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라이온즈 18년 .3] 박영길 감독

  • 입력 1999-03-02 00:00

박영길 감독은 프로야구 삼성에 공격야구를 도입한 최초의 사령탑이다. 부산 경남고 출신으로 롯데자이언트 감독을 지낸 박 감독은 호쾌한 야구를 지향, '홈런타자 사육사'란 별명을 얻었다. 박 감독은 '줄 것은 주고 더 많이 빼내는'식의 경기운영으로 즐기는 야구를 표방했다. 아마시절 최고의 좌타자였던 박 감독은 그래서 많은 거포들을 키웠다. 87년 홈런왕 김성래를 비롯, 이종두, 박승호 등도 박 감독이 조련했던 거 포들이다. 박 감독은 그러나 의외로 선수들에겐 인기가 없었다. 자신의 야구관을 선수들에게 너무 강요한 탓이다. 스타출신 감독으로서 자존심이 누구보다 도 강했던 박 감독은 투수의 공 한개 한개에 사인을 낼 정도로 자기 스타 일을 고집, 선수들의 반발을 샀던 것이다. 박 감독은 승운도 없었다. 감독 부임 첫해인 87년 전.후기 우승을 차지 했으나, 한국시리즈에선 선동열이 버틴 해태에게 4패를 당하며 고배를 마 셨다. 박 감독은 88년도 플레이오프에서 김영덕 전 삼성감독이 이끄는 빙 그레에게 0-3으로 진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성적부진을 선수탓으로 돌리 는 발언으로 선수들의 집단항의 사태를 불렀고, 결국 임기를 1년이나 남겨 두고 중도에 하차하는 계기가 됐다.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던 삼성도 박 감독 시절을 고비로 점차 하락의 길 을 걸었다. 선수들의 노쇠현상과 더불어 세대교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꼴뚜기 김시진은 87년 투수 개인통산 첫 100승 고지를 정복했으나, 한국시 리즈와 플레이오프에서 기대이하의 성적을 올린 이후 부진의 늪으로 빠져 들었고, 88시즌을 끝으로 최동원과 맞트레이드 돼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됐 다. 김시진, 황규봉과 함께 삼성 마운드의 원년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던 권영호는 세이브투수로 변신해 겨우 명성을 유지했다. 86년 6승6패26세이 브로 구원투수상을 거머진 권영호도 89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다만 한때 공포의 타선으로 불리던 라인업만이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타격의 달인 장효조는 87년 3할8푼7리로 개인통산 5번째이자 생애 마지막 수위타자에 오르며 83년 이만수이후 삼성에서 두번째로 페넌트레이스 MVP 가 됐다. 88년을 마지막으로 장효조도 롯데 거포 김용철과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87년과 88년 각각 3할4푼4리와 3할2푼3리의 타율을 기록한 이만수 는 87년 장타율과 타점부문 2관왕에 올라 장효조-이만수 투톱시대의 마지 막을 장식했다. 박 감독 시절 혜성과 같이 나타난 김성래는 87년(0.332)과 88년(0.350) 연속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87년에는 홈런왕(22개) 타이틀까 지 거머쥐었다. 삼성은 87년도 김시진(투수), 이만수(포수), 류중일(유격 수), 김성래(2루수), 장효조(외야수) 등 역대 최다인 5명의 골든글러브 수 상자를 배출, 마지막 황금기를 누렸다. <최영호기자 cy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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