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3> 이하석의 ‘우륵과 가야금’

  • 입력 2021-05-25 11:38  |  수정 2021-05-3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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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랑)
그것은 영원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라고 우륵은 생각했다. 가야금이 만들어져 우륵이 연주하자, “이 악기와 이 소리는 이후 우리가 열 천년의 세월을 넘어서까지 울릴 것”이라 한 가실왕의 마음이 그러했다.
 

우륵은 가야금을 사랑했다. 사람 사는 마을에서든, 숲에서든, 강가에서든, 산 능선 바위 위에서든 그의 탄주는 청청했다. 그 오묘한 소리는 사람들의 귀를 적시며, 바람을 타고 궁성에까지 흘러들었다. 가실왕이 그를 불렀다. 영민했고 비범한 왕이었다. 그의 탄주 소리를 익히 알고 있다면서 새롭게 12곡을 지으라 했다. “가야 나라들의 방언이 제각기 달라 이를 하나의 소리로 통일하기 위해서”라고 왕은 그 까닭을 밝히며,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우륵은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왕이 고맙고, 기꺼웠다. 거기다 그 소리로 어지러운 천하를 하나로 정연하게 통합하려는 꿈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의 소리가 단순한 연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세상을 고르고 융화하는 예악(禮樂)으로 거듭난다니, 얼마나 장하고 대견스러운 일인가?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왕성 가까운 골에 자리를 잡고는 음률을 새삼 가다듬기 시작했다. 잦은 여행을 통해 각 나라의 소리들을 채집하고 정리해나갔다. 그것들은 가야 각 나라의 사람 사는 모습과 산천의 기운과 삼라만상의 기미를 담은 소리로 거듭났다. 하도 열심히 소리를 모으고, 새로 그려내느라 그의 집에서는 가야금 소리가 밤이나 낮이나 그치질 않았다. 그 가야금 소리를 따서 사람들이 그의 동네를 ‘정정골’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런 열정과 성심으로 젊은 악성은 대가야 통합의 꿈을 지피는 열 두 곡을 집대성해냈다.
 

드디어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이 한 데 모인 자리에서 그 곡들이 연주됐다.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이’,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각 나라의 대표적인 소리들이 순화되고, 재해석되어 그 하나하나의 음악들이 보다 크게 통합되고 융화되는 느낌을 자아냈다. 그 소리들은 가야의 산과 강과 들과 숲을 흔들고 쓰다듬으면서, 그 안에 깃들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오롯이 담아냈다. “그래, 이 소리다!”라고 가실왕은 소리쳤다. “이 소리는 가야 각 나라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낸 소리다. 이제 가야 제국은 이 소리를 통해 통합해나가서, 마침내는 하나의 거대한 나라로 거듭나리라.”
 

“아아 얼마나 아름다운 꿈의 실현인가?”라고 우륵은 감격했다. 이 소리들을 통해 가야금이라는 악기는 크게 만방에 알려졌다. 천년을 내다보는 혜안과 신명에 의해 가야의 노래가 새롭게 열렸다.

2(버림과 지킴)
그러나, 위대한 노래일지라도 영원으로 온전히 이어지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가야금과 우륵의 노래를 사랑했던 가실왕이 죽자, 음악은 어지러워졌다. 새로 등극한 도설지왕은 예악의 꿈을 저버렸다. 가야금 소리를 음란한 술자리의 천박한 노래로 바꾸어버렸다. 거기다 도설지왕조의 난조의 정치상황은 차츰 망국의 기운을 띄어갔다. 말기의 정치는 어지러웠다. 한 때 가실왕의 개혁정치에 몸을 담았던 우륵의 입지는 좁아져가기만 했다. 무엇보다 대가야의 꿈이 서린 가야금과 가야의 음악을 지켜내기가 지난했다.
 

“아아, 가야금과 가야의 음악이 이것으로 끝난단 말인가?”하고 우륵은 탄식했다. 나라가 망하는 건 눈에 불을 보듯 번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야의 자취 역시 흩어져버리리라. 허망한 일 아닌가? 우륵은 가야의 기본 정신은 가야금과 노래에 있음을 굳게 믿었다. 그걸 지켜내야 한다. 그러나 망한 나라의 음악을 누가 지켜줄 수 있단 말인가? 우륵은 절망했다.
 

“서둘러 신라왕을 만나야겠다”라고 우륵은 마음먹었다. 신라의 진흥왕은 아직은 어리지만, 가실왕처럼 개혁적인 추진력으로 한반도의 정세를 바꾸려는 원대한 꿈을 지닌 왕재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에 의해 가야가 망한다 해도, 가야의 음악만은, 그 음악 속에 깃든 원대한 꿈과 화합과 원융의 기운만은 도외시하지 않을 게라고 우륵은 믿었다. 가뜩이나 대가야의 난조의 정치현실은 그를 구석으로 밀어내어 백척간두에 서 있는 형편이었으니, 이 쯤에서 대전환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신라로 망명했다.
 

“가야금을 지켜야 한다. 그게 가야의 꿈과 정신을 지키는 게다”라고 그는 함께 따라나선 제자 이문에게 거듭 말했다. 가야금부터 챙긴 다음 제자와 함께 한 것은 가야음악을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나 지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륵은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았다. 신라왕을 만나 가야금과 노래를 호소할 생각이었으나, 신라조정은 그에게 국원(國原:충주지역)으로 이주하라는 명을 내렸다. 모욕이었다. 망국의 슬픔에다 이런 수모까지 주어진 것이다. 우륵은 절망했지만, 가야금을 탄주하면서 끊임없이 가야의 노래를 상기시켰다. “아아, 고향의 노래를 부르자!”라고 그는 큰 강가에서 마음을 다지곤 했다.
 

세월이 흘러 제법 청년티를 내는 진흥왕이 그가 사는 지역을 순행했을 때 그의 노래를 들었다. 개혁과 통합의 의지로 불타던 열혈청년왕은 바로 그 음악을 이해했다. 그리하여 가야금과 그 노래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우륵의 악기와 노래는 망국지음(亡國之音)이니, 인정해선 안됩니다”라고 신하들이 말렸지만, 진흥왕은 “가야가 멸망한 것은 가야왕의 잘못이지, 음악의 잘못이 아니다. 음악은 인정에 연유하여 법도를 따르도록 한 것”이라며, 우륵의 노래를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우륵은 비로소 큰 숨을 쉬었다. 가야금과 가야의 노래를 그가 지켜낸 것이다. “됐다. 대가야 정신을 담은 이 악기와 노래는 천년을 넘어서까지 이어갈 것이다.” 그는 감격스러워하면서, 망한 고국을 떠올리며 울었다.

3(다시 사랑)
우륵이 죽은 지 천년이 지나, 또 수백 년을 더 지난 2010년의 봄. 꽃잎들이 비처럼 후둑이며 떨어지는 정정골에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륵박물관이 선 이곳에는 사철 가야금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박물관을 찾는 이들이 들을 수 있게 음향장치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내가 박물관 마당에 서서 그 소리에 젖는다. 떨어진 꽃잎이 바람에 수런대는 마당 너머 질펀하게 누운 들판 끝에 솟은 언덕 위에 서 있는 우륵기념탑과 우륵의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곳이 대가야의 의미있는 옛터임을 새삼 깨닫는다. “비로소 이곳에 온전히 터를 잡게 됐구나”하고 그는 중얼거린다. 대가야는 사라져 흔적조차 희미하지만, 그 역사의 숨결처럼 전해지는 게 가야금 소리다. 맑고 부드러운 그 음색은 대가야가 망한 후에도 살아남아서, 천년을 훨씬 넘게 우리의 산과 들과 강과 마을을 울리면서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는 그 소리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것이다.
 

마흔 두 살의 김동환. 박물관의 한 구석에 자그마한 공방을 마련하고, 가야금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인 고흥권 선생의 수제자. 서울에서 20년 넘게 가야금 제작에 혼을 바쳤다. 그러다가 5년 전 고령군이 박물관을 개관하면서 그를 초청, 이 곳에 터를 잡아주었다. “처음에는 어떨떨했으나, 차츰 이 곳이 가야금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여건이 어려웠으나, 가야금을 사랑하기에 그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버텨왔습니다.”
 

가야금은 오동나무 공명통 위에 안족을 놓고 명주줄을 팽팽하게 당겨 올려놓아서 소리를 낸다. 명주실을 여러 가닥으로 꼬아서 만든 줄을 물에 담가놓았다가 다시 삶아내는 등 공정이 까다롭다. “오동나무는 건조하는 데만 5년이 걸립니다. 좋은 소리는 좋은 나무에서 납니다. 나무를 깎고, 붙이고, 줄을 감아올리는 공정이 쉽지 않습니다.” 가족들과도 떨어져 이곳에서 생활하느라 외롭지만 이젠 가야금이 가족이라 여긴다.
 

작업공간이 좁아 바깥에서 명주를 꼬는 등 여건이 어렵지만, 그는 이 지역 애호가들과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가야금의 제작과 연주 체험을 도맡아하기도 한다. 차츰 가야금 주문도 들어온다. 영남대와 경북대, 동국대 등 대학교수들의 호감으로 이들 대학들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생활이 풍족할 만큼은 아니다.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야금 제작을 전수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곳이 가야금의 발상지 아닙니까? 우륵선생의 꿈이 천여 년을 훨씬 넘게 이어와 당신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그 자리에서 제게 닿는 건 놀라운 인연이지요. 이를 다시 천 년 만 년 너머로 이어낼 징검다리가 되는 겁니다. 그 역할을 제가 떠안은 듯 여겨져 설렙니다.”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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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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