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영남일보 책읽기상] 대학·일반부 최우수상-신서영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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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05   |  발행일 2019-12-05 제24면   |  수정 2019-12-05
“어른이어서 괜찮은 게 아니라, 나는 나이기 때문에 괜찮을 거야!”

나는 항상 하이힐을 신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고, 아름다운 스물넷이었다.

이력서를 넣은 모든 회사에서 합격증을 따냈으며, 대학생들이 열망하는 회사에 당당히 합격했고, 담담했다. 누군가가 나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으니까. 나는 영원히 그 하이힐에서 내려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엄마의 단화는 항상 뒤축이 접혀있었다.

엄마는 그냥 엄마였다.

한때 잘나갔다는 우리 엄마. 후에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던, 박사과정의 착한 남자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단다. 엄마는 잘생겼지만 예민한, 그래서 더 끌렸다는 취준생 우리 아빠와 결혼했다. 엄마는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단다. 내 위에 오빠인지, 언니인지 모를. 그 아이를 유산하고 나를 가지면서 퇴직하셨다고 했다.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계속 일을 했다면 아마 그 아이처럼 나 역시도 세상에 없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엄마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얼마나 통속적인 결말인가. 잘생기기만 한 취준생 남자라니!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고 한바탕 훈계라도 해주고 싶다. 게다가 중학교 교사라는 완벽한 직업을 버리다니! 나는 영원히 엄마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이힐을 신고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갈 것 같았던 스물여덟 나에게 어느날 ‘변수’가 태어났다. ‘그 결말만은 제발 없기를!’이라고 외쳤던, 엄마의 그 진부한 결말을 따랐다. 나는 고등학교 친구인 직업군인과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회사를 그만두었다. 건설회사에 다니던 아버지와 내 어머니처럼 군인 남편과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내 신발장은 벗기 좋고 신기 편한 단화로 채워졌다. 하이힐은 상자에 차곡차곡 넣어져 신발장 구석에 켜켜이 정리되었다. 엄마처럼 내 신발의 뒤축도 꺾인 채 접혀있었다. 아이를 안은 채 신발을 신으며 나는 깨달았다. 엄마의 신발이 항상 꺾여있던 이유를.

서른아홉. 마흔을 바라보며 나는 12년 차 엄마가 되었다. 내게 육아가 익숙해진 만큼 아이들도 훌쩍 자랐다. 이제는 둘째 아이도 스스로 숙제를 하고 준비물도 척척 챙긴다. 내 잔소리 없이도 혼자 긴 머리를 감고 헤어드라이어로 말릴 줄도 안다. 한 달에 한 번 출근 도장을 찍던 소아청소년과가 폐업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이들은 이제 단단해져 갔다.

정작 몸이 살만해지니, 마음이 힘들어졌다. 작년부터 나는 상실감과 우울감에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나는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갈 육아 기간을 넘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둔 패배자였으며, 그렇다고 전업맘으로서 아이를 영재로도 만들지 못한 무능한 어미였다. 진보적인 직장여성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전통적인 현모양처도 아니었다. 사회는 나를 낀 세대라고 불렀다. 나는 그렇게 어중간하게 사십 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회사를 그만뒀던 2014년 가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를 매일 되뇌었고,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망상까지 나를 사로잡았다. 그 망상은 내 몸까지 덮쳤다. 비현실적인 공포감과 두근거림, 목의 이물감, 그리고 숨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한 호흡곤란이 내몸 곳곳을 괴롭혔다. 병원에서는 검진결과 이상이 없자, 나에게 신경정신과 진료를 권유했다.

급한 마음에 동네 신경정신과로 달려갔다. 초진은 두 달이나 기다려야 한단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참 많구나. 한동안은 이 상태로 지내야 하는구나. 자포자기했을 때쯤 우연히 이십 년 만에 고등학교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친구는 내가 바라던 인생을 살고 있었다. 부러울 것 없는 그녀는 삼 년간 공황장애로 고생했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는 본인에게 약물치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책을 읽은 게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하며 나에게 책 몇권을 추천해주었다.

나는 그날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공포감을 주던 심정지라던지, 호흡곤란 그리고 비현실적인 공포감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구나. 그것들은 내 몸에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괜찮아, 지금 내 몸의 교감신경은 올바른 일을 하는 거야.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하지만 결국 조금 있으면 다시 느려질 거고 내 튼튼한 심장은 절대로 멈추지 않아.”

나는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인지 개선은 엄청난 효과가 있었으며 마음병원에 예약 일을 일주일 앞두고 나는 병원 예약을 취소할 수 있었다. 내 주치의는 바로 책이었고 그중에서도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지고 손을 맞잡아준 책이 있다. 저자는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었다.

그 책이 바로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였다. ‘어른이 되면 괜찮을거야’도 아니었고, ‘괜찮으니까 어른이다’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른이었고. 괜찮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을 줄 알았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서 크나큰 위로를 받았다.

전문의로서 기술해 놓은 공황장애의 인지 개선 부분도 당연히 도움이 되었지만, 정작 더욱 내 마음을 움직인 부분은 두 정신과 전문의의 ‘우리도 아직 괜찮지 않다는’ 허심탄회한 고백이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을 것 같은 김혜남 선생님은 육아의 고충과 후회를 잔잔히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금방 자라고, 엄마의 관심이 절실한 시기는 한정돼 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엄마의 손이 덜 필요할 때에 내 일을 찾아가도 늦지 않다. 물론 요즘과 같은 경쟁 사회에선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바꿀 만큼의 큰 무게는 아니다.”

김혜남 선생님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이들이 영유아기를 지나는 동안 만큼은 그들과 마음껏 놀아주고 싶다고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지질하게 되뇌는 나와는 또 다른 고백을 들으며 나는 꽤 잘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받았다.

나는 아이들의 모든 유년기를 함께 했다. 딸 둘은 나의 가장 소중한 인생의 친구로 자라주고 있다. 열두 살 딸아이는 내가 혼자 분리 수거하러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손에 든 분리수거 상자를 한사코 뺏어 들고 항상 동행한다. 분리수거를 함께 하고 놀이터의 그네를 타고 오는 것은 우리의 소소한 일과이다. 아홉 살 딸아이는 내 음악 동반자이다. 우리는 피아노 연탄곡을 끝내주게 치는 단짝 친구이다. 한사람이 빨라도 느려도 안 되는 피아노 연탄곡을 고 조막만한 손으로 함께 연주한다. 어깨의 높이가 맞지 않아 손이 교차하는 곡을 칠 때면 꽤 애를 먹지만 몇 번을 틀렸건 한 곡을 끝내고 나면 우리는 항상 “아이고 잘했어!”하며 서로를 부서질 듯 꼭 껴안는다.

박종석 선생님의 솔직한 고백에도 나는 감사드린다. 그는 항상 감사하세요. 욕심을 버리시라는 뻔한 설득 대신 그의 우울감을, 욕심을 고해했다.

“왜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까, 왜 그때 대학병원을 그만두었을까 라고 선택을 끊임없이 후회했다. 자책감은 타인에 대한 분노와는 달리 시간제한이 없어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같은 생각을 반복한다. 실제로 맞이한 삼십 대는 패기 넘치는 이십 대와는 달랐고 당당히 합격할 거라 믿었던 면접에서 떨어졌으며 잘나가는 동기나 친구들을 보며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열등감의 동굴 속에서 지겹도록 무력했던 나는 자책이야말로 상대방과 나를 아프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도 이십 대와는 판이한 나의 삼십 대로 괴로워했다. 포기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이어나가는 친구들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저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올라올 때는 나의 숨은 비열함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심지어 고등학교 친구에서 시작해 연인이 되고 결혼까지 한 남편에게도 분노를 토해냈다. 우리가 함께 꿈꾸던 그 미래가 그에게만 주어지고 나는 빈껍데기만 남았다고 소리쳤다.

비혼주의자 전문직. 거기에 고양이 한 마리쯤 기르면 더욱 세련된 사람이 되는 요즘, 나는 촌뜨기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아이 둘 딸린 주부인 나는 이미 봄 상품이 가득한 세상이라는 백화점에서 아직도 겨울인 마냥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가격표만 만지작거리며 뒤처진 기분을 느낀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렵다’라는 말은 얼마나 재미없는 말인가. 아마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번 생은 틀렸으니 그냥 만족하고 살라는 성의 없는 위로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세련된 사람들로 가득 찬 이 도시에서 평범한 나는 너무도 작고 볼품없구나.

그 트렌디한 삶에 가장 완벽히 가까운 듯한 박종석 선생님의 ‘혼자인 삶은 너무나 외롭다’라는 전혀 쿨하지 않은 그의 대답이 정말 고마웠다. 그의 글을 읽으며 조금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이들이 북적이는 집안에서 책을 읽으며 나는 묘한 자긍심마저 느꼈다.

우울감의 반대는 행복감이 아닌 생동감이라고 한다. 내가 우울한 것은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생동감 있게 인생을 헤엄치지 않아서이다. 나는 과거의 영광과 이제 과감히 인사한다.

“잘 가. 아름답던 젊은 날!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내 모습으로 또 아름다울 거야! 어른이어서 괜찮은 게 아니라 나는 나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로 괜찮을 거야!”

나는 얼마 전부터 전혀 다른 경력을 시작했다. 하루에 한두 시간 아이들에게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는 시간제 강사를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회사원이던 나는 지금처럼 영어를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했다. 업무상 영어를 가끔 썼지만, 바쁜 업무 때문에 내 영어 실력은 항상 제자리를 맴돌았다. 아이들을 키우며 영어책을 읽어주던 게 일 년이 되고 이 년이 되고 십 년이 쌓이니 제법 준전문가가 되었다. 아마도 영어 동화만큼은 원어민 엄마에게도 뒤지지 않을 듯싶다.

피아노 개인지도를 받기 시작했고, 문화센터에서 미술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기 싫던 피아노 학원이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아직은 선 하나 제대로 그리고 있지 않지만, 내년 여름 휴가에서는 카메라 대신 스케치북을 들고 가자고 아이들과 약속도 했다.

내 인생이 더 높아지기를 바라던 이십 대의 젊은 날이 있다. 하이힐을 신고 높이높이 오르다 보면 유리천장 따위는 나에게 없을 그것 같았다. 이제 그때처럼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없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번엔 더 깊이 가보는 건 어떨까? 우주만큼이나 지구의 심해는 온갖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더 높이 올라가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이제는 내 마음의 심해로 더 깊이깊이 내려가 보려고 한다. 그렇게 깊이깊이 내려가다 보면 알 수 있겠지? 내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꿈을 향해 한발한발 내디뎌 봐야겠다.

나는 꽤 괜찮은 어른이니까.


20191205

<수상 소감>
인생을 깊게 보는 방법 일깨워준 남편·두 딸에 감사

아이를 낳기 전. 아직 회사에서 꽤 잘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같은 이기적인 인간들은 꼭 자식을 키워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 사람이 되지 않을까?”

딩크족이 신조였던 저는 이 말에 묘하게 끌렸습니다. 저는 욕심 사납게도 이기적인 동시에 사람도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얼렁뚱땅 무려 12년이나 아이를 키우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제 좀 사람은 된 것 같은데 괜찮은 어른은 아닌 것 같아 올 한해 꽤 방황했습니다.

어느 날 자다가 눈떠보니 서른아홉이 돼 있는 것만 같아 억울했습니다. 애만 키우다 내 청춘 다 보내고 경단녀만 남았다며 한탄했습니다. 내 마음이 한여름의 아스팔트길 같이 푹푹 찌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열기를 조금 잠재우고자 무작정 책을 읽고 저를 다독이고자 글을 썼습니다.

제 마음을 위로해주신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의 저자 김혜남, 박종석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너의 경력은 단절된 게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거야. 그것도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일로!’라고 제 마음을 토닥여 주신 영남일보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높이 보는 법이 아닌 인생을 깊이 보는 법을 가르쳐준 남편과 두 딸에게 사랑하고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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