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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9> ‘조상의 선행과 그 뜻이 담긴’…청송 파천면의 담포정·기곡재사·귀래정·학산정
용전천(龍纏川)은 청송의 남쪽 부남면에서 발원해 청송읍을 지나 파천면을 관통한다. 청송군 내에서 유로 연장과 유역면적이 가장 큰 천이다. 옛날에는 파천(巴川) 혹은 파질천(巴叱川)이라 했다. 뱀처럼 용처럼 흐르는 천이다. 파천면은 천의 이름에서 온 지명이다. 신기리의 신기천, 덕천리의 덕천 역시 땅과 천이 하나다. 고대로부터 물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터전은 하나였다. 강물은 때때로 인간에게 고난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영원히 움직이면서 단단한 지반을 만들어준다.#1. 평해황씨의 담포정황광혁이라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어부가 큰 자라를 잡아 나뭇가지에 달아 놓은 것을 보게 된 그는 측은한 마음에 자라를 사서 살려 주었다. 자라는 물 위를 떠가며 세 번 돌아보고는 사라졌다. 그날 밤 그의 꿈에 한 소년이 나타나 말한다. 넓은 갯가에 ‘황아무개 소유의 토지’라고 쓴 표목을 많이 세워두라. 이상히 여기면서도 그는 소년의 말을 따랐다. 이튿날 마을에는 큰비가 내렸다.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갔으나 그가 세운 표목만은 온전히 서있었다. 그 자리를 논과 밭으로 개간해 씨 뿌리고 추수하니 늘 풍년이었다. 그곳이 파천면 신기리(新基里)다. 중태산 자락에서 발원한 신기천이 신기리를 관통해 용전천과 만나는 합류점의 남쪽에 본 마을인 새터가 자리한다. 평해황씨 황광혁이 자라를 살리고 얻게 된 천변의 땅이다. 이후 후손들은 70~80여 호를 이루며 번성하게 되는데, 선조의 선행으로 얻은 땅에 그 뜻을 기려 세운 것이 담포정(澹圃亭)이다. 담포란, 담박한 밭이다. 욕심이 없고 깨끗한 마음으로 얻은 터전을 뜻할 것이다. 신기천과 용전천 합류점 남쪽 새터 마을평해황씨 황광혁이 자라 살리고 얻은 땅담포정은 후손들이 선조 선행 기려 세워기곡재사,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 시조 이석의 묘 관리·祭 지내려 세운 재사 바람 잔잔한 산속…사람이 늘 생활하는 곳가선대부중추부사 장입국의 정자 귀래정귀래정 앞 진사 류응목 정자 학산정 자리 촘촘한 문살…고독이 음영처럼 드리운 모습담포정은 황광혁의 증손 황일성(黃一聖)이 고종 때인 1880년에 건립했다. 처음에는 서당으로 지어 후진을 키웠는데 1910년 국권침탈 후 일제의 강압으로 서당 운영이 어렵게 되자 정자로 바꾸어 담포정이라 편액했다. 이후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된 것을 1958년 복원했다. 그러나 갯가의 땅이라 지반이 약했던 탓인지 건물이 기우는 등의 문제가 생겼고 1962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자가 또다시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문중회의를 통해 2007년 다시 중건했다. 새터마을 안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사과밭을 병풍 세운 담포정이 보인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나지막하고 마당은 넓어 정자는 온전히 드러나 있다. 담은 마을길과 평행하지 않고 5도 정도 마을 입구 쪽 혹은 북동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대문도 정자도 같은 방향이다. 뒤돌아보니 소위 문필봉이라 부를 만한 봉우리가 솟아 있다. 정자는 봉우리 쪽을 향해 있다. 담포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며 정면에 반칸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대청의 들어열개 위에는 광창을 냈다. 담포정은 사용할 수 있는 고재가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 새로운 목재를 사용했다 한다. 마당에는 깬 돌을 깔고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한쪽에는 2007년 중건 후 세운 비석이 있다. 마루 난간의 치마널이 거의 지면에 닿을 듯해 멀찍이 보면 땅속으로 쑥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물 위에 뜬 배 같기도 하다. 기단의 정면 가운데에 묘한 바윗돌이 있다. 자라의 머리인가? 어쩌면 자라가 돌아와 담포정을 업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2.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의 기곡재사 새터에서 북동쪽으로 1㎞쯤 가면 신기천 너머에 신기2리 감곡(甘谷)마을이 있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이라 해서 ‘가람실’이라 불렸다. 감곡교를 건너면 아름다운 마을 숲 앞 갈림길에 기곡재사(岐谷齋舍) 이정표와 ‘진성이씨(眞城李氏) 시조 묘 입구’ 표석이 있다. 기곡의 뜻대로 갈림길에서 골짜기로 든다. 설마 이러한 해석이 옳지는 않겠지만 길은 맞다. 골짜기는 온통 사과밭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라디오 소리 우렁차다. 적적함을 달래는가 싶었는데 새를 쫓는 것이란다. 골짜기 길 끝에 재사가 자리한다. 기곡재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조상이자 진성이씨의 시조인 이석(李碩)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사다. 원래 있었던 재암과 1740년에 중건한 것은 소실되었고 185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건했다. 재사의 입구 오른쪽 앞에 3칸 초가지붕 건물이 있다. 왼쪽 칸은 아래 벽이 개방되어 있는 방앗간, 가운데 칸은 창고로 쓰이고 있다. 오른쪽 칸은 온돌방이다. 옛날 주사가 아닌가 싶다. 기곡재사는 정면이 다락집 형상인데 전체적으로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형이다. 문을 열면 정면으로 대청이 보인다. 누하주는 팔각기둥, 누상주는 둥근기둥을 세운 높고 넓은 마루다. 양쪽으로 익사가 연결되는데 누마루보다 조금 낮다. 앞쪽에 좁은 쪽마루를 달아내어 대청으로 오르는 작은 계단 한 단을 설치했다. 계단과 대청 입구가 부드럽게 마모되어 있어 잦고 신중한 걸음을 떠올리게 한다. 우익사에는 노년층이 사용하는 윗방을 꾸미고, 좌익사에는 장년층이 사용하는 중간방을 배치했다고 한다. 서열에 따른 용도의 구분이다. 현판은 대청을 마주 보는 방 위에 걸려 있다. 툇마루 아래 신발이 많은 걸 보니 사람이 늘 생활하는 곳이다. 다락집 형식이라 가운데 마당이 깊다. 좁은 기단과 툇마루로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중심 잡히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일 수밖에 없다. 재사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작은 핑크색 자전거가 담벼락에 기대있고 핑크색 아기의자가 초가 기단 위 볕 좋은 자리에서 산과 밭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도 잠잠한 산속, 안온하다. #3. 아산장씨의 귀래정과 하회류씨의 학산정 보광산에서 발원한 덕천(德川)이 용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 서쪽에 낮은 산들에 둘러싸인 덕천리가 자리한다. 덕천 가에 있어서 덕천리다. 마을은 만석꾼 송소 심호택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향으로 이름나 있으나 여러 성씨의 역사가 어우러져 있기도 하다. 덕천이 용전천과 만나기 전, 서쪽에서 흘러온 좁은 물줄기를 받아들이는 자리에 그들의 옛 시간이 있다. 아산장씨(牙山蔣氏)의 정자 귀래정(歸來亭)과 하회류씨(河回柳氏)의 정자 학산정(鶴山亭)이다. 귀래정은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를 지낸 장입국(蔣入國)의 정자다. 원래 의성 원유동(元儒洞)에 있었는데 병자호란 이후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폐허가 되었다. 이후 증손이 의성에서 덕천마을로 이거해 살면서 선조의 정자를 옮겨 와 중건할 마음을 품었는데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1938년이 되어서야 귀래정은 후손에 의해 후손들 곁에 세워졌다. 귀래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방과 왼쪽 온돌방 앞에만 난간이 없는 툇마루를 두고 측면에 판문과 고창을 설치했다. 오른쪽 방은 통 온돌방으로 정면과 측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산 아래 높직한 자리다. 귀래정 앞에는 진사 류응목(柳膺睦)의 정자 학산정이 자리한다. 그는 고종 때인 19세기 중후반의 인물로 대단히 우수한 문재였다고 한다.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그는 유력가의 수세에 밀려 귀향한 후 농사짓고 글 읽으며 지냈는데 출세의 권고에 밀려 몇몇 곳을 전전했다 한다. 그가 마지막에 자리한 곳이 덕천리다. 그는 학산정을 짓고 먼 데서 혹은 가까운 데서 찾아오는 많은 이름난 선비들과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의 선봉에 섰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비분강개로 여생을 마쳤다. 팔작지붕을 얹은 4칸 학산정은 옛 멋은 없다. 촘촘한 문살은 앙다문 입매 같고, 바짝 에워 선 담장은 타협 없는 몸짓 같다. 단단한 고독이 음영처럼 드러나 있는 정자다. 그는 학산정기에 ‘가까운 물 먼 산은 다정을 보낸 듯 읍하며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때때로 평온했을 것이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 기획 : 청송군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자리한 담포정은 황광혁의 증손 황일성이 고종 때인 1880년에 건립했다.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된 것을 1958년 복원했다.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의 기곡재사.가선대부중추부사를 지낸 장입국의 정자 귀래정.동학농민운동 때 의병 선봉에 섰던 진사 류응목의 정자 학산정.
2017.11.15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8>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뜻’…청송군 진보면의 풍호정·약산정·율간정
반변천(半邊川)은 청송군 진보면 소재지를 지나 합강리(合江里)에 들어서면서 북쪽으로 둥근 소리굽쇠 모양으로 흐른다. ‘합강’이란 여러 갈래의 물이 한데 모여 강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북쪽 부곡리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세천(細川)이 반변천과 하나 될 뿐이다. 합강리는 1984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었다는데 그때 물길의 형세가 변했던 걸까. 그러나 1945년에 지어졌다는 합강동 노래에 ‘합강이 회룡을 한다’는 구절이 있는 걸 보면 급하게 휘어진 굽이는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1. 합강리의 풍호정 진보면소재지를 지나 안동 방향 34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반변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풍호정 휴게소가 있다. 한쪽에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을 기리는 망향비가 서 있는데 그 옆에 서면 맞은편 천변 절벽 위에 수목으로 감싸인 정자가 보인다. 섬뜩할 만치 아름다운 모습이다. 물가로 내려가 1976년에 건설했다는 합강교를 건너고, 눈부신 저습지를 양쪽에 거느린 천변 비포장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그 아름다운 것에 닿는다. 풍호정(風乎亭)이다. 풍호정은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신씨(平山申氏)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손 풍호(風乎) 신지(申祉)의 정자다. 그는 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1463년에는 효행과 청렴으로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벼슬이 학문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 하여 나가지 않았다. 신지는 만년에 진보로 내려와 합강 상류의 절벽을 다듬어 풍호정을 짓고 동생 신희(申禧)와 더불어 즐기며 살았는데, ‘반드시 남쪽 고향땅으로 가라’는 아버지 신영석(申永錫)의 유언을 따른 것이라 한다. 풍호정은 약한 경사지에 안정감 있게 서있다. 최초 건립은 1414년으로 지금의 것은 그 이후에 중건된 것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며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다. 전면 반 칸은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놓고 온돌방의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전면의 마루에만 둥근기둥을 세웠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자료에서 본 편액은 푸른 바탕에 풍호정 세 글자가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 후손 풍호 신지 ‘남쪽 고향땅으로 가라’아버지 유언에 진보로 내려와 절벽 다듬어 풍호정 지어정자 뒤편 200년된 소나무 꿋꿋이 자리작약산 아래 부곡리 가장 위쪽 약산정 원주이씨 이오언·이준영이 지은 정자수풀에 가려졌지만 탄탄·온전한 골격고산자락 함양오씨 세거지 율리 율간정 숙종 때 통정대부 제수받은 척암 오학문 세상 초연한 채 경서 읽으며 공부하던 곳 주변은 웅장한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오른쪽 뒤편에는 200년 된 소나무가 긴 가지를 늘어뜨리고 맑은 빛으로 서있다. 나무는 150년 전 어느 겨울날 폭설로 인해 윗가지가 꺾였으나 꿋꿋하게 살아남았는데 사람들은 나무의 그러한 기개가 구한말 평산신씨 후손들의 의병정신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풍호는 공자의 제자 증점이 말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쐰다’는 이야기에서 따왔다. 그는 ‘기수는 멀고 무우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 보니 기수와 무우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더라’고 했다. 풍호정 아래에는 감돌며 굽이쳐 흘러내리는 반변천이 소(沼)를 이룬다. 옛날에는 이 일대의 물길을 따로 호명천(虎鳴川)이라 불렀다 한다. 휘어 흐르는 물소리가 호랑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을까. 넓게 둘러보면 오른쪽의 먼 시선은 비봉산(飛鳳山)에 닿고 정면의 하늘 아래엔 광덕산(廣德山)이 빛난다. 왼쪽에는 작약산(芍藥山)이 솟아 있는데 그 줄기가 은근한 자태로 흘러 천 너머 눈앞에 드리워져 있다. 정자의 왼쪽에는 주사(廚舍)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ㅁ’자형 주거건물이다. 정자 오른쪽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신지의 후손 신예남(申禮南)과 부인 민씨를 기리는 쌍절비각(雙節碑閣)이 있다. 지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후손들이 살아온 550년은 물속에 잠겼으나 그 시초만은 더없는 아름다움으로 기립해 있다. #2. 부곡리의 약산정 풍호정에서 천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작약꽃 봉오리를 닮은 작약산 아래에 부곡리(釜谷里)입구가 열려 있다.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천이 반변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부곡교가 놓여 있고 마을 안길은 천과 나란히 골짜기를 파고들고 있다. 부곡교에서 부곡리 마을이 활짝 보인다. 마을은 보이는데 마을에서 가장 윗자리에 자리한 약산정(藥山亭)은 보이지 않는다. 정자는 대숲과 잡풀이 감춰 버렸다. 부곡리는 원주이씨(原州李氏)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정종 때의 진사(進士) 이조(李稠)다. 그는 송생현(청송의 옛 지명)의 감무(監務) 겸 안동진관병마절도사(安東鎭官兵馬節度使)를 지낸 인물로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는 칭송이 있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가다 산수의 아름다움과 어조(魚鳥)의 즐거움에 반해 터를 잡은 곳이 부곡리다. 이후 언제부터인가 원주이씨 집안의 가세가 점점 쇠퇴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오언(李五彦)과 이준영(李俊永) 때에 이르러 학문과 행실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한다. 약산정은 이오언, 이준영 두 사람이 지은 정자다. 그들은 집 서쪽 작은 산기슭에 정자를 짓고 글 읽고 거문고 타며 만년을 보냈다 한다. 담을 둘러 동산으로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약산정기가 조선 고종 23년인 1886년에 쓰인 것을 보면 정자는 조선 후기의 것으로 짐작된다. 약산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이고 양쪽은 온돌방이다. 전면 1칸이 툇마루인데 양옆은 벽을 세워 판문을 달았다. 정자가 바라보고 있는 산이 마을 동쪽의 작약산이다. 정자의 이름을 약산정이라 한 것은 후손들이 작약처럼 무리 지어 성대해져서 문장과 덕이 온 나라에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담은 허물어졌으나 동산은 확연하고 연못은 보이지 않으나 천이 멀지 않다. 정자는 우거진 수풀에 가려져 있지만 탄탄하고 온전한 골격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약산이라 했던 마음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찾을 길 없다. #3. 율리의 율간정 북향하던 반변천은 부곡교 아래에서 서쪽으로 향하다 이내 남쪽으로 굽이쳐 고산(孤山)의 서쪽 사면 아래를 깊이 흐른다. 물길의 급박한 회룡과 비봉산, 광덕산, 작약산, 그리고 풍호정의 뒷언덕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산 자락 율리에 율간정(栗澗亭)이 있다. 34번 국도에서 하고산 마을과 청송관광농원 쪽으로 가는 기곡길로 들어가야 한다. 혼자만 알고 싶은 근사한 길이다. 율리는 합강리의 자연부락으로 함양오씨(咸陽吳氏) 세거지다. 입향조는 척암(菴) 오학문(吳學文)으로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임란 충신인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현손이다. 오학문은 조선 숙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은 인물로 벼슬을 떠나 영양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옛날에는 징검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정자 앞 천변에는 버드나무가 빽빽이 서 있어 ‘오류내’라 불렀고 밤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로 흐르는 강물은 ‘간이’라 불렀다 한다. 율간정은 이러한 경치를 바라보며 200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오래 묵은 밤나무 사이에 자리했다. 정자 뒤는 밤나무 밭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세상에 초연한 채 대나무 심고 꽃을 가꾸고, 스스로 고요한 가운데 경서를 읽고 사기를 강론하며 공부했다고 전한다. 옛집은 병란으로 타버렸다. 지금의 정자는 오랫동안 새 울음소리와 묵정밭의 그늘만 가득했던 터에 1957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율간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며 전면 반 칸은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다. 시멘트 담장으로 경역을 구획하고 정면에 협문을 내었다. 정자 옆에 감나무 한 그루가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밤나무 밭이 있었다는 정자 뒤에는 오씨 집안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석주 두 기가 서 있는데 밤을 잡으려는 다람쥐가 양각되어 있다. 명랑하고도 고운 마음이다. 율리에는 대대로 살아온 오씨 일가 30여 호가 여전히 살고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 기획 : 청송군청송군 진보면 반변천변에 자리한 풍호정은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신씨 시조인 신숭겸의 후손 풍호 신지의 정자다. 신지는 세조 때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청송에서 만년을 보냈다.200년 수령의 풍호정 소나무원주이씨 이오언·이준영이 지은 약산정함양오씨 세거지 율리의 율간정
2017.11.08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7> ‘참으로 보배스러운 이들을 기리며’…청송 진보면의 귀암정·송만정·백호서당
진보면(眞寶面)은 청송의 가장 북쪽 땅이다. 동남부에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을 뿐 청송군 내에서 비교적 구릉지가 많은 곳이다. 또한 반변천과 서시천이 흘러 충적지도 넓은 편이다. 진보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 이곳 대동산(大同山)에 봉수를 설치하고 ‘위급함을 알려주는 참으로 보배스러운 곳’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면 진보의 풍부한 물과 들, 기억되고 숭모되는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보배스러운 것이다.#1. 귀암 권덕조의 귀암정진보면 소재지 북쪽에 광덕리(廣德里)가 있다. 마을 뒤쪽에는 ‘광대하고 웅장하다’는 광덕산(廣德山)이 솟아 있는데 일명 두음산(斗蔭山), 북방산(北方山)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앞에는 반변천이 흐른다. 일월산에서 발현해 남쪽으로 흐르던 반변천은 마을 앞에서 서시천을 안으면서 서쪽으로 향한다. 마을은 물 위의 마을이라 하여 ‘한상(漢上)’이라고 했다가 터가 한양을 닮았다 하여 ‘새로운 한양’이란 뜻의 ‘신한(新漢)’이라고도 했다. 배산임수의 좋은 땅이다. 천을 건너는 광덕교에서 당당하게 선 광덕산과 마주한다. 저 산 아래에 진보향교가 위치하고 그 서쪽에 ‘귀암정(歸巖亭)’이 자리한다. 귀암(歸巖) 권덕조(權德操)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그는 고려 태사공 권행의 21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건장하고 신실하고 바르고 소견이 넓고 생각은 깊었으며 늘 너그러웠다 한다. 숙부인 충제(濟) 권벌(權)에게 학문을 배우며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했으며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지냈다. 귀암은 을사사화 이후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정착했다. 사람들이 왜 벼슬하지 않느냐고 궁금해 하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중종의 기일에 스스로 제수를 마련해놓고 통곡했다 한다. 후에 사림에서 그를 기려 옛 집터에 귀암사(歸巖祠)를 세우고 향사(享祀)를 받들어왔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다. 지금의 정자는 그 후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현판은 옛 이름을 그대로다.귀암 권덕조 기리기 위해 세운 귀암정태사공 권행 후손으로 퇴계학 정맥 계승 을사사화 이후 관직 버리고 청송에 정착 매년 중종 기일 제수 차려 통곡했다 전해 귀암정 남동쪽 반변천 가 자리한 송만정 귀암 권덕조 아들 송만 권준의 정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 일으켜 전장에 나가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전승’ 이끌어음식디미방 쓴 장계향의 아들 이휘일영남학파 학자로 농촌에서 학문에 몰두사후에 그를 따르던 많은 유림이 건의해진보 향중에서 영조 때 백호서당 건립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을 두었다. 왼쪽 앞에 ‘ㅁ’자형 주사채가 한 동 있는데 입김에도 바스라질 듯하다.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 같지만 지금은 인적이 없다. 사람이 떠난 집은 초속으로 늙는다. 정자 역시 인적이 끊긴 지 오래고 매우 낡았다. 퇴색되어 아련하고 움직임 없는 채로 기묘하게 굳어버린 모습이다. 그런데도 대단히 웅장하고 단단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정자는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뒤에는 광덕산 자락이 온화하고 단정하게 뻗어 내려오고 앞에는 들이 넓다. 귀암정은 남쪽의 거대한 비봉산(飛鳳山)과 대면한다. 조금의 위축도 없이 형형한 기(氣)로 마주한다. 낡았으나 웅장한 귀암정은 거대한 바윗돌처럼 기가 강성하다. 귀암정 상량문에 ‘두산이 북쪽에 솟으니 바람이 모이고 한수가 서쪽으로 흐르니 옷깃 싸임이 공고하다. 장인(匠人)을 감독하니 빛나는 정자가 웅장하고 홀연히 산천의 경치가 보인다. 겨울과 여름에 공부함은 동리 서실의 규모에 의하였다. 일편의 붉은 충절이 고금과 같다. 원컨대 후손들에게 효충의 명의를 가르쳐 아손들이 청숙한 기운으로 태어나 밝은 세대에 많은 인재가 나와 무궁하리라’ 하였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여든이 넘은 고령이었고 그의 마음속 충정은 그의 아들이 행동으로 이었다. #2. 권덕조의 아들 권준의 송만정 귀암 권덕조의 아들인 송만(松巒) 권준(權晙)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는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뛰어난 전략을 세워 전승을 이끌었다 한다. 전란 후 그는 은거하여 소나무를 쓰다듬고 호를 ‘송만’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항상 아버지 곁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의 정자가 귀암정의 남동쪽 반변천 가에 있다. 송만정(松巒亭)이다. 송만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ㄷ’자형 평면이다. 가운데 2칸 대청을 열고 양쪽 방 앞에만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설치했다. 누마루의 바깥쪽 측면은 판벽과 살창으로 막았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이 매우 높고 큼직한 돌로 계단을 만들어 성큼성큼 오르게 된다. 초석 역시 큼직한 바윗돌을 썼고 그 위에 팔각의 누 하주가 올라 있다. 마루 위로 굵은 기둥과 보가 팔작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누마루 부분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했다. 정면에는 낮게 주사가 자리한다. 주사도 ‘ㄷ’자형 평면으로 정자와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체 ‘ㅁ’자형을 그린다. 이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구성이다. 정면은 나지막하게 둔덕진 땅이다. 그 너머로 반변천이 흐르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시야는 주사의 지붕을 넘어 하늘을 향해 광대하게 열려 있다. 원래 처음에 권준이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가 않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63년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판도 후대에 게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대대적인 보수를 한 모습인데 옛 목재와 새 목재가 어우러져 따뜻한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권준의 아들 지선(止善) 역시 지극한 효자였다고 하는데, 효종이 사찬(賜饌)하고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는 사적이 읍지에 전한다. #3. 음식디미방 쓴 장계향 아들 이휘일의 뜻이 담긴 백호서당 광덕리의 서편에 좁고 긴 골짜기 마을 세장리(世長里)가 있다. 옛날에는 누운 용의 형상이라 ‘누용실’ 혹은 누운 누에의 형상이라 ‘누에실’이라 부르기도 했다. 약 3㎞의 시냇물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반변천과 합류하는데 마을은 그 시내의 중상류에 형성되어 있다. 한참을 올라 세장리 마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백호서당(栢湖書堂) 이정표인데 개천을 건너 산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한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갑자기 길이 끝나면서 꽤나 너른 터가 펼쳐진다. 푸른 반변천이 바로 아래인 벼랑 위다. 백호서당은 주사로 보이는 집 한 채를 앞에 세워두고 그 뒤에 높직이 서 있다. 먼 비봉산의 밑동까지 보이는 대단한 시야를 가진 자리다. 백호서당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한 서당이다. 이휘일은 영남학파의 학자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촌에서 학문에 몰두한 이다. 아버지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동생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어머니는 퇴계의 학통을 이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 장계향(張桂香)으로 여중군자로 칭송받았던 ‘음식디미방’의 저자다. 서당은 그의 사후 그를 따르던 많은 지방 유림이 건의하고 당시의 청송현감 조명협(曺命協)이 발의해 진보 향중(鄕中)에서 영조 때인 1757년 건립했다. 지금 이곳은 원래 서당이 있던 자리가 아니다. 1989년 안동 임하댐의 건설로 원래의 자리가 수몰지에 편입되자 이곳으로 옮겼다. 70m 정도 이동한 것이라니 주변 경관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백호는 잣나무와 호수를 뜻한다. 처음 건립될 때 주변에 잣나무들이 무성했고 반변천의 물줄기가 호수처럼 보였다고 한다. 백호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2칸을 대청으로 열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현판은 이휘일의 동생인 갈암의 친필이라고 한다. 측면의 작은 방문으로만 건물 내부로 오를 수 있는데 이는 근래의 조치인 듯하다. 대청의 뒷문 속으로 비봉산하의 마을과 들이 펼쳐진다. 이휘일에게 자연은 이상적인 공간 혹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농민의 땀과 삶이 담긴 노동의 공간으로 보았다. 그의 작품 ‘전가팔곡’은 순수한 우리말로 사계절 노동의 기쁨을 노래한다. ‘가을에 곡식 보니 좋기도 좋구나/ 내 힘으로 이룬 것이 먹어도 맛있구나/ 이 밖에 천사만종(千駟萬種)을 부러워 무엇하리오.’ 먼 들이 선명한 노란색이다. 백호서당은 뿌듯하고 부러울 것 없이 서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는 귀암 권덕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귀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한 권덕조는 을사사화(1545년) 이후 관직을 버리고 청송에 정착했다.송만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송만 권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웠다. 권준 스스로 송만정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백호서당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존재 이휘일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영남학파의 학자인 이휘일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촌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2017.11.01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6> ‘그리움과 탄식 사이…’ 청송 안덕면의 망운정·남포정·지악정·방호정
생육신 어계 조려의 현손인 망운(望雲) 조지(趙址)가 조부 조연(趙淵)의 명으로 함안에서 청송 안덕으로 이주한 때는 1562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다. 그가 정착한 곳은 길안천과 보현천이 동북서쪽을 감싸 흐르는 구릉진 땅으로 보현산의 지맥이 병풍처럼 바람을 막아주는 아늑한 명당이었다. 그 땅에서 조지는 8남매를 얻었고 평생 근검과 군자의 몸가짐을 가르치며 충효와 학문을 가문의 업으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세 딸은 신지제(申之悌), 장후완(蔣後琬), 이종가(李從可)에게 출가하였고, 수도(守道), 형도(亨道), 순도(順道), 준도(遵道), 동도(東道) 다섯 아들은 세상이 칭송하는 인물로 자랐으니 새로운 땅에서 훌륭히 일가를 이루었다 할 만하다.#1. 망운정과 남포정 땅의 형세는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어 명당리(明堂里)다. 현재 명당리는 청송 안덕면의 구심점으로 성장해 있다. 조지는 마을 한가운데에 집을 짓고 그 남쪽에 정자를 지어 ‘망운(望雲)’이라 편액했다. 그것은 당나라 적인걸의 고사 ‘망운지정(望雲之情)’에서 따온 것으로 ‘타향에서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조부 조연이 손자 조지에게 안덕으로의 이주를 명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의금부 경력(經歷)을 지낸 조연은 김안로(金安老)의 세도를 염오해 벼슬을 버리고 청송 안덕으로 이거한 적이 있는데, 혹 그때의 풍정이 심중에 남아 귀애하는 손자를 보낸 것은 아닐까 싶다. 고향과의 거리 300리, 망운이란 단순한 그리움이라기보다 곁에서 효를 다하지 못함에 대한 탄식일 게다. 하여 그는 매년 3월마다 고향으로 달려가 효제(孝悌)의 도를 다하였다 한다.길안천·보현천이 흐르는 구릉진 땅생육신 어계 조려의 현손 망운 조지 고향 떠나 일가 이뤄 살던곳 망운정 8남매중 셋째 조순도의 정자 남포정평생 홀로 부모곁 지키며 孝 다한 곳넷째아들 조준도 어머니 세상 떠난후묘소 바라보이는 곳에 지은 방호정다섯째 조동도 지악정 지어 묘소 지켜빽빽하게 채워진 마을 가운데에 기와돌담으로 둘러진 너른 경역이 고요히 펼쳐져 있다. 그 속에 솟을대문으로 구획된 망운정(望雲亭)과 협문으로 구회된 남포정(南浦亭) 두 채의 정자가 자리한다. 조지의 큰아들인 수도는 스물여덟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 형도는 어릴 때 큰아버지인 만호(萬戶) 조우(趙 )의 양자가 되었고 장성해서는 임진왜란에 출정했다. 넷째 준도는 재종숙부인 사직공 조개에게 출계했으며 노친을 봉양한 이후 정묘호란 때 창의하였다. 다섯째 동도는 열다섯 나이에 형 형도와 함께 전장에 나아갔다. 남포정은 셋째인 조순도의 정자다. 그는 평생 홀로 부모의 곁을 지키며 효로써 충을 행하는 삶을 살았다.망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두 칸 대청이 있고 양쪽은 온돌방이다.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마당에는 수려한 한 그루 회나무가 서있고 그 아래에는 옥정이라는 작은 우물이 있다. 그 뒤로 조지의 유허비와 맏아들 조수도의 유적비가 나란하다. 망운정 대문 앞에는 연못이 있다. 둘째 조형도는 아버지의 집에 대한 시 ‘망운정잡영(望雲亭雜詠)’을 남겼다. 그 첫째가 ‘소지(小池)’로 ‘반이랑 되는 모난 연못에 활수가 돌아드니/ 밝은 달 고요한 물결이 거울로 온전히 펼쳐진 듯’하다고 했다. 담담한 어조 속을 헤집어보고 싶은 취향은 애써 두덮고, 여전히 집 앞에 자리한 연못에서 대를 이은 세심한 존경을 읽는다.남포정은 정면 3칸 측면 반 칸 규모의 지극히 검소한 건물로 망운정을 바라보며 서있다. 노쇠했으나 허리를 굽히지 않고, 지쳤으나 온화함을 잃지 않은 사람 같다. 1950년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65년에 중수했다. 경내에는 조순도의 유허비가 다소 쓸쓸하게 서있다. 후손들이 보기에도 그러하였는지 두 정자 사이에 또 하나의 조순도 신도비각이 위치한다. 2006년에 상량한 것이다. 조순도는 비록 후방에 있었지만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 전장으로 격려의 글을 보내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전략을 세워 ‘자리에 앉은 지휘관(座元帥)’이라 불렸다 한다. 만년에 그는 후학을 가르치다 1653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지악정과 방호정, 그리고 금대정사 망운 조지는 1599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할아버지 조연의 사당 근처에 있다고 하는데 사당은 안덕면 덕성리에 있었던 덕봉사(德奉祠)로 여겨진다. 덕봉사는 조려, 조연, 조형도를 배향하고 후학양성의 지소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망운 조지는 1736년에 건립된 금대정사(金臺精舍)에 큰아들 수도와 막내아들 동도 등과 함께 모셔져 있다. 금대정사는 망운정의 동북쪽 신성리 계곡의 초입인 속골에 위치한다. 신성리 금대는 1619년경 사망한 망운 조지의 부인 안동권씨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넷째 조준도는 친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 방호정(方壺亭)이다. 다섯째 조동도는 1624년 금대 아래에 정자를 지었다. 지악정(芝嶽亭)이다. 두 아들이 어머니의 묘소를 지킨 셈이다. 방호정은 1억 년 전에 만들어진 벼랑 위에 올라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제 다리는 조준도의 후손인 조학래가 현대에 만든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ㄱ’자형으로 절벽 쪽의 전면은 팔작지붕이고 측면은 맞배지붕이다. 전면에는 마루방 두 칸과 온돌방 한 칸, 측면은 부엌과 한 칸 온돌방이 있다. 자연석 기단과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마루방에는 하부에 2단으로 궁창널을 끼운 세살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방호 조준도는 정자를 짓고 ‘풍수당(風樹堂)’ 또는 ‘사친당(思親堂)’이라 불렀고 ‘정자를 지은 건 어머니 묘소를 보기 위한 것/ 부모님 여읜 이 몸 벌써 쉰 살이라네’라고 노래했다. 지금 정자에서 어머니 안동권씨의 묘소는 보이지 않는다. ‘방호’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산 또는 섬 중의 하나다. 방호정은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집중된 고독으로 앉아 있다. 그것은 때때로 비회를 느끼게 한다.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 육지에 닿아 있는 섬처럼. 지악정은 금대정사의 왼쪽에 자리한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아주 소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1962년에 확장 중수한 것인데 망운정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형 조형도와 종군하였고 정유재란 때 향의장(鄕義將)으로 활약했던 조동도는 ‘도를 닦을 때는 경망(景望:조동도의 자)에게 의지하라’는 글을 얻었을 만큼 사람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전쟁 후에는 포상을 거절하고 형들과 함께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고 후학을 양성하다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가 묻힌 금대 안산에 묻혔다.금대정사는 다섯 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건립되었다. 재사는 산을 등진 높은 대 위에 동남향으로 올라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집으로 중앙 2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이고, 좌우는 각각 통간 온돌방으로 ‘금대(金臺)’와 ‘사암(思庵)’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앞쪽 낮은 마당에는 동 서재와 대문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다. 1847년에는 재사 오른쪽에 조지와 조동도 부자를 위한 묘우, 강당, 문루 및 동 서재 등을 건립했다. 그러나 고종 때의 서원철폐령으로 대부분 훼철되었고 묘우만 남은 것을 고쳐 우모정(寓慕亭)이라 했다. 우모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수리를 한 모습이다. 네 형제만이 살아있을 무렵, 그들은 가끔 망운정에 모였다. 초대되었던 하음(河陰) 신집(申楫)이 형제의 말을 글로 전한다. ‘지나간 일과 흘러간 구름은 부모를 사모하는 망극지통의 눈물이요, 흘러간 세월에 모두가 묵은 자취가 되었으니 우리 사형제 비록 선군의 남기신 자취를 밟아 보고져 이곳에서 시를 읊고, 이곳에서 활을 쏘고, 이곳에서 음주를 한들 다시 무엇을 첨망하리오.’ 그 모습이 매우 슬퍼 신집은 ‘전일에 망운한 분이 효자라면 오늘 망운하시던 분을 생각하는 사람도 효자로다. 이후 후손들도 이어 이어 효도하지 아니하랴’고 위로했다 한다. 지금 망운정 담벼락에는 1999년 8월10일 중수되었다는 표석이 붙어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청송군청송군 안덕면 명당리에는 생육신 어계 조려의 현손인 망운 조지가 지은 망운정이 자리하고 있다. ‘망운’이라는 편액은 당나라 적인걸의 고사 망운지정에서 따온 것으로 ‘타향에서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작은 사진은 남포정으로 정면 3칸 측면 반 칸 규모의 검소한 건물이다. 1950년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65년 중수했다.길안천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방호정은 망운 조지의 넷째아들 조준도가 지은 정자다. 조준도는 어머니 권씨의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지악정은 망운 조지의 다섯째아들 조동도가 지은 정자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1962년에 확장 중수한 것인데 망운정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2017.10.25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5>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는…’ 청송 안덕면의 추모재, 영수당, 일신재
글월 문(文)에 살 거(居)인 문거리(文居里). 문인이 많이 살았다는 마을이다. 청송의 남쪽 면봉산과 연점산 사이에 부드러운 능선으로 둘러싸인 남북으로 긴 산골로 둘러선 산등성이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다. 북쪽 정수리에는 길안천이 차갑게 흐른다. 선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준엄한 땅이다. 이곳에 오래 기억되고 있는 몇몇 사람이 있다. 기억됨은 훌륭한 문장을 남겨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선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준엄한 땅과 하나여서 영원히 상기될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문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文居里 추모재월성이씨 입향조 손자 이종윤 기리는 곳5백년이 지나도 수수하고 단정한 모습안동권씨 청송입향조 11세손 권후준매일 새로워진다는 뜻의 일신재 세워물욕 버린듯 방 한 칸에 벽장이 전부권후준 후손 권방이 이름붙인 영수당자신을 선하게 한다는 뜻의 ‘독선재’대문 현판에 굳은 다짐처럼 쓰여있어 #1. 문거마을의 추모재 문거리가 시작된 문거마을, 고샅길은 공사 중이었다. 두리번두리번 오래된 기와지붕을 찾는다. 골짜기 안쪽 멀리에 하늘을 가로지르는 문거대곡지의 푸른 둑이 보이고, 그 아래 다붓하게 모인 기와지붕들을 발견한다. 어떻게 가면 될까 궁리를 하며 따가운 햇살 속을 무작정 직선으로 걷기 시작한다. “이쪽으로 와도 돼요.” 공사를 하던 아저씨가 큰 소리로 손짓해 마을을 에둘러 골짜기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다. 어떻게 아셨을까, 저 먼 저수지 아래 추모재(追慕齋)로 간다는 것을. 길가 논은 그런대로 넉넉하고 노는 땅 없이 야무지게 밭들이 일구어져 있다. 산뜻한 골짜기다. 추모재는 송와(松窩) 이종윤(李從允)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재사다. 이종윤은 월성이씨 청송 입향조 이정견(李廷堅)의 손자로 입향 이래 가장 가문을 빛낸 인물이라 한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과 예조좌랑과 정랑, 시강원 보덕, 제주목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직언과 충언을 사명으로 여겼고 환관들과 내수사의 농간 등을 탄핵했으며 조정간신의 처벌에 힘쓴 인물이라 한다. 또한 매사에 청렴하고 신중했고 예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이종윤은 만 60세가 되던 1490년 제주목사로 부임해 뛰어난 통치력을 보여 주었는데, 2년 뒤 임기가 만료되자 제주도민들의 간청으로 유임된다. 재임 중이던 1495년 제주에서 생을 마쳤고 고향 청송으로 운구되어 묻혔다. 옛날에는 재사를 마을 입구에 지었는데 현재의 것은 1900년 무렵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지은 것이다. 추모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두 칸은 대청으로 열었고 양쪽은 방이다. 전면에는 반 칸 툇마루를 놓고 머름 형 평난간을 둘렀다. 오른쪽에는 화장실로 보이는 작은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경역은 기와를 얹은 흙돌담으로 살뜰하게 구획했고 담장 밖 오른쪽에 3칸 규모의 주사가 있다. 추모재는 봉긋한 야산 아래 저수지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마을을 음시한다. 정면은 평온한 구릉이다. 마을의 산 아래에는 천년 된 암자가 있었다 한다. 이종윤이 젊었을 때 고을의 사우들과 함께 그곳에서 글을 읽었다 하여 ‘이씨산방’이라 불렸다. ‘추모재강당기’에 보면 옛날의 재사가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황폐해지자 후손들이 산 아래에 작은 강당을 지어 강학소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산방에서 강당으로, 그리고 추모재로 이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후손들은 17C 중엽까지 청송에서 세거하다 그의 증손대에 타지로 흩어져 일부만이 남게 된다. 재사는 특별한 것 없이 수수하고 단정하다. 콘크리트 기단과 말쑥한 담장은 근래의 보수단장을 의미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훨씬 지났다. 추모재는 상좌에 홀로 있으나 떠나지 않은 따스한 손들을 맞잡고 있는 듯 온화하다. 정직하게 주름진 수수한 손들을 생각한다. #2. 문거리 석정마을의 영수당 문거마을에서 달밭우질길을 따라 북쪽으로 오른다. 문거2리를 지나 석정길로 접어들면 문거3리 석정(石井)마을이다. 낮게 드리운 연점산 자락을 바라보는 길안천변의 좁은 평지에 열두 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옛날에는 석평(石坪)이라고도 했다. 천변에 평평한 바위라도 있었을까. 이곳을 청송 제일의 경치라 했던 이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때로는 구부려 바라보고 때로는 우러러 보고, 개울과 산에서 휘파람 불고 시 읊으며 세간의 모든 일을 잊고 즐거움과 슬픔이 무슨 물건인지 모르고 살았다 한다. 그는 말했다. ‘부족함이 없는데 무엇을 바라겠는가.’그는 정자의 이름을 ‘영수당(嶺秀堂)’이라 했다. 빼어난 산줄기를 바라보는 집이다. 청송의 하 많은 절경 중에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제일이라 여겼던 이, 그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방(權滂)이다. 군지(郡誌)에는 선비의 도를 닦아 의를 행하고 자신에게는 엄하여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던 인물이라 기록되어 있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가 기(記)를 쓰고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이 시를 선사했으니 권방은 18세기 사람이다. 영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 대청방이 있고 양쪽은 협실이며 전면은 반 칸 툇마루다. 정자는 시멘트 벽돌담에 둘러싸여 있고 마당에는 1980년에 세운 유정비(遺庭碑)가 서 있다. 반듯한 대문에 독선재(獨善齋) 현판이 걸려 있다. 날 선 글씨체다. 흔히 ‘독선’은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신의 한 몸을 선하게 한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부족함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이, 자신에게 엄했던 이의 독선이지 않은가. #3. 장전리 못골의 일신재 석정마을 입구에 남쪽 골짜기에서부터 흘러온 개천이 있다. 천을 따라 좁은 길을 조심조심 오르면 석정지가 있고, 저수지 가장자리를 아슬아슬 따라 오르면 다시 거친 산길이 시작된다. 못골이라 불리는 골짜기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안덕면 장전리에 속하지만 이전에는 석정리였다. 돌아나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들 즈음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출타 중인 주인 대신 강아지 네댓 마리가 조르르 따르며 바지 자락을 가볍게 깨물다 물러난다. 끙끙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빛 현란한 짧은 숲길을 다시 지나면 산으로 둘러싸인 밝은 땅이 열린다. 풀 나무의 향기가 궁륭을 그리는, 이름 지을 수 없는 투명한 공간. 부드러운 흙과 거친 풀이 하나가 되어 평화로운 입김을 내뿜는 땅. 그 속에 정자가 있다. 높이 자란 풀들에 반쯤 가려진 정자는 층층이 쌓인 빛 속에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억을 모르는 순결한 이와 해후한 듯 설레었다. 정자는 일신재(日薪齋)다. 옛날에는 일신당이라 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로 가운데 한 칸 방에 달아낸 벽장 하나와 사방 좁은 툇마루가 전부다. 일신재는 안동권씨 청송 입향조 직장(直長) 권명이(權明利)의 11세손인 일신(日薪) 권후준(權后準)의 정자다. (영수당의 주인 권방은 그의 후손이다.) 권후준은 통덕랑을 지낸 권성시(權聖時)의 장남으로 문행(文行)과 덕망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신이란 매일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밝음과 덕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을 흐리게 하는 것을 물욕이라 여겼다. 움직이나 고요하게 있으나 간단없고 쉼 없이 물욕을 버리는 것, 그로써 밝음과 덕에 이르는 것, 그렇게 새로워지는 것을 일신이라 했다. 그는 게을리하지 말고, 홀로 방에 있더라도 잊지 말며, 모든 사람을 새롭게 하라고 당부한다. 일신재는 영원히 오늘일 것처럼 보였다. 나무랄 데 없는 완성이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청송군청송군 안덕면 문거리에 자리한 추모재 전경. 추모재는 월성이씨 청송 입향조 이정견의 손자인 송와 이종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재사다.일신재는 안동권씨 청송 입향조 직장 권명이의 11세손인 일신 권후준의 정자다. 권후준은 통덕랑을 지낸 권성시의 장남으로 문행과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영수당은 18세기 청송에 살았던 안동권씨 권방이 이름을 붙인 정자다. 청송군지에 따르면 권방은 선비의 도를 닦고 의를 행해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던 인물이다.
2017.10.18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4> ‘근원의 뜻이 지속되는…’ 청송 안덕면의 송오정, 송학서원, 화지재
누정의 역사에 있어서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된 정신은 ‘불멸’이다. 불멸은 영원에 걸쳐 무너지지 않을 균형을 갖춘 성실한 현재다. 성실한 현재는 오랜 뿌리를 거듭 상기하고 일으키는 것으로 구현된다. 청송군 안덕면의 송오정과 송학서원, 화지재는 각각 발단이 다르다. 그러나 지속되어온 정신과 성실한 현재는 같다. 그곳은 근원적인 것이 지속되는 장소이며, 사람들은 그곳을 지킨다. #1.복리 소대마을의 송오정 안덕면 소재지인 명당리의 남쪽에 복리(福里)가 있다. 보현산을 향해 길게 나아가는 골짜기의 초입이다. 복리는 평산신씨(平山申氏) 세거지로 인조 때인 1654년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신광계(申光繼)가 아버지 신벌(申)과 함께 개척했다고 한다. 길지를 찾아다니다 발견했다는 이곳은 들이 넓고 천이 동네와 조금 떨어져 있어 수해와 재해가 없는 땅이었다. 복리 소대마을 앞 환한 잔디밭에 마을의 이력을 알려주는 여러 비가 서 있다. 병신창의 때 활약하였던 신필호(申弼鎬)의 독립운동기념비, 가뭄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운지곡 저수지와 송림 저수지를 만든 노사(鷺沙) 신흥한(申興漢)의 송덕비, 그리고 마을 이름 ‘소대’의 유래비 등. 원래 마을은 노송이 우거진 가운데 자리해 송대동(松臺洞)이라 했다. 이후 마을 전역에 차조기 잎 ‘소엽(蘇葉)’이 저절로 자라 소대(蘇臺)가 되었다. 영조 때 선비 신해관이 건립한 송오정숨어 살면서도 도의 지키는 뜻 전해져퇴계 이황·학봉 김성일 모신 송학서원300여년 지난 지금도 유림정신 이어와장전리에 자리한 남계조 재실 화지재남동쪽 남계조 묘소와 향나무 바라봐너른 들을 바라보는 마을 안쪽으로 낮은 돌담길이 직선으로 뻗어 있다. 담 저편의 키 큰 나무들이 상체를 기울여 길에 투명한 그늘을 드리운다. 길 입구에는 돌담과 키를 맞춘 송오정(松塢亭) 표지석이 서 있다. 길 끝에는 옥색 철 대문이 보인다. 저 대문 속에 송오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단하고 촘촘한 문살의 상세가 보일 만큼 다가가서야 대문 위로 솟아오른 팔작지붕을 알아차린다. 빗살무늬로 쌓아올린 높고 견고한 돌담이 정자를 에워싸고 있다. 담과 대문은 무뚝뚝하면서도 정중하게 방문객의 접근을 차단한다. 송오정은 영조 때의 선비 신해관(申海觀)이 지은 정자다. 그는 잠시 성균관에 있다가 돌아와 숨어 살았는데 옛집을 수리해 정자를 짓고 한 그루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노닐었다 한다. 옛날에는 가운데 3칸 방을 두고 동서에 마루를 낸 구조였다. 마루에 기대 아래를 보면 물고기들이 헤엄쳤고 갈매기가 모래사장을 오르내렸으며 멀리 기름진 들이 내다보였다 한다. 현재 송오정은 새로 개축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다. 가운데 2칸이 대청이고 양쪽은 방이며 전면 반 칸은 툇마루다. 정자 왼쪽에는 살림집으로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이 있는데 모송재(慕松齋) 현판이 걸려 있다. 마당에는 커다란 바위와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대문 앞에 서면 돌담길 너머로 들의 조각이 보인다. 정자에 오르면 멀리 넓은 들이 보이지 않을까.송오정기(記)에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따르며 즐거워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는 꺾이지 않는 강함이 있고, 숨어 살면서도 도의를 굳게 지켰으며, 죽음을 기약하며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은 인물이었다 한다. 후인들은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고 그의 기침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향기와 빛이 아직 남아있어 지팡이 짚고 노니시던 곳에 더욱 슬픈 감회가 있다’고 소회했다. 송오(松塢)는 신해관의 호다. 송대는 소대가 되었지만, 송오라는 이름과 그가 어루만지던 한 그루 소나무는 지켜야 하는 어떤 것의 상징이었을지 모르겠다. 이제 높은 담장의 어스름 속으로 물러난 송오정은 스스로 근원적인 것이 성장할 양분이 되어 깊고 고요한 고독으로 돌아간 듯하다. #2.장전리 창말의 송학서원명당리의 동쪽 길안천변에는 너른 가람들이 감쪽같이 숨겨져 있다. 한길 가에 다소 휑뎅그렁하게 서있는 송학서원(松鶴書院) 이정표를 따라 샛길로 들어서면 그제야 들은 흔연히 제 모습을 펼쳐 보인다. 둘러선 산줄기는 멀고 들은 세상에서 가장 너른 호수처럼 잔잔하다. 마을은 장전리 창말. 옛날 안덕면의 식량창고가 이곳에 있었다 한다.송학서원은 들의 선두에 낮게 자리한다. 동쪽을 향해 선 외삼문의 양쪽으로 긴긴 담장이 뻗어나가 서원을 크게 감싸 안고 있다. 삼문 앞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꼬장꼬장하면서도 장려하게 솟아 있다. 창말과 가람들과 서원 모두를 파수하는 자세다. 송학서원은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세 분을 배향한다. ‘푸른 소나무와 하얀 학은 분수에 없는 것이지만(靑松白鶴雖無分), 푸른 물과 붉은 산은 인연이 있네(碧水丹山信有緣)’라는 퇴계의 시가 있다. 퇴계 이황이 자신의 본향인 청송을 동경하여 읊은 노래다. 송학서원은 이 시구에서 ‘송(松)’과 ‘학(鶴)’ 두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남쪽 담장 밖에 주사 건물과 화장실이 위치한다. 근래의 것인지 산뜻하다. 주사 뒤 담벼락에 나있는 좁은 통로로 들어가면 반듯하고 넉넉한 공간이 펼쳐진다. 경역 안에는 강당과 사당, 동서재가 질서 있게 자리하고 있다. 송학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집이다.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실이 있고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다. 동재에는 직방재(直方齋), 서재에는 존성재(存省齋) 현판이 걸려 있다. 동서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정연한 4개의 방에 툇마루가 있는 엄격한 얼굴이다. 별도의 담과 삼문으로 구획되어 있는 사당 존덕사(尊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송학서원의 모든 맞배지붕은 박공면 판자 끝부분이 간결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소소하나 눈에 띄는 공력이다. 송학서원은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가 1568년 명당리에 세운 명지재 서당을 모태로 1702년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후 1882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180여 년간 송학서원은 삼자현 이남의 유일한 서원으로 인재 육성과 유림 활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유림들은 서원을 서당으로 격하시켜 보호했다. 송학서당이 다시 서원으로 격상된 것은 1996년이다. 사당은 2010년에 건립했다. 시작부터 현재까지 송학서원을 지키려는 유림의 안간힘이 서원의 정신이다. 그로 인해 완전하게 구현된 서원의 오늘이 과거를 압도한다. #3.장전리 화지곡의 화지재 창말 마을의 가람들 동쪽 산지에는 단 몇 채의 집이 부락을 이루는 조그마한 골미골이 있다. 꽃봉오리 같은 산세에 작은 연못이 있어 화지곡이라고도 하는데 높지 않은 산이 사방을 둘러싼 소래기 같은 땅이다. 그 속에 영양남씨(英陽南氏) 청송 입향조인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재실인 화지재(花池齋)가 있다. 영양에 살던 그는 임진왜란 때 노모를 모시고 장전리로 피란해왔다고 한다. 남계조는 생활이 검소하고 자제 교육에 엄격한 사람이었다. 문을 내고 길을 열고 꽃과 돌을 배치하는 데 남달랐으며, 시(詩)와 예(禮)가 깊고 효와 우애는 높았다 한다. 특히 효행으로 칭송받았는데 당시 관찰사 김공수가 충효로 천거해 통정대부 부호군에 제수되기도 했다. 1621년 세상을 떠난 그는 화지곡의 매척산(梅尺山) 자락에 묻혔다. 재사는 인조 때인 1629년에 처음 8칸으로 세우고 영모재(永慕齋)라 했다. 이후 재실은 여러 번 무너졌다. 그때마다 후손들은 힘껏 고쳐 세우기를 거듭했는데 1937년에는 재실을 영구히 지키기 위한 별소를 짓고 골짜기의 이름을 따 화지재라 재명을 고쳤다. 화지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건물로 중앙 2칸은 대청이고 양쪽은 2칸은 통으로 된 온돌방이다. 막돌로 초석을 놓고 대부분 네모기둥을 올렸는데, 대청 전면의 중심에만 둥근 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4칸보다 좁은 너비의 맞배지붕을 얹고 양쪽 측면에 산기둥을 세워 가적지붕을 달아놓았다. 가적지붕은 마치 차양처럼 지붕 아래나 건물에 이어 달아놓은 짧은 지붕을 말하는데 재사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재사 서쪽에는 ‘ㄱ’자형 주사(廚舍)가 있고 앞마당 동쪽에는 3칸 동재가 자리 잡고 있다. 재사는 남동향을 바라본다. 거기 햇빛을 받는 언덕에는 남계조의 묘소와 묘도비각(墓道碑閣)과 거대한 향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400년 된 향나무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묘하에 심은 것이라 한다. 화지재에는 사람이 산다. 재실을 영구히 지키고자 했던 오래전의 도모는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최초의 형식은 변했지만 착실하고 소박하게 지켜온 마음이 화지재에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청송군청송군 안덕면 복리 소대마을에 자리한 송오정 전경. 송오정은 영조 때의 선비 신해관이 지은 정자로, 송오정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따르며 즐거워했다’는 내용이 있다.송학서원은 명지재 민추가 1568년 명당리에 세운 명지재 서당을 모태로 1702년 유림들에 의해 건립됐다.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여헌 장현광을 배향하고 있다.화지재는 영양남씨 청송 입향조인 운강 남계조의 재실이다. 남계조는 생활이 검소했고 자제 교육에 엄격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효행으로 칭송받았다.화지재 남동쪽 언덕에 자리잡은 수령 400년의 거대한 향나무. 조상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2017.09.27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3> 엎드린 듯 낮게, 그리고 고요하게 - 청송 안덕면의 동계정, 오의헌, 송포정
보현산의 북쪽 보현천변에 청송군 안덕면 덕성리(德城里)가 있다. 함안조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라 한다. 천변의 땅은 소나기 같은 햇살에 젖어 양지바르고, 집들은 편안하게 엎드린 듯 낮게 고요하다. 사과밭과 논이 넓게 갈마드는데, 벼들은 꾸벅꾸벅 인사를 전해오고 사과나무들은 훌쩍 발돋움해 저마다 햇볕 따먹기 바쁘다. 도랑 위에 척 걸쳐 앉은 정자에는 검은 머리 흰 머리가 잔잔한 물소리에 잠들었고,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낯선 사람을 향해 한번 컹 조심스레 짖는다. ‘환영합니다’ 길가 담벼락이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해바라기가 피고 잠자리가 줄지어 날고 허수아비가 웃는다. 오가는 이 드문 시골길의 벽화는 숫접게 다정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 조형도 不忠 부끄럽다며 낙향, 동계정 세워조형도의 아들 함세 기리는 오의헌다섯 가지 마땅함의 뜻 현판에 새겨남쪽엔 조종악 忠孝 기리는 송포정함안조씨가 대대로 살아온 덕성리세 정자 낮고 고요하게 자리잡아#1. “충언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다” 동계정덕성리에는 사부실(沙夫谷)과 덕재(德才), 두 개의 부락이 있다. 사부실은 본래 하천이었는데 큰 홍수로 인해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땅이라 한다. 고모산 줄기가 부드럽게 흐르는 마을의 가장 안쪽에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 앉은 동계정(東溪亭)이 있다.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5세손이자 망운(望雲) 조지(趙址)의 둘째아들인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의 정자다.조형도는 어릴 때 큰아버지인 만호(萬戶) 조우(趙)의 양아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총명하고 영특해 겨우 글자를 배울 만할 때 이미 문장을 지었고, 열 살이 되던 해에 양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른처럼 상례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뒤 3년간 향시에 연이어 장원했고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 등과 함께 화왕산전투에 참가해 크게 활약했다. 이를 계기로 무과에 지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 겸 비국랑(備局郞)에 임명되었다. 누차 승진해 통정대부에까지 오른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광해군 때다. 인목대비가 폐출되고 영창대군이 살해되자 충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그는 1613년 낙향해 정자를 세우고 동계정이라 했다. 동계정은 정면 4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의 천마산 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양쪽은 방이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옆면과 뒷면 전체에는 쪽마루가 놓여 있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사친당(思親堂), 왼쪽에는 연군헌(戀君軒) 편액이 걸려 있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으로 단정하게 구획돼 있고 3칸 대문채가 듬직하다. 원래 정자는 ‘보현산 북쪽 용연의 동쪽’ 혹은 ‘용산 절벽 위’에 있었다고 한다. “동계정은 예전에 가끔 놀러 갔던 곳이지. 매방들 언덕 위에 있던 정자 말이야. 미술시간에 정자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고 정자 밑은 현남국민학교 자연관찰지로 지정해서 야외수업을 가곤 했지. 그 수심 깊은 물을 용연이라고 불렀어.” 우연히 엿들은 대화로 동계정의 원래 자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부실의 남쪽, 지금은 폐교된 학교 뒤 보현천과 가까운 자리였을 것이다. 낙향한 지 4년 뒤 나라에 도적이 들끓고 반란이 잦아지자 조형도는 다시 중앙으로 나갔다. 인조반정 때는 인조를 호위해 보성군수에 올랐는데 세금을 감면하고 자신의 봉록으로 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이괄의 난 때는 공주로 피신하는 인조를 다시 한 번 호위해 진주와 상주의 영장(營將)으로 제수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70세였다. 급히 군장을 꾸려 적진으로 달려가 선봉에 서기를 청했으나 노령이 염려돼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분개한 나머지 등창이 나 세상을 떠났다 한다. 동계정은 비바람에 낡고 6·25전쟁으로 크게 훼손된 것을 1952년에 중건했고 1976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건했다고 한다. 마당에는 2008년에 중건했다는 비가 있다. 현재 지붕을 천막으로 덮어 놓은 걸 보니 다시 수리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다. 별나게도 대청에 시계가 걸려 있다. 오가는 후손들은 동계정의 시간을 본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멈추지 않는 시간이다. #2. ‘다섯 가지 마땅함’ 오의헌 동계정 옆에 마치 동계정의 그림자를 멀찍이 따르듯 오의헌(五宜軒)이 있다. 조형도의 아들인 조함세(趙咸世)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그는 어려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했고 학행이 높아 여러 번 침랑(寢郞)에 천거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그가 골짜기에 묻혀서 만년을 보낸 곳이 오의헌 자리다. 동계정의 흰 벽과 짙은 고동색 기둥에 잠시 눈이 익었던지 오의헌의 희끗한 모습은 매우 늙어 보인다. 지붕은 위태로워 보이고 몇몇 창호들은 낡고 삐걱댄다.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오의헌의 골격은 견실하고 탄탄하다. 조함세는 아버지 조형도와 마찬가지로 매우 효자였다 한다. 그가 11세 때 어머니의 몸과 팔다리가 마비돼 수족을 못 쓰게 되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옷 입고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루지 않았고,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로 어머니를 회생시켰다 한다. 그의 나이 19세에 아버지가 등창이 나자 항상 자신의 입으로 농혈을 빨아냈으며 이후 상을 당했을 때는 피눈물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오의헌은 정면 3칸 측면 반 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마루를 열고 양쪽으로 넉넉한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루 뒷면 가운데에는 유리창이 설치돼 있는데 쓰렁쓰렁한 매무새라기보다는 마을사람들과의 가까운 거리를 느끼게 한다. 오의헌 현판에는 헌의 의미가 함께 적혀 있다. 오의(五宜)란 다섯 가지의 마땅함(宜)이다. 봄에는 바람이 마땅하고, 여름에는 서늘함이 마땅하고, 가을에는 달이 마땅하고, 겨울에는 따스함이 마땅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주인이 마땅함을 뜻한다. 조함세는 수십 년을 궁벽하게 살았으나 의(義)를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오의헌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1696년에 건립됐고 이후 1790년에 중건됐다. 그가 기거했던 최초의 집 오의헌의 모습은 알 수 없다. 다만 사계절의 운치를 즐기고 자연의 질서를 높이 여겼으며 그에 맞는 덕을 갖추기를 원했던 한 사람의 거처를 상상해본다. 후손들이 지은 오의헌에는 사모해 높이는 마음이 더해졌을 것이다. #3. ‘충과 효의 뜻이 오롯이’ 송포정사부실의 남쪽은 ‘덕재’로 덕성리가 시작된 마을이다. 덕성리의 남쪽은 성재리(聖才里)인데 각각 덕(德)자와 재(才)자를 따서 덕재라 칭했다고 한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송포정(松浦亭)이 있다. 만호 조우의 아들이자 동계 조형도의 동생인 송포(松浦) 조종악(趙宗岳)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그는 겨우 3세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는 공을 세워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지냈고 인조 때는 별시위(別侍衛)가 되었고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송포정은 원래 집들에 휘 둘러싸여 슬쩍 숨은 듯이 자리했었다. 지금은 최근에 지어진 도롯가의 집이 마당을 활짝 열어 놓아서 한길에서도 송포정의 옆모습이 보인다. 송포정은 남쪽의 보현산을 바라보고 서 있다. 담은 높고 대문은 잠겨 있으나 옆집의 마당을 밟고 정자에 오를 수 있다. 송포정은 정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지만 풀의 성장력을 탓하고 싶을 만큼 정자는 깔끔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종악은 19세였다. 그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모친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숙부인 망운(望雲) 조지(趙址)에게 재차 간청했다. 그러자 숙부는 칼을 주며 시(詩)를 지어 격려했다 한다. ‘천지가 넓고 넓으나 이 칼을 놀리면(天地恢恢遊此刃) 하나의 칼이 능히 백만의 스승에 비길 것이다(一劒能當百萬師).’ 이 시가 송포정의 주련으로 걸려 있다. 전장에서도 그는 매일 밤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한다. 어느 날은 길을 가로막은 호랑이가 꼬리를 내리고 물러났고, 어머니가 병이 깊었을 때는 승냥이가 노루를 쫓아 들어왔다고 한다. 화산(花山) 권응수(權應銖)는 ‘충(忠)을 효문(孝門)에서 구한다 하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고 했다. 마루에 등잔과 부채가 걸려 있다. 후손들이 모여 찍은 큼지막한 사진도 걸려 있다. 시계와 유리창과 부채는 누구나의 것이다. 환영의 인사는 모든 이에게 향한다. 덕성이란 덕으로 성을 쌓는 일이다. 공동기획:청송군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청송군 안덕면 덕성리에 자리한 동계정은 생육신 어계 조려의 5세손인 동계 조형도가 지은 정자다. 조형도는 한강 정구에게 수학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 등과 함께 화왕산전투에 참가했다.동계정 인근에 자리한 오의헌은 조형도의 아들인 조함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조함세는 여헌 장현광에게 수학해 학행이 높았으나 벼슬길로 나가지 않았다.송포정은 조형도의 동생인 송포 조종악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정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2017.09.13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2> 언덕 위의 3色 정자 - 청송 현서면의 침류정, 오월헌, 동와정
바다 속으로 미광이 비치는 듯한 수목들의 언덕이다. 뒤쪽에는 고모산이 솟아 있고 눈앞에는 어봉산이 가까우며 옆으로는 문봉산 산두봉과 대정산이 감싸고 있다. 언덕 아래에는 길안천이 흐른다. 빠듯한 너비의 천변에는 벼와 사과나무가 애틋하게 풍성하다. 그러한 언덕에 세 채의 정자가 서있다. 침류정(枕流亭), 오월헌(梧月軒), 동와정(東窩亭)이다. 수목과 돌과 천과 들과 산은 이들 정자로 인해 명승이 되고 그들은 허리를 굽혀 자신의 경승을 둘러본다. 푸른 저녁처럼 어두운 수목의 그늘 속에서, 그러나 태양을 향해 가슴을 열고 밝게 안녕의 신호를 보내며….월정리 여암마을 언덕 위의 침류정의성김씨 청송 입향조 증손이 건립물길 가까이서 흐름에 집중하는 듯 침류정 동쪽 의성김씨 서당 오월헌오동나무와 달빛 이야기만 전해와선조 때 문신 김흥서가 세운 동와정견고하면서도 순박한 모습 그대로 #1. 계류를 베개로 삼은 정자, 침류정 언덕이 있는 곳은 청송 현서면의 월정리 여암(旅岩)마을이다. 마을 앞 냇가에 큰 바위가 이어져 있는데 그곳에서 쉬어가는 객이 많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숫제 ‘나그네 바위’다. 언덕은 나그네가 다리쉼했을 법한 바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길안천으로 쏟아져 내리는 고모산 자락에 돌을 쌓아 단단한 토대를 세우고 평평하게 다듬은 언덕이다. 침류정(枕流亭)은 언덕 위에 편안히 올라서 있지 않고 잿길에 길고 튼튼한 다리를 디디고 서 있다. 조금 더 물길 가까이, 조금 더 흰 바위들에 가까이, 물과 바위의 은밀한 조력에 귀 기울이 듯 서있다.침류정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성진(金聲振)의 정자다. 그는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도곡(道谷) 김한경(金漢卿)의 증손으로 학식이 높고 효성이 깊은 인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들을 전장에 보내고 자신은 노모를 피란시켰으며 난이 지나간 후에 이 정자를 지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고 한다.침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뒤쪽 중앙에 1칸 온돌방을 두고 좌우 전면에는 마루를 깔았는데, 전면에만 기둥 밖으로 난간을 두르고 좌우에는 양쪽으로 여는 판문을 내었다. 뒤쪽에는 세 칸 모두에 문을 내었는데 동쪽 마루 칸은 양쪽으로 여는 판문, 서쪽 마루 칸은 한쪽으로 여는 널문, 가운데 방문은 한쪽으로 여는 띠살문이다. 문 앞에는 길고 좁은 쪽마루를 달아 출입을 쉽게 했다. 온돌방에만 네모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둥근 기둥을 세웠고 기둥머리는 연꽃으로, 보머리는 봉황새로 장식했다. 침류정 옆에는 조금 거리를 두고 한 그루 향나무가 서있다. 정자를 지을 때 같이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는 나이 든 몸을 쇠기둥에 의지해 비스듬히 서 있다.마루에는 한산(韓山) 이병하(李秉夏)가 1905년에 지은 침류정기(記)가 걸려 있다. 그는 ‘이곳의 풍광 속에서 왜 흐르는 물만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는가를 곰곰 생각했고 술잔에 넘치는 물이 천리를 흘러가며 무궁한 이로움을 주는 것이니, 이 작은 집이 술잔에 넘치는 물의 근원과 같아 오래 갈수록 더욱 많아지고 멀리 갈수록 더욱 빛날 것’이라 했다. 흐름을 이어가는 것, 맑음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침류’의 교훈이라 했다.가만 얼굴을 바라보면, 침류정은 한없이 아득한 것들과 집중하여 공명하는 눈동자 같다. 그러나 옆모습을 훔쳐보거나 뒷모습을 바라보면, 침류정은 굳어버린 침묵처럼 말 없는 입 같다. 그 침묵과 집중을 지켜주기 위해 늙은 향나무는 한걸음 뚝 떨어져 서있는 걸지도 모른다.#2. 오동나무와 달의 정자, 오월헌 침류정의 동쪽에 산을 기대고 선 오월헌(梧月軒)이 있다. 의성김씨 집안의 서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김성진이 침류정과 함께 지은 것인지 그 이후의 것인지 명확한 설명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대연헌(大淵獻), 즉 어느 해년(亥年)에 쓰인 오월헌기(記)에 ‘김씨(金氏)의 서숙(書塾)’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다르게는 고종 5년인 1868년 2차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된 세덕사(世德祠)의 구재로 건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의 중수 여부를 알 수 없으니 현재의 건물은 1869년경 세워진 것으로 상정한다.오월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이고 양쪽에는 앞뒤가 1칸 반 규모인 방이 있는데 오른쪽 방에는 강학재(講學齋), 왼쪽 방에는 돈의재(敦誼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전면에는 반 칸의 툇마루가 있는데 양쪽 끝 1칸씩에만 낮고 평평한 난간을 올리고 측면은 판문으로 막았다.기문은 쌍호거사(雙湖居士) 권별(權)이라는 이가 썼다. 그는 어느 가을날 벗과 함께 오월헌에 올라 정자 주인에게 오월(梧月)의 의미를 물었다고 한다. 그때 오월헌 앞에는 선대(先代)에 심긴 오동나무가 있었다. 주인은 ‘봄과 여름에는 오동나무 그늘이 두텁고 밝은 달빛이 경치를 빛나게 하고, 가을과 겨울이면 오동나무 그림자가 소소하고 서리가 내리는 밤이면 달빛이 밝게 어리니, 이는 조상들의 달빛이 후손에게 비추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오동나무가 혹 시들거나 바람에 부러져도 반드시 그 뿌리에서 싹이 돋아 대대로 가꿀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쌍호거사는 ‘저 땅의 오동나무는 자손의 무성함과 연관하고 저 하늘의 달은 조상의 빛을 띠었다’고 감회했다. 지금 오동나무는 어디에 있나, 이 여름 화사한 연 자줏빛 꽃을 보지 못했는데….#3. 동쪽의 움집, 동와정언덕의 가장 동쪽에 동와정(東窩亭)이 자리한다. 동와정은 조선 선조 때 통정대부장악원정(通政大夫掌樂院正)을 지낸 동와(東窩) 김흥서(金興瑞)가 세운 정자다. 그는 이곳에 은거해 후학을 양성하고 성리학을 공부하며 자연과 함께 한 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동와’란 ‘동쪽에 있는 움집’을 뜻한다. 움집, 즉 움푹한 곳은 숨어있기 좋은 곳이겠다.전쟁을 겪고 세월이 지나면서 동와정은 점차 부서지고 무너졌다. 이후 후손들이 북쪽 산의 나무를 베고 남쪽 시내의 돌을 가져다 재실로 중건했다. 여섯 칸 겹집이었으며, 가운데 2칸은 정당(正堂), 오른쪽 2칸은 학문을 익히는 이업소(肄業所), 왼쪽 2칸은 손님을 대접하는 연빈소(賓所)라 했다. 견고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넓으면서 순박하게, 김흥서의 검소한 덕을 본받아 지었다고 전한다. 동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1칸 대청을 열고 양쪽에 1칸씩의 방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길게 놓아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자 곁에는 1998년 중수했다는 작은 비와 곧게 자라난 향나무가 있다. 현재의 동와정은 이전의 중수 기록에서 말하는 검소한 모습과 꼭 닮았다. 동와정은 깃털처럼 검박하고 손바닥에 모은 따뜻한 입김처럼 신중한 모습이다.동와정기는 후손 김동섭(金東燮)이 썼다. 그는 기문을 통해 이곳의 경치를 보여준다. 봄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빼어나고 무성한 그늘을 땅에 드리운다. 여름에는 구름이 일어나 기이한 봉우리를 만든다. 가을에는 물이 맑고 저녁노을은 따오기와 함께 날며 벼가 무르익어 많은 이들을 살게 한다. 정자의 주인들은 이 모든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후손들도 이 모든 풍경을 본다.공동기획:청송군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청송군 현서면 월정리에 자리한 침류정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성진이 지은 정자다. 김성진은 임진왜란 이후 이 정자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오른쪽에 정자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향나무의 가지가 보인다.오월헌은 의성김씨 집안의 서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동와정은 조선 선조 때 통정대부장악원정을 지낸 동와 김흥서가 세운 정자다.
2017.09.06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1> 골짜기의 집 - 청송 현서면 추원당·지양정·월송정
골짜기 곡(谷). ‘샘물이 솟아 나와 산간을 흐르는 물길’을 뜻한다. 또한 ‘깊은 굴’이나 모든 혈 자리들 가운데에서 기본이 되는 ‘경혈(經穴)’을 뜻하기도 하며 크게는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리 주어진 운명이든, 어느 날 맞닥뜨린 운명에 의해서든, 골짜기에 스스로 자기의 방을 둔 사람들은 그 골짜기와 하나로 보인다. 그들은 운명이나 질서 안에서 자유롭고, 운명보다 강한 삶을 산다.중종반정 공신 道谷 김한경이 낙향해독서·강론으로 97세의 생을 마감한 곳후손들 추원당 지어 그의 높은 뜻 기려큰 은행나무가 마을입구 지키는 원도동의성김씨 30대조인 김심 은거한 지양정산수에만 즐거움을 두고 93세까지 살아 길고 좁은 길의 끝에 고요한 생초전 마을 초입 길가 소나무같이 들어앉은 월송정태조와 친분 설학재 10세손 정지웅 추모#1. 도리 재동의 추원당‘의성김씨세거지(義城金氏世居地)’ ‘추원당(追遠堂) 입구’라 각자된 거대한 표지석이 도롯가에 서 있다. 흔들리지 않는 선두의 깃발 같아서, 저절로 뒤따라야 할 것 같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러나 의심 없이.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골짜기를 거슬러 가다 보면 갈림길에 서게 된다. 재동길과 도리길이다. ‘추원’이란 먼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이니 재사가 있을 법한 재동으로 간다. 곧 마을이다. 청송군 현서면 도리는 500여 년 전 의성김씨 도곡(道谷) 김한경(金漢卿)이 낙향해 처음 정착하면서 그의 호를 따 도동(道洞)이라 했다. 도곡의 사후 후손과 제자들이 재사(齋舍)를 지어 마을 이름을 재궁(齋宮)이라 하였고 재궁곡, 재궁골 등으로 불리다 재동이 되었다. 도곡은 연산군시대의 인물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과 뜻을 같이해 중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한 반정공신이었다. 중종 원년인 1506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훈록(勳錄)되고 정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지사에 제수되었으나 이후 공신들이 파를 지어 싸우는 것에 염증을 느껴 도리로 낙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독서와 강론을 하며 평생을 조용히 지내다가 1552년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지금 재사인 추원당의 서편 산중턱에 묘소가 있다. 마을에서 재사는 보이지 않는다. 뒷산 쪽으로 또렷하게 굽어지는 길을 따라 오르면 나무그늘 속에 선 신도비를 지나 양지바른 땅에 유현하게 자리한 추원당이 보인다. 곁에는 장서각과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운흥문(雲興門)’ 편액이 걸린 육중한 문을 힘주어 열면 단정한 사각의 마당이 펼쳐진다. 정면에 추원당이 마주하고 좌우로 부속건물이 있어 전체가 단단한 ‘ㅁ’자를 이루고 있다. 추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 주초 위에 원주를 세운 당당한 건물이다.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2칸의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어칸을 제외한 4칸 전면에 헌함을 둘렀다. 왼쪽 측면에는 창살 모양이 다른 2개의 벼락닫이창이 있고 오른쪽 측면에는 벼락닫이창 하나와 1칸 벽장이 달려있다. 대청의 뒷벽 오른쪽 1칸에는 골판문을 달고 아주 좁은 쪽마루를 설치했고 가운데와 왼쪽 문에는 바람을 막는 풍서란형 설주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대청에서 보면 오른쪽 방문 위에 사성재(思成齋)와 회재당(會齋堂) 편액이 걸려 있다. ‘사성’은 생각하며 제사 지내고 조상의 모습을 대하듯이 정성을 쏟는 것을 말한다. ‘회재’는 모여 재계한다는 뜻으로 1727년에 후손 김채중(金彩重)이 썼다고 전해진다. 왼쪽 방문 위에는 학습재(學習齋)와 도곡정(道谷亭) 편액이 걸려 있다. ‘학습’은 배우고 제때에 익힌다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의 뜻을 지니고 ‘도곡정’은 공이 도리에 은거하여 지은 집의 이름으로 1765년에 쓰여진 편액이다.추원당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처음의 자취는 종갓집의 화재로 모두 사라졌다. 현재는 1941년, 1979년, 2007년의 중수기가 있다. 1941년의 중수기에 ‘공이 돌아가신 후 묘 아래 이 당을 세우고 묘제를 지냈다’는 내용과 ‘19세기 초중반에 추원당의 북쪽 언덕에 사당을 세우고 ‘도동사(道洞祠)’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1908년에는 ‘기울어진 용마루를 바꾸고 삼나무 서까래로 바꾸었으며, 깨어진 기와를 붙여 다시 덮고 버팀목을 제거하여 바로잡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도곡정의 기와를 모두 들어내어 추원당을 덮었다, 칠을 했다, 모서리 문을 고쳤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길게 전해진다. 추원당은 긴 시간 동안 그때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왔다. 이는 동시에 긴 시간 동안 후손들의 손길이 끊임없이 닿아왔다는 의미다.어칸 앞에 서면 대문채 너머 은행나무와 재동 남쪽을 흐르는 산줄기가 보인다. 평화롭다. 도(道)란 길이고 근원이고 이치며 나아가 도덕과 인의(仁義)를 뜻하니 ‘도’와 ‘곡’은 한길로 통한다. 이곳에서 골짜기와 마을과 사람과 집은 구분되지 않는다. 운명이 낳은 재앙을 모조리 삼켜버릴 수 있는 힘은 재앙을 지극한 복으로 바꾸는 힘 또한 가진다. #2. 도리 원도동의 지양정재동의 북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원도동(元道洞)은 도리의 뿌리가 되는 마을이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을 입구를 지키는 아주 깊은 산골이다. 은행나무 옆에 곧고 좁은 길이 지붕을 인 한 칸 대문까지 인도하듯 뻗어 있다. 길 양쪽으로 밭과 농기계와 비닐하우스가 어지럽다. 뒤쪽은 낮은 산이다. 그러한 속에 마치 쇠로 주조한 듯이 여물게 보이는 팔작지붕이 또렷한데, 의성김씨 30대조 김심(金深)이 살며 공부하던 지양정(芝陽亭)이다. 김심은 이곳에 두어 칸의 정자를 짓고 숨어 살면서 바깥세상을 생각지 않았고 명성을 구하지 않았으며 다만 산수에 즐거움을 두고 93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그의 은일하고 소박한 거처는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지고 터는 황폐해졌다. 후손들은 힘을 모아 서당을 겸한 재사로 다시 세우면서 처음에는 도동서당으로 지어 도동정(道洞亭)이라 현판을 걸었다. 동서쪽에는 각각 강의헌(講誼軒), 모선재(慕先齋) 현판을 걸었는데, 처음부터 ‘지양’으로 이름하지 않은 것은 공과 사를 구별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이후 다시 기울어진 것을 후손들이 당원(堂員)을 모아 중건하면서 편액을 ‘지양’으로 걸었다. 문은 지게막대기 여럿을 괴어 의지적으로 막아놓아 가벼이 손대기 어렵다. 발돋움 해 담장 너머를 들여다본다. 지양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가운데 대청을 열고 양쪽에 방을 둔 모습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면의 4개 기둥만 원주를 썼는데 고색이 짙으나 탄탄하게 서있다. 어떤 연유에선지 지양정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지양’이란 무슨 뜻일까. 양지에 가득 자라나는 풀일까. 송나라 성리학자 주돈이(周敦 )는 ‘뜰에 자라나는 풀들을 뽑지 않고 지켜보면서 천지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지금 현판 없는 작은 집은 흐르는 세월을 그저 내버려두고 마당 가득 자라난 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3. 두현리 생초전 마을의 월송정 남북으로 긴 골이다. 작은 천이 골 따라 흘러 길안천과 만나는 곳에 골짜기의 입구가 있다. 옛날에는 골의 입구가 나무로 막혀 잘 드러나지 않았고, 세상에서 좋은 곳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한다. 찾는 이 드물었던 이곳을 한 도승이 지나면서 ‘초록 풀밭’이라 한 것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청송군 두현리 생초전(生草田)이다. 지금도 고요함은 물 속 같지만 생초전교로 이어지는 입구는 활짝 열려 양쪽으로 사과밭이 융융하다. 다리 근처에 화강석 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 대략 ‘동래정씨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의 후손들이 생초전에 입향했다’는 내용이다. 설학재는 조선 초 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칩거하면서 두문동(杜門洞) 현인들과 마음으로 동행했지만, 이후 태조·태종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출사한 인물이다.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제액(題額)을 공이 썼다고 하니 그 친분을 짐작할 만하다. 설학재의 10세손 정지웅(鄭之雄)이 선조 초 성주에서 청송 월정(月亭)으로 입향해 마을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고, 그의 아들 세련(世璉)이 월정에서 생초전으로 이거해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한다. 정말 마을이 있을까 싶은 길고 좁은 길 끝에 드디어 마을이 나타난다. 그 초입 길가에 후손들이 월정 정지웅을 기려 세운 월송정(月松亭)이 공들여 쌓은 정연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대청이 있고 양쪽은 방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마루 아래에는 화강석 기둥을, 위에는 둥근 나무기둥을 세웠다. 익공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보머리는 날카로운 눈매의 봉황으로 장식되어 있다. 우물 같은 땅이다. 눈앞에는 사과밭과 산줄기의 두 수평선이 나란하고 하늘은 궁륭처럼 시야를 덮고 있다. 눈 시릴 만큼 환한 것이 가슴 먹먹할 정도로 고적하다. 월송정기(記)에 선생(월정 정지웅)은 왜란과 호란, 남한산성의 치욕과 이후의 어지러운 세상에 대해 ‘반드시 창과 방패를 닦아 원수를 칠 뜻을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눈물만 떨구었다’고 한다. 이 외에 월정 정지웅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정자의 이름이 왜 월송정인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후인들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 소나무와 같았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골은 깊고, 사모의 마음은 높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청송군 현서면 도리 추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 주초 위에 원주를 세운 당당한 건물이다.지양정은 의성김씨 30대조 김심(金深)이 살며 공부하던 정자다. 한때 서당으로 사용되다 기울어진 것을 후손들이 당원(堂員)을 모아 중건했다.월송정은 설학재공의 10세손으로 청송에 입향한 월정 정지웅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2017.08.30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0> 몸 낮춘 사람들의 높은 집 - 청송 현동면 오체정, 낙금당, 겸와재 그리고 매계정과 월산재
멋있는 송림이다. 소나무 많은 청송이지만 이처럼 평평한 땅에 하나하나가 제 멋을 드러내며 여유롭게 숲을 이룬 모습은 드문 것 같다. 넉넉한 숲길을 관통하는 동안 은근한 보호와 환영의 느낌을 받는다. 송림은 청송의 가장 남쪽, 면봉산을 향해 약 7㎞나 깊숙이 파고드는 골짜기의 입구에 형성되어 있다. 골의 수문(守門)인 셈이다. 문 안에는 크게 두 개의 마을이 있다. 해가 열린다는 개일리(開日里)와 반달 형상의 땅에 매화 모양의 능지가 있다는 월매리(月梅里). 그곳은 은벽한 골짜기를 효와 덕으로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다.성재공이 아들 교육위해 지은 오체정담장 없고 사방 향해 열린 구조 눈길월매천 자락 당포마을 입구 낙금당건립 때 심은 대추나무 아직도 있어남수선생의 별서이자 학원인 겸와재많은 인재배출…월매서당으로도 불려 #1. 산앵두나무 꽃 같은 우애와 효를 기리는 정자, 오체정 송림의 가장자리 언덕에 정자 하나가 올라 서있다. 강건한 소나무들 사이 볕뉘를 받으며 아려하게 서있다. 곁에는 3채의 작은 부속건물이 있는데 정자와 함께 ‘ㅁ’자형으로 둘러서서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정자의 좌측 아래에는 병보천이 흐른다. 구암산에서 발원한 병보천은 송림을 크게 감싸며 이곳에서 초승달처럼 휘어 북향한다. 담장 없이 자유로이 열린 누마루에 몇몇 사람이 올라 있다. 사람의 숨과 체온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정자는 생명감이 넘친다. 현판은 정면과 측면 두 군데에 걸려 있다. ‘오체정(五亭)’이다.‘산앵두나무 체()’는 시경(詩經)의 상체지화(常之華)에서 따온 말로 형제간의 두터운 우애를 상징한다. 여기서 오체는 영양남씨(英陽南氏) 가문의 자훈(自熏), 응훈(應熏), 유훈(有熏), 필훈(必熏), 시훈(是熏)을 가리킨다. 이들은 청송 입향조인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증손인 성재(誠齋) 남세주(南世柱)의 다섯 아들이다. 형제는 1660년대의 인물로 학업과 덕망이 높고 효가 깊어 원근에서 하늘이 내린 효자라 칭송했다 한다. 원래 오체정은 성재공이 아들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작은 정자였다. 이후 1734년 자훈의 손자인 도성(道聖)이 제종들과 합의해 건물을 보수하고 할아버지 5형제를 기려 오체정이라 편액했다 전한다.오체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일자형 겹집으로 평면 구성이 특이하다. 앞쪽은 왼쪽부터 2칸 대청, 2칸 온돌방, 툇마루 순으로 구성되어 있고 뒤쪽은 그 역순이다. 앞면의 대청은 뒷면의 툇마루와 만나 병보천을 향해 열려 있고, 뒷면의 대청은 앞면의 툇마루와 만나 마을 입구의 송림을 바라본다. 대청에 면한 온돌방의 측면에는 분합문을 걸어 내외 공간을 확장할 수 있게 했는데 팔각빗살무늬 문으로 한껏 멋을 내었다. 온돌방의 앞쪽 2칸에만 쪽마루를 달아내고 나머지는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안쪽은 네모기둥을 세우고 바깥쪽은 둥근 기둥을 세웠다. 누마루의 하부기둥은 밤나무, 상부기둥은 소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부속건물들은 누군가의 거처다. 여기저기 쌓인 살림들은 거리낌없는 일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북쪽에는 멀리서부터 이곳까지 가지런히 이어지는 송림의 우듬지가 보인다. 남쪽에는 병보천을 가로지르는 만수교와 개일리의 환한 골짜기가 보인다. 정자는 사방을 톱아보며 골짜기의 수문 속에서 수문장처럼 자리한다. 오체정에는 담장이 없다. 주민들에게 오체를 떠올리는 일은 매우 가깝고 일상적인 일이다. #2. 산앵두나무가 있는 물가의 집, 낙금당면봉산에서 발원한 월매천이 만수교 아래에서 병보천과 만난다. 골짜기 속으로 나가는 길은 월매천과 나란하고 골짜기는 넓어 ‘해가 열린다’는 뜻의 개일(開日)의 의미가 확연하다. 현대식 집과 시멘트벽들을 무심히 지나치다 야무지게 오뚝한 기와지붕을 발견한다. 마을의 정면 한가운데에 단정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옆집과 어깨를 겯고 자리하고 있다. 낙금당(樂琴堂)이다.낙금당은 운강공의 10세손인 낙금(樂琴) 남성로(南星老)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과 문중에서 경모계(敬慕契)를 조직해 1880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공의 평소 거처였던 사랑채를 개수해 구재(舊材)를 고스란히 써서 지은 집이라 한다. 낙금공은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군량미를 지원하고 향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만년에는 성리학을 강학하여 후진을 육성한 학자였다.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의 낙금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 대청을 두고 양측에 온돌방을 두었는데, 왼쪽방과 대청의 전면에만 툇마루를 놓았다. 오른쪽 방은 툇마루 없이 전체가 방이고 왼쪽 방은 뒤편에 반 칸 규모의 공간을 달아내 양쪽 방이 역대칭인 구조다. 낙금당 후원에는 몇 그루의 대추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중 한그루는 1880년 낙금당 신축 때 준공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나무는 1991년에 죽은 듯했지만 1993년 보존 조치 후 다시 생기를 얻었다고 한다. 낙금공은 처음 이 땅에 들어와 기와집을 짓고는 마을 이름을 ‘당포(棠浦)’라 명명했다 한다. ‘당(棠)’은 팥배나무 또는 산앵두나무를 뜻하니 ‘체()’와 그 뜻이 닿아 있다. 어쩌면 당포란 오체의 유덕을 간직한 공의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3. 소박한 별서이자 학원, 겸와재당포마을을 지나면 월매리가 시작된다. 점점 좁아지는 월매천을 거슬러 점점 더 깊은 골짜기로 나아갈수록 마을은 드물어진다. 고적마을을 지나 골짜기의 끝에 가까워지는 고요한 길가에 겸와재(謙窩齋)가 있다. 월매천 너머 언덕진 자리다. 침류헌(枕流軒) 현판이 걸린 정자 한 동이 근래에 보수된 듯 말끔한 모습으로 자리하는데 그 곁에는 주사채와 대문채가 붕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겸와재는 운강공의 차남인 남수(南遂) 선생이 기거하던 곳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00년대 전후일 것으로 짐작된다. 침류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후면 3칸은 방이고 전면은 마루인데, 마루 양쪽에 벽을 세우고 문을 달았다. 담장 너머로 솟구친 은행나무와 물소리 맑고 높은 월매천, 하얀 마을길과 사과밭, 보현산 자락이 시원하게 펼쳐진 전경을 가진 건물이다. 남수 선생은 이곳에서 시냇물을 벗삼아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겸와재는 많은 인재를 배출해 일명 월매서당이라 불린다. 안내문에는 이곳을 마을 ‘입구’라 적고 있다. 월매마을은 아주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다. 홀로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겸와재는 선생에게 소박한 열락의 별서였고,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널리 자라게 하는 학원(學園)이었다. #4. 월매계곡의 매계정과 월산재 골짜기의 끝은 월매마을이다. 마을 경로당 뒤에 매계(梅溪) 남지훈(南之薰)의 덕을 기려 세운 매계정(梅溪亭)이 있다. 매계공은 운강공의 현손이자 유행(儒行) 남민주(南旻柱)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특히 인륜도덕을 중시해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늘 인덕의 함양을 강조했다 한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남지훈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를 하는 사람(實學人)’이라 칭송했다. 매계정은 200여 년 전에 처음 세워진 건물로 그간 많이 훼손되어 2000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중건했다 한다. 정면 3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고 전면은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다. 지붕은 고기와형 강판지붕을 올렸다. 중건 당시 후손들은 용도에 맞게 규모를 정하고 편리를 도모하되 야박하지도 않고 사치스럽지도 않도록 조심했다 하는데, 과연 실학인의 후손답다. 마을 끝 계류 가에는 의성김씨 재사인 월산재(月山齋)가 있다. 선조 초에 현서면의 도동에서 이곳으로 이거해 온 월계(月溪)공과 공의 아들 휘(諱) 정(玎)을 모신 재사다. 월계공의 휘(諱)는 몽기(夢麒), 자(字)는 중상(仲祥)으로 월매리의 자연 속에서 책 읽는 일에만 뜻을 두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갔다고 한다. 개일, 월매의 긴 골짜기에 먼저 가장 깊이 자리했던 분이 월계공인 셈이다. 공의 아들은 청산(靑山)현감 겸 청주진영의 병마절도도위(兵馬節度都尉)를 지냈다. 월산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에 촘촘한 격자무늬 미서기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안쪽은 3칸 방과 긴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짐작된다. 월계공 부자의 묘소는 모두 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월산이라 편액한 것은 공의 뜻이었다 한다. 반월의 지형에 매화 형상의 능지가 있어 월매라지만, 매계정과 월산재를 더해도 월매다. 매계정과 월산재는 같은 방향 같은 곳을 본다. 마치 삿갓을 펼친 듯 묘한 봉우리, 화룡산 천제봉이다. 그 뒤로 면봉산 줄기와 보현산 줄기가 겹겹이다. 골짜기의 입구는 넓고 그 끝은 높다. 천의 시작은 높고 그 끝은 넓다. 그 속에 몸 낮춘 사람들의 높은 집들이 있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청송군 현동면 개일리에 자리한 오체정 전경. 오체정은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증손인 성재공이 아들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작은 정자로, 소나무가 제 멋을 드러내며 여유롭게 숲을 이룬 풍경이 장관이다.낙금당은 낙금(樂琴) 남성로(南星老)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880년 건립한 사당이다. 후원에는 준공 당시 기념으로 심은 대추나무가 자라고 있다.겸와재는 운강공의 차남인 남수(南遂) 선생이 시냇물을 벗 삼아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많은 인재를 배출해 월매서당이라 불린다.청송군 현동면 월매리 매계정은 매계(梅溪) 남지훈(南之薰)의 덕을 기려 세운 정자다.월산재는 의성김씨 재사로, 월계(月溪)공과 공의 아들 휘(諱) 정(玎)을 모시고 있다.
2017.08.23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9> 다함이 없는 강물처럼 - 청송 현동면 추모정, 동암정, 경모정, 일송정
청송군 현동면 소재지인 도평리 하늘에는 늘씬한 다리의 수로가 근사하게 걸려있다. 물은 흐를까, 물은 어디에서 어디로 갈까 알지도 못하면서, 어쩐지 수로를 볼 때마다 함박 웃게 된다. 현동면에는 길안천의 지류인 병보천이 남북으로 흐르는데 도평리 북쪽의 천변에 면에서 가장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어쩌면 들을 살리는 그곳 병보천으로부터 물은 수로를 타고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건지도 모른다. 옛날,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 선생은 ‘강물이 다하면 자손이 없어지리라’ 하셨다. ‘강물은 결코 다함이 없다’는 뜻인가 싶다가도, 21세기를 사는 마음으로는 보존(保存)과 보전(保傳)의 의미를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생육신 어계 조려선생의 후손 신당 조수도와 그의 두 형제들 임란 때 나라지키고 가문 보전병보천변에 그 뜻 새긴 추모정조수도의 동생 순도의 11세손일송 조규명과 그의 아들 후송1835년·1907년 의병항쟁 동참산 중턱엔 일송이 지냈던 정자 현동에 학교 세우고, 또 기부…의로운 뜻 흐르고 또 흐르는 듯 #1. 지켜 보전한 이를 기리는 집, 추모정도평리의 북쪽은 인지리(印支里)다. 300여 년 전 함안조씨(咸安趙氏) 신당(新堂) 조수도(趙守道)가 이주해 개척한 마을이다. 신당은 생육신 어계 조려의 현손인 망운(望雲) 조지(趙址)의 장자로 청송 안덕에서 이곳으로 갈라져 나와 처음에는 지거동(支居洞)이라 했다. 이후 천변에 도장 모양의 바위가 있어 도장 인(印) 자와 원래 이름의 지(支) 자를 합해 인지동이 되었다. 신당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인지리의 가장 위쪽인 손달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수령 300년 된 느티나무가 정정하게 품고 있다. 신당의 자는 경직(景直)으로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총명하며 효성이 지극했다. 스승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는 ‘(신당) 조수도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여 이미 학문을 성취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신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인 조형도(趙亨道)와 조동도(趙東道)를 곽재우 장군 휘하의 의병으로 보내고 노부를 모시고 가문을 지켰다. 또 함안으로 가 집안 사람들을 피란시켜 화를 면하게 했다고 한다. 시대의 운명 때문인지 장자의 무게 때문인지 이후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근래에 깔끔하게 세운 손달 경로당과 쉼터가 있는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곧 길 아래로 천변의 경사지에 자리한 정자의 지붕이 보인다. 신당을 기려 세운 추모정(追慕亭)이다. 수목의 청량한 그늘에 싸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등불처럼 환한 배롱나무 꽃이 협문을 안내하고 곁에는 1999년에 중건된 기념비가 높직이 자리한다. 유려하고 착하게 굽이진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훤칠하게 선 추모정이 보인다. 전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앞쪽 1.5칸은 회랑과 같은 마루에 계자난간을 둘렀고 가운데 두 칸은 미서기문을 달았다. 공포조각 위 닭 형상의 보머리 장식이 특이하다. 마루에 오르면 마을을 향해 오르는 길과 유유히 흐르는 물이 보인다. 마을 앞 쉼터에 모여 앉은 노인들의 음성이 오순도순 들려온다. 문득, 신당이 곁에 앉아 이 소리들을 함께 듣는 듯하다. #2. 욕심 없이 제 할 바를 다한 집, 동암정 손달마을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인지리 부곡마을이다. 동리에서 조금 떨어진 밭 사이에 조금은 퇴락한 3칸 정자 동암정(東庵亭)이 고적하게 자리한다. 남쪽에서부터 달려온 보현산 줄기가 정자의 배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눈앞에는 현동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병보천은 저 너른 평야의 가운데를 낮게 흐른다. 편액의 동암(東庵)은 함안조씨 휘(諱) 시번(時)의 호다. 동암은 망운(望雲) 조지(趙址)의 증손으로 일찍 문사를 성취하고 효성과 우애가 특히 깊었다고 한다. 또한 농사 짓고 과원 살피는 일을 한가로운 사업으로 여기고 진실로 자연을 즐기는 일을 천명으로 삼은, 숨어 살아도 근심 없는 군자였다고 전한다. 정자는 동암이 평소 노닐던 자리에 지었다. 정면 3칸에 측면은 2칸의 소박한 건물로 중당에서는 강학하고 양측 방에서는 벗들과 마주했다. 늘그막에 동암은 지팡이 짚고 이곳에 올라 오랜 지기들과 두어 밤 머물며 고기 잡고 술 마시곤 했다 한다. 사람 좋은 주름진 얼굴의 그를 상상하게 만드는 정자다. 옆 사과밭에서 일하던 노인이 싱긋 웃으신다. 그 미소 속에 동암이 겹쳐진다. #3. 먼 곳을 바라보는 집, 경모정 동암정에서 들판과 천을 훌쩍 뛰어넘으면 창양리(昌陽里)다. 현동면에서 제일 먼저 햇빛이 비추는 곳이라서 창양이다. 마을 깊숙한 곳에 원창마을이 있다. 대문이 보이지 않고, 집집마다 과일나무와 꽃나무가 정성이어서 골목길 걷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마을이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 경로당과 모정과 경모정(敬慕亭)이 나란히 자리한다. 경모정은 망운 조지의 증손인 조시구(趙時玖)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현동면의 주사(主事)였던 안겸두(安兼斗)가 이곳에서 야학(夜學)을 열었다고 한다. 경모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열고 양쪽에 방을 두었는데 오른쪽 방을 앞으로 반 칸 정도 내어 더 크게 지었다. 그래서 양쪽 방의 정면 툇마루 크기가 다르고 기둥도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좌우 측면에는 쪽마루가 있다. 보통 쪽마루는 작은 동바리 기둥으로 지지되어 건물에 부착된 독립적인 성격을 보이는데, 경모정의 쪽마루는 굵은 바깥 기둥과 방 사이에 놓여 툇마루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쪽마루와 크기가 다른 방으로 인해 무려 18개의 기둥이 경모정을 구성하고 있다. 기둥이 많다 보니 기둥과 보가 만나는 곳을 보강해주는 보아지도 다양하게 많아서 오밀조밀하고 다채롭다. 경모정은 높은 기단 위에 올라서서 먼 곳을 바라본다. 후진을 양성하는 일 또한 먼 내일을 바라보는 일일 게다. 경모정과 동암정은 서로 마주 본다. 망운의 두 증손은 멀찍이서 든든했을 것 같다. 두 물길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도 그 원류는 하나이므로…. #4. 따르고 따르는 집, 일송정 원창마을의 남쪽은 신창마을이다. 한길 가 거대한 능수버들이 과객을 매혹하고 일제강점기에 후송(後松) 조용정(趙鏞正)이 지었다는 후송당(後松堂)의 긴 담장이 발길을 잡아끄는 바로 그 마을이다. 입구에 서면 왼쪽 숲속에 효자각이 보이고 후송당 뒤편의 낮은 산중턱에 한 정자의 자태가 언뜻 보인다. 모두 일송(逸松) 조규명(趙圭明)을 기리는 것들이다. 일송은 망운 조지의 셋째 아들인 남포(南浦) 조순도(趙純道)의 11세손으로 후송 조용정의 아버지다. 그는 1801년 인심 좋기로 소문났던 조성욱(趙性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마을 노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전 생애를 관통하는 선생의 효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다 할 수가 없다. 산 중턱에 숨은 듯이 일송정(逸松亭)이 자리하고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원시림처럼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는 미혹한 길이다. 10여m의 길을 홀린 듯 오르면 동그마한 햇살이 눈부시게 열리고 하늘을 향해 잎을 세운 측백나무가 파수꾼처럼 길을 막는다. 측백나무를 빙그르 돌아서서야 한 뼘 양지 속에 고요히 앉은 일송정과 마주한다. 일송정은 기역 자 툇마루를 앞에 두고 2칸 장방, 중방, 1칸 장방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누각이다. 툇마루 아래에는 짧고 낮은 담장이 있다. 담장은 정자의 내외를 선언하고, 걸음을 이끌고, 가까운 시선을 차단하고, 시선을 멀리로 보낸다.일송정은 아들 후송이 아버지 일송을 위해 지은 정자다. 일송은 1835년 함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따라 돌아와 일생 독서하며 일송정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후송 역시 정미년(丁未: 1907년)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에 참여해 의병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후송은 현동에 학교를 세웠고 그의 손자는 부동산 전부를 학교에 기부했다. 일송(逸松)이란, 달아나 숨었다는 슬픈 자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생의 뒤를 따른 후손들 모두가 후송(後松)이다. 떠나는 마을 입구에서 홀연 조용각(趙鏞恪)이라는 분의 송덕 불망비를 발견한다. 그는 1994년 주민들과 힘을 합해 고향 창양리에 길을 닦았다고 적혀 있다. 보존(保存)하고 보전(保傳)된 강물은 결코 다함이 없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공동기획:청송군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청송군 현동면 인지리에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신당(新堂) 조수도(趙守道)를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정이 자리하고 있다. 병보천변 경사지에 자리해 마을길과 물길을 바라볼 수 있다.일송정은 조선 말기 의병항쟁에 나선 일송 조규명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정자다.경모정은 망운(望雲) 조지(趙址)의 증손인 조시구(趙時玖)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야학(夜學)이 열리기도 했다.동암정은 망운 조지의 증손인 동암공이 평소 노닐던 자리에 지은 정자다.
2017.08.16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8> 근원을 이어가는 집 - 청송 부남면의 익야정과 모의재, 그리고 양계정과 경암재
심장에 한 가지 확고한 뜻을 지녔던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잘 지켜나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역성혁명을 인정할 수 없었던 악은 심원부(岳隱 沈元符)와 계유정난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이 그러했다. 그 뜻을 근원으로 삼은 후손들은, 그들의 근원을 가장 잘 이어나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터를 잡았을 것이다. 청송의 남쪽 부남면에 그들의 마을이 있다.#1. 날개 계곡의 익야정과 모의재 청송 부남면의 북쪽 용전천의 서쪽에 나실마을이 있다. 540m 정도의 낮은 능선으로 둘러싸인 사발처럼 오목한 분지다. 나실이란 ‘익곡(翼谷)’, 즉 ‘날개모양의 골짜기’를 뜻한다. 옛 사람들은 ‘나아실’이라고 길게 활공하듯 불렀다. 마을을 둘러싼 능선들이 그 땅을 연모하여 겨울에도 바람이 잠자는 따스하고 뽀송한 곳이라 한다. 마을 초입의 시무나무 숲을 지나 깊은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려온 실개천이 용전천과 합류하는 곳에 마을 입구가 있다. 용이 꿈틀대는 듯한 동북 봉우리의 기슭과 멀리 매봉이 날아드는 동남 언덕의 기슭이 근접해 스스로 이룬 동문(洞門)이다. 문은 마을을 비호하는 거대한 느티나무들로 인해 짙고 서늘한 그늘에 싸여있다. 나무들에게 ‘잠시 다녀갑니다’ 하고 인사를 올려야 할 것 같은 기운이 감돈다. 실개천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곧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서있는 정자를 만나게 된다. 동리의 문을 지켜보며 남동쪽을 향해 오뚝하게 서있는 정자, 익야정(翼也亭)이다. 역성혁명 반대 심원부 집안부남면 날개모양 골짜기 나실마을심순 기리는 문인들이 지은 익야정팔작지붕이 날아가 하늘에 닿을 듯임란 때 전사한 심공 모신 모의재세월 흘러도 그 뜻 오롯이 전해져생육신 이맹전 집안이맹전 9세손 이태신 추모 양계정진흙에서 피어난다는 연꽃 새겨져산기슭 양지바른 곳이라는 양숙리조상 뜻 기리는 벽진이씨 모여살아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로 팔작지붕이 처연한 듯 혹은 날아갈 듯 멋스럽다. 양쪽에 방이 있고 가운데와 전면은 마루로 열어 계자 난간을 둘렀다. 정면의 아래 기둥은 팔각이고 위 기둥은 둥글다. 공포엔 구름문양이 새겨져 있고 마루엔 고아하게 곡진 도리가 걸쳐져 있다. 작은 대문 앞에 ‘2003년 중건 모금 비석’이 있는데 ‘익야정은 심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익야정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 심순(沈淳)을 추모해 1760년 후손과 문도들의 후예가 지은 정자다. 심순은 악은 심원부의 차남인 만우 심효연의 후손으로 자는 군후, 호는 송헌(松軒)이다. 그는 문학과 필법이 뛰어났고 평생 나실에 숨어 살면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전한다. 익야정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문인들의 계원은 수백 명에 달했으며 그들은 심순의 글을 숭상하고 섬김과 나눔의 얼을 귀히 여겼다고 한다. 익야정 이름과 기문은 응천 박규진이 지었다. 기문에는 송나라 철학자 장재(張載)의 시 ‘서명(西銘)’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아마 ‘천명을 보존해 가는 것은 하늘의 자식으로 하늘의 도리를 다하는 것(子時保之子之翼也)’이라는 구절이 아닐까 한다. 또한 골짜기의 이름과도 부합하니 ‘익야’는 하늘에 닿고 땅을 아우른다.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 가에 화사한 꽃 화분들이 놓여 있다. 저절로 미소짓게 하는 소소한 정겨움이다. 잠시 후 광장처럼 넓은 터가 열린다. 하늘만 담긴 샘처럼 아늑하고 정결한 마을의 중심부다. 터의 가장자리에 마을 ‘모정’이 자리하고 그 뒤에 약간 높직한 담으로 감춰진 모의재(募義齋)가 있다. 녹슨 철 대문 앞 양쪽에 화단이 깔끔한데, 대문 안 모의재는 낡고 조금은 방치된 듯한 모습이다. 모의재는 악은 심원부의 7세손인 모의 심공을 모신 재실이다. 자는 정연(淨然), 휘는 정(汀)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문경 마포(麻浦)에서 각 군의 의병과 합세하여 신립(申砬) 장군 진에 나아가 수많은 적을 섬멸했던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는데 그때 나이 25세였다.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의복과 신발로 장례를 지냈으며 부인 아산(牙山) 장씨(蔣氏)도 따라 순절했다고 전한다. 모의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전면은 장마루, 후면은 방이다. 팔작지붕은 고기와형 강판으로 보수되어 있다. 중건 당시에는 주사도 갖추고 재실과 서당의 기능을 함께했다고 한다. 건물은 쇠락했으나 강직한 모의재 현판 아래서 바라보는 나실곡은 아름답고 안온하다. 남쪽에는 절재의 낮은 산봉이 재실을 향하여 머리를 읍하고 서북 장등은 굽이굽이 돌아 재실을 옹호한다. 심공은 전장에 나아갈 적에 ‘내가 충훈의 집 후예로서 비록 벼슬을 못한 선비의 신분이나 마땅히 힘을 다하여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리라’ 했다. 악은의 후손인 심공의 의는 대의다. 의란, 모든 경계의 피안에 있는 커다란 뜻이다. 세월이 흘러 집은 퇴락하였으나 그 뜻을 근본으로 삼은 이는 나실곡의 심장부에 여전히 자리한다. #2. 양지바른 땅의 양계정과 경암재 나실마을에서 남쪽으로 정결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몇몇의 마을을 지나 부남면 양숙리(陽宿里)에 닿는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양숙리다. 조용한 마을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산(葛山) 기슭 중봉 아래 오수처럼 앉은 정자 양계정(陽溪亭)이 있다. 주변으로 논밭이 꽤 넓게 펼쳐진 양지바른 곳이다.양계정은 생육신 경은 이맹전의 9세손인 양계공(陽溪公) 이태신(李泰新)을 추모해 지은 정자다. 양계공의 아버지 이여해(李如海)는 1596년에 영천에서 출생해 조부인 대암 이희백에게 수학하였는데 숨어 살면서도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여 사우들이 받들어 중히 여긴 인물이었다. 이여해는 만년에 가솔들을 이끌고 청송 양숙으로 이거했는데 별세하기 전 넷째아들인 양계공 태신에게 종가의 보전을 명했다. 양계공은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효자였고, 비범했으며, 글씨는 용이 날아가는 듯했다고 전해진다.맞배지붕을 올린 한 칸 대문은 고방(庫房)이 있어 약간 넓다. 대문 막새에 국화가 피었고 봉황이 난다. 양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1964년(단기 4297년)에 상량했다. 모든 기둥이 둥글고 공포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누마루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다리 머리에도 연꽃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후손들은 진흙 속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연꽃이 양계공과 같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양숙리의 자연 부락인 새말에는 양계공 이태신과 부친 이여해를 모신 경암재(景巖齋)가 있다. 양숙마을에서 용전천을 건너 맞은편, 자그마한 마을의 가장 안쪽에 낮은 산을 등지고 마을을 내다보는 자리다. 문 앞은 묵정밭으로 보이는데 수풀이 무성하다. 풀을 헤치고 협문을 들어서면 콘크리트 벽돌로 쌓아올린 담장이 경암재에 바짝 가까워 경암재가 한 뼘 거리다. 재실은 정면 4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콘크리트 기단 위에 서있다. 둥근 수막새에는 무궁화가, 망새와 귀면기와에는 큰 대(大)자가 새겨져 있다. 기단 위에 서면, 담장 너머로 마을의 논밭과 먼 산이 보인다. 마당은 여유가 없지만 경암재의 시선은 넓고 멀다.경암재는 후손들이 의논하고 힘을 합해 종중의 소나무를 팔아 세웠다 한다. 경암재라 편액한 것은 지명을 따라서라는데, 새말과 경암의 관계는 알지 못한다. 다만 빛바위라는 경암의 뜻이 참으로 맑고 곧다. 경은 이맹전은 영천으로 들어간 뒤 빗장을 걸고 평생 나오지 않았다는데, 이후 직계 후손들은 중앙 정계에 나가지 않고 선비의 명맥을 이었다 한다. 종가의 보전을 명하고, 종가의 보전을 책임으로 삼은 이여해와 이태신 부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지금도 깊으나 환한 양숙리에는 그들의 후손인 벽진이씨(碧珍李氏)가 모여 산다. 땅은 조상들의 뜻으로 가득 차 있고, 후손들로 인해 언제나 부활하고, 지켜지고, 이어진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청송군청송군 부남면 대전리에 자리한 익야정은 공조참의 심순을 추모하기 위해 1760년 지은 정자다.모의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했던 모의 심공을 모신 재실이다. 심공은 25세 때 탄금대 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다.청송군 부남면 양숙리에 자리한 양계정은 생육신 이맹전의 후손인 양계공 이태신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양숙리의 자연 부락인 새말에 양계공 이태신과 부친 이여해를 모신 경암재가 자리하고 있다.
2017.08.09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7> 옛 이름의 숨은 뜻 - 청송 부남면 화수재, 만우정, 낙은재
가끔 옛 이름들에 화들짝 놀라곤 한다. 어떤 것은 솔직하고 담백하다. 어떤 것에는 힘찬 포부와 넓은 이상이 담겨 있다. 또 어떤 것에서는 회한과 성찰을 엿본다. 모든 뜻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갸웃한 이름들은 너무 많고 숨은 속뜻은 너무 깊고 멀다. 그러나 눈과 입에 담긴 이름들은 때로 머리로 이해되고 때로는 가슴이 감응한다. 이름에 대한 이런 좌절과 난데없는 궁리는 부남면 대전리의 한 길가에서 불쑥 솟아났다. 한앞 입향조 정구선생을 모신 화수재일제시대·전쟁 상처딛고 우뚝 서 있어역성혁명 반대·낙향한 심원부의 차남때늦고 어리석다는 뜻의 만우정 지어흥해배씨 집성촌인 옥동 끝에 닿으면작은 땅에 숨어 즐거움 간직한 낙은재#1. ‘한앞’의 화수재 ‘한앞’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마을 입구에 서 있다. 그리고 마을 경로회관 앞에는 그 유래비가 있다. 설명에 의하면 ‘한’은 가장 크고 바른 첫 으뜸, 하나뿐인, 가득 찬, 참 좋은, 제대로란 뜻이고, ‘앞’은 얼굴이고, 바라보는 방향이고, 나아가 추구할 보람이자 체면이자 몫이며, 장래요, 희망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라 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한문자로는 마땅하게 새겨 쓸 수 없는데도 누가 언제부터인지 대전(大前)이라 쓰고 행정명칭으로 굳어 안타까운 마음에 그 유래를 밝힌다’고 했다. 돌에 새겨진 자부심과 분통이 너무나 절절해 또박또박 필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한앞은 지금 부남면소재지가 있는 대전리가 시작된 마을이다. 1589년경 경주정씨 정구(鄭球) 선생이 ‘용전천에 보를 막고 불무산 기슭을 개간해 마을과 앞들을 개척’하고 한앞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밭들과 집들에 둘러싸인 기개당당한 한옥이 우뚝한데 바로 한앞의 입향조 정구 선생을 모신 화수재(花樹齋)다. 화수재 솟을대문 앞에 추모비와 ‘한앞 종실 연혁’을 새긴 비가 있다. 정구 선생은 조선개국일등공신 양경공의 7세손인 고령현감 휘 길(佶)의 현손으로 통정대부 판중추부사를 지낸 분이라 한다. 처음 재실은 1745년에 세워져 서원으로 활용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일본 경찰의 주재소로 쓰였고,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점거했다. 마을 사람들은 1960년부터 퇴락한 재실을 보수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6년 뒤 현재의 건물을 지었다. 건축 당시 ‘안목 높은 도목수가 애써 고른 들보를 홍원리 홍계골에서 일족 150명이 밧줄로 끌어 밤새도록 운반해 와 원근에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화수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은 차분히 내려앉았고 기둥은 모두 둥글고 곧아 염검한 자세다. 기와의 내림새마다 무궁화꽃이 영원처럼 피었고 넓은 마당의 풀은 그제 정리한 모양이다. 화수(花樹)란 무엇일까. 그 뜻은 꽃과 나무인데, 화수재 앞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여물고 풍성한 열매다. #2. ‘감연리’의 만우정한앞의 북서쪽에 감연리가 있다. 옛날 마을 입구 쌍바위 밑에 맑은 샘이 있었는데 물맛이 달고 특별히 아이들의 병에 좋아 ‘단물’이라 부른 것이 지금의 감연(甘淵)이다. 마을은 완만하고 긴 골짜기다. 골이 길다 보니 마을의 입구는 ‘아랫마’, 마을의 끝은 ‘끝마’라 부른다. 순정한 이름이다. 아랫마와 끝마 사이 언덕진 동네는 ‘두들마’라 한다. 두들마의 오붓하면서도 은벽한 자리에 정자 하나가 숨은 듯 자리한다. 만우정(晩愚亭)이다.생각지 않게 너른 땅이다. 공들여 3단으로 다듬은 터에는 가장 아래에 연혁비가 서있고, 그 위에 대문과 담장이 있고, 가장 위에 정자가 서있다. 풀이 수북이 자란 좁은 물길이 터를 휘감고 사과나무 밭이 베일처럼 눈 아래에 펼쳐져 정자는 그 너머 맞은편의 푸른 산과 대면한다. 키 높은 현대의 지붕 몇 개가 보이지 않았다면 심산의 독야(獨也)처럼 고적했을 것이다. 만우 심효연(沈孝淵)은 고려 말(1391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등을 돌리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악은공(岳隱公) 심원부(沈元符)의 차남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만우공 심효연은 1448년(연혁비에는 1488년으로 새겨져 있다)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청천군의 봉을 받고 고향인 덕천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선생은 고향마을에 휴양과 강학을 위한 정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최초의 만우정이다. 이후 만우공의 5세손인 사천현감 심호가 임진왜란 이후 낙향해 덕천에서 감연으로 터전을 옮겼고, 후손들이 번창해 1804년 지금의 자리로 만우정을 옮겨 세웠다. 현재의 만우정은 1997년 문중에서 다시 중수한 것이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두 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다.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설치했고, 측면과 뒷면에는 쪽마루를 둘렀다. 대청에는 여러 시판들과 정갈한 글씨체로 새겨진 ‘만우정기’가 걸려 있다. 지붕에는 무궁화꽃이 피었고 봉황이 난다. 대문과 짧은 담장은 현대의 것으로 보인다. 막지 않았으나 막은 담장이고, 닫았으나 열린 문이니, 그것은 용(用)이라기보다는 질서나 규범이라 해야 할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정으로써 동을 이끄는 선이 회화적인 변화와 균형을 느끼게 한다. 만우(晩愚)란 때늦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만우공이 왜 관직을 버렸는지, 왜 호를 만우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라도 망하고 임금도 잃었으니 너희들은 조상이 묻혀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시조선산(始祖先山)을 지키며 살아가라’던 악은공의 유훈을 되짚어 어렴풋한 짐작만을 할 뿐이다. 고향에 돌아온 만우공은 오직 음덕을 쌓고 후진을 양성했다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후손이 번연하여 수백호의 집성촌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3. ‘옥동’의 낙은재 감연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오르면 부남면과 부동면의 경계부에 옥동이 있다. 귀한 구슬 옥(玉)자의 옥동은 감연리에 속한 작은 부락으로 나지막한 산줄기가 바짝 둘러선 작은 골에 실 같은 개천이 흐르는 조막만 한 땅이다. 그러나 마을 앞으로 용전천이 가깝고 하늘 맑은 날이면 먼 주왕산을 마을 앞까지 끌어당기는 활연함이 있다. 그래서인지 옥동은 이름이라기보다 하나의 집약된 힘처럼 느껴진다. 옥동은 흥해배씨의 집성촌이다. 고려 말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내다가 망국 후 모든 벼슬을 거부하고 안동에 은거한 배상지(裵尙志)라는 분이 있다. 공은 집 주변에 백죽(栢竹, 소나무와 대나무)을 심고 백죽당이라 자호했다 한다. 공의 장남은 지평공(持平公) 권(權)으로 그의 후손인 유(維)가 안동에서 청송 옥동으로 터를 옮겼고 이후 자손들이 옥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한다. 옥동길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다닥다닥 붙은 몇몇 집들을 지나 금세 마을의 끝에 닿는다. 거기 골짜기가 열리고 산줄기가 내려앉은 삼각형의 땅에 작은 정자 낙은재(樂隱齋)가 있다. 조선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낙은 배학순(裵舜) 선생이 1897년에 창건한 정자다. 현판은 ‘낙은정’으로 대원군이 하사한 친필 재호(齋號)를 목판 한 것이라 한다. 대문은 창화문(唱和門)이다. 부르고 답한다는 굵고 근엄한 획 속에 다정함이 스며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검박한 규모다. 가운데 대청을 열고 양쪽에 작은 방을 두었으며 방 앞에는 반 칸보다 좁은 툇마루가 대청과 연결되어 있다. 대청마루 난간의 가운데가 트여 있는데 툇마루의 옆에도 벽을 세우고 문을 달아 놓았다. 정면으로 성큼 오를 수도 있지만 일부러 옆으로 돌아 몸을 작게 만들고 고개 숙여 오르게 한다. 왼쪽 방 옆에는 한 뼘 쪽마루가 놓여 있다. 마루에 앉아 산을 바라보면 몇 그루 대나무가 쓰윽 몸을 기울여 시선을 맞춘다. 방 뒤쪽에는 서책의 너비만 한 벽장이 달려 있다. 무릎을 굽히고 모로 눕더라도 책은 바르게 놓여야 한다는 마음일까. 낙은재는 골짜기의 작은 땅에 맞춤한 듯이 작다. 그래서 낙은재는 자신의 만유 속에서 결코 작지 않다.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이 지은 기문을 보면 낙은(樂隱)이란 산을 베개하고 문을 닫고 숨는 즐거움이라 했다. 기문의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고종황제 34년(1897)’이란 시대를 본다. 어쩌면 그 시대의 낙은이란 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맞춤한 듯 꼭 맞아 꽁꽁 마음을 숨긴 탈.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청송군 부남면 대전리에 자리한 화수재. 한앞마을의 입향조 정구 선생을 모신 재실이며 한때 서원으로 활용됐다.만우정은 만우공 심효연이란 인물이 휴양과 강학을 위해 세운 정자로,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에 자리하고 있다.낙은재는 조선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낙은 배학순 선생이 1897년에 창건한 정자다. 정자가 자리한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옥동마을 일원은 흥해배씨 집성촌이다.낙은재 현판. 대원군이 하사한 친필 재호를 목판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2017.08.02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6> 골짜기의 밖에서 - 갈전당과 영모정 그리고 삼은정, 운암정
주왕산. 저 산에 하 많은 골짜기들이 있다. 꿈과 같은 설렘이 밀려오는 골짜기들. 그러나 한없이 평온하면서도 청동처럼 두렵고, 위안으로 넘치지만 동경 때문에 도달하기 어려운, 은하수와 같은 골짜기들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그 골짜기가 아닌 그 골짜기 입구에 집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1. 이해의 주인을 영모하다, 갈전당과 영모정 주왕산의 남쪽 자락에 절골과 주산골이 있다. 두 골짜기는 스윽 산세를 타고 만나 주산천으로 하나 된다. 생각만으로도 숨 못 쉴 듯 황홀한 두 골짜기가 합심해 주산천을 세상으로 내보냈다.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의 이전네거리는 절골과 주산골을 떠나온 주산천이 문득 한번 뒤돌아보는 듯한 장소다. 집 나선 아이가 이윽고 한번 뒤돌아보는 자리, 멀리 대문 앞에서 여전히 손을 흔드는 실루엣을 바라보는 자리, 동구와 같은 자리. 이전네거리는 그런 장소다. 임란 때 청송 입향한 안동임씨 갈전공척박한 땅에 배나무 심었다고 전해와 주산천 자락에 그를 기리는 두 정자주왕골 주방천변 벼랑 위의 삼은정山水에 숨었으나 가슴활짝 편 모습운암 후손이 하의리에 세운 운암정구름을 벗하여 바위에 눕는다는 뜻선계와 속세의 경계에 놓여있는 듯그런 곳에 우뚝 멈춰 선 두 채의 정자가 있다. 갈전당(葛田堂)과 영모정(永慕亭)이다. 갈전당은 안동임씨 청송 입향조 갈전공의 재실이다. 한 칸 넓은 부엌과 두 칸의 온돌방을 가진 건물로 단순하고 정갈한 매무새다. 상량에 2003년 먹색이 또렷하니 그리 오래지 않은 집이다. 영모정은 갈전당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갈전공을 추모해 지은 정자다. 정면 세칸 둥근 기둥마다 주련을 걸고 팔작지붕을 균형 있게 얹은 모습이다. 좀 더 골짜기 가까이, 좀 더 둔덕진 터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작은 문을 세워 보다 높은 위계를 드러내고 있다. 갈전당 앞 길가에 두 단 석축을 높여 세운 ‘가선대부 갈전 임공 유허비’가 있다. 비의 뒷면에 빼곡히 새겨진 글이 갈전공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공의 이름은 동추(同樞), 휘는 동(東), 자는 덕망(悳望)으로 갈전(葛田)은 호다. 공은 임진란 때 함안조씨 사정공(寺正公) 조수도(趙守道)와 갈전(葛田)으로 피란했다 한다. 갈전은 산노루떼 넘나들던 왕거암 중턱으로 여겨진다. 공은 그곳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배나무를 심었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이전리(梨田里)의 연원이다. 임란 후 갈전공은 배밭의 응달진 갈대밭(梨海陰地蘆田)으로 선산(先山)을 옮기고 그 묘 아래에 영영 머물렀다. 그 유허에 자손들이 세운 것이 영모정이다.비문의 마지막 구절이 인상 깊다. ‘청송백학(靑松白鶴) 이 고장에 팔경(八景)을 갖추어라. 그 주인은 갈전옹 유행(儒行)이 높았다오. 늙은 나무 푸새 잎에 끼친 향내 남아 있고 후손이 세거하여 칡처럼 뻗었으니 이곳에 빗돌 세워 천추(千秋)에 전하리라.’ 임공의 호 갈전의 뜻은 처음 칡밭을 일구던 때로부터 천추에까지 닿아 있다. 그런데 저 팔경은 또 무엇인가. 그 해답은 주산천을 바라보는 영모정 대청에 걸려 있다. ‘이해(梨海)팔경’이라 한다. 배꽃의 바다에 펼쳐져 있는 여덟 경치다. 1경은 운수동의 봄꽃(雲水春花)으로 운수동은 절골의 옛 이름이다. 2경은 황암의 가을풍경(皇岩秋葉), 3경은 용담의 맑은 폭포(龍潭淸瀑), 4경은 마암의 낙조(馬岩落照), 5경은 무포산의 달(霧抱山月), 6경은 옥녀봉의 구름(玉女峯雲), 7경은 밤나무 밭의 아침 볕(栗田朝陽), 8경은 산봉에 저무는 노을(蒜峯晩霞)이다. 후손들은 ‘정자에 올라 밭과 구름을 바라보고 창을 열고 달을 맞이하여 옛날 오르내리시던 자취를 찾아 우러러 본다’고 했다. 휘 돌아보면 갈전옹의 이해는 은하수와 같고, 여전히 우러러보는 저기에 있다. #2. 삼의에 숨다, 삼은정 주왕산 주왕골, 그 떨리는 계곡에서부터 주방천은 심장의 박동처럼 쏟아져 흐른다. 주왕산의 길목에는 펜션과 식당들이 즐비해서, 그 너머에 주방천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러 가겟집들을 유심히 살펴야 마침내 정자를 찾아낼 수 있고, 통나무집 펜션의 마당을 가로질러야 정자에 닿을 수 있다. 정자는 주방천변의 벼랑 위에서 천을 향해 앉아 있다. 마당과 정자는 콘크리트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담장은 순박한 정성으로 키운 온갖 야생화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열려있는 녹슨 철문 속으로 정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삼은정(三隱亭)이다. 주왕골은 상의리에 속한다. 옛 이름은 삼의리(三宜里). 삼위리(三危里)가 음변한 것으로 주왕산 주왕전설 속 마장군이 세 번의 위기를 겪었다는 데에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 삼의가 상삼의와 하삼의로 나뉘었고 다시 ‘삼’이 탈락한 것이 지금의 상의, 하의다. 옛날 이곳에 살던 한 사람은 스스로 호를 삼은(三隱)이라 했는데 대저 ‘삼의에 숨어 산다’는 뜻이다. 삼은공은 성품의 됨됨이가 높고 질박하고 행동은 빛이 나서 세속에 따르지 않았다 한다. 위엄 있고 깨끗했다고 기억되는 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이 지은 것이 삼은정이다. 아들은 땅을 팔고 재목을 구해 삼은공이 오르내리며 그 천석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땅에 정자를 지었다. 아래에 소가 둘러 있고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온 곳이었다. 삼은정은 많이 퇴락했다. 마루는 부서질 듯하고 두껍게 쌓인 기왓장들은 아우성처럼 흩어질 듯하다. 문득 무엇인가가 날갯짓한다. 저 위태로이 곧추선 망새기와 속에서 봉황인지, 삼족오인지 혹은 태극인지 모를 형상이 파득인다. 무엇이었든, 정자를 세운 이는 거기에 영원에의 기원을 담았을 것이다. 삶의 숨결은 사라지고 의미에 찬 형상은 사라져 가고 있다. 주방천을 가로지르는 양지교 가운데서 바라보면 멀리 천변의 벼랑 위에 선 삼은정의 옆모습이 보인다. 주왕산 자락의 병풍 같은 바위를 바라보고 있는 정자는 산수정원 속 하나의 아름다운 경물로 보인다. 산과 하늘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고 있는 후련한 모습이다. 상상해보면, 스스로 숨었으나 눈은 맑고 넓고 깊었으리라. 녹슨 철문 속 삼은정의 뒷모습을 되돌아본다. 가난하면서도 다정하다. #3. 구름을 벗하여 바위에 눕는다, 운암정 상의리 아래 하의리에는 동네의 가운데자리 우뚝 높은 석축 위에 운암정(雲亭)이 앉아 있다. 정자에 대한 기록은 주왕산에 대한 찬으로 시작된다. ‘맑은 기운이 가득히 서려 뾰족하게 우뚝 솟아 바다에까지 닿은 산이 세상에서 소금강이라 말하는 주왕산이다.’ 그러고 나서 마을과 정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신령스러운 선경이 펼쳐져 있어서 반드시 절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꿈틀꿈틀 한 가지의 산이 삼의골에 이르러 한 구역의 동리가 열렸는데 수풀이 으슥한 언덕에 운암정이 서있다.’대는 처음부터 높았던 모양이나 으슥한 수풀은 없다. 운암정은 환한 마을과 동구의 마을숲을 근경으로 가지고, 마을 앞들과 먼 산을 원경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처럼 평온하고 소박한 풍경은 지금 청송 땅에 흔하지만 운암정기가 전하는 마을의 옛 모습에는 주왕산 골짜기의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운암정 현판은 굳은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운암정은 파평윤씨 운암 윤공의 후손이 공의 묘소 근처에 세우고 조석으로 문안했던 정자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대청방이 있고 전면이 마루다. 대청의 양쪽은 온돌방인데 여닫을 수 있는 광창이 설치되어 있다. 얇고 여린 문종이는 모두 해어졌으나 문살 하나하나, 기둥 하나하나, 모두 곧고 탄탄하다. 공들여 장식한 익공에서 정자 지은 이의 마음이 엿보인다.운암 윤공은 어릴 때부터 효가 높고 비범해 주위 사람들이 듣고 놀랄 말들을 종종 하셨다 한다. 향시에 합격했으나 성시에 낙방했는데 포부를 펴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가슴 후련히 세상의 문을 닫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큰 스승들의 자취를 찾아 향배하고 떠돌며 세상을 개탄하고 깊이 근심했다고 한다. 운암은 공이 스스로 지은 호로 구름을 벗하여 바위에 눕는다는 뜻이다. 바위에 누워 구름을 바라보면, 구름 위에 누운 것 같다. 구름 위에서 바위에 누운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신선이 된 것 같다. 그러나 한편 큰 강의 편엽처럼 울렁거리고, 흔들리며 힘준 손끝은 차갑고 단단한 바위에 닿는다. 운암공은 그렇게 선계와 속세의 경계에 계셨던 게 아닐까. 운암정은 그렇게 있다. 선계와 속세의 경계에, 골짜기의 밖에.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청송군청송군 부동면 이전리에 자리한 영모정의 모습. 주산천 이전교 인근에 위치한 영모정은 안동임씨 청송 입향조 갈전공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가까이에서 본 영모정. 갈전공의 후손들은 ‘정자에 올라 밭과 구름을 바라보고 창을 열고 달을 맞이하여 옛날 오르내리시던 자취를 찾아 우러러 본다’고 했다.삼은정은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양지교 인근의 한 펜션 건물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펜션의 마당을 가로질러야 정자에 닿을 수 있다.청송군 부동면 하의리에 위치한 운암정. 운암정은 파평윤씨 운암 윤공의 후손이 공의 묘소 근처에 세우고 조석으로 문안했던 정자다.
2017.07.26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5> 마평에 깃들다 - 덕양재, 부강서당 그리고 쌍체정과 용간정
꽃밭등(花田嶝)을 타고 쓰윽 미끄러져 내려간다. 착지한 곳은 너르고 평평한 들. 용전천이 들의 남쪽을 온전히 적시며 흐르고 나지막한 산들이 편안한 호흡으로 감싸 안은 땅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20리를 달리면 주왕산이다. 주왕이 주왕산에 몸을 숨겼던 전설의 시대에 그를 잡으러 온 마사성은 이 들에 말을 매고 진격의 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들은 마뜰 또는 마평(馬坪)이라 불렸다. 지금 마평은 상평리(上坪里)와 지리(池里)로 나뉘어 있지만 모두 저 들에 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달성서씨 청송 입향조 모신 덕양재상평리 양지바른 들에 곧게 서있어 마평 四義士 서효원이 지은 부강서당 한때 병신년 의병 위패 보관하던 곳 형제간의 우애 깃들어 있는 쌍체정망동하지 않는 맑음 뜻하는 용간정나란히 마을 전체 내려다보고 있어 #1. 빛이 뿌리내린 집, 덕양재 꽃밭등에서 내려서면 곧장 닿는 자리다. 들에 둘러싸여 구석구석까지 빛이 드는 자리다. 마을과 들을 골고루 살필 수 있는 자리고, 들에서도 마을에서도 단번에 눈길 줄 수 있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 담담하면서도 온아한 집이 서있다.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자손들이 선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집, 덕양재(德陽齋)다. 덕양재는 달성서씨 청송 입향조인 서윤(徐尹)과 그의 손자 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의 손자 서봉(徐琫)을 모신 재실이다. 서윤은 중종 때 정5품 문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분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간신과 척신들을 등지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한다. 덕양(德陽)이란 빛의 덕, 은혜로운 양지를 뜻할진대, 이곳 서씨 자손들에게 덕양이란 곧 서윤이다. 답답하지 않은 높이의 흙돌담이 전체를 두르고 있다. 재실 본채와 대문채, 곳간채, 주사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본채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특이하거나 도드라진 면은 없지만 긴요한 것들이 소박하게 모인 구성이 간박하고 곧다. 대신 대문을 슬쩍 장식하는 가재모양(혹은 지네모양) 철물이나, 버티컬 블라인드 같은 곳간의 사롱창, 부엌의 자그마한 광창은 오래 바라보게 된다. 일상에서 흔하지 않으니 흥미롭고 귀하게 보이는 것이다.재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덕양재 현판이 걸려 있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앞쪽 전체에 툇마루를 깔았다. 정면 마루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을 썼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건물로 숭덕사(崇德祠) 현판이 걸려 있다. 지붕 박공면에 설치된 풍판이 과묵하고 듬직한 인상을 준다. 사당의 서쪽 곁에는 커다란 향나무가 푸른 가지를 펼쳐 외부도로를 살짝 가리고 있다.덕양재는 약 200년 전에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현재의 모습은 2005년에 보수한 것이다. 상당부분이 교체되었지만 기울어진 것은 세우고 시간을 견뎌낸 기둥이나 기와 등은 그대로 사용했다. 사당은 고종 때 서원 훼철령으로 사라진 것을 근래에 재건했다. 덕양재는 오래전 이 들에 뿌리를 내렸고 깊이 고정되어 지금 탄탄하게 서있다. #2. 감회의 공간, 부강서당덕양재에서 도라지밭 너머 상평 경로당이 보인다. 하얀 도라지꽃 몇 송이 피어난 들 앞에 ‘달성서씨 마평 사의사(四義士) 공적비’가 서있다. 구한말 청송의진에서 활약한 달성서씨 효원, 효격, 효달, 효신을 기리는 비다. 움직임 없이 웅성거리는 경로당을 지나쳐 옆 골목으로 들어선다. ‘국가유공자의 집’ 팻말이 달린 대문 안에서 강아지가 코를 내어놓고 맹렬히 짖기 시작한다. 움찔 몇 걸음 달아난 자리에서 부강서당(鳧江書堂)을 마주한다.부강서당은 조선 말기 유생이자 의병이었던 석간(石澗) 서효원(徐孝源)이 사림과 함께 지었다고 한다. 서효원은 마평 사의사 중 한 사람이다. 처음 서당이 세워진 곳은 지리로 원래 이름은 당약서당(堂約書堂)이었다. 1896년 병신창의 당시 청송의진 지휘부가 당약서당에서 하룻밤 유숙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당은 200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이름도 바뀌었다. 마뜰은 용전천 위에 떠있는 오리모양이라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용전천을 부강이라 부른다. 부강은 들과 천이 하나 된 이름이다. 지금 부강서당은 퇴계학의 정맥인 학봉 김성일을 계승한 이상정, 김종덕, 유치명을 배향하고 있다. 여러 기물들이 여기저기 부려져 있지만 건물은 깔끔해 보인다. 서당은 화강석으로 높인 단 위에 올라서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공간을 차분한 팔작지붕이 살짝 누르고 있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이고 양쪽은 온돌방이며 전면 반칸은 툇마루다. 배면에 벼락닫이 창 하나가 입술을 앙다물고 있고, 대청문 위에는 고아한 글씨체의 입춘방이 단정하게 붙어 있다. 몇 군데 홈이 파인 보가 있다. 다른 건물에 쓰였던 목재를 알뜰히 활용한 것일까. 서당의 지붕 위로 꽃밭등이 펼쳐져 있다. 병신년 7월에 저기 꽃밭등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 서당은 청송지역 의병 83위의 위패를 보관하고 있었다. 위패는 현재 꽃밭등 마루에 자리한 항일의병공원에 모셔져 있다. 서당은 어쩐지 우수에 젖은 듯한 표정이다. 저 표정에 사무친 시간이 정신적이고 시적인 영향력으로 가슴을 흔든다. #3. 그들이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 쌍체정과 용간정 꽃밭등에 정자 하나 올라 있다. 쌍체정(雙亭)이다. 쌍체정에서 동쪽 마을을 바라보면 거의 비슷한 눈높이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있다. 용간정(龍澗亭)이다. 데칼코마니 같은 두 정자는 상평리와 지리로 나뉘어 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같다. 쌍체정 창건기에 ‘꿈틀꿈틀 기가 성대한 모양으로 푸름이 쌓이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이곳이 꽃밭등’이 되었고 ‘앞은 큰들이 있어서 세상에서 맛뜰’이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간정기에는 산줄기가 뒤쪽을 감싸고 주왕산이 앞에 보이며 집들은 따스하고 들은 비옥한 이곳을 ‘일방의 낙토’라 했다. 이 모두가 쌍체정과 용간정이 함께 바라보는 그들의 세상이다. 옛날 마평에 은둔해 살던 우애 깊은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 큰 이불을 같이 덮고 베개를 같이 베고 벼루와 서판을 같이 쓰던 형제. 경치 좋은 곳에 정자 터를 정하고 낮과 저녁으로 휘파람 불던 형제. 선조 때 숭정대부판중추부사를 지낸 갈헌황공(葛軒黃公) 휘(諱) 우하(虞河)와 동생 규헌공(葵軒公) 주하(周河)가 그들이다. 어느 날 형제를 찾아온 청송부사 최광태는 형제의 초려에 쌍체헌(雙軒) 세 글자를 크게 써 주고 우애의 독실함을 시로 찬미했다 전한다. 그로부터 124년 후, 형제의 정자 터에 후손 영호(永浩)가 세운 정자가 쌍체정이다. ‘쌍체’란 ‘한 쌍의 산앵두나무’라는 뜻이다. 활짝 핀 산앵두나무 꽃은 형제의 우애를 뜻한다고 한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 규모인 쌍체정은 지금 지팡이 짚은 호호 노인이다. 정자의 모습은 절박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의초롭고 어여쁜 쌍체의 뜻이다. 용간정은 1985년 건축된 젊은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정자는 남북으로 긴 좁장한 언덕 위에 씩씩한 낯빛으로 앉아 있다. 그러나 정자에 다가가면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둥치의 느티나무가 엄청난 가지를 뻗어 정자를 감추고 있다. 언덕 아래 동쪽으로 나아가면 무성한 낙엽수와 소나무들의 숲속에 그의 옆 모습이 슬쩍 보인다. 언덕 아래 서쪽으로 나아가면 회화나무 사이의 그가 보인다. 언덕을 기듯 올라가면 그제야 그의 얼굴과 그가 바라보는 것을 보게 된다. 용간정은 동리 전체를 바라본다. 용간(龍澗)은 임진왜란 때 마평에 들어온 파평윤씨 윤번(尹)의 호다. 그 의미에 대해 용간정기는 ‘비늘을 가진 용은 망동하지 않고 물 맑은 천은 탁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용간’은 윤공의 시대에서 거의 400년 가까이 지나서야 적극적으로 소환되었다. 건축물의 이름은 보고 부를 때마다 그 가치와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젊은 용간정에는 망동하지 않는 맑음에 대한 오래된 이상이 깃들어 있고, 우리가 보는 것은 긍정적이고 그토록이나 지고한 서정이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청송군청송군 부동면 상평리에 자리한 덕양재 전경. 덕양재는 달성서씨 청송 입향조인 서윤(徐尹)과 그의 손자 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의 손자 서봉(徐琫)을 모신 재실이다.청송군 부동면 지리에 위치한 용간정의 모습. 용간정은 1985년에 건축된 젊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다.청송군 부동면 상평리 쌍체정 전경. ‘쌍체’란 한 쌍의 산앵두나무라는 뜻으로, 활짝 핀 산앵두나무 꽃은 형제의 우애를 뜻한다.청송군 부동면 상평리 부강서당의 모습. 조선 말기 유생이자 의병이었던 석간(石澗) 서효원(徐孝源)이 사림과 함께 지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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