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13> 김주영의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나옹왕사 스토리'

  • 입력 2021-05-29 17:40  |  수정 2021-05-3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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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일러스트=김성태 화백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 있는 반송 유적지에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종조(宗祖) 태고보우(太古普愚), 지공무학(指空無學)과 더불어 3대화상(三大和尙)으로 추앙 받는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영각이 지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620여 년을 의연한 모습으로 견디다가 고사한 소나무 자리에는 반송을 다시 심고,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사적비를 세웠다. 나옹화상은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의 왕사(王師)로 책봉되었으며 조선 건국에 기여한 공이 큰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그런 고승이 바로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에서 태어났다.
 

살점을 도려낼 듯 매서운 삭풍이 가차없이 불어닥치는 1320년(고려말)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지금의 가산리 불미골이라는 궁벽한 산골 마을 변두리에 있는 초가삼간에 서슬 시퍼런 포졸들이 소매 바람을 일으키며 들이닥쳤다. 

 

무슨 까닭 때문인지 눈에 핏발을 곤두세우고 집 안팎을 뒤지던 포졸들은 안방구석에 엎드려서 떨고 있던 아낙네를 발견하고 불문곡직 밖으로 끌어냈다. 욕설과 불호령과 발길질에 혼비백산 밖으로 끌려 나온 아낙네는 궁핍한 생활에 지쳐 남루한 몰골이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굳이 따지자면 영산 정씨(靈山 鄭氏)로 불리는 그 아낙네는 공교롭게도 출산을 바로 코앞에 둔 만삭이었다. 포졸들도 정씨가 만삭이란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전혀 사정을 두지 않고 아낙네를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그들에게는 잡아들이라는 관부의 명령만 지엄할 뿐이었다. 잡아들이지 못하면 그들 자신이 혹독한 처벌을 당할 것이었다. 그래서 포졸들은 끼니를 굶어 얼굴에 부황까지 있는 아낙네였지만 일말의 동정심도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은 걸음조차 임의롭게 떼어놓지 못하는 아낙네의 턱 밑에 종주먹을 들이대며 관아로 몰아 부쳤다. 

 

불시에 들이닥친 변고인데 다가 마땅히 하소연 할 곳도 없었던 아낙네는 순순히 포졸들의 불호령을 따라 관아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 떠날 때부터 진통이 있었던 아낙네는 영해부 관아가 바로 코앞에 빤히 바라보이는 논두렁길 엎어져 뒹굴다가 사내아이를 출산하기에 이르렀다.
 

포졸들의 횡포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포졸들은 아낙네가 해산을 하거나 말거나 금방 태어난 아기를 개울가에 버려 둔 채 아낙네만 관아로 끌고 갔다. 그러나 부사가 끌려온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핏자국이 낭자한 것을 수상히 여기고 그 연유를 물었다. 포졸들로부터 내막을 알게된 부사는 분기 탱천하여 포졸들을 크게 꾸짖고, 아낙네를 아기 곁으로 빨리 돌려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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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부사의 은덕을 입어 압송에서 풀려난 아낙네는 허둥지둥 아기가 버려진 논두렁길로 달려갔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을 그 곳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모르지만, 수백 마리의 까치 떼들이 날개를 펴서 논두렁에 뒹구는 아기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까치소”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는 그 곳에서 태어난 아기는 훗날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는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1320-1376)이었다.
 

어머니 정씨 부인이 금빛의 새매 한 마리가 오색의 영롱한 알을 떨어뜨려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다음 잉태한 아기가 바로 나옹이었다. 그러나 잉태할 당시만 하더라도 나라에서 부과하는 부역이나 세금을 물지 못해 걸핏하면 관가로 끌려가서 온갖 수모와 치도곤을 치러내야 할 만큼 궁핍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태몽 때문일까. 출가하기 전까지 아씨(牙氏) 성을 가졌던 나옹은 자라나면서 공상이 남다르고 행동 또한 범상치 않았다. 일찍이 출가를 염두에 두었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20세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절친하게 지내던 이웃의 친구가 역병으로 숨지고 말았다. 인생의 무상함을 가슴 저리도록 느낀 그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러나 모두 고개만 가로 저을 뿐 속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이것이 나옹으로 하여금 입산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바로 그 길로 태연히 길을 나서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으로 가서 당대의 명필이었던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출가하고 말았다.
 

묘적암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점심 공양을 할 때였다. 개울가로 상추를 씻으러 났던 나옹이 오랜 시간이 흘러갔는데도 공양간으로 돌아오는 기색이 아니었다. 기다리다 진력난 한 스님이 나옹을 찾아 개울로 나가 보았다. 그런데 그때, 나옹은 상추 잎사귀를 물에 적셔 바구니에 담지 않고 허공에 뿌리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찾아 나섰던 스님이 물었는데, 나옹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상추를 씻다가 멀리 가야산 해인사를 바라보았더니 때마침 절이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기에 상추 줄기에 물을 묻혀 불을 끄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해괴하게만 여겼을 뿐 누구도 그 말을 믿었을 리 없었다. 그 뒤 해인사에서 객승이 찾아와 방부를 들었기에 무턱대고 며칠 전에 해인사에서 화재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절에 불이 일어나 몽땅 타버릴 뻔했는데, 맑았던 하늘에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져서 불이 꺼져 무사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날이 바로 나옹이 개울가에서 상추를 씻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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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출가의 길을 오를 때, 창수면 신기리(지금의 영덕군 창수면 사무소 옆)에 자신의 반송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 놓고 “이 나무가 자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곳에 꽂아둔 소나무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 잎이 나고 가지가 뻗어 낙락장송이 된 반송이 620여 년을 살다가 1965년경에 고사하였다.
 

묘적암에 출가한 이후 나옹은 1344년 회암사로 가서 밤낮으로 수행하여 크게 깨닫고, 1348년 중국의 대도 법원사에서 지공화상을 친견하고 한 해를 머물렀다. 그리고 1358년에 귀국하였다. 그후 신광사 주지로 있다가 구월산과 금강산에 머물렀고 1367년 청평사에 있을 때, 지공이 보낸 가사와 편지를 받았고, 그로부터 4년 후에 회암사에서 지공의 사리를 친견하였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여 다시 왕의 스승으로 추대되었으나, 불에 탔던 회암사를 중창하고 난 후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서기 1376년 5월 15일의 일이었고, 세수 57세, 법랍은 불과 38세 였다. 그 후 2010년 나옹왕사 현창 사업으로 출가지에 반송정이란 누각을 건립하고 그의 당호인 강월헌(江月軒)이란 정자를 건립하여 왕사의 위업을 재조명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옹왕사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는 이런 시구도 남아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김주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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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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