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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도쿄의 야경. 시내는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이었다.<아사히신문 제공> |
일본 정부 승인 앞둔 막바지 단계
우시바 외무심의관·아주국장 접대
복요리 전문점 '후구겐 식당' 방문
당대 일류 복어요리사 가와시마씨
예약보다 늦은 인사들에게 '버럭'
본인 직업에 대한 자부심 투철해
최상급 재료·칼솜씨로 감동 전달
식당 고른 이병철 회장 안목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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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날개 복어요리. 후구겐의 요리는 맛도 맛이려니와 눈에 호소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일식텐카 제공> |
미쓰이물산과의 충주비료 건설자금 차관 교섭은 매듭지어졌다. 이제 일본 정부의 승인을 얻는 일이 남아 있었다. 차관의 제공자는 미쓰이물산이지만, 미쓰이물산은 차관 제공액의 80%를 일본 수출입은행의 융자로 조달하기로 돼 있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의 승인이 필요했다.
1964년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교섭의 최종 단계에 있었다. 이른바 한일협정으로 한국이 일본 측으로부터 과거의 36년간 지배에 따른 보상을 받는 회의였다. 훗날 두고두고 지탄을 받는 한일협정은 이 무렵 막바지 단계에 있었다. 이병철 또한 한일회담의 귀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일 양국은 정식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4천만불이라는 초대형 차관을 얻어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당시 일본도 달러 보유고가 불과 10억불 정도였다. 액수가 크다 보니 일본 정부로부터 차관을 얻으려면 외무성, 대장성(경제기획원), 통산성 등 세 부처 간의 협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중에서도 열쇠는 외무성이 쥐고 있었다. 외무성의 실세인 우시바 노부히코(牛場信彦) 외무 심의관, 니시야마(西山昭)씨가 아주(亞洲) 국장이었다.
어느 날 세 사람은 같이 골프를 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의 재계 인사들과 만남이 잦다 보니 식사 접대가 많았고 당대의 명망 있는 식당을 찾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중 한 곳이 복어요리로 유명한 후구겐이라는 식당이었다. 저녁 식사는 복어요리로 유명한 '후구겐(鰒源)'으로 정했다.
도쿄 스키치(築地)에 있는 '후구겐' 현관에 도착했다. 예약은 한국은행 도쿄지점장인 김봉인씨가 했다. 스키치라면 우리나라의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근처에 어시장이 있는 곳이다. 근처에 수산시장이 있어 재료의 공급이 빠르므로 생선은 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스키치 근처에는 요정이나 유명한 음식점이 많다. 다소 골프시간이 길어져 예약시간보다 한 시간은 늦은 오후 8시에야 겨우 도착했다.
◆후구겐 식당의 주인
일행이 후구겐의 입구에 들어섰는데 '후구겐' 주인이 버럭 화를 냈다. "왜 이제 오십니까. 예약 시간에 맞추어 복요리를 만들어뒀는데 한 시간이나 늦게 와서 맛을 버렸습니다." 후구겐 주인이 한마디 내지르곤 인상을 구겼다. 네 사람은 그만 머쓱해졌다. 식당 주인한테 한국과 일본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야단맞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네 사람 모두 태어나서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일행은 멋쩍게 예약된 방으로 들어섰다. 곧 주인이 들어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제가 복요리집을 하는 것은 돈을 벌자는 것 외에 최고의 맛을 손님들에게 제공하자는 데 있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제 맛이 안나는 것이 억울합니다. 저는 규슈 출신으로 일본 제일의 복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복요리를 맛있게 드시려면 시간이 맞아야 합니다. 네 분이 보통 손님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직업에 투철한 요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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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구겐의 주인이자 창업주이며, 당시 복요리를 이병철에게 제공했던 사람의 이름은 가와시마 겐조(川島源藏 1892-1967)라 한다. 그는 규슈의 후쿠오카 근처에 있는 후쿠시마쵸(福島町, 현재의 八女市) 출신이다.
'1인당 3만엔(현재가격)'. 그가 비싼 가격을 주장하고 있는 이면에는 그의 요리에 대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요리는 맛도 맛이려니와 눈에 호소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백자 위에 놓인 반투명의 복어회는 국화, 날고 있는 학 등이었다.
요리에 대한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개업 기간 동안에는 늘 조리실에서 생선 요리를 직접 만들었고, 탕을 만들 때에는 불의 세기, 국물의 맛, 물의 양 등을 정밀하게 체크했다. 술은 항상 술병의 목까지 가득 차게 넣었다. 그 결과 가와시마의 복어 요릿집은 정말로 양심적이라는 평을 듣게 됐다. 분위기에 대한 배려도 남달랐다. 언젠가 고위 공무원 한 사람이 지방에서 올라온 손님들을 모시고 그의 집을 찾았다. 손님들은 요리에 감탄해 술을 정도 이상으로 마셨다.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큰 소리로 떠들면서 노래했다. 그날 가와시마씨는 손님을 모시고 온 고위 공무원에게 앞으로 6개월간 자기 집에 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가와시마씨는 이처럼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투철했다. 그런 만큼 그가 만든 요리 또한 당대 최고였다.
◆가와시마 복요리의 특징
그가 내놓는 복어 생선회의 특징은 이렇다. 생선회의 단면은 홍색으로 빛나야 하며, 생선살에 탄력이 있어야 하고, 얇은 단면은 아름다운 무지개 색깔로 빛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선회칼이 예리해서 같은 속도로 단숨에 생선을 잘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생선살의 색깔이 균일하지 않다. 새의 고기를 열듯이 복어회를 단숨에 두껍게 잘라낸 후 다시 그 살 속에 부엌칼을 넣어 양분한다. 종잇장처럼 얇은 복어회를 다시 양분할 정도이니 그 기술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손님의 혀는 날카롭기 때문에 주방장이 어떠한 칼놀림으로 생선회를 도려냈는가를 안다고 한다. 따라서 손님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칼솜씨가 무뎌서는 좋은 생선회를 만들 수 없다. 재료 역시 품질이 뛰어나야 한다. 복어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정확하게 50㎝ 전후의 것만 쓴다. 그것이 최상품이기 때문이다. 또 그 재료를 규슈나 시모노세키로부터 운반할 때도 특별한 포장을 하고 있다. 복어의 포장은 이중상자 속에 담겨 있다. 생선 그 자체를 얼음에 재워서 올라오면 가죽이 수축됐다가 다시 녹여서 조리하므로 생선의 맛이 떨어진다. 따라서 후구겐에서는 복어를 나무상자로 일단 포장한 후 그 위에 얼음을 채우고 다시 포장을 한 번 더한다. 생선의 선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얼음은 닿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후구겐의 노하우다.
반년간 휴업, 같은 구입처, 이중상자로 된 생선의 수송, 배가 흰색인 호랑이 복어만을 쓰는 등 후구겐의 노하우는 만만치 않다. 그 집에서 파는 술은 후쿠오카에서 생산되는 '흰색꽃'이라는 것이다. 흰색꽃은 후쿠오카에서 생산되는 명주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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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 작가 |
일행은 식사를 마쳤다. 대단한 요리 솜씨였다. 모두 가와시마 주방장의 복요리 솜씨에 감탄했다. 골프 접대에 이어 뛰어난 요리 식당에서의 식사는 일행에게 감동을 주었다. 일본인 모두가 자기 직업에 관해서는 프로였다. 이렇게 자기 직업에 투철한 직업정신이 있는 일본은 앞으로도 계속 번영할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날 복요리 식당 후구겐의 접대 이후 충주비료의 대한 차관은 잘 풀렸다. 비즈니스의 세계는 어렵다. 논리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도 있고, 정으로 풀어야 할 문제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다. 제대로 된 식당을 고른 이병철의 안목에 일본 측도 그 성의를 인정했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도쿄 시내는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이었다. 바쁜 하루였고, 힘든 하루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당연했다. 대한민국과 삼성그룹의 발전에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1960년대 한국의 기업인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뛰었다. 그게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들었다.
이병철은 모두를 배웅하고, 차에 올랐다. 도쿄는 고독했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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