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2] 作家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9> 성석제가 만난 문경 묵조밥과 약돌 돼지
◆ Story Memo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과거길에 오른 선비와 보부상으로 늘 붐볐다. 이 때문에 문경은 손님을 맞고 보내는 일이 잦아졌고, 자연스럽게 길손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줄 수 있는 음식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음식이 묵조밥이었다. 한동안 맥이 끊기기도 했지만 50여년 전 문경의 한 식당에서 재현한 이후 전국에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문경은 일제강점기 시절 가은면과 마성면을 중심으로 탄광산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당시 광부들은 ‘몸에 쌓인 먼지를 씻어낸다’며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문경의 대표음식 중 하나인 약돌 돼지는 그 옛날 광부들의 애환과 맞닿아 있는 음식이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9편은 문경 묵조밥과 약돌 돼지에 대한 이야기다. 문경만의 독특한 지역성과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1. 예로부터 길손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예로부터 경상도 땅을 일컫던 영남(嶺南)은 문경새재, 곧 ‘조령(鳥嶺)의 남쪽 지방’이라는 뜻이니 영남의 시작이 문경이다. 문경에는 산이 많다. 영남은 큰 산과 험한 고개, 즉 태산준령(泰山峻嶺)에 비유되곤 하는데 문경에는 한국 100명산에 들어가는 대야산, 주흘산, 희양산을 비롯해 조령산, 운달산, 황장산, 포암산, 성주봉, 시루봉, 부봉, 대미산, 백화산, 도장산, 공덕산, 조항산 등 세기가 숨 가쁠 정도로 많은 산이 운집해 있다. 산이 많으니 고개도 많고 골짜기도 많다. 특히 여름에는 용추계곡, 선유동계곡, 쌍용계곡, 운달계곡, 새재계곡, 김용사계곡 등의 이름난 계곡이 5분 이상 발을 담글 수 없는 차가운 계류와 그늘, 시원한 바람으로 피서객을 불러들인다.문경새재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수많은 고개 가운데서도 가장 교통량이 많고 정치, 경제, 사회, 국방, 문화적인 중요도에서 으뜸 가는 고개였던 만큼 수많은 역사적, 문학적인 기록을 내장해 왔다. 조령, 새재에 관한 지명 유래는 여러 가지다.대표적인 것이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에서 왔다는 설이다. 또 ‘고려사지리지’ 등에서 초점(草岾)이라 하였으므로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조령보다 먼저 생겨난 북쪽의 하늘재와 이우릿재(이화령) ‘사이’에 있는 고개라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고 또 하늘재나 이우릿재보다 나중에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옛적에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때 새재 남쪽의 추풍령을 넘어갔다가는 추풍낙엽처럼 낙방할 것이라 못 가고, 새재 북쪽의 죽령으로 갔다가는 대나무 껍질을 밟고 죽 미끄러질 것 같아서 못 가 결국은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새재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것이 맞든 간에 새재가 험준한 산곡 간에 있는 중요한 교통로라는 점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2. ‘길손들의 음식’ 묵조밥 이처럼 산이 많은 척박한 땅에 살며 손님을 맞고 보내는 일이 많았던 문경 사람들이 만들어낸 특유의 음식에 묵조밥이 있다. 새재의 남쪽에 있는 ‘소문난식당’에서 50여년 전에 문경 지역 전통 음식인 묵조밥을 되살려낸 이후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으며 맥을 이어가고 있다. 묵조밥은 묵과 조밥으로 구성된다. 조밥은 원래대로 하자면 좁쌀로 지은 밥이다. 좁쌀은 조의 껍데기를 벗긴 곡물이다. 쌀, 보리, 콩, 기장 등과 함께 오곡(五穀) 가운데 하나였던 조는 건조하고 척박한 산비탈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다. 차조와 메조로 구별되는데 밀·보리를 수확한 뒤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씨를 뿌려도 된다. 쌀이나 보리와 함께 주식의 혼반용으로 많이 쓰고, 엿이나 떡, 술, 풀, 새먹이 등으로 이용된다. 조의 짚은 연료 또는 가축의 사료, 지붕 이는 데, 땔감 등에 쓰이기도 한다. 민간약으로도 많이 썼는데 ‘본초습유(本草拾遺)’에서는 “좁쌀을 물에 끓여 먹으면 복통과 코피를 다스리고,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즙을 먹으면 모든 독을 푼다. 곽란 및 위통을 다스리며 또 놀라는 병을 다스린다”고도 했다. 뜨물은 갈증을 그치게 하고 차좁쌀은 폐병을 다스린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조는 알곡이 작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데 비해 놀라운 효능과 쓰임이 있는 작물이며 구황식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묵조밥의 조밥은 좁쌀로만 지은 밥은 아니고 쌀에 조가 혼합되어 있는 형태다. 채썰기 한 도토리묵 혹은 청포묵에 좁쌀을 섞어 지은 밥을 넣고 여기에 발효시킨 무와 김치, 오이, 미나리 등을 채쳐서 얹은 후 김가루와 껍질을 벗겨 볶은 들깻가루로 섬세하게 고명을 하여 참기름과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음식이다. 취나물과 애호박나물, 도라지, 고사리, 표고버섯, 우엉, 숙주나물 등 12가지의 제철 반찬이 알맞은 양으로 따라 나온다. 필자가 갔을 때는 전국 어느 식당에서든 좀체로 보기 힘든 가죽나물 무침이 나왔다. 더운 여름에 연세든 어르신들이 도토리묵과 청포묵을 직접 쑤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도토리는 인근의 산에서 주워오고 청포묵의 원료인 녹두는 계약재배로 들여오는 것이라고 했다. ‘소문난 식당’에서 나오는 ‘묵조밥 정식’은 묵조밥에 조죽과 더덕무침, 녹두빈대떡이 더해진 것이다. 구황식품인 도토리와 조가 주요 재료이기는 하지만 원래 묵조밥은 아무나, 아무 때나 먹는 게 아니었다. 양반가에서 혼례같은 경사스러운 대사를 치를 때 귀한 손님에게 새벽참으로 내는 고급 음식이라고 한다. 묵조밥 밥상을 받으면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이 나는 것은 그래서인 것 같다. 매끄러운 묵 덕분에 조밥을 넣으면 입 안에 씹힐 듯 말 듯 부드럽고도 담백하다. 그 맛을 오래, 제대로 보려면 천천히 먹는 게 좋다. 그 꾸밈없는 맛은 산과 숲, 계곡의 자연에서 나오는 것 같다.
#3.‘탄광의 애환’ 약돌돼지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0년대부터 한적한 문경의 산곡간에 산과 바위를 깨뜨리는 다이너마이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시커먼 석탄 광석을 실어내는 검은 화물 기차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가은면과 마성면을 잇는 탄맥을 채굴하는 거대한 광업소가 생겼고 지역 이름을 따서 ‘은성탄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전국에서 ‘검은 황금’을 캐내는 일에 종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탄광촌과 아랫마을이 번성하고 돈이 돌았다. 문경에서는 돈 자랑을 하지 마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겼다고도 한다. 석탄 채굴은 탄광이 완전히 폐쇄된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지하 8㎞의 막장까지 내려가 석탄을 캐는 광부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달픔과 위험, 애환이 존재했다. 막장의 온도는 30℃가 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더운 막장을 ‘월남 막장’이라고 했다. 광부는 갱내에서 쥐를 발견하면 안심하고 작업을 하는데 쥐는 유독가스에 예민하고 출수사고나 붕괴사고를 미리 예감하는 것으로 믿고 있어서 쥐가 보이지 않으면 위험이 높은 것으로 생각했다.총연장 400㎞나 되는 갱내에서는 긴 팔 옷과 긴 바지를 입고 방진마스크를 쓰게 되어 있지만 방진마스크와 상관없이 진폐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낙반사고와 매몰사고 또한 잦았다. 그야말로 탄광의 막장은 인생의 막장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고단한 일과를 마친 후 광부들이 가장 즐겨 먹던 음식은 돼지고기와 막걸리였다. 돼지비계가 몸에 쌓인 먼지를 씻어내린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최근 연구결과에서 돼지고기의 지방이 중금속과 황사 속의 미세먼지를 씻어내는 효과가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돼지고기에 많이 함유된 불포화지방산이 장기나 인체 내부에 쌓인 유해 물질과 결합해 독성을 가라앉히고 이를 몸 밖으로 배출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돼지고기에 들어있는 메티오닌과 시스틴 등의 아미노산은 나프탈렌과 벤졸, 납 등의 체내 흡수를 막아준다. 돼지고기를 먹고 몸속의 먼지와 탄가루를 씻어내려던 광부들이 사라지고 난 뒤 가은읍 일대에서 화강암의 일종인 거정석(巨晶石)이라는 돌이 발견됐다. 국내에서는 문경 일대에만 분포하는 거정석은 홀뮴(Ho: 피부질환, 간암치료제로 사용), 게르마늄(Ge: 살균작용), 셀레늄(Se: 중금속 제거작용) 등 인체에 유익한 약리작용을 하는 희귀원소를 함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문경 사람은 이 돌을 부르기 편하게 ‘약돌’이라고 한다.약돌 분말을 음용하거나 입욕제로 쓰는 등으로 활용법을 궁리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약돌 가루를 사료에 섞어 돼지를 사육했다. 모든 포유류가 목뼈의 숫자가 같은 것처럼 사람의 몸에 유익한 게 돼지에게 좋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약돌을 먹여서 키운 돼지가 그렇지 않은 돼지에 비해 건강하게 잘 자랐고 고기 맛 또한 좋다는 데 많은 사람의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문경 약돌돼지’이다. 약돌 돼지고기는 쫄깃쫄깃하고 부드러우면서 맛이 좋고, 입안에 기름기가 남지 않아 산뜻하기 때문에 구워 먹어도 좋지만 문경에서는 이것을 석쇠구이 또는 샤브샤브로 많이 해 먹는다. 그 중에서도 ‘솔잎한방돼지찜’은 삼겹살과 족살을 한약재와 인삼, 새송이, 호두, 마늘, 은행 등 13가지 재료와 함께 쪄낸 문경만의 음식이다. 약돌 한우도 등장해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고 사육한 한우의 고급스러운 육질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석탄 만한 약돌이 없었다. 이 검은 약돌은 편리한 만큼 귀하고 비싼 석유를 대신해 서민들을 추위로부터 막아주었다. 연탄화덕으로 밥을 해먹기도 하고 머리 감을 물을 데우고 빨래를 삶기도 했으니 이 약돌이 없었으면 우리 민족이 지난 세기를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지금도 연탄은 양로원이나 보육원처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이나 독거 노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연료이다. 또한 연탄 돼지갈비처럼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조리할 때 쓰이기도 한다. 이제 문경의 약돌은 건강과 입맛을 상징하는 물질이 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문경이라는 지역 자체가 이 나라에서 귀한 약돌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성석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공동기획: 공동기획:pride GyeongBuk채 썬 묵과 좁쌀을 섞어 지은 밥을 갖은 나물과 비벼먹는 묵조밥. 손님을 맞고 보내는 일이 많았던 문경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역의 토속음식이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거정석(약돌) 가루를 섞은 사료로 키운 문경약돌돼지고기 솔잎한방 돼지찜.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2012.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