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2> 성석제의 '진각국사와 명마'

  • 입력 2021-05-26 17:09  |  수정 2021-05-31 13:47

 

영남일보영남일보07_특집07면_20101101.jpg


그는 말에 올라탔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이 들 때까지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했던 말이었다. 그는 말을 믿었고 말은 그에게 감응했다. 말은 천리 준마였으며 말을 탄 사람 역시 말과 짝할 만한 영웅의 기개가 넘쳐흘렀다.

 


흥해의 넓은 들판은 물론이고 바닷가 모래밭, 인근 수십 리 안에 있는 언덕, 초원이 모두 말과 사람의 놀이터이자 훈련장이었다. 사람들은 말을 용마로, 말을 탄 사람을 배장군이라고 불렀다. 벼슬은 없지만 장군의 기상을 압도하고도 남을 그의 이름은 배천희(裵千熙)였다.
 

오래도록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온 고려는 국권을 되찾을 영웅의 출현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혼란한 세상은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고 기아와 병마, 전쟁의 위협에 신음하는 백성에게 활로를 열어줄 진정한 장군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배장군은 한껏 호기가 치솟아 힘찬 휘파람 소리를 냈다. 말 역시 긴 울음소리로 화답했다. 배장군은 등자에 발을 깊숙이 밀어 넣은 뒤 고삐를 안장에 비끄러맸다. 이어 안장에 걸려 있던 화살통에서 꺼낸 화살을 각궁에 단단히 매긴 배장군은 말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내가 이 화살을 저 산을 향해 쏠 것이다. 네가 용의 피를 받아 이 땅에 현신한 것이라면 바로 지금 네 능력을 보여다오. 너는 분명 이 화살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을 게다.”
 

장군은 맑은 호통소리와 함께 활을 반공에 들어 화살을 날렸다. 동시에 말의 배를 차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말은 장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어느 때보다 힘차고 빠르게 달렸다. 몸을 최대한 숙인 장군의 귓가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아지경으로 말과 사람은 한몸이 되어 달리고 또 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은 예정한 장소에 다다른 듯 걸음을 멈추었다. 장군이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의 활 실력을 확신하고 있던 장군은 화살이 박혀 있어야 할 거대한 나무 둥치를 살폈다. 화살은 없었다. 좌우 옆으로 한 장, 앞 뒤로 한 장 그 어디에도 화살은 없었다. 장군은 몸을 떨었다.
 

“내가 뱀을 용인 줄 알고 잘못 키웠구나!”
 

말에서 뛰어내린 장군은 등 뒤에서 장검을 뽑아들어 말을 겨누었다. 믿음과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배신감이 격렬하게 엄습했다. 장군의 칼이 휘둘러지고 공중에 피보라가 일며 말은 무릎을 꿇었다. 말의 몸 높이가 낮아진 뒤 장군의 눈이 말의 뒷부분으로 향했다. “아아!” 하고 놀람과 슬픔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장군이 날린 화살이 말의 엉덩이에 꽂혀 있었던 것이었다. 말은 결코 화살보다 느리지 않았다. 몸에 화살이 박힌 채로도 화살보다 빨리 달려왔던 것이다. 장군은 피 묻은 장검을 바위에 내리쳐 부러뜨렸다. 죽어 넘어진 말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의 경솔함을 사죄하고 또한 통곡했다.
 

말이 죽은 자리에 무덤이 하나 생겨났다. 그 앞에 그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으리. 생명으로 생명을 구한다? 너를 죽여 나를 살린다? 다 어이없는 말놀음이로다.”
 

장군은 그 날 이후 칼을 버렸다. 생명과 인연이 가진 오의에 한층 깊이 마음을 묻고 수도에 들었다.
 

스님이 된 그는 19세에 승과에 급제한 후 금생사, 덕천사, 부인사, 개태사등 십여 사찰의 주지로 지냈고 원나라에 들어가 강남의 몽산(蒙山) 스님에게서 의발(衣鉢)을 전해 받았다. 귀국한 후에 치악산에 은거하다 양양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 공민왕 16년(1367)에 왕이 직접 대사를 찾아가 고려 승려의 최고 직책인 국사를 맡아달라고 간곡히 청하므로 이에 국사로서 선교(禪敎)를 아우르는 도총섭(都摠攝)의 직위에 올랐다. 왕은 국사를 배출한 흥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원래 국사의 암자가 있던 깊은 산중에는 맹수가 많아 사람이고 가축이고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국사가 수도를 할 때 이곳에서 닭을 많이 키웠는데 이상하게도 맹수들이 닭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생명을 끔찍하게 아끼고 존숭하던 국사의 마음에 동물들이 감응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에도 닭들은 대를 이어가며 살아갔다. 후손들은 국사의 유허비가 있는 사당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제물로 산에 살고 있던 닭을 잡아 바쳤다고 한다. 생닭을 제사상에 제물로 올리는 것은 유례가 드문 일로 지금도 진각국사의 제사를 지낼 때는 생닭을 쓰고 있다.
 

하루는 어느 장사치가 산을 넘어 갯목(浦項) 쪽에 물건을 팔러가다가 고갯마루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배가 고팠던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장사치에게 달려들 기세였고 장사치는 호랑이를 보자마자 놀라 넋이 달아나 버렸다. 마침 국사가 근처를 지나가다 그 광경을 목도했다. 호랑이가 땅바닥에 널부러진 사람의 목을 향해 앞발을 내리치려는 순간 국사는 지팡이를 뻗어서 호랑이를 제지했다. 국사에게서는 일찍부터 닦은 출중한 무예와 정신력이 뒷받침하는 태산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호랑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흉폭한 모습으로 으르렁거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국사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한낱 미물인 산짐승이 감히 천지지간에 가장 귀한 사람의 생명을 해하려고 한단 말인가. 너는 바닷가의 나루 끝에 빠져죽고 말리라.”
 

호랑이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기세가 꺾여 큰 울음소리를 남기고 떠나갔지만 장사치는 두려움으로 길을 더 갈 수 없었다. 국사의 배려로 하룻밤을 암자에서 머물 게 된 장사치는 다음날 아침 고개를 넘어오는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조심조심 갯목으로 향했다. 장사치가 바닷가 나루 끝 마을에 이르고 보니 큰 소동이 벌어져 있었다. 집채만 한 호랑이가 수심이 두어 뼘밖에 되지 않는 바닷물에 코를 박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장사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국사가 호랑이에게 했던 언행에 대해 털어놓았고 사람들은 새삼 생명을 거룩하게 여기는 국사의 이야기를 전해 내리게 되었다.
 

공민왕 19년, 왕은 사자 편에 인장과 법의를 보냈다. 다음해 국사는 금강산을 순유했는데 왕이 사자를 보내 돌아오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국사는 오히려 사자에게 자신은 번다한 시정을 떠나 영영 산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왕에게 아뢰어 달라고 청했다. 이듬해 국사는 부석사에 들어가 절의 전각을 다시 짓는 큰 불사를 이루었다. 우왕 8년(1382년), 광교산 창성사에서 입적하니 향령(享齡) 76세, 법랍(法臘) 63세였다.
 

국사가 입적한 후에 사람들은 일반 스님들처럼 시신을 다비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부도를 만드는 대신 국사의 고향인 흥해에 무덤을 만들어 안장했다. 그 자리는 바로 국사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말이 묻힌 무덤 바로 옆이었다.

성석제<소설가>

기자 이미지

김기오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