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의성 안계미술관 1층 전시 공간. 목욕탕이었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탈바꿈해 전시를 열고 있다. 조현희기자

대구 중구 문화동에 2017년 문을 연 '문화장'. 옛 청수장 여관 건물이다. 조현희기자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면 대중목욕탕만한 것이 없다. 일요일 오전이면 어김없이 엄마 손을 잡고 나들이 가듯 찾은 목욕탕은 동네 사랑방이었다. 그곳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과 서로 등을 밀어주기도 했다. 늘 가던 목욕탕이 질릴 때쯤이면 기분 전환 겸 옆동네 목욕탕에 방문할 때도 있었다.
그 많던 대중목욕탕은 다 어디갔을까. 세상에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다면 영원한 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목욕탕 자체를 보기 힘들다. 건물이 남아 있어도 방치된 경우가 많다. 생활양식의 변화로 목욕탕을 찾는 발걸음이 줄면서 쇠퇴기를 맞았다. 팬데믹 때는 직격탄을 맞아 줄줄이 폐업했다. 이제 으리으리한 고급 스파, 찜질방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곳들도 용도상으로는 목욕탕이긴 한데 잘 모르겠다. 추억이 깃든 대중목욕탕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렇게 설 곳을 잃어가던 대중목욕탕이 문화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대구 중구 문화동에 위치한 '문화장'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디자이너, 무용학과 교수, 건축가, 바리스타 등 6명의 청년들이 모여 2017년 문을 연 공간이다. 옛 노보텔 건물 뒤편에서 40여년간 운영된 청수장 여관을 리모델링해 카페 겸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여관에 있던 목욕탕의 모습은 살렸다. 이에 걸맞게 슬로건도 '커피와 예술로 나 목욕합니다'이다. 뮤지컬 '라이온킹' 오리지널팀이 대구 순회공연을 할 때 자주 찾아와 사진 촬영을 하기도 했단다.
이같은 사례가 입소문을 타면서 대구경북 곳곳의 대중목욕탕들이 문화공간으로 변신을 이어가고 있다. 한때는 일상이었고, 또 한때는 애물단지였던 목욕탕이 이제는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특별한 공간이 되고 있다. 14면에서 계속
카페부터 미술관까지…문화공간 된 대중목욕탕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바노 카페'. 2층 카페 공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2층 여탕, 3층 남탕'의 문구가 새겨진 거울이 있다. 조현희기자

'바노 카페' 내부. 곳곳에 목욕탕과 관련된 소품들이 비치돼 있다. 조현희기자
무엇이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이게 뭐 특별한가 싶지만, 목욕탕은 조금 다르다. 목욕탕이 아닌데 분명 목욕탕이다. 문화공간으로 바뀐 목욕탕들은 기존 목욕탕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한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오래 전 기억이 되살아난다.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바노 카페'는 40여년간 영업한 목욕탕 '명성사우나'를 2023년 카페로 바꾼 경우다. 건물 외관에 '명성사우나' 간판을 살려뒀다. '바노'는 스페인어로 목욕탕이란 뜻이다. 1층에서 주문을 한 뒤 2층으로 올라가 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2층 여탕, 3층 남탕'의 문구가 새겨진 거울이 있다. 카페 공간으로 활용되는 2층은 원래 명성사우나의 여탕이었다. 여탕 표지판이 붙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목욕탕인지 카페인지 헷갈릴 공간이 펼쳐진다. 찜질방부터 건식사우나, 습식사우나, 세신실, 샤워기까지 유지했다. 곳곳에 목욕탕과 관련된 소품들도 비치돼 있다.

경북 경주 감포읍에 위치한 카페 '1925감포'. 1925년에 지어진 목욕탕을 개조했다. <1925감포 SNS>
경북 경주 감포읍에는 1925년에 지어진 100년 된 목욕탕이 있다. 감포읍에 있는 '1925감포'다. 목욕탕이 탄생한 1925년과 지역명을 따서 명명했다. '신천탕'으로 운영됐지만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은 뒤 30년간 방치됐다. 이런 공간을 카페로 개조한 곳이다. 1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이 든다.

경북 의성 안계미술관 입구. 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목욕합니다' 팻말이 떠오르는 '예술합니다' 팻말이 있다. 조현희기자

경북 의성 안계미술관 내 전시 굿즈 판매대. 원래 목욕탕 매표소 자리였다. 조현희기자
이런 목욕탕은 또 어떤가. 경북 의성 안계면에는 미술관으로 바뀐 목욕탕이 있다. 인구 5만도 안 되는 군 지역에 이런 이색적인 미술관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안계청년예술거리에 위치한 '안계미술관'(관장 김현주)이다. 약 40년간 운영되다 2019년 폐업 후 방치되던 '안성목욕탕' 건물을 2021년 김현주 안계미술관장이 청년시범 마을 일자리 사업을 통해 임대해 미술관으로 조성했다. 1층은 전시공간, 2층은 사무실 겸 작업실로 운영된다. 3층 옥상은 향후 야외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지난해 건물 외벽을 공사해 밖에서 보면 이곳이 목욕탕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지만 안에 들어서면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예술합니다'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기존 목욕탕에 있던 '목욕합니다' 표지판을 재활용한 것이다. 입구 옆 매표소 자리엔 전시 굿즈를 진열해둔 작은 판매대가 있다. 전시 공간 한가운데엔 온탕 욕조가 남아 있고 전시대처럼 활용된다. 타일도 그대로라 전시 작품뿐만 아니라 공간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개관 이후 지금까지 약 40회의 전시를 진행했고, 현재는 장민숙 개인전 '집으로, 그림'이 다음 달 5일까다.
공간의 재활용…철거 대신 재활용해 도시재생

경북 경주 감포읍에 위치한 카페 '1925감포' 외관. <1925감포 SNS>
목욕탕의 변신은 주민들에게는 추억을, 관광객들에게는 새로운 콘텐츠를 선사하는 도시재생 사례다. 주민들은 가게에 방문해 목욕탕과 얽힌 일화들을 쏟아낸다. 경주 '1925감포'는 문을 연 이후 입소문을 타고 여행객들이 모이며 동네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특히 이효리가 다녀간 카페로 유명세를 타면서 보통 불국사나 첨성대 등 유적지 중심으로 이뤄지던 경주여행에서 감포읍 일대가 새 여행 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노후 건물을 재활용하는 '목욕탕 리노베이션'은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환영받는다. 목욕탕 건물은 그 건물의 용도에 맞는 특성이 뚜렷하다. 배관 설비, 콘크리트로 만든 단차가 있는 욕조, 굴뚝 등 일반 상가 건물과는 구조가 다르다. 다른 용도로 전환하기 쉽지 않아 철거가 어려울뿐더러 비용도 많이 든다. 대신 이를 살리는 리노베이션을 하면 기존 건물을 헐지 않아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경제적 효과도 얻고 이색적인 분위기를 낼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목욕탕이었던 공간들이 이색 여행지로 인기를 끄니 실제 목욕탕이 아니었던 곳인데도 목욕탕 콘셉트의 인테리어를 하는 경우도 나온다. 지난 3월까지 서울아트책보고에서 열린 '공중 만화탕' 기획전시에 이어 경기상상캠퍼스에서도 오는 8월까지 같은 이름과 콘셉트의 전시를 연다. 어린 시절 기억이 깃든 목욕탕이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