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가기 딱 좋은 청정 1번지 영양] <9> 남이포와 선바위, 그리고 서석지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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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09   |  발행일 2020-11-09 제12면   |  수정 2020-11-27
칼로 산맥 자른 남이장군 전설 고스란히…뱃머리 같은 위용에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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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변천과 청계천(동천) 두 물길이 합류해 큰 강을 이루는데 이곳을 남이포라 부른다. 남이포에는 조선 세조 때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남이 장군의 설화가 전해진다.

어떤 맹렬한 시간이 저토록 날선 단애를 장대히 치켜세웠을까. 어떤 뜨거운 시절이 저 두 개의 물줄기를 성대히 만나게 하였을까. 그들은 길 가던 우리를 뚝 멈추어 세우고는 몸의 한가운데로 밀려 들어왔다. 벼랑의 머리에 수북한 진홍빛 숲이, 햇살에 스민 소슬바람에 살랑 흔들리는 나뭇잎이, 물결에 흩어지는 다채로운 담색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가을의 고요함이, 이토록 신비롭고도 현실적인 풍경이 눈앞에 아슴아슴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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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포 정면 맞은편에는 칼날처럼 하늘을 찌르는 선바위가 서 있다. 남이 장군이 산맥을 잘라 청계천 물길을 돌렸는데, 장군의 칼에 잘린 산맥의 흔적이 지금의 선바위라고 한다.

#1. 남이포와 선바위

일월산의 동쪽에서 반변천이 흘러 남쪽으로 간다. 일월산 서쪽에서는 청계천(동천)이 흘러 남쪽으로 간다. 두 개의 물줄기는 입암면 연당리 일월지맥의 무이산 남쪽자락에서 만난다. 예각의 벼랑이 돌올하게 솟아 우뚝하고 너른 물길이 유유한 그곳을 남이포(南怡浦)라 한다. 남이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맞은편에는 칼날처럼 하늘을 찌르는 바위가 헌걸차게 섰는데 선바위(立巖)라 한다. 남이포와 선바위에는 남이 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자 민간과 무속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추앙되는 바로 그 남이 장군이다.


겸재 정선 '쌍계입암' 배경된 선바위
칼날처럼 하늘 찌를 듯한 자태 뽐내
남이포 벼랑 물들인 진홍빛 숲 장관



옛날에 용의 아들인 아룡과 자룡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역모를 꾀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형제는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고 용의 아들이라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형제를 토벌하지 못해 골치였다. 이들을 벌하기 위해 조정에서 보낸 이가 남이 장군이다. 역도의 무리와 장군의 군사는 이 강변에서 대치하게 된다. 이후 치열한 칼싸움이 시작됐다. 남이 장군의 뛰어난 검술에 아룡과 자룡이 몰리게 되자 용의 재주를 가진 형제는 하늘로 솟구쳐 올라 공격해 왔다. 이에 장군도 용마의 힘을 빌려 날아 올라 대적하니 모든 사람이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남이 장군의 기합소리와 함께 아룡과 자룡의 목이 땅으로 떨어지자 관군의 함성이 강변에 진동했다. 역도의 괴수를 물리친 장군은 용마를 타고 유유히 내려오다가 높이 솟은 석벽에 자신의 초상을 검 끝으로 새겼다. 남이 장군의 현란한 무공을 본 역도들은 감탄해 앞다퉈 항복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 강변을 남이포라 불렀다. 장군의 초상은 아직도 석벽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을 쉬이 찾아내기는 어렵다.

장군의 무공은 역도의 토벌에만 그치지 않았다. 부근의 지형을 살펴본 장군은 청계천 물길을 돌리지 않으면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해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고 한다. 장군의 칼에 잘린 산맥의 흔적이 지금의 선바위다. 선바위는 겸재 정선의 그림 '쌍계입암'의 배경이기도 하고 이 지역 지명의 연원이기도 하다. 선바위 아래 작은 주차공간에 서면 마치 거대한 뱃머리 같은 남이포 절벽이 보인다. 남이포의 물가 둔덕에는 선바위를 조망할 수 있는 남이정이 자리한다. 그사이로 성대히 하나 된 천이 차츰 서늘해지는 가을의 마른 향기로 가득 차 담홍빛 미광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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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선비 정영방이 조성한 서석지. 가을이 짙어질수록 연못 주변에 늘어선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호방한 풍경을 연출한다.

#2. 서석지

선바위와 남이포를 석문(石門)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로 삼은 이가 있다.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선비 정영방(鄭榮邦)이다. 그는 석문에서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 무이산 서편 자락 연당리에 정자와 연못으로 작은 정원을 꾸미고 내원(內苑)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원을 둘러싼 바깥 세계를 외원(外苑)이라 했다. 정영방은 1610년부터 연당리에 초당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 정원을 구상했다. 그렇게 계획만 10년, 1620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해 인조 14년인 1636년에 주거공간인 수직사(守直舍), 서재인 주일재(主一齋), 정자인 경정(敬亭), 그리고 연못인 서석지(瑞石池)로 이뤄진 자신의 별서정원((別墅庭園)을 완성했다. 정영방의 정원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

마당의 전체가 거의 연못이다. 북쪽에는 네모난 단을 내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했다.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읍청거'를,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인 '토예거'를 내었다.


정영방이 16년 동안 조성한 서석지
조선시대 '3대 민가 정원'으로 꼽혀
400년 넘은 은행나무들 흙담가 장식



읍청거는 '맑은 물이 뜨는 도랑'이라는 뜻이며, 토예거는 '더러움을 토해낸다'는 뜻이다. 읍청거는 연못의 수면과 낙차가 있다. 물이 떨어지면서 작은 폭포가 되어 귀를 울리고 눈을 즐겁게 한다. 마을에는 원래 흰돌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연못을 조성할 때 땅속에서 나온 기괴한 형상의 돌을 '서석'이라 해 그대로 정원석으로 삼았다. '서석'은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이다. 그는 '경영잡영, 서석지'에 이렇게 썼다. '서석지의 돌은 속에는 무늬가 있고 밖은 흰데,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져 있다. (중략) 마치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군자와 같고 덕과 의를 쌓으며 저절로 귀함과 실속이 있으니 가히 상서롭다 일컫지 않겠는가.'

물 위로 드러난 서석은 60여 개, 잠긴 서석은 30여 개다. 이 서석 중 19개에는 이름이 있다. 신선이 노니는 선유석, 선계로 가는 다리 통진교, 바둑판 같은 돌 기평석, 바둑구경하다가 도끼자루 썩는다는 난가암, 읍청거로 들어온 물을 퍼지게 하는 분수석, 용이 누워 있는 와룡암, 구름이 떠 있는 상운석, 명예를 절로 끌어들이는 상경석, 나비와 희롱하는 희접암, 꽃과 향초 같은 화예석, 갓끈 씻기 알맞은 탁영반, 고운 눈이 흩날리는 쇄설강, 학이 구름을 머금은 봉운석, 낚싯줄을 드리울 만한 수륜석, 물고기 형상의 어상석, 물결 사이에 떨어진 별 같은 낙성석,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관란석, 하늘과 어우러지는 촛불바위 조천촉, 옥으로 만든 자 같은 옥계척. 이름에도 뜻에도 풍류가 있다. 이 중 와룡암은 제갈 양의 별명인 와룡 선생을 빗대었는데 '세상으로부터 은거했으나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뜻이란다.

서석지로부터 이 정원의 주인이 품었던 인생관과 욕망이 느껴진다. 서석지 흙담 가에 은행나무가 호방하다. 나무는 선생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는데 400년 넘게 자라나 숲처럼 대단해졌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이웃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데 주변 어디에도 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을이면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호젓한 장관이니, 연못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짝이라는 신기한 소문에 혹한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지명유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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