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7> 이상국의 '울진대게의 비밀 - 성류굴 500인과 육촌대왕'

  • 입력 2021-05-26 18:30  |  수정 2021-05-3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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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진 뒤 두어달 만에 한양을 삼킨 왜군의 한 줄기는 동해안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울진 성류사(聖留寺) 주지인 해율(蟹律)은,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왕피천의 물줄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서쪽 하늘에 먹장구름이 까맣게 몰려들었다. 그는 스승 해일(蟹一)선사가 들려주시던, 격암(格菴, 울진 출신 남사고(1509-1571)선생의 호)의 예언을 떠올렸다.

 

1550년 효렴(孝廉)으로 참봉 벼슬에 천거되었던 격암선생은 “40년 뒤 임진년과 계사년 사이에 남해에서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계사년에 침입하면 나라가 결딴날 것이고, 임진년이면 그보다는 낫지만 강토를 유린당할 걸세. 지금 열세살이 된 왜국의 소년 하나(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년생)가 스스로 태어난 날을 기해 전쟁을 꾀할 것이네. 그런데 이 나라 사직은 동서가 붕당(朋黨)으로 갈라져 칼이 코 끝에 닥쳐드는 날까지도 서로 싸우고 있을 걸세. 큰일이야. 지금부터 2년쯤 뒤에 그 병란을 감당해야할 왕재(王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나중에 선조가 되는 이연)가 태어날 것일세.” 

 

이때 해일선사가 물었다. 

 

“전란이 나면 우리 울진은 어떤 방도를 써야 할지요.” 

 

“너무 걱정은 마시게. 붉은 옷을 입은 육촌대왕이 도와줄 거야.”

해율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낯익은 성류사 불자(佛子) 이십여명이 달려왔다. 

 

“스님, 왜적들이 수천리를 짓밟고 사람들을 벌레같이 베어넘긴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해율은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말을 꺼낸다. 

 

“울진은 신라가 점령하기 전(봉평 신라비는 그 무렵 세운 비석)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고구려에선 왕이 울진국으로 와서 직접 제사를 지낼만큼 이곳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굴신(窟神, 혹은 수신(隧神))을 왕국의 수호신으로 삼았기 때문이지요. 고구려는 매년 10월이면 성류굴에서 큰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굴은 사실 큰 원력(願力)을 지닌 곳입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실직국의 왕(삼척, 울진지역 지배세력)이 예국(강릉 지배세력)에 쫓겨 숨어살던 곳이고, 가까이는 고려말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굴에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아래 왕피천(王避川)은 그래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우리들도 잠시 병란을 피하여 굴 속에 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류사의 부처를 거기 함께 옮겨 예불을 드리도록 합시다.” 

 

이런 제안에 마을 사람 500여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상당히 오랫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준비해 굴 속으로 이동했다. 대웅전에 모셔져있던 부처를 떼어 이동할 때였다. 청년들은 좁은 굴 입구에 서서 불상을 밀어넣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부처의 크기로 봐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폭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상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저절로 굴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율스님과 마지막 어린 아이가 들어온 다음, 사람들은 준비해놓은 바윗돌로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바깥에 남은 사람들도 도왔다. 감쪽같이 입구의 자취를 숨긴 것이다. 약 10m 폭의 돌벽을 쌓아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안은 점차 깜깜해졌고 사람들은 소리와 촉각으로 서로를 인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양식은 거의 바닥나고 모두들 어둠에 지쳐 있을 때 좁은 굴 한쪽에서 희미한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적에게 들켰다고 생각하고, 무기를 들었다. 다가온 것은 놀랍게도 연꽃 잎을 온몸에 걸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불상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부처는 붉고 큰 게 한 마리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때 해율스님이 가만히 나섰다. 

 

“여러분, 이 자해(紫蟹, 대게가 붉다 하여 예전엔 이렇게 불렀다)대왕님은 바로 우리를 지켜주는 굴신(窟神)입니다. 저 연화님은 동해 여신의 궁녀이고요. 우리 울진국은 자해대왕에게 제사를 지내온 부족입니다. 성류굴의 성류(聖留)란 바로 성스러운 대왕이 머무르는 곳이죠. 원래 울진 바다는 해포(蟹浦), 해진(蟹津), 기알게, 거일로 불리어왔습니다. 모두 게와 관련된 이름들이지요. 게는 다리가 여섯인지라 육촌(六寸)이라 불렀고 그것이 대나무 마디처럼 생겼다 하여 죽촌(竹寸), 죽육촌으로 부르기도 했고요. 동해 연안의 사백 길 해저에 있는 왕돌짬(대륙붕)에 사는 대게들은 대왕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덕을 상징하는 진미객(珍味客)들입니다. 저는 대왕의 신하로 굴을 지키려 성류사에 와 있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물었다. “대게의 신은 사람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괴롭혔다고도 하던데요.” 

 

해율은 말했다. “뭍에 사는 멧돼지 부족이 만든 옛날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멧돼지와 곰이 산골을 떠나 멀리 바닷가로 놀러가는데 어떤 마을에서 굴에 사는 대게가 여인을 제물로 바치도록 강요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멧돼지는 꾀를 써서 대게를 죽이고 사람들은 멧돼지에게 크게 감사를 하죠. 이건 이방의 종족들이 퍼뜨린 얘기일 뿐입니다.” 

 

해율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자해대왕이 사람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도록 했나니... 이제 연화님을 따라 동해로 가보시게.”

사람들이 서로 쭈뼛쭈뼛하고 있을 때 연화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한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자 함께 손잡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저절로 마치 게가 움직이듯 부드럽게 횡보(橫步)로 이동을 시작했다. 성류굴(472m)은 갑자기 땅밑으로 큰 길이 열리더니 끝없이 이어졌다. 500명의 사람들은 걸어서 잠깐만에 동해 밑바닥에 이르렀다. 굴이 열리면서 눈앞에 물이 펼쳐졌으나 습기처럼 젖어드는 느낌이었고 숨이 차지 않았으며 수압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환한 태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저는 신라의 보천(普天)태자입니다. 장천굴(성류굴) 신에게 불교의 뜻을 전파했지요. 하늘에서 날아온 저는 대게들에게 동해의 태양 형상을 불어넣었습니다. 둥근 몸에 여섯 가닥으로 퍼져나가는 다리가 그것입니다. 동해에 뜨는 태양과 빛을 상징합니다. 대게는 바다 밑바닥에 사는 태양인 셈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해(蟹)인 것도 바로 그런 연유이죠. 우리의 몸 중에서 가장 발달한 것은 눈입니다. 우리는 섣불리 보지 않고 사방 팔방을 다 점검하고 살피며 그것을 다시 내성(內省)의 눈으로 확인하여 일을 처리합니다. 또 대게의 횡보는 진전없는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형편에 맞게 몸을 움직이는 처신의 미덕입니다. 마지막으로 대게의 집게발은 한번 물면 놓지않는 끈기와 집념을 말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본성의 미덕들입니다. 전란이 끝나는 날까지 여러분들은 바다밑 진경(珍景)과 진미(珍味)를 누리며 지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몇 백년이 지나면, 대게들이 여러분들을 크게 먹여살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보천태자는 이들을 동해의 여신이 있는 용궁으로 안내했다.

왜란 이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물밑으로 감춰졌다. 성류굴은 다시 열렸고, 울진에는 배 성주(成主) 제사를 지내는 사람 중에서 대게를 그린 한지묶음을 무명실로 묶어둔 형태로 놋좆(배의 뒷전에 튀어나온 나무못)에 매달아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례가 끝나면 바다밑에서 함께 지내던 지인들을 모시고 가만히 동도름(음식을 나눠먹는 일)을 했다.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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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메모
울진의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성류굴은 주변 암벽의 측백나무(수령 수천년)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하금강'으로 불린다. 2억5천만년 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로 종유석이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다.

 

신라 신문왕의 태자 보천이 이곳에 머물러 수도를 했으며 장천굴의 신에게 수구다라니경을 전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또 고려말 학자 이곡의 '관동유기'에는 성류굴 암벽 밑에 성류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굴신(窟神) 신앙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다. 

 

임진왜란 때 주민 500명이 피신했고 성류사 불상을 옮겼다는 내용과 배의 성주에게 제사를 지내는 민속과 관련한 내용은 울진군지(2001년 발행)에 적혀 있다. 울진의 봉평신라비는 국보 242호로 신라가 이 지역을 고구려에서 빼앗은 뒤 이곳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고 세웠다는 내용이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건립 연대는 524년으로 추정) 

 

남사고의 임진왜란 예언과 선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예언은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흠의 문집에 있다. 굴에 사는 대게의 신에 관한 이야기는 떠도는 설화를 이원수선생이 정리한 '저동이와 웅남이', 그리고 만화 '멧돼지 도사'를 참고했다. 

 

단편적인 내용으로 제각각 떠도는 스토리들을 엮어 풀어낸 것이다. 이 울진의 굴신 '대게 스토리'는 팬터지와 어드벤처 콘텐츠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테마파크와 게임콘텐츠로 활용할 만한 흥미진진한 '스토리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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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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