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1] 조선 최초 사설 대중의료기관 존애원

  • 류혜숙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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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19 07:48  |  수정 2021-06-27 14:13  |  발행일 2021-04-19 제11면
임진왜란 후 굶주리고 아픈 백성 신분 따지지 않고 사랑의 인술

■ 시리즈를 시작하며

상주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유서 깊은 역사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올곧은 정신문화는 시대와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독특한 무형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흡인력 있는 무수한 이야기가 고개를 넘고 깊은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펼쳐진다. 이러한 유무형의 자산은 상주라는 같은 뿌리에서 태동했고, 상주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미래 상주'를 이끌어갈 원동력이자 강력한 에너지이기도 하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시리즈를 연재한다. 자연과 생태, 역사, 문화, 인물 등 상주를 무대로 펼쳐진 다양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담아낸다. 1편에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을 보듬은 사설의료시설 '존애원'의 이야기를 따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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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병약해진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해 설립된 상주 존애원. 현존 자료상 조선조 최초 사설 대중의료기관으로 당시 향촌사회를 이끌었던 13개 문중이 힘을 모아 건립했다. 1993년에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약배이들에 복사꽃이 피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른 것들도 대지 가득 고개를 내밀고는 부드러운 바람에 얼굴을 씻고 있다. 그 가운데 네 칸 기와집이 낮은 언덕에 기대 동그마니 앉아 있다. 언덕에 서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복사꽃은 이따금 바람을 타고 지붕의 용마루에 내려앉았고, 꽃잎이 떠난 자리에는 연둣빛 잎이 돋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오래된 평온이었다. 400년을 이어온 폭풍 같은 평온이었다.

#1. '마음을 지키고 길러 타인을 사랑한다'

400여 년 전 우리의 산하는 참혹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전국을 완전히 파괴했고 백성들은 전염병과 각종 질병으로 약 한 첩 못쓰고 죽어갔다. 임란은 최악의 의료상태를 야기했다. 당시 지방에는 각 도에 파견된 몇 사람이 지역민에 대한 치료와 약재 공납 등의 임무를 맡았지만 의료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왜적의 손에 죽고, 역병(疫病)에 쓰러지고, 굶주려 죽고…온 나라 백성이 거의 살 바를 잃었으니 춘궁기가 돌아옴에 굶어 죽는 자가 적병의 칼날에 죽는 자보다 몇 배나 많았다.'

임진년(1592) 상주와 함창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벌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남긴 일기의 한 대목이다. 행정·경제·교통의 요지였던 상주의 피해는 컸다. 임란 사상 첫 대규모 전투였던 상주 북천전투에서도 의병 등 상주민 800여 명이 전원 산화했다. 이에 상주는 조세 감면의 은전을 받았지만 전쟁 뒤 남은 것은 지옥 같은 비참함뿐이었다.


상주 13개 문중 '낙사계' 만들어
1602년 아담한 건물 짓고 진료
흉년·춘궁기엔 빈민 구휼 활동
1782년 무고로 약방 철거 수난
서당·경로잔치 열어 명맥 유지
2009년 이후 해마다 시술 재현



임란의 뒤끝인 1599년 가을,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창석(蒼石) 이준(李埈), 석천(石川) 김각(金覺), 청죽(聽竹) 성람(成濫),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 일묵재(一默齋) 김광두(金光斗), 우곡(愚谷) 송량(宋亮),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이 있었다.

우복 정경세는 지역 양반들에게 의료원 설립을 건의하고 협력을 구했다. 당시 상주의 사족은 이미 16세기 중엽부터 선비들의 모임인 유계(儒契)를 결성해 향촌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1566년의 병인계(丙寅契), 1578년의 무인계(戊寅契) 등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흩어졌던 그들이 다시 뭉쳐 낙사계(落社契)가 꾸려졌다. 상주 남촌현의 청리·공성·외남·내서 지역 13개 문중으로 계원은 24명이었다. 진료는 성람이 맡았다. 율곡 이이의 제자이며 성리학자이자 실학자였던 그는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1604년 선조가 인후증과 실음증을 앓고 있을 때 치료에 차도가 없자 내의원에서 추천한 이가 바로 성람이었다.

창석 이준은 그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천300가지나 되는 병이 침공해 오는 데도 약은 한두 가지도 갖추지 못해 죽으니…. 동지들과 대략 약재를 모아 급할 때 쓰고자 한다. 진료하고 투약하는 일은 공(성람)의 일이라고 하니 성람이 마땅한 일이라고 여기었고, 여러 사우 또한 흔연히 참여를 원하여 협력하려 하였다.'

이렇게 현존 자료상 조선조 최초 사설 대중의료기관인 '존애원(存愛院)'이 창설됐다. '존애(存愛)'란 중국 송(宋)나라의 선비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딴 이름이다. '마음을 지키고 길러 타인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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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은 의료기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글 공부를 도와주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잔치도 열었다.

#2. 불인지심과 측은지심으로

늘 푸르다는 상주 청리(靑里)에 도연명이 태어난 고장과 이름이 같은 율리(栗里)가 있고 바로 그곳에 존애원이 있다. 오늘 복사꽃이 피었으니 도연명이 전하였던 도화원(桃花源)이 예와 다를까.

존애원 건물은 1602년에 건립되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조촐한 규모다. 수차례의 중수와 중건으로 그 원형은 다소 변형되었지만 매우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낙사계에서는 쌀과 베를 모아 중국의 약재인 당재를 구입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향약재는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채집을 맡겼고 일부는 존애원 앞 넓은 들에 직접 재배하기도 했다. 들은 지금도 '약배이들'이라 불린다. 약초를 길렀던 들이다.

존애원에서는 남녀노소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굶주리고 아픈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곧 선비의 도리이자 책무라고 믿었다. 그 마음의 뿌리에는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불인지심(不忍之心)'과 남을 측은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다.

존애원을 찾는 사람은 날로 늘어났다. 운영은 약재를 판매한 이윤 등으로 충당했다. 약재를 판매한 이익으로는 다시 약재를 구입했고 치료비를 약재로 받기도 했다. 흉년이 들거나 춘궁기에는 빈민들에게 곡식을 빌려 주었다. 그러나 갚는 이는 드물었다. 운영 자금이 부족해지면서 재정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준은 사람의 '인(仁)이라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어지지 않는 한' 존애원의 의료 활동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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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의 현판. 존애(存愛)는 '본심을 지켜 기르고 남을 사랑함'이라는 뜻을 지닌 중국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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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 내부에 걸린 편액.

#3. "크도다, 이 계()여!"

그러나 의료 활동은 200년이 안 돼 무너졌다. 1782년 상주지역의 한 향민에 의한 무고(誣告) 때문이었다. 약방이 철거되었고, 그간의 운영 기록이 모두 사라지는 수난을 겪었다. 1797년이 돼서야 마침내 존애원은 누명을 벗었다. 초계문신 이동(李)에 의해 전후 사정을 들은 정조(正祖)는 낙사계를 크게 칭송하며 말했다. '크도다, 이 계()여. 나도 이에 들리라.' 낙사계의 명칭은 '대계(大)'로 바뀌었으나 16년간 진료가 중단됐던 존애원은 이미 기반이 무너져 재개되지 못했다.

존애원은 그러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오늘날 경로잔치에 해당하는 '백수회(白首會)'가 그것이다. 1607년부터 지역의 노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시행된 백수회는 1894년까지 이어졌다. 백수회에서는 즉석에서 시를 짓는 '백장회(白場會)'도 열렸다. 특히 70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새해에 음식을 올리는 세의(歲儀)는 1940년까지도 지속됐으며 관례(冠禮)도 열려 1908년까지 이어졌다.

또한 존애원은 서당이자 배움터 역할도 했다. 1747년 간행된 '상산지(商山誌)'에 존애원은 서당으로 기록돼 있다. 진료가 중단됐던 시간에도 존애원은 예절교화와 후진양성의 장(場)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존애원은 1950년 제사를 지내는 단소(壇所)로 승격되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존애원은 한동안 세상에서 잊히는 듯했다. 그러다 문중 후손들의 노력으로 1956년 존애원 사적인 '낙사휘찬(洛史彙纂)'이 발간됐고, 1993년 2월에는 존애원이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2005년에는 처음으로 '존애원 의료시술 재현행사'가 열렸고 이후 2009년부터는 해마다 재현행사가 개최됐다. 또한 존애원 기록을 새롭게 모아 정리한 자료집인 '존애원지'가 2005년과 2007년에 발간됐다. 그리고 2007년 낙사계 참여 후손들을 중심으로 '존애원보존회'가 만들어졌다. 이들 후손은 지금도 해마다 음력 2월10일 존애원에 모여 선조들의 음덕을 기리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화재청 누리집. 상주시청 누리집. 경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경북도,1992. 김도완, 상주 낙사계의 존애원 설립과 운영, 안동대, 2018. 우인수, 조선후기 상주 존애원의 설립과 의료기능, 대구사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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