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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5> 우광훈의 '어린 음악대의 탄생-아동문학가 김성도 스토리 (경산)'
Story Memo 아동문학가 겸 동요 작곡가인 김성도는 1914년 경산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하양초등과 계성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8·15 광복 이후 대구로 돌아와 계성고와 계명기독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평생을 교단에서 보냈다. 문학적 재능과 음악적 소질이 뛰어나 계성학교 재학 중에 이미 아동잡지 '별나라’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를 발표했다. 특히 1934년에 작사·작곡한 '어린 음악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전 국민이 즐겨 부르는 동요가 됐다. 또 어린이들의 읽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에 '안데르센전집’을 번역해 국내에 처음으로 안데르센 동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영남일보의 '김성도 스토리’는 그의 대표작인 '어린 음악대’를 작사·작곡하게 된 배경을 주요 모티브로 재구성했다. ● 도움말 : 아동문학가 하청호 1935년 경성(京城) 연희전문학교 교문 앞. 빛바랜 교복 차림의 한 사내가 벤치에 앉아 손에 든 편지를 읽고 있었다.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덕촌리…. 연필로 꼭꼭 눌러 쓴 향서의 내용은 더없이 평이했다. 가족들의 일상에 관한 세세한 묘사와 더불어, 사내의 안부와 근황을 묻는 소소한 질문들. 하지만 사내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 사내의 머릿속은 어린 시절 동생들과 어울려 보리방아 찧던 일이며, 금호강변에서 멱 감던 일 등 그리운 옛 추억들로 가득했다. 나이는 스물 둘. 눈에 띌 만큼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아직 중학생이라 해도 될 만큼 앳돼 보였다. 사내 옆에는 다양한 종류의 문예지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1932년, 사내는 열아홉이란 나이에 주요한이 편집하는 잡지, '동광(東光)’이 주관한 전국아동문예콩쿠르에서 '우주의 빛’이란 시(詩)로 입선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동요 '강아지래요’가 ’신가정(新家庭)’이란 잡지에 연거푸 입선함으로써 아동문학을 향한 자신의 꿈을 맘껏 펼쳐나갈 수 있었다. '나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리라….’ 사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어린이’란 잡지를 펼쳐들었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소년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교문 쪽을 향해 달음질치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들은 잔디밭을 곧장 가로지르더니 광장 한가운데에 잠시 멈춰 한껏 재잘거린 다음 양팔을 휘저으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봄날의 고양이처럼 서로의 뒤를 쫓고, 놀라 도망가고, 마구 뒤엉키는…. 소년들의 움직임은 더없이 역동적이었고 자유로웠다. 간간히 일본 순사의 탁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기모노를 걸친 여성들이 게다를 끌며 소년들의 옆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메마른 가로등 앞. 한 소년의 행동이 수상하였다. 소년은 여느 소년들과는 달리 상가(商街)가 시작되는 사루비아 화단 옆에 외로이 서 있었다. 오후의 햇살은 암막 위를 비추는 서치라이트처럼 강렬했고, 소년의 얼굴은 하얀 분을 잔뜩 칠한 가부키 배우처럼 더없이 희화적이었다. 소년은 살짝 미소를 머금더니 자신의 주먹을 입 가까이에 가져갔다. 그리고 나팔을 불듯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기기를 반복하였다. 지그시 감은 눈과 붉은 입술, 높푸른 하늘과 투명한 공기, 희고 가는 팔목과 조그마한 손. 그렇게 마임 형식으로 시작된 연주는 실연처럼 강렬한 가락과 리듬으로 변하여 사내의 귓속을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곱디고운 음(音)의 향연…. 그 소리는 사내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사내는 밀려드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교문 앞 그늘에 모여 있는 소년들을 불렀다. 소년들은 사내의 부름에 잠시 쭈뼛쭈뼛 거리더니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귀염성 있는 이목구비에 검게 탄 피부는 더없이 건강해 보였다. “쟤는 왜 저렇게 혼자 있는 거니?" 사내가 화단 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소년들은 겁에 잔뜩 질린 듯한 얼굴로 사내의 교복만을 힐끔힐끔 훔쳐볼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난 조선인이야. 너희들과 똑같은." 사내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으며 까까머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식민통치는 더욱 조직화되고, 제국의 폭압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순사복만 봐도 오줌을 지리던 아이들이 생겨날 지경이니, 교복에 겁을 먹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너희들과 떨어져 노는 게 이상해서 물어보는 거야." 사내가 한껏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머금자, 그제야 소년들은 '저 아이의 아버지가 조선혁명군의 일원이었다는 것, 흥경성전투에서 그만 총상을 입고 돌아가셨다는 것, 그날 이후 저렇게 매일 군악대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까지 세세히 늘어놓았다. '그랬구나….’ 사내는 짐짓 무거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소년에게로 돌렸다. 그림자 한점 없는 광장, 한가운데였다. 소년은 이번엔 어디서 주워 왔는지 둥근 차돌을 양손에 들고 탁탁 부딪히며 광장 한가운데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북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소년은 잠시 행진을 멈춘 다음 차돌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더니 다시 주먹손으로 나팔부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소년은 나팔수와 고수(鼓手)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고갔다. 얼굴은 여전히 태양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고, 행인들의 시선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순간, 소년의 친구들이 소년 쪽으로 우르르 달려가더니 소년 뒤에 일렬로 늘어섰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얼굴로 소년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보았는지 바이올린, 탬버린, 트럼펫, 심벌즈, 캐스터네츠, 플루트, 작은 북…. 소년의 슬픔을 위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소년의 기행(奇行)을 조롱하려는 것인지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들이 이뤄내는 화음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훌륭한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망국의 아픔 따윈 전혀 느낄 수 없는, 동심(童心)만이 표현할 수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광장의 축제요, 희망의 송가였다. 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어른들은 아무도 소년악단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영토를 잃어버린 제국의 황민들은 소년악단의 음악에 귀 기울일 여유조차 없었다. 굴욕과 비관과 염세로 점철된 그들의 고단한 삶이 자신의 눈과 귀마저 멀게 한 것이다. 그렇게 소년들의 염원과 희망으로부터 단절된, 그들의 절망은 깊고도 어두웠다. 사유의 부재가 아니라 소통의 부재, 관심의 부재가 아니라 시선의 부재를 탓해야 했으리라. 잠시후 소년이 앞장서서 행진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친구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따따, 뚜뚜, 쿵작작, 피피리…. 흥에 겨운 악단은 신세계 그 자체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순간, 사내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재빨리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메모장과 볼펜을 꺼내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 가지요 쿵작작 쿵작작 둥근 차돌로 쿵작작 쿵작작 북을 칩니다 구경꾼은 모여드는데 어른들은 하나 없지요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끝낸 사내는 곧장 교내에 있는 피아노실로 달려가 자신의 시에 곡을 붙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학장인 백낙준 박사의 도움으로 작곡공부를 한터였다. 그렇게 곡이 완성되자, 사내는 인근 소학교로 자신의 노래가 담긴 악보를 인쇄해 돌렸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경성방송국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자신을 '이하윤’이라고 밝힌 남자는 사내가 작곡한 '어린 음악대’를 어린이 특집방송에 내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하윤이라면 경성에서는 꽤 알려진 방송인이자, 시인이요, 문학평론가였다. “마지막 노랫말이 특히 인상적이었소"라고 이하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어른이란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순간, 사내는 벅찬 감동에 사로잡혔다. 작가와 독자, 창작과 감상 사이에서 오는 공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열망이 담긴 언어가 결코 혼잣말이 아니었다는 것, 이 암울한 시대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은 결국 불굴의 의지요 노래라는 것, 침묵과 순응조차 공감을 만나면 외침이, 아니 조그마한 함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광복을 향한 잰걸음은 언제 어디서나 진행 중이란 사실이었다.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 기획 : eride GyeongBuk동요 '어린 음악대’의 노랫말이 적혀 있는 김성도 노래비. 1988년 김성도를 기리기 위해 경산문학회가 그가 다녔던 하양초등학교에 세웠다. 1974년 대구청년회의소가 주관한 아동백일장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아 심사평을 하고 있는 김성도의 모습. (영남일보 DB)
2011.07.13
[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4> 이상국의 '향단(香壇)과 옥결(玉缺) - 조선 성리학 거두, 회재 이언적의 孝와 仁 이야기 (경주)'
회재 이언적(1491~1553)은 경주라는 '스토리의 보물창고’를 고향으로 둔 까닭에, 사람들의 눈길을 덜 받아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옥산 아래 독락당에서 홀로 즐김(獨樂)을 기꺼워하신 분이 그 일을 억울해 할 리야 없지만, 조선에 드리운 정신의 큰 빛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우리가 정작 억울해 해야 할 일이다. 회재는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서 태어난 동방5현(東方五賢·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준봉(峻峰)이다. 그보다 11세 아래인 퇴계 이황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생이 살아계실 때 스스로 깊이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분의 큰 도를 알지 못했다. 나 또한 어리석어 일찍이 벼슬에 나아가 선생을 우러러보고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그에게 깊이 물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10여년 전부터 병이 들어 재야에 묻혀 있으면서 의지할 데를 찾다가 그에게 물을 기회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 뒤에야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으로 선생을 흠모하였다."퇴계조차도 무릎을 꿇고 그리워했던 대유학자가 우리에겐 왜 이리 낯설어졌을까. 그가 펼친 학문의 경지가 워낙 큰 성취였는지라 짧은 두리번거림으로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천하의 인재에게 고루 기회를 줘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굳이 학파를 개창하지 않아, 그의 학문을 치열하게 홍보해 줄 제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공자와 맹자가 닦아놓은 유학의 큰 도는 남송(南宋)의 주희(1130~1200·호는 회암(晦庵))에 이르러 학문의 체계를 갖춘다. 그로부터 361년 뒤 조선에서 '주희(晦)의 집(齋)’을 자처하는 선비가 등장한다. 그가 회재 이언적이다. 주자학을 이 땅에 제대로 이식한 사람. '철학자 회재’ 얘기도 좋지만, 여기선 그 분의 사람냄새를 좀 맡자.양동마을 들어서는 어귀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눈에 잘 띄는 집이 하나 있다. 향단(香壇·보물 제412호)이란 이름을 지닌 이 곳은 회재의 어머니 월성손씨가 거주했던 집이다. 원래 99칸이었는데 6·25전쟁 때 일부 파괴된 것을 보수하면서(1976년) 56칸으로 줄였다. 지금은 51칸이다. 독락당에 몸을 낮춰 앉았던 회재답지 않게 지은 고대광실(高臺廣室)은, 외롭게 살아간 어머니를 우러르는 그의 마음이 아닐까.향단은 회재가 경상감사로 부임할 때 노모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이 지어준 집이라는 설도 있고, 회재가 자신을 대신해 고향에 남아 노모를 모시는 아우 이언괄을 위해 지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경상감사 시절이면 1543년(53세)이다. 이 무렵 어머니는 노환이 깊어 풍기(風氣)에 허리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홍문관 제학 겸 동지성균관사(종2품)를 맡고 있던 이언적은 3월에 관직을 버리고 어머니 월성손씨에게로 달려간다. 아들을 보고는 현기증으로 주저앉는 어머니를 껴안고, 그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한 달이 채 못되어 중종은 회재를 불러올린다. 왕은 당시 경상감사에게, 회재의 모친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고 잘 돌보라는 특명을 내린다. 대구의 비 내리는 고모령(顧母嶺)을 지나며 편찮은 노모가 있는 쪽을 얼마나 돌아보았을까. 상경하던 회재는 문경에서 자신이 병들어 눕게 된다. 왕은 다시 충청감사에게 분부하여 회재를 극진히 간호하라고 한다. 이 해 7월 지방관을 한사코 원하는 이언적의 뜻을 받아들인 중종은 마침내 경상감사로 임명한다. 이언적은 소문난 효자였다. 그는 그 전에도 몇번이나 노모 봉양을 위해 귀향을 간청했지만, 왕은 '조정에 쓸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느냐’면서 허락해주지 않는다. 끈질긴 애원에 중종이 마지못해 안동부사와 김해부사로 발령을 냈으나, 이번엔 사간원에서 '격을 낮춰 지방관료로 가는 건 옳지 않다’며 반대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한 그 내면에는, 적막한 과부의 삶에 대한 연민이 숨어있다.이언적은 18세 때 결혼한 부인 밀양박씨에게서 아이를 얻지 못했다. 아우인 언괄은 아들을 보았으나, 어릴 때 병으로 잃고 말았다. 두 아들을 앉혀놓고 어머니는 쓸쓸한 집안을 둘러보며 한숨 짓는다. “어찌 이 집은 이리 자식복이 없단 말인가?" 서른 초반에 남편을 잃고 고단하게 살아온 그녀는 자식이라도 번성하기를 원했다. 50세 되던 해, 이언적은 어머니를 위하여 사촌동생 이통의 셋째 아들 응인을 양자로 데려온다. 회재의 또 다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기문총화(記聞叢話·엮은 이와 연도 미상)’와 조식의 '남명집’에 나온다. 경주에서 주학교관(훈도)을 하고 있던 이언적은 25세 되던 해(1516년) 석(石)씨 성을 가진 관비(官婢)와 사랑을 했다. 그리고 임신한 상태였는데, 그것을 모르고 조윤손이란 사람이 석씨가 마음에 들어 소실로 들였다. 조윤손에 대해선 설이 여럿이다. 지중추부사를 지낸 조윤손(曺潤孫)이라고도 하고, 남명 조식의 친척이었던 조윤손(曺胤孫)이라고도 한다. 7개월 뒤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윤손은 그에게 옥결(玉缺·혹은 옥강(玉剛)이라고도 한다)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옥결이 장성하자 그는 후사로 삼고 집과 논밭, 노비들을 물려준다. 이언적은 어느날 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여인이야 첩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아들은 돌려주는 게 옳지 않은지요?" 1547년 조윤손이 죽고 난 뒤 옥결은 장례를 치르고 나서 회재의 부인 박씨를 찾았다. 박씨는 울면서 그의 손을 잡고는, 회재가 강계로 귀양을 떠났으니 그리로 가보라고 했다. 강계에서 옥결은 회재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듣는다. 그 기록이 '관서문답록’(주해잠계집(註解潛溪集)에 실려 있다)이다.옥결은 이 곳에서 생부에게 '전인(全仁)’이란 이름을 받는다. 회재가 평생을 닦아온 공부의 핵심이 '인(仁)’이 아닌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과아자야(汝果我子也).’ 너는 과연 내 아들이로구나. 평생 학문을 통해 낳은 자식 하나가 바로 온전한 사랑(全仁)이로구나. 그런 부르짖음이었을까. 이전인은 정3품 당하관인 예빈시정 벼슬을 했다. 땅밑으로 몰래 흐르는 시냇물의 의미로 '잠계(潛溪)’라는 호를 썼다. 이후 이언적은 '법자(法子)’인 응인에게는 종택을 지키도록 하고, '혈자(血子)’인 전인에게는 옥산서원을 지키도록 분배를 한다. 회재는 '구인록(求仁錄)’이란 책을 썼는데, 그는 천지의 마음이 인(仁)이라고 말한다. 노자는 '천지가 어질지 않다(天地不仁)’고 말했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회재는 말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얻어 그것을 본성으로 삼은 까닭에 사람 모두가 측은한 마음을 지닌다. 이것이 인의 실마리다. 생명을 좋아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은 천지의 덕과 부합된 것이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며, 인간은 만물의 신령이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갖추면 그것이 효도이며, 그것은 천지의 마음을 갖추는 인(仁)이기도 하다." 그는 인(仁)을, 생명을 낳은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풀어낸다. 이런 생각은 열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와 어린 동생 둘과 어렵사리 살아낸 지난 시절의 이력에서 피어난 것일지 모른다.어머니 손씨의 친정집이기도 한 양동마을의 '서백당(書百堂)’은 회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설창산이라는 풍수가는 이 집에서 세 사람의 빼어난 인물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우재와 회재, 두 사람이 이미 태어났으니 앞으로 한 사람이 더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월성손씨 종갓집인 이 집 사람들은 혹시 딸네들이 와서 여기서 아이를 낳아 회재처럼 높아질까 싶어, 임신한 몸으로는 자고가지 못하게 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서백(書百)은 참을 인(忍)자를 하루에 백번씩 쓴다는 의미로 마음단속을 잘 하라는 의미가 담겼다. 그래서 그런지 회재는 소용돌이치는 사화(士禍) 속에서 비교적 온건한 처신을 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랬지만 57세(1547년) 때 정미사화로 칼끝을 결국 피하지 못하고 유배를 간다. 이듬해 모친의 부음을 한 달 늦게 전해듣는다. 이후 1553년 63세로 형지에서 눈을 감는다. 강계 귀양지에서 아들 이전인에게 해준 말은 묘한 여운이 남는다.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을까.전인이 여쭙기를, “정자(程子)께서 과부는 차라리 굶어죽을지언정 재가는 하지 않는다는 의논이 어떠한지요?" 하니 대인께서 말씀하셨다.“부인된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지. 그렇다고 천하의 모든 여자들이 이처럼 굶어죽을 필요야 있겠느냐. 지금 양반들이 한미하고 일가친척이 별로 없이 젊은 나이에 자식이 없는 데도 새 과부로 재가하지 않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부모로서는 마땅히 당사자의 뜻을 물어 수절을 하겠다면 허락하되, 그렇지 않다면 재가토록 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 <관서문답록>에서.회재에 관한 스토리텔링은, 그를 범접하기 어려운 위인으로만 만들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조선 성리학의 거봉이라는 찬사는, 소통의 문지방만 높일 뿐이다. 회재도 몰래 사랑을 하고, 외로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으며, 어지러운 세상에서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치적 행동가였다. 또 혼자 가만히 앉아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는 끝없는 '자기완성’의 열정가였다는 점들이 고루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양동마을에서는 향단-서백당-무첨당을 중심으로 한 길과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회재 묘소와 달전재사를 아우른 스토리코스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또 옥산마을의 독락당과 옥산서원은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혀 상심하던 회재가 자연을 벗삼아 한적하게 뜻을 벼르고 후학을 위해 가르침을 행하던 곳으로, 아름다운 건축 공간미를 함께 즐기면서 삶의 의미를 반추해볼 수 있는 명소다. 협찬 : pride GyeongBuk경주 양동마을의 향단(보물 제412호). 회재 이언적의 어머니 월성손씨가 거주했던 집이다.양동마을 서백당 전경.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다.무첨당 전경. 여강이씨 종가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상류층 주택에 속해 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나 쉼터 또는 책 읽는 장소로 사용됐다.
2011.07.06
[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3> 김정현의 '부석사 용이 된 사랑의 여인 선묘낭자 (영주)'
#Story Memo영주 부석사는 중국에서 유학한 의상 대사가 신라통일기인 676년 세운 한국의 화엄종찰이다.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이면서 ‘가장 웅장한 절집’으로 알려진 1300년 고찰이기도 하다. 부석사에는 의상 대사와 중국 여인 선묘 낭자에 얽힌 애틋한 러브 스토리가 유명하다. 선묘는 당나라로 유학 온 의상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불법을 공부하는 의상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의상은 선묘의 사랑을 거부하고 공부를 마친후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탄다. 이때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진후 용이 되고, 의상 대사가 험한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이 지역에 있던 500여명의 유민이 절 창건을 방해하자, 용이 된 선묘가 커다란 너럭바위를 들어올려 유민을 물리치고 절 창건을 도왔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왼편 뒤쪽에는 당시 선묘가 유민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는 너럭바위가 전설처럼 남아있다. ‘부석사의 용이 된 사랑의 여인 선묘낭자’ 스토리는 의상과 선묘낭자의 설화를 모티브로 재구성한 것이다.서기 676년. 서라벌 남산 동쪽 기슭의 황복사(皇福寺)에 주석하여 화엄계를 강론하고 있던 의상(義湘)대사는 문무대왕으로부터 사찰 창건을 명받았다. 의상은 이미 문무왕 원년인 661년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672년 귀국하여 동해 바닷가에 낙산사를 창건한 바 있다. 왕명을 받은 의상이 향한 곳은 소백산맥 자락의 봉황산(鳳凰山)이었으니,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이 그곳이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격멸하고, 668년에는 평양성마저 함락시키면서 고구려를 멸하였다. 그러나 군사적 연합에 그쳐야 할 당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면서 지배권을 행사하려 들었으니, 신라는 진정한 통일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그들을 몰아내야 했다. 이에 문무왕은 명장 김유신에게 당을 몰아낼 것을 명하여 그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신라는 거대 중원세력인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지원하여 당나라 군사의 배면을 괴롭히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한편 소백산 자락 봉황산 인근의 땅은 죽령을 축으로 오랫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는데, 지금의 영주 땅이 본디 고구려 내이군(奈已郡)으로 시작되었다가 신라의 내령군(奈靈郡)이 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소백산맥 자락으로 들어선 의상은 비로소 왕의 깊은 내심을 깨달았다. 그저 명산에 대찰을 세우고자 하는 불심(佛心)만이 아니었다. 산속에서 마주치는 눈빛 번뜩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고구려 멸망이 애달프고 받아들일 수 없어, 그 재건의 꿈을 꾸며 소백산맥 깊은 골짜기로 숨어든 유민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신라의 전략에 따른 것이든, 자발적이든 이미 당나라 군사와의 전투에도 이골난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당과의 전쟁도 막바지에 이른 즈음, 왕께서는 이들 유민을 불심으로 껴안으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봉황산에 이른 의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아서는 깊지도 않은 산중에 그저 민숭한 터인 듯 싶지만, 조금만 눈여겨 살펴보면 그게 아니었다. 멀리 서남쪽 하늘 아래로 소백산맥 연봉들이 우람하게 늘어선 모습이며, 그 안으로 봉황산을 포근하게 껴안은 듯 겹겹이 둘러싼 작은 봉우리들은 참으로 웅혼(雄渾)하고 수려(秀麗)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과연 이 땅에 자비로운 부처님의 뜻을 전할 화엄도량으로, 천년왕국 신라를 지켜나갈 호국사찰의 터전으로 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풍광이었다. 하지만 천년을 지키고, 만년을 이어갈 천생의 터전은 수월하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신도 승려라면서 이미 터전으로 삼았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또 다른 무리들은 당장에 해코지라도 할 듯 시퍼렇게 날이 선 무기를 흔들면서 핏발선 두 눈을 부라렸다. 딴은 그들의 말도 그르지 않았다. 본디 땅의 주인이 없거늘 불 터전이라고 주인으로 정해진 승려는 없을 터. 그러나 그들은 부처의 자비심으로 불사를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恨)이 서려 있었다. 망국의 한, 님을 잃어버린 한…. 그 또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라 탓할 수 없는 일이니 왕명을 들어 군사의 힘으로 쫓아낼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은 통일대업을 눈앞에 두고 삼한의 민족 모두를 껴안고자 하는 왕의 본뜻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부처님의 자비심을 거스르는 일이었다.고뇌 속에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하던 의상이 설핏 눈을 감았나 싶은데 화사한 옥색비단 당의(唐衣) 차림의 여인이 나타났다. 의상은 금방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오, 선묘낭자! 당나라에 계셔야 할 낭자께서 이곳 신라 땅에 어쩐 일이시오?”“대사님. 저는 이미 대사님께서 등주(登州)항에서 귀국선에 몸을 실으시던 그날, 용이 되었습니다.”“용이 되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영문 모르는 의상의 물음에 선묘낭자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661년. 여러 난관 끝에 마침내 당으로 유학을 떠나 산동반도 등주에 상륙한 의상은 양주(楊州)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이때 먼 나라에서 화엄학을 배우러온 맑고 기품 있는 스님을 유지인의 딸이 연모했으니, 그녀가 선묘(善妙)였다. 하지만 아리따운 여인의 마음과 달리 의상은 오직 깊은 불심으로 화엄 수학에만 전념코자 했으니, 선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스스로 헤아렸다. 오래지 않아 의상은 장안(長安)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삼장(智嚴三藏) 문하로 들어가니, 선묘는 자신 역시 일생과 내생을 불법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의상스님에게 귀의하기로 맹서했다.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스승 지엄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귀국길에 오른 의상은 등주에 들른 길에 유지인의 집을 찾았다. 전날의 은혜에 사례라도 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불단 앞에 합장하고 염불삼매에 빠진 선묘의 뒷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힐까 두려워 등을 돌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는 그동안 의상에게 드리기 위해 한땀 한땀 정성들여 기운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넣어둔 상자를 들고 황급히 등주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스님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난 뒤였다. 망연히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던 그녀는 가사장삼이 든 상자를 스님이 탄 배에 전해지기를 바라며 힘껏 던진 뒤, ‘이 몸이 용이 되어 스님을 호위하리라’고 서원하면서 자신의 몸을 바다로 던졌다. 과연 그녀는 서원대로 용이 되었다. 그리고 황색바다 거친 뱃길은 물론 지금껏 의상의 길을 호위해 왔던 것이다.뒤늦게 선묘낭자의 애절한 마음과 그간의 처연한 사연을 들은 의상은 이미 세속의 오욕칠정(五慾七情)에서 벗어난 법력에도 가슴이 아린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대사님. 저는 화엄의 세계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한 여인에 대한 사랑보다는 천배 만배 큰 것임은 어렴풋이나마 짐작합니다. 대사님의 뜻을 거스르고, 나아가실 길을 어지럽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의 벗어던질 수 없는 이 애착 또한 그만한 인연이 쌓인 까닭일 테니, 이 생애에서 대사님께 귀의하여 불법으로 구원받으려 합니다. 부디 탓하지 말아주십시오.”“어찌 소승이 낭자의 뜻을 탓하겠소. 오히려 그 깊은 불심에 합장할 뿐이오. 그러니 이제 그만 인연의 고리를 잊고, 부처님의 품으로 돌아가시오.”“아직은 아닙니다. 대사님이 이곳 봉황산에서 이루시려는 큰일을 마무리지으시도록 도우려 합니다. 세속의 한이 깊은 사람들이라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아니 되오. 이들은 나라 잃은 설움, 새 세상에 대한 의구심이 깊은 사람들이오. 특히 외세인 당과의 연합에 대한 노여움으로 부처님의 뜻마저 온전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소. 이런 이들을 피로써 억누른다면 그것은 잠시 불씨를 잠재우는 거짓에 불과하오. 대왕께서 특별히 절을 세우시라 명하신 뜻도 그것이오. 나는 부처님의 자비심과 화엄세상의 뜻으로 이들을 위무할 것이오.”“그처럼 깊은 뜻인 줄 모르고 하마터면 용력만 휘두를 뻔했습니다. 이제 대사님의 자비심을 깨우쳤으니 마땅히 용을 던지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홀연히 사라지는 선묘의 모습에 의상은 번쩍 정신을 차렸으나,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날이 밝자 다시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봉황산 중턱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날 벼린 칼이며 낫 따위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아니, 여느때보다 더욱 사나운 눈빛과 거친 고함으로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벌일 듯 보였다. 의상을 수행하는 관리와 시종들은 잔뜩 겁에 질려 안절부절못했다. 관리 중의 책임자는 당장 군사를 지원받자고 청했지만, 의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은 억누르면 그만큼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정히 사단이 벌어진다면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들 스스로 불법에 귀의하여 한을 삭이게 할 것이었다. “앗, 대사님을 보호하라!”한 순간 책임자의 다급한 고함이 들리더니 관리들 모두가 칼을 뽑아들었다. 무리의 사람들이 거칠게 짓쳐들어오는 것이었다. 의상은 몸을 던져 관리들 앞을 가로막아 섰다. “물러나시오, 칼을 거두시오!”“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스님!”그러나 순간, 실랑이를 벌이던 의상과 관리는 물론이고 무리를 지은 사람들까지 모두 기함하여 땅바닥에 몸을 엎드려야 했다. 천지를 가를 듯한 굉음과 함께 본존(本尊) 법당터로 염두에 둔 산자락의 집터 만한 너럭바위가 하늘 위로 솟아오른 것이었다. 바위는 귀를 찢을 듯 ‘윙∼ 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곧바로 무리 지은 사람들 위로 날아가 금방이라도 짓누를 듯 허공을 오르내렸다. 무리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산 아래로 도망치자, 바위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받침돌 위에 내려앉았다. 관리와 시종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의상은 그것이 용이 된 선묘낭자의 신변(神變)임을 알 수 있었다.다시 날이 밝자 사람들은 또 무리를 지어 올라왔지만, 그때마다 너럭바위가 하늘 위로 떠오르기를 며칠. 마침내 사람들은 불법의 신묘함과 지엄함에 감복하여 의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위협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심열성복(心悅誠服)이었고 부처님을 향한 귀의였다.의상은 귀의한 그들과 함께 불 터전을 닦기 시작했다. 충심으로 힘을 모은 불사는 이내 산을 깎아 땅을 다졌고, 마침내 법당의 터를 잡게 되자 다시 너럭바위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금방 제 자리에 내려앉는가 싶더니 받침이 되는 바위와의 틈에서 한 마리 거대한 용이 나타나 머리는 법당 터에 두고, 꼬리는 그 아래로 둔 채 숨을 거두었다. 이에 의상은 용의 머리 위에는 본존의 대좌(臺座)를 두게 하고, 꼬리 위에는 석등(石燈)을 세우라 하였다. 놀란 사람들이 의상에게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담담한 낯빛으로 대답하였다. “이 땅에 화엄세상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도량을 수호하고자 용이 승천하지 않고 땅에 몸을 내렸으니, 먼저 사람들 마음 속의 원망과 한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오. 또 나는 이 도량을 부석사(浮石寺)로 이름하고, 화엄종찰로 삼을 것이오. 나무아미타불….”<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절 창건을 방해하는 유민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용이 된 선묘낭자가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는 너럭바위. 부석(浮石)이란 글귀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선묘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묘각. ‘이루지 못한’ 애틋한 러브스토리 때문인지 처연한 느낌이 든다.선묘각 안에는 선묘낭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모셔져 있다.머리를 법당 부처님쪽으로 두고, 꼬리는 마당 석등쪽으로 둔 채 묻혀 있는 석룡. 용으로 변한 선묘낭자가 죽어서도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부석사 석축공사 당시 발견됐는데, 현재 땅에 묻혀 있어 볼 수는 없다.
2011.06.29
[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2> 이하석의 '사람이 곧 하늘이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포항)'
Story Memo경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해월 최시형(崔時亨·1827~98)은 머슴살이, 한지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다 1859년 포항시 신광면 마북리 검곡(劍谷)에 정착해 화전민 생활을 했다. 당시 경주 용담에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스승인 수운 최제우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매일 포항 검곡에서 경주 용담을 오가며 득도에 이른다. 검곡은 그런 의미에서 해월에게 동학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정신적 고향이나 다름없다. 이후 1863년 스승으로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동학의 2대 교주가 된다. 하지만 곧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고, 36년간 긴 도피생활을 이어간다. 이때부터 '최보따리’란 별칭으로 불리게 된다. 도피생활 중 해월은 동학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하지만 끝내 1898년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돼 순교한다. 영남일보의 인물열전 2편 '해월 최시형 스토리’는 해월과 스승인 수운 최제우와의 마지막 이별 장면, 그리고 도피생활 중에도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해월의 결연한 삶을 주 내용으로 스토리를 재구성했다.#1“높이 날아서 멀리 가라." 스승의 유지다. 해월 최시형은 그 글귀가 적힌 종이를 품에서 꺼내 다시 본다. 동 트기 전 대구 성문을 빠져나온다. 찬바람 속에서 잠시 어디로 갈까 망설인다. 어쨌든 몸을 숨겨야 한다.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안동 쪽이다. 스승 수운 최제우의 모습은 초췌했다. 지난 연말 추위가 매섭던 밤중에 경주 용담정에서 체포된 뒤 영남대로를 통해 서울로 압송되려 했으나, 중간의 조령에 수천 명의 동학도들이 스승의 탈주를 도모하기 위해 집결해 있다는 소문에 방향을 바꿔 보은·청산·청주를 거쳐 올라가던 도중 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과천에서 다시 방향을 돌려 대구감영으로 이송된 직후였다. 옥사에게 적지 않은 돈을 안겨주고 은밀한 면회를 청했다. 해월은 옥바라지로 변장한 채 밥상을 들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 수운을 만났다. 혹독한 고문으로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광대뼈에 난 상처가 깊었다. 헤진 옷은 온통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슬픔이 북받쳤으나 억지로 참았다. 지난해 그는 스승으로부터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었고, 도통(道統)을 이어받았다. 스승을 만난 지 2년 만에 동학의 2대 교주가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5세, 스승의 나이 40세 때다. 그때 스승의 모습을 그리면서 해월이 수운을 살폈으나 참담하게 바뀌어 있었다. 눈만 형형하게 살아있을 뿐이었다. 서로 신분을 숨긴 처지니,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수운은 짐짓 태연하게 그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접은 종이 쪽지를 꺼내 재빨리 그에게 건넸다. 燈明水上無嫌隙(등명수상무혐극)柱似枯形力有餘(주사고형역유여)高飛遠走(고비원주)'물 위에 등불을 밝혀보지만, (동학의) 혐의를 찾아낼 틈새가 없으리라. (동학의) 기둥은 말라버린 모습이지만, 그 힘은 갈수록 여전히 남아 있다. 높이 날아 멀리 달아나라.’그것이 스승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해월은 돌아와 동지들에게 스승의 상태를 전하고, 각자 흩어져 칩거할 것을 명한다. 동학도들의 체포에 관군들이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해월이 안동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부근의 영양과 봉화 등에 숨을 곳이 많기 때문이다. 사흘 뒤 안동의 접주 이무중의 집에 숨어든다. 그러나 이내 이웃의 밀고로 관군이 들이닥친다. 해월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뒷담을 넘어 산 속에 몸을 숨긴다. 청량산 쪽 들판으로 해서 영양 석보를 지나 태백산맥 창수령을 넘어 영덕으로 향한다.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봄날(1864년 3월10일), 수운은 교수형에 처해진다. 머리는 참수되어 대구 남문 밖에 사흘 동안 효수됐다. 아들에게 시신이 넘겨진다. 영덕에서 이 소식을 들은 해월은 비통하기 짝이 없지만, 이내 또 몸을 추슬러서 영해로 숨어들어야 한다. #2 이후 그는 태백산 깊은 곳을 중심으로 안동과 울진 등지에 숨어서 포교에 힘쓴다. 그러다 1871년 영해에서 그의 묵인 하에 '이필제의 난’이 일어난다. 당연히 그 배후인물로 지목된다. 영양 일월산과 강원도 정선, 충북 단양 등 험준한 골짜기의 엄습한 그늘 속에 늘 몸을 숨긴 채 동학을 전파하고 조직을 건사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인제와 담양에 경전 간행소를 설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등 경전을 발간한다. 교리의 근원을 밝히고 그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밑받침이 되는 사업이다. 육임제(六任制)를 확립,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강화해 나가기도 한다. 그는 우리 역사상 최장기 수배자다. 평생을 숨어서 생활했다. 늘 떠돌았기에 '최보따리’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그의 수배생활은 곧 동학의 재건이라는 위대한 실천의 삶이었다. 그늘 아래의 잠행이 계속되면서도 그의 주변에는 신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아울러 이 땅 구석구석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 속에 동학의 사상을 심어나갔다. 이 성실과 끈질긴 실천의 열정이 동학의 교세를 계속해 불려나간 원동력이었다. 그는 경주 황오리에서 태어난 뒤 포항에서 일자무식 농사꾼으로 생활했지만, 타고난 종교적 열정으로 동학의 2대 교주가 됐다. 무서운 기억력으로 경전을 외워 이를 자기 사상으로 무르익혀 내놓았다. 1870년대의 어느 더운 여름 날. 청주의 신도 서택순의 집에 피신해 있던 때다. 베짜는 소리가 들린다. 해월이 묻는다. “누가 베를 짜는 소린가?" 서택순이 “제 며느리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래?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게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하느님)가 베를 짜는 것인가?" “……" 서택순은 해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물거린다. 해월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신도들에게 강조하곤 한다.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하느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며느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받들라고 한 건 당시의 엄격한 남녀 구별과 신분사회에서 혁명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해월은 이 사상을 발전시켜 '인내천(人乃天)’, 곧 사람이 하늘이란 사상을 내놓았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은 인간의 평등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니의 살같이 하라" “밥 한 그릇에 세상만사가 다 들어 있다"고 가르쳤다. “새소리도 시천주(侍天主) 소리"라고도 했다.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는 그러한 사상을 이론적으로, 또는 지식의 체계를 들어서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삶 속에서,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서, 민초들과 어울려 노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거나 실천을 통해 인식시켰다. 이런 가르침을 그는 수배생활로 점철된 평생에 걸쳐 게으름 없이 실천해냈다. 피신하는 곳마다 농사를 짓고, 나무를 심었다. 새끼를 꼬고 짚신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동학의 가르침을 쉼 없는 샘물처럼 온몸에서 우려내놓았다. 그에게 있어서 변혁과 혁신, 그리고 진보는 곧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했다. 그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3그의 힘은 커서, 동학의 교세는 확대되어 갔다. 1892년에는 동학교인 수천 명이 삼례에 모여 수운 최제우의 명예회복과 동학의 인정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신원운동을 펼친다. 이 기운이 이듬해 서울 광화문에서 동학교인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임금에게 동학을 인정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커진다. 이 때 왕은 긍정적인 교시를 내리나, 이는 동학교도를 해산시키기 위한 임시처방에 불과했음이 나중에 밝혀진다. 이에 충북 보은에 모여든 동학교도들이 비폭력 집단시위를 벌인다. 이듬해 겨울 청산에서 전봉준이 궐기한다. 해월 은 손병희를 동학군 총사령관격인 통령으로 임명하고, 전라도로 진군해 전봉준 부대와 합세한다. 그는 전투의 와중에 있었으나,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군중 속에서 숨은 채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대패한다. 그는 다시 강원도 산 속으로 피신한다. 1895년 12월 그는 치악산 수레너미에서 손병희에게 동학의 도통을 전수한다. 앞서 손병희에게 의암(義菴)이란 도호를 내린 바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죽음을 생각하곤 한다. 나이 70을 넘기면서 죽음마저 위대한 실천의 한 모습으로 보여야 한다고 여긴 것이리라. 스승이 갔던 그 길을 고스란히 따라감으로써 동학교주로서의 삶을 보여주려는 마음을 자주 다진다. 그 길은 체포되어 처형되는 길이었다. 그는 1898년 72세 되던 해 봄에 원주 원진여의 집에 머무르다가 체포되지만, 이는 이미 예견된 과정이라 할 만하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압송, 서소문 감옥에 수감된다. 두 달 뒤 교수형에 처해진다. 스승이 갔던 그 길을 그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의 시신은 광화문 밖에 버려져 가매장되지만, 이종훈 등이 수습하여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봉 아래 8부 능선에 묻힌다.그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높여 산 적이 없으나, 죽은 다음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지도자’로 꼽힌다. 끊임없는 관의 추적과 수배 속에서도 민초들의 삶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동학사상을 널리 펼치고, 이를 통해 동학농민운동이라는 근대 최대의 민중운동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후 3·1운동 등 독립운동과 근대화의 사상적 토대와 조직을 구현해냈다.공동 기획 : pride GyeongBuk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사진=포항시 신광면사무소 제공>해월 최시형 생전 모습.해월 최시형의 옛 집터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 해월의 옛 집터가 있는 검곡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입구에서도 2㎞나 떨어져 있다.해월의 포항 검곡 옛 집터. 지금은 무성한 풀 사이로 표지판만 초라하게 남아있지만, 검곡은 해월에게 동학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정신적 고향이나 다름없다.포항시 신광면에 있는 최시형의 어록비. 만물을 스승으로 삼고, 말과 행동을 한결같이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2011.06.22
[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1> 성석제의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한 낙동대감 류후조 (상주)'
지난해 1·2부로 나눠 ‘스토리텔링의 寶庫-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시리즈를 연재한 영남일보는 올해도 시리즈의 3부‘인물열전’을 시작합니다. 오늘부터 매주 1회 연재되는 ‘인물열전’에서는 경북도내 23개 시·군을 대표하는 인물을 포함, 재조명이 필요한 역사적 인물들의 스토리를 발굴해 스토리텔링화할 계획입니다. 발굴된 스토리는 향후 경북지역의 문화관광산업 콘텐츠로 활용됩니다. 또한 출판,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형 상품 개발도 함께 모색할 것입니다. 시리즈 필진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김주영·이하석·성석제·김정현·우광훈·이상국씨 등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대거 참여해 스토리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열다섯살 난 신랑 류후조는 처가에서 초례를 치른 뒤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연안이씨 명문가의 규수인 신부는 첫눈에도 아리땁고 어질어 보였다. 신랑은 아직 황홀한 기분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채 싱글벙글하면서 말을 타고 있었고, 신부는 가마를 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토진나루에서 행렬은 낙동강을 건너게 해줄 배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류후조의 눈이 나루터의 언덕으로 향했다. 거기에 웬 남루한 옷을 입은 여자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아기를 낳고서는 기진해 쓰러져 있었다. “이보시오! 정신 좀 차려보시오!” 하인이 달려가 여자를 깨우려 했으나, 여자는 눈을 뜨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신랑은 짐에서 꿀을 꺼내 물에 타서 먹이게 했다. 이어 신부가 타고 있는 가마로 다가간 그는 나직하게 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신부는 스스로 가마에서 내렸다. 이어 신행 짐에서 이불을 꺼내 여자와 아기를 덮어주게 하고 가마에 태웠다. 신랑은 감탄하는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랫사람들에게 일렀다. “저기 보이는 주막까지 얼른 저 여자와 아기를 데려다 주고 오라. 주모에게 산모를 보살펴 달라고 하고 미역이 있거든 국이라도 끓여주게 하거라. 물론 돈을 충분히 주어서 비용으로 쓰게 하라.” 산모와 아기를 주막에 데려다 주고 온 뒤 신부는 다시 가마에 올랐다. 산모가 남긴 흔적과 냄새가 있었지만,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예정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온 신랑은 부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구나. 하지만 무슨 일을 할 때는 늘 신중하게 생각하여 가장 바른 길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난 연후에 처신해야 한다.” 아버지 류심춘이 말했다. 류심춘은 세 세자의 스승을 맡으면서 역사상 드물게 세 임금을 가르친 학자라는 영예를 얻은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은 평생 류후조의 가슴에 남게 된다. 류후조는 얼마 뒤 주막으로 다시 찾아가 산모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것을 확인하고, 고향인 강릉까지 갈 수 있도록 노자를 보태주었다. 그로부터 40여년 뒤 강릉부사가 되어 부임한 류후조에게 머리가 하얗게 센 어떤 여자가 찾아왔다. 바로 낙동강 나루터에서 구원해 준 여자였다. 그녀는 상주에서 입은 은혜를 잊을 길이 없어 평생토록 매일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은인에게 액운이 없기를 기도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과거를 하지 않은 내가 부사까지 된 것이 바로 이 여인의 기도 덕분이었구나.” 류후조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자가 그때 낳은 아들은 글공부를 열심히 해 어엿한 선비가 되어 있었다. 류후조는 아들을 불러 더욱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주었고, 그 아들이 통천군수가 될 때까지 돌보아 주었다. 아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내 외가는 바로 류후조 대감 댁”이라고 했고, 후손들은 류후조 대감 댁을 외갓집으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인의 기도 덕분인지는 몰라도 류후조는 환갑이 되던 해 외직이긴 하나 당상관인 부사로 있으면서 문과 정시에 합격하여 내직에 들어갔다. 연륜과 함께 원만한 성품, 신중함을 갖춘 그의 관직생활은 순조로워 형조참판과 대사간의 요직을 역임했다. 1863년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고, 조 대비의 전교로 고종이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왕좌에 등극했다. 대왕대비가 잠시 수렴청정을 맡았으나, 실권은 임금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른바 대원군의 십년 집정시대가 시작되었다. 류후조는 고종 1년에 인사권을 관장하는 요직인 이조참판, 이듬해에 청요직(淸要職)의 대표적 관직인 대사헌을 거쳐 같은 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한 해 뒤에 드디어 우의정에 임명되어 가문의 역사로는 9대조 서애 류성룡에 이어, 두 번째로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류후조는 가문과 개인의 영광인 정승의 자리를 거듭 사양했다. 이에 어린 임금이 여러 번 취임을 재촉했고, 급기야 대왕대비까지 나서서 두 번씩이나 전교를 내려 강권한 뒤에야 어렵사리 자리를 받아들였다. 정승에 취임하기로 결정하던 날 밤, 대원군이 몰래 사람을 보내 류후조를 불렀다. “우상 대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소. 내일 대감이 주상전하 앞에 나서게 되면 반드시 정승으로서 제기할 첫 번째 건의를 물을 것이오. 첫 번째 건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하께서 무조건 가납(嘉納)하게 되어 있소.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신의 붕당과 문벌의 폐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모조리 척살하고 쫓아낼 수밖에 없소. 이에 대해서는 남인의 후예인 대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난 대감을 믿겠소.” 일단 대원군 앞에서는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집으로 돌아온 류후조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집안의 씨를 말리는 식의 피비린내 나는 과격한 방식의 변화는 엄청난 부작용을 낳을 것이고, 새로운 원한과 폐단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다. 대원군은 ‘상갓집 개’로 불리며 안동김씨의 사랑방을 고개를 숙인 채 들락거리던 시절의 비분을 권력의 칼을 빌려서 해소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청지기가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 “대감마님, 장동에서 이판 대감이 오셨습니다.” 안동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이조판서인 김병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자, 김병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이제까지 원수질 만한 일이 있었소이까?” 류후조는 대답했다. “없었지요.” “그럼 앞으로도 원수가 될 일은 없겠지요?” 류후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 나는 누구와도 원수를 맺고 싶지 않소.” “고맙소. 저는 오로지 대감만 믿고 돌아갑니다.” 이튿날 조복을 차려입고 입궐한 류후조는 임금 앞에 나아갔다. 대원군은 물론이고 안동김씨로서 대신과 재상의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긴장된 얼굴로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관례에 따라 정승에 취임한 사람으로서 첫 번째 진언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전하, 신의 고향인 경상도 상주는 임진왜란 때 온 백성이 몸을 던져 왜적과 싸워 세금을 감면받는 은혜를 입은 일이 있사옵니다. 그때 의병을 창의하고 앞장서 왜적과 싸웠던 부제학 이준(李峻)은 크나큰 전공을 세운 것 말고도 인근의 선비들과 함께 존애원(存愛院)을 세워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원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큰 덕을 쌓아 오늘날까지 인근의 백성들이 그 은공을 기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준에게 시호를 내리시고, 자손의 어려움을 보살펴 주소서.” 대원군이 앞으로 불쑥 나서서 어이가 없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우상 대감, 그것 말고는 더 헌의드릴 게 없소이까?” “지금 말씀드린 것은 제가 어릴 때부터 수십년 동안 생각해온 것으로, 이 이외에는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다는 사람을 계속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원군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러났지만, 그 일을 가지고 더 이상 가타부타 따지지는 않았다. 사실 그의 수족이 될 만한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건의에 따라 이준에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날 밤 류후조를 찾아온 김병기는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멸문의 위기를 모면케 해준 은혜에 감사했다. 다음해 안동김씨 가운데 한 명인 김병학을 영의정으로, 류후조를 좌의정으로 승진한다는 교지가 내렸다. 류후조는 이번에도 한사코 자리를 사양했다. 그의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다. 그리하여 실직인 좌의정에서 물러나 명예직인 판중추부사 겸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상주는 교통의 요지였고, 높고 낮은 관원들이 영남을 오가노라면 반드시 낙동강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전 좌의정이자 봉조하인 류후조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찾아오는 관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그의 집은 낙동강에서 십리쯤 떨어져 있었다. “공무에 바쁜 관원들이 여기까지 찾아오게 하느니, 내가 강가에 나가서 사는 게 낫겠다.” 낙동강의 나루터 마을로 이사한 뒤로 그는 자연스럽게 ‘낙동대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에 일흔이 넘는 노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가끔 그를 찾아와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다 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상감사가 큰 행렬을 이끌고 그의 집에 다녀간 뒤로는 그렇게 높은 사람인 줄 몰랐다면서 더 이상 집에 놀러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그는 웃으며 말하곤 했다. “경상감사가 내 친구 하나를 떼버렸구나.” 그가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지방관에 임명받은 사또가 장기를 둘 줄 아느냐고 물어왔다. 그가 둘 줄 안다고 하여 장기판이 벌어졌는데, 사또가 오만방자하기 그지없어 말끝마다 야유를 하고 비아냥대더니 장을 부를 때마다 “신관 사또 장 받아라”를 외쳐대는 것이었다. 계속 참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장을 부를 때가 되어 “낙동대감 장 받아라” 하자, 그제야 사또가 그를 알아보고는 납작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노라고 용서를 빌었다. 한 번은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하고 있던 그에게 인근의 양반가 젊은이가 와서 자신이 발을 적시기 싫으니 업어서 강을 건네달라고 했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젊은이를 업고 강을 건너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류후조는 이처럼 범인이 오르기 힘든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언제나 남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듯 겸손하게 처신하고, 평민들 사이에 섞여 소탈하고 즐거운 삶을 살았다. 그것이 낙파(洛坡) 류후조와 관련된 일화가 세상에 널리 유전하는 이유일 것이다. ◆Story Memo 상주 출신인 류후조(柳厚祖·1798~1876)는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8세손이기도 한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 상주로 내려와 서민들과 어울리며 소탈한 삶을 살았다. 특히 문안인사차 관인들이 그의 처소를 찾는 일이 잦아지자, 국가중책에 바쁜 선비들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한가한 자신이 길가로 나와 있는 것이 낫겠다며 스스로 낙동강 나루터 인근으로 처소를 옮기기도 했다. 그후부터 ‘낙동대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영남일보의 ‘낙동대감 류후조 스토리’는 토진나루에 얽힌 그의 이야기와 좌의정 시절 스토리, 그리고 귀향 후 일화를 재구성했다.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상주시 중동면에 있는 풍산류씨 우천파(遇川派)의 종택인 수암종택 전경. 수암은 류성룡의 셋째 아들인 류진의 호다. 1700년대에 지어졌는데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수암의 7세손인 ‘낙동대감’ 류후조에 의해서다.
2011.06.15
[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6·끝) '고려의 반석’ 안동…중흥을 꿈꾸다
“왕이시여! 소신이 앞장서겠습니다." “부원군, 그 연세에 어떻게? 부원군께서는 여기 남아 후일을 도모해주십시오. 뒷산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고, 반심을 품은 자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안어대동의 땅은 처음부터 변치 않는 고려의 뒷산이었습니다. 소신이 마지막 남은 목숨을 아껴 앞장서지 않는다면 어찌 저승에서 홍언박과 여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홍언박은 왕실의 일원이며 사사로이는 나의 외사촌 형이시니, 왕실에서 신위를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랑은 안어대동의 땅에서 태어나 안어대동의 땅에서 나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으니, 이 땅에서 기리는 것이 가할 듯합니다. 부원군과 안동부민이 합심하여 여랑의 사당을 세우고 영원토록 그녀를 기려주십시오." “황공하옵니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왕의 성은에 여량 또한 편히 잠들 것이며, 그녀의 정신을 안동부민은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7 왕의 나라 복주성 안에 무거운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홍언박과 여랑의 장례가 끝나자, 왕께서 모든 중신과 토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복주의 성민들은 모두 분노와 결기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군사와 함께 총진군하여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바로 세울 것이오! 내가 친히 나설 것이니 준비를 서두르시오!" “왕이시여. 아직도 곳곳에 적의 잔당이 있습니다, 신중하소서." “소수의 잔당마저 두려운 자는 사직하시오!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안일과 사욕이었소! 무릇 모든 개혁이 어려운 것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손 안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 반발하는 까닭이오. 그들은 나라와 백성보다도 오직 자신의 영화만을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적이오. 눈이 있으면 성안의 백성을 돌아보시오. 동지 섣달 찬바람에 성긴 삼베 무명차림으로 추위를 맞서면서도 백성은 나라를 위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러나 비단옷을 걸치고 말린 푸성귀 반찬이 거칠다 내치는 이들은 무엇을 했소. 백성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고, 백성의 입에 들어갈 한 점 고기마저 제 입에 걸어 넣으면서도 백성을 업수이 여기고 착취한 게 그들이오. 더하여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다가 기껏 한 줌 제 이익을 위해 백성과 나라를 송두리째 남에게 바치려는 강도질까지 서슴지 않고 있소. 나는 나서지 않았다 변명하지 마시오! 부화뇌동, 복지부동도 다르지 않은 도둑질이오! 이제 더는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을 것이오! 단숨에 짓쳐 들어가 적을 물리치고, 그들의 손아귀에 쥔 것을 스스로 내놓게 하여 백성의 삶을 기름지게 할 것이오. 신중하라, 불가하다 간할 자들은 모두 목을 내놓으시오!" 쩌렁쩌렁한 왕의 분노에 무능하고 삿된 중신과 토호들은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왕이시여! 소신이 앞장서겠습니다." 나선 것은 손홍량이었다. “부원군, 그 연세에 어떻게? 부원군께서는 여기 남아 후일을 도모해주십시오. 뒷산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고, 반심을 품은 자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안어대동의 땅은 처음부터 변치 않는 고려의 뒷산이었습니다. 소신이 마지막 남은 목숨을 아껴 앞장서지 않는다면 어찌 저승에서 홍언박과 여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꺾이지 않을 의지였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랑과 홍언박의 소식에 무빈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싶었다. 왕의 일족이면서도 도성보다는 낙향하여 사랑하는 이와 자연을 벗 삼는 무위와 소요의 삶을 살고자 했던 벗이었다. 귀족의 부패도 볼썽사납고 역겨웠지만, 천년 왕국 신라를 이어 지켜온 500년 사직이 이미 원의 속국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자주와 자존을 되찾으려는 투쟁과 일신(一新)보다는 오로지 부귀영화만을 좇아 지조와 정신을 내팽개친 왕실이고 조정이었다. 차마 하늘과 백성 보기가 부끄러웠다. 다행히 노국공주와 함께 돌아온 왕께서는 원의 속국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국가의 기치를 세우자 했고, 백성을 위한 나라와 조정을 꿈꾸었다. 홍언박이 귀향을 미루고 왕실과 조정에 남은 것은 왕의 그 꿈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무빈 자신과 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왕께서 그 꿈을 활짝 펼치려는 순간, 진정으로 사랑한 두 사람이 그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니…. 무빈은 이를 악물고 칼을 빼들었다. 어서 적을 소탕해 나라를 안정시킨 뒤 같은 희망을 품었던 벗과 그의 님 곁으로 돌아가 그들의 무덤이나마 지키며 소요하리라. “공격하라! 금수강산 우리 고려의 산천을 짓밟고, 백성을 눈물짓게 한 적의 무리를 모조리 베어라!" 일흔다섯 복천부원군 손홍량이 갑옷을 차려입었다. 비록 하얗고 긴 수염은 바람에 흩날리고, 늙어 쇠약해진 몸은 위태해 보였지만, 두 눈의 안광만은 형형했다. 그가 왕의 앞에서 검을 뽑아들더니 도열한 군사를 향해 높이 쳐들었다. “왕의 군사들이여, 고려의 군사들이여! 이제 진군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팔을 크게 불어라! 북을 힘차게 두드려 왕의 출진을 알려라.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라! 송야천을 단번에 건너뛰고, 주흘산과 조령을 단숨에 넘어라! 적의 목을 베어 그 피로써 강을 만들자! 도성을 되찾아 왕을 편안케 하자! 홍건의 적을 격멸하자! 고려를 능멸하던 중원의 군사를 몰아내자! 압록강을 건너자! 우리의 옛 땅 만주를 경략하자! 이기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충신과 열사가 우리를 지키리라!" 와――! 와――! 충! 의! 용! 무! 안! 어! 대! 동! 천지를 진동하는 군사와 백성의 함성에 왕은 가슴이 벅찼고, 왕후 노국공주는 뜨거운 눈물을 지었다. 막 출전하려는 순간이었다. “승전입니다! 승전보를 고합니다!"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말을 달려온 군관 한 사람이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이시여, 승전보입니다! 무빈, 최영, 정세운, 이방실, 안우, 김득배 등의 장수가 20만 군사를 모아 적병 수 만의 목을 베었습니다! 개경 수복 또한 눈앞이니, 왕께서는 근심을 잊으시고 옥체를 편안히 하시어 귀경하시옵소서!" 와――! 장졸과 백성의 함성이 다시 하늘을 울렸다. “부원군, 이미 승전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원군께서는 이곳에 남아 나라의 든든한 뒷산이 되고, 등뼈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무빈 등이 그리하였다면 소신은 왕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곳은 실로 왕의 땅입니다, 나라의 땅입니다, 안어대동의 땅입니다. 나는 이 땅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할 것입니다!" “실로 가당하신 분부이옵니다. 다시 안어대동의 이름을 찾고, 대도호부의 영광을 얻었으니 자손만대 충절의 마음으로 나라의 반석을 다질 것입니다. 고려 왕 만세! 왕후마마 만세!" 만세! 만세! 안동부민의 만세가 그칠 줄 몰랐다. 왕은 한참을 기다려 부민의 만세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손홍량을 돌아봤다. “홍언박은 왕실의 일원이며 사사로이는 나의 외사촌 형이시니, 왕실에서 신위를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랑은 안어대동의 땅에서 태어나 안어대동의 땅에서 나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으니, 이 땅에서 기리는 것이 가할 듯합니다. 부원군과 안동부민이 합심하여 여랑의 사당을 세우고 영원토록 그녀를 기려주십시오." “황공하옵니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왕의 성은에 여랑 또한 편히 잠들 것이며, 그녀의 정신을 안동부민은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안동부민들은 들으라!" 사위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내가 안동을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기는 했으나, 이 땅은 왕의 땅에 진배없음을 알린다. 이미 고려의 반석이 되었던 땅, 나 또한 이곳에서 고려 중흥을 꿈꾸었다. 이곳을 도성으로 삼아 천대 만대 복되고 편안함을 누리고 싶다만, 이제 고려는 압록강 넘어 우리의 고토를 경략해야 할 것이니 북쪽의 개경을 도성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동부민들이여 잊지 마라! 이 복되고 편안한 땅은 영원히 왕의 땅임을!" 안동부민들은 모두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지었다. 왕의 땅, 나라의 반석으로 칭해지는 영광이라니……. 손홍량이 나섰다. “왕이시여. 승전이 눈앞이니 잠시 더 쉬시어 옥체를 편히 하소서." “아닙니다. 뜻을 세웠을 때 나설 것입니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친히 고려의 군사와 함께할 것입니다. 정히 아쉬우시면 작은 소반에 건국주와 안동소주를 한 잔씩 채워 주십시오. 내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그 뜨거운 열기가 식기 전에 개경을 되찾을 것입니다." “여보게들. 어서 술과 잔을 준비하게." 손홍량이 받쳐 든 소반 위의 술잔을 단숨에 비운 왕은 칼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 “자! 출진하라!" 왕의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기치창검이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렸다. 안동의 부민들은 차전을 만들어 손홍량의 지휘에 따라 힘차게 허공으로 치솟으며 왕의 승전과 안녕을 기원했다. 글 = 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연필 일러스트=김성태 화백
2011.04.27
[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5) 복주군의 출전과 왕의 눈물
조일신의 칼날이 왕을 향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여랑도 몸을 날려 칼날을 막아서니 그녀의 복부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바닥을 기어서 다가오는 여랑을 홍언박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헐떡였다. “여, 여량아. 미, 미안하구나…"“괜, 괜찮습니다. 이렇게라도 님을 따라 함께 가게 되었으니 저는 행복합니다. 이제 다시는 서로 떨어져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그래. 이승에서 못 누린 영화, 우리 저승에서 다정(多情)으로 대신하자꾸나." “왕이시여, 끝까지 보필하지 못함을 용서하소서."“무슨 소립니까. 제가 형님과 이 여랑에게 목숨을 빚진 게 얼마인데, 아! 하늘이시여…!"“부디, 부디, 고려를 핍박받지 않는 자주국으로 만드소서…." “오! 선왕들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이들의 영혼을 보살펴주소서…."# 6. 오, 내 사랑이여! 마침내 출전이다! 왕이 드디어 무빈이 이끄는 복주군의 출전을 명했다. 국경 일원은 물론이고 내륙 일부지역까지 진출했던 홍건적은 그간 전열을 재정비한 고려군의 반격으로 이제 개경과 국경 일부 지역에서만 준동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토멸 작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출전의 보고를 위해 왕 앞에 도열한 복주군의 군세는 자못 엄중했다. 왕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출전을 격려하고, 장수 무빈에게 친히 어검(御劍)을 하사했다. 군사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왕과 백성의 가슴은 터질 듯 벅찼다. “이제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자네의 무훈을 믿어 의심치 않고 기다리겠네. 개경을 수복하면 그곳에서 만나세." “나 개인의 무훈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고려가 자주국이 되면 술이나 한잔 나누면 될 일. 그런데 개경에서 만날 때는 여랑도 함께 볼 수 있겠지?"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랑은 왕의 호위무사니 당연히 개경으로 갈 테고. 모르지, 혹시 내가 파직 당해 복주에서 여랑의 귀향을 기다리면 소홀했던 지난날의 벌을 받게 될지. 하하하!" “예끼, 이 사람! 하하! 이제 여랑은 왕과 더불어 님도 지켜야겠구나. 개경에서는 너를 선머슴 같은 모습 말고, 고운 여인으로 만나고 싶구나." “장군께서는 어찌 저를 선머슴이라 하십니까…." “어이구, 이제는 얼굴도 붉히고. 벌써 여인이 다 되었구먼 그래, 하하하!" 얼굴을 붉힌 여랑을 두고 홍언박, 무빈 두 남자는 짓궂은 너털웃음을 한참동안 더 이었다. 인연이 있어 만나, 그 인연을 소중하게 이어온 사람들이 이제 더 깊은 정의 날을 앞두고 있는 것이었다. 궁 한 곳에서는 김용과 조일신이 은밀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친원파의 거두들로 몽진 이후에는 원나라와의 연락도 닿지 않아 노심초사하는 중이었다. “홍건군이 패퇴하고 있음이 분명한 듯하오. 이제 개경을 수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니 참으로 걱정이오." “그렇소. 더구나 복주군을 얻어 군세를 보강한 왕은 개경으로 돌아가면 분명 우리를 압박할 것이오. 듣기로는 손홍량이 올린 수습책의 주된 내용도 우리 친원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라 하오." “나도 들어 알고 있소. 문제는 노국공주, 그 계집이오. 왕은 노국공주의 말이라면 거절하지 못할 텐데, 어쩌자고 부모와 본국을 외면한 채 독배를 마시려하는 것인지, 원!" “둘 다 사랑에 눈이 먼 것이지요." “사랑? 흥, 그까짓 사랑이 다 무어란 말이오. 힘이 있고, 돈이 있으면 사랑 따위는 저절로 찾아오는 하찮은 것이거늘." “아무튼 어찌할 생각이시오? 날을 잡아야 되지 않겠소?" “승전보가 들어오기 전에 끝을 봐야지요. 이미 왕이 바뀐 뒤라면 그 누군들 어찌하겠소. 어차피 승전의 과실은 누가 되든 왕의 것이니." “반란이다! 역모다!" 왕이 왕후와 함께 홍언박을 대하고 있을 때 김용과 조일신 일당이 수십의 군사를 이끌고 내궁으로 쳐들어왔다. 이미 내궁 밖의 군사는 은밀한 공격에 목숨을 잃은 터였고, 당장 남은 호위군은 여랑과 대여섯의 군사뿐이었다. 여랑이 남은 군사들과 혼전을 펼치는 그 사이, 김용과 조일신은 벌써 왕 앞에 피 묻은 칼을 들고 섰다. “왕께서는 어찌 은혜를 배신으로 갚으려 하시오! 선대로부터 우리가 원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고 그 그늘 아래에서 누린 영화가 백년이 넘는 터요!" “네 이놈! 어찌 감히 네 놈이 선왕들을 들먹이는 것이냐! 나라의 힘이 약해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오늘까지 견디어 온 것은 오직 힘을 키워 나라의 주권을 바로 세우려 함이었다. 그 절치부심의 세월에 너희 놈들은 상국이라는 이름으로 원국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 왕을 협박하며 영화를 누리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제 내가 나라의 자존을 찾으려하니 기어이 그 승냥이 근성을 드러내는구나!" “나라의 자존이라고! 하하, 그까짓 하찮은 자존 때문에 목숨을 잃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에잇!" 높이 치켜드는 칼 앞에 왕후가 뛰어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대들은 고려의 신하, 어찌 고려의 왕 앞에 칼날을 세우는 것이오!" “공주! 이 모든 것이 공주의 탓이오! 공주야말로 어찌 황제폐하를 능멸하는 것이오! 공주가 일개 위왕의 딸로서 고려의 왕비가 된 것은 황제폐하의 은덕 아니오. 그런데 자식의 도리도, 폐하에 대한 은혜도 모두 외면하고 오직 사랑놀음에 빠지다니, 참으로 어리석소!" “아무리 부모님의 은혜가 있다고 해도 나는 이미 한 지아비의 아내. 지아비가 왕이어서 나 또한 고려의 국모가 된 것이지 황제의 은덕은 아니오. 사랑하는 이의 아내, 한 나라의 국모가 되었으니 그 길을 지키는 것이 바른 도리. 그러나 그대들은 나라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었으니 도리를 모르는 승냥이가 맞구려." “뭐라고! 이런 발칙한 계집!" “네 이놈!" 김용의 칼날이 왕후를 향하자 홍언박은 온몸을 날려 그 칼을 받았다.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를 토해내면서도 홍언박은 가슴에 박힌 칼날을 움켜잡아 왕과 왕후를 지키려했다. “으윽, 여, 여랑아…!" 단발마의 비명에 문을 박차고 뛰어든 여랑의 낯빛이 하얗게 바랬다. “오, 오라버니!" “왕과 왕후마마를…." 벌써 조일신의 칼날이 왕을 향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여랑도 몸을 날려 칼날을 막아서니 그녀의 복부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여, 여량아, 왕을, 왕을…." 홍언박의 가슴을 발길로 걷어차 칼을 빼낸 김용이 다시 칼날을 치켜세웠다. 여랑은 조일신을 밀치고 제 칼을 휘둘러 왕을 향한 김용의 칼날을 막았다. 날카롭게 부딪히는 두 개의 칼날…. 왕이 뒤늦게 검을 찾아들자 조일신이 왕과 겨루려 들었다. 여랑이 몸을 돌려 조일신을 단칼에 베는 사이 김용의 칼날이 그녀의 등에 박혀들었다. 김용이 박힌 칼을 뽑으려하는 사이 왕이 김용의 목에 칼을 꽂았다. 단발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김용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어졌지만 여랑의 몸뚱이도 낙엽처럼 바닥에 굴렀다. “오, 오라버니…." 바닥을 기어서 다가오는 여랑을 홍언박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헐떡였다. “여, 여량아. 미, 미안하구나…" “괜, 괜찮습니다. 이렇게라도 님을 따라 함께 가게 되었으니 저는 행복합니다. 이제 다시는 서로 떨어져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 이승에서 못 누린 영화, 우리 저승에서 다정(多情)으로 대신하자꾸나." “여랑아! 형님! 아…! 그대들이 있어 내 새 희망을 품었건만 어찌 이리 떠나려하시는가…." 홍언박은 왕의 외사촌 형이었다. 사랑하는 정인이 있고, 복되고 평안한 땅에서 오순도순 살자는 굳은 약속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였다. 조정의 권세나 세상의 영화는 진작부터 외면했다. 다만 외세에 핍박받는 나라의 안위가 염려되어 홍언박은 안에서 왕을 보필하고, 여랑과 무빈은 밖에서 왕의 거룩한 뜻을 위해 은밀히 준비하자 미루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왕의 뜻이 펼쳐지려는 때, 그들은 먼저 떠나게 된 것이다. “왕이시여, 끝까지 보필하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무슨 소립니까. 제가 형님과 이 여랑에게 목숨을 빚진 게 얼마인데, 아! 하늘이시여…!" “부디, 부디, 고려를 핍박받지 않는 자주국으로 만드소서…." “오! 선왕들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이들의 영혼을 보살펴주소서…." “왕을 지켜라! 반란의 무리를 척살하라! 왕후마마를 모셔라!" 손홍량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내궁 안으로 울려오고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서 일흔다섯 노구의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여랑과 홍언박의 시신을 끌어안은 왕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계속> 글=김정현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연필 일러스트=김성태 화백
2011.04.20
[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4) 사랑의 땅에 내리는 오색 꽃비
#5. 힘을 기르자, 적을 물리치자! 랑을 바라보는 홍언박의 눈빛이 그윽했다.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촉촉하고 애틋한 듯도 싶었다. 여랑은 어디에 그처럼 용맹한 여장수의 모습이 있었나 싶을 만큼 수줍은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실로 몇 해만에 보는 님의 모습인가.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 님에게 가있지 않았던가. 그래도 지금은 나라가 위난에 처한 터라 당장 사랑을 이루지는 못하는 터. 하지만 이제부터 두 사람은 지척에서 함께 하늘을 보고 숨결을 느낄 수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네가 호위무사가 되어 이제 우리가 함께할 수 있게 되었구나. 장하고 고맙다. 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환궁하면 그때는 우리 백년, 천년을 변치 않을 가약을 맺자꾸나." "오라버니, 저는 가약이 아니어도 오라버니께서 한 하늘 아래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저는 그리 염두에 두지 마시고, 왕과 나라의 일에 먼저 애쓰십시오." "오냐. 나라가 있지 않고서야 어찌 우리의 사랑인들 온전하랴.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부디 왕과 왕후마마의 호위에 만전을 기하여라. 너는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만, 조정에는 아직도 원나라에 기대려는 무리들이 있어 왕후마마를 핍박하기도 하는 실정이다." "설마하니 왕후마마까지요?" "그래, 이제 이곳 복주에서 왕실이 안정되어가니 그들인들 더는 어쩌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방심할 일은 아니다." 여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가 없으면 사랑도 온전할 수 없다는 님의 말씀.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이를 따라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고려의 국모로서 의연한 노국공주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리라. 주성 밖 들판에서는 군사로 편성된 안어대동의 장정들이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정연한 대와 오와 열이 장수 무빈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진을 펼치고 닫고 변하는 모습은 가히 천지를 떨게 하는 위엄이 넘쳤다. 한편에서는 칼과 창을 든 병사들이 '충(忠), 의(義), 용(勇), 무(武)! 안, 어, 대, 동!'의 구호에 맞춰 절도 있고 현란하게 움직이니 그것은 아름다운 군무처럼도 보였다. 성루에 선 왕께서 흡족한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마음 든든한 모습입니다. 이제 부원군의 수습책을 듣고 싶습니다." 곁에선 손홍량이 읍하고 입을 열었다. "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미 원의 쇠락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원에 빌붙은 몇몇 신하들이 왕과 왕후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줄 신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이번에 우리를 침략한 홍건의 무리들이 한인(漢人)의 후예로서 원에 대항한다고는 하나, 이미 우리에게는 적이 되었으니 철저히 토멸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고 한인들에게도 우리의 강인함을 주지시켜야 하옵니다. 우리 고려는 비록 중원의 나라들과 조공의 관계를 맺은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외교상의 방편일뿐 주종의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허나 몽고인들의 원에 의한 고려의 핍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으니, 차마 태조 대왕을 비롯한 선대의 종묘에 고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에 원의 멸망 이후에도 중원의 국가에 그와 같은 수모를 다시 당해서는 아니될 것이오니 왕께서는 홍건적을 철저히 토멸하시고, 원의 마지막 준동에도 의연히 대처하실 수 있도록 무엇보다 국방을 튼튼히 하소서." "이를 말이겠습니까. 다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백성들입니다. 백성들은 저와 같이 나라를 위해 한겨울 삼베 옷차림에도 기꺼이 몸을 내던지는데, 정작 앞장서야 할 중신들은 국론을 분열시켜 나라를 이 지경에 빠트렸으니 어찌 백성들을 볼 낯이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어서 서둘러 국론을 가르는 신하는 내치시고, 조정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소서. 그리하면 백성들은 한겨울 삼베옷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고려의 백성들, 더구나 안어대동의 백성 모두는 나라의 소중함과 왕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어 신민 모두가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면 살림의 나아짐은 불꽃과 같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오직 홍건의 무리를 격멸하고, 왕실이 부흥해 나라가 안정되도록 할 때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입니다. 오늘 저 장병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를 보니 마음 든든하고 고려의 밝은 미래를 눈앞에 보는 듯합니다. 또한 흩어져 있던 장수와 병사들이 곳곳에서 모여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는 장계도 받았습니다. 이에 최영, 이방실, 정세운 등 장수로 하여금 홍건적을 격멸토록 하였으니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시면 여기 안어대동의 군사들도 지원군으로 보내소서." "그럴 생각입니다. 다만 저들 군사는 앞으로 우리 고려의 주력군으로 삼을 것이니, 조금 더 훈련을 시킨 다음 홍건적의 주력을 격멸할 때 내보낼 생각입니다. 무빈 장군이 참으로 든든합니다." "왕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나 더 아뢰올 말씀은 왕후마마의 신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염려스럽습니다. 왕실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어서 후사를 보셔야 할텐데……. 왕께서는 군사 훈련은 소신과 무빈 장군에게 맡겨두시고, 왕후마마를 위로하고 돌보소서." "하하. 고맙습니다, 부원군." 은 왕후와 함께 교교한 달빛 아래를 거닐면서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다. 오직 사랑하는 지아비를 따라 고려의 국모로서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그 마음 한 자락에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왜 없으랴. 하지만 굳이 그것을 다시 꺼낼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모르는 척 외면하면서 일상의 위로로 마음을 달램이 나을 터였다. "왕후, 파천 길의 고생으로 몸이 많이 상했을텐데 좀 어떠하오?" "아닙니다. 이곳 땅에 온 뒤부터는 참으로 편안한 기운에 아무런 탈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인정스럽고 정성스러운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그건 그렇소. 나도 이처럼 편안한 기운을 느끼고 미더운 마음이 든 적이 없었던 듯 싶소. 참으로 복되고 평안한 땅이오." "왕께도 다행한 일입니다. 이제 각지 장군들의 활약으로 홍건의 무리들도 그 기세가 수그러들고, 복주 군사들의 용맹함은 하늘을 찌를 듯하니 왕께서도 건강을 유념하십시오." "허허. 그렇지 않아도 오늘 복천부원군께서도 우리의 후사를 걱정하면서 왕후와 나의 건강을 염려했소." "참으로 송구합니다." 왕후는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정비로서 혼인한지 벌써 13년째이건만 여태도 태기(胎氣)가 없었던 것이다. 왕후의 그 기색에 왕은 얼른 그녀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공주,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려. 하지만 걱정마시오. 그간은 원국과의 일이나 조정의 일로 왕후의 마음이 편치 않아 그리되었을 것이오. 이제 여기 안어대동의 땅에서 좋은 기운을 얻으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오. 더구나 우리의 사랑이 이처럼 두터운데 어찌 하늘인들 무심하시겠소." "그리 말씀해주시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나 저도 이곳에 온 뒤부터 알 수 없는 좋은 기운에 공연히 마음이 설렙니다." "하하, 좋은 일이오. 참으로 좋은 기운의 땅이오." 행궁 밖에서 갑자기 폭죽이 터지면서 하늘 가득 오색의 불꽃을 수놓았다. 성 안의 백성들이 왕과 왕후의 마음을 알아 축복해주는 듯 싶었다. "보시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구려. 저것이야말로 우리 사랑의 꽃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아름다운 사랑의 땅에 오색 꽃비가 내리네. 하늘의 비가 만물을 적시듯 오늘 꽃비는 왕후를 적시소서. 저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사랑의 노래를 들으면서 왕과 왕후는 천천히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 글 = 김 정 현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2011.04.13
[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3) 안어대동에 펄럭이는 황금깃발
#4. 왕이 오시네 복주성 성루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늙은이와 아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손에는 저마다 몽둥이며 농기구,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라도 불끈 쥔 채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서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장년의 사내, 건강한 아녀자는 모두 왕을 맞으러 송야천으로 나가고, 성을 지키기 위해 꼬박 밤을 새운 그들이었다. 새벽녘, 멀리 횃불 빛이 희미해지면서부터는 간간이 들려오던 함성마저 그쳤지만, 아직은 승전보도 패전의 기미도 없었다. 모두들 피가 마르는 듯했다. 머리를 삼베 끈으로 질끈 묶은 온후한 얼굴의 노인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손홍량. 올해로 일흔다섯 해를 산 그는 스물셋이 되던 충선왕 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종1품 판삼사사(判三司事)에까지 오른 뒤 복천부원군에 봉해져 지금은 낙향한 나라의 원로였다. 그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왕실의 일원인 홍언박이 분명 복주로 옥체를 모셔 오리라 생각하고 대비한 터였다. 아직 승전보는 없지만, 결코 안어대동의 민군(民軍)이 쉽사리 패하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또 믿었다. 하지만 그래도 입안이 마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이 저 멀리에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것이 구름인가 싶어 잔뜩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여보게들! 어서 손에 든 몽둥이와 돌멩이는 내려놓고,왕을 맞을 준비를 하게!왕후를 모실 준비를 하게!성문은 활짝 열고, 길을 쓸고, 밥을 짓고, 따뜻한 국을 끓이게.빚어둔 고삼주도 청자 주병에 담아내고, 말린 나물이나마 정성껏 삶고 무쳐서 왕과 왕후의 상을 차리게. 맛나고 정갈하게.왕을 맞이하자!왕후를 모시자!"“소주라면 원나라의 그 증류주를 이르는 것입니까?"“예, 그러하옵니다.충렬왕께서 왜국 정벌에 나선 아국 고려군과 원군을 위무하기 위해 이곳 땅에 다녀가신 바 있습니다.그때 증류주의 제조법이 전해져 지금도 빚고 있으니, 안동소주라 하옵니다."“허허, 참으로 왕실과 인연이 각별한 땅이오. 아니, 우리 고려의 반석이고, 왕들의 땅이오."“왕이 오신다! 어가 행렬이다!" “와……!" 사람들의 함성은 그것이 잘못된 소리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럼, 그렇지!’ 노인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보게들! 어서 손에 든 몽둥이와 돌멩이는 내려놓고, 왕을 맞을 준비를 하게! 왕후를 모실 준비를 하게! 성문은 활짝 열고, 길을 쓸고, 밥을 짓고, 따뜻한 국을 끓이게. 빚어둔 고삼주도 청자 주병에 담아내고, 말린 나물이나마 정성껏 삶고 무쳐서 왕과 왕후의 상을 차리게. 맛나고 정갈하게. 몽고족 원으로부터 나라의 자존을 되찾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땅과 세금의 제도를 개혁한 왕이시네. 나라의 왕이시네, 백성의 왕이시네! 부모의 땅에서 멀리 떠나와 그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치기도 하련만, 오직 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려의 사람이 된 왕후시라네. 백성의 어머니시라네, 나라의 국모시라네!" “왕을 맞이하자! 왕후를 모시자!" 온 성민은 하나가 되어 손홍량을 따라 노래 부르며 잰걸음으로 달리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지난 밤, 송야천을 건넌 왕은 어가 행렬을 멈추고 강 건너 전투가 어떻게 될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홍언박도 처음에는 어서 복주성으로 향하기를 재촉했지만 이미 밤이 깊어진 터라 혹여 모를 매복군을 염려하여 왕의 뜻을 따랐다. 물론 그것에는 무빈과 여량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과연 새벽녘 여명이 밝아오자 마지막 함성과 함께 칼과 낫으로 무장했던 안어대동의 민군이 무빈과 여량을 따라 정연하게 강을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들이, 백성이, 나라를 지키고 왕을 맞으려는 마음 하나로 정예의 홍건군을 물리치고 승전한 것이었다. 왕과 왕후의 용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것을 지켜보며 홍언박은 가슴 벅찬 감동에 저절로 '고려 만세!’를 외쳤다. 복주성의 민군과 신하, 비빈들은 찬란한 아침햇살 아래에서 하나 된 마음으로 어가 행렬의 정비를 서둘렀다. 기다리고 있을 복주성 성민들에게 비록 파천한 지경이나마 왕과 어가의 초라한 행색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왕은 희망이 되고 기둥이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오색 휘장과 문장을 휘감고, 황금빛 왕의 깃발을 펄럭이는 어가 행렬이 복주성 턱 앞에 이르렀다. 벌써부터 활짝 열려있던 성문 안쪽에서 하얗고 누런 삼베 옷차림의 늙고 어린 백성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길 양 옆으로 나뉘어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왕은 차마 그 백성을 두고 말 위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땅에 내려섰다. “왕이시여! 말 위에 오르소서!" 느린 걸음으로 성문을 나온, 삼베 끈으로 머리를 동여맨 노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왕은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오, 복천부원군 아니시오? 여기에 어쩐 일로?" “왕이시여. 이곳 복주는 저의 향리이옵니다. 비록 몸이 늙어 낙향은 하였으나, 어느 한 날 한 시도 왕과 왕후마마를 잊은 날이 없사옵니다. 마침내 황망하게도 어가의 몽진 소식을 듣고, 왕께서 필히 이곳 안어대동의 땅으로 오시리라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럼 나를 구한 안어대동의 군사들도 부원군께서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사옵니다. 본디 안어대동은 고려의 반석이 되었던 땅이기에 백성들은 언제나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이 아니라, 그저 안어대동의 백성들이 그리한 것입니다. 왕의 홍복이며, 나라의 홍복입니다." “오! 안어대동! 참으로 고려의 반석이오!" 왕을 맞은 백성들의 기쁜 마음의 노래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왕과 왕후는 화려한 성장을 하고, 정성을 다해 준비한 연회상을 받았다. 왕의 좌우에는 어느새 무빈과 여량이 시립해 호위했고, 손홍량의 곁에 나란히 앉은 홍언박은 연신 여량에게 눈길을 향하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왕이시여, 소신의 잔을 받아주시옵소서. 건국주 고삼주이옵니다." “건국주 고삼주라? 처음 듣는 이름의 술입니다." “일찍이 태조께서 병산 전투를 앞뒀을 때, 안중이라는 주모가 이 고삼주로 견훤의 군사들을 취하게 해 대승에 일조했다 하옵니다. 그로부터 고삼주를 나라를 건국한 건국주라 부르기도 하옵니다." “그렇소? 참으로 건국주라는 이름이 맞춤합니다. 하물며 태조께서도 그러하시고, 명종조에도 나라에 크게 공을 세운바 있다 들었는데, 어제는 나와 왕후까지 인교의 덕을 입었으니 그 보답을 어이해야 좋겠습니까?" “보답이라니요, 지나친 말씀입니다. 오시는 행로에 용체가 고단하실 터이니 잔을 비우신 뒤 이곳 소주도 한 잔 받으시고, 오늘은 편히 쉬시옵소서. 용체가 회복되시면 소신이 용렬하나마 오늘의 수습책을 간할까 하옵니다." “소주라면 원나라의 그 증류주를 이르는 것입니까?" “예, 그러하옵니다. 충렬왕께서 왜국 정벌에 나선 아국 고려군과 원군을 위무하기 위해 이곳 땅에 다녀가신 바 있습니다. 그때 증류주의 제조법이 전해져 지금도 빚고 있으니, 안동소주라 하옵니다." “허허, 참으로 왕실과 인연이 각별한 땅이오. 아니, 우리 고려의 반석이고, 왕들의 땅이오. 그런데 소주보다도 부원군의 그 수습책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아니옵니다, 먼저 용체를 평안케 하시옵소서. 만백성이 사랑하는 왕후마마의 옥체도 많이 상하신 듯하여 백성 모두의 마음이 아프옵니다." “고맙습니다. 부원군의 자애로움에 왕후도 힘을 낼 것입니다." 해쓱해진 얼굴의 노국공주를 돌아보던 왕이 문득 시립한 무빈과 여량에게 눈길을 가져갔다. “오, 저들은 누구요? 내 저들의 용맹에 매우 감탄하고서도 미처 보답하지 못했구려." “왼쪽은 무빈이라 하오며,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의는 변치 않은 저의 지기이옵니다. 언제라도 나라를 위해 쓰일 때를 기다리며 병법과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은 여랑이라 하오며, 어릴 적 제 아버님 친구 분의 딸로 제게는 여제(女弟) 뻘이 되옵니다. 무빈의 수하에서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홍언박이 답하자, 무빈과 여랑은 왕의 앞에 부복했다. “참으로 가상하구나. 기왕 나라를 위해 나섰고 나와 왕후를 구했으니, 무빈은 장수의 자리에서 홍건적의 퇴멸과 개경 수복에 앞장서고, 여랑은 나와 왕후를 호위하는 게 어떻겠느냐?" “황송합니다. 왕의 뜻을 받들어 고려를 수호하고, 왕과 왕후마마를 지킬 것입니다!" 무빈과 여랑이 당당한 음성으로 고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계속> 글 = 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2011.04.06
[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2) 人橋를 밟고 안어대동의 땅으로
#3. 뒤는 적이요, 앞은 강이라니! 공민왕의 몽진(蒙塵)길은 초라하고 험난했다. 왕은커녕 왕후마저 연(輦·가마)을 버리고 말을 타야 했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성민(城民) 없이 관리 몇이 왕을 맞이했고, 충청도 충주에 도착했을 때는 맞이하는 관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전황이 급박했음이리라. 주흘산을 넘고 예천을 거쳐, 풍산 수리에 이르러 잠시 어가를 멈추었다. 마을 주민들이 나와서 왕의 행렬을 반기며 극진히 대접했다. 달포 만의 환대에 일시 마음의 안정을 얻은 왕은 홍언박으로부터 복주와 관련된 역사를 들었다. “참으로 선대 왕들께서 평안하고 복된 땅이라 하신 까닭을 알만하오. 그렇지만 과연 복주라고, 지금 저들 10만 대군에 대항할 기틀을 만들 수 있겠소?" “뜻이 강건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또한 그 곳에서는 일찍부터 저와 교우하던 몇 사람이 언제든지 나라를 위해 나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수심 가득한 용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몽진을 나설 때 시위하던 군사들도 이제는 겨우 십수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모두 추적하는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죽거나 다쳐 낙오된 것이었다. 진퇴유곡. 이게 고려의 운명이란 말인가! 저 강만 건너면 복주인데, 안동인데! 안어대동의 땅을 코 앞에두고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이 것이 운명이라면, 정녕 이제 고려는 끝이었다. “안어대동의 부녀자들이여, 왕후마마와 비빈마마들이 계시다!먼저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게 하라!왕후마마의 다리를 놓자! 우리의 왕을 모시자!"“나를 쫓던 홍건적은 지금 어디쯤에 있소?" “산과 재가 높아 아직은 넘지 못한 듯합니다." “시위하던 군사들도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구려." 왕의 낙담에 홍언박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적은 언제 재를 넘을지 모르는데, 이래서는 복주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구려." “심려치 마십시오. 남은 군사 중 몇을 앞에 보내 적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 왕의 하문에 미처 대답도 꺼내기 전에 시위 군사의 화급한 전갈이 들이닥쳤다. “큰일 났사옵니다! 홍건적이 재를 넘어 벌써 예천을 지났다는 전갈입니다!" 예천이라면 바로 얼마 전에 지나온 곳이었다. 그새 해는 저물어 어둑해지는데, 일각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허둥지둥 자리를 일어선 어가 행렬은 어둠이 내리기 전 복주에 이를 생각에 말을 내달렸다. 그래도 왕후인 노국공주는 대륙에서 말을 탔던 터라 나았지만, 다른 비빈들은 말을 타는 것도 처음인데 말마저 비루먹어 그 처량한 행색이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절로 젖게 했다. 어느새 홍건적 추적군의 말발굽이 일으키는 먼지가 등 뒤에서 뿌옇게 일고 있었다. 홍언박은 앞서 보낸 군사들을 애타게 찾으며 행렬을 호위했다. “왕이시여, 저희가 여기서 적을 막을 테니 어서 가십시오!" 보이지 않던 시위 군사 몇이 모습을 드러내며 허리를 굽혔다. 왕이 그제야 사위(四圍)를 돌아보니, 짚단으로 만든 병사들이 창검을 높이 세워 진을 펼친 형세가 제법 그럴 듯했다. 홍언박이 말하던 준비라던 것이 이 것인 모양이었다. “왕이시여, 복주까지는 무사히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어서 서두르소서." 홍언박의 재촉에도 왕은 잠시 말머리를 멈추고 군사를 돌아보았다. 참담함이야 더 말할 수도 없지만, 한편으로는 왕을 위해 기계(奇計)를 짜낸 군사들의 정성에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적의 눈을 속이는 계책은 잠시 추적군의 말발굽을 멈추게 할 뿐, 이내 저들의 칼날에 도륙될 터이니……. 왕은 저미는 가슴을 달래며 다시 말고삐를 당겼다. 과연 그랬다. 갑작스레 나타난 정연한 군세에 추적군의 말발굽은 주춤했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전열을 정비하고 공격을 개시해 왔다. 불과 십여 기의 군사에 수백의 적이라니……! 칼이 부딪치고 피가 튀니 중과부적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적의 피인지 자신의 피인지, 구천의 악귀처럼 검붉은 피칠을 한 시위 군사 몇이 겨우 몸을 추슬러 왕의 뒤를 쫓았다. 어느새 어둠은 세상을 뒤덮었고, 어가는 걸음을 또 멈춰야 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 들려오는 것은 거친 물소리뿐. 송야천이었다. “아, 이 강을 어찌 건너느냐……." 왕이 낙담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지치고 나약한 비빈 시종들. 저들이 어찌 깊이도 알 수 없는 한밤중의 강을 건넌단 말인가. 게다가 동짓달 추위에 때 아닌 안개까지 자욱하니, 어찌할꼬! 왕의 탄식 앞에서 홍언박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진퇴유곡. 이게 고려의 운명이란 말인가! 저 강만 건너면 복주인데, 안동인데! 안어대동의 땅을 코 앞에 두고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이 것이 운명이라면, 정녕 이제 고려는 끝이었다. “적이다!" 불화살이 날아오자, 말발굽 소리가 지척이었다. “오냐, 모두 칼을 뽑아라!" 비장한 왕의 외침에 일순 비빈들의 비명소리마저 멎었다. 그러나 시위하는 군사라고는 겨우 열 명 남짓.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홍언박은 끝까지 하늘에 대한 믿음을, 반 천년 고려의 수호신 부처님의 자비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왕이시여, 여기는 제가 막겠습니다. 어서 말을 달려 강을 건너소서!" “그럴 수는 없다! 왕후와 비빈을 버리고 혼자 사는 구차함을 겪느니 차라리 내 피를 쏟으리라!" “아니되옵니다! 바로 지척에 왕의 땅이 있습니다. 옥체를 보존하여 고려를 지키소서!" 왕을 노국공주의 곁으로 밀친 홍언박이 칼을 빼어들고 짓쳐오는 적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 사이 앞서 쫓아온 시위 군사 몇이 죽을 힘으로 칼을 휘두르며 적의 걸음을 지체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 일각이나 버티려나. 바람 앞의 등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와……!" 갑작스레 들려오는 함성에 횃불을 밝힌 한 무리의 사람들. 홍건적보다 더 놀란 것은 왕이었다. 그러나 한 손에는 횃불을 밝혀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과 낫을 든 채 적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은 매운 겨울바람에도 성긴 삼베 옷차림인 백성, 고려의 백성이었다. “홍언박, 어디 있는가?" 어둠을 가르는 소리에 홍언박이 달려갔다. 과연 그는 무빈이었으니, 근엄한 얼굴에는 충정의 결기가 가득했다. “고맙네, 때맞춰 와주었네." “나도 고려의 백성일세. 저 홍건적 놈들은 내가 물리칠 테니 자네는 어서 어가를 모시게." “강이 막혀서……." 비빈들을 향한 홍언박의 눈길에 무빈은 비로소 사정을 알아채고 백성의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안어대동의 부녀자들이여, 왕후마마와 비빈마마들이 계시다! 먼저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게 하라!" “왕후마마의 다리를 놓자! 우리의 왕을 모시자!" 일사불란한 합창과 함께 한 무리의 부녀자들은 단박에 강으로 뛰어들어 줄을 짓고 허리를 굽혀 인교(人橋), 사람의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빈이 다시 소리쳤다. “안어대동의 군사들이여! 여랑을 따라 적을 물리쳐라!" “나 여랑이 앞장선다! 홍건적을 물리치자!" “와……!" 카랑한 여인의 선창에 천지가 무너질 듯 함성이 울리자, 하늘의 별빛마저 떨리는 듯했다. 갑옷 차림의 홍건적 군사들도 노도와 같은 그 기세에, 벼린 칼을 들고서도 삼베옷 군중의 낫 앞에서 사지를 후들거렸다. 왕은 눈물을 지었다. 엉성한 삼베 치마저고리 틈새로 동짓달 매운 찬바람이 매섭게 스치건만, 그녀들은 머뭇거림조차 없이 차디찬 강물에 몸을 넣어 다리를 만들었다. 등을 타는 비빈의 발걸음이 지나가면 다시 몸을 일으켜 앞쪽으로 달려가 다리 잇기를 수십 차례……. 이를 기려 '놋다리밟기’라 할 것이니, 나라의 왕 된 자로서 백성의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 텐가. 아, 정녕코 나라의 주인은 이들 백성이니……! 왕의 어가는 치열한 고함과 비명과 칼부림 소리를 등 뒤로 한 채 안어대동의 땅을 향해 그렇게 송야천을 건넜다. <계속> 글=김정현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2011.03.30
[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1) 고려의 개국과 안동 파천(播遷)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스토리텔링 뮤지컬 '왕의 나라’ 원작을 매주 1회(수요일), 총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왕의 나라’는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한 공민왕이, 고려왕조의 안정을 되찾기 위한 교두보를 안동에서 마련한다는 스토리를 주요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여기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애틋한 러브스토리와 전란(戰亂)의 긴박한 상황이 더해져 극의 긴장감을 높일 예정입니다. 고려개국 공신인 삼태사(김선평, 권행, 장정필)를 비롯해 여랑, 홍언박 등 안동출신의 인물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고, 스토리텔링화해 흥미를 더합니다. 스토리 마이닝(발굴)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이 맡고 원작은 소설 '아버지’의 작가 김정현씨가 집필합니다. '왕의 나라’는 영남일보와 <재>안동영상미디어센터가 공동으로 제작하고 경북도와 안동시가 후원하는 스토리텔링 뮤지컬로 오는 8월 무대에 오를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왕이시여, 복주로 행하시옵소서." “복주? 그곳이 어디냐?" “그곳은 일찍이 태조께서 안어대동이라 칭하신 왕의 땅이며 고려의 반석입니다." “오, 다행이고 축복이로다. 어서 그곳으로 향하자!" “왕이시여, 이 비에게는 오직 왕께서 곁에 계시는 그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당신의 그 명정(明正)한 뜻과 굳건한 의지는 한 여인을 넘어 인간으로서 하늘처럼 사랑하게 합니다." #1. 하늘이 열리다, 고려의 개국 서기 927년, 후백제의 왕 견훤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한 뒤 경애왕(景哀王)을 협박해 자진(自盡)하게 하고 왕비를 겁탈하니, 견훤의 부하들은 따라서 비빈들을 난행했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 1만으로 신라를 구원코자 하였으나, 지금의 대구 인근 공산(公山)에서 신숭겸과 김낙 등의 장수를 잃고 패하였다. 930년, 날로 쇠약해 가는 신라를 보듬으며 견훤과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왕건은 지금의 안동 땅인 고창군(古昌郡)에서 결전을 치르게 된다. 한편 이미 신라 조정의 통치력이 상실된 상태에서도 3년 전 경애왕에 대한 견훤의 만행을 잊지 않은 채 불공대천(不供戴天)의 원수로 여기던 고창군 성주 김선평(金宣平)은 권행(權幸)·정필(貞弼)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킨다. 열세에 몰려있던 왕건군은 김선평 군사의 도움으로 병산(甁山)전투에서 대승한다. 더불어 김선평은 군(郡)을 들어 고려에 귀부(歸附)하니 왕건은 나라의 터전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2년 뒤인 935년, 신라의 경순왕 또한 무고한 백성의 참혹한 죽음을 피하고자 투항하고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했다. 936년, 고려 태조 왕건은 고창군을 '동쪽에 있는 평안한 땅’이라는 뜻의 '안어대동(安於大東)’이라 칭하고, 안동부로 승격했다. 또한 훗날 김선평·권행·정필 등 세 사람을 태사(太師)로 추증하니, 이들이 안동 태사묘(太師廟)에 배향된 삼태사(三太師)다. 천년의 명(命)이 다하고 새 하늘이 열렸다. 고려의 하늘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백성의 눈물을 거두리라. 재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왕의 위엄은 나라의 반석이다. 다시 천년을 이어갈까, 반 천년은 태평하리라. 안어대동의 땅이다. 나라의 기틀이 된 땅이다. 삼태사의 충의는 왕을 보위했다. 안어대동의 백성은 나라를 보위하리라. 왕의 땅이다. 나라의 땅이다. 백성의 땅이다. 대대손손 영원할 안어대동이다. 고려는 찬란한 영화 속에서도 수많은 고난을 맞닥트렸지만,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헤쳐나가 반 천년 사직을 지켜갔다. 거란의 침입에 맞서는 귀주대첩의 승전보를 울렸고, 여진을 정벌해 국경을 안정시켰으며, 몽고의 침입에는 '팔만대장경’ 인류문화유산을 꽃 피우며 삼별초의 항쟁으로 맞섰다. 그리고 1351년, 원나라에 볼모로 들어갔던 왕전(王 )이 돌아와 충정왕의 뒤를 이으니 그가 고려 31대 공민왕이다. 10년 볼모 세월을 겪고 돌아온 공민왕은 나라의 면모를 쇄신하기 위한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원의 풍습인 변발을 없애고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한 것 등은 민족적 자주정신의 발현이었고, 압록강 서쪽 땅과 쌍성총관부 옛 땅을 회복한 것은 국력의 확충이었으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개혁을 단행한 것은 민생을 살피고 부국강병의 터전을 닦으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이러한 국정쇄신에 지지기반이 된 것은 외사촌형 홍언박 등 외척세력과 원나라 볼모시절 시종했던 김용·이숙 등 측근세력이었다. 그러나 공민왕 즉위 초 이미 이민족 원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한족 반란군 홍건적은 원의 군사에 밀리자, 그 방향을 고려로 틀어 압록강을 건넜다. 원이라는 저물어가는 세력을 사이에 둔, 한족 반란군과 자주독립을 꿈꾸던 고려의 이유 없는 전쟁이었으니, 아! 절치부심한 개혁군주 공민왕의 꿈은 물거품이 되는 것인가! 1359년, 1차 침공한 홍건적은 이방실·안우 등의 맹렬한 반격으로 4만 군사 중 겨우 300명 만 살아 돌아갔으니 고려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탕질로 고려 백성들의 피해와 국력 손실 또한 적지 않았으니, 공민왕의 개혁은 발목을 잡혔다. 무엇보다도 홍건적에 대한 반감은 친원(親元)세력의 발호에 빌미가 되었으니, 내부의 혼란이 우려되었다. 1361년, 홍건적은 다시 10만의 군사로 고려를 침공해왔으니……. 한편 안어대동의 땅은 1197년 성종조에 김삼(金三)·효심(孝心) 등이 봉기하여 도적질을 할 때 그들의 평정에 공을 세워 대도호부로 승격했다가, 1308년 충렬왕 대에는 복주목(福州牧)이 되어 있었다. #2. 파천(播遷), 어디로 가야 하나!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10만 홍건적의 공세는 둑을 터트리고 쏟아져 나온 물살 같았다. 이미 1차 침공 때도 잠시 개경(開京)을 비우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쉽게 회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공민왕의 고민이 깊어지자, 우려했던 내분이 고개를 내밀었다. 김용 등 친원파는 왕후 노국공주를 압박했다. 노국공주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로, 공민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을 때 혼인한 정비(正妃)였다. 친원파는 노국공주가 원나라 사람임을 내세워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리고, 다시 원에 의탁하여 구원을 청하도록 왕을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자신들의 득세를 도모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노국공주의 의사는 명확하고 단호했다. “무슨 말씀들이오. 나는 이미 한 지아비의 아내이며, 고려국의 왕비입니다. 왕께서 이미 자주국의 기치를 세웠는데, 어찌 신하된 자의 도리로서 그 거룩한 뜻을 저버리려 하는 것입니까." “왕후마마,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입니다. 적들이 바로 코 앞에서 개경을 엿보고 있습니다." “천년왕국 신라를 이어, 이미 반 천년을 지켜온 고려입니다. 위난이 닥친다고 무릎을 꿇어서야 어찌 사직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왕후로서 왕의 뒤를 따를뿐입니다." “중원 땅의 아버님을 생각하십시오. 더구나 홍건적은 아버님 나라의 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왕후님의 뜻을 아신다면 아버님께서 뭐라 하시겠습니까?" “아버님과 황제께서는 다른 뜻으로 나를 혼인하게 했을지라도, 그것은 그분들의 뜻일 뿐입니다. 내가 왕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늘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친원파의 김용 등은 노국공주의 완고함에 혀를 찼다. 사랑이라니! 기껏 그까짓 사랑 때문에 어찌 권력과 목숨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해야 좋다는 말이오. 아직도 원을 추종하는 자들은 왕후까지 압박하고 있으니……." 공민왕의 고뇌에 홍언박 등이 나섰다. “왕이시여! 왕후마마의 뜻은 강고합니다. 흔들리지 마소서. 일시 개경을 비운 뒤 다시 도모하여 되찾으면 되는 일입니다." “파천을, 이태 전의 그 수모를 다시 겪어야 한다는 말이오?" “이번에는 10만의 군사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왕께서 안정하시고 다시 깃발을 드시면 고려의 신민들은 모두 목숨을 걸어 나라를 보위할 것입니다!" “오, 나의 백성들이여! 하지만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오?" 막상 파천은 결정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가 막막했다. 지금 당장 반도 땅 어느 곳에 10만 군사를 방어하고 물리칠 여지가 남아있겠는가. 동짓달 찬바람 가운데 왕의 어가가 길을 헤매야 할 것을 생각하면 홍언박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올 지경이었다. “아, 노국공주여, 나의 왕후여! 그대의 지극한 사랑에도 나는 그대에게 평온함조차 주지 못하니……." “왕이시여, 이 비에게는 오직 왕께서 곁에 계시는 그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당신의 그 명정(明正)한 뜻과 굳건한 의지는 한 여인을 넘어 인간으로서 당신을 하늘처럼 사랑하게 합니다." 왕과 왕후의 고뇌에 홍언박은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빈과 여랑. 무빈은 오랜 세월 뜻을 같이한 막역지우고, 여랑은 이미 어린 시절 홍언박의 가슴에 여인으로 아로 새겨진 사람이었다. “왕이시여, 복주로 행하시옵소서." “복주? 그곳이 어디냐?" “그곳은 일찍이 태조께서 안어대동이라 칭하신 왕의 땅이며, 고려의 반석입니다." “오, 다행이고 축복이로다. 어서 그곳으로 향하자!" <계속> 글 = 김정현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일러스트=김성태 화백김정현 소설가공민왕노국공주
201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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