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0> 김주영의 '청송 벽절 마을의 가슴 애이는 왕버들'

  • 입력 2021-05-25 13:37  |  수정 2021-05-3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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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 14대 임금인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선과 동맹을 맺어 명나라를 침공하려던 도요또미(豊臣秀吉)의 야심이 좌절되자, 그는 1592년 4월, 15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들은 세 갈래를 나뉘어서 서울로 향했다. 그 들 중에서 고니시(小西行長)이 이끄는 1군은 조선의 전국토를 가차 없이 초토화시키며 부산,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렀다. 왜군들의 말발굽에 불타지 않는 사찰이 없었고, 민간에 대한 침탈과 횡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의 참혹한 전화 속에서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고, 조정은 우왕좌왕 나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경상도 청송과 같은 오지에서 살고 있는 헐벗은 백성들도 임진년 왜란의 아비규환에서 무사할 수 없었을 정도로 전화의 처참함은 치명적이었다.


그 전화의 와중에 청송군의 벽절 마을이란 곳에 채씨 (蔡氏) 성을 가진 과년한 처녀가 있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윈 그녀는 노쇠한 아버지 채씨를 봉양하며 가난한 살림을 겨우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댁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허리가 꼬부라져 콧등이 땅에 끌릴 정도로 병약해서 문밖출입도 임의롭지 못한 아비 채씨에게 출병하라는 영장이 날아든 것이었다. 이런 변고는 크게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병든 아비와 바깥출입이라곤 모르고 살았기에 이렇다할 견문도 없었을 뿐더러 하소연할 관아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출병 날짜는 아득바득 다가오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그 댁의 딱한 사정을 관아로 나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머슴살이하고 있는 쑥대머리 총각이 찾아와 처녀의 아비인 채씨를 뵙자고 청했다. 겨우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어인 일인가 하고 수인사를 하는 채씨에게 공손히 절을 올린 총각이 건네는 말은 전혀 예상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어르신네. 당돌하다 마시고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연세 육십을 넘겨 병고를 겪고 있는 어른께 출병 영장이란 날 벼락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분명 잘못되어도 보통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필경 관아의 배부른 아전 놈들이 서로 시시덕거리면서 탁상공론으로 어르신네의 연세나 병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부에서 출병시키라는 인원의 충수만 채우기 위해 어르신 명함에 무작정 꺾자를 휘갈겨 영장이랍시고 날려 보낸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하네. 그러나 출병 일이 바로 코앞이어서 어찌 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이라네.”
 

“지금 난데없는 왜병들이 들이닥쳐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절간조차 가차 없이 불태우고, 소중한 보물을 약탈해 간다고 합니다. 생명과 같은 양식을 빼앗아 저들의 배를 채우고, 가축을 잡고 술을 빚어 아녀자들을 겁탈하고 관아에 불 지르는 것을 예사로 저지른다 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쑥대밭에 아비규환입니다. 이런 차제에 정신 못 차린 관원들과 아전들이 서로 결탁하여 이런 못된 일들만 저지르고 있으니, 하찮은 머슴인들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보게 자네 말이 당장 귀로 듣기에는 매우 당연한 것 같으나, 지금 난리 통에 그런 말을 함부로 했다간, 어느 솔개가 채 갈지 모른다네. 말조심하게. 바른 소리를 할수록 혀를 뽑아갈 세상이라네.”
 

“제가 어르신네를 대신하여 출병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나대신 출병을 하겠다니?”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평소 마을 앞 우물길을 드나드는 따님의 단아하고 정숙한 모습을 지금껏 가슴을 졸이며 사모해왔습니다. 그러나 한낱 머슴살이로 연명하고 있는 하찮은 지체로써 감히 바라보기만 했을 뿐 터놓고 속내를 토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어르신네가 당한 억울한 일을 혈기 방장 한 제가 대신함으로써 저의 속내를 어르신네와 따님에게 전달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런 천우신조가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젊은이가 몸을 숨기고 전장 터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또한 비겁하고 몹쓸 짓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저의 작은 뜻을 흔쾌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 없네.”
 

“제가 어찌 가볍게 맘을 먹고, 찾아와 외람 된 말씀을 올리고 있겠습니까.”
 

“자네의 언사가 예사롭지 않은데. 어디서 문자를 익힌 것인가.?”
 

“오다가다 어깨너머로 언문 몇 자를 터득했을 뿐입니다.”
 

총각의 희생이 숭고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헤아린 두 부녀의 눈자위에 눈물이 맺혔다. 그 날 밤 다시 만난 처녀와 총각머슴은 들고 온 어린 버드나무 한 그루를 마을의 우물가에 심었다. 출정한 총각이 싸움터에서 개선하여 돌아오면, 물론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남보란 듯이 백년가약을 맺을 터이지만, 그 동안이라도 처자는 아침저녁 우물길을 드나들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라는 뜻이었다.
 

그 이튿날로 출정 길에 오른 총각은 왜군과 맞서 싸우는 신입(申砬)장군 휘하로 들어가 싸우고 있었다. 신입 장군은 대구를 거쳐 상주를 진군하여 파죽지세로 문경에 이르는 왜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부상을 당하거나 혹은 집으로 돌아오는 병사들에게서 총각의 소식을 듣게되면 처녀의 가슴은 떨리면서도 뿌듯했다. 그 동안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고 집에 밥 지을 물이니 마실 물이 있다 하더라도 마을의 우물가를 찾아가 심어 둔 버드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었다. 정성을 기울인 나무는 심은 나이와는 달리 깊게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나 왜군을 맞이하여 승승장구했었던 신입 장군 휘하의 장병들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그때, 최후의 결의로 배수의 진을 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신입 장군조차 전사하고 말았다는 놀라운 패전의 소식이 벽절 마을에까지 들려왔다. 장군 휘하에서 싸우던 병사들 역시 비겁하게 도망한 병사 외에는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소식도 들려 왔다. 그러나 처녀는 총각이 필경 살아올 것을 믿어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전쟁도 끝장이 났고, 그로부터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단념이 빨랐던 처자의 아비는 나이를 먹어 가는 여식의 고단한 모습을 바라보다 못해 여식 몰래 혼사를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부모 된 처지로썬 어쩌면 당연한 처사라 할 수 있었다. 집안에 매파로 보이는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결같이 마을 우물가로 가서 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채씨는 여식을 불러 앉히었다. 아비는 여식도 눈치를 채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긴 말 하지 않았다.
 

“이것은 너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다 못해 주선한 혼사다. 마을에서 효녀로 소문난 네가 이 아비가 주선한 혼사를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면, 너와 정혼하기로 언약하였던 그 총각의 일인데, 그것은 나 또한 오래두고 고심해 왔었던 일이다. 사람의 도리로 봐서도 그렇고, 언약을 봐서도 이 아비 대신 출정한 그 젊은이를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총각의 짐은 그래서 이 아비가 무덤까지 안고 가마. 그러나 너는 네가 살아가야 할 인생이 있다. 네가 오매불망 기다리는 그 사람은 전화의 티끌에 휩싸여 사라져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덧없고 허망한 일일뿐이다.”
 

타이르는 아비의 말을 처녀는 고개를 다소곳하게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아비의 말을 거스른다는 것은 지체 있는 집 안의 아녀자로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례를 닷 새 앞 둔 날 새벽, 마을 우물가에 물을 기르려 왔던 마을 사람들은 평소 알뜰하게 가꾸어왔었던 왕 버드나무 가지에 명주 수건으로 목을 맨 채씨 처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청송읍 벽절 마을 우물가에는, 천연 기념물 제19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수령 400여 년의 왕 버들이 그때 총각처럼 우연히 곁에 자란 노송과 함께 다정스럽게 서 있다. 

김주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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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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