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6] '시대의 충신' 사육신 박팽년(1417~1456)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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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30   |  발행일 2020-07-30 제13면   |  수정 2020-12-01
"두 임금 섬길 수 없다" 단종 복위에 목숨 바친 충절의 표상
15세에 생원시 합격, 좌승지 등 역임
문장·글씨 뛰어나 '집대성'으로 불려
세조 왕위찬탈에 맞서 단종 복위운동
집성촌 하빈 묘골 육신사에 위패 모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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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육신사 경내 오른편에 위치한 태고정.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중기 정자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554호로 지정됐다.


대구 달성에는 '충절(忠節)'의 의미를 되돌아 보게 하는 공간이 있다. 조선시대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다. 육신사가 달성에 터를 잡은 이유는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후손들이 하빈면 묘골에 세거 집성촌을 이뤘기 때문이다. 박팽년은 집현전 정자부터 형조참판에 이르기까지 20여년간 관직 생활을 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올곧은 성품은 타의 모범이 됐고, 문장과 글쓰기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행장이나 문집이 전해지지 않지만 몇편의 시와 서문 등이 남아있어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서슴없이 죽음을 선택한 '시대의 충신'이었다. 그의 절의는 시대를 거슬러 오늘날까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6편'에서는 사육신 박팽년의 삶에 대해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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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인 숭정사에는 박팽년 , 하위지,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 '사육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문장·글씨 모두 뛰어난 집대성

박팽년은 1417년(태종 17) 한석당 박중림(朴仲林)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인수(仁수),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그는 어릴 때 부터 학문에 대한 소양이 깊었다. 15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한 뒤 2년 만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세종은 일찍이 그를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발탁해 중용했다. 1438년에는 호당(湖當)에 선발돼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47년(세종 29) 중시에 합격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젊은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다.

세종 연간 박팽년은 집현전의 정자(正字)·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직집현전(直集賢殿)·직제학(直提學)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당시 그는 집현전 학사로 다양한 편찬 사업은 물론 한글 창제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당시 집현전의 젊고 유망한 학사들 가운데 학문과 문장, 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렸다.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이석형(李石亨)·유성원(柳誠源)·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하위지(河緯地)등 기라성 같은 인물 가운데 최고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의 문장은 부드럽고 담담했으며, 필법이 유독 뛰어났다고 한다. 성격은 과묵하면서 침착했다.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으며, 하루 종일 앉아있으면서도 의관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명나라 6대 황제인 정통제(正統帝)가 오랑캐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침실을 마다하고 밖에서 짚자리를 깔고 지냈다. 주위에서 그 연유를 묻자 그는 "천자가 오랑캐에 잡혀 있으니 비록 남의 나라 신하이기는 하나 차마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의 충절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팽년은 세종에 이어 문종에게도 총애를 받았다. 문종이 그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부탁했을 정도다. 문종은 어느 날 밤,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들여 무릎에 단종을 앉히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며 술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 자리엔 성삼문과 신숙주 등이 동석했다. 단종 즉위 이후 그는 집현전 부제학,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 左副承旨)·승정원 우승지(右承旨),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등을 거치며 소임을 다했다.

◆오직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1455년 조선사회는 급변한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다. 앞서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직후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등을 차례로 죽이고 이미 정권을 잡은 터였다. 왕위 찬탈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 했다. 성삼문의 간곡한 만류 끝에 그는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박팽년은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임명됐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金)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은밀히 추진, 거사일을 6월1일로 잡았다.

이날은 세조가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가 예정돼 있었다. 연회 때 별운검(別雲劒)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세조를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 시위(侍衛)를 폐지했다. 결국 거사가 미뤄졌고, 파국으로 치달았다.

거사 실패를 두려워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했고, 박팽년과 성삼문 등은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능을 높이 사 회유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했다. 더욱이 그는 국문(鞠問)자리에서도 세조에게 '나으리'라는 호칭을 썼다. 이에 세조는 "그대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 칭했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 감사로 있을 때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답했다. 실제 박팽년은 충청 도 관찰사 시절,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심한 고문을 당한 박팽년은 같은달 7일 옥중에서 숨졌다. 이튿날 그의 아버지 박중림과 동생 박인년(朴引年)·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 아들 박헌(朴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됐다.

죽기 전 그는 "나를 난신(亂臣)이라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를 지켜 본 금부랑 김명중(金命重)이 "어찌하여 이러한 화를 스스로 자처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마음이 평안하지 않아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충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선비의 절의를 끝내 지켜낸 셈이다.

생육신(生六臣) 중 한 명인 남효온(南孝溫)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박팽년 등 사육신의 충절을 추모했다. 이후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는 사육신으로 추앙받게 됐다.

숙종대에 이르러 박팽년은 복관(復官)됐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증직됨과 더불어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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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위치한 도곡재는 살림집으로 지은 건물이었으나 1800년대 들어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됐다.

◆하늘의 뜻을 받아 대를 잇는 충절심

사육신 가운데 박팽년의 가문만 유일하게 직계 혈손으로 계통이 내려온다. 이는 하늘이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멸문의 화를 당했을 당시 박팽년의 아들인 박순의 아내 이씨가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친정인 대구로 내려간 이씨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려고 했다. 이씨가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다. 이때 공교롭게 박팽년의 여종 또한 딸을 낳았고, 서로 자식을 바꿨다. 목숨을 부지한 박순의 아들은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훗날 박비는 장성한 뒤 경상감사로 온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의 권유로 자수했다. 성종은 특별히 이를 용서하고 일산(壹珊)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가문의 명맥을 비로소 잇게 된 순간이었다.

박팽년의 충절심은 대를 이어 재현된다. 박팽년의 5세손인 박충후(朴忠後)와 박충윤(朴忠胤), 박충서(朴忠緖)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박충후는 무과에 급제한 뒤 통정대부·가선대부를 거쳐 태안군수·함안군수를 역임했다.

박충윤의 아들인 도곡(陶谷) 박종우(朴宗祐)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587년(선조 20) 하빈면 묘골에서 태어난 박종우는 어려서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에게 수학했다. 서사원과 교유한 백부와 부친의 영향이 컸다. 그는 일찍이 문예에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19세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한결같이 두 스승에게 나아가 바로잡았다고 한다. 또 정구가 고을 사람에게 무고를 당하자 한달음에 달려가 변론하는 등 스승의 일을 제 일인 양 도왔다. 그의 성품과 됨됨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종우는 1630년(인조 8) 한성시에 책문으로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6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전장에 나가길 원했으나 아흔의 양친을 두고 차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대신 적을 막을 9가지 방책을 관찰사 심연(沈演)에게 진언했다. 그는 또 "주상께서 포위돼 있는데 내가 비록 초야의 미천한 신하이나 어찌 침소에서 편안히 거처하겠는가"라며 50일 동안 길바닥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듬해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통곡하며 평생 쓴 초고를 모두 태워버렸다. 당시 그는 "백성들이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갓과 신이 뒤바뀌며 풍속이 변하고 바뀔 것인데 차마 죽지는 못할지언정 글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후 그는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호하고 19년간 두문불출하며 평생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달성 십현(十賢)으로 꼽히는 그는 사헌부 지평에 추증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 =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추적·박팽년·곽재우, 대구달성교육청. 도곡선생문집, 한국국학진흥원.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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