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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0> 고소산성
김천 문무리∼상주 이화리 고갯길은삼한시대 감문국-사벌국 국경 추정교통요충지로 감시·대피에 최적지험한 계곡 따라 오른 백운산 중턱엔골짜기 형태 살려 축조된 돌 성벽이…부채꼴 모양으로 敵 감시·공격 유리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산성(山城)을 국가방어의 거점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천시 개령·감문면 일원의 속문·고소·감문 산성은 감문국의 대표적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감문국 북쪽에 위치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 산성에서는 감문국의 거의 모든 영역을 조망할 수 있어 군사적 활용 가치가 높다. 학계는 해당 산성을 삼국시대나 그 이후인 6세기 전후의 것으로 간주한다. 소국의 인력으로 산성축조와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반면 향토사학계는 앞서 언급된 산성들이 감문국의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개령평야의 수확물을 노리는 부족이나 세력확장을 노리는 외부세력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했다는 주장이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0편에서는 김천시 감문면의 대표적 산성유적인 고소산성을 탐방했다. 고소산성 인근의 지석묘(고인돌) 유적과 함께 김천의 또다른 소국으로 알려진 문무국(文武國)의 흔적도 살폈다. # 옛 산성과 소국의 흔적을 더듬다고소산성은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 일원에 위치해 있다. 백운산 자락 능선, 해발 330m가량의 비교적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백운산 정상부(해발 618m)의 속문산성보다는 낮은 곳에 있지만, 감문·어모면 일대를 관찰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또한 감천의 지류인 감문천과 남쪽에 위치한 감문산성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전략적 거점이다. 고소산성은 속문산성과 상호 보완관계였다. 속문산성이 위치한 백운산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 고소산성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속문산성에서는 고소산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무성한 풀숲에 가려 볼 수 없지만 산성이 축조됐을 당시에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학계 또한 고소산성을 인근 백운산에 위치한 속문산성의 보조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5년 김천시와 경북대가 추진한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 지표조사’에 따르면 산성에서 출토된 기와의 연대를 확인한 결과 두 산성의 축조시기는 6세기 전후다. 또한 고소산성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백운산에 위치해, 주변 산성을 관할하는 본부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적에 패한 감문국의 군대가 백운산 능선을 따라 이동한다면 손쉽게 속문산성으로 후퇴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소산성이 또다른 소국의 영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김천에서는 고소산성 주변이 문무국의 영역이었다는 구전이 전해내려오기 때문이다. 감문국보다 더 작은 소국이 감문면 문무리 일원에 있었다는 것이다.실제로 김천시 감문면은 김천에서 가장 많은 지석묘가 산재해 있어 특정 세력이 존재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문무국이 존재했다는 고소산성 인근에도 수많은 지석묘가 있다. 산 전체에 옛 사람들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특히 고소산성 입구에서는 눈에 확연히 띌 정도의 큰 고인돌을 볼 수 있다. 커다란 바위를 옮겨 고인돌을 만들었을 정도로 큰 세력이 문무리 주변에 살았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한편 문무국의 중심 도읍지는 여산(余山)으로 전해진다. 여모·여무·여산골로 불렸고 현재는 상여·하여 마을로 나뉘어 있다. 현재 김천에는 문무국 외에도 어모·배산국 등이 존재했다는 구전이 전해내려온다. 안타깝게도 옛 문헌에는 문무국 등의 김천지역 소국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반면, 구전이지만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 향토사학계 의견이다.# 고소산성을 가다 고소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매우 험하다. 고소산성이 위치한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산길을 찾는 주민이 급감하면서 산성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특히 여름철에는 산성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다.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이 산성을 짙은 녹음 아래 숨겼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이 아니면 여간해서 산성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문무리 서북편의 산 능선을 따라 산성을 찾아나섰지만, 애초 우려대로 산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곳곳에 돌을 쌓아 만든 축대를 볼 수 있었지만, 성벽의 흔적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작고 너무 초라했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었고, 결국 산성 찾기를 포기한 채 하산했다. 산을 내려오자마자 인근 지리에 밝은 문무리 주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을회관에서 터줏대감 노인을 수소문했지만, 정작 산성에 대해 잘 아는 이는 드물었다. 다행히 산성의 내력을 아는 한 주민의 도움을 얻어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산성 아래 지석묘 유적에서 산을 오르면 산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었다. 몇몇 주민 또한 산성의 존재해 대해 알고 있었다. 문무리의 한 주민은 “돌 모양이 모두 다른데 어찌나 촘촘히 박아놨는지, 성이 매우 튼튼하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과의 만남 후 다시 산을 올랐다. 사람의 왕래가 없어서인지 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이번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가파른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자 곳곳에서 돌을 쌓아 만든 석축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로 인해 무너진 산성의 돌들을 후대의 주민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석축 위에는 화전민이 집을 짓고 살았을 법한 집터도 남아 있다.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능선 부근에 위치한 고소산성의 동편 성벽에 도착할 수 있다. 성벽의 가운데는 물의 흐름 때문인지 무너져 있다. 성벽의 위용은 여전하다. 일부 성벽의 높이는 여전히 5m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형태도 온전하다. 부채꼴 모양으로 계곡을 둘러싼 성벽의 형태는 적에 대한 감시는 물론 공격에도 유리해 보인다.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에 따르면 고소산성의 남아있는 성벽 대부분은 돌로 만들어졌다. 토성인 감문산성과 토성·석성이 혼재된 속문산성과는 달리 대부분 돌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골짜기 형태를 그대로 살려 축조한 점도 독특하다. 물론 남쪽 성벽의 경우 자연경사면의 흙을 파내 조성해 돌로 만든 동편 성벽과는 구별된다. 고소산성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소산성은 교통로에 대한 감시기능과 유사시 군사와 백성이 대피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산 속에 방치돼 있지만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에서 상주시 공성면 이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해 있다. 삼한시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감문국과 사벌국의 국경인 셈이다. 한편 오랜 세월 탓에 산성유적 상당수가 훼손됐지만 전문가들은 산성의 복원에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최근 정부와 지자체의 지역 관광콘텐츠 개발 붐으로 자칫 잘못된 산성유적 복원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남지역 산성을 연구한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무리하게 산성을 정비·복원하는 것은 반대”라면서 “원형을 간직하는 복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계명사학 제23집’‘국역 김천역사지리서’‘디지털김천문화대전’‘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김천시사’‘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기획 : 김천시김천시 감문면 문무리의 백운산 줄기에는 감문국 산성으로 알려진 고소산성이 위치해 있다. 오랜 세월 방치돼 상당부분이 무너졌지만 여전히 당당한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김천시 감문면은 김천에서 가장 많은 지석묘(고인돌)가 산재해 있어 특정 세력이 존재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고소산성 입구에 위치한 지석묘의 모습.
2015.07.08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9> 감문국의 山城-속문산성<하>
◇ 스토리 브리핑산성(山城)은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군사 거점으로 활용됐다.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 정상부의 속문산성(俗門山城) 또한 마찬가지다. 속문산성 곳곳에는 방어목적의 성벽과 함께 군대와 백성들이 머물렀을 법한 공간이 남아있다. 학계는 속문산성을 삼국시대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김천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구전은 다르다. 구전에 따르면 속문산성은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 최후의 방어 거점이다. 감문국은 1천700여년 전(231년)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김천 역사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9편에서는 속문산성의 성곽과 관련 유적을 직접 살폈다. 속문산성이 신라대에 축조됐다는 학계 의견은 8편에서 다루었기에 따로 논하지 않는다. # 사방이 탁 트인 전략적 요새1950년 여름,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북한군은 칠곡군 다부동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였다. 주변 지형 보다 높은 장소를 점령해 전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고지에서는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쉽고, 공격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옛 군대의 전투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고대 중국의 병법서 손자병법에는 지형과 관련한 전술법이 기록돼 있다. ‘전망이 탁 트인 고지를 점령하는 것(視生處高)’과 ‘적이 고지에 있을 때는 올라가지 말라(戰隆無登)’는 내용이 그것이다. 즉 고지를 선점하는 측이 전투에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특히 고지에다 성(城)을 쌓고 농성(籠城)까지 한다면 난공불락일 수밖에 없다. 역사에서도 산성의 중요성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당 전쟁이 대표적 사례다. 특히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고구려 산성인 안시성(安市城)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세민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요하(遼河) 유역의 산성인 안시성을 넘지 못해 전쟁에서 패했다. 적의 산성을 후방에 남겨둔 당나라 군대는 편히 전투를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황제 이세민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속문산성과 같은 옛 산성 역시 이러한 전술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속문산성이 위치한 백운산은 618m에 불과하지만 주변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다. 주변 지형과 군사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인근 감문산성이 320m 고지에 있는 것과 비교하면 더할나위 없는 요새다. 인근의 고소산성 또한 해발 330m의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속문산성을 삼한시대(三韓時代) 감문국의 것이라 간주했을 때, 속문산성이 지닌 전략적 입지는 더 커진다. 백운산 일대는 감문국의 중심인 개령면 일원에서 서북 방향에 위치해 있다. 백운산은 당시 영남 서부의 맹주인 사벌국(현 상주시)과 경계를 이뤄, 신라군도 함부로 진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군대 배치는 제한적이었고 감문국의 전략적 이점은 컸을 것이다. 향토사학계는 속문산성을 감문국 최후의 결사항전이 벌어진 장소로 보고 있다. 감문국 백성과 군사들 또한 최후까지 결사항전할 장소로 속문산성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감문면 송북리 백운산 오르는 길감천변 개령들과 금오산 한눈에정상의 능선 감싸듯 이어진 산성탁 트인 시야에 묘한 긴장감이…정상부 홈 팬 바위들과 우물 흔적군대·백성 함께한 결사항전 방증 급경사면 십분활용한 바위 성벽옛 위용 보여주는 보존상태 감탄 # 백운산을 오르다 속문산성 입구에 도착하기 전 국도변에서 ‘감문면’이라는 지명이 적힌 교통표지판을 볼 수 있다.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은 그 운명을 다 했지만 국명(國名)은 감문면이라는 지명 속에 녹아 있다. 속문산성 일대가 감문국 최후의 격전지라는 향토사학계의 주장에 언뜻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다. 김천시 감문면 송북리에 도착하면 백운산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산을 오르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2000년 이후 매년 백운산 정상부에서 해맞이 행사가 열리면서 등산로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등산로 중간에는 탐방객이 쉴 수 있는 벤치가 설치돼 있다. 가파른 오르막에는 나무 계단이 놓여 있어 지친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산 중턱에 오르면 서서히 주변 지형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김천의 젖줄 감천변의 개령들이 한 눈에 보이고,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면 금오산이 손에 잡힐듯 우뚝 솟아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 대략 40분쯤 오르면 백운산 정상부에 도착할 수 있다. 정상부에는 산불감시 초소와 100여명의 인원이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는 목조 데크가 조성돼 있다. 산불감시 초소는 주변을 감시하기 위한 산성의 망대(望臺)가 있던 곳이다. 백운산 정상부의 탁 트인 풍경은 속문산성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만약 속문산성에 주둔하던 군사가 산 정상에 서 있었다면, 산 아래 병력의 움직임을 일일이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산지가 없는 동남쪽의 풍경이 시원하다.백운산 정상부에는 평평한 터가 남아 있다. 다소 좁아보였지만 1천㎡ 가량의 면적으로 간단한 군사훈련은 가능해 보였다. 정상부 능선에는 수많은 바위가 흩어져 있는데, 범상치 않은 모양의 돌이 눈에 들어온다. 직경 30㎝ 가량의 홈이 파여 있는 둥근 바위가 눈길을 끈다. 곡식을 빻는 절구였거나 건물의 주춧돌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구멍난 바위 외에도 산 정상부에는 사람이 가공한 듯한 바위가 무더기로 쌓여 있다. 돌의 크기나 모양새로 보아 석성을 쌓고 보수하는데 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시에는 적을 공격하는 무기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정상부 동북쪽에는 우물 흔적이 남아있다. 김천 백운산악회 조규철씨는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며 우물 터를 가리켰지만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탓에 물은 발견할 수 없었다. # 옛 위용을 간직한 속문산성속문산성은 백운산 정상의 능선을 감싸듯이 이어져 있다. 감문국 멸망의 역사를 증언하듯 여전히 긴장감이 흐른다. 속문산성의 성벽은 지형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세워졌다. 산지의 급경사면을 활용해 성을 쌓는 수고를 줄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삼국시대 산성의 축조방식과 같이 각 지형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성을 쌓아올렸다.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에서는 속문산성의 축조방식을 ‘편축법(片築法)’으로 소개하고 있다. 편축법은 ‘ㄴ’자 모양으로 토양을 자른 후 외곽의 경사면을 따라 한쪽 면에만 돌을 쌓는 축성법이다. 산 정상부의 능선에 위치한 산성에 적용하기에 좋다고 한다. 속문산성은 동서(東西)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이 있는 속문산성 남동쪽은 천연의 바위를 그대로 이용했다. 반면 완만한 오르막인 남서쪽의 경우 3~5m 높이의 석성을 쌓았다. 산 정상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가면 헬기장이 있는데, 그 아래에 30~40m 길이의 성벽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1천여년 전인 신라시대나,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온전한 보존상태를 자랑한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속문산성의 석성 대부분은 완전하지 않다. 백운산 능선을 따라 석축이 이어져 있지만 상당부분이 무너져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 위용을 보여주려는 듯 전체적인 석성의 형태는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석성(石城)의 모습을 바탕으로 과거 속문산성이 지녔던 군사적 중요성을 상상할 수 있었다. 글·사진=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도움말=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계명사학 제23집’‘국역 김천역사지리서’‘디지털김천문화대전’‘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김천시사’‘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기획 : 김천시속문산성 남서편에 위치한 성벽의 모습. 1천년이 넘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거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김천 백운산악회 조규철씨가 백운산 정상부 속문산성에서 홈이 파인 바위를 가리키고 있다. 곡식을 빻는 절구였거나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2015.07.01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8> 감문국의 山城-속문산성<상>
해발 600여m에 흙·돌로 쌓은 산성 향토사학계 “삼한때” 학계 “삼국때” 감문국 멸망 전후로 축조시기 異見 “감문국 4천 인구로는 축성 불가능” 기와 파편 등 유물 ‘신라의 城’무게 향토사학계 “勝者역사에 가려” 반론 ◆ 스토리 브리핑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의 주요유적 중 하나는 산성(山城)이다. 김천시 개령·감문면 일원에 위치한 속문(俗門)·고소(姑蘇)·감문(甘文)산성이 감문국의 대표적인 산성 유적지다. 김천지역 향토사학계는 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이 존재했던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추정한다. 대부분 군사방어용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평야로 외부세력의 침입이 있을 때, 주변 산성을 거점으로 대항했다는 것이다.반면 학계는 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 멸망 이후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가 축조했거나 그 후대에 지어졌다고 추측한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사용되다 현재의 형태로 남아있다고 주장하고 있다.축조시기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이들 산성이 감문국 역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1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기와 파편 등 삼국시대 유물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성벽과 그 부속건물의 흔적은 옛 시대상을 엿보는 자료로 활용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8편은 감문국의 유적으로 알려진 산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속문산성에 관한 내용이다. # 감문국 멸망의 역사와 함께한 산성속문산성은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白雲山, 해발 618.5m)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백운산은 소나무가 무성해 ‘송문(松門)’이라 불렸으며, ‘속문산(俗門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 산성의 정확한 축조시기를 알 수 없다’면서도, 속문산성을 감문국의 주요 유적으로 보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의 존재는 신라와 같은 승자의 역사에 의해 가려졌다. 지방을 근거로 존립했던 소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 흔적을 찾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문산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문헌에는 “석축 주위 2천455척, 고 7척, 내유 2천2지 유군창(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이라며 속문산성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산성의 규모와 샘, 연못의 수까지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속문산성의 현재 모습도 문헌의 기록과 거의 흡사하다. 속문산성은 백운산 정상부를 기준으로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내려가는 계곡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상당 부분이 무너져내렸지만 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토석 혼축성’이 이어져 있으며, 옛 문헌에 기록된 샘도 발견할 수 있다.속문산성이 위치한 백운산의 지명은 감문국 멸망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천지역에는 감문국의 최후와 관련된 구전이 전해지는데, 그 이야기의 배경에 백운산과 속문산성이 있다.구전에 따르면 서기 231년, 신라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감문국 백성과 군사들은 속문산성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른다. 감문국으로 쳐들어온 신라군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영남지역 소국을 연이어 정복하고, 잦은 전투를 경험한 신라의 전투력은 여타 읍락국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라군의 수장은 신라 이사금의 동생이자 정복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석우로 장군이었다.이미 예견된 전쟁이었지만, 감문국 백성들 역시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 비록 소국의 백성이었지만 죽을 각오로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했다. ‘감문국 군사 80여 명이 백운산 속문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묘사한 구전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최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감문국은 망국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백운산’은 이때부터 불려진 지명이라고 한다. ‘속문산성에서 죽은 감문국 백성들의 영혼이 흰 구름이 되어 산 주변을 떠돌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감문국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구전일 뿐이다. 삼국사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기록이 없다.김천시민들은 감문국 멸망의 역사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평소 백운산을 즐겨 오른다는 김천 백운산악회 총무 조규철씨(64)는 “어린 시절 신라군이 (백운산에서) 감문국 군사를 모조리 다 죽였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다. 감문국이 신라에 병합되지 않고, 하나의 나라로 이어지고 번성했다면 김천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 신라 방어의 최전선김천 향토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속문산성이 감문국 멸망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주장한다.영남지역 산성을 연구한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속문산성의 축조시기는 5세기 말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6~10세기 신라 기와가 (속문산성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거점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특히 신라와 백제의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김천지역 산성들이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조 연구사는 “김천 지역을 둘러싼 양국(신라·백제) 간 갈등은 이른 시기부터 있었기에 신라의 입장에서는 군사목적용 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역사는 학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실제로 신라와 백제는 6세기 들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진흥왕 15년(554)에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의 목숨을 빼앗고 영남 서북지역을 힘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진지왕 2년(577)에는 백제가 신라 서쪽의 영토를 침략하는 등 백제의 저항도 매우 거셌다. 신라 입장에서 김천지역 산성은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김천 북쪽에는 신라의 제2도성으로 불리던 사벌주(상주)가 있었고, 추풍령은 백제·고구려·가야 세력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가야를 견제하기 위해 김천지역이 꼭 필요했고, 부속 산성들은 세력 확장의 최전선이었다. 이 때문에 김천지역 산성은 효율적인 방어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고구려·백제·가야가 연합해 신라로 진격한다면 김천지역은 서라벌(경주)로 향하는 가장 짧은 진격로였기 때문이다. 김천지역 산성만 지켜낸다면 능히 서라벌을 지킬 수 있었다. # 조선시대까지 활용된 산성김천지역 산성들이 ‘신라의 성’이라는 주장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전문가들은 “감문국과 같은 작은 나라의 규모로는 성을 쌓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중략)…’이라는 동사(東史)의 기록을 볼 때 감문국의 인구는 기껏해야 4천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축성에는 대규모 인원 동원이 필요한데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는 그 소요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신라 정도의 규모를 갖춰야 산성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역시 ‘신라의 성’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속문산성에서 발견된 기와 대다수는 삼국시대 신라의 것으로, 돌로 된 성곽의 축조방식 또한 신라의 양식으로 알려졌다. 특히 전통시대의 기와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관청이나 사찰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널리 사용됐다. 한편, 김천을 비롯한 전국의 산성들은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한반도 대부분의 산성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다시 사용되었는데, 속문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2005년 김천시와 경북대박물관이 발행한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에 따르면 속문산성의 주요 역할은 평상시에는 교통의 거점으로 백성을 감시 관리하는 것이었다. 전시에는 인근 주민의 대피지 내지 방어 거점의 역할을 담당했다.글·사진=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도움말=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기획 : 김천시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낙동강 방면의 모습. 속문산성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백운산에 위치해 사방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김천 백운산악회 조규철씨가 속문산성 주변에 흩어진 기와 파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5.06.24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7> 문학 작품에 담긴 1700년 前 시간
◇ 스토리 브리핑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후대의 문학에 큰 영감을 주었다. 옛 소국은 1천700여 년 전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시(詩)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조선의 선비들은 감문국에 대한 시를 다수 남겼다. 조선 중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한 시의 소재로 감문국을 선택했다. 풍기군수 재직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 1495~1554)도 감문국과 관련한 시를 남겼다. 김천 출신의 대문호인 적암(適庵) 조신(曺伸, 1454~?) 또한 자신의 시에서 감문국을 언급, 지역의 자부심을 드높이려 했다. 김천을 상징하는 ‘금릉(金陵)’의 주인은 온데간데없지만, 그 역사는 옛 문인들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7편은 감문국과 관련한 문학작품에 관한 이야기다. # 실학자 유득공과 감문국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박지원·박제가와 같은 북학파(北學派)의 일원이다. 포천현감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청나라 등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흥시키려 했다.유득공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뿌리를 깊이 있게 연구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득공의 저서 ‘발해고(渤海考)’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渤海)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는 조선 곳곳을 유람하며 역사지리에 눈뜨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옛 도읍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인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때의 기행을 토대로 지은 작품이다. 단군 때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연구하며 옛 도읍의 변천과 역사를 시문으로 엮은 한 편의 서사다.총 43수로 구성된 ‘이십일도회고시’는 ‘단군의 왕검성’부터 ‘신라의 경주’ ‘대가야의 고령’ ‘고려의 송도’에 이르기까지 21개 도읍의 역사를 칠언절구의 한시로 담아냈다. ‘감문국의 개령’도 한 편의 시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감문국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장부인은 간 지 오래인데 들꽃은 향기롭다(獐妃一去野花香)땅에 묻힌 낡은 비는 금효왕의 흔적(埋沒殘碑去孝王)크게 일으킨 군사 삼십명(三十雄兵酋對發)달팽이 뿔 위에서 천 번은 싸웠으리(蝸牛角上鬪千場)시에 등장하는 ‘장부인’은 감문국의 왕비로 알려진 인물이다. ‘땅에 묻힌 낡은 비는 금효왕의 흔적’이라는 시구는 신라에 패망한 감문국의 뼈아픈 역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마지막 시구는 실제 ‘동사(東史)’에 전해지는 감문국의 역사를 노래한 것이다. 동사에는 ‘아포(현재 김천의 아포면 지역)가 조공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감문국 본국에서 30명의 대군을 동원해 진압하려 나섰지만, 감천의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갔다’는 기록이 나온다.일부에서는 이 내용을 예로 들며, 감문국의 국격을 의도적으로 낮추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의 규모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일은 옳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문학 박사)는 “(유득공이 꼽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고도(古都) 21곳 중 한 곳에 김천 감문국이 포함됐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학자의 입장에서 전설상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감문국이 역사에 기록됐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권 교수는 “당시 감문국에 대한 기록이나 유적이 더 남아있었다는 추측이 들기도 한다. 유득공이 감문국을 특별하게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21개 옛 도읍 시로 남긴 실학자 유득공민족의 뿌리로 ‘감문국의 개령’ 노래풍기군수 지낸 주세붕의 ‘무릉잡고’엔비 내리는 감천 뱃길 담은 서정詩 실려김종직의 처남인 조위·조신 형제도고향 김천의 자부심 감문국 역사 읊어 # 풍기군수 주세붕과 감문국 유적조선 중기의 문신 주세붕은 자신의 시문집 무릉잡고(武陵雜稿)에서 감문국을 노래했다. 당시 영남지역의 벼슬아치들은 주로 낙동강의 뱃길로 다니곤 했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또한 마찬가지였다.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는 “상주가 본관인 주세붕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뱃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주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 지류인 감천을 따라 개령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감문국 옛 터에 초가을 비 내리는데(甘文故國新秋雨)백발의 풍기군수 이곳을 지나네(白髮豊基太守行)동루에서 진중히 술잔 나누니(珍重東樓雙酒)한 생에 친한 벗 사군의 정일세(百年靑眼使君情)시에 나온 ‘술잔’과 ‘친한 벗’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간다. 김천 지역에 주세붕과 교류를 나눌 만큼 학문이 깊은 선비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조선시대 영남 인재의 절반을 배출했다는 선산 또한 감문국 도읍으로 가는 길목인 감천의 하류에 위치해 있다. 드높은 학풍과 더불어 유서 깊은 명승지는 선비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옛 소국의 아련한 흔적을 배경으로 감천변에서 풍류를 즐기는 것이 당시 선비들이 즐겼던 최고의 유희(遊)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 김천의 문풍(文風)을 엿보다조선 전기의 명문장가이자 김천 출신인 조신은 자신의 시에서 감문국을 읊었다. 조신은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의 서제다. 형 조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학문에 출중하였으나, 신분의 한계 때문에 큰 벼슬에는 이르지 못했다. 조위는 외국어에 능통한 덕분에 역관이 된 후 7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다. 안남국(베트남) 사신과 시를 주고받은 일로 조선의 국격을 높였다는 평가가 있다. 1894년 무오사화로 형 매계가 유배당하자 김천에 은거했다. 일찍이 감문국의 한 고을이더니(曾屬疳文一附庸)비로소 도첩을 나누어 현이 되었네(始分圖牒作雷封)오늘날 군민이 극히 번성함은(于今劇郡民繁庶)선왕의 태실봉을 두어서였네(爲有先王胎室峰)조위의 시에는 고향 김천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묻어나 있다. 시는 김천이 감문국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번성’이라는 시어와 함께 직지사 뒷산에 위치했던 조선 2대 왕 정종(定宗)의 태실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지역에 대한 자신감의 배경에는 영남사림의 종주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92)과의 인연이 있다. 김종직의 본관은 선산이지만 김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김종직의 아버지는 개령(김천시 개령면) 현감을 지냈기에, 김종직은 어린 시절 상당부분을 개령에서 보낼 수 있었다. 1452년에는 김산(김천) 봉계 현감 조계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조신·조위 형제는 바로 김종직의 처남들이다. 김종직은 말년이 되자 김천에 머무르며 후학을 양성했다. 58세 때 김천으로 낙향한 뒤 서당인 경렴당을 지었다. 전국의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김천은 한동안 문예 부흥을 일궈낼 수 있었다.이 밖에도 감문국과 관련한 문학작품은 여럿 있다. 개령현감이었던 장진환·이민보·이종상은 감문국의 옛 영화를 시로 표현했으며, 진사 박영무 또한 자신의 시 속에 감문국의 흔적을 그렸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공동기획 : 김천시변화무쌍한 감천의 물길을 따라 번성했던 감문국은 다양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시대를 이끌었던 당대의 선비들은 감문국의 역사를 인지하고 시로 남겨 후세에 전했다. 작은 사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에서 감문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금효왕의 무덤(김천시 감문면)으로 알려진 봉분.
2015.06.17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6> 비운의 신라 장수 석우로
<스토리 브리핑>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한 석우로(昔于老·?~249년)는 신라의 장수이면서 감문국과 관련된 대표적 인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조분왕 2년(231년)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석우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고 영토를 확장한 영웅이다. 반면 감문국의 입장에서는 포악한 정복자다. 입장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지만 감문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석우로에 대한 고찰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6편은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지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신라의 장수이자 귀족, 석우로에 관한 이야기다.# 신라 지배세력의 일원감문국 정벌에 나선 석우로는 신라 10대 임금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다. 일설에는 각간(角干·신라의 최고 관직) 수로(水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석우로는 박·석·김씨 세력이 연합해 이사금(尼師今·신라에서 사용한 임금의 칭호)을 선출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석씨 세력의 일원이었다. 감문국 멸망 당시의 신라는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김씨와 박씨, 석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했다. 석우로가 왕성한 활동을 펼친 조분왕 시기에는 주로 석씨가 왕위를 잇고 있었다. 왕의 아들인 석우로 역시 왕위 계승 후보였다. 훗날 석우로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인 흘해(삼국유사에는 걸해)가 왕으로 즉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석우로 생존 당시의 신라는 일반적 왕위계승이 이뤄지지 않는 나라였다. 석우로 역시 왕위를 계승할 자격은 있었지만 선택받지는 못했다. 왕권은 강하지 않았고, 각 부(성씨)의 공감대를 얻는 인물이 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6세기 법흥·진흥왕대에 이르러서야 강력한 왕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설에는 석우로가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사금 시대의 왕위계승을 장자 중심으로 왕위를 잇던 후대의 시기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왕의 아들이라는 지위가 왕권 계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비록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석우로에 관한 기록은 역사에서 비중있게 다뤄졌다. 실례로 석우로는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과 연개소문, 궁예, 견훤 등 열전에 언급된 인물이 80여명에 불과하기에 더 눈길이 간다. 물론 열전에 포함된 것이 해당 인물의 중요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다만 삼국사기 편찬 당시 사관의 선택을 받았을 만큼 중요도가 있었으며, 관련 자료가 남아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석우로가 열전에 기록된 것이 삼국사기를 쓴 고려의 유학자 김부식의 출신지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김부식의 가문은 경주를 세거지로 두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대에 개경(개성)의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했다. 고려시대 거란의 2차 침입 때 수많은 역사자료가 소실됐는데, 김부식이 경주에 남아있던 고자료를 활용했다는 의견이다. 이 때문에 석우로와 같은 신라계 인물이 부각될 수 있었다는 추측이다. # 전투에 탁월한 장수 초기 신라의 지배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책임)를 실천했다. 지배층이 전투의 선종에 나서는 것은 권위를 확보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성씨로 하나 된 친족공동체는 전쟁을 통해 각 세력의 위상을 드러내려 했다. 전쟁은 귀족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했다. 감문국 멸망 당시의 신라 역시 영역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석우로 또한 전쟁터에서 명성을 쌓는다. 석우로는 신라의 장수로, 석씨 지배세력의 일원으로 전장(戰場)을 누비던 영웅이었다. 진한(辰韓·현재의 경상도 지역)의 읍락국가들을 정벌해 신라의 영역을 확장했으며, 왜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추풍령을 거느렸던 감문국은 석우로가 정복한 대표적 나라였다. 조분왕 재위 초반 감문국을 정벌한 석우로는 신라의 지배권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 또한 ‘왜인이 신라에 침입하자 사도에서 싸워 화공으로 적의 전함을 불태워 승리했다’며 그의 전공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석우로는 상주지역의 읍락국가 사벌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토벌에 나섰다. 당시 사벌국은 백제와 연합해 신라에 맞서려 했지만 석우로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고 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석우로의 사벌국 토벌 기록이 신라의 진한 통합과 관련한 삼국사기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점이다. 강종훈 교수는 “석우로의 활약으로 신라는 사실상 진한의 통합을 마무리지었다. 그는 진한을 대신하는 신라를 탄생시킨 영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장수 석우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열전은 석우로에 대해 “조분왕 16년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자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지켰다. 밤이 되어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우로는 몸소 다니며 위로하고 손수 섶에 불을 피워 따듯하게 해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감격하고 기뻐하여 마치 솜을 두른 것같이 포근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전투에 패했지만 병사의 고단함을 일일이 챙기는 덕장(德將)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는 석우로의 군사적 능력을 묘사하려는 사관의 의도로 풀이된다. 감문국 토벌 등 신라 영토확장 혁혁한 功왜인 격퇴‘용장’ 병사 돌보는‘덕장’ 면모삼국사기 列傳에도 궁예 등과 함께 실려“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객관서 倭 사신에 말 실수…침략 빌미줘이후 해명하러 倭 진영 찾았다 최후 맞아 # 석우로는 과연 포악한 인물이었나감문국 멸망의 한(恨) 때문인지 김천의 향토사학계는 신라의 영웅 석우로를 매우 포악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석우로의 성격이 매우 거칠었으며, 감문국과 신라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김천지역 구전에 따르면 80명의 감문국 결사대가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의 속문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김천 향토사학계는 왜(倭) 사신과 관련한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의 기록을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다. 열전에 따르면 석우로가 신라 객관에서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에게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석우로가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며 왜의 사신을 농락했다고 전해진다. 석우로가 사신을 조롱할 정도로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반면 강종훈 교수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강 교수는 “석우로는 말 실수로 파멸에까지 이른 인물이다. 성격이 거칠었다기보다는 신중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관은 석우로가 죽은 원인으로 ‘말 실수’를 꼽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은 ‘(석)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 군무와 국정을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중략) 그런데 말 한마디의 잘못으로 스스로 죽음을 취하였고, 또 두 나라(신라·왜)로 하여금 싸우게까지 했다’고 전한다. 석우로의 행동이 실수인지 성격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왜왕은 사신의 일을 빌미 삼아 신라에 침입했다. 갑작스러운 전란을 수습하려는 석우로는 왜군 진영으로 직접 찾아가 해명에 나섰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석우로는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라며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석우로는 왜인에 의해 불에 타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훗날 석우로의 부인이 왜의 사신을 죽여 남편의 복수를 했다고 전한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공동기획 : 김천시읍락국가 감문국의 영역이었던 김천시내 전경. 서기 231년 신라의 귀족이자 장수였던 석우로는 현재의 김천지역인 감문국을 공략, 진한(辰韓)세력을 신라로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석우로가 왜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정황이 상세하게 나온다.
2015.06.10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5> 400여년 흥망의 역사
<스토리 브리핑>김천지역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의 건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김천의 토착세력과 북방세력의 만남으로 감문국이 세워졌다 추정할 뿐이다. 2천년을 넘나드는 세월의 무게는 감문국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다만 감문국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2~3세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국가의 지속시기는 400년 남짓으로 보고 있다. 1천700여년 전 신라에 복속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록 소국(小國)의 역사는 승자인 신라의 역사에 의해 가려졌지만, 감문국에 대한 자부심은 김천시민의 마음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5편은 감문국의 건국과 패망에 관한 이야기다. # 감문국의 건국안타깝게도 확인된 감문국의 건국 역사는 거의 전무(全無)하다. 심지어 전설로도 남아있지 않다. 2천여년의 시간은 감문국 기원의 비밀을 남기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학계와 향토사학계 역시 감문국의 건국 시기와 그 내용에 대해 추정할 뿐 구체적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 감문국의 건국 시기는 대략 기원전 2~3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읍락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감문국도 그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향토사학계는 북방세력이 남하해 기존 토착민과 결합하면서,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가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기원전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중국 한(漢)나라에 의해 망하고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북방의 선진문물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며 감문국의 건국 배경을 유추했다. 고려시대 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위만조선의 유민으로 보이는 북방세력에 관한 언급이 있다.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이야기하면서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조선유민이 산골에서 6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기록했으며, 이 마을들을 진한(辰韓) 6부라고 했다. 북방에서 유입된 유민의 존재가 삼한지역 각 읍락국가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북방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기존 토착세력의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북방유민의 일방적 지배가 아닌 토착민들과의 결속으로 읍락국가의 형성을 가속화시켰다고 본다. 개령·감문면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지석묘(고인돌)가 대거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지석묘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상징하는 무덤으로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졌다. 현재 김천시 감문면 문무·삼성·송북리 등지에 산재해 있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신석기·청동기 유적 또한 김천에 독자적 토착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992~93년, 계명대는 송죽리에서 대규모 선사유적을 발굴했다. 당시 발굴에 나섰던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실장은 “일찍이 김천지역의 토착세력은 감천을 중심으로 거점취락을 형성하고, 낙동강 일대와 백두대간을 넘어 금강 상류의 세력과도 긴밀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토착민 집단과 북방세력이 결합해 감문국을 건국했다고 볼 수 있다. 감천 유역의 집단은 북방민의 문물을 접한 것을 계기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감문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감문국의 중심인 개령면 일원은 방어에도 유리했다. 산성(山城)을 거점으로 군사활동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천시 일원에는 감문면의 속문산성과 고소산성, 개령면의 감문산성 등 감문국과 관련된 산성지를 포함해 9곳의 산성지가 있다. 결론적으로 백두대간 아래의 들과 물길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정치세력은 생산과 방어에 유리한 감천변을 거점으로 정했다. 이어 인근 읍락을 통합해 한 국가를 건설했다. 그 국가가 바로 감문국이었다. 삼국사기 “위만조선 유민, 진한 6부 이뤄”三韓 읍락국가형성에 북방세력 관련 방증개령·감문·구성면 일대 선사시대 유적은감문국 이전 토착세력의 영향력 존재 입증서해·전라도·북방 향하는 길목 추풍령은영토확장 지리적 요충지…각 세력 각축장결국 신라 왕의 아들 석우로가 정복‘대단원’ # 감문국의 멸망 역사는 감문국이 231년(조분왕 2) 신라 이찬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멸망했다고 기록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조(新羅條)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년 7월조에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신라의 열째 임금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자 주변세력 정복에 잔뼈가 굵은 석우로를 직접 보냈을 정도로 감문국은 신라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감문국이 무너지던 시기, 신라는 이미 경상도 지역의 읍락국가 상당수를 정복한 상태였다. 신라는 일찍이 경산의 압독국(押督國), 경주 안강의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손에 넣었으며, 벌휴왕 때는 의성 조문국(召文國)을 병합했다. 남은 나라로는 김천 감문국과 상주의 사벌국(沙伐國), 영천의 골벌국(骨伐國) 정도였다. 당시 신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영역을 넓혀 나가는 부단한 노력을 했다. 감문국을 비롯한 백두대간 주변은 물론 경상도 일원의 소국을 병합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특히 감문국은 신라가 꼭 정복해야 할 지리적 요충지였다. 감문국은 한반도 남부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고구려·백제·신라와 가야 세력이 동시에 접하는 장소였다. 특히 감문국의 영역이었던 추풍령은 신라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요충지였다. 백두대간에서 수레가 다닐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고개인 추풍령을 점령해야 백두대간의 진출입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라는 추풍령을 손에 넣어야만 금강유역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서해안과 북방은 물론 전라도로 향하는 길을 열 수 있었다. 또한 감문국을 차지해야 가야 공략을 위한 전초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라가 감문국을 정벌하려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벌국과 대가야 사이에 위치한 감문국을 정벌해야 두 세력 간의 교류를 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벌국은 영남지역 서북부의 맹주였다. 상주의 넓은 들을 기반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 대가야와 연맹체를 맺지는 않았지만 신라와 가야 사이에서 밀고당기는 정책을 펼치며 독자 생존을 도모했다. 결국 신라의 감문국 정벌은 새로운 교통로를 확보하고 대가야와 상주 사벌국을 분리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실제로 감문국이 신라에 정복당하고 감문군이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벌국은 신라에 병합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감문국의 멸망은 경북지역의 읍락국가가 멸망하는 연쇄효과도 일으켰다. 신라의 입장에서 골칫거리였던 영천의 골벌국이 감문국 멸망 이후 신라에 투항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236년(조분왕 7), 골벌국 왕 아음부(阿音夫)는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의 턱밑에 골벌국이 위치해 있었기에 신라는 늘 껄끄러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천 감문국과 상주 사벌국까지 신라에 병합당한 마당에 골벌국의 세력은 극도의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골벌국의 지배세력은 신라와의 병합을 택한 후 서라벌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만족했다. 감문국 정벌을 신호탄으로 경상도 일대의 소국 대부분이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는 중앙집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고구려, 백제와 나란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도약의 기틀 또한 마련할 수 있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공동기획: 김천시추풍령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 상하행선 구간 양쪽에 추풍령휴게소가 자리 잡고 있다. 추풍령은 예로부터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유용한 교통로로 삼한시대 각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신라는 추풍령 일대를 다스리던 감문국을 정복하면서 금강유역 및 서해안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계명대 행소박물관에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토기가 전시돼 있다. 이러한 유물은 김천의 독자 세력이 선사시대부터 감천변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2015.06.03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4> 천혜의 자연조건
◆ 스토리 브리핑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기원전 2~3세기경 건국돼 번성한 나라다. 백두대간의 산악 지형 탓에 고립될 수도 있었지만, 독자적 정치세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낙동강 지류 감천(甘川)의 풍부한 물과 개령평야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실제로 감문국 유적에서는 가야식 토기가 출토되는 등 신라와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감문국은 험한 산세에도 불구, 사통팔달의 지리적 요건을 갖춰 경제적으로도 번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령의 대가야(大伽倻)는 물론 상주의 사벌국(沙伐國), 신라의 모태인 경주 사로국(斯盧國)과 교역하며 탄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 향토사학계 의견이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4편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바탕 삼아 번성한 감문국에 관한 이야기다. # 작지만 강한 나라 감문국 18세기 조선의 역사학자 이종휘(李種徽·1731~1797)가 지은 ‘동사(東史)’에는 감문국의 규모를 짐작할 만한 기록이 나온다. 기록에는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30인을 대군이라 표현한 사실로 미뤄봤을 때, 감문국의 규모는 600~700가구(인구 4천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일부 향토사학계는 “30인이라는 표현이 상징적이어서 더 많은 군사가 (감문국으로)쳐들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감문국의 규모 또한 더 크게 보는 견해도 있다. 비록 나라의 크기는 작았지만 다른 읍락국가의 침략이 빈번했다는 기록은 감문국의 경제적 상황과 문화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문국이 상주지역의 읍락국가 사벌국처럼 드넓은 평야를 가졌다거나, 고령의 대가야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독자적 문화를 향유했다는 증거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의 역사가 신라에 의해 가려졌지만 매우 찬란했다고 주장한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감문국의 문화가 찬란하고 고도화됐기 때문에 신라가 탐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문 위원은 “승자의 역사에만 집착하면 패자의 역사는 잊어진다. 역사적 사료와 함께 구전(口傳)에도 귀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김천지역에는 감문국과 관련한 수많은 구전이 전해져 내려온다. 기록에는 없지만 대를 이어 감문국의 이야기가 이어져 오고 있다. 감문국 공주와 신라 청년의 러브스토리에서부터 신비의 우물물을 마시고 천하장사가 됐다는 감문국 원룡장군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감문국 멸망 당시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 속문산성에서 저항했던 80명 군사에 대한 이야기도 구전으로 이어져 온다. 감문국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했다는 증거는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3세기 후반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의 기록에 따르면 3세기 중엽 영남지방에는 가야 계열인 변한계 12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감문국 또한 변한에 속한 김천지방의 소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근구 전 김천향토사연구회장 또한 감문국을 가야권(伽倻圈)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이는 감문국을 신라 중심의 진한 연맹체 일원으로 보는 학설과 대비된다. 동사(東史) 가야세가(伽倻世家)편에서도 ‘대가야는 고령을, 소가야는 감문소국을 말한다’고 밝혀 놓아 감문국이 독자적 문화를 향유한 국가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백두대간 줄기에 둘러싸인 지형 덕의식주 등 차별화된 고유특성 가져‘빗내농악’도 감문국 군사굿서 전래다른 읍락국가의 침략 빈번 기록은경제·문화수준 아주 높았다는 방증18세기 문헌엔 “소가야는 감문소국”‘신라 중심의 진한 연맹체’說과 대비‘가야-신라 중개무역’ 국부축적說도 # 감천(甘川) 줄기에서 번성한 감문국향토사학계는 감문국이 번성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조건으로 지형적 특성을 꼽는다. 백두대간 줄기에 둘러싸인 감문국이 의식주에서부터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감문국의 군사굿에서 비롯되었다는 김천의 빗내농악이 김천만의 독특한 문화로 인정받는 것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천시 개령면 일원의 충적평야 또한 감문국이 성장의 주요 배경이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감천의 물은 매년 범람해 감문국의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었다. 별다른 시비법이 없었던 삼한시대에도 감문국 농민들은 높은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감천이 선사한 풍요로움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동시에 수많은 물산의 생산과도 직결되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전후까지 김천시 어모면에서 생산된 왕골 돗자리는 영남지역 일대에서 강화도 화문석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다. 어모면의 돗자리는 감천변의 비옥한 습지에서 자라난 왕골로 만들었다. 감문국은 감천이 선물한 자원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감문국의 중심지인 감천 하류지역은 역사적으로도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2선봉장을 맡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영남에서 전라도와 충청도로 향하는 길목인 감천변에 보급기지를 두고 전투를 지휘했다. 20세기 초 경부선철도가 개통됐을 때에도 감천변인 김천시 어모면의 기차역에서는 큰 장이 섰다. 감천의 맑은 물도 감문국의 융성에 한몫했다. 대리석이 많은 감천 발원지 주변 산지의 특성 덕분에 하천에는 늘 모래가 풍부하다. 모래는 물을 정화했고, 상류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감천에 기대어 살던 많은 사람들은 맑은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맑은 물과 넘치는 농업생산량은 가축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됐다. 김천은 과거 전국 규모의 우시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토종 돼지인 지례돼지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향토사학계는 “가축생산까지 더해지면서 감문국은 더 강한 경제력을 지닌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활발한 대외교역을 펼치다감문국이 활발한 대외교역을 펼친 국가였다는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진·변한의 읍락국가와 교류하면서 이익을 남겼다는 것. 감문국은 금강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영남권의 다른 읍락국가보다 북방의 문화를 빨리 흡수할 가능성이 높았다. 감천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증대 또한 활발한 대외교역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 향토사학계 주장이다. 특히 감문국이 고령의 대가야 세력과 활발한 교류를 펼쳤다는 주장도 있다. 감문국이 가야세력과 신라 간 중개무역을 했다는 의견이다. 감문국 유적에서 다량 출토된 토기 역시 교역의 주요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천시 대항면의 추풍령 일원에는 옛 가마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장은 “어릴 때 (추풍령 부근)그곳에서 수많은 토기 파편이 나왔다. 감문국이 토기생산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토기와 관련된 지역의 내력 덕분인지 김천은 ‘옹기(甕器)’로도 유명했다. 구한말 조정의 탄압을 피해 김천의 산골로 흘러들어온 가톨릭 신자들은 옹기를 구워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할아버지가 김천 직지사 아래에서 옹기를 구웠으며, 김 추기경의 호(號) 또한 ‘옹기’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공동기획 : 김천시낙동강 지류이자 김천시민의 젖줄인 감천(甘川)에서 바라본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충적평야(沖積平野).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甘文國)은 감천변의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나라의 힘을 키웠다. 감문국이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는 주장의 저변에 감천이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조선후기 지도첩인 동여비고(東輿備攷)에 표현된 김천의 모습. 산지에 둘러싸인 감문국의 중심(개령·開寧) 한가운데로 감천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2015.05.27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3> 개령·감문면 古塚(고총)의 조성 내력
◆ 스토리 브리핑김천시 개령면과 감문면 일원에는 수많은 고총(古塚·오래된 무덤)이 산재해 있다. 대부분이 감문국(甘文國)의 유적으로,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천의 옛 지명인 금릉(金陵)이 감문국 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금효왕릉(金孝王陵)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김천의 향토 문화 원류로 감문국을 꼽고 있는 사실도 근거가 되고 있다.반면 사학계에서는 다소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사학계는 “출토된 유물을 볼 때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감문국 멸망 후인 삼국시대에 조성된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총의 조성시기에 대한 주장은 다소 엇갈리지만, 감문국 지배 세력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에 대해서는 사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3편은 감문국 유적지내 고총의 조성 시기와 그 배경에 관한 이야기다. #. 패망 후에도 독립성 유지한 감문국 지배세력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과 개령면 양천리의 석실고분은 감문국의 대표적 고분이다. 금효왕릉은 감문국의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양천리 석실고분 또한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 불리고 있다.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양천리 석실고분은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1967년 양천리 석실고분에서 출토된 금제이식(귀고리), 화살통 장식, 토기 등의 유물은 지배층 계급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양천리 석실고분은 개령면의 고분 중에서는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반면 사학계는 김천시 개령면 일원의 고총은 감문국이 독립된 국가로 있었던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보고 있다. 감문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인 4~6세기경 정치적 상황에 의해 고총들이 조성됐다는 것.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감문국) 고총의 유물을 살펴보면 삼한시대 형식과는 차이가 있다. 현재 발견된 고총들의 유물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라고 설명했다.‘감문국 대표고분’금효왕릉·장군석실사학계 “출토된 유물 삼국시대 양식”삼한시대에 조성됐을거란 추정 일축 나말여초 영웅 꿈꾸던 토착세력들은혼란기 역사적 명분·정체성 확립 노려“내 조상은 읍락국가 수장” 명분 삼아김천지역에 고총이 만들어진 이유는 6세기 전까지 신라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3세기 전후 감문국과 같은 경북 일원의 읍락국가들은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신라의 지배력은 지방의 구석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신라는 각 지역의 읍락국가를 병합했지만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감문국을 다스리던 기존 지배세력에 통치권을 위임해야 했다.주 교수는 “신라 군사에 의해 하루아침에 나라가 망해버린 터였지만 기존 감문국 지배세력의 힘은 유지됐다. 독립적 군주 체제는 아니었지만 하루아침에 독립성을 잃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신라는 지방 세력을 통한 간접지배를 선택했고, 이 때문에 감문국 지배세력은 패망 이후에도 자신들의 세(勢)를 이어갈 수 있었다.#.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큰 무덤을 만들다신라에 병합된 이후 권력을 위임받은 각 지방의 토착세력들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감문국도 마찬가지였다. 감문국의 토착세력들은 큰 무덤을 만들어 신라의 권위를 위임받은 권력자임을 과시하려 했다. 비록 자신들의 나라를 무너뜨린 신라가 부여해준 권력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독자적 세력을 과시하고, 여전히 자신들이 그 지역의 주인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때문에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과 개령면 양천리 석실고분이 군주나 장군의 무덤이 아니고, 감문국 지배세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사학계의 의견이다.비슷한 시기 감문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큰 무덤을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신라의 지방 세력자들은 중앙에 대항하기 위해 부를 축적하고 무덤을 만들었다. 이러한 지방세력의 무덤은 곳곳에 생겨났다. 대구의 경우 달성공원과 비산·내당동 등지에도 오래된 무덤이 있다. 물론 독립 세력이 아닌 지방 토호세력의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 세력들이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들던 현상은 6세기에 이르러서야 멈춘다.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어느덧 완성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신라는 각 지방에 지방관을 직접 파견했고, 더 이상 신라 서라벌의 것과 비슷한 모양새의 무덤은 생기지 않았다. 반독립 상태의 지방세력을 제압한 신라가 비로소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 나말여초 시대 감문국…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나말여초(羅末麗初·신라말 고려초)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은 감문국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한 번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통일신라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하고 후삼국 시대에 접어들 즈음 경북지역을 포함한 한반도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때 각 지역의 토호세력들은 중앙정부가 약해진 틈을 타 스스로를 장군으로 칭하고 삼국의 쟁패자가 되려 했다. 이러한 지방 세력 중 잘 알려진 사례가 바로 상주 호족 아자개(阿玆蓋)의 아들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이다. 또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의 아들로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스스로 건국의 길을 택한 궁예(弓裔)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 외에도 북원의 양길(梁吉), 서남해의 해상세력으로 견훤의 편에 선 능창(能昌·일명 수달) 같은 지방세력이 있었다. 또한 고려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송악의 왕륭(王隆)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력이 신라와 거리를 두고 스스로 살 길을 도모했다. 바야흐로 분열의 시대가 도래했고,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감문국의 지배세력도 마찬가지였다.나말여초의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각 지역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확립해야 하는 계기가 됐다.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했던 토착세력들은 독립의 명분을 찾기 위해 읍락국가의 역사를 명분으로 삼았다. 자신들의 조상 또한 서라벌과 같은 읍락국가의 수장이었으니 왕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논리였다.‘감문국 유적지의 오래된 무덤들이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이다’라는 주장이 나온 이유도 나말여초의 정치적 혼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낙동강 유역에서 여러 세력이 발호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김천의 토호세력 또한 신라에 의해 진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발호한 세력들이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고려가 건국됐고, 견훤의 후백제는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참고문헌=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 자문단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공동기획 : 김천시김천시 개령면 양천리의 석실고분. 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천리 석실고분은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도 알려져 있다. 학계에 따르면 신라가 감문국을 정복한 이후에도 감문국 토착세력들은 여전히 영토를 다스리는 세력으로 남았다.양천리 석실고분의 입구. 석실의 규모는 길이 2.5m, 너비 1.2m, 높이 1.2m로 직사각형의 상자 모양이다.
2015.05.20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 한반도 읍락국가의 형성
<스토리 브리핑> 감문국(甘文國)은 삼한시대 김천지역에 존재했던 읍락국가(邑落國家)다. 삼국사기는 231년(조분이사금 2년) 신라 이찬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감문국이 멸망당했다고 전한다. 감문국은 삼한시대 진한 연맹체 중 한 곳으로 독자적 세력을 지녔으며,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 병합된 감문국은 진흥왕대에 이르러 ‘군(郡)’에서 ‘주(州)’로 승격됐다. 감문국의 영역이 신라 지방 통치조직 중 가장 격이 높은 ‘주(州)’로 승격된 것은 감문국의 영역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편에서는 감문국에 대한 본격적 고찰에 앞서 한반도 읍락국가의 형성과정부터 살핀다. 고대 읍락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알아야 감문국이 존재했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면밀히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감문국에 대한 독자의 이해 폭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1. 감문국으로 가는 징검다리‘역사(歷史)’는 누군가가 놓아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근·현대나 조선시대와 같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경우 사료(史料)는 매우 풍부하다. 덕분에 징검돌 사이의 거리는 짧고, 상대적으로 편히 건널 수 있다. 반면 고려와 통일신라를 거쳐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징검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진다.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가 존재한 삼한시대의 경우 징검돌 사이의 간격은 더욱 더 멀다. 기록은 태부족인 데다, 당시 시대상의 상당 부분을 발굴유물의 존재나 형태에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읍락국가에 대한 고찰은 감문국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과거를 바라보는 기준점을 단단하게 세운다면, 향토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일부 지자체에서 ‘지역 현창(顯彰) 사업’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려 했다는 논란이 종종 있어 왔기에, ‘역사적 팩트’에 대한 기본적 고찰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읍락국가의 건국에서부터 몰락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이해하려면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감문국과 같은 한반도 읍락국가는 대부분 삼한시대를 배경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마한·진한·변한을 아울러 지칭하는 ‘삼한’이라는 용어는 흔히 임진강 이남 지역에서 기원 전후의 시기부터 300년 무렵까지의 시간적인 폭을 갖는 하나의 독립된 시대를 일컫는다”며 삼한시대를 정의했다. 이 기간은 계급의 분화에 따라 정치체제를 갖춘 초기국가들이 등장하는 시기이며, 고구려·백제·신라가 주가 되는 삼국시대로 진입하기 전의 단계다. 물론 삼한을 삼국시대 이전 역사로 총칭하는 데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기원전 2∼3세기경 속속 등장정치·경제적 필요성에 의해읍락 간 뭉쳐 읍락국가 형성대외전쟁·교역땐 통합됐지만구속력 약해 독자세력 유지해변한·마한·진한 등 ‘삼한’은읍락국가간 더 큰 범위 연맹체 #2. 삼한(三韓)의 성립과 읍락국가의 형성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다. 특정 장소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다. 이후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배계급이 등장했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등장은 읍락국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지리적 위치 탓에 상대적으로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쉬운 한반도 북부지역의 경우 읍락국가의 성립이 빨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감문국이 위치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늦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2~3세기경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읍락국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읍락 내부에서는 일정한 혈연관계가 형성되면서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급사회는 청동기와 철기 등 금속기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가속화됐다. 사람들은 외풍에 견디고 생존하기 위해 결속해야만 했다. 독립된 읍락과 읍락이 정치·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이다. 대구에 존재했던 읍락국가인 달벌국의 예를 들면 이해는 더 빠르다. 달벌국의 정치적 중심세력은 현재 대구 달성공원 일원에 정착해 살았다. 수도 역할을 하는 읍락을 ‘국읍(國邑)’이라고 하는데, 달벌국의 경우 국읍인 달성공원 주변을 중심으로 대구의 월배, 다사 등에 있던 세력을 규합해 읍락국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읍락국가는 대외적 전쟁이나 교역때 하나의 국가로 기능하는 정치체제였다. 대구 달벌국 외에도 경주의 사로국, 의성 조문국, 청도 이서국을 비롯해 김천 감문국까지 여러 읍락국가가 생겨났다. 감문국 또한 대구의 달벌국처럼 여러 읍락이 합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읍락국가들을 더 큰 범위에서 연결한 것이 ‘변한·마한’과 더불어 삼한의 연맹체 중 한 곳인 ‘진한(辰韓)’이다. 진한의 맹주로 경주의 사로국이 있기는 했지만 절대적 통치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감문국을 포함한 진한의 연맹체들은 현대의 국가와 같이 중앙통치적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연맹체 내 국가 간 구속력이 강하지 않았기에 각자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참고문헌=‘(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자문단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감문국(甘文國)의 영역인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전경. 감문국은 김천시 개령면을 중심으로 성립한 읍락국가로 누구에 의해 언제 건국되었는지 직접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삼한 78국은 각각 국읍과 읍락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국읍(國邑)을 중심으로 몇 개의 읍락(邑落)이 모여 하나의 나라가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2015.05.13
감문국 시리즈 연재에 부쳐 - “고대 부족국가로 재조명…지역민 향토史 재인식 계기로”
“감문국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엄연한 국가(國家)입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과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은 “선조들의 위대한 자취야말로 살아있는 교훈이며 민족진로의 지표”라며 감문국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고대의 유적, 유물을 발견하고 재해석하는 것은 매우 설레는 일이며, 감문국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문 위원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시리즈 연재로 향토 역사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 전환이 이뤄지길 바랐다. “김천 개령들 일원에는 감문국 유적이 널리 퍼져 있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늘 연구대상에서 밀려왔다. 이는 감문국의 역사가 지역의 작은 역사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그나마 최근 들어 (감문국이) 관심과 연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어 다행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지방의 역사·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남일보에서 김천의 고대 부족국가 감문국을 재조명하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아무쪼록 이번 시리즈 연재로 감문국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으면 한다.” 이 회장 역시 감문국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이 커지길 기원했다. 지역의 문화유산 감문국을 온전히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감문국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김천시민으로서 늘 아쉬움이 있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감문국 유적이 버려지다시피 했고, 일부는 일본인들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방치되어 왔다. 이제라도 달라져야 한다. 앞으로 감문국의 역사 유적을 복원해 많은 이들이 즐기고 공부하는 장소로 바뀌었으면 한다.” 김천시 또한 지역민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감문국 주변을 김천의 새로운 관광거점으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김천시는 국토교통부의 백두대간원 발전종합계획의 하나로 ‘감문국 이야기나라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타당성 조사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2015.05.06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 프롤로그 - 왜 감문국인가
영남일보는 ‘감문국(甘文國)의 흔적을 찾아서’ 시리즈를 매주 연재한다. 삼한시대 김천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감문국을 중심으로 그 스토리를 풀어낸다. 감문국은 기원전 2~3세기 경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일원에서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 각 세력의 접경지역에 위치해 여느 부족국가와 다른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서기 231년(신라 조분왕 2)에 신라 이찬 우로에 의해 정벌 당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감문국은 경북의 여타 부족국가처럼 그동안 관심에서 소외되어 왔다. 고대국가 성립 전 태동한 부족국가의 존재는 역사의 승자인 고구려·백제·신라에 의해 가려졌기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그 존재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영남일보는 감문국의 흔적을 다시 더듬어보고, 김천의 역사와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 보고자 한다.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문단을 구성해 심층 취재에 나선다. 향토의 역사와 뿌리를 재조명하고 지역의 새로운 역사·문화 콘텐츠도 발굴한다. #1. 감문국의 흔적을 더듬다언제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옛날. 유라시아 대륙을 떠돌던 인류는 어느덧 한반도에 이르렀다. 대륙의 중심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사람들은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퍼져나갔고, 강과 하천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며 문명을 일구어냈다. 특히 한반도 남부권의 정중앙이라는 지리적 여건을 가진 김천 일원은 우리나라의 고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여느 국가의 고도(古都)처럼 화려한 유산이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선조의 삶을 엿보기에 충분한 공간적 배경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한반도에 정착한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천은 극적인 변화를 거듭한 우리 역사의 조각들을 품고 있다. 감문국은 다양한 문화를 빠르게 흡수했다. 백두대간을 병풍으로 삼고, 어머니의 젖줄과 같은 감천(甘川)에 기대어 수준급의 문화를 꽃피웠다. 경북 서북부에 자리한 김천은 남한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동쪽에는 금오산, 서쪽에는 황악산이 백두대간 준령들과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소백산맥의 지맥인 삼도봉(해발 1천178m)은 지금도 경북·충북·전북의 3도를 모두 접하고 있다. 이러한 김천의 지리적 입지는 감문국이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김천을 가로지르는 감천도 감문국의 형성·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감천 유역에서는 일찍이 인류가 정착해 살아온 흔적들이 남아있다. 감문국이 터를 잡은 감천유역에서는 다양한 세력이 집단을 형성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의 신석기 유적에 남아있는 옛 취락지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개령면에 3개의 정치집단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어 감문국 외의 다른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중에서도 김천시 개령면 일원에서 흥망성쇠의 역사를 써내려간 고대 부족국가 감문국의 유산은 주목할 만하다. 감문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는 토기와 고분 벽화를 비롯해 진귀한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현재 경북대·계명대 등 지역 대학의 박물관에 다수의 유물이 보관 및 전시되고 있다. 또한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과 신석기 취락 등 선사시대 유적은 김천이 감문국의 건국 이전부터 인류의 주요 활동 무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감문국을 둘러싼 김천시 감문면의 속문산성·고소산성 등의 군사 유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적은 감문국의 영역이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각 세력집단이 한반도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차지해야 할 지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탄탄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전까지, 감문국은 한반도 지배 세력의 접점으로 독특한 문화를 향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부권 정중앙’ 고대역사 중심지삼한·삼국의 주도권 쟁탈 요충지 주목각 지배세력의 접점…독특한 문화 발원기원전 2∼3세기경 개령면 일원서 건국삼국사기 “서기231년 신라에 정벌”기록김천 옛지명 금릉‘금효왕릉서 유래’說#2.‘금릉(金陵)’의 땅 감문국 어느 시대나 ‘역사(歷史)’는 ‘신화(神話)’를 밑거름으로 삼아 성장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와, 인류를 창조했다는 중국 복희씨(伏羲氏) 신화처럼 구술로 전해오던 인류의 문화유산은 문명시대로 접어들며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김천에서 일어난 부족국가 감문국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기원 전후의 아득한 옛 일임에도 불구, 감문국과 관련한 문헌과 유적은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자료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감문국이 남긴 유·무형의 유산은 현재까지도 강력한 힘을 뿜어내고 있다. 지금까지도 김천지역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감문국이라는 국명(國名)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는 ‘금릉(金陵)’이라는 김천의 옛 지명으로 알 수 있다.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에 위치한 감문국 왕의 무덤 금효왕릉(金孝王陵)에서 ‘금릉’이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감문국 왕릉으로 전해지는 금효왕릉은 높이 6m, 지름15m의 규모로 김천 최대의 고분으로 꼽힌다. 원래 현재보다 더 큰 규모였지만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는 못했고, 인근 경작지로 인해 침식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수차례 도굴된 것으로 의심되고 있지만 여전히 김천을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 중 하나다. 지리서 조선환여승람에서는 “(김천시 감문면) 삼성동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1995년 1월1일, 금릉군이 김천시에 통합되기 전까지 감문국을 상징하는 ‘금릉’이 김천의 옛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감문국과 김천의 역사가 여전히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참고문헌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공동기획:김천시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은 감문국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김천 최대의 고분이다. 김천의 옛 지명인 ‘금릉(金陵)’이 이 고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감문국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이찬 우로가 감문국을 토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토리텔링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12·끝> 송라면 조사리와 원각조사
#1. 사람의 몸을 빌려 탄생한 용왕의 아들동해의 월포 해수욕장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5리쯤 가다보면 천년 전의 대왕고래뼈를 발굴하여 유명해진 방어리가 나온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한적하고 평화로운 어촌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의 행정구역상 지명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다. 마을 이름이 특이하게도 불교적 용어인 조사리(祖師里)가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 하나가 전해오고 있다.고려 말기인 우왕 시절에 이 마을에는 김백광(金白光)과 정덕(淨德)이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고을 아전이던 남편의 성품은 순박하고 부지런했으며, 부인 역시 현숙하고 인정이 많았다. 하지만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었다. 집안의 대가 끊어질까 염려한 부인은 날마다 먼동이 틀 무렵이면 동해가 바라보이는 바위에 올라 자식을 얻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부인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어느 날 밤, 부인은 해와 달이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믿기 어렵지만 부인이 임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신(天神)의 도움 덕분이라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그 당시 천신은 고려 말기의 혼탁해진 정치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민초의 고통과 슬픔을 달래줄 인물을 하계로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동해바다를 향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정덕부인을 본 천신은 부인의 몸을 통해 이를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하계로 보낼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때마침 동해용왕(東海龍王)의 막내자식이 천신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금지옥엽이나 다름없는 막내를 용왕이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었다. 기회를 보던 천신은 용왕부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용왕의 막내를 정덕부인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가도록 조치했다.해신(海神)들의 모임에서 돌아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용왕부부는 부랴부랴 막내를 찾아 마을 앞바다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용왕의 몸인지라 바다를 벗어날 순 없었다. 애가 탄 용왕부부는 자식이 있는 마을까지 접근하기 위해 해변에 늘어선 바위에다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어려움 속에 마침내 바위굴을 통해 집까지 당도했지만 그때 부인은 이미 천신 시녀의 도움을 받아 바다와 떨어진 신구산(神龜山) 기슭으로 몸을 피한 다음이었다. 크게 낙심한 용왕부부가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바위굴을 나왔을 때는 어느덧 동녘하늘이 환하게 밝아온 연후였다. 해뜨기 전에 반드시 용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용왕들의 오랜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자식마저 찾지 못한 걸 애통해하던 용왕부부는 끝내 마을 앞의 바위로 굳어지고 말았다고 한다.#2. 마흘, 해탈의 경지에 이르다천신의 점지를 받아 태어난 아기였기 때문일까. 기록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난 날은 우왕 5년(1379) 음력 2월 보름으로, 그날부터 열흘 가까이 비가 내려서 메마른 대지를 충분히 적셨다고 전해진다. 당시는 오랜 겨울가뭄으로 대지가 말라서 봄 농사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마실 우물까지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런 까닭에 주민들은 아기의 탄생이 단비를 몰고 왔다고 믿었다. ‘마흘(摩訖)’이라는 이름을 얻은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눈빛이 선지자처럼 맑고 깊었으며, 다른 젖먹이들처럼 보채거나 울지 않아 부모를 편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또 뛰어나게 총명하여 세 살 무렵에 천자문을 외었고, 열한 살 때는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열두 살 되던 해에 병으로 부친을 여의게 되었다. 그 충격 때문인지 마흘은 돌연 말문을 닫았고, 깊은 사색에 잠겨 홀로 해변을 배회하거나 혹은 불경공부에 몰두하며 나날을 보냈다. 달마대사가 면벽하여 묵언수행하듯 말을 잊고 지낸 지 3년이 되던 해 어느 날이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듯 바닷가에 나가 있던 마흘은 동해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보자 마치 천신의 계시라도 받은 양 ‘크도다! 태양의 정기여!’하며 크게 한 소리 외치곤 해탈의 미소를 환하게 지었다고 한다. 그 뒤로 마흘은 높은 식견과 뛰어난 학문을 지녔음에도 벼슬길에 나갈 마음을 품지 않았다. 태조 5년에 재야에 묻힌 인재를 찾기 위한 과거가 시행되었고, 주변사람들의 권유에도 그는 응시하지 않았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인근의 평범한 촌부인 유씨(劉氏)와 결혼한 후 스스로 논밭을 갈고 김을 매며 마을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대중 속에 있다는 평소의 생각을 몸소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마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서 가까운 보경사(寶鏡寺)와 도성암(道成菴)을 다니면서 스님들과 불법을 논하고 불경을 읽으면서 참다운 삶의 진리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스님들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불경에 대한 심오한 해석에 혀를 내둘렀다. 어떤 스님은 마흘을 두고 천년에 한 번 보기 힘든 돈각(頓覺: 소승, 대승을 차례를 밟아 학습 수행하지 않고 변칙적으로 한꺼번에 깨닫는 일)의 귀재라고 말했다. 어떤 사찰에서는 마흘을 주지로 모셔가기 위해 몇 번씩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흘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위로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책무이자 본분이라며 살던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삶의 진리와 불법을 강론하는 일뿐 아니라 농사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또한 홍수와 가뭄을 예언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이에 대비하게 했다. 사람들은 이런 마흘을 높이 사서 이인(異人)이라거나 혹은 성인(聖人)으로 부르기도 했다.#3. 용왕 부부의 恨이 서린 곳이러한 마흘의 민중을 위한 자애심과 깊은 지혜, 뛰어난 설법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인근 절의 스님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먼 길의 수고로움을 마다않고 찾아왔다. 또한 마흘의 학식과 불법을 추앙하여 제자가 되길 자청하여 찾아오는 젊은이도 적지 않았다. 그 뒤로 마흘은 조사로, 마을이름은 조사리로 불리게 되었다. 조사란 불교에서 ‘한 종파를 세우고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위하여 애쓰던 원각조사는 81세가 되던 1459년 유월 보름날에 등신불이 되어 열반에 들었다. 열반에 들기 전에도 원각조사는 제자들에게 송라(松羅)에 역(驛)이 생긴다는 예언과 함께 130여년 뒤에 왜적의 침략으로 한반도가 피의 전란에 휘말릴 것을 예고할 만큼 민족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남달랐다고 한다.원각조사가 열반에 든 후 제자들이 모여 불교의식에 따른 화장을 한 뒤 사리를 봉안하고 비(碑)를 세웠다. 처음에 원각조사의 비는 송라면 하송리 오역촌의 도성암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암자가 불타버리고 그로 인해 원각조사의 비석도 사라지고 말았다.그 뒤 수백 년이 지난 뒤인 일제강점기에 홍수로 인해 도성암 터가 유실되면서 비석의 거북 받침돌이 드러났고, 인근을 파헤쳐 비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광복이 된 후에 조사리 주민들이 힘을 모아 비석을 조사리의 원각조사 출생지에 세웠다. 그러나 교회가 들어서면서 다시 비석을 원각조사를 해신신앙의 신으로 모신 서낭당 옆 소나무 숲으로 옮겨 세워야 했다.현재 마을을 지키는 서낭당에는 ‘경신위천(敬神爲天)’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이는 용왕신이나 해신을 공경하고 하늘을 떠받들라는 의미로, 동해용왕의 자식에서 천신의 점지로 인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원각조사의 출생의 비밀이 깃든 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막내자식을 찾기 위해 바위에 굴을 뚫다가 해가 뜰 때까지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굳어버린 용왕부부 바위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암용의 자태는 사라지고 수용의 자태만 바닷가에 애처롭게 남아 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용의 한이 서린 이 바위에 정성껏 기도하면 득남을 한다고 해서 멀리서 적지 않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한다. 아울러 용이 자식을 찾기 위해 뚫어놓은 속칭 ‘구들고래’ 혹은 ‘용치바위’에서는 요즘도 여전히 듣는 사람에 따라서 용왕이 자식을 찾아 ‘내 새끼야’하며 울부짖는 소리나 가야금이나 뿔고동 소리가 들려온다니 정녕 신기하고 경이로운 관광명소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글=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공동기획:포항시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에 있는 용암(龍巖). 암용 바위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파손되었고, 현재는 수용 바위만 남아 있다.조사리 북쪽 구릉 솔숲에 위치한 원각조사비. 원각조사비는 원래 송라면 하송리 오역촌의 도성암에 있었지만 임진왜란때 분실된 후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위치로 오게 됐다.
2014.10.28
[스토리텔링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11> 죽도시장
#1.동해안 사람 풍속도를 엿볼 수 있는 곳 만일 당신이 세상을 떠도는 여행자라면 둘러보아야 할 장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세상에 남긴 문화예술이나 유적·역사적 건축물이 그 하나이고, 둘째는 오랜 자연환경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비경과 다양하고 낯선 풍광이다. 그리고 셋째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온갖 생산소비품의 유통지인 시장이 될 것이다. 앞선 두 가지가 고답적이고 정태적인 관광명소라면 가장 치열하고 직접적인 삶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명소는 전통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전통시장에는 자연이나 역사에서는 접할 수 없는 당대 서민들의 삶의 애환과 생활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푼이라도 값을 깎으려는 손님과 셈이 빤한 상인의 흥정이 마치 한 토막 즉흥연극처럼 이루어지고, 먹을 것과 입을 것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농수산물과 소비재가 좌판을 그득 메운 채 인연 맞는 손님을 기다리는, 어쩌면 매일같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풍속도를 엿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주변 하천 복개전에는 갈대 우거진 섬광복 후 귀국인 좌판 벌이며 첫 형성6·25때 완전 소실됐다 피란민이 재건산업화 인력 유입으로 절정기 맞아포스코와 더불어 포항경제 쌍두마차새 생명의 물길 ‘포항운하’ 개통으로크루즈 연계 ‘문화관광 시장’ 변신 중특히 시장 중에서 삶의 활기를 가장 역동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역시 바다와 인접한 수산시장일 것이다.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기원(起源)했다는 말에서 보듯 어느 곳보다 활달한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게 수산시장인 까닭이다.이러한 수산시장 가운데 동해안 최대 규모의 시장을 꼽으라면 단연 포항의 죽도시장을 들 수 있다. 포항시 북구 죽도동에 있는 죽도시장의 정확한 명칭은 ‘포항죽도시장 활성화구역’으로 죽도시장, 죽도농산물시장, 죽도어시장 등이 연합하여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대지 면적만도 13만2천㎡에 건물면적 6만5천㎡ 규모의 시장으로 수산물, 건어물, 활어회, 농축산물, 채소 및 과일, 가구 및 잡화를 취급하는 2천500여개 점포에 4천500여명의 상인이 종사하는, 소위 ‘없는 것이 없는’ 방대한 규모의 시장이다. #2.지역경제를 이끌었던 포항의 상징 이 죽도시장은 요즘은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포항 명물이자 겨울 별미인 ‘과메기’와 시원한 맛이 일품인 ‘포항물회’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며, 고래고기와 ‘무색·무미·무취’의 3무(無)라는 삶은 개복치의 진기한 맛을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바다와 접한 곳이니만치 모든 해산물의 신선도가 뛰어난 건 물론 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취급하는 해산물의 종류도 다양해서 동해안뿐만 아니라 서해와 남해안에서 나는 모든 해산물이 거래된다.농산물 역시 풍부하다. 새벽 3시면 농산물 도매시장이 열리고, 지역소매상에게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공급된다. 그뿐 아니다. 시장 주변에는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수제비골목’과 닭에 관한 모든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속칭 ‘닭골목’, 곰탕과 돼지국밥, 보신탕 등의 국밥집이 10여개 늘어선 ‘해장국골목’, 담백한 맛이 일품인 문어를 가마솥에 삶아내어 판매하는 가게가 늘어선 ‘문어골목’ 등도 죽도시장의 명물로 시장 방문객에겐 빼놓을 수 없는 순방코스가 되고 있다. 하지만 죽도시장이 처음부터 이처럼 크고 번화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시초가 있듯 죽도시장도 처음엔 조그마한 난전에 불과했다. 죽도시장이 들어선 자리 역시 죽도(竹島)란 이름이 말해주듯 늪지에 갈대가 우거진 작은 섬이었다. 그러다가 후일에 칠성천과 양학천 등의 주변 하천이 복개되면서 육지로 편입된 것이다. 광복 후 일본에서 귀국하여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죽도와 칠성천 주변을 따라 천막을 치고 좌판과 노점을 시작하면서 점차 시장의 형태를 갖춰갔다. 이후로 농수산물의 판매가 증가하고 수백명의 도소매상인이 모여들면서 시장은 점차 번성기에 접어들었지만 아쉽게도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인해 죽도시장은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시장은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피란민이 하나둘 생계를 위해 장터에 모여들면서 죽도시장은 다시금 살아나기 시작했다. 비록 당시엔 도로 및 운송수단이 열악했고, 칠성천이 복개되기 전이라 중앙동, 남빈동에서 시장에 오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으며 송도, 해도에서 올 적에도 나룻배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뒤따랐지만 채소와 과일 등 포항과 인접한 8개 군에서 생산된 물품이 모여들면서 시장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여기에 죽도동 유지와 상인들이 부흥회를 조직하여 시장 재건에 나서면서 시장은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어 갔다.다음 해인 1955년에는 도소매상이 500여개로 급증하고, 노점도 1천여개 증가하면서 명실상부한 경북 굴지의 상설시장으로 거듭 태어났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당시의 여천장과 포항장의 명성을 되살리는, 경북과 포항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특히 포항과 가까운 영덕과 강구, 울진, 구룡포 등 동해안 인근지역을 아우르는 도매시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한편으론 전국에서 손꼽히는 어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여기에 1970년 초에 포항제철(포스코)이 완공되고, 산업화 인력의 유입에 따라 포항지역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죽도시장은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포항제철과 형산강을 사이에 둔 죽도시장은 사람들에게 포항 경제를 이끄는 쌍두마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이즈음 죽도시장은 또 한 번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게 된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시장인 까닭에 구획정리도 안 된 비좁은 골목에다 수도며 위생시설 등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도시인구의 증가에 따라 나날이 늘어나는 새로운 업종과 상인, 몰려드는 손님을 감당해내기엔 시장으로서의 터전이 비좁았던 것이다. 곧 황대봉씨(대아가족 명예회장)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주도하는 구획정리사업이 벌어졌고, 당시 채소밭이던 8토지(현 개풍약국∼오거리)를 시장 부지로 편입시키면서 죽도시장의 규모를 확장하는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었다. #3.죽도시장,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거듭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의 모든 전통시장이 그렇듯 죽도시장 역시 침체의 늪에 빠져들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 편리성과 청결함을 앞세운 대형백화점이나 기업형 마트, 편의점 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전통시장의 존립을 위협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교통 혼잡과 낙후된 시설, 지나친 호객행위 등으로 소비자들도 죽도시장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넘어서는 게 바로 역사와 전통의 힘인 것이다. 또 위기는 때때로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이를 계기로 죽도시장은 새로운 시장의 면모를 선보이기 위해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장을 활성화시킬 방안을 끈질기게 모색했다. 먼저 예전의 번잡하고 구차하던 모습을 말끔히 정리하고 단장하는 한편 전통시장의 특징과 우수성을 최대한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 손님들에게 쾌적한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시장거리를 현대식 아케이드 구조물로 개조하고 주차장을 넓히고 만남의 광장과 해상무대를 마련했다. 또한 전자상거래를 위해 인터넷 쇼핑몰 구축에도 착수했다. 아울러 상거래의 기본인 신뢰와 질서, 규범을 지키자는 친절교육도 실시되었다. 숙원사업이었던 동빈내항의 악취도 포항운하가 개통되면서 말끔히 사라지게 되었다. 외려 포항운하관과 크루즈관광을 겸하는,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겸비한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거듭날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의 문화와 관광이 함께 어우러진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물질적 소비와 판매만 넘쳐나는 단순한 유통시장 구조에서 벗어나 옛날 우리 선조가 그러했듯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밀린 회포를 풀고, 식어버린 가슴을 따스한 정으로 데우고, 먹을거리와 즐길 거리가 흔전만전 넘쳐나는, 경상도 속담에 ‘남이 장에 간다 하니 똥장군 지고 따라간다’는 말처럼 장이라면 무조건 따라 가보고 싶은 그런 흥겹고 신기하며 맛나고 재미나며 풍성한, ‘사람 사는 향취가 묻어나는’ 그런 전통시장의 맥을 이어갈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류의 새롭고 독특한 ‘시장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그런 경이로운 장터가 되리라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 : 포항시죽도시장의 해산물은 신선함과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취급하는 해산물의 종류도 다양해 동해안뿐만 아니라 서·남해안에서 나는 모든 해산물이 거래된다.죽도시장의 어물전 상인이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죽도시장 상인들은 사람 사는 향취가 묻어나는 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쾌적한 쇼핑환경을 위해 현대식 아케이드로 새 단장한 죽도시장은 포항운하관과 크루즈관광이 연계된 문화관광 시장으로 제2의 도약기를 맞고 있다.
2014.10.14
[스토리텔링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10> 영일대해수욕장
<스토리 브리핑> 포항시 북구 영일대해수욕장은 포항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이다. 길이 1.75㎞, 너비 70여m의 고운 모래로 이뤄진 백사장을 자랑한다. 1975년 북부해수욕장으로 개장했다가 2013년 영일대해수욕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포스코와 영일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영일대해수욕장은 해상누각 영일대와 산책로 등 각종 편의시설에 위락시설까지 더해지면서 동해안 최고의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2014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 10편은 영일대해수욕장의 변천사에 대해 다루었다. 주요 스토리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 풀어냈다. #1. 놀라운 변화를 맞이한 포항 영일대해수욕장바다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마치 천년을 기다린 불멸의 사랑처럼. 해안과 인접한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정(鄭)은 동남쪽으로 열린 바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른 저녁의 햇살이 뉘엿한 풍경 아래 가을을 품은 시원한 해풍이 불어왔고, 결 고운 모래가 신발 바닥에 부드러운 감촉으로 와 닿았다. 먼 태곳적부터 육지를 그리워하듯 파도가 하염없이 밀려드는 해안 백사장에는 괭이갈매기 몇 마리가 허공에 그려놓은 오선지의 음표처럼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길들여지지 않은 갈매기들의 자유분방한 자태를 제외하면 주변의 모든 건 낯설고 새로웠다. 해안을 따라 서로 어깨를 겨누며 들어선 현대식 고층빌딩과 명함을 내밀듯 이마에 간판을 내건 많은 술집과 음식점, 카페와 횟집, 편의점과 모텔이 바다를 보며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고층 아파트가 저마다 위용을 뽐내기나 하듯 곳곳에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정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남유럽이나 지중해의 해수욕장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었다. 잔잔하게 파도가 밀려드는 해안 모래사장에는 연인처럼 짝을 짓거나 혹은 서너 명씩 무리지어 푸른 바다를 전망하거나 넓은 백사장을 산책하며 나름대로 바다를 만끽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애완견을 데리고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도 있었고, 육상선수처럼 러닝셔츠에 쇼트 팬츠 차림으로 해안을 달리는 건장한 젊은이도 보였다. 일찌감치 모래밭에 원을 그리며 퍼질러 앉아 술판을 벌이는 청년들도 보였다. 정씨는 자신이 찾아온 바다가 어린 시절 한때를 보냈던, 추억이 너무 많아 꿈속에서도 종종 등장하곤 했던 그 해변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있고 뽕밭이 변해 바다가 된다는 뜻의 상전벽해라는 고사성어도 있지만 자신의 기억에 선연했던 바다가 외국에 떠나 있던 수십년 동안 이처럼 놀랍게 변해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우측에 보이는 포스코의 웅장한 모습과 좌측의 바다를 향해 거북등처럼 튀어나온 두호동 동산 모습 정도일 것이다. 북쪽의 어촌은 어릴 적에 ‘설머리’로 불리기도 했다.“아우! 정말 오랜만이다.”지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돌아보니 중학교 동창인 김이었다. 이틀 전에 미리 전화로 바닷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던 터였다. 어린 시절엔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던 동네친구이자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던 죽마고우였다. 이제 그도 시간의 흐름엔 어쩔 수 없던지 어릴 적에 보았던 개구쟁이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귀밑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어 있었다. 다른 동창에게 들은 얘기론 그는 이곳에서 제법 괜찮은 상가건물을 운영하며 북부상가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2. 북부해수욕장을 추억하다“넌 여기 와본 지 30년은 넘었지, 아마?” 반갑게 악수를 나눈 뒤 동창 김이 감회 어린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랬다. 그쯤 되었을 것이다. 그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지금의 해수욕장이 들어선 자리는 털털거리는 버스가 하루에 몇 번 오가는 작고 외진 바닷가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당시에 작은 모래톱이 있던 백사장에는 어민들이 잡아온 고기를 말리는 발이나 덕장이 늘어서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어민들은 통통배를 타고 인근 바다에서 잡아온 멸치와 오징어 따위를 덕장에 널어두고 따가운 햇살에 말리곤 했다. “작년부터 이곳의 이름이 영일대해수욕장으로 바뀐 것 모르지? 예전의 송도해수욕장보다 여기가 전국적으로 더 유명해졌어.”어깨를 나란히 하고 백사장을 걷던 친구 김이 은근히 자부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 정은 여객선 터널 너머의 송도해수욕장 방향을 바라보았다. 친구의 말처럼 그가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엔 송도해수욕장의 명성이 꽤나 높았다. 여름철만 되면 바캉스 인파가 백사장을 가득 메웠다. 포항시민은 물론 인접한 대구와 울산, 멀리는 서울사람들까지 피서를 즐기기 위해 송도해수욕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 당시부터 포스코를 비롯한 인근 산업체가 포항을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그에 따른 산업폐수와 도시 생활폐수가 형산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들면서 바닷물이 오염된 탓이었다. 게다가 새로 들어선 방파제의 영향 탓인지 송도해수욕장의 모래가 빠르게 유실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실되는 모래만큼이나 빠르게 송도해수욕장의 명성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당시 피해를 입은 건 비단 송도해수욕장뿐만이 아니었다. 1975년에 새롭게 북부해수욕장이란 이름으로 개장되었던 두호동 앞바다 역시 환경오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철강관련 산업들이 호황기를 맞으면서 경향 각지에서 수많은 근로자와 노동인력이 포항으로 몰려들었다. 인근의 창포동, 장성동, 두호동이 상업용지와 주거용지로 개발되었고 여기서 발생한 생활하수며 오폐물이 정화되지 않고 하수관을 통해 그대로 해수욕장으로 흘러들었다. 이런 실정을 잘 알고 있던 인근 지역주민들은 북부해수욕장에 몸을 담글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가끔씩 사정을 모르는 외지인들이 수영을 한답시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피부병을 걱정할 정도였다. “어릴 적에 너와 내가 여기 해변에서 명지조개를 잡은 것 기억나?”역시 중·고등학교 무렵의 회상을 하고 있었던지 김이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바닷물이 무릎 정도 오는 지점까지 들어가 트위스트를 추듯 몸을 움직이면 모래 속의 딱딱한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지고, 손으로 건져 올리면 대합과 비슷한 형태의 황갈색 명지조개가 나왔다. 당시 마을 어민들은 갈퀴를 사용하여 모랫바닥을 긁어 잡은 조개에 콩나물을 넣어 국을 끓이거나 찜을 만들어서 술안주로 애용했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 #3.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지는 해변 “이제 이 영일대바다에서도 명지조개가 다시 잡히기 시작했어.”친구 김이 말했다. 바다가 오폐수로 더러워지면서 자취를 감춘 명지조개가 다시 잡힌다는 건 그만큼 바다가 청정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놀라는 그의 표정을 본 김이 덧붙였다.“하수시설을 완비한 데다 두호동 어촌계에서 씨조개를 뿌린 게 유효했던 모양이야. 곧 예전처럼 명지조개가 지천으로 잡힐 때가 올 거야.”두 사람은 바다를 향해 길게 석조다리로 이어진 해상누각인 영일대에 올랐다. 한눈에도 전망이 기가 막혔다. 천천히 석양이 지고 어둠이 내리면서 주변 경관이 점차 바뀌어갔다. LED 조명으로 환해진 포스코의 스카이라인과 인근 빌딩과 상가에서 환하게 밝힌 조명등이 해수면에 반사되어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마치 초현대식 해양도시의 야경을 보는 듯했다. 바다 중간에서 색색의 조명을 받으며 분수가 용트림하듯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쳤다. 고사분수라고 했다. 친구 김은 이곳 영일대 백사장에서 매년 포항국제 불빛축제와 바다국제공연예술제 등 갖가지 축제가 열리며 이때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 소식은 그도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접한 바가 있었다.“머지않아 영일대해수욕장이 동해에서 가장 이름난 관광명소가 되리라 생각해.”조명이 휘황한 영일대 난간에 기대어 한층 화려해진 주변 야경을 바라보던 정에게 김이 말했다. 정은 친구의 바람이 단순한 개인적 희망이 아니라고 느꼈다. 정은 문득 자신도 이곳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밤마다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야경을 빚어내고, 마음 맞는 사람과 술과 음식이 있으며 철마다 축제가 열리는 그런 곳이라면 누군들 살고 싶지 않을까.“이제 술이나 한잔하러 가볼까. 그동안 밀린 얘기도 나눌 겸.”정의 말에 김이 반색을 지으며 앞장을 섰다.“잘 아는 횟집이 있는데 그리 가지. 고향을 찾아온 걸 축하해서 오늘 내가 한 턱 쏠게.”빛과 색으로 수놓인 밤의 경치가 영일대해수욕장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그것은 고흐의 그림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보다 더욱 찬란한 야경이었다.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도움말=김상출 전 북부해수욕장 상가연합회장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공동기획 : 포항시포항시 북구 영일대해수욕장은 길이1.75㎞에 너비70여m의 백사장을 자랑한다. 1975년 개장 당시에는 인근 송도해수욕장의 유명세에 밀렸지만, 백사장 면적이 늘고 시설 및 환경 개선이 이뤄지면서 현재의 번화한 도심 해수욕장으로 거듭났다.영일대해수욕장 북편에 위치한 영일대 해상누각은 영일대해수욕장의 명물이다. 포항시 북구 두호동 주민센터 앞 해상 1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2014.09.30
[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13·끝> 고려와 후백제가 마지막으로 겨룬 ‘일리천 전투’
#1. 왕건, 강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대치서기 936년 9월. 가을이 무르익었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수확 철이지만, 농부들은 애를 태운다. 바야흐로 큰 전쟁이 벌어질 조짐이어서 동원령이 떨어진 가운데, 모두 창검을 손질하기에 바빴던 게다.왕건은 천안부에 군사들을 집결시킨다. 지난 6월 태자 무와 박술희 장군이 보병과 기병을 주둔시켜서 조련하고 있던 곳. 군사들을 점검한 그는 바로 일선군(一善郡·지금의 구미 선산지역)으로 이동한다. 일선은 후백제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으로, 견훤의 아들 신검이 새롭게 발흥하고 있었다. 왕건은 문경으로 해서 상주를 거쳐 선산으로 들어와(일설에는 문경~안동~예천~의성으로 진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후백제의 신검 군대와 대치한다.왕건은 임시 막사 안에서 다소 느긋하게 전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어쩌면 이번 전쟁은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창과 칼을 겨누었던 견훤이 투항을 해온 것이다.낙동강? 감천? 일리천 위치 의견 갈려‘어갱이들’‘발갱이들’‘점검평야’ 등 일리천 전투 관련 지명 여전히 전해져고창(古昌·안동)전투에서 왕건과 견훤은 한때 피나는 고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견훤은 대패했고, 도주했다. 그후 선산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고창전투의 대승은 뜻밖에도 많은 이득을 가져와 고창 일대 30개 군현이 고려에 투항했다. 다른 군현과 성도 고려에 투항하는 수가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대업의 실마리가 뜻밖에도 견훤에 의해 풀리기 시작했다.견훤의 집안싸움이 그런 기회를 가져왔다. 견훤은 막내아들 금강을 특별히 사랑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를 눈치 챈 장남 신검이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로 유폐시키고는 왕이 되었다. 사위 박영규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한 견훤은 곧바로 개경에 연락해 투항 소식을 전했다. 왕건을 만난 견훤은 비통한 어조를 감추지 않았다. “내가 아들을 잘못 두었소. 부디 신검을 토벌하여 주길 바라오.”견훤은 거듭 요청했다. 마침내 왕건의 마음이 움직였다. “좋소. 함께 전투에 임해서 신검을 잡읍시다.”그렇게 해서 왕건과 견훤이 나란히 고려군 진영의 복판에 서게 된 것이다. 누가 막사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 오시오.” 왕건은 반색을 한다. 견훤이다. 둘은 얼굴을 맞대고 곧 일어날 전투에 대해 의논을 한다. “우리는 함께 중군을 맡을 것입니다.”왕건은 견훤에게 웃음을 지어보인다. 견훤은 고개를 끄덕인다. 고려군 9만명(삼국사기에는 10만7천명 또는 8만6천여명)의 진영이 짜여진다. 기마군 1만명과 보병 1만명으로 좌강(左綱·좌군)을 삼고, 역시 기마군과 보병 2만으로 우강(右綱·우군)을 삼는다. 중군으로는 기마군 2만과 기병 9천500여명을 배치한다. 이 밖에 보병 수천 명과 여러 성의 원병군 1만여명이 참가한다. 이 전투에 참가한 군대는 고려군과 지방 호족의 군대는 물론, 926년 거란에 정복당한 후 고려 땅으로 대거 옮겨 온 발해 유민도 포함되어 있다. 중군에 배치한 후삼국 최강의 장수 유금필이 이끄는 말갈기병도 눈에 띈다. 고려의 각 부대는 깃발을 선두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드디어 사열이 시작된다. 왕건과 함께 나타난 견훤을 보자 군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어떻게 적장이 우리 주군과 함께 있단 말인가?”“글쎄, 견훤이 우리 주군에게 투항을 하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우리 주군에게 부탁을 했다는군.”“그래? 그럼 우리가 유리하겠네!”견훤이 투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려군은 사기가 오른다. 왕건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장성들과 군사들을 독려한다.고려와 후백제의 부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왕건은 강 건너 자욱한 먼지에 휩싸인 후백제군을 보면서 이제 대업을 이룰 때가 머지 않았음을 예감한다. 견훤이 고려에 귀순한 것에 자극받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것이 얼마전이다. 경순왕은 친히 개경으로 와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제 후백제만 평정하면 천하의 대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후백제 신검의 부대는 강 건너 유난히 깃발이 많이 펄럭이고 있는 부대의 중앙을 유심히 살핀다.“왕건의 옆에 있는 장수가 누구냐?” 신검의 물음에 누가 대답한다. “폐하, 상왕전하입니다.”“뭐라고?” 신검은 크게 놀란다. 왕건으로 보이는 갑옷 입은 이의 옆에 선 이가 견훤인 것을 알아본 군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왕이 저기에 있다. 어떻게 된 셈인가?”군인 사이에 급속하게 퍼지는 온갖 유언비어를 신검은 안간힘을 다해 막는다. “우리를 배반한 늙은이일 뿐이다. 동요하지 말라!”그러나 ‘고려진이 10만 대군인 데다 우리의 왕이 직접 그 대군의 일부를 지휘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후백제 진영에 퍼진다.#2. 왕건, 마침내 후백제를 멸망시키다마침내 고려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꽹과리와 북소리가 울리면서 자욱하니 먼지가 인다. 먼지 속으로 반짝이는 창검이 살기등등해진다. 그러나 후백제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면서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갑자기 고려군의 진영으로 백기를 든 군대가 먼지 속에서 나타난다. 고려군이 창검을 겨누며 그들을 막는다. 백기를 든 군인들이 말에서 내려서는 꿇어 앉는다. “우리 백제의 왕을 뵈러 왔소!” 누가 소리친다. 견훤이 나서자 그들은 일제히 견훤의 말 앞에 엎드린다. “그대들은 누군가?” 견훤이 묻는다. “백제의 좌장군 효봉과 덕술, 애술, 명길입니다. 저희는 고려군에 복속되기를 희망합니다.”“그래, 백제의 왕 신검은 패륜아니라. 그리니 정통성이 없느니라.”“맞사옵니다. 우리 장병들도 그 점에서 신검 왕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그들의 항복은 대번에 고려군 진영을 흔든다. 고려군의 사기는 크게 오른다. 왕건이 나선다. “신검은 어디에 있는가?”“중군 속에 있습니다.”“적의 중군을 좌우에서 협공하여 격파하고 신검을 잡아라!”고려의 기마군과 보병이 후백제군의 중군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한다. 전세는 고려에 유리해진다. 후백제군은 우왕좌왕한다. 고려군은 파죽지세로 후백제군을 유린해 후백제의 장수인 흔강(昕康)과 견달(見達) 등을 비롯하여 군사 3천200여명을 사로잡고 5천700여명의 목을 벤다. 후백제군은 지휘체계가 흔들리면서 교란이 일기 시작한다. 고려로 투항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기네끼리 “항복하자” “안 된다.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다투는 지경으로까지 이르더니 결국 서로 창을 겨누면서 싸움을 벌이는 아비규환이 벌어진다.신검은 할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린다. 군사들은 먼지 속에서 퇴로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쏟으면서 숱한 사상자를 낸다. 달아나는 후백제군을 고려군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죽이거나 사로잡는다. 후백제군은 밤낮없이 달아나 황산군(黃山郡·충남 논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炭嶺·대전 동쪽 식장산)을 넘어 마성(馬城·옥천)에 주둔한다. 그러나 추격의 끈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는다. 신검은 비통한 심정으로 추격군의 동태를 묻는다.“그들이 어디까지 따라붙었느냐?”“황산에 이미 도달했다 합니다.”“그렇다면 완산주로 오는 길목이 아니냐?”신검은 절망적으로 외친다. 후백제의 본거지인 완산주가 점령되면 더는 어디로 갈 데도 없다. 신검은 칼을 꺾는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황산으로 가자.”신검은 아우 청주(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데리고 왕건 앞에 엎드린다. 비로소 왕건이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는 순간이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한다. 포로가 된 병졸은 모두 풀어준다. 항복해 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한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 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인다. 신검은 항복했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한다(삼형제를 모두 죽였다는 설도 있다).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우울함에 휩싸인다. 자신이 이룬 대업이 자신의 대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게 너무 마음 아팠다. 거기다 몸도 등창이 매우 심하게 나는 등 만신창이가 된다. 그리하여 황산의 한 절에서 쓸쓸히 사망한다.#3. 당시와 관련된 지명 곳곳에 남아있어‘일리천 전투’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다. 그 현장인 일리천이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에 대해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현 낙동강을 지칭한다는 설도 있고,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이었을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구미지역에서는 낙동강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낙동강과 감천이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일리천 전투와 관련된 지명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견훤의 아들 신검의 부대가 집결한 곳은 지금의 고아읍 일대다. 고아읍 관심리 앞 들판을 ‘어갱이들’이라 한다. 태조 왕건이 매봉산을 사이에 두고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고아읍 관심리 앞들에 주둔시켰다고 해서 이곳을 ‘어검(御劒)평야’ 또는 ‘어갱이들’이라 한다. 또한 진을 쳤던 곳이 ‘장대(새도방)’다. 신검이 송림리 앞들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군사를 괴평리로 옮겨 배수진을 친 곳이 ‘발검(撥劒)평야’, 곧 ‘발갱이들’이 된다. 태조 왕건이 매봉산 서쪽 낮은 구릉으로 진격해 기습 작전을 펴서 점령한 곳이라 해서 ‘점검평야’ 곧 ‘점갱이들’이라 한다. 이들 지명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주민에 의해 불리고 있다.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공동기획 : 구미시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했던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 앞 어갱이들. 지금은 곡창지대로 변해 과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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