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관리의 사표 청백리…왕조실록에 '청렴' 낱말이 급감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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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01  |  수정 2023-09-01 07:44  |  발행일 2023-09-01 제13면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관리의 사표 청백리…왕조실록에 청렴 낱말이 급감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청백리의 상징 맹사성의 고택 맹씨행단, 충남 아산에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관리의 사표 청백리…왕조실록에 청렴 낱말이 급감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김천시 양천동의 하로서원, 조선조 대표적인 청백리 노촌 이약동을 기린다. 〈영남일보 DB〉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관리의 사표 청백리…왕조실록에 청렴 낱말이 급감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구미 채미정, 절의와 충정의 청백리 야은 길재를 추모하기 위해 금오산 자락에 세운 정자, 〈문화재청 제공〉

옛 선비들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배우고 익혀 벼슬길로 나아가서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청렴하게 살아가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 했다. 재물 욕심이 없는 곧고 깨끗한 관리를 청백리(淸白吏)라 했고, 청백리는 이도(吏道)의 등불이요 관리의 사표였다. 예로부터 청백리가 많이 나와야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이 행복을 누리는 태평성대가 열린다고 했으며 조선왕조는 개국과 더불어 청렴을 무척 중요시하고 청백리를 제도화했다. 조선왕조 청백리 수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 말에 쓰인 전고대방에 가장 많은 218명이 수록돼 있으며 오늘날 청백리 정신을 기리고자 청백리상을 제정하여 모범 공무원에게 수여하고 있다.

◆청백리의 연원

청백리는 중국 한나라 문헌에 처음 나오며 우리나라는 신라 진평왕 때 화랑도 검군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탐관세력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기록과 고구려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재상으로 등용할 때 어진 이가 관직을 맡아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했으니 삼국시대부터 청백리가 등장했다. 고려 명종은 청렴한 사람을 중용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쳐내 염치 기풍이 나라에 가득하도록 청렴결백과 신상필벌을 강조하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

근면·검소가 속성인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왕조는 청렴을 유난히 강조했다. 왕조실록에 청렴이란 낱말은 충효보다 더 많이 나오고 중종 때 청백리를 제도화했다. 청백리 녹선(錄選)은 육조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 수장이 천거하고 왕의 재가를 받아 의정부에서 뽑았다. 살아있을 때는 염리(廉吏), 사후에 청리 또는 청백리라 불러 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됐다. 후손들은 음덕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고 누대청덕(累代淸德)이라 하여 대대로 청백리 가문이라는 영광이 뒤따랐다. 탐욕관리가 탐관오리이고 파렴치 몰염치로 비하했다.

◆조선 개국과 청백리

조선의 청렴은 태조 때부터 시작됐다. 여말 혼란기에 나라를 다시 세운 태조 이성계는 건국 이듬해 1393년, 전 왕조 청렴한 인물 다섯을 청백리로 선정하여 새 나라의 귀감으로 삼고 조정신료와 지방수령에게 덕치를 펼치도록 했다. 안성, 우현보, 길재, 서견, 유구가 그들이다.

그중 광주안씨 천곡 안성(1351~1421)은 고려·조선 두 왕조에서 여섯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그의 청렴이야기는 유명하다. 벼슬길로 나아갈 때는 책과 이불을 담은 대나무상자 하나만 가져갔고, 벼슬을 마치고 돌아올 때 가지고 간 대나무상자가 낡아 물건을 담을 수 없자. 부인이 "대나무상자가 다 찢어졌는데 왜 다시 바르지 않소" 하니, "내가 헌 종이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바른단 말이요"라 하여 공과 사의 엄정함을 세상에 전했다. 늙어 병이 깊어지자 방촌 황희가 위문 와서 치자(治者)의 도(道)를 묻자, "죽은 다음 후일을 위해 다만 청렴의 한 글자만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야은 길재에 대해 청렴결백과 절의의 명성이 온 나라에 자자해 고려충신으로 절개 기풍을 새 왕조의 사표로 삼는다고 했으며 후손에게 관리 보임의 은전을 내렸다.


中 한나라 문헌에 청백리 첫 기록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등장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이듬해
길재 등 고려 5人 청백리로 선정
새 나라의 귀감 삼으며 덕치 강조

왕조실록에 충효보다 많은 청렴
청백리 217명…'가문DNA' 13번
황희·이황·류성룡 등 숱한 일화
중종은 궁전 뜰에 3개 門 만들어
신하 청렴도 따라 지나다니게 해



◆청백리 정승, 황희와 맹사성

청백리의 표상은 정승 황희와 맹사성이다. 황희는 조선왕조 최장수 정승이지만 작은 기와집에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살만큼 청렴했다. 태조부터 세종까지 4대 56년을 관리로 지냈고 69세에 영의정에 올라 18년간 국정을 책임졌지만 재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맹사성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으로 부를 만큼 조선을 대표하는 재상이자 청백리의 상징으로 왕조 오백년의 기틀을 다졌다. 성품이 부드러워 황희의 강직과 단호함을 완화시키고 조정신료와 마찰을 중재했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빈한 살림살이로 사는 집은 민가와 다를 바가 없으며 늘 녹미(녹으로 받은 묵은쌀)로 밥을 하고 바깥출입을 할 때 소를 즐겨 타고 다녀, 보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관리의 사표 청백리…왕조실록에 청렴 낱말이 급감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성종조 청백리 김천 출신 이약동의 제주목사시절 선정비. 육당 최남선이 청렴한 조선관리의 으뜸으로 꼽았다. 〈제주시청 제공〉

◆투갑연·삼마태수·백비

청백리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오는 인물들은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청백리는 성종조 이약동, 중종조 송흠, 명종조 박수량이다. 육당 최남선이 1908년 잡지 소년에 조선시대 대표인물 100인을 선정하면서 청렴분야에서 노촌 이약동(1416~1493)을 꼽았다. 이약동은 제주목사 시절 선정을 베풀고 떠날 때 재임 중 사용한 기물을 모두 관아에 남겨두었고 말채찍조차 읍성 문루에 걸어두었으며, 제주 군교들이 전별 선물로 배에 몰래 실어준 갑옷을 찾아내 바다에 던져 유명한 투갑연(投甲淵) 고사를 낳은 인물로 목민심서에 실려 있다.

전라감사를 지낸 지지당 송흠(1459~1547)을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렀다. 당시 법령에 따라 지방관은 7∼8필의 말을 거느리고 떠들썩하게 부임하기 일쑤였지만 송흠은 전라도 여덟 고을 수령을 거치면서 늘 말 세 필만으로 검소하게 행차했고 짐도 단출했다. 효성이 지극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아 백성들이 우러렀고 참찬까지 올랐으며 그로 인해 삼마태수는 청백리의 별칭이 됐다.

삼가정 박수량(1491~1554)은 30여 년 관리생활에 호조판서까지 지냈지만 평생 청렴하게 살아 죽은 후에 장례를 치르지 못할 정도로 청빈했다. 조정에서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고, 명종은 그의 청백한 일생의 행적을 글로써 찬양한다는 것이 오히려 청렴에 누가 될 수 있다 하여 무덤에 백비(白碑)만 세우도록 했다. 그 백비가 청백리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청문·예문·탁문

중종은 궁전 뜰에 청문(淸門), 예문(例門), 탁문(濁門)이라는 세 개의 문을 만들고 조정 중신들에게 지나가도록 했다. 청문은 맑고 깨끗한 사람, 예문은 보통 사람, 탁문은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통과하도록 했는데 만조백관 대부분은 예문으로 통과했지만 단 한 사람만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청문으로 통과했다. 그가 대간직의 송강 조사수(1502~1558)이다.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었고 청렴한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성품이 곧고 맑아 삼사를 두루 거쳤고 경상도와는 묘한 인연이 있다, 1539년 성주사고(史庫)가 화재로 소실됐을 때 조사관으로 내려와 성주고을 백성 100여 명을 하옥시키고 곧은 성품으로 혹독하게 조사하여 원망이 조정에까지 들리게 했던 인물이다.

명종이 조사수를 이조참판에 보임하자 사관은 실록에 이렇게 썼다. "조사수는 청백하여 벼슬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가난한 선비 집 같았다. 성시를 이루어야 할 이조참판댁 대문 앞에는 새 잡는 그물을 칠 정도로 적막했다." 일찍이 그는 친구에게 어려운 시기에 오직 절개를 지켜 스스로 깨끗이 할 뿐, 그래야 영원히 보존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의 오백년 왕업은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부자·조손·형제 청백리

청백리 정신이 가풍으로 이어져 조선왕조에는 부자, 조손(祖孫), 형제 청백리가 13번 나왔다. 가문의 청렴 DNA가 대대로 이어진 집안이다. 조선 초 정척-정성근-정매신은 세종·성종·중종조의 3대 조손청백리이고 세조조 영의정 정창손은 아버지 정흠지, 형 정갑손과 함께 3부자 청백리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청백리인 집안은 조선 초 최유경과 최사의, 류구와 류겸, 조선중기 이제신과 이명준, 강유후와 강석범, 조선후기 윤지인과 윤용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청백리인 인물은 조선 초 안성과 안팽명, 조선중기 이기설과 이후정이다. 형제 청백리는 성종조 형제정승인 허종과 허침, 중종조 염근리 임호신과 임보신이고, 현손 등 직계 청백리는 이지직과 영의정 이준경, 우의정을 지낸 허종과 허욱이다.

◆영남선비 청백리

청백리로 녹선된 영남인물은 많다. 후기에는 중앙 진출이 어려웠으므로 주로 전기에 녹선됐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안동지역에는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예안의 이현보, 풍산의 김양진이 청백리이고, 경주지역에는 양동마을의 손중돈과 이언적, 경주 최부자의 선조 최진립이 청백리이다. 선산지역에서는 길재와 김종직, 선산김씨의 큰 인물 김취문이 청백리이다. 이밖에 초대 조선통신사를 지낸 의성 비안의 박서생, 달성 현풍 솔례마을의 곽안방, 김천의 이약동, 성주 초전의 벽진이씨 이철균, 봉화 계서당 종택의 성이성, 동래의 정형복, 영천 호연정의 이형상 등이 영남선비 청백리이다. 비록 녹선되지 않았지만 우리집 보물은 오로지 청백뿐이라고 했던 안동 길안의 보백당 김계행도 실질적인 청백리이다.

◆역사 속의 청백리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관리의 사표 청백리…왕조실록에 청렴 낱말이 급감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조선왕조는 관리 임명에 있어 청렴성이 요구되는 자리를 청요직이라 하여 반드시 청렴한 인물로 보임했고, 탐관오리는 삼천리 귀양을 보내 가혹하게 처벌했다. 역대 국왕들 가운데 사치를 일삼은 국왕은 거의 없었고, 영조는 52년 치세 동안 사치와 낭비를 엄금하고 스스로 검소하게 생활해 나라 곳간을 튼튼히 했다. 왕조실록에 청렴이란 낱말이 역대 국왕마다 수십 회씩 나오다가 19세기부터 급감하게 되는데 헌종 1회, 철종 3회로 줄어들면서 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영의정보다 되기 어려운 청백리이지만 조선왕조 217명(중복제외) 청백리 가운데 영의정은 이원익 이항복 등 14명, 좌·우정승이 18명, 찬성과 참찬이 23명이다. 사관은 실록에 고관들의 졸기(卒記, 죽음알림기록)를 쓰면서 청렴한 인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청빈하게 살았다고 후대를 위해 기록으로 남겼다.

청백리는 조상들의 삶이 어려울 때 믿고 기대는 희망의 등불이었으며 오늘날에도 힘없는 민초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기다리는 시대의 부름이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dk6716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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