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0> 김정현의 '신수라의 황금보검(上) - 초원을 건너 온 사나이'

  • 입력 2021-05-28 17:15  |  수정 2021-05-3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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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경북 경주시 계림로 도로공사 중 붉은빛 석류석 등으로 장식된 화려한 황금보검이 부장된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이야기의 탄생이다)


이제 떠나온 곳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문득 우유빛 대리석으로 쌓은 거대한 성의 둥근 첨탑이 구름 위로 뿌옇게 솟아오르다가 사라진다. 그 성 안 돔형 천장에는 신과 전사와 사랑의 그림들이 황금색과 붉고 푸른 안료로 채색되어 있었던가. 왕의 황금 술잔, 금과 은 ․ 청동과 주석으로 빚어 온갖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한 눈부신 조각과 기물들…… 다 무슨 소용이랴. 마침내는 검붉은 죽음의 핏빛으로 얼룩져버린 것을. 몸을 피하라고, 떠나라고, 오직 동쪽으로, 끝아 보이지 않는 바다가 나타나는 곳으로. 길은 멀지만 의심과 죽임이 아니라 관용과 포용이 있는 곳으로. 날마다 새롭고 사방을 망라하는 곳으로. 금(今)이나 간(干)이 통치하는 곳으로. 백년도 전에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다녀왔고 아버지의 아버지와 그 형제와 친구들이 찾아간 곳으로…… 어머니는 그것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얼어붙은 겨울 강을 건너고, 해바라기 줄기만 빼곡히 들어차 더욱 을씨년스러운 벌판의 눈보라를 헤쳐 왔다. 구름은 중턱에 걸리고, 하늘을 나는 새마저 날갯짓을 쉬어가는 아득한 산을 넘을 때는 차라리 되돌아가 죽임의 칼을 휘두르다 피를 쏟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산을 넘으니 과연 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제 곧 바다가 나오겠거니 말을 달렸다. 하지만 초원의 끝에는 타는 햇살 아래 죽음의 흔적이 여기저기 뼈 무더기로 남아있는 모래와 자갈의 사막이 나왔다. 그 사막을 건너면 한동안 초원이 이어지다가 다시 끝 모를 황토 벌판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분노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제(帝)의 병사, 왕의 신하, 칸(Khan:汗)의 부하 등등 제각각의 사람들. 마주치면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부터 치켜뜨고 주변을 맴돌다가 황금보검과 친구들의 보석을 보는 순간 단박에 칼을 빼어들고 짓쳐드는……. 친구들은 그렇게 하나 둘 스러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바다가 나타났을 때, 또 다른 공격자 무리와 마주쳤고 마지막 남은 친구마저 눈을 감아야 했다. 소피아의 오빠이자 혈육과도 같은 친구 퀸투스. 부디 서로를 지켜주라고 그녀가 애원의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는데. 아! 내 사랑 소피아, 그리고 어머니…….


“정신이 드시려나 보구나. 어서 가서 유 장군님을 모셔오너라.”


여자였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분명 여자의 음성이었다. 씬스라로프는 화들짝 눈을 떴지만 몸뚱이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기척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복색에 흰 피부와 큰 눈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아직 움직이기에는 무리입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곧 그쪽 말을 잘하는 분이 오실 겁니다.”
 

뜻밖에도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씬스라로프, 그들의 언어였다. 여인이 조금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까마귀가 구름처럼 모여 있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 타고 오신 듯한 말은 이미 뼈만 남아있었고요. 뼈나마 거두어서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아, 나의 애마 블라키! 씬스라로프의 눈가에 옅은 이슬이 비쳤다. 그랬다. 벌써 수년 전부터 자신과 일상을 함께했던 애마 블라키는 얼마인지도 모를 그 먼 길을 달려오는 동안 단 하루도 발굽을 쉬지 못했다. 퀸투스가 화살 맞은 말 등에서 떨어졌을 때는 두 앞발을 치켜들며 머뭇거렸지만, 그마저 칼날에 피를 내뿜자 되돌아가라는 채찍질에도 씬스라로프를 등에 실은 채 무작정 남쪽을 향해 죽을힘으로 달렸다. 칼에 베인 등짝을 흐르던 피가 말라가고, 화살 박힌 허벅지가 무감각해질 무렵 블라키의 숨결도 가물거렸다. 하늘에서 검은 까마귀가 떼를 지어 쫓아오고 있음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두 눈이 감기는 데 이제 다시는 뜨지 못하겠구나 생각할 때 블라키는 주저앉고 자신은 의식의 끈을 놓았던가…….
 

“그가 깨어났다고요, 공주님?”
 

이번에는 남자의 음성이었다. 씬스라로프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예, 장군님. 어서 들어오세요.”
 

시녀를 따라 들어서는 사내는 햇볕에 잘 그을린 듯한 구리빛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자신과는 또래로 보였다. 얼핏 선한 듯 보이지만 가슴이 서늘하도록 깊은 눈빛은 강하고도 인상적이었다. 사내의 허리춤에 찬 칼을 보자 씬스라로프는 비로소 자신의 황금보검이 생각났다. 힘겹게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 그를 보고 사내가 선한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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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경북 경주시 계림로 도로공사 중 발굴된 황금보검. 경주시청 제공


“보검을 찾으시오?”
 

유창한 자신들의 말이었다. 그래도 씬스라로프는 허리춤만 더듬거렸다.
 

“공주님, 보검을 찾고 있습니다.”
 

“예.”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침대 건너편 장(欌) 문을 열더니 황금보검을 꺼내 가져오자 사내는 그 보검을 받아 씬스라로프의 허리춤에 내려놓았다.
 

“치료를 받는 사람인지라 잠시 보관해두었던 거요. 내가 하는 말은 알아듣소?”
 

씬스라로프는 대답 대신 두 눈을 끔뻑였다. 말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경계심이 풀어지지 않아서였다.
 


“허허, 마음을 놓아도 괜찮소. 우리에게는 남쪽과 동쪽 바다를 통해서도 손님들이 찾아오지만 가끔은 북쪽에서 초원을 달려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소. 물론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친구를 찾아가기도 하고요. 백여 년 전쯤에 당신의 보검을 장식한 것과 비슷한 보석들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소. 일부는 돌아갔고, 우리 땅에 남아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소. 그들에게서 말을 배운 사람이 있어 내게도 전해진 거요.”
 

“이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오?”
 

씬스라로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마 우리 사정을 들었다 할지라도 나라 이름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거요. 우리도 최근에 들어서야 그동안 사라(斯羅)니 사로(斯盧)니 신라니 하던 것을 신라(新羅)라 하기로 확정한 터요.”
 

“그게 무슨 뜻이오?”
 

“신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오. 특히 라의 의미는 그동안 우리가 사해만방의 어떤 이들이든지 우리를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환영하고 서로 교류하기를 즐겼기에, 그 뜻이오.”
 

“이 나라의 통치자는 무엇이라 부르오?”
 

“이전에는 이사금(尼師今)이나 마립간(麻立干)으로도 불렀소만 이번에 국호를 정하며 국왕이라 부르기로 결정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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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영규 서양화가(한려대 미술학과 교수)


 

씬스라로프는 가슴이 벅찼다. 바다가 보이고도 먼저 칼을 겨누고 보검과 보석을 탈취하려는 자들만 보았던 터인지라 어머니가 들은 이야기가 모두 헛된 것인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비로소 찾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세상 끝 가장 동쪽의 남쪽 땅에 이처럼 가슴 열린 사람들의 나라가 있게 된 것인지…….
 

“염치없지만 당신들 나라의 국왕을 뵙고 싶소.”
 

“당연히 만나게 될 것이니 우선 몸부터 추스르시오. 그런데 염치없다는 게 무슨 이야기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소. 처음부터 많은 것을 갖고 출발하지도 못했지만 오는 도중 마주치는 대부분의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모두 잃어버렸소.”
 

부끄러운 기색의 그의 말에 사내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손님이 찾아왔으면 온 손님이 중요한 것이지 그까짓 물건이야 아무리 진귀한 보화라도 뭐 그리 대수겠소. 심려치 마시오.”
 

이상한 나라였다. 아니, 그래서 아버지의 아버지 일행이 이곳을 찾아 떠났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복색이나 장식물은 특별히 아름답고 품위가 있었다. 탐욕 없이도 누릴 것은 누리는 삶이라니, 새삼 기이하게 생각됐다.
 

“나는 유강(柔剛)이라 하오. 장군의 직분으로 국왕을 보필하고 있소. 그리고 이분은 이 나라 공주님이시오. 당신을 구한 분이시니 은혜를 잊지 마시오. 특히 말 등에 당신을 싣고 오다가 말이 지쳐 꽤 먼 길을 걷기까지 하셨소. 혼자 나다니기를 좋아하시거든요.”
 

“아니 유 장군님은 무슨 그런 말씀까지…….”
 

수줍음에 낯빛을 붉히는 여인의 자태가 가슴을 뛰게 했다. 씬스라로프는 소피아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올리며 두 눈을 감았다. <계속>

김정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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