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충청·경상 3道 생활…왕따 안 당하려 대구 사투리 배워”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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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3   |  발행일 2018-02-23 제34면   |  수정 2018-02-23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소설가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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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시절’이었지만 되돌아보면 가장 훈훈했고 가장 인간적인 욕망을 발견했던 시절이었다. IBS(침투용 고무보트)에 앉은 20대 시절의 이룸. <이룸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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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당시 내 꿈은 경호원이었다. 멋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1982년 해병대에 지원한다. 거기 훈련 강도는 ‘비명’에 가까웠다. 잘못 들어왔다 싶었지만 그때 난 시궁창을 메기처럼 기고 있었다. 여느 군대의 군기는 솔직히 ‘솔솔 부는 봄바람’이었다. 해병대 군기와 훈련의 강도는 비교를 불허했다. ‘살인적’이란 수식어 하나가 더 필요했다. 그래도 버틴 건 내 특유의 ‘마조히즘’(자신을 학대하면서 희열을 느낌) 덕분인 것 같다. 툭하면 2~3일 잠을 자지 못했다. 구타금지였지만 ‘구타지상주의’는 미풍양속이었다. 고참은 곧 구타의 상징이었다. 그 말도 안되는 폭력성 기합도 ‘지옥훈련’이란 미명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저들은 왜 때리는지 모르면서 조건반사적으로 때린다. 그러니 저건 폭력이 아니다. 그래서 아파도 아프지 않아!’

군대란 하나의 거대한 권위주의가 20대의 무료한 심성을 ‘야수’로 키워냈다.

내 문학적 감수성은 해병대에서 조금 빛을 발한다. 선임들을 위한 연애편지, 자살병들을 위한 조의문까지 내 몫이었다. 거기서 유명해지기 전 같은 대대에 있었던 콧수염 가수 김흥국을 만나게 된다. 그는 제대 직전 콧수염을 길렀고 “내 콧수염을 기억해라. 난 반드시 유명해질 것”이라는 호언장담을 날리고 떠났다. 어떤 사람이 어떤 간절함을 갖고 있으면 그 뜻이 하늘에 닿아 반드시 이뤄진다는 걸 그를 통해 깨닫게 된다. 전장에서 듣는 하모니카 소리가 끝내주듯, 사격장 바닥에 누워 있을 때 마른땅에서 피어난 새싹이 철모 끝자락과 오버랩되어 보였다. 그 모순적 앙상블이 내 소설의 척추로 자리잡게 된다.

“문학의 감수성 키워준 해병대 제대
막막한 현실의 청년기 가출로 위안
충무로 식품공장 고된 작업과 사투
근처 책방서 사온 소설책만 쌓여가”

“대학시절 소설가 김원우 만나 원동력
심훈문학상 중편소설 ‘돌비녀’ 당선
이웃은 여전히 내가 소설가인줄 몰라”

두번째 장편소설 ‘설리화야 설리화야’
대구 배경으로 실종된 친형이 주인공
억세게 다가온 지역감정의 극복 그려



◆군보다 더 가혹한 현실

26개월14일을 뒤로하고 해병대 정문을 떠나왔다. 내 미래보다 각 세운 군복의 다림질 선이 더 중요해 보였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제대하고 나니 더 막막했다. 그때 한 많은 청춘은 다들 가출로 위안을 삼던 시절이었다. 나도 가출을 한다. 2년간의 축축한 가출기는 나만의 비망록에 빼곡하게 적히기 시작한다.

당시 서구 원대동 큰형님 집에 얹혀 살았다. 눈칫밥의 달인이 될 수밖에. 막둥이라서 외로움은 더 진했다. 당시 부모는 김제에 있었다. 형 밑이지만 내 맘은 항상 ‘타향살이’였다. 그리움과 외로움이 만나면 폭발력을 일으킨다. 그게 문학의 뇌관이다.

당시 상경 가출의 첫단추는 서울역 앞 고만고만한 중식당이었다. 이어 서울역 근처 허름한 공장문을 다짜고짜 열고 들어갔다. 내 퀭한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던지 사장은 퇴짜를 내밀었다. 어찌어찌 학력을 속여 충무로 어느 식품공장에 들어간다. 면류를 생산하는 신광식품이었다. 사장이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합격이었다. 그도 날 통해 젊은시절 자신을 발견한 거라고 믿었다.

세상에서 가장 노동강도가 세고 작업자의 기질도 더없이 억센 그런 척박한 일터였다. 다들 표정이 무지막지했다. 막장인생의 표본이랄 수도 있었다. 내 표정도 산적스러움이 있지만 다른 직원에 비하면 너무나도 고운 자태였다. 내 별명은 그래서 졸지에 ‘미스리’가 된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해병대는 지옥이 아니었다. 그 공장이 지옥이었다. 밤 10시부터 오전 4시까지 심야에 일을 했다. 반죽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숙소는 공장 다락방이었다. 기계음은 고막을 찢을 정도였다. 집중력이 실종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중엔 기계음이 없는 곳이 더 불안했다. 그럴수록 근처 책방에서 사온 소설책은 더 쌓여갔다.

그때 충무로는 한국 영화의 메카였다. 막연히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국제영화학원에 들어간다. 거긴 그 시절 아이돌 기획사였다. 나름 잘나갔던 배우 윤미라, 김창숙, 민지환 등을 만났다. 단역 요청이 많이 왔지만 난 가지 않았다. 틈틈이 시나리오 공모전에도 출품했다. 제대로 된 이룸표 소설은 아직 잉태하지 못했다.

◆심훈문학상과 돌비녀

계명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근본적으로 문과적 성향인 나와는 맞지 않아 엄청 시달렸다. 그러다가 문예창작학과를 발견했다. 내겐 오아시스만큼이나 반가웠다. 당장 복수전공을 신청했으며 그곳에서 고루한 문체로 유명한 소설가 김원우를 만난다. 그의 위용은 대단했으며 문학, 그리고 소설에 대해 경외감마저 들게 할 정도로 그의 가르침은 완벽했다. 내 소설 쓰기의 절반은 그의 영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명대 시절 계명문화상을 받게 된다. ‘꽃반지’였다. 2001년 나름 비중있는 제5회 심훈 문학상에 중편소설 ‘돌비녀’가 당선된다. 미끈하고 쿨한 제목도 많았지만 내 소설 제목은 시종일관 촌스럽다. 어떤 사람은 내 소설이 꼭 ‘연변 작가풍’ 이라고 했다.

일상은 변한 게 없었다. 내가 혜성처럼 나타난 것도 아니고 중앙 문단의 총아가 된 것도 아니었다.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사람들도 내가 소설가란 걸 모른다. 어쩜 시민이 작가를 압도한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상, 그냥 일상에 점 하나가 더 찍혔을 뿐이다. 졸업후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원래 실력이 없으면 대학원 가는 것이 아닌가. 난 거기서 시인 이성복, 손정수, 장옥관, 김경수 등의 영향을 받게 된다. 내 소설도 점차 세련미를 더해간다. 제도권이란 나름 장점이 있었다. 제도권은 솔직하게 말하면 필살기, 그러니까 빨리 가는 지름길을 알려준다. 무술로 말하자면 일본 무예의 지존으로 불렸던 최배달이 창시한 실전용 무술인 ‘극진공수도’처럼.

계명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 강의를 얼마간 하다가 대구시교육청 영재반을 현재까지 맡아 그들을 지도하고 있다. 한 해 영재반에 들어오는 아이는 15명 남짓. 분명 문학청년실종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고교 문예반도 사라졌고 그 흔했던 시화전 같은 것도 맥을 추지 못한다. 취업이 화두가 된 세상에 문학이 동사를 한 것일까. 하지만 문학영재를 보면 그걸 속단할 수 없다. 문학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다. 만 명의 어설픈 문학이 한 명의 빛나는 문학을 이길 수 없는 것 아닐까.

◆소설 & 내 삶의 비망록

이번 내 장편소설은 결국 내 삶의 비망록이다. 이 소설은 고대국가 조문국(召文國)의 왕경(王京)이었던 의성군 금성면의 깊은 산골마을 사방물. 그곳의 1969년과 1992년 현재의 대구시 수성교를 주 무대로 전개된다. 발단은 동대구역에서 기거하던 남 주인공이 수성교 밑으로 내려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소설은 7일간의 이야기. 1992년 대구에서 열린 제73회 전국체육대회가 배경이다. 발상부터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요 인물의 설정부터가 가족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배경과 간단한 소재만 빌려왔을 뿐 대부분 내 체험이다. 그중 주인공이 된 내 둘째 형(이규대)의 행방불명은 정말이지 이 작품의 핵이라고 여긴다. 형은 우리 집안의 영웅이었다. 명석하고 멋있었다. 탐을 낸 대전의 모 공책공장 사장이 데릴사위로 모셔간다. 하지만 부도가 나는 바람에 형의 미래도 부도가 난다. 현실에선 돌아오지 않는 형이지만 소설의 말미에서는 그 형이 돌아온다. 내 유년시절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그의 유고는 내 가슴 저 깊이까지 파고든 ‘대못’이었다. 그 못을 빼지 못한 채 근 오십 년을 버텨왔다.

작품에 매달린 몇년간 나는 거의 도공에 가까웠다. 몇 번을 부수고 다시 지었다. 노트북 앞에서 몇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도 했다. 내게 종교는 없지만 자판을 두드리기 전에 기도했고 덮은 후 눈을 감았다. 서술 방법을 바꾸기도 했다. 극문학 형식을 택했다. 일테면 희곡형식이나 시나리오처럼 지문과 대사로만 이루어진 방식을 차용했다. 그것을 다시 소설형식으로 바꾸자 속도가 붙었다. 시나리오를 소설로, 소설을 다시 시나리오로.

난 충청·전라·경상, 이렇게 3도를 몸소 체험해 왔다. 지역성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몸소 느꼈다. 생물학에 ‘격리설’이 있다. 그 지역에 살면 사람도 그 지역화가 된다는 이론이다. 인간도 지역성을 넘어서기 힘들다. 내 소설에는 3도 사투리가 번갈아 들어간다.

내 운명을 오지게 교란시킨 건 한 통의 편지였다. 도시로 떠난 누나가 내게 보낸 것이었다. 누나가 묘사한 도시는 마치 유토피아처럼 비쳐졌고 내 마음은 벌써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도시가 황야라는 걸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괜스레 엄마 품속을 벗어난 대가는 정말이지 혹독했다. 대구란 도시. 독한 외로움을 투척하며 텃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초기엔 언어가 말썽을 부렸다. 지역감정의 틈바구니에 낀 내 사투리는 몰매를 맞았다. 지역감정이 너무 심해 난 본적을 바꾸기까지 했다. 말씨를 바꾸어보려고 노력했으나 그건 외국어를 익히는 것보다 어려웠다. 형제처럼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던 불알친구가 없었다면 아마 몇 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역감정 극복과 사라진 형, 그게 이번 작품을 기필코 완성해야겠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집필하는 동안은 이룸은 없었다. 등장인물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작가의 천국이고 그게 작가의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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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출간된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설리화야 설리화야’는 한국의 해묵은 지역감정을 대구를 배경으로 잘 그려냈다.

◆무명의 눈으로 본 우리 문단

아마추어는 글이 거칠다. 프로의 글은 덜컥거리지 않는다. 프로의 글은 못 쓴 글은 있지만 아닌 글은 없다. 아마추어 글들은 비문이 많다. 예술은 기실 영혼의 진액을 뽑아내는 작업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예술이 아니며 소설 또한 아무나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등단제도, 이건 선이면서 악이다. 이걸 통해 유능한 작가를 골라낼 수도 있지만 천재를 놓칠 수 있다. 등단제도만을 고집했다면 ‘해리 포터’의 탄생이 가능했을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F1 드라이버인 페르난도 알폰소는 면허증조차 없다지 않는가. 등단하지 않은 이인화, 김탁환, 김진명 등 수많은 유명 작가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인간 세상 고유의 무늬를 드러내는 행위가 문학이라고 여긴다. 소설은 특히 모든 장르를 품을 수 있는 거의 블랙홀 같은 예술이다. 천지가 공감하는 소설작법이 있을까. 답은 없고 과정뿐인 것 같다. 문체도 참 중요한데 난 김훈과 김영하 문체를 부러워한다. 여기서 잠깐, 이해(Understand)란 단어를 음미해보자. ‘밑에 선다’는 뜻이 아닌가. 암튼 독자 또는 대중에게 작가는 겸손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운문은 천부적이지만 산문 또는 소설은 꼭 그렇지 않은 거 같다. ‘엉덩이로 쓴다’는 것처럼 노력의 산물일 수 있다. 누구나 일생에 한편 정도는 명작을 완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문학의 위기는 늘 있어왔고 그에 대한 불안은 괜한 걱정이다. 문학은 특히 소설만큼은 영화 내지는 스토리가 필요한 모든 영역에 물을 대주고 있다. 상업적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장르다. 그게 내가 8년째 맡고 있는 문학영재 소설반에 지원자가 몰리는 이유라고 본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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