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4> 이하석의 '광주이씨의 金蘭之交'

  • 입력 2021-05-25 11:46  |  수정 2021-05-3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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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직 최원도만이 자기를 구원하리라 믿고 은거지를 탈출했다. 개성에서 업고 온 아버지. 이집은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까지의 까마득한 길을 다시 아버지를 업은 채 걷기 시작했다.

 

천곡(泉谷) 최원도와 둔촌(遁村) 이집은 평생의 지기였다. 벼슬길은 둘 다 평탄하지 못했다. 사간이었던 최원도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영천으로 낙향한 것은 신돈의 득세로 권문세가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세상이 어지러워져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후 이집은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 권좌에서 끌어내릴 모의를 했다. 그러나 이웃의 밀고로 그 사실이 드러나자, 신돈은 그를 포살하라는 명을 내림은 물론, 그의 집안까지 박살을 낼 기세로 등등했다. 멸문의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집은 벼슬을 버리고 서울인 개성을 떠나 한양의 둔촌에 은거해 있다가(이집의 호 둔촌은 은거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화가 거기까지 미칠 듯하자 아버지를 업고 다시 친구를 찾아 먼 길을 나선 것이다.
 

등에 업힌 아버지를 추스르며, 내려놓고 쉬었다 다시 업었다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추풍령을 넘었다. 영천까지 오는데 몇 달이 걸렸다. 최원도의 집은 영천에서 경주로 가는 어귀의 구룡산 아래 궁벽한 산촌에 숨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물어물어 겨우 당도했다.
 

집안이 떠들썩했다. 최원도의 생일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집은 바깥사랑채에 아버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최원도에게 그가 왔음을 알렸다. 최원도가 바로 나왔다.
 

“천곡! 날세, 둔촌일세.”
 

이집은 반가움과 안도의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최원도는 상거지 꼴을 한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왜 왔는가? 여긴 자네가 올 곳이 못되네.”
 

최원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와 아버지를 끌어내 쫒아냈다. 그리고는 냅다 사랑채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의 체취가 닿은 흔적조차 꺼리는 태도였다.
 

이집은 아연실색했다. 오직 친구를 찾는다는 일념으로 천리길을 죽을 고생을 하며 왔는데, 이런 천대를 받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백년지기이니, 무슨 까닭이 있겠지. 이렇게 느닷없이 죄인의 몸으로 들이닥쳤으니 내가 심했군”하고 그는 애써 친구를 이해하려 애쓰며 오리 밖에 떨어진 낫고개(蘿峴)에 숨었다. 밤이 왔다. 어둠 속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아버지를 다독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탄식을 했다. 문득 누가 저만치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이집은 놀라 숨을 죽였다.
 

“둔촌, 날세.”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원도였다. “아깐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이네. 오해하지 말게.”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
 

“잘 왔네. 내가 자네를 숨겨줌세.”
 

최원도는 이집 부자를 아무도 몰래 집안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낮에는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이슥한 밤이면 최원도의 방에서 두 친구는 나란히 잤다. 밥 먹는 것도 표가 안 나게 항상 한 사람의 밥을 넉넉하게 차리라 하여 나누어 먹었다. 신돈의 명으로 영천의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그날의 화재 사건으로 인해 두 부자가 이 집에 숨어있는 걸 깜쪽같이 몰랐다.

2
“참으로 이상한 일이네.”
 

부엌일을 맡아보던 몸종 제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제부턴가 주인의 식성이 달라진 게다. 식사량이 평소와 다르게 아주 많아졌다. 밥을 고봉으로 꼭꼭 눌러서 많이 담게 했다. 상이 나올 때는 밥이고 반찬이고 남는 게 거의 없었다. 뭐든지 싹싹 비워져 있었다. 주인의 평소 식사량을 잘 아는 제비로서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루는 밥상을 들여놓고 나와서는 문틈으로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인 한 사람만 있을 줄 알았는데, 잠시 뒤에 노인과 주인 또래의 한 사람이 다락에서 내려와선, 세 사람이 한 그릇의 밥을 나누어먹는 것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은 채였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다락으로 올라가고 이어서 “상을 물려라”라는 주인의 소리가 들렸다. 제비가 방에 들어가니, 주인만이 달랑 앉아있었다.
 

제비는 이 기이한 일을 최원도의 부인에게 알렸다. 부인이 그 연유를 묻자 최원도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부인만 알고 있으라며 가족과 몸종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하라고 일렀다. 부인은 제비에게 “이 일이 누설되면 우리 가족은 물론 너까지 죽는다”고 입을 봉하기를 다짐했다. 제비는 행여 자신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의 화를 당할까 염려했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영원히 제 입을 막아버렸다.

3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는 세 개의 무덤이 있다. 최원도의 어머니 묘와 이집의 아버지 이당의 묘, 그리고 제비의 묘다. 이집이 최원도의 집에 숨어있기 3년만에 아버지 이당이 벽장 안에서 세상을 떠나자, 최원도는 자신의 옷으로 염습을 하여 밤중에 모친의 산소 밑, 자기가 죽으면 묻힐 곳으로 정해둔 자리에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끊은 제비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묘역 입구에 자그마하게 제비의 무덤, 연아총(燕娥塚)을 안치했다.
 

이당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로 꼽힌다. 그러니까 그의 무덤은 광주이씨 시조묘가 된다. 묘역의 도래솔은 국내 최대로 묘를 푸른 띠로 넓게 둘러싸고 있다. 이 무덤터는 풍수상 야자형(也字形) 대길지로 꼽힌다. ‘야(也)’자의 아랫내림획 끝 부분에 위치한 이당의 묘는 글자의 모양처럼 사방을 산이 둘러싸 보호하는 형국이다. 산을 덮고 있는 도래솔의 가지들이 한결같이 이 무덤의 혈자리를 향해 뻗어있다고 보기도 한다.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 덕분인지 광주이씨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정승 5명에 대제학 2명을 배출하는 등 크게 번창해왔다. 무엇보다 이 묘역은 함께 생사를 넘나든 최원도와 이집의 금란지교와 지극한 효심이 이루어낸 자리로 기억되어 왔다.

4
광주이씨 후손인 한음 이덕형이 영천 북안의 시조묘를 찾아 성묘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1601년이었다. 도체찰사로 영남의 여러 고을을 순찰하고 있었는데, 가을에 영천에 들린 것이다.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시조묘에 도착하자, 이 지역의 유림들과 문사들이 많이 모여 환대했다. 그 중에 노계 박인로도 끼어 있었다.
 

노계의 집은 영천 도천으로 이곳에서 가까웠다. 노계는 한음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던 중 마침 그가 온다는 말에 만사 제쳐놓고 참석했다. 두 사람은 인사를 했다.
“무과에 급제한, 거제도 조라포 만호를 지낸 박인로입니다.” “아이구, 선생의 존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대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마흔 한 살의 동갑내기였다.
 

한음의 손님 대접은 조촐했다. 홍시를 접시에 담아내놓았다. 문득 한음이 노계에게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계, 저의 어머니는 임진왜란 때 돌아가셨지요. 아버지 홀로 지내시는 게 안타까워요. 재상이랍시고, 전란 후의 수습에 몰두하느라 홀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틈도 주어지지 않는군요. 선생이 시조와 가사에 탁월한 재주가 있으시니, 이 홍시를 빌어 저의 사친의 정을 표현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노계가 화답, 단숨에 네 수를 지었다. 그 중 한 수는 다음과 같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효친의 정이 절절히 우러나는군요.”
 

한음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이 시의 제작시기와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본 이야기는 김창규의 ‘노계 시 평석’을 참고했다: 필자주) 두 사람은 절실한 친구 사이가 됐다. 자연히 두 사람 간의 왕래는 각별해졌다. ‘조홍시가’를 지은 지 10년이 지난 51세 때는 노계가 경기도 광주 용진강 가에 살고 있는 한음을 방문, 용진강 사제(沙堤)의 풍광 속에서 노후를 보내는 한음의 유유자적한 삶을 그린 ‘사제곡’과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읊은 ‘누항사’를 짓기도 했다.
 

한음이 죽고 나서는 그의 아들 이여구와 이여황이 선고(先考)의 친구인 노계를 많이 챙겼다. 노계 만년의 가사 ‘상사곡’과 ‘권주가’는 이들이 선고의 ‘한음문고’를 편찬할 때 짓게 하여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우리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들이 한음과 노계의 교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니, 이들의 우정은 개인적 친분의 차원을 넘어 한국문학사의 한 사건으로 기록되어지게 되는 셈이다.
 

노계는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향리에는 그를 기리는 도천서원이 세워졌다. 뜻 있는 이들은 광주이씨 시조묘와 도천서원을 둘러보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는 한음과 노계의 정감 넘치는 금란지교를 새삼 되새긴다.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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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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