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5> 이상국의 '칠곡 다부동 328고지엔 비가 내렸다'

  • 입력 2021-05-25 11:54  |  수정 2021-05-3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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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가득 채운 매미소리를 끊고 총성이 웁니다. 총성이 그치면 매미가 울기 시작합니다. 한 병사가 간밤의 백병전에서 숨진 동료의 흙투성이 낡은 군화를 벗겨주었습니다. 쓰러진 M1소총을 세워 철모를 씌웠습니다. 주머니에서 화염에 그을린 영어사전을 꺼냈습니다. 책의 뒷장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아내... 나는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8월13일 328고지에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전날 낮에 이 고지를 점령한 뒤 적었던 글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글씨를 읽다가 산 사람의 눈물이 사전 위에 떨어져 번졌습니다.

가수 현인이 불렀던 노래 ‘전우야 잘 자라’(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는 1950년 8월에 대구 코앞까지 내몰렸던 망국의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북진하는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이 노래는 이듬해인 1951년에 나왔는데, 전쟁통에 울려퍼지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가사는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피 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에 관한 생생한 증언입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말은 바로 치열했던 경북 칠곡군의 다부동(多富洞)전투를 그린 한 장면입니다. 승승장구하는 전쟁이었다면 ‘전우의 시체(요즘은, 사람의 주검은 ‘시신(屍身)’이라고 표현합니다)’가 아니라 ‘적의 시체’를 넘고 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군의 주검을, 한번도 아니라 여러번, 그것도 비켜가지도 않고 그대로 밟고 넘어야 하는 상황이었을까요. 이 땅엔 이 뜻을 아는 세대와 전혀 모르는 세대가 지금 함께 살고 있습니다. 60년이나 지난 얘기이거든요. 저 처절한 시간을 얘기해줄 사람은 점점 사라져갑니다.

8월13일 새벽 제1대대는 다부동전선 328고지에 이미 적이 들어온지도 모른채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첨병소대를 지휘하던 제3중대 제1소대장(이신국 중위)은 선두에서 남등고개를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야, 몇 연대냐?” 300m쯤 앞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 이중위는 눈 앞이 아찔한 느낌이었습니다. 등에는 식은 땀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잠깐의 정적. 그런데 평안남도 개천 출신인 그는, 질문하는 말투가 평안도 사투리인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래, 신의주 독립연대다. 왜 그러디? 인차 올라갈게.” 그의 말에 위에서는 기다리는 듯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마침 구름이 끼어 새벽4시인데도 10여m 앞이 안보일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철모 벗어.” 이중위는 소대원들에게 속삭입니다. 연락병은 뒤에 따라오는 주력부대에 일단 정지하라는 명령을 보냈습니다. 7부 능선에 이르자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20m까지 다가가 1소대는 총을 쏘면서 덮쳐 들어갔습니다. 약 1개 소대가 전멸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기관총에 사수와 부사수 2명씩 나란히 죽어있었습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예 칡덩굴로 발을 묶어 놓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 정규군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징발한 의용군이었습니다. 그들의 입가에서는 술냄새가 감돌았습니다. 술을 먹여 겁 없이 싸우도록 한 것입니다. 어이없는 남남(南南)의 살육전이었지요.

13일 밤. 328고지에는 비가 부슬거렸습니다. 30여년만의 불볕더위라는 37도 폭염에 지쳤는지라 병사들에겐 빗방울이 달콤했습니다. 나뭇잎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 뿐, 칠흑같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강 건너의 적들은 이날따라 포탄 한발 쏘지 않고 잠잠했습니다. 자정이 지난 시각, 천근만근의 무게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리느라 병사들이 자신과의 싸움을 벌일 무렵, 50m쯤 앞에서 녹색 신호탄이 허공으로 치솟아 터집니다. 이쪽에서 깜짝 놀라는 사이, 적들이 와르르 제1대대 진지로 덤벼들었습니다. 인민군들은 공격을 할 때 “만세”라는 구호를 외칩니다. 이곳에서 듣는 만세소리는 음산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장병들은 엉겁결에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부대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캄캄하고 질척거리는 산 속,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잘 안되는 상황에서 서로 쏘고 찌르고 후려칩니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불꽃이 튕기고 비명소리가 터져나옵니다. 미끄러지면서 몸끼리 뒤엉켜 육탄전을 벌입니다. 백병전이 벌어지면 피아(彼我)를 확인하기 위해 총을 만져보거나 어깨 쪽을 서로 더듬어봅니다. 인민군 정규보병은 위장용 그물망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으니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또 머리를 만져보기도 합니다. 우리 군은 대개 머리가 길었으나 저쪽은 대부분 짧은 머리였기 때문입니다. 서로 확인을 한 다음 소스라치듯 떨어집니다. 한쪽에서 칼을 내리꽂습니다. 도망치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집니다. 이번엔 다른 목소리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암호! 암호 뭐야?” 병사는 그를 떨치고 다시 뛰어내려갑니다. 이날 전투로 제1대대는 고지 뒤쪽으로 후퇴합니다.

이튿날 아침 부대가 다시 진격하여 고지를 되찾았을 때 서울 출신의 한 학도병이 시신 앞에서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피난 내려 오느라 같이 내려오지 못했던 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던 그는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의용군으로 참전했습니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형과 동생은 서로를 찌르고 쏘았던 것이지요.

이런 전투들로 12일 사이에 15번 정상을 빼앗았다 빼앗겼다를 거듭하였습니다. 이 고지에서만 3000여명의 주검이 널려 있었습니다. 더 끔찍한 일은 바위산인지라 호를 파기 어려웠던 병사들은 시신들을 쌓아올려 방호막으로 쓴 것입니다. 시신에 기대앉아 그들은 산 아래 마을에서 날라준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삼켰습니다. 요기를 하고 있을 때 적의 포격이 시작됐습니다. 호 앞에 포개졌던 주검더미가 박살이 나서 흩어집니다. 포탄이 터지면 지긋지긋한 파리떼가 잠시 사라져서 그게 후련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이번엔 모기떼가 들러붙었습니다. 헤어진 전투복 구멍구멍마다 빨대를 꽂듯 내려앉았으나 그것을 쫓는 일도 귀찮았습니다.

제3대대 수색대의 사병 박모 하사가 소총을 오발하여 전우 한 명이 숨졌습니다. 수색대장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군기 해이를 물어 즉결처분하겠다.” 순간 대원들은 모두 얼굴이 굳어지고 숙연해졌지요. 달빛이 밝은 밤이었습니다. 수색대장은 박하사를 세워놓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부모님을 만나거든 내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는 대구상업학교 6학년 재학중에 자원입대한 학도병이었습니다. 수색대장은 박하사를 구석진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10보 앞에서 총구를 높이고 4발을 속사로 쐈습니다. 사병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선임하사관이 현장에 뛰어가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잠시 뒤 수색대장은 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명사수로 이름난 내가 10보 앞에서 쏘았는데도 총탄이 맞지 않았던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니 그를 더 이상 문책 않고 충성을 다할 기회를 줄 것이다.”

제3중대 제1소대 향도 정재중 일등중사는 공동묘지 모퉁이의 진지로 갔다가 화기분대장 박노식 이등중사가 호 속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가가 “박중사”하고 어깨에 손을 댔습니다. 그의 몸은 싸늘했습니다. 그는 기관총 손잡이를 붙잡고 눈을 부릅뜬 채 적진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 적의 기습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뛰어나가 기관총을 쏘던 용감한 병사였지요. 정중사는 그의 두 눈을 감겨주었습니다. 이 죽음들이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곳에서 그토록 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었고 전세는 역전되었으니까요.

그해 8월 13일 이 전투에서 남편(정모씨)을 잃고 60년을 ‘미망인’으로 살아온 여인이 있습니다. 결혼한지 한달 만에 입대한 신랑은 두 달 뒤에 전사통지서 한 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는지라 어린 며느리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살면서 시할머니, 시부모를 모셨습니다. 막내 시누이의 둘째아들인 이모씨(50세)는 유난히 외삼촌을 많이 닮았다 합니다. 또 정하사가 전사한 날과 이씨가 태어난 날이 우연히 같은 8월13일인지라, 외숙모는 이 생질(甥姪)을 전쟁에 주어버린 남편 대신 얻은, '자식'처럼 아껴왔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장롱 깊숙한 곳에서 불에 그을린 영어사전을 꺼냈습니다. 뒷장을 넘겨 외삼촌의 마지막 글씨를 이씨에게 보여줬습니다. 외숙모는 이미 얼룩진 그 위에 다시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은 건, 그날의 군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닐지요. 대한민국은 이 328고지를 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상국 <스토리텔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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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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