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5> 조선조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 ‘존애원’(상주)

  • 입력 2013-06-17   |  발행일 2013-06-17 제11면   |  수정 2021-06-02 17:55
온나라에 괴질 창궐 “계금서 출연 약재를 사고 주치의 두고 차별없이 진료”

◆Story Briefing


상주 존애원은 조선조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무렵인 1599년(선조 32) 유림들이 조직한 낙사계를 기반으로 설립됐다. 진료건물인 ‘존애당(存愛堂)’은 3년 뒤인 1602년에 세워졌다.

전쟁 직후여서 백성들은 전염병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약 한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더욱이 지방의 의료환경은 극히 열악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13개 문중(무송 윤씨가 빠져 지금은 12개) 24명(후일 30명)이 계를 모아 설치·운영한 것이 존애원이다. 질병으로부터 ‘향토민은 향토민이 구한다’는 취지였다.

존애원 설립은 상주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난 유학자 정경세를 비롯해 성람, 이준, 김각 등이 중심이 되었다. 지도층인 유림들이 동참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가 담겨 있는 민간 의료구휼 활동으로 평가 받고 있다. 존애원의 이름은 ‘본심을 지켜(存心) 만물(남)을 사랑(愛物)한다’는 뜻을 지닌 중국 송나라 학자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 사상에서 따왔다. 진료는 관에서 물러나 처가인 상주에 머물고 있던 성람이 맡았고, 운영은 계원들이 판매한 약재의 이윤 등으로 충당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5편은 백성을 위해 생명존중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상주 존애원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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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있는 존애원.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13개 문중이 뜻을 모아 세운 조선조 최초의 사설의료기관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백성들을 걱정하며…

초당(草堂)에 월계화가 피었다. 율촌 집이 임진년(壬辰年)에 불타 없어졌다는 전언을 들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저 꽃을 떠올렸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푸른 빛이 도는 앵앵거리는 파리 떼, 청승(靑蠅)을 피해 낙향해 이곳에 거처를 마련할 때 가장 먼저 저 꽃을 심고 싶었지만 구할 수 없었다.

“우복(愚伏) 대감, 또 꽃을 보고 계시는구려.”

뒤를 돌아보니 이준(李埈)이 종복도 없이 홀로 문을 들어선다.

“궁려(窮廬,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의 누추함을 저 꽃이 제 향으로 감싸기에 감탄하는 중이오.”

창석(蒼石) 이준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다. 그때 공교롭게 이질이 발병해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형 이전이 그를 업고 왜적과 싸우며 적진을 탈출해 백화산에 숨어 무사할 수 있었다. 후에 이준이 감복해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의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들이 그 그림을 보고 극찬하며 시를 짓기도 했다.

“소식을 듣자하니 남도로부터 괴질(怪疾)이 돌아 조만간 우리 고을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 하오.”

“저도 듣고 걱정하고 있던 참입니다. 참화(慘禍) 후엔 역질(疫疾)이 거르는 적이 없으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괴질은 근육 경련이나 발열은 없지만 소변이 나오지 않고 급속도로 탈수증세가 나타나 발병 며칠 후 곧 죽게 되는 무서운 병이었다. 온 산하 곳곳에 널린 말과 사람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균이 기근에 든 민초의 삶을 칼보다 빨리 쓰러뜨리고 있을 터였다.

“이제 그 병마가 우리를 덮치는 것은 일도 아닐 거요.”

이준이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더니 몸서리를 친다. 자신의 지난 병력과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환란에서 백성을 구휼할 방도가 조정에도 만무할 터. 제생원(濟生院), 의생방(醫生房)은커녕 혜민국(惠民局)이나 활인원(活人院)은 제대로 운영되는지 모르겠소이다.”

진휼의 어려움을 아는 이준이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나마 상주(尙州)는 민관군 800여명이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북천전투로 복호(復戶, 조세감면)조치를 받아 그나마 사정은 나았지만, 이태 전 정경세가 경상도 관찰사로 적을 두었을 때 살펴본 그 재정으로는, 괴질에 대한 대비책을 따로 세울 방도가 도무지 없어 보였다.

말을 이어가던 정경세가 갑자기 무릎을 쳤다.

“시보어물 유보어국(施普於物 有補於國, 널리 남에게 베풂이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하는 일)이라 하지 않았소. 우리 계(契) 말이오.”

상주는 인후지지(咽喉之地, 사람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지역)의 땅으로 국토의 중심지이자 전략적 군사 요충지였다. 때문에 왜(倭)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기도 했지만 충효와 의리있는 인물이 많이 나오고, 대동단결 또한 잘 되는 지역으로 이름 높았다. 불기당(不欺堂) 노기(盧麒) 등의 병인계(丙寅契), 참봉 윤진(尹) 등의 무인계(戊寅契) 등이 오래 전에 조직되어 상호 친목을 도모하고 출향인사와도 향사의 협력을 잘 유지해 오고 있었다. 임란 후인 지금은 물론 잠정적으로 모임을 중지하고 있었다.



#낙사계를 결의하다

“자, 저랑 어디 급히 좀 가 봅시다.”

“어딜 말입니까.”

“지금 조정을 믿고 있다간 아무래도 시간을 놓쳐 손쓸 도리가 없을 것만 같지 않소.”

“그러니까 향리의 일은 향리가 해결한다, 이 말씀이군요.”

“그렇소. 언제 괴질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촌각(寸刻)을 다투는 일이니, 먼저 의원부터 만나러 갑시다.”

“아, 청죽(聽竹) 말이군요.”

아호가 청죽인 성람(成濫)은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와 의학에 밝은 이른바 유의(儒醫)였다. 마침 임란 후 처가인 상주에 거처하고 있어 그들은 자주 달빛을 맞거나 시회를 가지며 꽃을 완상하곤 했다. 그가 잔볕에 말린 약재를 뒤적이다가 반갑게 맞았다.

“웬일들이십니까.”

자리에 앉아 서로 안부를 물은 후 정경세는 말을 꺼냈다.

“지금 온 나라에 괴질이 창궐했다 합니다. 모름지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 몸이 한서(寒暑)의 침해를 받아 저러한 병이 오는데도 한두 가지 약도 갖추지 못해 백성은 비명에 죽어갑니다. 그것은 바위 담장 아래서 질곡에 죽어가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눈이 시큰해지고 조갈(燥渴 목이 마름)이 왔다. 이준의 표정도 정경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성람은 짐작이 간다는 듯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동이 내어온 찻물로 목을 적시며 정경세는 말을 이어 나갔다.

“공께선 시와 서, 학문이 뛰어나고 황제(黃帝)와 같이 의약의 술법에 능통합니다. 공의 마음 또한 고인이 영사에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과 같으니, 어찌 저 고통을 막연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정경세는 어머니와 동생 홍세가 왜군에게 조총과 칼에 맞아 죽어가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임란때 의병을 꾸려 대항한 그도 안령산에서 적에게 화살을 맞고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입술이 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기미를 알아챘는지 이준이 옆에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동지와 더불어 약재를 모으겠습니다. 이제 병을 진찰하고 약을 조제하는 일은 공이 맡아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성람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튿날 정경세, 이준, 성람은 강응철, 김광두와 함께 향당의 장로인 송량, 김각에게 자문을 받아 병인계와 무인계를 합계(合契)하여 낙사계(落社契)라 이름 붙였다.

“낙사계를 결의한 이 자리, 계금에서 쌀과 베(布)를 출연하여 약재를 사고, 주치의를 두고 염가로 진료합시다. 약값에서 얻은 이윤으로 의국을 운영하되 진료는 지역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하는 것이 어떻겠소.”

남촌(청리, 외남, 공성, 내서 등) 지역 열세 문중의 스물네 명(후일 서른 명)의 낙사계원들은 흔쾌히 찬성했다. 조선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실로 상주는 향기롭기 그지없는 군자향(君子鄕)이었다. ‘본심을 지켜 만물(남)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중국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당호(堂號)를 따 이준이 ‘존애원기(存愛院記)’를 지었다.

대저, 남과 내가 비록 친소는 다르나, 한 가지로 천지간에 태어나 한 기운을 고르게 받은즉, 만강(滿腔)의 차마 못하는 어진 마음을 미루어 동포를 구활(救活)함이 어찌 사람의 본분을 다함이 아니랴… 유마힐(維摩詰)은 위(位)가 있는 자가 아님에도 능히 백성의 병을 보기를 자기의 병을 보듯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유자(儒者)이며 또 나와 남이 한 가지라 여기는 자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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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서는 매년 ‘존애원 의료시술 재연행사’를 열어 선조의 생명존중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2005년 처음 재연행사를 연 것을 계기로, 2009년부터는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경로효친과 예절교육의 장으로…


낙사계를 기반으로 설립된 존애원은 생명존중 정신의 집약체였다. 신분차별도 없었고, 지역의 경계도 없었다. 오로지 백성을 구휼한다는 인도주의 정신이 존애원의 근간이었다. 설립 당시 낙사계의 조약은 사중조약(社中條約)으로, 전체 11조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진덕근행(進德謹行, 덕으로 나아가고 행동을 삼감) ②과실상규(過失相規, 과실은 서로 간하여 고침) ③성애상접(誠愛相接, 성심과 사랑으로 맞이함) ④ 환란상구(患難相救, 환란은 서로 구제함) ⑤유경상하(有慶相賀, 경사시 서로 축하함) ⑥유상상조(有喪相弔, 상사에 서로 조문함) ⑦부의(賻儀, 초상시 베 3필, 풀자리 5장, 상지(常紙) 5권, 대지(大紙) 2권, 장례시 미곡 20두, 콩 5말, 보리 10말) ⑧존의(尊儀, 영전에 물건을 드림, 형편에 따라) ⑨선영개장(先塋改葬)과 비갈(碑碣)을 세울 때 쌀 20두 부조 ⑩회일(會日)은 봄 가을 중 달 보름, 우천시 연기 ⑪ 유사(有司)와 주계약장(主契約長)의 임기는 1년으로 한다.

부칙으로 ‘11목은 큰 강령이니 효제덕행(孝悌德行)을 근본으로, 위반이나 사사로이 여긴 자는 경계를 하되 그래도 뉘우치지 않으면 축출한다’고 밝혀 놓았다.

존애원의 의료활동은 1782년, 상주지역의 한 향민에 의한 무고로 중단되고 만다. 다행히 16년 후인 1797년, 누명을 벗었지만 의료사업 기반은 이미 무너져 맥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존애원의 설립 목적은 의료기관 운영에만 그치지 않았다. 경로효친과 예절교화의 장으로 역할을 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지금의 경로잔치인 ‘백수회’가 그것이다.

의료활동이 한창이던 1602년부터 1894년까지 매년 열렸던 백수회는 많을 때는 100명이 넘는 어르신들이 모였다고 한다. 존애원 설립을 주도한 정경세는 당시 백수회의 풍경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의 성인식과 같은 관례(冠禮, 남자는 상투를 짜고, 여자는 쪽을 찌는 성년례)도 존애원에서 열려 1908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또 1747년 간행된 상주의 역사기록인 ‘상산지(商山誌)’에는 존애원을 서당(書堂)에 포함시키고 있어, 교육기관의 역할도 맡았다.

수 차례 중수와 중건으로 그 원형은 다소 변형되었지만, 현재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가면 존애원 건물을 볼 수 있다. 2005년 ‘존애원 의료시술 재연행사’가 열린 것을 계기로, 2009년부터는 해마다 재연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존애원을 설립했던 낙사계(현 대계) 후손들이 2007년 ‘존애원 보존회’를 만들어 선조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20130617
글=박미영<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기획: pride GyeongBuk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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