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9] 양직당 도성유(1571~1649)와 서재 도여유(1574~1640)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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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0   |  발행일 2020-09-10 제13면   |  수정 2020-12-01
한평생 강학에 힘쓴 '달성십현'…임진왜란·이괄의 난 때 공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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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는 도성유와 도여유, 도신수를 배향하는 용호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 입구인 입덕문을 지나면 용호서당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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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서원은 흥선대원군 집권기 때 훼철된 뒤 용호서당으로 개칭됐다. 이후 강당만 복원돼 용호서당 현판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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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서당 아래 쪽에 위치한 치경당은 묘소가 전해지지 않는 성주 도씨 시조 도순과 3세조 도유도, 도유덕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대구 달성의 명망 높은 가문 중 성주 도씨(星州 都氏)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 개국공신 도진(都陳)때부터 팔거에서 세거하던 성주 도씨는 경상좌도 병마우후 도흠조(都欽祖)가 하빈현 도촌리로 이거하면서 뿌리를 달성에 두게 됐다. 달성에 입향한 이래 문·무과에 급제한 교지가 24매에 이를 정도로 도씨 가문은 학문을 숭상하는 가풍을 올곧게 이어왔다. 또한 서예와 시, 글짓기에 뛰어난 이들이 많아 다양한 문집이 전해져 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직당(養直堂) 도성유(都聖兪)와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달성십현(達城十賢)에 오를 정도로 학문과 인품이 남달라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9편'에서는 양직당 도성유와 서재 도여유의 삶에 대해 다룬다.

대구 유학 문풍 계승한 도성유
한강 정구·서사원 스승으로 모셔
임진왜란 때 의병 군량 조달 임무
이황 문묘종사 위해 상경 상소도

후학 양성에 힘쏟은 도여유
병자호란 끝난후 학문에만 전념
이괄의 난 일어나자 향병 모집
다사읍 서재마을 유래는 그의 號

◆대구 유학의 문풍을 계승

도성유는 1571년(선조 4) 8월22일 세상에 나왔다.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에게 수학했다. 권응인은 당시 송대의 시풍이 유행하던 문단에 만당(晩唐)의 시풍을 받아들여 큰 전환을 가져온 주역이다. 가풍을 이어 도성유는 학문에 정진했고, 15세에는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 됐다. 당시 그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등암(藤庵) 배상룡(裵尙龍),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 사월당(沙月堂) 유시번(柳時藩) 등과 교유했다.

특히 도성유는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아 항상 자신을 살폈다고 한다. 체구는 작았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중후했으며 효심 또한 지극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는 데 힘을 보탰다.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부친이 팔공산에서 피란하던 중 숨져 더이상 활약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삼년상을 마친 뒤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낙향하자 그를 찾아가 배례(拜禮)했다. 이후 그는 정구와 서사원을 스승으로 모시며 더욱 학문에 매진했다.

그는 문장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정구가 선성(先聖)들의 유상(遺像)과 주자의 친필을 그에게 모사하게 하면서 "도성유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611년(광해군 3)에는 불의에 대항하는 선비의 기개를 보였다. 같은 해 5월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손처눌 등과 상경해 반박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후 그는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 때 신판(神版)에 글씨를 쓰는 역할을 맡았다.

도성유는 대구 유학의 문풍을 계승했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는 1615년(광해군 7) 서사원의 병이 깊어지자 선사서재(仙査書齋)의 재장(齋長)을 위임받았다. 이후 후학들로 하여금 스승의 뜻과 가르침을 본받고 따르게 했다. 서사원이 타계한 뒤에는 이천에 사당을 세우고 봉향했다. 이듬해부터는 와룡산 아래에 와룡정사를 짓고 학문과 저술에도 힘썼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성리정학집(性理正學集),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가 있다.

스승을 어버이처럼 섬긴 그는 정구를 화암서원(연경서원)에 제향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당시 화암서원은 이황을 제향하는 서원이자 대구 유학의 중심지였다. 도성유는 서원의 규모를 정비하고, 원지(院誌) 편찬 및 원록(院錄) 수정 작업도 펼쳤다. 또한 서사원의 강학소인 선사서재에 묘우를 짓자고 제안해 이강서원(伊江書院)을 건립하기도 했다.

유학에 대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있다. 칠곡부가 문묘를 세우기 위해 도성유의 땅을 자신에게 팔 것을 청하자 "문묘를 세움에 어찌 땅을 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기증을 했다고 한다.

평생을 강학에만 몰두했던 그는 1649년(인조 27) 1월30일 와룡정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1636년(인조 14)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세상을 등지고 두문불출한 지 10여 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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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서원 앞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선비의 도는 말이 아닌 실천에

도여유는 1574년(선조 7) 12월23일 하빈현 도촌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해중(諧仲), 호는 서재다. 달성군 다사읍 서재 마을 이름이 그의 호(號)에서 비롯됐다. 그만큼 그의 인물됨이 높다는 방증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배움에 뜻을 뒀다. 10세 무렵 사촌형인 도성유와 함께 권응인에게 가르침을 받아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성실함과 두터움이 한결같았다. 특히 다른 이를 공손히 대해 다툼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토지에 다른 이가 밭을 일궈 싸움이 나게 되자 "어찌 한 자 한 치의 땅 때문에 남과 서로 따지랴"라며 개의치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의 나이 15세 때부터는 서사원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강학에 몰두했다. 하지만 곧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부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렀다.

평소 '학문은 하루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은 그에게 강학은 즐거움이었다. 정구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로 그는 배움을 청했고, 이후 정구와 서사원 문하에서 심경·주서·예학 등 책을 강론했다. 특히 그는 학문에 탁월했던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

서사원은 그를 가리켜 "학문하는 방향이 올발라 쇠폐한 나를 일깨워 준다"고 했으며, 정구는 "후생(後生) 중에 뜻을 가진 이는 도여유뿐"이라고 했을 정도로 신임이 깊었다. 당대 큰 어른인 두 스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 받은 셈이다.

1611년에는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배척하자 이를 변론하는 상소 모임에 참여했다. 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손처눌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해 공을 세웠다.

그는 "학문은 자득(自得)하기를 귀하게 여기니, 자득하면 옛사람들의 천언만어(千言萬語)가 황홀하게 친히 듣는 듯 해 나의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여서 이른바 '구이(口耳)의 학문'일 따름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선비의 도는 말이 아니라 실천에 있음을 강조한 것.

벼슬에는 큰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성시에 떨어지자 그는 "얻고 얻지 못함은 명이니 요행으로 이룰 수 없다. 과거에 급제하길 바라는 것은 어버이가 계셨기 때문인데 양친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진취에 마음을 두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반면 슬하에 아들 네 명은 모두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나아갔다. 장남 도신수(都愼修)는 당쟁의 영향으로 주로 외직에 있었지만 백성들의 구휼과 교화 등에 힘써 왕명으로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기도 했으며, 넷째 도신징(都愼徵)은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병자호란 이후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로지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은 도여유는 1640년(인조 18) 10월3일 세상을 등졌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서재집 4권 2책'이 있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한민족대백과. 용호육현행록, 성주도씨용호문중.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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