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2> 김정현의 '신수라의 황금보검(下) - 임전무퇴, 그 영원한 우정

  • 입력 2021-05-29 17:25  |  수정 2021-05-3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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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보검(黃金寶劍)'의 1973년 발굴 당시 모습. 미추왕릉지구(현 대릉원) 정화사업에 따라 경주시 황남동 계림로 공사 중에 출토됐다. 보검에 붙어 있던 의복 흔적과 부장품의 배치, 남아 있는 치아 등을 고려할 때 무덤의 주인은 성인 남자 2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신수라 스토리'는 이 황금보검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경주시청 제공


 

공주가 보이는 눈빛의 의미가 사뭇 심상했다. 은근한가 싶으면 그윽했고, 그윽한가 싶으면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다. 무엇이란 말인가? 신수라는 가슴이 다 먹먹할 지경이었지만 공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자비심 없는 마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부처의 법이 전해진지는 제법 되었지만 아직 불법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기에 공주의 처지로서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불법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연민의 마음 때문이었다. 

 

끊이지 않는 전란 속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붉은 피를 흘리며 사라져가는 숫한 생명들. 사랑조차 지키지 못해 애태우고 눈물짓는 그 청춘들에는 자신도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공주를 사랑하는 이기에 더욱 앞장서야 하고, 공주이기에 기껏 말발굽이나 살펴줄 뿐 눈물조차 짓지 못하지 않는가. 

 

그래서 살생유택의 계율은 더욱 가슴에 와 닿았고 세상 모든 전장에서 지켜지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황금보검을 품고 찾아온 저 사내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적을 멸하고 나면 그때는 평온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또한 부처의 뜻과 다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 겁니까?”
 

밝은 얼굴로 들어서는 유강의 모습에 공주도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닙니다. 신수라님이 벌써 몇 번이나 부처를 물으셨는데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허허, 왕께서 즉위하시고 삼년 째 되던 해에, 사람을 순장(殉葬)하는 장례법을 금지하라 명하신 그것도 같은 마음 아니셨습니까?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그것처럼, 세상만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그것이 시작일 테지요.”
 

“그렇네요. 참으로 유 장군님은 명쾌하십니다.”
 

신수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어떤 신도 이루지 못한 영원한 숙제 아니던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면 혹시 모를까. 그런다 할지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유린당하는 것인 세상살이인데. 그래도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를 정겹게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차라리 숭고하다 여겨지는 것은 무슨 또 까닭인가.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당장 대전으로 드시라는 명이십니다!”
 

꼬꾸라질 듯 허둥거리며 들어선 전령의 숨이 턱에 찼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인가?”
 

“적군이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우리 수비군이 있지만 워낙 중과부적이라 벌써 성을 내주었다 합니다.”
 

“아……!”
 

장군보다 먼저 비명을 흘리며 사색이 되는 공주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래도 한 마디 위로마저 건네지 못하고 황급히 일어서는 유강을 따라 신수라도 발길을 서둘렀다.

다급하게 소집된 증원군의 숫자를 더했지만 수적인 열세는 여전했다. 게다가 이미 패전으로 쫓겨 온 방비군의 사기마저 바닥이었다.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세 방향에는 적의 깃발이 촘촘했고, 한쪽 방향이 뚫려있기는 했지만 돌아서는 그 순간 적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될 게 뻔했다.
 

“어쩔 것인가?” 신수라가 물었다.
 

“우리가 먼저 돌진한다.” 유강은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느 순간에, 어디로?”
 

“적장이 모습을 보이는 순간, 그곳으로 모두.”
 

“그런 뒤에는?”
 

“적장이 소수의 적을 피해 등을 돌리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무조건 돌진해 쓰러뜨려야지. 그럼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다.”
 

“군사가 월등히 부족한 건?”
 

“그건 일당백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허, 그게 작전인가?”
 

“그럼 다른 계책이라도 있나?”
 

신수라는 어이가 막혔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유강은 등을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고 섰다.
 

“형제여, 벗이여! 우리는 지금껏 칼날을 겨누지 않은 한 찾아오는 이 누구든 막지 않았다. 배신하지 않는 한 떠나는 자 역시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하는 한 신라의 국민이며, 신라국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한 지금껏 적을 죽임에서도 살생유택의 정신을 지켰다. 하지만 이제 저 무도한 적들은 우리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물러서면 형제며 벗인 신라국의 무고한 신민들이 적들에게 도륙 당한다. 그들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 설령 도륙 당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도륙 당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우리가 신민을 지키면 신라는 천년 왕국으로 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도 그저 한낱 생명이었을 뿐이다. 나는 앞장설 것이다! 지금 여기를 떠나는 자 신라의 국민이 아니니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다! 떠날 자는 떠나고, 남을 자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자!”
 

와――! 

 

갑자기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때마침 적장의 깃발이 맞은편 중앙에 나타났다. 장검을 뽑아든 유강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우리들 부모와 형제를 위해, 사랑하는 님과 벗을 위해, 적장의 목을 베라! 돌격!”
 

전장의 흐름이 그렇게 변하는 것은 신수라는 아직 한번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죽음을 찾아 나서는 병사의 돌진은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듯하던 군사를 천 배로 늘린 듯 노도와 같았다. 졸지에 혼전이 된 전장에서 유강의 검은 햇빛의 춤을 추며 어느새 적장의 코앞까지 바싹 다가갔다. 신수라도 그런 유강의 뒤를 지키며 전신을 피로 물들였다. 마침내 적장의 칼과 맞닥트린 순간, 수십 개의 칼날이 한꺼번에 유강을 향해 짓쳐들었다. 신수라는 몸뚱이를 날려 유강을 향한 칼날을 받았다.
 

“신수라!”
 

하지만 유강도 미처 다 막지 못한 칼날을 등에 꽂고 말았다.
 

“어서 적장의 목부터 베라!”
 

신수라는 칼날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피를 받아 목을 적시며 검을 휘둘렀다. 가물거리는 시선 속에 유강을 칼날 아래 적장이 꼬꾸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적장이 쓰러졌다!”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한순간 전장이 숨을 죽인 듯 가라앉았다. 돌아선 유강은 쓰러진 신수라를 껴안았다.
 

“안 된다! 눈을 감지마라! 너는 신라국 사람이 된지 이제 겨우 이태를 넘겼을 뿐이다!”
 

“흐흐, 이처럼 죽을 수 있어서 기쁘다. 권력의 음모와 협잡으로 죽기는 억울해서 떠나왔는데, 마침내 사람답게 죽는구나. 살생은 가리되 전장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다니…… 참으로 신라는 천년왕국이 될 것이다.”
 

“오, 신수라…… 적을 물리쳐라! 신수라의 원수를 갚아…….”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유강마저 신수라의 피로 물든 몸뚱이 위에 허리를 꺾었다. 장렬한 두 사람의 주검 앞에 남은 병사들은 두 눈에 핏빛 불을 켰다. 때맞춰 저 멀리에서 지원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왕께서 비통한 낯빛을 감추지 않은 채 입술을 뗐다.
 

“유강과 신수라는 신라의 위대한 장군이었으며 아름다운 벗이었다. 그들의 충성과 신의와 우정이 영원히 함께하도록 두 사람을 합장하라! 또한 대장군의 예로써 장사지내도록 할 것이며, 그 분묘는 왕릉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잡아 영원히 왕실과 함께하도록 하라!”
 

공주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나섰다.
 

“국왕이시여! 이미 영원한 신라의 사람인 신수라의 황금보검을 그의 허리춤에 두어 그의 그리운 옛사람들과 가문도 잊지 않도록 배려하소서!”
 

“네 뜻이 옳다! 그리하여 언제라도 훗날의 사람들이 신라의 정신을 기리도록 하라!”

신라 22대 왕 지증왕(智證王) 조(祖)에 있었을 이야기이다. 불교와 관련한 이차돈의 순교는 그 다음 23대 법흥왕 조에 있으며, ‘화랑’은 24대 진흥왕 조에 공식화 되었다. 신라가 천년동안 왕국을 유지한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발굴된 무덤에는 두 남자가 합장되어 있었으며 그 중 한 사람의 허리춤에는 황금보검이, 다른 사람에게는 장검(長劍)이 각각 여러 기물과 함께 부장되어 있었다. <끝>

김정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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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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