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1)…나는 '덕후'입니다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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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26 07:32  |  수정 2024-01-26 11:54  |  발행일 2024-01-26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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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장윤아기자

"사랑해야 한다."

작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 쓴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은 저렇게 끝난다.

책에 나오는 소년 모모는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두 번째 이야기'를 쓰면서 그 내용을 떠올린 것은 한때 내가 그 책의 지독한 '덕후'(특정 분야에 심취한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기자는 소심한 '책 덕후'다. 세상의 많고 많은 책 중에서 특히 홀리게 하는 책이 있다. 나는 내가 빠진 그 책들이 잠깐의 떨림과 영감을 주는 것을 넘어 아예 삶의 한 조각으로 각인돼 버리길 원했다. 꽤 오래전에 빠졌던 '자기 앞의 생'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수많은 책 중 한권의 책과 사랑에 빠져
작가의 숨결따라 여행·언어도 새로 배워
한 분야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
설렘의 의미 덕후들 이야기 통해 재조명


외워버릴 기세로(물론 불가능했지만)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로맹 가리가 대체 왜 그런 내용을 쓴 것인지, 그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그가 쓴 다른 책들을 찾아 읽기도 했다. 그래야 책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도 에펠탑이나 샹젤리제 거리,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간 게 아니라 파리 뒷골목을 찾아갔었다. 파리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이틀밖에 없었는데, 그중 하루를 뒷골목을 찾아가는데 할애했다. 관광객은 아무도 찾지 않는, 다소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혼자 행복해했다. 인생의 무언가를 이룬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한 번씩 '우산'을 보면 울컥하고, 고장 나고 낡은 우산도 못 버린 채 모아놓고 있다.

또 한때는 스페인어로 쓴 책에 빠져서 스페인어 공부를 시도한 적이 있다. 작가의 숨소리까지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역본에서 내가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아쉬웠다.

그 모든 행위들이 효율성 측면에서 보자면 상당히 '쓸데없는 짓'일 수 있다.

대체 왜 그런 짓들을 했을까. 정답은 역시나 '자기 앞의 생'에 있다. 결국 그건 '사랑' 때문이었다. 그 책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한 분야에 깊이 심취한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와 함께하고, 집중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그 설렘의 감정이 퍽퍽한 일상을 살아내는데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를….

최근 대구 북구 쪽에 일이 있어 갔다가 우연히 한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는 주변 상가 건물들 사이에 수줍게 서 있었다. 입구에서 받은 첫인상은 여느 카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층고가 높고 깔끔한 카페구나'… 그 정도 생각만 했다.

그런데 카페 안쪽으로 들어가자 범상치 않은 느낌이 전해졌다. 벽에 걸린 액자 안에 야구선수들의 사인 유니폼이 들어 있었다. 옆으로는 작은 '야구 박물관'이 마련돼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인볼이 한꺼번에 모여있는 광경을 '일상에서 우연히'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인볼 보관용 케이스를 어디서 살 수 있는지 검색해보고, 직접 사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나하나 사인볼을 모으고 보관하는 게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선수나 감독들의 사인이 적힌 야구 배트와 각종 야구 물품, 특히 삼성 라이온즈 관련 '굿즈'들이 함께 전시돼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야구팬들은 가슴이 뛸 것이다.

카페에서 강한 '덕후'의 향기가 전해졌다. 혹시 야구선수 본인이나 그 가족이 이 카페를 운영하는 걸까. 커피를 다 마신 뒤 조용히 카페 카운터에 가서 물었다. "왜 이렇게 가게에 야구 관련 물건들이 많나요?" 여자 사장님이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제가 야구를 좀 좋아해서요."

순간 한 노래의 가사가 뇌리를 스쳤다. "처음이라기엔 너무 길을 이미 다 아는 듯이, 우연이라기엔 모두 다 정해진 듯이…"(헤이즈 '헤픈 우연' 중) 장르는 다르지만, 덕후와 덕후는 이렇게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걸까.

2024년 새해가 시작됐다. 아직은 추운 '겨울'이지만, 곧 설레는 계절 '봄'이 찾아올 것이다.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설레는 표정을 포착해봤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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