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4> 우광훈의 '연못 속에 당신이 있어요'

  • 입력 2021-05-25 14:17  |  수정 2021-05-31 13:40
- 최씨담(崔氏潭), ‘나의 남자, 당신의 여자’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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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한 쌍이 연못 위를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어요. 흙내음 잔뜩 머금은 장맛비가 한바탕 대지를 적신 뒤라, 수면 위에 드리워진 연잎들은 투명에 가까운 녹색을 띄고 있었죠. 그 위로 탐스런 벚꽃이 보이네요. 아, 저 순결한 자태. 하얀 꽃잎 속 연분홍은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지요.

 

달포 전이었어요.
 

마을 연못가로 절 데려오신 낭군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우리의 혼약을 위해 나 술을 끊으리다. 아니, 이제부터라도 책을 제대로 읽으리다.”
 

따스한 눈길만큼이나 깊고 낮은 목소리. 아, 전 그 언약이 공허해도 좋을 듯싶었어요.
 

그 날, 우린 연못가를 두 바퀴나 돌았었죠. 마을사람들의 눈길이 두려웠던 전, 낭군의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심스레 뒤를 따라야만 했어요. 낭군 역시 흠, 흠, 거리시며 간간히 헛기침만 내뱉으시더군요.
 

손을 잡고 싶었냐고요? 양반이란 원래 밤이 되어야 뜨거워지는 법. 그렇다고 엉뚱한 공상은 하지 마세요.
 

연당 앞 능수버들 앞에 다다랐을 때쯤, 낭군이 걸음을 멈추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혼인 후 처가에서 한 달 정도 쉬다 옵시다. 장인 장모님께 효도도 하고, 그곳 벗들이랑 긴히 나눌 이야기도 있고. 어떠오?”
 

“아버님께 허락은 받았사옵니까?”
 

“물론이오. 어머님도 쾌히 승낙하시었소.”
 

순간, 울컥 눈물이 치밀 뻔 했습니다. 전 끓어오르는 감정을 달래며 이렇게 말했지요.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래요. 허허. 오늘 따라 하늘이 참 청명하오. 마치 낭자의 눈동자 같구료.”
 

낭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시더군요. 그제야, 홍수처럼 밀려드는 연못의 풍경.
그날따라 태양은 더없이 강렬하고, 미풍조차 찾아볼 수 없어 낭군과 제 모습이 마치 명경(明鏡)처럼 물 속에 투영되어 있더군요. 물에 어린 제 사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전 손을 살짝 들어올려 그의 그림자를 조심스레 어루만졌지요. 그의 볼, 어깨, 가슴, 허리……
 

그때, 갑자기 남동풍이 불어왔어요. 그림자가 심하게 일렁이더니 우리의 모습은 거친 물결 속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죠. 낭군의 모습도, 제 모습도, 이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아, 얄미운 남동풍.
 

전 고개를 들어 연못 맞은편 대숲을 바라보았어요. 대나무들은 ‘쉬이쉬이~’하고 기이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죠.
 

“바람이 심하오. 고뿔이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네.”
 

전 그 날을 잊지 못해요. 그 연못에서의 오후는 화양연화(花樣年華), 제 아름다움의 전부였으니까요.

가거라. 조만간 우리 마을에도 왜놈들이 들이닥칠 테니 어서 길을 떠나거라.
 

어머니께서는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우리 걱정일랑 말고 어서 구성으로 떠나거라. 뼈를 묻더라도 시집에서 묻어야지. 석이야 뭐하느냐! 어서 봇짐을 메지 않고!

혼인 닷새 후, 낭군은 급한 일이 생기시어 본가인 구성으로 떠나셨죠. 그런데 며칠 뒤, 왜군이 난(亂)을 일으켰다는 소식과 함께 대구(大邱)마저 함락되어다는 전갈이 마을관리에게 전해졌어요. 마을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상인들을 따라 하나 둘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죠.
 

“큰 마님, 아니 되옵니다. 이런 난리에 아래로 내려간다는 건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것. 나리께서도 벌써 피난길에 오르셨을 테니 마님과 저도 큰 마님과 함께 하게 해 주십시오.”

석이가 어머님께 고개 숙여 간곡히 아뢰었죠. 하지만 어머님은 막무가내였어요.
 

“시집간 여자는 출가외인인 법, 죽더라도 시집에서 죽어야 하느니라. 얼른 짐을 챙겨 떠나거라!”
 

어머님의 불같은 호령에 석이 역시 어쩔 수 없었지요. 제 손이 엄동설한 계수(溪水)처럼 시리다며 사시사철 어루만져주시던 아버님도 이번엔 아무런 말씀도 않으시더군요.
 

양천에서 구성까지는 과곡을 지나 삼십 리 길이었죠. 과곡 언덕배기를 지날 때쯤, 우린 목도 축일 겸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지요.
 

“아씨, 마을 사람들이 이미 피난을 떠났으면 어떡하죠?”
 

석이가 저에게 물병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전 두렵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잠시 뒤면 제 낭군을 만날 수 있다,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했죠.
 

그렇게 상좌원(上佐院) 옆 감천(甘川)이 눈앞에 펼쳐질 때쯤이었어요. 갑자기 후덥지근한 바람이 제 볼을 스치더니, 문득 낯선 사내의 체취가 느껴졌어요. 전 걸음을 멈춘 다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죠. 잡풀이 무성한 소나무 숲 뒤로 검은 그림자가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보였어요.
 

“거기 뉘시오?”
 

석이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어요.
 

그러자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이마를 훤히 드러낸 채 머리를 위로 말아 올린 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왜군의 모습과 똑같았어요. 왜군들의 얼굴은 선했으나, 들고 있는 칼날엔 핏자국이 선연하더군요. 왜군들은 굴참나무가지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우리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어요.
 

“예쁘구나. 참으로 예쁘구나!”
 

남정네의 욕정이란 끝이 없어, 늙어 죽을 때까지도 여자의 몸을 그리워한다더군요.
 

“마님 뛰어요! 저 놈들은 짐승이랍니다.”
 

순간, 석이가 외쳤어요. 그 소리에 전 얼른 뒤돌아서 선대의 산소가 있는 능지산 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죠. 하지만 왜군들을 따돌리기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어요. 석이가 안타까운 듯 뒤처진 절 바라보며 소리치더군요.
 

“아씨, 장의를 벗어 저에게 주시어요!”
 

“왜 그러느냐?”
 

“제가 놈들을 따돌려 보겠사옵니다.”
 

“아니다, 석아. 난 어렵겠다. 너라도 살려야겠다.”
 

전 방향을 틀어 연당(蓮堂)이 보이는 쪽을 향해 곧장 내달렸죠.
 

다시 등 뒤에서 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니 되옵니다. 그곳으로 가면 죽음뿐이어요. 아씨, 제발 장의를 벗어 저에게 주시어요!”
 

하지만 전 못들은 척 계속 달음질쳤지요. 왜군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절 향해 걸음을 돌리더군요.
 

“섰거라. 게 섰거라.”
 

연당 앞 능수버들이 가까워질 때쯤, 거울처럼 투명한 연못이 보이더군요. 그러자 문득, 내 낭군의 얼굴이, 내 낭군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어요. 저곳에서 당신은 저에게 이렇게 속삭였죠. 오늘 따라 하늘이 참 청명하오. 마치 낭자의 눈동자 같구료…… 아, 그건 사랑의 밀어(密語)였나요?
 

연못 수면 위로 당신의 모습이 보이는 군요. 참으로 의연하신 당신.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시는 군요. 그래요. 당신은 나의 남자, 전 당신의 여자. 연못 속에 당신이 있어요. 당신 속에 연못이 있어요.

낭군, 제가 달려갑니다. 당신의 여자가 달려갑니다.

아, 이제야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 보지요. 고개 돌려 절 바라보시는 당신. 그래요, 낭군.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을 겁니다. 부끄러워하거나 눈치 보지도 않을 겁니다. 당신의 사랑이 달려갑니다. 이제껏 눈길 한 번 제대로 맞추지 못한 이 못난 년이 당신을 향해 달려갑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따스한 품속으로, 당신의 그윽한 눈길 속으로.

우광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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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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