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5·(끝)] 국파 전원발…元서 장원급제 '볼모' 같은 벼슬살이…과도한 고려 조공 절반 경감 이끌어

  • 김진규 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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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14 07:10  |  수정 2022-11-21 14:19  |  발행일 2022-11-14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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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궁면 무이리에 자리한 청원정(왼쪽 앞 건물)과 소천서원(오른쪽 뒤편 건물). 청원정(淸遠亭)은 원나라에서 귀국한 국파 전원발이 고향 무이리에 머물면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또 소천서원은 전원발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졌다.

볼모 아닌 볼모가 되어 원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지만 한순간도 자신이 고려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국파 전원발. 그는 원나라의 세금과 조공으로 인해 고국의 백성들이 흘리는 피땀에 힘들어했고, 그 피해를 조목조목 밝혀 세공을 절반 이상 감경토록 했다. 고려로 돌아온 전원발은 예천에 터를 잡고 후학을 가르치며 노년을 보냈다.

#청년 인재, 타국에 볼모로 묶이다

고려 1315년(충숙왕 2) 정월, 과거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른바 응거시였다. 본디 고려에서는 과거의 본 시험을 동당감시(東堂監試)라 일렀다. 하지만 원나라의 간섭이 극심하여 고려의 과거에 합격해도 원나라에 가서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고려의 젊고 유능한 인재를 데려다가 그네들의 입맛대로 휘두르겠다는 계산이었다. 이에 과거에 응시한다는 뜻의 응거(應擧)를 써서 응거시가 되었다.

이때 현서 달지리(현 문경시 영순면) 출신의 18세 청년이 문과에 합격했다. 응양군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전진의 아들,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생몰년 미상)이었다. 용궁전씨 시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전방숙(全邦淑)의 5세손으로, 전법총랑(典法摠郎) 전충경(全忠敬)의 증손이자 판도총랑(判圖摠郎) 전대년(全大年)의 손자이기도 했다.

전원발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원나라로 떠날 생각을 하면 심란하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불안했다. 하지만 고려는 힘이 없었다.


元 간섭 극심해 고려 과거 합격자 차출
다시 그곳 과거 치르게 해 인재 발묶어
타국 벼슬살이에도 고려인 정체성 유지
황제에 고국 대한 세공 폐단 따져 설득

귀국 미뤄가며 외교적 가교 역할 수행
공민왕 "中주인 바뀌어도 그대 덕에…"
예천 용궁 무이리의 성화천 일대 하사
고려 위해 일해 줄 걸 당부했지만 낙향



원나라로 차출된 전원발은 원칙대로 다시 그곳의 과거에 응시했다. 뜻밖에도 결과는 장원급제였다. 당시 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런데 몽골인도 아닌 고려인이 최고의 점수를 받은 것이다. 그토록이나 뛰어난 인재를 원나라가 호락호락 놓아줄 리 없었다. 전원발은 볼모 아닌 볼모가 되어 원나라에 발이 묶였다.

그런 상황에서 전원발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려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우뚝 서는 것이었다. 전원발은 사명감을 가지고 적응했고, 힘을 키웠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벼슬도 따라왔다. 병부의 고위관직인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집현전 고위관직인 태학사(太學士) 그리고 영록대부(榮錄大夫) 등에 올랐다.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정치적 입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조공 요구가 점점 과해진 것이다. 고려가 피폐해질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전원발은 순제(順帝·1320~1370)를 알현했다.

"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나라입니다. 세금과 조공의 폐가 지나칩니다."

조목조목 따지는 전원발의 논리에 순제는 납득했다.

"허락하노라. 아울러 그대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비단옷을 하사하겠다."

이로써 금·은·명주·말 등을 비롯한 세공이 절반 이상 감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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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궁면 무이리에 자리한 청원정.

#충신의 노후를 함께한 마을, 무이리

명나라 개국을 기점으로 전원발은 고려로 환국했다. 중간에 귀국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원 정부에 남아 외교적 가교역할에 충실했던 그를 공민왕은 진심으로 환영했다.

"중국의 주인이 바뀌었어도 그대 덕분에 세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피로한 백성이 안심하고 쉬게 되었으니 실로 공이 크다. 마땅히 상을 주리라."

공민왕은 말에서 그치지 않고 전원발을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한 뒤 예천 용궁 무이리의 성화천(省火川·현 금천) 일대를 하사했다. 아울러 고려를 위해 일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타국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나라가 간신으로 득시글거리는 것을 보고 전원발은 무이리로 향했다. 그리고 성화천 동쪽 바위 그윽한 자리에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눌러앉았다.

청원정은 당시로써는 보기 드문 평면 구조였다.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일자형에 온돌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마루방을 각각 1칸씩 두고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한 후 팔작지붕을 얹어 미학적 가치를 입혔다.

전원발은 이곳에서 노후를 보냈다. 세 벗이 종종 찾아와 함께 지냈는데 서북면도병마사와 정당문학 등을 역임한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 판삼사사와 정승 등을 지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삼사좌윤과 성균관대사성을 거친 척약재(척若齋) 김구용(金九容) 등 학식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성정이 맑은 인물이었다.

세 사람은 전원발의 재능이 아까웠다. 그중 김득배가 편지로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치자 전원발은 담담하게 답했다.

江 修鱗縱/林深倦鳥歸/歸田是吾志/非是早知機.

강이 넓으니 물고기가 자유로이 헤엄치고/ 숲이 깊으니 지친 새가 돌아오는구나/ 고향에 돌아와 밭을 일구는 것은 나의 뜻이니/ 세상이 괴로운 줄 일찍 알았도다.

제자도 가르치며 한가로이 소요하던 어느 날, 자정미수(慈淨彌授) 대사가 입적했다. 법상종의 유명한 승려로 왕의 신망을 얻었던 그의 죽음에 어명이 떨어졌다.

"속리산 법주사에 비를 세우라. 글은 이숙기가 짓게 하고 글씨는 전원발이 쓰게 하라."

전원발은 원나라에서 맹활약했던 인물답게 문장뿐만 아니라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전원발이 명을 받자와 '자정국존보명탑비(慈淨國尊普明塔碑)'를 일필휘지로 써서 올렸다.

전원발이 내려놓은 벼슬길은 그의 자손들이 대신 걸었다. 아들 전한(全한)은 사복시정(司僕寺正·사복시에 속한 정삼품)을 지냈고, 손자 전강(全强)·전근(全謹)·전경(全敬) 형제는 모두 장원급제하여 고위관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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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발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소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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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영순면 오룡리에 자리한 국파 전원발 묘소.

#나라를 살렸으니 소천(蘇川)으로 개명하라

전원발의 무게감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깊어졌다. 동방의 주자로 일컬어졌을 정도로 걸출했던 조선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전원발을 일러 이렇게 평가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을 지닌 군자요, 고인(高人·벼슬에 오르지 않고 고결하게 사는 사람)으로 백대에 스승이 되는 선비셨다."

광풍제월은 비 갠 뒤의 바람과 달을 가리켰다.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전원발의 인품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표현이었다.

이황의 칭송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周敦신)의 생애에 비견한 데 이어, 고려의 유학자로서 조선에까지 은덕을 베푼 명현(名賢)으로 표현했다.

그런 전원발이 살았던 곳답게 무이리 또한 충신의 마을로 거듭났다. 임진왜란 때였다. 당시 무이리에 은거하던 전 황해관찰사 백진양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출전했다. 얼마 뒤 백진양을 태우고 떠났던 말이 홀로 상처투성이로 돌아오다가 마을 앞에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말을 묻어주고 백진양을 기다렸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그의 의관과 유품으로 마을 앞산에 묘를 만들고 백장군산이라 불렀다.

바로 그 백진양이 활약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100년이 흐른 1698년(숙종 24)이었다. 임금이 일렀다.

"전원발이 중국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 부여된 세금과 조공의 폐해를 여러 번 아뢰어 수정한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공의 수량이 조선에까지 이르러 우리가 편안하게 되었다. 그 공을 어찌 잊으리. 성화천을 소천강으로 고치라."

소천강(蘇川江)은 글자 '소(蘇)'가 가리키는 대로 나라를 소생, 즉 되살렸다는 뜻이다. 마침 영남의 유림에서도 묘우(廟宇·신위를 모신 집)를 세우자는 의견이 제시되던 차였다. 이에 참봉 전찬(全纘)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찬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전원발의 8세손이었다.

"국파 어른은 세상에 드문 명현이시니 후손된 자로서 그 덕을 갚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이로써 소천서원(蘇川書院)이 세워졌고 전원발이 제향되었다. 1701년의 일이었다. 신도비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 훌륭한 도리와 아름다운 자취를 세상에 다 전할 수 없음이 한스러우나 그 현저한 훈업과 월등히 뛰어난 기절은 오백여 년을 거쳤음에도 다하지 않았다. (…) 그리고 이 글을 보거든 지나는 이 옷깃 여며 숙연하라'고 끝을 맺었다.

소천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8년에 지역 유림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아울러 임진왜란 시기에 소실되었던 청원정(경북도문화재 제533호) 또한 1918년, 생전의 전원발이 강의하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지금도 예천 용궁 무이리에 가면 청원정뿐만 아니라 '국파전선생유허(菊坡全先生遺虛)'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볼 수 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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