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17> 우광훈의 ‘나는 태백산 호랑이다’ 신돌석 스토리 (영덕)
영덕에서 태어난 신돌석은 평민으로서는 처음으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야욕에 맞선 의병장으로 유명하다.1896년 을미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자, 3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일제에 무력으로 맞섰다. 특히 태백산맥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면서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려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다. 당시 신돌석은 교묘한 게릴라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의병부대가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그의 의병부대가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꿈꾸었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서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영남일보의 ‘신돌석 스토리’는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의병에 가담한 뒤 ‘태백산 호랑이’로 불리면서 활동한 신돌석의 신출귀몰한 의병 스토리를 담았다.나는 태백산 호랑이다. 본명은 신태호(申泰好), 자(字)는 순경(舜卿), 아명(兒名)은 돌석이다. 나의 키는 오척육촌, 골격이 남달리 굵고, 얼굴 역시 크고 넓다. 피부는 검은 색, 얼굴엔 천연두의 흔적이 뚜렷하다. 나는 불효자요, 한 여자의 부덕한 지아비다.나는 지금 천하 제일의 요새 수동(水洞) 희암곡(喜庵谷)에 웅크리고 앉아 겨울을 나고 있다. 내가 이곳을 겨울 안식처로 선택한 것은 산과 고개가 험준하고, 골이 깊기 때문이다. 특히 수동저수지로 이어지는 길목은 입구가 매우 좁아 그 어떤 적의 공격도 쉽게 막아낼 수 있다. 내 옆에는 화냥총이 세로로 길게 세워져 있다. 날 따르는 부하들은 화톳불 옆에 모여 앉아 있다. 그들은 곡주를 들이켜면서 어젯밤 야간행군으로 인한 피로를 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나와 같은 평민이요, 농민이다. 오로지 나를 믿고, 구국(救國)을 염원하는 이 나라의 충성스러운 백성이다.나는 을미사변에 분개해 열여덟 어린 나이로 의병에 가담했다. 그 당시 나라는 참으로 위태로웠다. 왜(倭)의 괴한이 경복궁에 난입해 국모를 살해하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머리카락은 단발령이라는 미명 아래 단칼에 잘려나갔다. 상상조차 못할 치욕이었다. 나는 처음 김하락이 이끄는 의병에 종사했고, 간간이 영해 의진을 도왔다. 우리는 첫 전투에서 관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천지가 개벽하는 환희를 맛보았다. 하지만 남천쑤전투에서 육로와 수로로 엄청난 관군이 밀려들자 전세는 역전되었고, 우린 결국 참패했다. 대장 김하락은 양 어깨에 총을 맞고 강물 위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우린 결국 갑주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의 엄한 명으로 혼인했다. 아내는 축산면에 있는 청주한씨. 하지만 나의 머릿속은 온통 의병에 대한 생각과 남천쑤전투에 대한 울분 뿐이었다.1904년. 내 나이 스물일곱 되던 해였다. 청나라를 이 땅에서 몰아낸 일본이 드디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의 승자가 조선을 차지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구국에 앞장서야 할 대신들은 벌써 왜의 앞잡이 노릇에 혈안이 돼 있었고, 조선의 외교권과 군사권이 곧 일본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소식이 현자 사이에서 떠돌았다. 그렇게 무수한 풍문의 끝은 항상 망국(亡國)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동네 사당에 모여들어 임금의 용안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향을 피워 조선의 재기를 기원했다.나 역시 숱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분개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매일 새벽이면 월송정으로 향했다. 울창한 송림과 아담한 정원을 지나, 밤하늘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듯한 검푸른 연못을 가로질렀다. 달은 저토록 휘영청 밝은데, 내 마음은 한없이 어두웠다. 월송정에 올라서면 울분에 잠긴 민초들의 목소리가 마치 들불처럼 나의 귀 속을 뜨겁게 휘저었다.나는 매번 그 한서린 구릿빛 얼굴을 향해 굳은 의지로 답하였다.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다음 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구국을 향한 열띤 함성이 온 나라를 뒤덮었다.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고, 무력으로 항거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1906년 4월, 참꽃 만개한 봄이었던가. 나는 본가에서 약간 떨어진 김춘궁의 집 앞에서 300여명의 청년들과 함께 거병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운명, 영릉 의진의 시작이었다. 의진이 결성되자, 친일하는 이들이 나에게 달려와 가족의 안위를 들먹이면서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나는 결국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 국동(菊洞) 깊숙한 골짜기에 내 부모를, 미곡(美谷)의 한 나루터 근처에 내 아내와 아들을 숨겨야만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숨는 것은 나의 흔한 일과요, 피할 수 없는 업보였다. 나는 평생을 숨고, 또 숨었다. 그렇게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태백산 그 깊은 주름 속에 고스란히 숨겨둘 수밖에 없었다. 태백산을 벗어나면 나는 모든 것이 위험했다.1906년 6월 영남지역에서 연일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임금은 각 지방의 의병활동을 중지하라는 조칙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건 조선통감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우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항전을 계속했다. 관군의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 관아를 공격하고, 무기고의 무기를 강탈했다. 곡식이나 옷감을 주민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일제에 종사하는 자들은 매로써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통감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휘사 나호와 중대장 권후를 시켜 우리를 공격했다.보름여 간, 태백산맥 허리를 몇 번이고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진위대는 집중적으로 우리를 공격하였지만,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더위와 게릴라전에 지친 토벌대가 물러나자, 우리는 진열을 가다듬은 뒤 먼저 울진 관아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지난 번 전투로 인해 부족해진 무기와 식량을 보충한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나의 고향, 영해로 진격하였다. 그 날이 아마 6월26일이었을 것이다. 고향으로 향하면서, 나는 나의 불운을 탓하였다. 내가 나고 자란 땅과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온 백성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 의진을 통감부에 고발하고, 그것도 부족해 군사를 요청한 영해군수를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영해읍성에 도착한 우리는 계획대로 읍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서문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다. 수비하던 관군들은 결국 우리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남문으로 도주하였다. 읍 안으로 들어서자, 격정을 누르지 못한 선봉장 이하현이 마을에 불을 질러대기 시작하였다. 내가 염려하던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그를 제지하였다.“성 안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오로지 불의한 무리만을 처단하도록 하라!”관아를 지키는 무리들은 순순히 투항하였다. 그렇게 영해읍성을 손쉽게 점령한 우리는 영해군수의 죄상과 거의(擧義)의 정당성이 담긴 방(榜)을 곳곳에 붙이고, 향인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영해군수는 세 가지 죄가 있으니, 의병을 효유한다며 대의에 항거한 죄가 첫째요. 군대를 청하여 의병진을 토벌하려 한 죄가 둘째며, 왜학(倭學)을 설치하여 인민을 무도한 길로 빠지게 한 죄가 그 셋째이다. 때문에 거의하여 이를 토벌하노니 그 죄를 받아라. (황성신문 1906년 7월3일자)
나는 영해군수를 나의 임시거처로 불러 그의 죄를 호되게 꾸짖었다.“너는 나와 같은 조선인이 아니더냐? 그런데 어찌하여 왜에 항거하지 않고 나를 해하려 드는 게냐?”하지만 넋나간 표정으로 무릎 꿇은 그의 초췌한 모습 앞에서 더 이상 죄상을 따진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그를 감옥으로 물리었다.이틀 뒤, 대규모 토벌대가 다시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는 서둘러 고향을 떠나야 했다. 고향은 참으로 오랜만이었고, 머무는 내내 우울하였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면서 이번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내 부하들이 저질러놓은 저 재난의 흔적들이 두려웠고, 증오가 더 큰 증오를 낳고, 복수가 더 큰 복수를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가 두려웠다. 끝없이 되풀이될 이 민족상잔의 암울한 미래가 두려웠다.천하의 일은 분분히 어지러운데우연히 이 서당에 올랐네.진보군 석보에 있는 석천서당(石川書堂)에 올라 시 한 수를 읊고, 일월산으로 향하고 있을 때쯤 한 통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내가 살던 집과 이웃 친척집들이 토벌대의 만행으로 모두 불태워졌다는 것이었다. 치졸한 복수극의 시작. 물론 예상하였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분개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 섣불리 전투를 시작할 수 없었다. 때를 기다리며 참을 줄도 알아야 했다. 이게 겨울의 운명, 나의 운명인 것을.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숨고, 또 숨는다.<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신돌석 장군의 생가. 1940년 일본 관헌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로 불태워 일부가 소실됐으나, 42년 상량주 연목 일부를 새로이 세우고 기와집으로 꾸몄다. 현재의 초가로 복원한 때는 95년이다. 이곳에서 2.3㎞ 떨어진 곳에 ‘신돌석 장군 유적지’(아래 사진)가 자리잡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2011.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