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 성석제의 '龍의 후예'

  • 입력 2021-05-24 18:21  |  수정 2021-05-3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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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득한 옛날, 넓디넓은 동쪽 벌판(沙伐)을 바라보는 터에 공갈못(恭儉池)이 만들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못 속에는 용이 살았다.


용은 겨울 한밤중이면 두껍게 언 얼음에 밭갈이라도 하듯 쪼개진 자국을 냈다. 그 때문에 밤새 천둥처럼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이튿날 나와 보면 한 자가 넘는 두꺼운 얼음을 거대한 쟁기로 갈라놓은 듯 도랑처럼 길게 못둑까지 이어지는 틈이 생겨나 있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추워도 그 틈은 얼지 않은 채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곤 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용이 얼음을 간 것이라고 하여 ‘용갈이(龍耕)’이라고 불렀다. 용갈이 자국이 얼마나 큰지, 좁은지 넓은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용은 세상의 물을 관장하며 강과 구름, 번개와 뇌운의 형상을 닮은 존재였다. 물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부들과 농부들이 생산한 오곡과 과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용은 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2.
어느날 상주 공갈못 근처에 살던 김생(金生 : 김 씨 성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 경주에 갔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도중에 김생은 지극히 아름다운 미인과 만났다. 평생토록 그렇게 어여쁜 여인은 본 적이 없는 터라 그는 가슴이 뛰기도 하는 한편 뭔가 두려운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다. 

 

나란히 걸음을 재촉한 두 사람은 대구 가까운 우명원의 숙소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방으로 들어오더니 물을 방안에 쏟고는 물의 기운에 감응하여 황룡으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김생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시 여인으로 모습을 바꾼 황룡은 “나를 도와 주겠다고 약속을 하시오. 아니면 오늘 저녁 이후 당신 목숨을 보전할 수 없소”라고 했다. 

 

김생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용녀는 붉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경주의 용담에 사는 용녀요. 사흘 뒤 저녁 공갈못에서 세 용이 싸움을 벌일 것이오. 그 중 청룡은 내 남편이 될 용이고 백룡이 내 혼사를 방해할 암룡이니 그 백룡을 죽여주시오. 내 반드시 그 보답을 후히 하겠소.”
 

김생은 그러겠노라고 굳게 맹세했다. 그러자 황룡은 기이한 향기를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사흘 뒤 김생이 공갈못에 도착하니 마침 저녁이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짙은 구름이 내려깔리고 나무를 뿌리채 뽑아버릴 듯한 폭풍이 부는가 하면 뇌성벽력이 치는 가운데 세 마리 용들 간에 필사적인 쟁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생은 칼을 빼어들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백룡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허리를 힘껏 칼로 내리쳤다. 그러나 겨냥을 잘못 하여 중간에 끼어든 청룡의 허리를 자르고 말았다. 

 

청룡은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피를 쏟으며 공갈못으로 빠져들어갔다. 그 사이에 백룡을 죽인 황룡이 김생의 앞에 다가오더니 “네가 내 남편을 죽였으니 네가 청룡 대신 나와 같이 살아야만 한다”고 했다.
 

김생은 체념한 얼굴로 집에 가서 부모 형제와 작별이나 하고 오겠다고 했고 황룡은 그러라고 허락했다. 김생은 집으로 가던 도중 갑자기 병이 들어 집에 도착한 뒤 죽고 말았다. 

 

집안 사람들이 크게 놀라서 무당에게 점을 치자 용신의 조화라 하여 못가에 제단을 쌓고 굿을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큰 굿판이 벌어졌다. 그러자 공갈못의 못물이 누렇게 물들더니 거대한 황룡이 나타났다. 

 

황룡은 제단을 향해 “당신이 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렸더니 이제야 오셨군요!” 하면서 흡사 팔로 사람을 껴안는 흉내를 내면서 다시 못 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부터 사람들은 가뭄과 물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 물 때문에 생기는 재해를 줄여달라고 공갈못의 용에게 빌게 되었다고 한다.

3.
공갈못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수하는 낙동강, 그 천삼백리 길에서 가장 빼어난 경승을 보여주는 상주 경천대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자리가 있다. 

 

제를 지낼 때 제관들이 춤을 추었기 때문에 춤추며 기우제를 지낸다는 뜻의 무우정(無雩亭)이 서 있는 곳이다. 경천대 수백 길 층암절벽 아래로 검푸른 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용소(龍沼)가 있다.
 

용소 물속에는 언제부터인가 용이 살고 있었다. 그 용은 물속에 실타래처럼 몸을 도사리고 있다가 경천대 바위 위에서 아이들이 용소를 내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기라도 할라치면 몸을 쭈욱 뻗어서 아이들을 확 잡아채어 물속으로 데리고 간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런데 경천대 바위에는 말에게 여물이나 물을 먹였다는 구유가 언제부터인지 생겨나 있다. 바로 그 말이 용소에서 나온 용이 변신한 용마였다.
 

용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바다의 이순신 장군처럼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서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불리는 불패의 명장 정기룡이 타고 다니던 말이다. 

 

정기룡은 젊은 시절 상주 낙동강 일대의 산야에서 무예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경천대 맞은편 낙동강 강변 드넓은 모래밭에 거대한 말 한 마리가 거침없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말은 일상에서 보는 과하마나 파발들이 타고 다니는 역마에 비해 훨씬 덩치가 커서 키가 팔척이 넘었다. 게다가 여간 사나운 기세가 아니어서 여느 사람들은 범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정기룡은 원래 이름이 무수(茂壽)였다. 어느날 그는 한양에 갔던 중에 종각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마침 그때 임금(선조)이 종각의 종을 용이 감고 승천을 하는 꿈을 꾸었다. 임금은 선전관을 보내 그를 데리고 오게 해서는 이름을 기룡(起龍)으로 바꾸도록 했으니, 그는 원래 용과 인연이 깊었다.
 

정기룡은 모래밭에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말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조심성이 많은 용마는 처음에는 허수아비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허수아비가 움직이지 않자 아느 순간부터 가까이 다가와서 발굽으로 툭 쳐보기도 하고 입으로 짚을 물어뜯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허수아비가 무해한 존재라는 걸 알고는 어린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듯 친숙하게 굴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정기룡은 허수아비 속에 몸을 감춘 채 용마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용마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전날처럼 다가와 몸을 허수아비에 비비며 가려운 데를 긁기까지 했다. 

 

기회를 잡은 정기룡은 재빨리 허수아비를 벗어버리고 용마 위에 훌쩍 올라탔다. 깜짝 놀란 용마는 사납게 몸을 흔들어 정기룡을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일찍이 마상무예를 최고 경지까지 연마한 적이 있는 정기룡은 몸을 찰싹 붙인 채 허벅지로 힘껏 말의 배를 조이며 갈기를 끌어당겼다. 

 

날뛰던 용마는 정기룡을 떨어뜨릴 수 없는 걸 알고는 폭풍 같은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장군을 내면 반드시 용마를 낸다고 했던가. 바로 그 장군이 정기룡이요, 말이 경천대 아래 용소에서 나온 용마였던 것이다.

4.
장군은 25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무장의 길에 들어섰다. 31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방어사 조경의 부장으로 출전, 금산에서는 포로가 된 조경을 필마단기로 구출해 나오기도 했다. 

 

고령에서는 홀로 적군의 진중에 돌입, 왜군 장수를 생포하고 여세를 몰아 적군 5백여명을 무찔렀다. 상주 용화동 싸움에서는 중과부적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혼자 적들의 앞에 나서서 현란한 마상무예로 왜적을 현혹한 끝에 이들을 유인하여 전멸시켰으며 화공으로 상주성을 탈환했다. 

 

화왕산, 성주, 의령, 경주, 울산 등의 총 60여 회의 대소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경상좌우병사 등의 벼슬을 지내고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올랐다가 진중에서 61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용마는 평지에서는 60척의 참호를 뛰어넘을 정도로 날랬으며 절벽과 험곡에서도 회오리바람처럼 빨랐다. 

 

장군이 전쟁에 승리하고 위태한 곳을 벗어날 때 용마는 언제나 장군과 함께 있었다. 전란이 끝나자 용마가 죽으니 장군은 깊이 슬퍼하며 제문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용마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있다. 상주의 국민관광지 경천대 입구 폭포 앞에 구국의 상징이 되어 장검을 비껴들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장군을 태운 채, 불꽃이 튀는 듯한 발굽을 치켜들고 갈기를 용의 꼬리처럼 휘날리며.
 

장군과 용마의 동상을 지나 고개를 넘어가면 예나 다름없이 빼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경천대가 나온다. 그 아래 검푸른 낙동강의 용소 속에 용마의 후손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한은.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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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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