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4> 김주영의 '영덕 조항리 새목산 호랑이'

  • 입력 2021-05-29 17:48  |  수정 2021-05-3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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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일러스트=김성태 화백


지리에 밝다고 자신하고 있는 사람이더라도 영덕군 축산면 묘곡 저수지 서남쪽 새목산 기슭에 자리 잡은 조항리가 어디에 위치하는 것인지 딱부러지게 밝히기는 어렵다. 웬만한 지도에는 잘 나타나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산중 마을이 옛날에는 영해부 묘곡면 조항동 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조항리는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지만 자연 용수가 많아 옛날에는 이 마을의 범 바위 골을 중심으로 70여 호라는 적지 않은 가구들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살았었다. 그러나 영덕군에서는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지칭할 만큼 깊은 산골짜기였기 때문에 그 동안 가구수가 꾸준히 줄어들어 사람들 사이에 잊혀져 가는 마을이 되면서 지금은 고작 4가구가 살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지대가 높은 만치 동해바다를 한 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경관에 생활용수도 풍족해서 농사도 매년 풍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북 영주의 풍기군처럼 조선시대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이 곳을 찾아와 터를 잡아 많은 가구 수를 자랑할 수 있었다. 그 마을농사는 발 아래로 바라보이는 평야 지대에 흉년이 들면 마을에는 필경 풍년이 들었고, 평야지대에 풍년이 들면 반대로 소출이 신통치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워낙 산 속의 밀림지대였기 때문에 인근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더구나 산 짐승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일 아침 날이 밝아서야 바깥출입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 마을에 편삼만(片三萬)이란 총각이 살고 있었다. 이 청년은 기골이 장대하여 서 있으면, 그 허우대가 깍짓동과 같았고 근력과 간담도 남달라서 성질 사나운 맹수와 마주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장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몸이 종이처럼 가벼워 바위와 바위 사이를 나비처럼 가볍게 넘나들었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팽이 돌 듯 지나다녔다. 맹수를 겁내지 않았고, 순식간에 고개를 넘는 번개와 같은 순발력을 가졌기에 그의 친구는 당연히 밀림 속에 살고 있는 짐승들이었다. 

 

그 친구 중에는 쌓은 정분이 돈독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는 호랑이가 있었다. 둘은 함께 밀림 속을 달리기도하고 같이 끌어안고 딍굴기도 하며, 삼만이가 들에 나가면 짐승을 잡아다가 건네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호랑이가 다가와 등을 돌려 앉으며 등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삼만이가 따라가 보았더니 범바위골 골짜기 후미진 풀섶에 어여뿐 처녀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입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을 만져보았더니,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깜짝 놀란 삼만이는 서둘러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얼떨결에 시작한 응급조치가 효험이 없지 않아 처녀는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살아난 처녀의 사연을 들어보았더니, 집으로 돌아갈 처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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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의 가난한 부모는 열 마지기를 받고 딸을 어떤 고을 부잣집으로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처녀가 혼례를 치르고 신방을 들어갔는데, 그때 첫 날 밤 신방으로 들어온 신랑은 키 꼴이 일곱 살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곱사등이였다. 

 

어쩔 수 없었던 신부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난데없는 호랑이가 한 밤중의 잔칫집으로 뛰어 들었다. 혼비백산한 신랑이 신부를 두고 도망해 버린 사이 호랑이는 신부를 등에 태우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삼만이는 결혼할 나이를 훌쩍 넘긴 노총각 신세였고, 처녀는 시집이나 친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딱한 신세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호랑이가 바라보는 가운데 부부가 되었다.
 

신부는 궁핍한 가운데 살았지만, 본래 총명하였고 글을 읽어 지혜를 가진 재원이었다. 그녀는 가락지 빼 건네주면서 영해골로 나가서 책을 구해오라고 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천자문에서 삼경에 이르기까지 문자를 가르쳤다. 그러던 하루,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늘 영해골로 나가 보시지요. 필경 군병을 선발할 할 것이니, 이녁이 응모해 보시기 바랍니다.”
 

반신반의하고 영해골로 나가 보았더니 과연 아내의 말대로 군병을 모집하니 응모하라는 방이 나붙어 있었다. 비록 산중에서 본데없이 자랐으나, 무술뿐만 아니라, 문자에도 통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 날로 장교에 임명하여 영해성중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새목산에서 영해골까지는 50리를 훌쩍 넘기는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날쌘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먼길을 한결같이 출퇴근하려면 힘에 겨울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집에서 성중까지 매일의 출퇴근에 어김이 없었다. 알고 보았더니, 호랑이가 그의 출퇴근을 도와 주고 있었다. 

 

그렇게 근무하기를 3년이 흘러간 뒤, 어느 날 갑자기 왜구가 쳐들어와 성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살육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왜적은 군관의 가족들을 색출해서 살해하고 노략질하여 그 참혹함이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도 남들 따라서 어서 피난을 떠나시오. 여기 있다간 변을 당하리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말했다.
 

“지금 당장 목숨을 잃는다하여도 당신을 두고 떠나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죽겠어요.”
 

그는 다시 영해골로 나가 왜적들과 접전을 벌이는 가운데 공교롭게도 영해부사가 왜적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가 부사를 놓아줄 것을 요구하자 왜장은 삼만이가 항복하면, 부사를 놓아줄 뿐만 아니라, 영해성에서 철수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왜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삼만은 드디어 호랑이 등에서 내려 왜장에게 칼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이 실책이었다. 그가 호랑이 등에서 내려서며 칼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왜적의 궁수들이 시위를 당겼다. 수 십 발의 화살이 그의 등에 꽂히고 삼만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호랑이가 급하게 달아나 새목산 집으로 돌아와 서럽게 울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의 전사를 예상하고 있었던 듯 매우 침착하게 행동했다.
 

“남편은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비굴하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니, 자랑스런 일이지 슬퍼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호랑이를 다독거려 위로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남편의 장렬함을 추모하여 장례를 치렀다. 지금도 조항동에는 절강 편씨(浙江片氏)후손이 살고 있다. 

김주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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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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