓亭)은 누각과 정자를 의미하나 일반적으로 누(樓), 정(亭), 당(堂), 대(臺), 각(閣), 헌(軒) 등을 아울러 일컫는다. 누정은 자연과 합일한다. 물과 돌과 나무와 빛 속에 누정은 또 하나의 자연이 되고 시인묵객들을 끌어당겨 스스로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누정에는 또한 세움의 뜻과 마음이 서려 있다. 장소를 택하고 목재를 고르고 구조를 정하고 이름을 짓는 모든 행위와 결과에는 지조와 은둔과 추모와 같은 다채로운 내면이 새겨져 있다.#1.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집, 망미정 청송읍의 동쪽 용전천변에 10여m 높이의 절벽이 있다. 절벽 아래에는 여울물이 감돌아 능히 용이 살 만한 깊은 소를 이루는데, 절벽의 허리에는 용이 승천하다 스친 흔적이 베인 상처처럼 남아 있다. 또 언제 용이 날아올라 천지가 흔들릴지 모르는 절벽 위 가장자리에 함께 날아오를 듯 턱을 살짝 치켜세우고 서 있는 정자가 있다. 망미정(望美亭). ‘아름다움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종 때인 1899년 청송부사 장승원(張承遠)이 푸른 용전천과 방광산의 절경에 감복해 지었다는 정자다. 예전 이 일대는 맑은 솔밭이 그윽했다고 한다. 지금 주변에는 풀·나무 하나 없이 하늘만 넓어, 먼 데서 바라보이는 정자의 뒷모습은 도도하고 쓸쓸하다. 그러나 점점 다가가면, 일정한 너비로 서있는 기둥들 속에 세로로 나뉜 벽과, 가로로 나뉜 벽과, 하나의 작은 창을 가진 벽과, 허(虛)로 채워진 벽이 유쾌한 대조와 즐거운 비례의 표정을 짓고 있다.망미정은 절벽 바위의 정수리들을 초석 삼고 그 위에 그랭이질 한 네모기둥을 정면 3칸 측면 2칸 골격으로 세워 팔작지붕을 얹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가장 오른쪽이 대청마루로 용전천 물길이 남쪽으로 둥글게 굽어지는 방향으로 활짝 열려 있다. 왼쪽 두 칸은 방으로 전면은 툇마루다. 두 칸 모두 문이 있으나 창은 가운데 칸에만 작게 나 있다. 1899년에 부사 장승원이 지은 망미정용전천과 방광산 절경 한눈에 들어와격변의 시대 고뇌의 공간이었을지도…손자가 조부위해 지은 우송당·애국정선대와 후대의 애틋한 관계 느껴져파평윤씨 오랜 그리움 담긴 영모재공동의 유교적 공간이자 구심점 역할고려 말, 조선 초의 정자들은 대개 사방이 개방된 모습이었다고 짐작되는데, 그때의 사방 개방된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은 이후 정자의 원형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구들이 있는 온돌방은 조선시대에 와서 확산되었다. 대개 정자는 즐기며 휴식하는 유식(遊息)의 공간이었으나 거기에 폐쇄된 공간에서 학문을 통해 수양하는 장수(藏修)의 공간이 더해진 것은 16세기 사림이 형성되면서였다. 부사 장승원은 백의에 의관을 장정하고 선비들과 시를 읊으며 막걸리를 즐겼다고 전한다. 그러나 방산 허훈이 쓴 ‘망미정시’를 보면 장승원은 ‘면류관을 쓰고 패옥을 차고 궁궐에 들어갔다가 외직으로 뛰쳐나와 청송고을을 맡았는데’ ‘외로운 이 삿갓만 한 정자에 앉아 강물만 가끔 내려다본다’고도 하고, ‘서방미인(西方美人)’, 즉 ‘임금을 바라본다’고도 했다. ‘망미’ 속에 감춰 모신 님은 임금님이었던 걸까. 격변의 시대에 장수의 공간은 고뇌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2. 관계를 이어가는 집, 우송당망미정 동쪽에 또 하나의 정자 우송당(友松堂)이 자리한다. ‘소나무를 벗한다’는 이름에 답하듯 주변에는 몇 그루 소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 있다. 우송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형태로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가 방이다. 대청에는 문을 달아 때론 방으로 때론 마루로 자유롭게 변신한다. 전면에는 툇마루에 멋진 계자난간을 둘렀고 후면에는 소박한 쪽마루를 두었다. 기둥머리와 화반은 큼직하고 화려하다. 당(堂)은 당당한 집채를 말한다. 우송당은 당당하다. 우송당은 1931년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상영(尹商榮)이 지었다. 이 일대는 그의 할아버지 윤두석(尹斗錫)이 즐겨 산책하던 곳으로 우송당은 손자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지은 집이다. 조선시대 어린 손자의 교육은 주로 할아버지가 맡았다고 한다. 아들이 아닌 손자가 조부를 기린다는 것은 그러한 시간과 관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송당의 당당함 속에 너그러움과 엄격한 질서가 동시에 느껴진다. 우송당과 망미정은 서로가 완상의 대상이 된다. 다만 우송당은 절벽에서 조금 물러나 자리한다. 정자 앞 천변 길은 풀밭 속에 걸음의 흔적으로 나있다. 풀이 자라는 속도보다 사람들의 걸음이 잦은 걸 게다. 정자에서는 저 길이 먼저 또렷하다. 이는 손자 상영이 조부의 걸음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방식이 아닐까. 시간에 시선을 내어준 것, 이것은 시선이 닿는 곳에 먼저 시간을 내어주는 우리의 걸음으로 이어진다.#3. 오래 그리워하는 집, 애국정과 영모재 청송읍의 남쪽, 용전천 너머는 금곡리(金谷里)다.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마을로 ‘금이 나던 곳’이라 하여 금곡이다. 이 마을에도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 지은 정자가 있다. 금곡3리의 애국정(愛菊亭), ‘국화를 사랑하는’ 정자다. 홀로 황국을 사랑했다는 노인은 문숙공 윤관의 후예다. 그는 글 읽는 농부로 한가할 때는 지팡이 짚고 마을(굿바들, 청송읍 금곡리)을 소요했다 한다. 만년에 휴식할 곳을 정했지만 정자를 짓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손자 양주가 할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뜻을 슬퍼하며 지은 것이 애국정이다.애국정은 우송당과 거의 같은 구조다. 대신 양쪽 측면에 문이 있고 그 앞에 자연석이 계단으로 놓여 있다. 대청 문 위에는 가로로 긴 광창이 있는데 아름답고 정교한 꽃살로 가득하다. 어느 후손의 근사한 마음인지 대청 문고리에 마른 솔가지가 꽂혀 있다. 애국정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애국정기’에 ‘신축(辛丑)사월’이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애국정 마당에는 그네 의자와 수도가 있다. 동리의 후손들은 들일을 하고 여기 흔들흔들 의자에 앉아 애국정의 시간에 스며드는 걸까. 할아버지와 손자, 선대와 후대의 관계가 보다 가깝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애국정 맞은편으로 보이는 것은 길가 축대 위의 둥그런 둔덕이다. 시선은 막혀 있지만 들꽃들 가득해 유정하다. 정자를 에둘러 정원도 조성되어 있다. 국화는 보이지 않지만 혹 모른다. 가을날 도연명의 집처럼 집 둘레 가득 국화꽃 피어날지. 금곡2리는 초막골이라 불린다. 조선 명종 때 윤씨 효자가 초막을 짓고 시묘를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안길로 제법 올라가면 등마루 선의 마지막 즈음에 파평윤씨 집안의 재사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대문은 잠겼고 담은 높아 대문 틈새로 속을 들여다본다.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구조다. 전면과 측면에 좁장한 쪽마루가 보이고 양쪽 방 앞에만 계자난간을 세웠다. ‘영모재창건기’에 보면 재실은 예부터 있었지만 지금의 건물로 지은 것은 1823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은 많고 힘은 적어 햇수로 3년간 여러 후손들이 힘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영모재는 있는 듯 없는 듯, 재실인 듯 아닌 듯, 그러나 마을의 심장부에 위치한다. 공동의 유교적 공간이자 정신적 구심점이다. 대문 앞에는 작은 텃밭이 있고, 재사의 오른쪽에는 금곡리 농부들의 피로 해소실이 자리한다. 일할 때도 쉴 때도 그들의 뿌리, 그들의 구심점은 가까이에 늘 존재한다. 잊으나 잊지 않는 것, 그렇게 오랜 그리움으로 뒤를 따르는 것이 ‘영모’일 터. 마음이 담긴 건축은 만들고 지키는 사람의 자부심을 키워주고 보여준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 기획 : 청송군청송읍 용전천변 10여m 높이의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망미정. 1899년 청송부사 장승원이 푸른 용전천과 방광산의 절경에 감복해 지은 정자다.‘소나무를 벗한다’는 뜻을 가진 우송당. 1931년 파평윤씨 윤상영이 그의 할아버지 윤두석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청송읍 금곡3리에 위치한 애국정. 국화를 유독 좋아했던 할아버지를 위해 손자가 지은 정자다.파평윤씨 집안의 재사인 영모재. 마을의 심장부에 위치한 정자는 공동의 유교적 공간이자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망미정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용전천 물길.
2017.06.28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 청송읍, 읍치의 건축 - 운봉관·찬경루·만세루·청아루
◆시리즈를 시작하며 예로부터 누각과 정자를 일컫는 누정(樓亭)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누정은 선조들의 정신과 혼이 깃든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누정은 거닐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유상(遊賞), 독서하고 강론하는 강학(講學),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는 추모(追募)의 공간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돼 왔다. 특히 이러한 누정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경상도에 많았고, 그중에서도 자연풍광이 뛰어난 청송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영남일보는 청송지역의 누정을 둘러보고, 그 속에 담긴 선조들의 정신과 가치를 재조명하는 ‘청송의 魂(혼) 樓亭(누정)’ 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청송의 누정에 얽힌 사람살이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누정에 남겨진 시문(詩文)과 누정의 내력을 담은 누정기(樓亭記)도 집중 조명해 선조들의 풍류와 사상을 엿본다. 시리즈 1편에서는 청송읍에 위치해 있는 운봉관과 찬경루, 만세루, 청아루에 대해 다룬다.세종의 妃 소헌왕후를 배출한 땅고을 중심에 객사 운봉관 자리잡아왕후배출 경사 찬미한다는 찬경루川 건너 청송심씨 시조묘 바라봐만세루와 함께 제사지내던 재각지금은 소헌공원으로 불리는 곳군민의 안녕 기원하는 열린공간 중앙로. 청송읍의 메인 스트리트다. 좁은 도로에 조막조막한 건물들이 도열해 있는 보통 소읍의 모습이지만 청과 관, 법과 치안, 토지와 전력, 교육과 방송 등 공적 건물이 집중되어 있는 청송의 핵심부다. 뒤로는 방광산(放光山)이 낮게 또렷하고, 앞으로는 용전천이 은빛 모래사장을 거느리고 넓게 흐른다. 산 아래 천 따라 길게 자리한 청송읍 땅은 아주 오래전부터 청송의 중심이었다. #1.중심의 힘, 운봉관중앙로 십자로에서 옛 건축물의 뒷모습을 본다. 단정한 권위와 순정한 위엄에 사방 빛이다. 화려한 공포는 도리어 무구하고, 천진한 바윗돌로 쌓아올린 낮은 석축이 담담히 선량하다. 양쪽에 긴 날개채는 기둥 속에 밝은 세계를 들여 가볍고, 가운데 세 칸 정당은 깨끗한 벽으로 감싸 무겁고 귀한 공간임을 알겠다. 청송군의 객사, 운봉관(雲鳳館)이다. 운봉이란 구름 속의 봉황. 귀한 이 임금을 뜻할 게다. 객사는 조선시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숙소였지만 중앙 정당은 왕의 전패를 모신 왕의 공간, 임금 그 자체였다. 하여 객사는 어느 고을에서나 가장 중심된 곳에 으뜸 되는 형식으로 지어졌다. 길 떠나 아무리 낯선 고을에 닿아도, 객사가 자리한 곳이 바로 그 땅의 중심임을 알았다. 객사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국의 읍치에 동일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정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익사를 배열하는 것, 정당의 지붕은 익사보다 한 단 높은 것. 이런 기본은 전국의 읍치에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운봉관 역시 그러한 기본을 따르고 있다. 청송 객사가 지어진 것은 세종 10년인 1428년, 군수 하담(河澹)에 의해서다. 청송심씨 심온의 딸이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에 오르고, 인구 1천명도 되지 않았던 작은 현이 세조 5년인 1459년 도호부로 승격되고도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다. 도호부라 해도 이 오지의 땅에는 읍성이 없었고 다만 방광산 아래에 관아 건물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지세가 곧 성이었다. 군수 하담은 ‘땅이 궁벽함으로 하여 사신이 오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소탈하게 전한다. 첩첩산중 청송, 부임해 온 관리들은 이 땅에 들어 망연히 울었다 했던가. 그러나 떠나갈 때도 그들은 눈물 흘렸다. 청청한 땅의 순박한 마음들을 그들은 애민했고, 사람들은 떠나가는 이들을 오래 기억했다. 운봉관 오른편에는 청송의 역대 관리들의 치적을 기리는 불망비와 선정비가 모여 있다. 좋은 기억들이 모여 중심의 힘에 더해진다. 청송도호부의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훼손되었다. 객사 역시 1918년 정당과 서익사가 파괴되었다. 동익사만이 화를 면해 한동안 운봉관 현판을 걸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은 2008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동익사 기둥이 보다 어두운 것은 그 때문이다. 파괴의 의미는 알 만하나 동익사의 보존은 갸웃하다. 내재된 힘의 반력에 움찔하였던 것일까. 동익사 앞 한 그루 탱자나무는 알고 있을까. #2.지극한 예의 공간, 찬경루와 만세루운봉관 평평한 마당은 용전천을 향해 서서히 낮아지다 뚝 떨어진다. 천변 절벽의 가장자리 기울어진 땅에 찬경루(讚慶樓)가 서 있다. 군수 하담이 운봉관과 함께 지은 누각이다. 보통 객사에 부속된 누는 조정 사신의 연회나 유생들의 시문회 장소 등으로 사용되지만 찬경루는 그와 같지 않다. 찬경루는 용전천 건너 보광산을 바라보고 있다. 저곳 가파른 산줄기가 급히 흘러내리다 평지를 이룬 자리에 등잔대의 호롱불 같은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묘가 있다. ‘찬경’이란 ‘소헌왕후를 배출한 경사를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누는 천이 넘쳐 시조묘를 찾을 수 없을 때 제사를 지내던 재각(齋閣)이다. 누 기둥은 땅의 생김 그대로 세워 올려 저마다 길이가 다르다. 구름 같은 문양이 새겨진 사각의 주춧돌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북쪽 양측 칸에 쌍여닫이 판문을 달고 그 앞에 계단을 놓아 누상으로 오르게 하니, 판문을 마주해 이미 손이 가지런해진다. 소박한 익공에 단청이 화려하고, 평방 부리마다 피어난 태평화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천변 둑길에 올라 바라보면 객사 정당인 운봉관이 가림 없이 온전하고, 찬경루는 동익사 앞에 지붕 합각면이 정면인 채로 서있다. 운봉관에 대한 예와 보광산 시조묘를 향한 예가 동시에 구현된 모습이다. 지금 운봉관과 찬경루 일대는 ‘소헌공원’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있는 이곳에서 지금도 청송의 안녕을 기원하고, 군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오래된 중심의 힘은 지금 공공의 중심을 지지하고 있다. 찬경루 앞 용전천에 섶다리가 놓여 있다. 강물이 불어도 시조의 묘를 찾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오랜 세월 사라졌던 섶다리는 약 15년 전부터 다시 놓였다. 천 건너 근곡리와 덕리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서다. 이 다리 덕에 읍으로 향하는 그들의 보행이 편해졌고, 읍 사람들 역시 천 너머 보건소를 오가는 일이 편해졌다. 덕을 찬한 예가 오늘의 덕으로 이어진다. 섶다리 건너 방광산에 닿으면, 청송심씨 시조묘 아래 보광사와 만세루가 있다. 천은 건넜으나 비가 오는 날, 심씨 후손들은 만세루에서 제사를 지냈다. 세종이 군수 하담에게 명해 건립했다고도 하고, 소헌왕후가 제향을 위해 보광산을 찾았다가 사찰은 원당으로 삼고 만세루와 추모재를 지었다고도 한다. 추모재는 한순간 파르르 먼지가 되어 버릴 듯 퇴락했던 것을 최근에 산뜻하게 고쳤다. 극락전의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던 것을 오십 보쯤 뒤로 물렸고, 주련이 있는 중앙 기둥은 옛것 그대로다. 웅장한 만세루는 눈앞의 산음에 조아리는 듯도 하고, 몸을 곧추세워 우러르는 듯도 하다. 햇살 넉넉한 그리 넓지 않은 땅이 송백에 둘러싸여 새집처럼 안온하다. #3.도(道)와 미(美)와 용(用)이 하나 된 공간, 청송향교 청아루운봉관이 있는 중앙로 십자로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정면에 군청이 보이고 그 오른쪽 아래에 청송의 오래된 학교 향교가 자리한다. 향교는 유교국가 조선왕조가 각별히 중요시한 건물로 객사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법칙을 따랐다.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기본으로 전묘후학 또는 전학후묘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배치였다. 청송향교는 좌묘우학이다. 이는 유교적 이념에 의한 원칙 아래 풍토에 맞게 재편된 모습이라 하겠다. 향교의 대문인 외삼문은 2층 누각인 청아루(菁莪樓)다. 외삼문을 누문으로 만든 것은 드문 예다. 청(菁)은 우거지다는 뜻을, 아(莪)는 쑥을 뜻한다. ‘우거진 쑥’이라는 ‘청아’는 시경에서 유래한 말로 무성한 쑥과 같은 인재나 그 인재를 교육하는 일을 뜻한다. 지붕을 고치고, 단청을 새로 칠하고, 누문을 달고, 기와를 얹은 토석담으로 경역을 두른 것은 최근의 일이다. 누는 빈 마루다. 이 마루는 한때 청송중학교의 임시교실이었다. 빈 공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거개 그 쓰임은 유전된다. 그것은 곧 예이기도 하다. 대들보는 나무의 곡진 몸 그대로다. 미가 도이고 도가 미다. 도와 미와 용이 하나 된 공간이 청아루다. 건축은 시대의 상징, 읍치의 건축물은 시대를 꿰뚫는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청송군 청송읍 월막리에 위치한 운봉관. 운봉관은 조선시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숙소였지만 중앙 정당은 왕의 전패를 모신 왕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때 정당과 서익사가 파괴되고 오른쪽 동익사만 화를 면했는데, 지금의 모습은 2008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운봉관 현판. 운봉(雲鳳)은 ‘구름 속의 봉황’이라는 뜻인데, 임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청송향교 앞의 청아루. 2층 누각인 청아루는 향교의 대문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때 청송중학교의 임시교실로 쓰였다.소헌왕후를 배출한 청송심씨 후손들은 용전천이 넘쳐 시조묘를 찾을 수 없을 때 찬경루에서, 천은 건넜으나 비가 오는 날엔 만세루에서 제사를 지냈다. 왼쪽부터 찬경루, 용전천에 놓인 섶다리, 용전천 건너 보광사 경내에 자리잡은 만세루.
2017.06.21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21·끝> 시리즈를 마치며
영남일보가 청송국가지질공원을 재조명하기 위해 연재한 ‘청송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 지질명소로 떠나는 여행’ 시리즈가 막을 내린다. 이번 시리즈는 지난 4월19일 1편을 시작으로 지질 명소 24곳을 재조명하고 지질과 관련된 다양한 스토리 자원을 발굴해 연재했다. 영남일보는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한동수 청송군수를 지난달 24일 인터뷰했다. 이날 인터뷰를 통해 청송국가지질공원의 전반적 현황과 성과, 유네스코(UNESCO)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위한 청송군의 계획을 들어봤다. 쉽고 재미있게 소개한 지질명소 24곳대중 관심 증가…탐방해설 신청 늘어청송국가지질공원은 ‘지질학 교과서’화성·퇴적·변성암 등 다양하게 분포유네스코 실사단 청송꽃돌에 큰 관심이달말 세계지질공원 등재 여부 결론 ▶영남일보에 연재한 이번 시리즈를 간략하게 평가한다면…. “매회 연재 때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청송의 지질 역사와 스토리텔링을 연계한 덕분에 독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지질학 용어는 어려운 단어가 많은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풀어 써 큰 도움이 됐다. 난해한 학술적인 부분까지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연재를 통해 청송국가지질공원 내 24개 지질명소를 널리 알렸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실제로 영남일보의 이번 시리즈를 통해 청송국가지질공원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도가 높아졌다. 지질공원에 대한 문의전화와 탐방해설 신청이 부쩍 증가했다.”▶현재 국내에는 국가지질공원이 7개소 운영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청송국가지질공원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만큼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송국가지질공원만이 가진 우수한 특성은 무엇인가.“청송국가지질공원은 국내 유일의 순수 내륙중심형 지질공원이다.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 등 다양한 지질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지질공원이 가지고 있는 경관자원 또한 국내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주왕산국립공원, 마그마가 굳어 만들어진 청송 꽃돌, 퇴적암으로 구성된 백석탄 등 청송의 지질자원은 ‘지질학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다양성이 뛰어나다. 이밖에도 송강리 습곡구조와 공룡발자국 화석 등 지구의 역사와 관련한 다양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청송의 지질자원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이는 자원에만 치중하는 시대는 지났다. 청송의 지질에는 수천만년 진행된 지구의 역사가 오롯이 깃들어 있다. 청송의 지질자원에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지역은 물론 국내 지질학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청송국가지질공원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등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떻게 준비해 왔고, 등재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청송군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등재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10년부터다. 청송은 2011년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위한 학술조사를 실시했으며, 2012년에는 전담조직을 구성했다. 2014년 청송의 지질자원이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고, 이듬해인 2015년 11월, 유네스코 본부에 세계지질공원 신청서를 최종 제출했다. 올해 초에는 청송국가지질공원이 유네스코의 세계지질공원 서면심사에 통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7월11일부터 3박4일간 유네스코의 현장실사를 받았으며, 오는 9월 말에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총회에서 예비인증 위원회 심사가 있을 예정이다. 총회에서 사실상 세계지질공원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이후 내년 4월 유네스코 이사회에서 청송국가지질공원의 세계지질공원 최종 인증 여부가 발표된다. 총회에 참석해 지질공원 홍보 부스를 운영하는 등 교류활동에 동참할 계획이다.”▶청송을 찾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평가위원들의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알고 있다.“평가위원들은 청송의 지질자원이 가진 가치를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했다. 무엇보다 청송군의 세계지질공원 등재에 대한 강한 열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주왕산국립공원의 경우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두꺼운 화산재층으로 구성돼 있고, 탐방도 쉬워 호평을 받았다. 청송백자 원료인 법수도석은 지질·역사·문화가 융합되는 지질자원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꽃돌’로 불리는 청송 구과상 유문암은 평가위원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평가위원들은 꽃돌을 관찰하며 감탄사를 연발했고,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귀띔했다. 청송군민 18명으로 구성된 지질해설사의 활동에 대해서도 후한 점수를 줬다.”▶청송군은 세계지질공원 등재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청송군은 지난 5년 동안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학술조사부터 기반조성, 국가지질공원 인증, 세계지질공원 신청까지 차질없이 성공시켰다. 지난 7월 현장실사에서 그동안 준비해온 교육, 해설, 관광인프라를 충분히 어필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희망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위한 청송군민의 적극적 지지와 염원이 있기에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다면 국내에서는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다. 등재가 된다면 이후 계획은.“청송군은 이미 등재 이후를 대비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라는 상징적 가치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준비 중이다. 엄격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적용해 지역의 숙박시설, 식당 등을 지질공원과 연계한 지정 업소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면 다양한 효과와 혜택이 따라온다. 우선 국제적 브랜드에 따른 지역 인지도 향상과 관광객 증가가 기대된다. 관광객이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관광서비스업이 성장하고, 이에 따른 고용이 창출돼 지역경제가 한층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유네스코와 관련된 세계지질공원 로고를 사용할 수 있어 지역 상품의 가치도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국가지질공원 교육협력센터나 유네스코 교류센터와 같은 공공시설까지 유치한다면 방문객 증가는 물론 외부인구 유입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세계지질공원 등재는 지역주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결과적으로 지역 역량을 높이고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슬로시티’ 청송의 철학과도 맞아떨어진다.”▶세계지질공원 등재 여부를 떠나 지질 자원은 관광산업과 접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청송의 관광은 주왕산과 주산지 등 자연 경관에만 치중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경관 관광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관광객들은 더이상 청송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주왕산만 구경하고서는 금방 떠나버린다. 머무르는 관광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기존 자연경관에다 지질공원 탐방 프로그램, 음식메뉴 등을 다양하게 마련할 것이다. 또한 객주문학관, 청송야송미술관과 같은 문화자원을 널리 알려 청송의 관광산업을 업그레이드시킬 계획이다. 마이스(MICE) 산업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기업회의와 포상 관광을 유치한다면 관광수익이 창출될 것이다. 각종 스포츠 행사도 유치할 계획이다. 청송은 최근 실내 다용도 경기장을 마련했으며, 이미 전국 규모의 배드민턴 대회를 치른 경험이 있다. 이 밖에도 청송은 산악 마라톤, 패러글라이딩,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등 험준한 산악지형을 활용한 스포츠 행사를 자주 치러왔기에 잘 될 것이라 믿는다.”▶지질공원 외에 청송군의 전반적인 문화관광산업 활성화 계획은.“올해 말 충남 당진과 영덕을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청송을 찾는 관광객 수요가 급증할 것이다. 자동차로 서울에서 청송까지 2시간대, 대구에서는 1시간대로 가까워진다. 이에 청송군은 주왕산관광단지 내에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등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도록 거점 관광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청송사과와 세종의 비 소헌왕후, 조선시대 만석꾼 청송 심부자 등 다양한 역사·문화자원을 스토리텔링할 계획이다. 또한 군민 제안제도 및 공무원 아이디어 발굴 등을 통해 문화관광산업 발전 시책을 마련할 예정이다.”▶농촌 인구 감소가 문화관광산업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농촌 인구감소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최근 한 공공연구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인구가 계속 감소하면 50년 후에는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80곳이 소멸한다고 한다. 물론 현재 추세대로 인구감소가 진행된다는 가정이지만, 인구 유지가 청송의 지역발전을 위한 첫 조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자연을 보전하면서도 청송으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유인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청송국가지질공원과 문화관광을 연계하고, 자연과 문화·예술이 숨쉬는 고장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대담=최종철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정리=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배운철기자 baeuc@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영남일보가 지난 4월부터 연재한 ‘청송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 지질명소로 떠나는 여행’ 시리즈는 청송의 다양한 지질자원을 재조명하고, 그 속에 깃든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청송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 지질명소로 떠나는 여행’ 시리즈의 주요 지면들.
2016.09.06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20> 노루용추계곡
용이 살다 떠난 못을 어여쁜 노루가 슬그머니 샘터 삼았을까, 고요하고 아늑한 노루용추. 앙증맞은 폭포 아래 적이 넉넉한 폭호다. 숲을 세워 몸 숨기고 옷깃 열어 하늘빛 정히 받는 은벽하고 감미로운 자태인데, 어리고 맑은 낯빛에 무고한 비밀이 서려 있다. 아주 오래전, 노루용추가 태어나기 전, 한때의 시간이 통째로 사라졌었다는 땅의 내력. 그것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사라진 시간이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1. 월외의 사라진 시간청송 주왕산의 북서쪽에 청송읍과 진보면을 경계 짓는 태행산(太行山)이 솟아 있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해발 933m. 긴 다리로 저벅저벅 큰 걸음 걷는 듯해 ‘태행’이라 부르게 되었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옛 지도에는 월외산(月外山)이라 되어 있다. 달의 바깥이라는 신비로운 이름은 어느 시절엔가 스러졌지만, 산의 남쪽 긴 골짜기는 지금도 월외리라 부른다.월외리∼너구동 잇는 길이 2㎞ 계곡이암·사암 퇴적층 위에 화산암 쌓여계곡 일대 ‘부정합’ 지질현상 나타나노루용추에서 주왕산 가까워질수록응회암층이 두꺼워져 주상절리 이뤄달기폭포는 수직절리가 침식돼 형성월외리에서 너구동으로 이어지는 동서로 긴 계곡을 월외계곡 혹은 노루용추계곡이라 한다. 계곡에는 태행산과 금은광이 등지에서 시작된 괘천(掛川)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괘천은 흘러흘러 계곡의 동쪽 해발 350m에서 높고 장쾌한 달기폭포로 떨어지고, 계곡의 서쪽 해발 310m에서 1m 남짓한 깜찍한 폭포로 다시 한 번 떨어진다. 이 작은 폭포 아래에 펼쳐진 폭 6m, 깊이 2m 규모의 폭호를 ‘노루용추’라 하니, 계곡의 이름은 여기에서 왔다.노루용추 일대의 지질은 좀 특이하다. 아래에는 붉은 갈색 빛의 이암, 그 위에는 녹회색의 사암, 그 위에는 연회색 빛의 화산암이다. 이암과 사암의 퇴적층 위에 화산암이 덮개처럼 놓여 있는 것이다. 퇴적층은 백악기 중기에 형성되었다. 주왕산이 만들어지기 전이다. 화산암층은 백악기 후기에 형성되었다. 수차례의 화산 폭발로 주왕산이 만들어질 때, 그 두툼한 가슴을 형성한 응회암층이 슬금슬금 뻗어와 달기폭포를 지나 여기 월외리의 노루용추에 닿은 것이다. 퇴적층의 시간과 응회암층의 시간 사이, 백악기의 중기는 통째 어디로 갔나?그 사이, 사라진 시간 동안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어쩌다 퇴적이 중단되었거나, 난데없이 지층의 일부를 잃어버렸거나 하는. 이후 응회암이 다시 퇴적되었다. 이처럼 ‘퇴적이 중단되거나 퇴적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 위에 다시 퇴적되는 것’을 ‘부정합’이라 한다. 노루용추 주변에서는 경사진 퇴적층 위에 울퉁불퉁한 회색빛 화산암이 쌓여있는 부정합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 분명한 경계면이 시간의 공백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2. 부정합의 차별침식이 만든 노루용추노루용추가 형성된 것은 퇴적층이 시나브로 사건사고의 시간을 보내고, 이후 화산암층이 쌓인 그 다음의 일이다. 퇴적암류는 일반적으로 화산암류에 비해 풍화와 침식에 약하다. 이처럼 상부가 강하고 하부가 약할 경우, 침식 속도의 차이에 의해 절벽면이 형성되며 절벽부를 따라 물이 흘러내리면서 폭포를 이룬다. 화산암으로 폭 덮여 있던 한동안 퇴적암은 안온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흐르던 물이 화산암의 틈새로 스며들었고, 틈은 점점 커져 결국 암석 덩어리로 떨어져내렸다. 이로 인해 소규모의 낙차가 생성되었고, 덮개를 잃은 퇴적층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빠르게 침식되어갔다. 그러한 동안 화산암도 느리지만 꾸준히 침식되었다. 암괴 주변에 그득한 잔자갈들이 그 조각들이다. 낙차가 작으니 폭호의 깊이는 깊어지지 않고, 침식은 지속되니 폭포는 자꾸만 후퇴한다. 결국 노루용추의 미래는 더 먼 후퇴와 더 넓은 폭호다.#3. 수직절리의 침식이 만든 달기폭포노루용추에서 동쪽으로 오를수록, 주왕산과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응회암층은 점점 두꺼워진다. 응회암은 고온의 화산재가 쌓여 식으면서 만들어진다. 냉각으로 인해 수축되고 용접한 듯 단단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체적이 줄고 수직으로 갈라져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를 이룬다. 주상절리는 쉽게 풍화되지는 않지만 절리를 따라 무너져 내려 가파른 단애를 만든다. 노루용추에서 동쪽으로 오를수록, 수직절리와 단애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 절정이 달기폭포다. 청송 8경 중 하나로 월외리 지명을 따 월외폭포라고도 부른다. 높이 11m의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져 내린다. 폭우 같은 폭포다. 달기폭포는 주왕산 응회암의 수직절리에 의한 절벽이 침식되어 형성된 폭포다. 아래에는 큼직한 암석들이 뒹굴고 있다. 언뜻언뜻 육각기둥 형상의 암괴들도 보이는데, 이들은 수직 절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임을 지시한다. 폭포의 낙차는 큰데 폭은 좁고 수량은 많다. 비교적 좁지만 아주 깊은 폭호가 발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달기폭포의 폭호를 용소(龍沼)라 한다. 용이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고도 전해진다. 지금 달기폭포 곁으로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고 도로가 지나간다. 도로를 내면서 깊었던 용소는 많이 얕아졌다. 그러나 결국 달기폭포의 미래는 조금씩 물러서는 후퇴와 지금보다 깊은 폭호다.백악기는 1억4천500만년 전에서 6천600만년 전 사이의 시간이다. 청송에는 백악기의 어느 때와 특별한 사건이 만나 낳은 놀라운 지형과 지질이 많이 있지만 노루용추에서 달기폭포까지, 약 2㎞ 거리의 노루용추계곡은 유별나다. 여기에는 백악기 7천만년이라는 시간이 늘어서 있다. 미숙한 땅의 감별사라 할지라도 찾아볼 수 있는 땅의 내력,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노루용추계곡이라는 유산이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 참고= △청송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청송의 향기공동 기획:청송군 ■ 태행산 산악자전거 코스...월외리엔 장난끼공화국...노루용추계곡의 새 명소청송읍과 진보면을 경계 지으며 파천면 고개~중대산~태행산~노루용추계곡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 산길 14㎞. 청송의 새로운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태행산 산악자전거(MTB)코스다. 2008년 개설된 이후 주기적으로 산악자전거 대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평소에도 개인이나 동호인 단체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울창한 소나무숲 터널, 깊은 협곡, 험한 오르막, 굽이굽이 굴곡이 심한 능선 등 지옥 코스가 어우러져 산악자전거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산 정상에 가까울수록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장관을 이룬다. 노루용추계곡은 이 코스의 종점에 해당된다.노루용추계곡이 있는 월외리에는 또다른 명소가 있다. 바로 장난끼공화국이다. 장난끼공화국은 주왕산의 ‘기(氣)’와 인간의 ‘끼’, 과학과 문화예술이 융합된 신개념 관광지다. 옛 월외초등에 조성되어 있다. 2012년 전국 10개 지자체와 상상나라국가연합을 조직해 조성한 관광지로, 생활과 휴양이 결합된 명소로 자리잡았다. 지역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여행정보 청송읍에서 동쪽으로 3㎞ 거리에 달기약수터가 있고, 다시 동쪽으로 약 6㎞를 더 들어가야 비로소 월외리다. 월외 탐방지원센터에서 임도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청송 사람들이 부러 찾아와 물을 떠간다는 일명 ‘산삼 썩은 약수’가 길가에 솟아나고 있고, 조금 더 오르면 노루용추다. 목재 데크 탐방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야 된다. 노루용추에서 조금 더 올라야 달기폭포다. 달기폭포 상류의 계곡도 아름답다.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한 길이다. 한산한 날에는 차로도 갈 수 있다.노루용추는 청송군 청송읍 월외리 노루용추계곡 초입의 작은 폭포 아래 형성된 폭호를 말한다.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맑은 물과 암석, 그리고 초록의 숲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노루용추에서 관찰되는 퇴적암(작은 사진).드론으로 촬영한 노루용추계곡. 노루용추계곡은 월외리에서 너구동으로 이어지는 동서로 긴 계곡으로, 월외계곡이라고도 한다.노루용추에서 조금 올라가면 볼 수 있는 달기폭포. 청송 8경 중 하나인 달기폭포는 주왕산 응회암의 수직절리에 의한 절벽이 침식되어 형성된 폭포다.
2016.08.30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9> 파천 구상화강암
바위 속에 공이 박혀 있는 듯하다. 어느 선수가 투구 연습을 했나? 공은 원형 그대로거나 타원형이거나 또는 불규칙한 모양이어서 온갖 변화구의 연습장 같다. 용의 여의주 같기도 하다. 혹은 고대 생물의 알인가? 그예 바짝 들여다보면 동공이 열린 눈동자 같기도 하다. 공은 돌이다. 돌이 돌 속에 있다. 이것은 박힌 것이 아니라 자라난 것이라 한다. 돌이 돌 속에서 돌과 함께 자라났다는 기묘한 이야기가 청송 파천면에 전해진다. 수몰된 파천 신흥리의 구상화강암1.2㎥ 바위에 화강암이 공이처럼 돋아석영·장석·흑운모·각섬석 등으로 구성핵 중심으로 광물결정이 붙어 반복성장양파 속 같은 특이한 암석 구조 나타내전세계 통틀어 100여군데 정도만 발견#1. 물에 잠긴 마을, 물가에 드러난 귀한 돌파천면은 청송읍의 서쪽, 해발 300m 이상의 산들로 채워진 땅이다. 면의 한가운데를 용전천이 관통한다. 오래전 천의 이름은 파천(巴川) 혹은 파질천(巴叱川)이었다. 물줄기가 뱀처럼 굽어 흐른다는 의미다. 땅의 이름은 물의 이름에서 왔다. 천의 이름이 뱀에서 용으로 거창해진 것 외에 큰 변화는 없다. 여전히 발 디디는 곳은 골짜기고, 눈 닿는 곳은 고개다. 파천면의 남쪽에 신흥리 마을이 있다. 안덕면의 노래산 줄기가 슬그머니 손을 뻗고, 파천면의 서쪽에 솟은 사일산 자락이 응답하듯 손 내밀어 형성된 골짜기다. 새로운 마을이라 신흥리라 했지만 마을이 생긴 것은 50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마을은 없다. 대신 커다란 호수 청송호가 들어차 있다. 2007년 청송양수발전소가 준공되면서 두 개의 호수가 형성되었는데, 하나는 노래산 정상부에 있는 상부댐 노래호, 하부댐이 바로 청송호다. 청송호의 남서쪽 뾰족한 끝자락에 아주 진귀한 바위가 있다. 바위 속에 공이 들어박힌 것 같은 모습의 돌. 얼핏 보면 몸에 멋대로 자라난 혹처럼 보이기도 한다. 커다란 바위에 공이 혹은 혹이 마구 돋아 있다. 이것이 화강암이라 한다. 흔하고 익숙하게 알고 있는 화강암의 모습이 아니다. 정말이냐고 믿을 수 없다고 해도, 분명 화강암이라 한다. 이 같은 공모양의 조직이 돌연변이처럼 형성되어 있는 화강암을 구상(球狀)화강암이라 한다. 구상화강암은 굳어질 때 구체의 중심부에 어떤 핵을 중심으로 종류가 다른 광물이 침전되어 동심원상 구조가 여러 개 형성된 화강암을 말한다. 광물들은 핵에서 외부를 향해 층상으로 배열되어 구나 타원체를 이루고, 광물마다 성격이 달라 어두운 층과 밝은 층이 교호되어 나타난다. 구상화강암은 현재 전 세계를 통틀어 100여 군데 정도 알려져 있고, 그 산출이 드물고 희귀해 오래전부터 지질학적으로 귀하게 여겨져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암석의 조성이 약간씩 다른 구상화강암이 여럿 발견되었다. 옛날 조선시대에 이 같은 돌을 본 사람들은 거북 등 같다고 해서 ‘거북돌’이라 불렀다 한다. 청송의 구상화강암은 2015년을 전후해 세상에 알려졌다. #2. 양파처럼 자라난 돌 청송 땅의 가장 아래에는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이 깔려 있다. 이후 트라이아스기에 들어 지구 내부의 화강암질 마그마가 변성암층을 관입했다. 약 2억3천만 년 전에서 1억8천만 년 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 결과로 청송 화강암이 만들어졌다. 청송 화강암은 청송 중부를 중심으로 북서 방향으로 연장되어 나타나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소규모다. 청송호 남서부의 구상화강암은 그러한 청송 화강암의 또 다른 얼굴이다. 파천면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파천 구상화강암이라 부른다. 파천 구상화강암은 중립 내지 조립질의 흑운모 화강암으로 석영, 장석류, 사장석, 흑운모, 각섬석과 그 외 불투명광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드러나 있는 바위의 크기는 1.2㎥다. 그리고 암반에서 떨어져 나간 1㎥ 크기의 전석이 주변에 동그라져 있다. 바위에 형성되어 있는 공의 구경은 작은 것이 3㎝, 큰 것은 14㎝로 다양하다. 그들은 무색과 유색 광물의 함량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색을 나타내는데, 대체로 중심부는 석영과 사장석이 우세한 백색 내지 유백색을 띠고, 외부로 갈수록 유색광물의 함량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꽃이 한 알의 씨앗에서 출발하듯, 이들 구상체도 마찬가지다. 먼저 성장된 결정이나 기존 암편이 씨앗, 즉 중심핵이 된다. 이를 중심으로 석영이나 장석과 같은 무색광물들이 성장했다. 그리고 그 둘레에 다시 흑운모와 같은 유색광물이 성장해 띠나 껍데기처럼 둘러쌌다. 이후 다시 무색광물이 같은 방식으로 성장해 구상체를 이루었다. 이러한 반복적인 성장과정은 양파 속과 같은 구조를 나타낸다.#3. 중생대 초 마그마 전쟁완전히 구에 가까운 모양도 있고 타원형도 있다. 구상체가 원형에 가까운 공 모양인 것은 핵을 중심으로 결정의 성장 속도가 모든 방향으로 같았기 때문이다. 마그마가 식는 과정에서 성장 속도가 모든 방향으로 동일하려면 핵이 한 곳에 가만히 있지 않고 마그마 내부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녀야 한다. 파천 구상화강암에서 구상체는 원형과 타원형이 모두 나타난다. 하나하나가 눈동자처럼 선명한 것도 있고, 여러 개가 덩어리로 뭉쳐져 나타나는 것도 있다. 중생대 초, 고생대의 땅을 뚫고 나온 마그마는 내적인 전쟁상태였던 것 같다. 여러 핵은 각자의 방식대로 세력을 넓혀나간 듯하다. 정주하여 자라난 것, 유동하며 커진 것, 여러 핵이 연합한 것 등 다양한 모습이다. 마치 인간 시대 이전의 세력 집단인 마그마의 전쟁사 같다. 지질시대의 기록물이니 어찌 귀하지 않을까. 구상화강암에 대한 연구가 미비했던 옛날에는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이 희귀하고 기묘한 돌을 탐낸 일본인들이 트럭으로 실어갔다 하고, 광복 후에는 고위 관리들이 한두 개 가져갔다고도 한다. 지질학자들은 하나같이 안타까워한다. 이 귀한 것, 누가 훔쳐 갈까 하고. 파천 구상화강암은 근래에 알려졌고 청송호가 비교적 든든한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도 쉬쉬, 우리만 알자.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 참고= △청송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한국지형산책 △청송의 향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망대·고갯길·신라고분·망향의 공원…볼거리 풍성한 청송양수발전소양수발전은 수력발전의 일종이다. 비교적 전력 수요가 적은 심야전력을 이용해 하부저수지의 물을 상부저수지로 끌어올려 저장했다가, 전력수요가 많은 시간대에 상부저수지의 물을 하부저수지로 낙하시켜 위치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발전 방식이다. 즉 노래산의 상부저수지 노래호에서 하부저수지인 청송호로 물을 떨어뜨려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다. 노래호가 펼쳐져 있는 상부댐에는 청송지역을 시원히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매년 해맞이 행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청송호가 있는 하부댐에는 지하발전소와 산책로, 홍보관과 망향의 공원, 잔디구장 및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청송호에는 청송군 파천면 신흥2리 15가구 주민의 삶터가 잠겨 있다. 양수발전소 홍보관 뒤쪽에는 고향 잃은 그들을 위한 망향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입구 탑에는 수몰 전 마을 전경 사진과 31가구 이주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흥리의 신라시대 석곽고분 1기도 이전 복원해 두었다. 상부댐과 하부댐을 잇는 굽이굽이 고갯길이 가을날 그리 좋다고 소문나 있다. ☞여행정보청송 읍내에서 영양 안동방향 31번 국도와 연결된 월막교를 건너면 곧바로 청송교차로다.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청송 양수발전소 표지판을 따라 10㎞ 정도 가면 청송호다. 중간에 덕천민속마을과 송소고택도 지난다. 파천 구상화강암은 청송호의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상부댐의 전망대 입장 시에는 간단한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드론으로 촬영한 청송호.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구상화강암이 관찰되는 호수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산이 고요한 풍경을 연출한다.파천 구상화강암은 청송호의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구상화강암은 갈수기 때는 물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평소에는 물 속에 잠겨있다.청송에서 관찰되는 구상화강암. 파천면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파천 구상화강암이라 부른다. 돌이 돌 속에 들어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는 돌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서 돌이 자라난 독특한 지질이다.
2016.08.23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8> 면봉산 칼데라
백두산의 형성은 신생대 제3기 말에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최후기인 약 1천 년 전에 칼데라 호인 천지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천지의 규모는 동서 3.35㎞, 남북 4.85㎞이며 면적은 약 9.2㎢ 정도다. 울릉도의 칼데라 지형인 나리분지는 직경이 약 3㎞, 면적은 약 1.5㎢다. 형성 시기는 약 1만 년 전이다. 청송 남부에도 칼데라 지형이 있다. 면적이 59㎢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다. 때는 중생대 백악기인 약 1억4천500만 년 전이었다. #1. 볼 수 없는 거대한 칼데라 마그마가 지하에 모여 있는 공간을 ‘마그마 방’이라 한다. 화산이 폭발하면 지하의 마그마 방에 있던 용암과 화산재 등이 뿜어져 나오고, 그러한 물질이 빠져나간 만큼 지하에는 빈 공간이 생기게 된다. 이후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주변 지대가 함몰되어 움푹 들어간 분지 형태의 특별한 지형이 만들어지는데, 대체로 원형이고 가파른 외벽에 둘러싸여 수천m 이상의 지름을 지닌다. 이것이 칼데라다.용암·화산재 뿜어져 나간 지하공간에주변 지대가 함몰돼 형성된 분지 지형현동·현서면 일대 걸친 면봉산 칼데라내부 계곡엔 환상단층·유문암맥 관찰중생대 백악기 때, 청송 남서부에서는 엄청난 화산 폭발이 있었다. 대규모의 회류응회암이 분출한 이후 천천히 마그마 방이 붕괴되었고, 거대한 칼데라가 생겨났다. 그 붕괴의 모습은 조금 특이했다. 북동 측에서는 820m나 내려앉았는데, 남서 측에서는 함몰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비대칭 함몰구조를 학계에서는 ‘뚜껑문형 칼데라’로 분류하며 중히 여긴다.칼데라는 지름이 동서로 10.2㎞, 남북으로 약 8㎞인 타원형이었고 경사는 중심부로 향했다. 과거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을 59㎢의 칼데라 지형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침식 삭박되어 윗부분은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칼데라의 뿌리와 몇몇 화산체만 남아 그때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다. 청송의 현서면과 현동면, 포항 북구 죽장면에 걸쳐 있는 면봉산(眠峯山)은 당시 화산 폭발이 만든 칼데라의 잔류 화산체다. 그래서 청송의 칼데라를 ‘면봉산 칼데라’라고 부른다.면봉산 칼데라는 눌인천과 길안천의 상류 사이에 위치한다. 현동면 남서부인 월매리에서 현서면 남동부인 수락리에 걸쳐진 지역이다. 칼데라 내에는 보현산에서 발원하는 보현천과 면봉산에서 발원하는 월매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천의 양쪽에는 가파른 산들이 남북으로 이어져 능선을 이룬다. 산세는 험하고 좁은 계곡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른다.#2. 면봉산 칼데라를 이루는 것들면봉산 칼데라는 지형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지질 관계를 통해 과거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칼데라 내부를 채우고 있는 것은 화산재가 굳어서 만들어진 응회암이다. 그 중에서도 화산 폭발 시 고온의 화산재가 흘러내리면서 쌓인 회류 응회암이며, 매우 높은 온도의 화산재가 서로 들러붙고 변형되어 만들어진 용결 응회암이다. 이 응회암을 ‘면봉산 응회암’이라 부른다. 면봉산 응회암은 오직 칼데라 내부에만 분포되어 있다.면봉산 응회암은 회류 응회암과 층상 응회암으로 세분할 수 있다. 칼데라 내부의 가장 밑에는 회류 응회암이 약 300m 두께로 쌓여 있다. 그 위에 층상 응회암이 약 30m 정도로 얇게 나타나는데 거뭇하고 촘촘한 층이 특징이다. 그 위에 다시 회류 응회암이 약 700m 두께로 덮여 있다. 보현천과 월매천 주변의 계곡에서는 이러한 면봉산 응회암의 조금씩 다른 세부를 관찰할 수 있다.칼데라의 가장자리에서 구조적 경계를 이루는 것은 환상 단층과 유문암맥이다. 환상 단층은 칼데라가 형성될 때 아래의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상부 암석이 함몰되면서 발달하는 고리모양의 단층이다. 면봉산 칼데라의 북측부에는 이러한 환상 단층이 수㎞로 연장되어 나타나는데 거의 수직으로 응회암과 접해 있다. 북서측과 동측부는 유문암맥이 둘러싼다. 유문암은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암석으로 칼데라 형성의 최후기 때 면봉산 응회암에 관입한 것이다. 유문암맥은 칼데라의 중앙 부분에도 소규모로 나타나는데 이는 화구를 따라 관입한 것으로 보인다.#3. 칼데라 속 월매계곡 칼데라 내부에 형성된 계곡이 현동면의 월매계곡이다. 월매리는 월매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 상류 쪽에 본 마을인 월매마을이, 하류 쪽에 고적마을이 위치한다. 두 마을 사이는 약 1㎞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 면봉산 칼데라의 동북쪽 가장자리를 이루는 유문암이 발달해 있다. 유문암은 대개 담회색 내지 회백색을 띠고, 장석이 드물게 반정으로 나타난다. 고적마을에서 월매마을로 천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칼데라의 가장자리에서 칼데라 내부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넓은 골은 점점 좁아지고 그 깊이는 점점 깊어 간다. 월매마을이 끝나면 왼쪽으로는 월매못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작은 절집인 용암사가 자리한다. 용암사 뒤쪽에는 커다란 절벽이 빼어난 장관으로 서 있다. 오른쪽은 매우 좁고 험한 협곡으로 단소골이라 한다. 휴대폰도 먹통이 되는 골짜기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데 한 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골짜기다.이 일대가 월매계곡이다. 계곡물은 청정수다. 물은 아래로 흘러 월매못을 채웠다가 다시 흘러가며 월매리의 미나리를 키운다. 계곡물에는 민물고기가 풍부하다. 어른 중지만 한 피래미와 퉁가리, 동자개 등 여러 종류가 잡힌다. 월매계곡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아는 사람들만 매년 비밀스레 찾아가 호젓한 한가로움을 누린다. 이제 그 계곡에 발 담그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 지금 칼데라 안에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공동 기획:청송군▨ 참고= △청송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청송남부 면봉산 칼데라의 유형과 진화, 황상구, 김성규, 학술논문 △한국지형산책, 이우평■용암사 인근 협곡 단소굴, 고두곡 의병장 피신한 곳…동굴 맞은편엔 ‘건들바위’청송군 현동면 월매리 용암사의 오른쪽 암릉 사이에는 V자형의 협곡이 있는데 단소골, 또는 굴골이라 한다. 병풍 같은 절벽 사이를 수백m 올라가면 ‘단소굴’이라 부르는 동굴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활동을 한 고두곡 장군이 피신했던 곳이라 전한다. 피란 당시 쌀 한 톨만 넣어 밥을 지어도 한 솥 밥이 되고, 두 톨을 넣어도 한 솥 밥이 된다는 신묘한 솥을 굴 속에 묻고 떠났다는 말이 전해온다. 3m 길이의 이 굴에는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마실 수 있는 샘이 흐른다. 동굴 맞은편 가파른 산에는 높이 약 6m, 직경 7m의 육중한 암석이 있는데, 지면에는 닿지 않고 허공에 둥실 떠 있는 듯 아슬아슬한 상태로 서있다. 이 바위를 ‘건들바위’라 부른다. 옛날 불국사를 건립할 때, 한 힘센 사람이 이 바위를 들고 가다가 불국사가 이미 완공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이곳에 두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여행정보월매계곡은 청송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청송읍에서 포항방향 31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 현동면소재지 지나 눌인리 쪽으로 들어서 개일월매길을 따라 계속 직진한다. 고적리를 지나 월매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용암사, 왼쪽으로 가면 월매저수지다. 용암사 뒤쪽 계곡과 월매저수지 상류의 계곡이 추천할 만하다. 용암사 옆에 면봉산 기상 관측소와 보현산 천문대 등으로 등산할 수 있는 산행 들머리가 있다.면봉산 칼데라 내부에 형성된 월매계곡. 한 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골짜기에 위치해 있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청정수는 청량감을 더한다.드론으로 촬영한 면봉산 칼데라 지형 일대. 청송군 현서면과 현동면, 포항의 북구 죽장면에 걸쳐 있는 면봉산은 화산 폭발이 만든 칼데라의 잔류 화산체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침식 삭박되어 과거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던 칼데라 지형은 볼 수 없다.면봉산 칼데라의 동쪽 경계부 근처에 자리한 용암사. 용암사 뒤쪽에는 커다란 절벽이 빼어난 장관으로 서 있다.
2016.08.16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7> 병암 화강암 단애와 나실 마그마 혼합대
태아와 같은 심성암. 지하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굳어 만들어진 암석이다. 키는 얼마나 큰지, 체중은 어느 정도인지, 땅 속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길고 긴 지질시대를 거쳐 땅 속의 심성암이 지상에 서게 되면 조금은 알 수 있다. 땅 속에서의 삶과 지상에서의 삶까지. 청송의 부남면, 그 중심부에 커다란 심성암이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은 약 6천500만 년 전 그가 겪은 지하의 삶과 이후 지상에서의 삶을 보여준다. ◆ 부남 암주부남면의 중심부에 매봉산이 솟아있고 노부천이 용전천과 합류해 북서쪽으로 향한다. 그 일대에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이 9.4㎞, 북동~남서 방향으로 너비 4.8㎞ 크기의 심성암체가 드러나 있다. 학계에서는 평면상의 노출 면적이 100㎢ 이상 되는 거대한 심성암체를 저반, 그보다 작은 것을 암주(岩株)라고 한다. 하여 이곳의 심성암체를 ‘부남 암주’라 부른다. 부남면 노부천 일대 거대한 심성암체땅속 마그마가 치솟아 굳어 만들어져사발모양 분지 나실마을 둥근 능선엔 마그마 혼합돼 생성 화강섬록암 분포노부·용전천 합류前 지점 천변에 병암절리는 떨어지던 범이 할퀸 자국인 듯신생대 제3기 즈음이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흐르던 화강암질의 마그마가 백악기 퇴적암의 약한 부분을 뚫고 관입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화강암질의 마그마가 고화되기도 전에 그 속으로 섬록암질의 마그마가 관입했다. 같은 액체 상태였지만 서로의 성격은 달랐다. 쫀쫀하고 끈끈한 화강암질 마그마 속에서 보다 유했던 섬록암질 마그마는 섞이지 못한 채 여러 갈래로 분기되고 파열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화강섬록암’이다.화강섬록암에는 멍처럼 검은 응어리가 생성되어 있다. 마치 섬록암질 마그마의 외상처럼 보이는 이것을 학계 용어로는 고철질의 미립상 내포체라 한다. 동시에 서로 다른 두 마그마의 경계부에는 피부와 피부가 닿아 서로의 열을 나누어 가지듯 점진적인 평형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 부분에는 화해처럼 응어리가 없다. 관입과 혼합에 의해 화강섬록암이 만들어진 이후 또다시 화강암질 마그마가 관입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세립질 화강암이다.부남 암주는 여러 차례의 마그마 관입과 그에 따른 혼합 등 복잡한 사건들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래서 하나의 암체 내에 섬록암, 화강섬록암, 조립질 화강암, 세립질 화강암 등 암석의 조성과 조직, 빛깔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조립질 화강암은 암주 전체에서 주로 평지에 분포해 있다. 섬록암이나 화강섬록암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대전3리인 ‘나실 마을’이고, 세립질 화강암을 볼 수 있는 곳은 ‘구천리 병암’이다. ◆ 나실마을의 마그마 혼합대 부남면의 북쪽 용전천의 서쪽에 나실마을이 자리한다. 용전천 변에는 다소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주로 심성암류가 풍화되어 쌓인 모래 충적층이라 한다. 마을 초입의 천변에 군락을 이룬 작은 시무나무 숲을 지나면 마을 입구가 병목처럼 좁게 그늘져 있다. 좁장한 길 옆으로는 좁장한 물줄기가 흐르고, 작은 물레방아가 순박하게 장식되어 있다. 물줄기 너머 숲에는 제법 너른 터가 있는데 웅장한 당산나무가 세상의 모든 그늘을 삼킨 기세로 서있다. 짧은 입구를 지나면 긴 터널을 지난 듯 갑자기 눈부시다. 나실마을은 최고 540m의 낮은 능선으로 둘러싸인 사발처럼 오목한 분지 지형이다. 사발의 안쪽에 해당하는 분지에는 섬록암, 사발의 입술격인 둥근 능선에는 마그마가 혼합되어 생성된 화강섬록암이 분포해 있다. 녹색 빛이 슬쩍 감도는 회색 혹은 암회색의 얼룩덜룩한 암석은 섬록암이다. 멍든 모양새로 고철질 미립상 내포체를 품고 있는 암석은 화강섬록암이다. 내포체의 크기는 보통 5~20㎝인데, 수 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 암석들은 매우 점이적으로 분포해 있어 나실마을에서 이들을 찾아내는 일은 마음 단단히 먹고 시작하는 보물찾기다. ◆ 병암 화강암 단애 아주 쉽게,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은 세립질 화강암이다. 부남 암주를 구성하는 세립질 화강암은 다른 암석과의 경계가 매우 뚜렷하며 오직 한곳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매봉산의 남쪽, 노부천이 용전천에 합류되기 직전 지그재그로 곡류하는 천변에 최고 140m 높이의 수직 절벽이 우뚝 서있다. 병암(屛岩)이다. 단단한 것이 넓고 곧게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병암을 이루는 암석이 바로 세립질의 화강암이다.벼랑은 높아 그늘이 짙고,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에도 한기를 품고 있다. 병암은 오래전 범이 떨어져 죽은 벼랑이라 하여 ‘범덤’ 또는 ‘범디미’라 불려왔고 천변의 숲은 ‘범덤숲’이라 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범덤 모퉁이에 굴을 파고 피란했다 하여 여헌대(旅軒臺)라 부르기도 한다. 한때는 초등학교의 소풍 장소로 애용되기도 했고 어린아이들이 다이빙을 하며 서로의 담력을 겨루기도 했던 곳이라 한다. 숲은 대부분 개간되어 밭과 과수원이 되었지만 한 조각의 범덤숲은 그 이름과 함께 여전히 남아 캠핑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병암 외에도 노부천의 곡류에 따라 여러 방향의 단애가 형성되어 있다. 병암의 서쪽에는 섬록암질의 단애가, 동쪽에는 화강섬록암질의 단애가 있다. 이들은 모두 부남 암주의 조각들이다. 지하의 커다란 심성암체가 이처럼 지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오래고 오랜 시간이 있었다. 두꺼운 지표 물질들이 끊임없는 침식과 삭박에 깎여 나가면서 심성암체는 조금씩 지표와 가까워졌다. 그렇게 마침내 지상에 노출된 것이 암주다. 부남 암주를 구성하고 있는 화강섬록암이나 화강암 등과 같은 암석은 그 조성과 조직을 통해 지하에서의 삶을 설명한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병암이 보여주는 것은 물과 바람과 햇빛과 심지어 식물의 뿌리까지 합세해 만든 치열한 지상에서의 삶이다. 수만 개의 생채기를 지닌 채 묵묵히 우뚝 서 있는 크고 단단한 병암. 저 사선의 긴 절리는 떨어지던 범의 발톱이 할퀸 것일지도 모른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공동 기획:청송군▨ 참고= △청송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청송문화원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송의 향기 △김종선 외, 남한의 백악기-제3기초 화강암과 마그마 혼합:시공간적 변화와 지구조적 의미, 암석학회지, 2012. ■부남면 구천리 병암서원…이이·김장생 위패 봉안청송군 부남면 구천리 병암의 동쪽에는 병암서원(屛岩書院)이 자리한다. 서인과 노론의 종장으로 꼽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서원이다. 퇴계학파가 주류였던 청송은 서인의 정치이념을 계승해 온 자생 노론도 일정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숙종 28년인 1702년에 지역 유림에서 건립하여 사액을 받은 병암서원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2년에 복원되었다. 이후 몇 번의 이전을 거쳐 1993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으며 본채와 동재, 서재 등 3동이 아담하게 구성되어 있다. 봄이면 도화가 만발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병암서원에서 동쪽으로 3㎞ 정도 거리에 있는 화장저수지도 장쾌한 볼거리다. ☞ 여행정보청송읍에서 31번 국도 포항방향으로 가다 부남면사무소에서 68번 지방도를 타고 1.7㎞ 정도 남하하면 대전3리 나실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68번 지방도로 조금 더 남하해 구천리에서 얼음골 가는 길로 들어서면 곧 병암을 만난다. 매봉산 아래 홍원리에 있는 세 그루 개오동나무도 볼 만하고, 나실마을 초입의 시무나무 숲도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군락지다.청송군 부남면 구천리에 위치한 병암 화강암 단애 전경. 매봉산의 남쪽, 노부천이 용전천에 합류되기 직전 지그재그로 곡류하는 천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최고 140m 높이의 수직 절벽이 넓고 곧게 펼쳐져 있다.드론으로 촬영한 나실마을 전경. 마을은 사발 모양처럼 오목한 분지 지형이다. 사발의 안쪽에 해당하는 분지에는 섬록암, 사발의 입술격인 둥근 능선에는 마그마가 혼합되어 생성된 화강섬록암이 분포해 있다.나실마을에서 관찰되는 화강섬록암. 멍처럼 생긴 검은 응어리는 ‘고철질 미립상 내포체’라고 한다.이이와 김장생을 배향하고 있는 병암서원.
2016.08.09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6> 신성리 공룡발자국과 방호정 감입곡류천
천은 요동치는 뱀처럼 굽이쳐 흐른다. 계곡은 깊고 가파르고 벼랑은 높고 길다. 저 벼랑 위에는 오래된 정자 하나가 그림처럼 앉아 있고, 저 계곡의 가파른 산 사면에는 더욱 오래된 짐승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천은 정자에서 노닐던 이들은 보았지만 발자국의 주인은 보지 못했다. 어쩌면 천은 오래전 어머니 호수로부터 그 짐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지 모른다. 거짓말 같던 짐승의 전설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2004년이었다.계곡 초입 가파른 산사면 회색 암반에중생대 백악기의 공룡 발자국 400여개2004년 발견…단일지층으로 국내최대1억년전 드넓은 호수·초원지대의 하천융기한 땅 경사를 따라 빠르게 흐르다물굽이 더욱 커져 ‘감입곡류하천’ 형성 #1. 21세기의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해발 600m 이상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청송의 안덕면. 그 가운데를 낙동강의 상류인 길안천이 북류하며 15㎞에 이르는 긴 계곡을 만든다. 청송8경 중 제1경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신성계곡’이다. 2003년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흔들었을 때다. 거센 비바람이 신성계곡을 휘갈겼고, 산은 으스러지듯 무너져 허연 뼈와 같은 암반을 드러냈다. 회색의 암반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은 이듬해인 2004년 7월이다. 그곳에는 400여개의 짐승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한 방향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걸어가는 커다란 발자국. 그것의 주인은 공룡이었다.신성계곡의 초입인 신성리(薪城里)에 약 1억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때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이 화석으로 남아 있다. 목이 긴 초식공룡인 용각류, 육식공룡인 수각류 등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 중 단일 지층으로는 최대 면적(약 2천400㎡)이다. 태풍 ‘매미’ 이후 10년이 더 지난 지금, 주변은 초록으로 무성하고 공룡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는 기울어진 암반 가에는 들여다보기 좋도록 전망대가 갖춰져 있다.맞은편에는 수직의 기암절벽이 정자 하나를 족두리처럼 얹고 서 있다. 정자는 조선 광해군 때인 1619년 방호 조준도 선생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방호정’이다. 절벽은 일명 ‘방호정 퇴적층’이라 불린다. 세밀하게 층진 이 퇴적층은 마치 꼼꼼하게 작성된 지질연표처럼 신성리 공룡시대와 그 전후를 설명해 준다. 21세기 신성리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1억년 전 백악기 시대의 단면이다.#2. 약 1억년 전 백악기 말의 신성리 1억년 전 이 역동적인 계곡은 평평했다. 드넓은 호수와 초원의 땅이었다. 동해가 열리기 전이고 일본이 분리되기 전이던 그때, 땅은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었다. 날씨는 따뜻했고 식물은 풍부했으며 공룡과 다양한 동물들은 물과 먹이를 찾아 유목했다. 자유롭게 평지를 흐르던 물줄기들은 잘게 부서진 암석들을 껴안고 천천히 호수로 흘러들었다. 암석들은 쌓이고 굳어져 중생대의 지층이 되었다. 이때의 거대한 호수를 경상호, 퇴적층을 경상누층군이라 부른다.기존의 암석이 부서져 가루가 되고 그것이 물의 흐름에 의해 이동해 쌓인 후 굳어진 것을 ‘쇄설성 퇴적암’이라 한다. 방호정 일대에 분포하는 암석은 이러한 쇄설성 퇴적암으로 주로 회색이나 녹회색을 띠는 사암과 흑색 혹은 암회색을 띠는 이암, 그리고 녹색의 응회질 사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암은 미세한 점토 입자들이 퇴적된 것, 사암은 모래가 퇴적된 것, 응회질 사암은 화산 폭발에 의한 화산 쇄설물들이 퇴적된 것으로 기존에 형성된 화산암이 홍수나 태풍에 의해 이차적으로 퇴적된 것이다. 이곳에서는 사암과 이암이 서로 번갈아 층을 이루고 그 사이에 간헐적으로 응회질 사암층이 나타난다. 이는 당시 우기와 건기가 되풀이되었고 가끔 화산 활동이 있었음을 의미한다.이렇게 천천히 퇴적암들이 층을 이루는 동안 공룡은 호수 주변을 쿵쿵거리며 활보했다. 아주 얕은 물밭이거나 호수의 가장자리였을 것이고 부드러운 진흙과 모래가 쌓인 땅이었을 것이다. 분주한 걸음은 자국을 남겼고, 발자국이 빗물이나 강물에 의해 사라지기 전에 건기가 찾아왔으며, 곧이어 또 다른 퇴적물이 그 위를 빠르게 덮었다. 태양과 지구가 공모하여 감춰버린 그들의 흔적은 영원처럼 땅속에 묻혔다.그리고 머지않아 공룡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백악기 말인 약 6천600만년 전의 일이다. 전 세계 공룡의 출현 시기는 중생대 초기와 중기에 집중되어 있다. 신성리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주로 발견되는 공룡의 흔적은 중생대 말기다. 이는 공룡시대 최후에 해당된다. 멸종의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생존을 위해 찾아온 공룡들에게 이곳은 백악기 최후의 파라다이스였다. #3. 공룡시대 이후의 신성리 공룡 시대는 끝났지만 땅의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평평한 땅 위를 천천히 흐르던 하천은 땅이 융기하자 경사를 따라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원래의 흐름은 유지하면서 물은 땅을 더욱 깊이 파내려 갔는데 이것이 ‘감입곡류하천’이다. 신성계곡을 뱀처럼 굽어 흐르는 길안천의 모습이 이때 만들어졌다. 골짜기가 파이는 과정에서 물굽이가 점점 커졌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후 신생대 제4기에 들어 빙기와 후빙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기후 변화에 의해 신성리 골짜기는 더욱 깊어졌다.그러는 사이 단층도 생겼다. 방호정의 왼쪽 절벽에 15~20m 규모의 꽤 큰 단층이 양측에 선명하게 발달되어 있다. 언제 어느 방향으로 힘이 작용했는지, 단층이 어느 쪽으로 이동했는지는 현재 파악되지 않지만 지층이 끊어지던 그때 이 일대에는 지진이 일어났고, 그것은 신성리를 조금쯤 흔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퇴적층의 가장 윗부분은 침식되어 평탄해졌다. 그리고 그 위에 방호정이 지어졌다. 태양과 지구는 다시 공모하여 감춰 두었던 오래된 생명체의 흔적을 파헤쳐 놓았다. 광해군 시절의 방호 선생에게 이곳은 피난처이자 은신처였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곳은, 적어도, 현재를 잠시 잊을 수 있는 곳임은 분명하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참고= △청송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한국지리 △한국의 지형 △자연지리학사전 ■신성계곡 초입 ‘방호정’…방호 선생이 어머니 그리며 지은 정자신성계곡의 초입, 백악기 퇴적층의 머리위에 앉아 있는 방호정은 청송군의 유서 깊은 정자 중 하나다. 방호 조준도 선생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정자를 짓고 처음에는 사친당(思親堂)이라 했다 한다. 현재 건물은 정자, 강당, 관리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벽 아래로는 길안천이 감입 곡류해 흐르고 곳곳에는 제법 깊은 소(沼)가 있다. 차고 맑은 물과 깨끗하고 넓은 자갈밭, 울창한 소나무숲과 야영장을 갖추고 있어 신성리 계곡의 방호정 일대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휴식처로 이름 나 있다. ☞여행정보 청송읍에서 31번 국도 포항 방면으로 가다 현동면 사무소에서 908번 지방도로 안덕면, 안동 쪽으로 조금 가면 신성계곡 초입에 자리한 방호정을 만날 수 있다. 방호정 맞은편 산사면에 삿갓 모양으로 드러나 있는 암반이 신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지대다. 계곡 입구에 있는 신성지질학습관에서 출발해 방호정 퇴적층, 신성공룡발자국, 백석탄을 차례로 지나 목은재 휴게소에 이르는 11.8㎞의 지질탐방로가 개설되어 있다.드론으로 촬영한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공룡발자국 전경. 산사면에 삿갓 모양으로 드러나 있는 암반 위에 400여개의 공룡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 중 단일 지층으로는 최대 면적이다. 발자국이 있는 암반 옆에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드론으로 촬영한 신성리 방호정 감입곡류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휘 감아 돌아가는 물길의 모습이 장관을 연출한다.감입곡류천이 흐르는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방호정은 조준도 선생이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정자로 유명하다.
2016.08.02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5> 청송 얼음골
좁은 산길에서 가까운 산사면의 너덜을 만나면 움찔한다. 산속에 포복해 있던 백만 군사의 은밀한 움직임을 순간 알아차린 것마냥 움찔한다. 그런가 하면 저것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라 가만가만 숨을 쉬며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 가만히 얼굴을 맞대어 들여다본다. 그러면 아, 환상이 아니다, 상상이 아니다. 너덜은 숨을 쉰다. 뜨거울수록 더욱 서늘한 숨을 내뿜고 있다.한여름에 얼음이 어는 계곡주왕산 남쪽, 영덕 달산면 가는 산길높이 62m 탕건봉 산자락에 들어서면냉장실에 있는 듯 냉기가 뿜어져 나와비오면 녹고 무더위 지속되면 또 얼어너덜지대로 불리는 애추지형응회암 단애 20∼30㎝ 크기로 쪼개져산기슭에 쌓여 반원추형 지형 만들어무수히 쌓인 돌 틈새로 들어간 공기가차고 습한 공기와 만나 얼음 만들어져 #1. 뜨거울수록 얼음 어는 이상한 계곡주왕산의 남쪽, 영덕 달산면으로 향하는 산길을 달린다. 비교적 느슨하게 나아가던 산길이 내룡리를 지나면서 좁고 깊게 휘휘 돌아나가다 갑자기 원을 그리듯 급하게 휘는데, 거의 멈춤에 가깝게 속도를 줄이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대한 암벽 하나가 길을 막아선다. 모르고 지나던 이도 설 수밖에 없을 이곳, 얼음골이다. 이곳은 한여름철 기온이 높아지면 얼음이 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얼음골이다. 비가 오면 얼음이 녹고 무더위가 지속되면 또다시 얼음이 생긴다. 자연의 속셈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보통 32℃ 이상이 되면 얼음이 얼고 32℃ 아래로 떨어지면 얼음이 녹는다고 한다. 정수리에 연기가 폴폴 무성한 날일수록 바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얼음골이다. 길 막은 암벽은 높이 62m로 탕건봉이라 불린다. 그 모양새나 표면의 야성적인 절리들이 과연 말총을 길게 줄을 세워 뜬 탕건과 닮았다. 어떤 이들은 이 멋있는 암벽이 신비로운 재주를 가져서 얼음을 얼게 할까 생각한다. 아니다. 그럼 암벽 아래를 흐르는 소하천의 숨겨진 능력일까. 그것도 아니다. 탕건봉의 오른쪽 산자락에 얕은 동굴 모양의 약수터가 있다. 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 약수터와 가까워질수록 시원함이 커지고 냉장실에 들어앉은 듯 온 몸이 싱싱해진다. 그럼 약수의 힘일까. 역시 아니다. 약수터 위쪽에 너덜겅이 흐르고 있다. 차가운 기운은 저 무수한 돌멩이들의 강, 너덜겅에서부터 뿜어져 나온다.#2. 빙하기가 만든 애추, 애추가 만드는 얼음너덜이란 20~30㎝ 크기의 모난 돌들이 산기슭에 잔뜩 쌓인 것으로 ‘너덜겅’ ‘너덜지대’ ‘돌서렁’이라고도 한다. 학계에서는 ‘애추(Talus)’라 하는데, ‘풍화된 암석이 중력의 작용으로 급사면에서 떨어져 내려 퇴적한 반원추형의 지형’이라 정의한다. 얼음골에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는 애추지형이 총 4군데 있다. 100m 이상의 규모인 곳도 있고 40m 정도로 비교적 작은 곳도 있다. 얼음골을 이루는 애추는 경사면의 각도가 45도에 달하고 애추를 이루는 암석들은 크기가 30㎝ 내외로 각이 져있다.청송 얼음골의 너덜은 응회암 덩어리들이다. 이곳의 응회암은 무포산응회암에 속한다. 무포산응회암은 신생대 제3기 전기 때의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주왕산에서 남쪽으로 약 5㎞, 얼음골에서 북서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솟아있는 무포산(霧抱山) 지역에 가장 넓게 분포한다. 또한 북쪽으로 태행산까지, 남동쪽으로는 내연산까지 그 범위가 매우 넓다. 이후 신생대 제4기 최후의 지질시대에 들어 한반도에는 빙하기와 간빙기가 잇따라 출현했다. 탕건봉과 같은 응회암 단애의 절리나 틈에 함유되어 있던 수분이 얼고 녹기를 반복했고, 그로 인해 팽창과 수축이 거듭되었고, 틈을 따라 균열되어 떨어져 나간 암석이 하나둘 아래로 굴러내려 쌓였다. 이 과정이 오랜 세월 반복되어 상부에는 작은 암설이 그리고 하부에는 큰 암설이 쌓인 너덜을 이루었다.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크고 모난 바위들의 틈새로 들어간 공기는 온도가 낮고 습한 지하의 영향을 받으며 바위틈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아래쪽에서는 차갑고 습한 공기가 바깥쪽으로 빠져나오면서 따뜻하고 건조한 외부 공기와 만나게 된다. 이때 공기 중의 습기가 기화하면서 주변의 열을 흡수해 온도가 더욱 낮아지는데, 냉각의 정도가 크지 않으면 차가운 바람이 부는 풍혈이, 냉각의 정도가 심하면 얼음이 어는 빙혈이 만들어진다.#3. 여럿이 함께, 얼음 땡학계에서는 화산폭발로 한번 불에 구운 셈인 화산암이 단열효과를 높여 바깥의 열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도 얼음골 형성에 한몫한다고 설명한다. 얼음골 근처의 930번 도로에서는 많은 애추지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얼음골만 얼음이 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는 애추의 지형지세와 태양에너지와의 관계에 답이 있다.얼음골의 경사면은 북쪽을 향하고 경사각이 매우 크다. 이로 인해 태양빛이 잘 들지 않는데, 한여름철 남중고도일 때도 얼음골 사면이 받는 일사량은 평지에서 받는 일사량의 15%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얼음골 앞에는 무장산이 불과 30m 내외의 간격으로 버티고 서있다. 이처럼 비교적 깊은 곡벽으로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일사량이 적은 것도 얼음골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얼음골은 예부터 ‘잣밭골’이라 불려 왔다. 잣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이겠다. 잣나무는 해발 300~1천900m 되는 고지의 험준하고 양지바른 비탈에서 자란다. 주로 험한 바위산에서 볼 수 있다고 하니 얼음골을 잣밭골이라 한 연유를 알 만하다. 무포산이나 무장산이 ‘안개를 품었다’는 뜻을 지닌 것도 역시 얼음골의 하계 동결현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얼음골 약수를 냉천이라 하며 보약 대접하는 것 또한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물에 어느 병이 대적하겠냐는 신망이 아니겠나. 얼음골에 얼음을 얼게 하는 일, 얼음이 얼어서 생겨난 일, 얼음을 녹게 하는 일, 이 모든 것은 여럿이 함께하는 ‘얼음, 땡’이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 참고= △청송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한국의 지형 △자연지리학사전 △한국의 하계 동결현상 분포지에 관한 지형학적 연구, 전영권, 대구가톨릭대학교 △한반도 얼음골의 지형적 특성과 결빙현상, 김윤이공동기획: 청송군 ■ 여름엔 폭포 겨울엔 빙벽...얼음골 ‘탕건봉’ 두 얼굴얼음골의 응회암 암벽인 탕건봉은 여름 동안 폭포가 된다. 청송군이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뉴밀레니엄 기념사업으로 1999년 8월에 설치한 인공 폭포다. 더울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얼음골에서 폭포는 그 매력을 배가시킨다. 겨울이 되면 폭포는 폭 100m, 높이 62m의 거대한 빙벽이 된다. 얼음의 질이 좋아 전국에서 많은 빙벽 등반팀이 찾아오며 빙벽 애호가들과 전문 산악인의 빙벽훈련장으로 이용된다. 2011년에는 아시아권에서는 최초로 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 대회가 이곳 청송 얼음골에서 열렸다. 대회는 앞으로 2020년까지 얼음골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얼음골 근처에는 8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촌과 인공 암벽장, 오토캠핑장 등도 들어서 있다. 계곡에는 가족과 어린이들을 위한 전통얼음썰매장도 운영된다. ☞ 여행정보 청송읍에서 31번국도 포항방향으로 가다 930번 지방도를 타고 영덕방향으로 간다. 내룡리 보건소를 지나면서부터 여러 애추 지형을 발견할 수 있다. 얼음골 주변으로 클라이밍 아카데미, 청룡사, 해월봉, 얼음골, 무장산 정상 등을 잇는 ‘빙벽밸리’도 조성되어 있다. 데크로드(1천830m), 해월봉 등산로(3천560m), 무장산 등산로(3천270m) 등 세 가지 길이 있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청송얼음골 전경. 거대한 응회암 암벽(탕건봉)이 자리한 일대가 얼음골로, 굽이치는 소하천과 함께 장관을 연출한다. 여름철 기온이 높아지면 얼음이 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청송의 대표적인 지질명소다.청송얼음골은 비가 오면 얼음이 녹고, 무더위가 지속되면 또다시 얼음이 생긴다. 장맛비에 얼음은 녹았지만, 얼음골 빙혈에서 나오는 찬바람에 이끼에 이슬이 맺혀 있다.얼음골의 애추지형. 20~30㎝ 크기의 모난 돌들이 산기슭에 쌓여있는데, ‘너덜겅’ ‘너덜지대’ ‘돌서렁’이라고도 한다. 날씨가 더울수록 차가운 바람이 나오고, 냉각의 정도가 심하면 아래쪽에 얼음이 어는 빙혈이 만들어진다.얼음골 응회암 암벽인 탕건봉은 여름철에는 시원한 폭포수가 흐르고, 겨울철에는 거대한 빙벽이 된다.
2016.07.26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4> 주왕산 절골 협곡과 주산지
아껴 거닐고 싶은 그윽함이다. 고요하고 맑아 저절로 숨이 깊어진다. 볕은 넉넉히 스며들고 바람도 들랑날랑하는 고즈넉하고 방순한 계곡이다. 그러나 벼랑 높고 골 깊은 협곡이다. 단애들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끝 모르게 이어진다. 그 몸짓은 단호하나 눈길은 따스하니, 에워 서나 겁박이 아니고 바투 섰으나 쟁투하지 않는 선한 공간이다. 내내 꿈 같은 골이다. 단번에 심장으로 돌진해 들어와선 오래오래 떠나지 않는 심상이다. 좁고 깊은 절골 협곡수직의 경사…벼랑높이 50m 이상대문바위까지 5㎞ 이어지는 골짜기응회암지대에 등골처럼 고랑져 있어‘하늘그릇’ 주산지절골 들머리서 1㎞ 아래쪽에 위치암석층 빈 공간에서 흘러내린 물로300년간 한번도 바닥 보인 적 없어 #1. 절이 있던 골짜기, 절골 협곡주왕산의 남동쪽 자락에 절골이라는 계곡이 있다. 옛날 계곡 깊은 곳에 운수암(雲水菴)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때는 골의 이름도 운수동(雲水洞)이라 했다. 절은 사라지고 차츰 이름도 잊혔지만 그 기억만은 남아 계곡의 이름이 되었다. 절골. 그나저나 구름과 물의 골짜기라니, 옛 사람들은 너무 은근하지 않나. 바투선 벼랑, 올찬 암벽이다. 18세기 학자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은 이 골짜기에서 ‘좌우로 철벽이 하늘에 닿았고’ ‘해와 달은 중천이 아니면 볼 수가 없다’고 했는데 정녕코 사실이다. 그러나 눈길 가 닿는 단애의 정수리께는 대체로 동글동글해 구름이 흐르기 좋겠고, 계곡은 먼 데서 오는 빛들을 함빡 껴안을 만큼 여유가 있어 아늑하다.벼랑의 높이는 거의 50m 이상이다. 단애들은 10~20m 거리를 두고 서있다. 경사는 거의 수직을 이루고 횡단면은 수직에 가까운 V자형이다. 이러한 계곡이 북동방향으로 대문바위까지 약 5㎞나 이어진다. 좁고 깊고 긴 골짜기, 절골은 협곡이다.절골 협곡은 주왕산의 몸통을 이루는 거대하고 치밀한 응회암지대에 등골처럼 고랑 져 있다. 약 6천만 년 전 수 차례의 화산폭발이 있었고, 그때 엄청난 두께로 쌓인 화산재가 굳어진 것이 주왕산 응회암이다. 응회암은 식으면서 수축되어 단단해진다. 동시에 수축할 때 발생하는 힘이 수직의 규칙적인 절리를 형성한다. 대기나 물에 시달린 절리의 면이 어느 날 뚝 떨어져 내리면 이 과단성 있는 낙하는 단호한 단애를 남긴다. 이러한 낙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되었고, 그로 인한 지형의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 주산천 물길이 만드는 것들절골을 따라 주산천(注山川)이 흐른다. 주왕산 최고봉인 왕거암의 남쪽, 신술골과 갈전골의 물줄기가 합해져 절골을 적신다. 천의 이름은 주아산(注兒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주아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칭이 나올 만큼 오래된 산이다. 그 이름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골짜기 동쪽에 있는 해발 745m의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산천은 이리저리 굽으며 제 몸 닿는 곳마다 흔적을 남긴다. 물길의 가장 깊은 곳을 연결한 선을 ‘최심하상선’이라 한다. 물은 굽이져 흐르고 ‘최심하상선’은 양쪽 기슭에 번갈아 나타난다. 이 선에 인접한 곳은 침식을 받아 깊은 소를 만드는데, 절골에서는 폭이 3~8m인 소가 20개 정도 관찰된다. 소가 깊어지는 동안 그 맞은편에는 모래나 자갈 등이 쌓인다. 평면이 초승달 모양인 이러한 퇴적 지형을 ‘포인트 바’라고 한다. 침식을 받은 곳은 후퇴하고, 퇴적된 곳은 전진한다. 침식과 퇴적에 의해 최심 하상선은 이동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하천은 더욱 구불구불해진다.절골 협곡을 오르는 길은 주산천 물길과 함께하는 길이다. 큰 오르막 없는 완만한 길이다. 길을 막는 암괴 무리들을 피해가는 데크처럼 꼭 필요한 곳에만 보행 보조 시설이 있을 뿐 대부분이 자연 그대로의 ‘길 없는 길’이다. 발 딛기 좋은 암반을 고르고, 누군가 미리 공들여 놓아둔 징검다리를 건너고, 때로는 직접 다릿돌을 놓아가며 걷는 길이다. 천사 김종덕은 ‘가운데 물을 따라 길이 나 있다’고 했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도 참으로 그러하다. 앞선 사람의 흔적을 따르는 길이고, 사라진 흔적을 찾아 나아가는 길이다. 그렇게 오늘의 흔적을 더하는 길이다. #3. 돌들의 협업, 주산지절골 들머리에서 1㎞ 정도 아래쪽에 동쪽으로 파고든 또 하나의 골짜기가 있다. 계류가 흘러내려 주산천에 합해지는 모습은 신술골이나 갈전골의 물줄기와 마찬가지지만 그 골짜기의 끝은 완전한 별세계다. 그곳에는 주왕산 영봉에서 뻗어 나온 울창한 수림에 둘러싸인 작은 못 주산지가 있다. 200여 년 묵은 왕버들이 물속에 뿌리박고 서있는 신비의 세계다.산책로가 주산지의 절반을 감싼다. 촉촉하고 청량하게 그늘진 길이다. 왼쪽 하늘가에는 단풍이 물들면 용이 승천한다는 별바위가 내려다보고 있다. 별바위에서 가까운 동쪽 능선에 주아산 745m 봉우리가 솟아있다. 주산천과 주산지는 그 이름의 기원이 같은 듯하다. 별바위의 서쪽 아래, 해발 400m 즈음의 계곡을 막아 물을 가둔 것이 주산지다. 조선 경종 원년인 1720년 8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0월에 완공한 농업용 저수지다.주산지는 주왕산 응회암으로 빚은 ‘하늘그릇’이다. 응회암층 위, 고도 500m 이상의 능선부에는 퇴적암과 안산암질의 용암이 쌓여있다. 이들은 월외리 너구동 주변과 이전리 동쪽의 능선부에 주로 분포하는데 너구동에서 가장 잘 발달하여 너구동층이라 부른다. 이는 응회암이 주왕산의 큰 덩어리를 만든 이후 다시 퇴적의 시간을 겪고, 다시 화산 분출의 사건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주왕산 응회암에서 부석의 분포와 방향 등을 연구한 결과 학자들은 화산의 분출구가 가메봉의 남동쪽 수㎞ 떨어진 곳이었다고 추정한다.너구동층 퇴적암과 주왕산 응회암의 상부층은 암석중의 빈 공간이나 틈의 비율이 높다. 그래서 비가 오면 암석층의 빈 공간은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었다가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낸다. 그렇게 흘러내린 물은 주왕산 응회암층에서 중심부의 치밀하게 굳어진 층 속에 가두어진다. 그래서 주산지의 물은 단 한 번도 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다. 주산지는 지난 300여 년간 골짜기 마을의 농토를 적셨고, 지금은 우리의 마음을 적신다. 주산지를 바라보면 가슴에 하늘을 담는 그릇 하나가 생긴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 ▨ 참고= △청송국가지질공원 및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주왕산지공동기획: 청송군 ■ 절골계곡에 있던 운수암...지금은 기록만 남아있어절골 협곡과 주산지는 청송 부동면 이전리(梨田里)에 위치한다. 옛 지명은 이전평(梨田坪)이다. 주산천의 하류, 지금은 사과밭 빼곡한 땅이 옛날에는 배 밭이었던 걸까. 어쩌면 도화처럼 이화의 낙원이었을지 모른다. 해동지도에 이전평역(梨田坪驛)이 나오는데, 현재의 914번 지방도가 과거에도 영덕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이전리는 역참 마을이었다. 주산지의 마르지 않는 물이 늘 이전리의 농토를 촉촉이 적셨으니, 산 넘는 길손도 목 축여 쉬기 좋았을 것이다. 절골 계곡에 있었다는 운수암은 ‘순조가 즉위한 지 9년이 되는 1808년에 이르러 161년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창건은 인조 때인 1648년 즈음일 게다. 암자는 화재와 중창을 거듭했다고 하는데 그 마지막은 알 수가 없다. ☞여행정보 청송읍에서 31번국도 포항방향으로 가다 주왕산휴식소에서 부동면 방향으로 간다. 914번 길로 주왕산 방향으로 가도 되고, 908번 길로 부동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도 된다. 이전리에서 절골로 계속 오르면 절골 탐방 안내소다. 주차장은 협소한 편이다. 절골로 오르는 길에 상이전 마을에서 절골교 지나 우회전해 들어가면 주산지다. 이곳 주차장은 넉넉하다. 절골계곡은 완만하지만 강우 시에는 절대 진입하면 안 된다. 불어난 물은 길의 흔적을 삼켜버린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주산지. 주왕산 영봉에서 뻗어 나온 울창한 수림에 둘러싸인 저수지로, 조선 경종 임금 때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해 조성됐다.거의 수직을 이루는 암벽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장관을 연출하는 절골 협곡. 협곡은 주왕산의 몸통을 이루는 거대하고 치밀한 응회암지대에 등골처럼 고랑 져 있다. 작은 사진은 절골 협곡에서 관찰되는 응회암.
2016.07.19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3> 주왕산 ‘용추협곡’
협곡 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학소대. 오후의 빛 가득한 3시 즈음에도 학소대는 슬픔처럼 응달져 있다. 하늘 가까운 바위 위에, 옛날 청학과 백학 한 쌍이 살았다 전해진다. 어느 날 사냥꾼이 백학을 쏘았고, 홀로 남은 청학은 슬피 울며 바위 주변을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학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들이 있다. 여헌 장현광의 기록에는 청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새 한 마리가 살았고, 한 무인이 둥지 옆에 화살을 쏜 이후부터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음 신집은 학이 2월에 와서 둥지를 틀다 7월에 돌아간다고 했고, 호우 이환은 학이 4월에 와서 깃들어 살다가 8월 새끼가 자라면 데리고 간다고 했다. 노애 류도원의 기록에는 학은 떠나 둥지가 비었으나 봄날 저녁 구름 사이로 울면서 날아갈 때가 있다고 한다. 이야기들은 분분하나 학을 실제로 보았다는 이는 드물다. 조선시대에는 학소대 밑에 학소암, 학소대 맞은편에 청학암이 있어 두 암자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 주왕계곡은 명승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막막히 사로잡힌다. 철갑부대에 에워싸인 듯하다. 처음엔 천천히 다가오더니 어느덧 어깨를 밀어넣듯 바짝 다가와 이내 둘러선다. 무리 지은 듯하나 따로이고, 서로가 서로를 수도하듯 면벽하면서도 기세는 제각각이다. 우듬지는 가맣고 발아래는 해연처럼 먹먹하다. 추상같은 기상에 걸음이 허영해진다. 톺아볼 만한 것은 눈앞의 한 치뿐인, 협곡이다. ‘주왕의 늑골’ 용추협곡주방계곡 따라 북동 방향 1㎞ 구간응회암 주상절리 수직으로 갈라져가파른 골짜기 빚고 폭포도 만들어‘주왕의 심장’ 용추폭포산의 중심 해발 320m 지점에 위치낙차 1∼5m 내외 3단 폭포로 구성물이 낙하해 큰 폭호·포트홀 형성#1. 주왕산의 늑골, 용추협곡 주방계곡을 따라 주왕산을 오른다. 길은 유순히 나아가고, 계곡은 천천히, 천천히 좁아진다. 계류에 발 담근 바위들이 천천히 커지고, 그리 멀지 않은 능선에 잿빛 바위들이 고개 들기 시작한다. 숨어있던 군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듯 하더니, 곧 거대하고 위압적인 무리가 되어 나타난다. 자하교를 지나면서부터다.왼쪽으로는 연꽃을 닮은 연화봉과 병풍바위가 잇대어지고, 오른쪽으로는 망월대로부터 급수대를 거쳐, 학소대로 연결되는 암석 단애들이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다. 시루교에 이르면 시루봉이 거석의 기둥처럼 하늘을 찌르며 기립해 있고 그 양쪽으로 거침없는 기세로 시립한 암벽들이 주왕산의 늑골처럼 드러나 있다. 학소교를 지나자 엄청난 암석 단애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길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단애의 틈을 비집고 나아간다. 가까이 바짝 다가서는 철갑 같은 암석들에 붙잡혀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주왕산의 가슴우리 뼈와 같은 그 속, 그 한가운데에서 폭포가 쏟아진다. 용추(龍湫)폭포다. 폭포는 놀란 심장처럼 쾅쾅 울리며, 건강한 심실처럼 계류를 뿜어낸다. 폭호는 시리도록 맑으나 그 깊이는 쉬이 가늠되지 않는다. 자하교에서부터 용추폭포까지, 주방천을 따라 북동 방향으로 약 1㎞. 이 계곡을 용추협곡이라 한다. 옛 선비들은 이 계곡을 신선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생각했고, 좁은 문을 지나 다다를 수 있는 무릉도원이라 여겼으며, 청학이라 불리는 기이한 새가 산다 하여 청학동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학자 여헌 장현광은 청학동에서 ‘바위 뿌리가 각기 사람과 겨우 지척지간에 있는데, 바위 모서리가 곧바로 구름이 다니는 하늘로 솟아 있어 하늘과 해가 참으로 우물 안에서 보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2. 협곡의 생성 주왕산은 산 가슴 전체가 협곡이다. 협곡은 골짜기 양쪽에 늘어선 벼랑이 급경사를 이루는 좁고 깊은 계곡을 말한다. 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 협곡은 까마득히 높고 날서있다. 이 모습의 시작은 약 7천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일대에 화산 폭발이 있었다. 무려 아홉 번에 이르는 엄청난 폭발이 이어졌고,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쌓였다. 연속적으로 분출한 고온의 화산재는 점차 냉각되면서 응회암으로 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주왕산이다. 주왕산 응회암은 냉각으로 인해 수축되고, 수축되면서 용접한 듯 단단해졌다. 이 과정에서 암석은 체적이 줄고 수직으로 갈라져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를 이루었다. 주상절리가 발달하는 응회암은 절리를 따라 쉽게 낙석이 발생한다. 수직의 주상절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칼로 벤 듯 가파른 절벽이 생겼고, 떨어져 나간 벼랑의 조각은 골짜기를 구르며 다양한 모양의 암괴로 쌓였다. 그 계곡에 물이 흐른다. 물은 바닥을 깎아 골짜기를 깊게 하고, 폭포를 만들고, 바윗덩어리를 쪼개고 뒤흔들어 다양한 지형을 빚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용추협곡이다. 용추협곡은 주왕산 응회암이 치밀하게 엉긴 산 중심 부분에 발달해 있다. 벼랑의 높이는 100m 이상이다. 경사는 거의 수직을 이루고 횡단면은 수직에 가까운 V자형을 이루고 있다. 바닥의 폭은 자하교에서 학소대까지는 10~20m 정도지만 점점 좁아져 용추폭포 부근에서는 3~5m 내외로 매우 좁아진다. 폭포의 침식 작용으로 깊이가 더욱 좁아진 것이다.#3. 청학동 용추폭포 광해군 때의 문인인 호우 이환은 ‘발을 포개면서 나아가고 몸을 던지면서 건너뛰어 다리의 힘이 다 빠져나간 뒤’에야 비로소 다다르게 되는 곳이 용추의 입구라 했다. 용추의 서쪽 봉우리는 만학봉(晩鶴峯), 북쪽은 천심대(川心臺), 동쪽은 수학대(壽鶴臺)로 세 봉우리가 합쳐져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길이 열려있는데, ‘돌 틈을 잡고 배를 바위 모서리에 붙이고 한 굽이를 돌아’서 용추에 이를 수 있었다 한다. 조선 선조 때 학자 여헌 장현광도 ‘다리 힘이 건장한 자가 아니면 반드시 넘어지고 만다’라 했고, 18세기 선비 노애 류도원 역시 ‘다리는 절로 떨리고 머리는 바위가 짓눌러 고개 들기조차 어렵다’고 했다.아래를 내려다본다. 바위 뿌리가 보이는 곳도 있고, 암괴들이 으르렁대는 곳도 있지만 해구처럼 깊고, 아예 해연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곳도 있다. 옛사람들은 저곳을 기어 걸었을 것이다. 이 아찔한 지형을 만든 공범 중 하나가 용추폭포다. 폭포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과 2단 폭포는 폭이 2m, 낙차가 1~2m로 소규모다. 폭포 아래에는 절구와 같이 움푹 파인 포트홀이 발달되어 있다. 1단의 포트홀은 폭 3m, 깊이 2m로 선녀탕이라 부르고, 2단의 포트홀은 폭 8m, 길이 5m, 깊이 1m로 구룡소(九龍沼)라 부른다. 연이어 제 3단 폭포가 떨어진다. 폭은 2m, 낙차는 5m 규모로 용추폭포에서 가장 크다. 아래에는 커다란 폭호가 형성되어 있고, 10㎝ 내외의 표력(지름이 256㎜ 이상인 큰 자갈)들이 쌓여 있다.포트홀과 폭호의 발달 과정은 유사하다. 물이 낙하하면 하상 암반의 오목하거나 깨어진 부분에 와류가 생기고, 그 틈으로 들어간 자갈과 모래 등이 와류에 휩쓸려 돌면서 맷돌처럼 암석 바닥을 깎는다. 이러한 작용이 계속되면 자갈은 구멍 안에 갇히고 계속 회전하면서 처음에는 비교적 작았던 구멍을 넓고 깊게 만든다. ‘새나 넘어갈 길’에 지금은 평평한 산책로가 놓여 있고 새처럼 내려다볼 수 있으니 옛 님들 대하는 마음이 우쭐해진다.‘용추(龍湫)’란 용이 폭포에 살다가 하늘로 승천한 웅덩이란 뜻이다. 구룡소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 한다. 주왕산의 높이는 해발 721m다. 용추폭포는 해발 320m 지점에 위치한다. 산의 중심 부분에 용이 살던 폭포가 있다. 주왕산의 심장은 용의 집이었던 게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류혜숙 객원기자 archigoom@naver.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 ☞여행정보 주왕산의 입구인 대전사에서 용추폭포까지는 2㎞ 남짓하다. 폭포까지는 무장애 탐방로로 휠체어나 유모차 등도 올라갈 수 있다. 학소대 앞에는 주왕산 숲 속 도서관이 자리한다. 탐방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쉼터로 여행, 환경, 문학 등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다. 또한 숲 속 도서관은 국립공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그린 포인트 적립 장소로 쓰레기 등을 수거해 가져오면 그 양만큼 포인트로 돌려준다. 이 포인트로 공원 시설을 무료로 이용하거나 등산용품을 받아 갈 수 있다.용추협곡은 주왕산 응회암이 치밀하게 엉긴 산 중심 부분에 발달해 있다. 길게 이어진 협곡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장관을 연출한다. 옛 선비들은 이 협곡을 신선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여겼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용추폭포. 3단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건강한 심장의 심실처럼 계류를 시원하게 뿜어낸다.용추폭포의 폭호는 시리도록 맑으나 그 깊이는 쉬이 가늠되지 않는다.
2016.07.12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2> 주왕산 ‘급수대 주상절리’
거대한 것이 온다, 천천히. 나뭇잎 타고 대양을 떠돌다 느닷없이 맞닥뜨린 대함선의 뱃머리 같다. 벼락과 같은 마주침이다. ‘북북서로 나아가라’고 고함치는 것 같다. 천둥의 목소리다. 하늘을 벼리며 선 형상은 함장의 눈초리처럼 매운데, 그 피부는 늙은 코끼리의 가죽 같고 대왕고래의 목주름 같다. 의연히 압도하는 벼랑이다. #1. 물 길어 올리던 봉우리, 급수대주왕산 주방계곡을 따라 오른다. 계류는 순하게 흐르고 길도 순하다. 수억 개의 초록 이파리들이 살랑대는 순순한 길, 그 주억대는 고갯짓 사이로 저 큰 벼랑이 어린다. 깜빡이는 찰나마다 환영인가 싶다. 그러자 얄랑거리는 것들 다 물리고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북두성을 향해 나아가는 함선의 현두처럼 솟구친 단애, 급수대(汲水臺)다.옛날에는 급수봉(汲水峯) 또는 격수암(激水巖), 혹은 길고암(桔巖)이라고도 했다. 모두 물과 관계있는데, 이름의 유래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37대 왕인 선덕여왕은 후손이 없었다. 이에 무열왕의 6세 손인 김주원이 차기 왕으로 추대된다. 궁으로 향하던 그가 홍수를 만나자 상대등 김경신은 한발 앞서 입궐해 왕좌를 차지해 버린다. 곧 김주원을 지지하던 귀족들마저 등을 돌리는 사태에 이르렀고, 위험을 느낀 그는 주왕산으로 피신해 들어온다. 그는 절벽 위에 대궐을 짓고 식수를 얻기 위해 두레박으로 계곡의 물을 퍼올렸다. 그가 물을 길어올렸던 벼랑이 바로 급수대다. 전설 간직한 급수대주왕산으로 피신한 신라왕족 김주원절벽 위에 대궐 짓고 식수 퍼올린 곳화산재 엉겨붙어 식은 응회암 덩어리표면 수축으로 다각형 수직절리 이뤄급수대 밑동 ‘천둥알’화산재 숨은열에 상태가 변질된 광물규산염이 포도알처럼 촘촘하게 박혀급수대 꼭대기에서 쇠줄에 쇠 두레박을 매달고 수직으로 내렸다 한다. 한 사람이 두레박에 매달려 내려와 물을 길었다 한다. 주왕산 유람기를 남긴 옛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설을 전하면서도 ‘어찌 다 믿겠는가’ 하고 스스로 검열한다. 그러나 저것은 쇠줄 드리웠던 자국, 쇠 두레박이 데룽데룽 오르내리며 할퀸 생채기 아닌가? 현대의 지질학은 그것을 주상절리라 한다. 급수대 표면에는 주상절리가 가득하다.#2. 다양한 방향을 보이는 절리 급수대는 뜨거운 화산재가 치밀하게 엉겨 붙어 차갑게 식은 응회암 덩어리다. 중생대 말, 남동동쪽 어딘가에서 수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 300℃에서 800℃에 이르는 끈적끈적한 화산재가 흘러내려와 쌓이고 쌓였고 굳어지고 굳어져 주왕산이 되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응회암 덩어리는 골로, 봉우리로, 단애로 조각되었다. 조각된 모습으로 응회암은 산 가슴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급수대는 그 한 조각이다.고온의 화산암이 냉각될 때는 표면이 먼저 식으면서 수축한다. 수축에 의해 틈이 생긴다. 절리다. 수축이 일어나면 틈들은 서로 만나 육각형 패턴의 절리를 이루는데, 절리는 수직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옆에서 보면 마치 기둥들이 줄 선 모습으로 보인다. 주상절리다. 이것은 매우 도식적인 이야기다. 온도나 습도가 마냥 같지 않고 지진이나 산사태와 같은 진동도 일어나며 암석 자체의 성분이나 점성의 차이도 있다. 때문에 수축은 고르지 않다. 넓적한 육각형도 생겨나고, 찌그러진 육각형도 생겨나고, 성마르게 오각형, 사각형이 되기도 하고 나긋하게 칠각, 팔각이 되기도 한다.급수대의 표면에는 사각형, 육각형 등 다각형의 주상절리가 가득하다. 환경의 변화를 겪었다는 공표다. 또한 직경이 큰 주상절리대와 직경이 작은 주상절리대들이 띠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직경을 가진 영역들이 서로 겹쳐진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먼 옛날 이곳에 쌓인 고온의 화산재가 짧은 주기를 가지고 여러 번 분출했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독립적인 냉각과정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3. 천둥알을 찾아라급수대를 가장 상세히 볼 수 있는 곳은 자하교에서 시루교(학소대)까지 연결되어 있는 약 1㎞의 ‘자연관찰로’에서다. 한 사람이 발 디딜 만한 좁은 오솔길을 가다 보면 급수대 밑동에 촘촘하게 형성되어 있는 절리들을 볼 수 있다. 상수리나무의 표피 같고 첩첩 산골의 너와지붕 같다. 그 위로 단애의 우듬지를 향해 대왕고래의 목주름 같은 절리들이 선명하다. 바위 면에서는 화산 폭발의 분출물 중 물에 뜰 만큼 가벼운 부석의 파편들이 용결, 변형된 피아메도 쉽게 발견된다. 암회색의 온전한 피아메도 있지만 풍화되어 빠져나간 흔적이 보다 우세하다.자연 관찰로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천둥알(thunder egg)이다. 천둥알은 화산재의 높은 잠열 때문에 생긴 열 변질 광물을 말한다. 잠열은 온도의 상승에는 관여하지 않고 다만 상태 변화만 일으키는 열이다. 잠열 때문에 원래의 모암이 파괴되면 새로운 광물이 그 틈을 채운다. 급수대의 응회암 벽면에는 규산염 광물로 이루어진 천둥알이 불규칙한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사진으로 보면 옅은 파랑이나 주황이 몽환적으로 마블링 된 유리구슬 같고, 우주에서 날아와 박힌 운석 같고, 멍든 것 같고, 잘 익은 포도 알 같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미국 오리건주나 호주의 골드코스트에서 대표적으로 산출되는데, 급수대의 천둥알은 소량이고 희귀하다. 그래선지 뒤로 넘어질 듯 열심히 찾아봐도 쉽지 않다. 저 위, 저것인가? 하지만 잡히지 않는 신 포도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 ▨ 참고= △자연지리학사전 △주왕산지 △청송지질공원 홈페이지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자연지리학사전공동 기획:청송군■ 옛 문헌에 실린 나왕전 ‘신라왕 피신한 대궐 터’1604년 주왕산을 유람했던 하음 신집은 ‘유주방산록’을 남겼는데, ‘나왕전(羅王殿)’은 ‘신라왕이 적병을 피할 때 머무른 대궐 터’라 하고 ‘만 길이나 되어 공중에 높이 꽂혀 있는 돌벼랑’을 ‘격수암(급수대)’이라 했으며 ‘봉우리를 돌아 굽은 길을 5~6리쯤 가야 나왕전’이라 했다. 그리고 그 길을 ‘반드시 덩굴을 잡고 나무를 넘어가야 이르게 된다. 산세가 매우 경사지고 돌이 굴러 떨어지므로 앞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를 밟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꿈치를 따라야 하니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이를 수 없다’고 설명한다. 자하교에서 시루교(학소대)를 잇는 자연관찰로는 400여년 전 그의 발자취 남은 나왕전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물론 덩굴 잡고 뒷사람 이마를 밟고 가야 하는 길엔 지금 편안한 산책로가 놓여 있지만 말이다. 그가 올랐다는 봉우리가 급수대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 보니 뭇 산들이 공손히 절하는 모습이었고 태백산의 서쪽과 조령의 남쪽이 모두 탁 트인 듯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다시 저녁이 되어 내려왔는데 온몸이 피곤하여 3일 동안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였다’는 송구하게도 재미진 기록도 있다. ☞여행정보 주왕산의 주 입구인 대전사에서 주방천 계곡을 따라 약 3㎞ 오르면 길 따라 급수대의 옆면에서 정면까지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자하교나 시루교에서 자연관찰로로 진입해 들어가면 급수대의 밑동을 가까이 볼 수 있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위험할 수 있다. 급수대에서 주왕암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망월대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연화봉과 병풍바위, 그리고 급수대의 옆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큰 풍경을 가지는 최고의 전망대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주왕산 급수대. 하늘을 향해 불쑥 솟구친 바위의 모습이 전진하는 대함선의 뱃머리처럼 웅장하다. 급수대 표면에는 사각형, 육각형 등 다각형의 주상절리가 가득하다. 급수대 주상절리는 수직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옆에서 보면 마치 기둥들이 줄 선 모습처럼 보인다.
2016.07.05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1> 주왕산 ‘용연폭포’
주왕산에는 이름 난 세 개의 폭포가 있다. 용추·절구·용연 폭포다. 이들은 1930년대부터 80여년간 1·2·3 폭포로 불렸다. 명칭에 ‘용(龍)’자를 쓰지 못하도록 일제가 강제로 변경한 것이었다. 이 중 제3폭포로 시나브로 익혀져 온 것이 용연폭포다. 조선시대에는 ‘내용추’ 또는 ‘쌍용추’라고도 불렀다. 제 이름을 오롯이 되찾은 것은 지난해다. 주왕산 심장부 타고 흘러내린 주방천 응회암 절리 틈으로 떨어져 폭포 돼 상부 폭포 아래는 호수같은 ‘포트홀’ 폭포 양옆 단애엔 움푹 파인 ‘하식동’ 하단 폭포 암반이 깎여 ‘폭호’도 형성 #1. 가장 깊은 골짜기의 폭포 해발 약 400m 지점. 주왕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달려온 물줄기가 장엄하게 낙하한다. 푸른 절벽을 거느리고 낭떠러지 아래 깊은 못으로 주저 없이 뛰어 내린다. 아찔하고 아름다운 추락, 그리고는 유유히 몸을 가다듬어 다시 떠나 흐른다. 주왕산의 심장부를 타고 흐르는 주방천의 상류에 이처럼 처연히 고운 용연(龍淵)폭포가 있다. 주왕산의 폭포 가운데 가장 깊숙한 계곡에 자리한 폭포다. 용연폭포에는 용이 살았다고 하고, 폭포의 깊은 곳은 바다와 통해 있다고도 전해진다.폭포들이 위치하는 주왕산 계곡의 주 암질은 모두 응회암이다. 응회암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뿜어져 나온 분출물 중 입자의 크기가 2㎜이하인 것이 굳어 만들어진 것이다. 주왕산 응회암은 대부분 높은 온도에서 굳어진 용결응회암으로 굳은 정도에 따라 비 용결, 부분용결, 치밀 용결로 구분한다. 그 중 치밀하게 용결된 응회암이 주왕산의 중간 부분을 두껍게 차지하고 있는데, 용연폭포는 치밀 용결대에서 비 용결대로 변하는 부분에 위치한다. 뜨거운 화산 분출물이 급격히 식으면 수축으로 인해 절리가 생긴다. 그 틈을 타고 계속 물이 흐르면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나와 절벽이 만들어진다. 굼실굼실 흐르던 물은 이제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리며 폭포가 된다. 용연폭포는 두 번 뛰어내려 두 개의 단을 이룬다. 상부는 폭이 약 4m, 낙차는 6m. 하부의 폭은 5m, 낙차는 10m에 이른다. 보통 하부 폭포는 두 줄기로 떨어지지만 수량이 증가하면 한 줄기로 합쳐진다. 물이 흐를수록 절벽은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일이 반복된다. 이러한 연속적인 침식과정 속에서 폭포는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러나게 된다.#2. 폭포의 후퇴를 보여주는 하식동폭포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조망대와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용연폭포의 상부는 등산로에서 보면 암벽과 수풀에 가려져 있어 조망대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그 모습을 아는 이가 적었다 한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까마귀 두 마리가 날아간다. 대기를 준동시키는 폭포 소리에 기린초가 파르르 몸을 떤다. 상부 폭포 아래에 물이 맑다. 윤슬로 빛나는 물속에 넙데데한 암반과 자글자글한 자갈들이 한 눈에 보인다. 폭과 길이가 10m 정도에 이르는 이 작은 호수는 ‘포트홀’이라 한다. 처음에는 물이 타고 흐르는 바위였을 게다. 긴 시간 동안 떨어져 내린 물이 바위의 오목한 곳이나 깨진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 지금과 같은 커다란 수반(水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폭포의 양 옆 단애에는 공 맞은 반죽처럼 움푹 파인 동굴들이 있다. 북측에 3개, 남측에도 작은 규모로 발달해 있는데 수면보다 약간 높은 자리에 위치하며 3m 정도 크기의 둥근 모양새다. 이를 ‘하식동’이라 한다. 폭포 아래로 떨어진 물이 소용돌이 칠 때 튀어 오른 물이 측면에 부딪히고, 오랜 시간 물방울을 맞은 벽은 어느덧 동그랗게 닳아 굴 모양으로 파였다. 하식동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는데, 물이 낙하하는 지점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이 가장 먼저 형성된 것이라 한다. 폭포는 떨어져 내리면서 절벽을 깎아 조금씩 후퇴한다. 최초의 하식동을 만든 폭포는 그동안 조금 후퇴하고, 다시 하식동을 만들고, 또 후퇴한다. 그렇게 하식동은 먼 것에서부터 가까운 것으로 순차적으로 형성되었다. 하식동의 위치로 미루어 볼 때 용연폭포의 상부폭포는 폭포의 형성 이후 최소 20m 이상 후퇴되었음을 알 수 있고, 폭포수는 좀 더 북측으로 치우쳐져 흘러내렸으리라 짐작된다. 하식동의 침식방향도 조금씩 다르다. 폭포는 물러나 앉으며 약간씩 자리를 옮긴 듯하다.#3. 폭호와 피아메 용연폭포의 하단 폭포는 상부의 포트홀에서부터 두 줄기로 떨어진다. 그 아래에는 폭 48m, 길이 37m, 수심이 약 4m에 이르는 용추라는 ‘폭호(瀑壺)’가 형성되어 있다. 폭호는 암반 상에 둥글게 파인 웅덩이를 말하는데, 포트홀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비교적 작은 구멍에 자갈과 모래 등이 들어가 소용돌이치며 맷돌처럼 암석 바닥을 깎는다. 이러한 작용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자갈은 구멍 안에 갇힌다. 갇힌 자갈은 구멍 속에서 계속 회전하면서 넓고 깊은 폭호를 만들었다. 폭호는 청초하다. 언뜻 얕아 보이는 폭호는 갑자기 절벽처럼 깊어진다. 4m라는 수심이 가뭇없다. 안전 울타리도 출입금지도 없던 옛날에는 사고도 잦았고, 한 겨울 폭포가 꽁꽁 얼어붙으면 산 아래 살던 아이들이 얼음을 지치며 놀았다 한다. 가장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서있는 나무들이 싱그럽다. 가지고 싶다는 탄식이 절로 터지는 풍경이다. 폭포 주변에서는 평평한 접시 모양의 큰 피아메를 쉽게 볼 수 있다. 길이가 40㎝에 달하는 피아메도 있다. 피아메는 매우 가벼운 화산 분출물인 부석이 퇴적, 압착된 것이다. 흐르거나 날아와 쌓이기 때문에 그 방향성은 피아메마다 다르다. 그러나 이곳의 피아메들은 전체적으로 긴 축이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어 흐름의 방향을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의 방향을 쫓아 보면 화산재가 흘러온 곳은 남동동. 남동 능선을 타고 가면 산들과 동해가 보인다. 주왕산을 만든 폭발은 그 길에서 보이는 어느 곳일 터.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전임길 객원기자 core8526@naver.com ▨ 참고= △자연지리학사전 △주왕산지 △청송지질공원 홈페이지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 △청송의 향기공동기획:청송군 ■사창골 계곡길 끝 절구폭포 용연폭포로 가는 등산로 중간에 절구폭포로 향하는 샛길이 있다. 가메봉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흐르는 사창골 계곡길이다. 사창골은 옛날 대전사의 창고가 있던 골짜기로 일제 때는 참나무로 목탄을 생산하던 곳이라 한다. 사방이 벼랑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에 잘게 부서진 돌들이 자그락자그락 밟힌다. 멀지 않지만 깊은 골의 막다른 곳에 제2폭포라 불렸던 절구폭포가 있다. 계곡물이 처마처럼 생긴 바위에서 떨어져 절구처럼 생긴 바위에 담겼다가 다시 낮은 바위를 타고 쏟아져 절구폭포다. 조선시대 때는 중용추라고도 했다.절구폭포 역시 주왕산 응회암의 절리에 의해 생긴 폭포로 치밀 용결대에 속한다. 폭포는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부 폭포 아래에는 선녀탕 포트홀이 있고 하부 폭포 아래에는 폭호가 발달해 있다. 절구폭포는 협곡 안에 위치해 있어 습도가 높다. 바위에는 이끼가 많이 보인다. 폭포 부근의 피아메는 풍화에 의해 제거되어 대부분 빈 공간만 남아있다. 이곳의 습도 또한 피아메의 풍화 속도를 증가시켰다고 한다. 절구폭포에는 사람들이 많다. 주왕산에서 유일하게 물에 손 담글 수 있는 폭포이기 때문이다. 수심도 얕다.■용연폭포 물길 거슬러 오르면 전기없는 마을 ‘내원동’ 흔적용연폭포에서 북동쪽으로 약 1㎞ 더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기 없는 마을로 알려져 왔던 내원동이다. ‘주왕산지’에 ‘시내를 따라 십리 길이 굽이마다 밝고 환하다’며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이한 승경이 있는 줄 알지 못하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고려 중기부터 사람이 살았고 일제시대에는 100여 가구가 넘게 모여 살았으며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분교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다. 지금은 휑한 집터와 낮은 돌담, 그리고 그 과거를 전하는 이야기만 남아 있다. ☞여행정보주왕산 주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용추협곡 지나 1㎞ 정도 오르면 절구폭포 분기점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200m 정도 들어가면 절구폭포다. 분기점에서 왼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용연폭포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등산로 입구인 대전사에서 용연폭포까지는 3.4㎞ 정도다. 용연폭포 조금 위에 가메봉과 금은광이 삼거리 갈림길이 있다. 가메봉 방향으로 1㎞ 쯤 가면 사라진 마을 내원동이다.무인기 드론으로 촬영한 용연폭포. 두개의 단을 이루는 2단 폭포로 상부는 폭이 약 4m, 낙차는 6m이고 하부의 폭은 5m, 낙차는 10m에 이른다.용연폭포가 위치한 주왕산 계곡의 주요 암질은 응회암으로, 동굴처럼 움푹 파인 곳은 하식동이라 한다. 하식동은 북측에 3개, 남측에도 작은 규모로 발달해 있다.
2016.06.28
[스토리텔링 2016] 청송 국가지질공원 Geo-tourism <10> 주왕산 ‘연화굴’
허리는 굽되, 기어가지 않을 정도로만 디딤돌을 마련해 둔 가파른 외길이다. 커다란 바위들과,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이 도처에서 쳐다본다. 아틀라스처럼 구부정하지만 저돌적으로 전진한다. 덜컥 헐거운 돌멩이가 추락처럼 뛰어 내려가면 걸음은 산사태처럼 움찔한다. 고개를 들어 앞을 올려다보면 다만 서늘한 숲이 내려다보이고, 슬쩍 주위를 살피면 오래된 성벽과 같은 돌 무리가 미처 제 몸을 다 숨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길의 끝이다. 숨을 고르기 위한 한 평 남짓한 평지뿐, 눈앞에는 바위의 사원과 같은 연화굴이 가로막고 서 있다. #1. 건축가 없는 건축, 연화굴연화굴은 주왕산의 주 등산로에서 이탈해 산 중턱에 숨은 듯 자리한 굴이다. 풍상에 닳은 성곽 같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문 같다. 구구한 전설로만 전해져온 역사시대 이전의 수도원을 발굴해낸 것 같은 놀라운 느낌이다. 서원모가 쓴 ‘주왕산지’에 보면 1932년경 황생이라는 이가 뽕잎을 따러 왔다가 무성한 등나무 줄기에 감춰져 있던 이곳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서원모는 친구들과 함께 찾아와 이름을 적고 연하굴(烟霞窟)이라 명명했다. 봉우리 이름과 근사한 것을 취한 것이라 한다. 화산재가 식어 굳어진 응회암굴냉각 과정서 특정방향 절리 형성동굴 뚫린 지점에 수직절리 발달상부 판상절리…아래는 괴상절리 굴 벽면엔 암회색 ‘피아메’ 결정화산재가 압착돼 광물로 변한 것 봉우리는 연화봉(蓮花峯)이다.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 한다. 그 아래에 연화굴(蓮花窟)이 있다. 이름은 손쉬운 방향으로 정착한 듯하다. 연화굴은 높이 3m, 너비 5m, 길이 10m의 통로형 굴이다. 터널이고 돌문이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만든, 건축가 없는 건축이다. 굴 바닥과 입구 앞까지 크고 작은 돌들이 거친 너덜겅처럼 흩어져 있다. 굴 옆으로는 기괴한 형상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병풍바위에서 계곡수가 나와 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는데, 물줄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드문 이끼들과 습기를 먹은 대기에서 계곡수를 떠올린다.공기는 시원하고 고요하다. 굴의 어둠 속에서 햇살은 더 환해 호롱 모양을 한 굴의 실루엣이 선명하다. 그 옛날 새겼다는 서원모와 친구들의 이름은 찾아지지 않는다. 뒤편은 암벽이 가로막고 서 있다. 굴은 지나가라는 듯 열어놓고는 이내 걸음을 잡는다. 양쪽의 좁은 틈으로 어디론가 이어질 것 같은데 나아갈 수 없다. 검은색을 띤 암벽이 축축하다. 머리 위로는 길고 좁은 하늘이 보인다. 폐허가 된 사원 같다. 외진 기도실이고 고독한 독방 같다. 눈 깊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것만 같은데, 19세기 사람 류정문은 이곳을 보고 ‘허물이 남아 누운 용’이 생각난다 했다.#2. 절리의 침식이 만든 굴주왕산은 대부분이 화산재가 급격히 식어 굳어진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화굴 역시 주왕산 응회암 지대에 속한다. 응회암은 냉각되는 과정에서 특정한 방향의 절리를 형성한다. 굴이 뚫려있는 지점은 수직절리가 발달하고 있다. 10~20㎝ 내외의 조밀한 간격으로 발달한 수직절리로, 작고 길쭉하고 각진 암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새다. 이런 암석 조각들이 떨어져 나와 굴을 만들었다고 한다.상부는 수평의 판상절리가 발달해 있다. 간격이 조밀해 두툼한 고깃덩어리로 보이기도 한다.아래쪽은 불규칙한 괴상의 절리다. 지면과 평행한 절리가 약간 우세하지만 드물게는 수직절리도 보인다. 이러한 판상, 주상, 불규칙 절리대는 단속적으로 변화한다. 이는 연화굴을 이루는 응회암체가 불규칙적이고 복합적으로 냉각되었음을 시사한다.연화굴 뒤편의 검은 암벽은 응회암 수직 절리대에 끼어든 안산암 암맥이다. 응회암의 수직절리 속에 안산암질 암맥이 수평 방향으로 조밀하게 채워져 있다. 방향이 다른 암질이 만나면 틈이 생긴다. 틈으로 인해 침식의 힘은 강해졌다. 틈을 따라 지표수가 흘러 침식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 틈을 따라 굴을 구성하는 응회암체가 기울어져 호롱 모양을 만들었고, 틈을 따라 흘러내린 물로 인해 뒤쪽의 틈과 앞쪽 면이 관통하는 터널형의 굴이 되었다.#3. 동굴의 피아메 무릎이 찢어진 적이 있다. 상처는 얇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 모양의 거뭇한 흉터로 남아 있는데, 동굴의 벽면에는 그와 비슷한 자국이 많이 보인다. 회백색 혹은 암회색의 그것은 ‘피아메’라 불린다. 화산 폭발의 분출물 중 물에 뜰 만큼 가벼운 부석의 파편들로, 화산재가 퇴적될 때 압착되어 보다 단단한 구조의 광물로 변한 것들이다. 부석들은 폭발로 인해 하늘을 나는 동안 휘발성 성분이 빠져나가 수많은 공기구멍(氣孔)이 생긴 것이라 한다. 화산재가 높은 온도와 큰 압력을 받아 응회암이 될 때, 부석들은 치이고 눌려 납작해졌다. 공극은 계속 감소되어 밀도가 높아졌고 심하게 편평해져 어두운 유리 파편과 같은 피아메가 되었다. 판상절리나 불규칙절리 부분에는 대부분 피아메가 빠져나가 빠끔하다. 풍화에 의해 빠져나간 것이라 한다. 등산로에서 연화굴로 올라가는 산길에서도 퀭한 피아메들을 발견할 수 있다.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주왕산지 △청송지질공원 홈페이지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공동 기획:청송군 ■ 주왕산의 동굴들>>> 주왕굴·무장굴·연화굴 등 은둔·수도자의 전설 품어 전설에 의하면 중국 당나라 시대 주왕이 반란을 일으켜 실패한 후 숨어든 곳이 주왕산이다. 주왕산에는 많은 동굴이 있는데, 주왕이 숨어있다 죽음을 맞이한 곳이 주왕굴, 주왕의 군사들이 무기를 숨겨둔 곳이 무장굴이다. 연화굴은 주왕의 군사가 훈련을 하던 곳이라 하고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성불한 곳으로도 전해진다.이들 동굴의 생성은 약 7천만 년 전 주왕산의 형성과 때를 같이한다. 모두 고도 390m에 위치하며 주왕산 응회암대에 속한다. 주왕굴은 높이가 약 5m, 폭은 약 2m인 자연동굴이다. 주왕굴은 좁은 간격의 응회암 수직절리 내에 단층선이 지나가면서 풍화와 침식에 약해져 생긴 굴이라 한다. 주왕굴로 향하는 길목에서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단애에는 여러 방향과 두께의 수직절리와 함께 주상절리도 볼 수 있고, 피아메도 선명하다. 무장굴은 높이 3~5m, 폭 2.6m, 깊이 6m 규모로 역시 주상절리와 소규모의 단층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현재도 계속 발달하고 있다. 암맥이든 단층이든, 무언가가 끼어들면 변형된다. 그 모습은 은둔자와 수도자의 전설을 품을 만큼 기묘하고 신비롭다. ■ 자하성>>> 신라군사 막으려 쌓은 城...산사면에 돌 무리만 남아 허물어진 성벽 같기도 하고 너덜 같기도 한 돌무지 흐르는 산사면 아래에 자하성(紫霞城) 안내판이 서있다. 연화굴과 가깝게 있다. 주왕이 자신을 잡으러 온 신라 군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주왕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성돌로 추측되는 돌 무리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안내판에는 길이가 약 12㎞에 달했다고 적혀 있다. 청송읍지에는 자하성 혹은 주방산성이라 기록되어 있고 길이는 1천450척, 성 안에는 시내가 두 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음 신집이 1604년에 쓴 ‘유주방산록’에는 ‘신라왕이 적병을 피해 왔을 때 지은 것’이며 ‘짧은 성가퀴는 황량하니 자취는 오래되었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성문이 남아있어 오고 가는 유람객들은 모두 그 문으로 다녔다고 한다. 19세기 창녕 사람 조화승은 ‘연하굴은 그 굴을 통해 자하성에 이르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했으니, 슬그머니 자하성과 연화굴의 관계를 상상하게 된다. 자하성에 대한 옛 글에는 가끔 ‘돌문’이 애매하게 등장하는데 그것은 혹시 연화굴이 아닐까. 긴 자하성의 문 가운데 하나가 연화굴은 아니었을까. 산길서 본 성벽과 같은 돌 무리가 화들짝 떠오른다.☞ 여행정보주왕산 대전사에서 주방천 계곡 등산로를 따라 올라간다. 자하교 쉼터에서 용추폭포 방향으로 조금 가면 왼쪽에 연화굴 가는 이정표가 있다. 산길을 200m 정도 오르면 연화굴이다. 내부로의 접근은 금지되어 있다. 자하교 쉼터 부근에 자하성 안내판이 있다.연화굴은 화산재가 급격히 식어 굳어진 주왕산 응회암 지대에 속한다. 높이 3m, 너비 5m, 길이 10m의 통로형 굴로, 햇살이 비칠 때면 호롱 모양을 한 실루엣을 살며시 드러낸다.연화굴 주변은 기괴한 형상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 틈을 비집고 뚫려있는 굴은 마치 외진 기도실 같기도 하고 고독한 독방처럼 보이기도 한다.주왕이 숨어있다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전해지는 주왕굴.자하성 주변에는 돌 무리만 어지럽게 널려있을 뿐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201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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