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가 자신의 집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 그림인 단원도(壇園圖). 1781년 뜻이 맞는 강희언, 정란과 함께 가진 즐거운 자리를 추억하며 김홍도가 1784년에 그린 작품이다.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제공〉 |
너무나 유명한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 풍속화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인물화,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독자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다.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영조와 정조 등의 초상화를 그린 어진화가로도 활약했다. 그런 그가 여러 악기에도 뛰어난 인물임은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시서(詩書)에도 능했던 그는 풍류인이었다. 퉁소, 생황, 비파 등 악기도 잘 다뤘는데, 거문고 타는 것도 매우 즐겼다.
강세황은 자신의 시문집인 '표암유고(豹菴遺稿)' 중 '단원기'에서 김홍도의 그림 실력에 대해 '못 그리는 것이 없다. 인물, 산수, 신선, 부처, 꽃과 과일, 동물과 벌레, 물고기와 게 등이 모두 묘한 경지에 이르러, 옛날의 대가들과 비교해도 그에 필적할 만한 자가 없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풍모와 풍류에 대해서는 '김홍도의 품격은 얼굴이 맑고 정신이 깨끗하여, 고상하며 세속을 초월한 듯 평범하지 않다. 성품 또한 거문고와 피리의 맑은 소리를 좋아했고, 꽃 피고 달 밝은 밤이면 가끔 두어 곡 연주하기를 즐겼다. 그의 연주 솜씨는 옛 사람에 못지않고,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아 진이나 송나라의 고매한 인물에서 그와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김홍도가 거문고를 정말 좋아하고 그 연주를 즐겼음을 알 수 있는 대표적 그림이 있다.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檀園圖)인데, 그가 직접 거문고를 연주하며 풍류를 즐기는 그림이다. 김홍도의 아호는 여럿이지만, 그 중에 제일 많이 쓴 게 단원(檀園)이다.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화士), 첩취옹(輒醉翁) 등을 사용했다. 그중에 단원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의 아호이다. 그런데 이 아호는 단순히 이름의 별칭인 아호로서만 기능했던 건 아니었다. 그가 살았던 초당의 이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781년 4월 김홍도 살던 초당 '단원'서
선배 화가 강희언-여행가 정란과 풍류
강희언 세상 뜬 후 재회 추억을 화폭에
그림 상단엔 사연·소회 등 담아낸 화제
당시 정란이 읊은 詩 두 편도 적어 넣어
김홍도 거문고 사랑 짐작되는 대표작품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
◆김홍도 그림 '단원도'
단원도(檀園圖)는 1781년 4월 뜻이 맞는 세 사람이 김홍도의 집 단원에서 가진 모임을 추억하며 1784년에 그린 작품이다. 그린 이는 김홍도. 모임 구성원은 김홍도, 강희언, 정란이다. 세 사람은 당시 단원에서 오래 기억에 남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784년 12월, 뜻밖에 정란이 영남 지방 안기역 찰방(察訪)으로 있는 김홍도를 유랑 중에 찾아왔다. 객지에서 벼슬을 하는 김홍도에게 정란의 방문은 가뭄에 단비 같이 반가운 일이었다. 당시 강희언은 저 세상의 사람이 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그 옛날의 일을 회상하며 닷새 동안 술로 회포를 푼 후, 김홍도가 예전 자신의 집에서 모였던 일을 떠올려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 소회를 화제로 남겼다. 세 사람이 단원에서 가졌던 즐거운 시간을 회상하고,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과 소회 등을 담았다. 정란이 그날 지은 시도 함께 적어 넣었다.
김홍도가 단원도 상단에 남긴 글인 화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해(滄海:정란) 선생께서 북으로 백두산에 올라 변경까지 다다랐다가 동편 금강산으로부터 누추한 단원(김홍도의 집)으로 나를 찾아주셨다. 때는 신축년(1781) 청화절(4월1일)이었다. 들의 나무에는 햇볕이 따스하고, 바야흐로 만물이 화창한 봄날이었다. 나는 거문고를 타고, 담졸(澹拙) 강희언은 술잔을 권하고, 선생께서는 모임의 어른이 되셨다. 이렇게 참되고 질박한 술자리를 가졌다. 어언 간에 해가 다섯 차례나 바뀌어 강희언은 지금 세상에 없는 옛사람이 되고, 가을 측백나무에는 이미 열매가 열렸다. 나는 궁색하여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산남에 머물며 역마를 맡은 관청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해가 한 차례 돌아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홀연히 선생을 만나게 되니 수염, 눈썹, 머리칼 사이에는 구름 같은 흰 기운이 모였으되, 그 기력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올봄에는 제주도의 한라산을 향하리라 하니 참으로 장하신 일이다. 다섯 밤낮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원 없이 이야기하기를 단원에서 예전에 놀던 것처럼 하였더니 슬픈 느낌이 그 뒤를 따르는지라, 끝으로 단원도 한 폭을 그려 선생에게 드린다. 그림은 그 당시의 광경이고, 윗면의 시 두 편은 이날 선생께서 읊으신 것이다. 갑진년(1784) 12월 단원 주인 김사능이 그린다.'
화제 앞에 쓴 정란의 시 두 편은 이런 내용이다. '금성 동편에 지친 노새 쉬게 하고(錦城東畔歇蹇驢)/ 석자 거문고로 처음 만남 노래했네(三尺玄琴識面初)/ 잔설 남은 따사로운 봄날 한 곡 뜯으니(白雪陽春彈一曲)/ 푸른 하늘 아득해 하늘과 바다 텅 빈듯하네(碧天寥廓海天虛)' '단원 거사는 풍채가 좋고 자세가 바르며(檀園居士好風儀)/ 담졸 그 사람은 장대하고 기이했네(澹拙其人偉且奇)/ 누가 흰 머리 늙은 나그네를 영남 땅으로 이끌어(誰敎白首山南客)/ 술잔 부딪히고 거문고 타 미치게 만들었나(拍酒衝琴作許癡)'.
그림을 보면 김홍도의 집이 자리 잡은 터는 계곡의 거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산자락인 듯하다. 초옥(草屋)은 그 전체적인 규모를 다 드러내진 않았고, 세 사람의 주인공과 시중을 드는 시자가 있는 마루가 화면의 중심이다. 그 안쪽으로 단원의 방이 연결되어 있고, 그 방 벽에는 당비파로 보이는 악기가 걸려 있다. 방 한쪽에는 서책이 쌓여있고, 화병에는 꽃 대신 공작의 깃털이 조화처럼 꽂혀 있다. 연이 자라는 연못이 있는 마당에는 오동나무, 소나무, 대나무, 파초 등이 심겨져 있다. 또 풍란이 깃든 괴석도 자리하고 있고, 마당 귀퉁이에는 돌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평상이 나무 아래 놓여있다. 고고한 자태의 학 한 마리가 앞마당이 제집인 양 노닐고 있고, 담장 앞에는 큰 수양버들이 수많은 연둣빛 줄기를 운치 있게 드리우고 있다. 사립문 밖에는 말과 함께 마부 한 명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쉬고 있다. 정란이 타고 온 말일 것이다. 늦은 봄날, 마당의 학이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는 가운데, 마루에 앉아 풍류를 즐기고 있는 주인공 세 사람을 보자. 거문고 타는 이는 단원 김홍도이고, 기둥에 기대고 앉아 부채를 살살 부치고 있는 이가 담졸 강희언이다. 그 옆에 정란이 거문고 가락을 감상하며 시를 구상하고 있는 듯하다.
'인왕산도' '석공도' 등을 남긴 화가 강희언은 대선배 화가인 겸재 정선과 이웃하여 지내면서 그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7세 아래인 김홍도와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정란은 당대 최고의 여행가였다. 그는 서른 살부터 조선 팔도를 구석구석 탐방했는데, 김홍도와 각별한 인연을 나누었던 모양이다. 화제에서도 밝혔듯이 김홍도의 '단원도'는 정란을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봉규〈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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